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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산한 다음 오란은 평상시와 같이 일어나서 아침 준비는 했으나 들에는 나가지 않았다. 왕룽은 촌자서 점심때까지 나락을 베고 나서 두루마기를 입고 시장에 나가서 달걀 50개를 샀다. 그것은 금방 낳은 싱싱한 것은 아니지만 상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먹을 수 있는 것이었다. 한 개에 한푼씩 주었다. 그리고 달걀에 물을 들이기 위해 빨간 종이도 샀다. 종이와 함께 달걀을 삶으면 물이 드는 것이다. 또 과잣집에도 갔다. 누런 설탕을 한 근 남짓 샀다. 점원이 설탕을 지푸라기로 모양 있게 싸고는 그위에 붉은 종이 조각을 끼워 주면서 빙그레 웃었다. "부인이 해산하신 모양이군요!" "첫 아들이라서......" 왕룽은 자랑스럽게 말했다. "축하합니다." 그때 옷을 잘 입은 손님이 가게로 들어왔기 때문에 점원은 그 사람에게 눈을 팔면서 건성으로 말했다. 점원은 매일같이 이런 인사말을 하는 것이지만 왕룽은 자기에게만 이렇게 인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무척 흐뭇해 했다. 그래서 가게를 나오면서 머리를 숙여가며 인사를 했다. 먼지투성이의 햇볕이 따갑게 내리 쬐는 거리로 나서니 자기만큼 행복한 사람은 이 세상에 없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그는 처음에는 매우 기뻤으나 곧 불안한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것은 이 세상이 사는 데는 너무 운이 좋아도 좋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행복할 때는 더욱 조심해야 한다. 특히 가난한 사람에겐 행복을 방해하는 귀신이 많은 것이다. 그는 갑자기 발을 돌려 향을 파는 가게로 가서 향을 네 개 샀다. 그것은 식구 한 사람에게 하나 꼴인 셈이다. 그는 곧장 사당으로 가서 결혼하던 날 아내와 함께 향을 피우던 것처럼 그 잿더미 위에 향을 꽂아 놓고 그것이 다 타는 것을 지켜본 다음에야 집으로 돌아왔다. 그 작은 사당에 모신 두 지신은 위대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오란은 산후 조리도 않고 남편과 함께 들로 나가서 일을 하기 시작했다. 들에 있는 곡식을 다 거두어들인 그들은 타작을 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도리깨질을 하고 그 일이 끝나자 키에 넣어서 부치기 위하여 대나무로 얽은 큰 광주리에 담았다. 키질을 하는 바람에 껍질과 먼지가 구름같이 날리었다. 이 일이 끝나자 그들은 또 밭에 나가서 밭을 갈았다. 왕룽이 소를 몰면서 갈아 나가면 오란은 그 뒤를 따라 가면서 삽으로 커다란 흙덩이를 부스러뜨렸다. 그녀가 이렇게 온종일 일할 때는 아기를 헌 이불에 싸서 땅바닥에 눕혀 두었다. 아기가 울면 그녀는 잠시 일을 멈추고 아기 곁으로 가서 젖가슴을 헤치고 젖을 먹였다. 늦가을 햇볕이 젖을 먹이는 어머니의 얼굴에 내리 쬐었다. 그녀의 머리와 어린 아이의 머리에는 흙먼지가 잔뜩 묻어 있다. 그러나 흙빛처럼 검은 오란의 젖가슴에선 눈같이 흰 젖이 흘렀다. 아기가 한쪽 젖을 빨면 또 한쪽의 젖도 줄줄 흘러내렸다. 오란은 흐르는 젖을 그대로 두었다. 아무리 먹여도 또 몇 아이라도 먹일 수 있을 만큼 젖이 넉넉하다는 것을 잘 아는 오란은 그렇게 젖이 흘러내려도 아깝지 않은 것이다. 언제나 계속해서 젖이 흘러내렸다. 이따금 너무 흐르면 옷을 버릴까 봐 일부러 젖을 잡아 쥐고 쭉 짜 버린다. 그러면 젖이 땅으로 떨어지고 흙 속에 스며들어 푹신한 흙 위에 얼룩이 진다. 아기는 순하고 건강한 어머니가 주는 무진장한 생명수를 꼴깍꼴깍 잘도 삼킨다.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왔다. 그들은 월동 준비에 바빴다. 이 해는 전에 없는 풍년이어서 조그마한 세 방이 꽉 찼다. 천장엔 파와 마늘 단이 주렁주렁 매달렸고 갈대로 엮은 섬엔 나락, 밀 등을 가득 넣은 것이 가운뎃 방, 아버지방, 그들의 방 할 것 없이 가득 쌓여 있었다. 물론 이 곡식은 팔 것이고, 검소한 왕룽은 다른 마을 사람들처럼 노름을 하거나 헛된 음식에 낭비하는 법이 없이 곡식값이 낮은 추수 후에는 당분간 팔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삼촌은 곡식이 채 익기도 전에 팔곤 했다. 추수하는 일이나 타작하는 수고를 덜고 싶었고, 또 현금을 갖기 위해서 헐값이라도 밭에 둔 채로 팔아 버렸다. 그의 숙모는 뚱뚱하고 게으르고 어리석은 여자였다. 밤낮 맛있는 음식만 찾고 시장에서 새 신을 사고 싶다거나 무얼 하고 싶다고 안달복달이었다. 그러나 왕룽의 아내는 남편의 신이건 시아버지의 신이건, 또 아이의 신이건 모두 자기 손으로 집에서 만들었다. 만약 오란이 신을 사겠다고 하면 왕룽은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을 정도였다. 삼촌이 살고 있는 쓰러져 가는 묵은 집 천장엔 아무 것도 달아 맨 것이 없었다. 그러나 왕룽의 집 천장엔 돼지다리까지 매달려 있었다. 이웃 칭 서방집에서 먹이던 돼지가 병이 든 것 같아서 잡았을 때 사둔 것이었다. 살이 빠지기 전에 잡은 것이라 살점도 많았다. 오란은 그것을 소금에 절여 잘 말리기 위해 매달아 두었다. 그 밖에도 창자를 빼내고 소금을 넣어서 말린 닭도 털을 덜 뽑은 채로 두 마리나 매달려 있었다. 그러므로 겨울에 동북쪽 사막에서 찬바람이 살을 에일 듯이 불어와도 왕룽의 가족은 풍성한 가운데 단란하게 지냈다. 어린 아이도 무럭무럭 건강하게 잘 자랐다. 아이의 백일에는 많은 음식을 해서 아이의 명이 길도록 축복해 주었다. 왕룽은 흔히 잔치에 왔단 사람을 다시 청해 붉게 물들인 달걀을 열 개씩 나누어 주었다. 모두들 허우대 좋고 투실투실한 어머니처럼 둥근 얼굴에 튼튼하고 토실토실한 아들을 가진 왕룽을 부러워하는 것 같았다. 겨울이라 아이를 밖에 데리고 나갈 수는 없었다. 그들은 방안 양지쪽에 이불을 펴고 남쪽 창문을 열어 햇볕이 잘 들어오게 했다. 거센 북풍이 불었으나 북쪽의 흙담이 두터워 춥지 않았다. 뜰 앞에 있는 대추나무나 밭가에 있는 버드나무와 배나무의 잎은 남김없이 모두 바람에 떨어졌다. 다만 집 동편에 있는 성긴 대숲의 잎만이 달라붙어 있었다. 거센 바람에 줄기가 부러질 것 같아도 대잎만은 떨어지지 않았다. 이렇게 거센 바람이 계속해서 분다면 밭에 뿌린 밀의 싹이 나지 않을 건 뻔한 일이었으므로 왕룽은 걱정을 하면서 비가 내리기만 기다렸다. 어느 날 바람이 고요해지고 하늘이 흐려지더니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그들을 마음이 흐뭇해지면서 방안에 앉아 쏟아지는 빗줄기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빗물은 마을 앞에 있는 밭에 스며들었고, 처마에서도 마구 떨어졌다. 아이는 그 빗줄기가 이상한 듯이 빗줄기를 잡으려고 두 손을 밖으로 내밀고 웃었다. 어른들과 같이 웃었다. 늙은이도 손자 곁에 앉아 있다가 손자의 하는 양을 보고 좋아했다. "이렇게 영리한 놈은 없을 거야. 작은집 아이들은 걸음을 배울 때까진 아무 것도 알지 못했어." 축축한 밭에서 푸릇푸릇한 밀싹이 땅 위로 움터 올랐다. 이럴 때면 농군들은 서로 찾아다니며 놀았다. 하느님이 그들 대신 말라가는 곡식에 비를 내려 주기 때문에 그들은 뼈가 아프도록 물통을 짊어지고 밭으로 물을 나르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산을 쓰고 맨발로 좁은 밭둑길을 따라 이집저집 찾아다니면서 차를 마시기도 했다. 아낙네들은 바지런히 집에서 버선을 만들거나 옷도 꿰매고 설 준비를 했다. 그러나 왕룽과 오란은 그다지 나다니지 않았다. 이 마을엔 조그마한 집이 여섯 채나 있었으나 왕룽의 집처럼 풍성하지 않았다. 그래서 너무 친근해지면 돈을 빌려 달라고 할까봐 왕룽은 은근히 두려워했다. 설도 가까워 오니 음식도 장만해야 하고 새 옷도 지어야 하기 때문에 모두들 돈을 빌려 쓰고 싶어하는 것이다. 그래서 왕룽은 될 수 있으면 그들을 피하기로 하고 밖에 나가려 하지 않았다. 오란은 옷을 꿰매고 그는 대갈퀴를 내어다가 부러진 곳을 새로 갈거나 삼노끈으로 잡아 매기도 했다. 그가 이렇게 농구를 손질하면 아내는 그릇을 손질했다. 설사 옹기 그릇 같은 것이 금이 가도 다른 아낙네들처럼 내버리고 새 것을 사지 않고 진흙으로 그 틈을 메우고 숯불에 구워 새 것 같이 만들었다. 그들은 집안에만 눌러 앉아 두 사람만의 즐거움을 나누는 것으로 만족했다. 두 사람이 주고받는 이야기는 언제나 간단했다. '저 호박씨를 받아 두었는가?' 라든지, '보리짚은 팔기로 하고 콩대를 때지.' 따위의 사소한 이야기였다. 간혹 왕룽이 '이 국수는 맛있는데......' 하고 음식을 칭찬하면 오란은, '올해는 잘 익어서 그렇죠.' 하고 쑥스럽게 대답하곤 했다. 풍년이었끼 때문에 왕룽은 추수한 것을 팔아 그들이 쓰고도 남을 만한 상당한 은전을 가질 수 있었다. 그는 돈을 허리에 차고 다니는 것이 위험하고 아내 이외의 사람이 알게 되면 곤란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두 사람은 그 은전을 어디에 숨겨둘 것인가를 의논했다. 그 결과 오란의 생각에 따라 침대 뒤에 있는 벽에 구멍을 파고 은전을 집어넣은 다음 진흙으로 발라 버리기로 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감쪽같은 일이었다. 왕룽은 부자처럼 마음이 느긋했다. 다 쓸 수 없을 만큼 많은 돈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에 한 마을 사람들을 대해도 어쩐지 어깨가 으쓱해지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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