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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극대도] 1권 제3장 도적 떼가 되다 ① 다된 밥에 재 뿌린다는 속담이 이런 것인가? 공문(公文)이 올라간 시간보다 더 빨리 금부도사가 도착했다. 심학균의 계산대로라면 이틀 후나 와야 할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심학균은 추호도 의심을 하지 않았다. 다만 단상 아래 같 이 오체복지하고 있는 서문영호가 자꾸 옆구리를 찌르는 통에 마 지못해 고개를 들며 공손한 어조로 물었다. "금부도사님, 외람 되오나 금부령(禁府令)을 좀 보여 주실 수는 없는지요?" 금부령은 형부(刑部)인 금부의 명패로 금부도사가 늘 지니고 다녀 야 하는 것이다. 위엄이 가득한 금부도사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 말은 심현감이 본 도사를 믿지 못하겠다는 말로 들리는데, 맞 소?" 금부도사의 음색에는 불쾌감이 깃들여 있었다. 이런 질문이 심히 못마땅한 모양이었다. 심학균은 등줄기가 후줄근 젖는 것을 느끼며 황급히 머리를 조아 렸다. "소신이 어찌 감히! 하오나 관부의 관례가 그러하기에……." 맞는 말이다. 하나 금부도사의 가슴을 뜨끔하게 만드는 말이기도 했다. '짜식이 대충 넘어갈 일이지. 사람 골 아프게 만들고 있어.' 그렇다고 어정쩡한 모습을 보이면 더 의심을 사는 법이다. 그는 재빨리 눈알과 머리를 굴리다 회심의 미소를 띠며 크게 고개를 끄 덕였다. "좋소! 심현감의 정신… 높이 사지. 한데 말이오……." 금부도사는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옆의 노인은 누구요? 보아하니 장안현의 유지 같은데… 본 도사 의 말이 맞소, 심현감?" 순간 심학균의 가슴이 뜨끔했다. 관아에는 고을의 백성이라면 누구나 들어올 수 있다. 하지만 그것 은 공적인 일이어야 하며, 좀 전처럼 현감의 처소에서 일 대 일의 대담은 해서는 안된다. 이는 청렴(淸廉)한 관리라면 우선적으로 지켜야 하는 것이다. '젠장. 긁어 부스럼 만든다더니…….' 심학균은 더듬거리며 대꾸했다. "그, 그렇습니다." 이제 칼자루는 금부도사에게 넘어갔다. '저 늙은이가 옆구리를 찌르는 것을 보아… 흐흐, 분명 뭔가 있 어. 하긴, 털어 먼지 안 나는 놈이 있으려고.' 그는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최소한 심학균이 들을 수 있는 음성으 로 중얼거렸다. "조사를 해보면 알겠지만, 보나마나 필시 어떤 청탁 때문에 만난 것일 테고. 안타까운 일이야. 이번 일로 심현감에 대해 본 도사가 이미 폐하께 아뢰었거늘… 할 수 없지. 없던 일로 해야겠어." "안됩니다!" 심학균은 고함을 지르다시피 하며 무례하게도 머리를 번쩍 치켜들 었다. "뭐가 안된다는 것이오?" "그, 그건… 저……." 의뭉스런 금부도사의 말씀에 그는 일시간 말문이 막혔다. 이 일을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한단 말인가? 심학균이 말을 더듬고 이마에 진득한 땀을 흘리는 것을 본 금부도 사는 내심 흐뭇하게 웃으면서도 싸늘한 어조로 말했다. "두 사람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가는 심문을 해보면 알 터이고 ……." 심문이란다. 그는 두 사람을 아예 죄인으로 몰아붙이고 있었다. 새파랗게 질리는 심학균의 얼굴을 곁눈질로 살피던 금부도사는 짐 짓 품안에 손을 넣어 금부령을 꺼내는 시늉을 하면서 고개를 돌렸 다. 양옆으로 늘어서 있는 열 명의 금부병사 중에 이미 점찍어 놓은 한 병사의 얼굴에 시선이 멈추었다. 유달리 길어 보이는 턱에 주독으로 빨간 주먹코를 가진 병사는 눈 이 마주치는 순간, 인상을 팍! 구겨 보이고는 슬며시 외면하였고, 이런 행동은 금부도사에게 한층 더 기쁨을 선사하는 것이었다. 금부도사는 귀밑까지 찢어진 입을 나불거렸다. "어이, 서황(徐荒). 이리 오너라." '어이? 서황이라고?! 빌어먹을 자식… 나중에 보자!!' 속에서 주먹과 발이 올라왔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서황이 엉거 주춤 다가오는 꼴이 꼭 도살장에 끌려가는 황소 마냥 그 태도가 몹시 불량하기 그지없는지라 금부도사의 눈썹이 하늘 끝까지 솟구 쳤다. "이놈! 귀엽다고 오냐, 오냐 해주었더니, 어디다 눈알을 부라리느 냐? 에잇! 이놈을 내 당장에 물고를 내고 말리라!" 서황의 눈썹도 덩달아 솟구쳤다. "이 새끼……." 어쩌고 욕을 하려던 서황은 다음 말을 꿀꺽 삼켰다. 금부도사가 연신 한쪽 눈을 찡긋하는 것을 보자 정신이 번쩍 들었기 때문이 다. 하나 이미 입 밖으로 튀어나온 말을 도로 밀어 넣을 수는 없 지 않은가. ② 서황은 무릎을 꿇으며 머리를 조아렸다. "……가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금부도사님." 서황답지 않은 순발력과 재치였다. 진정으로 뉘우치는지 무릎 위에 놓인 두 주먹이 부르르 떨렸고, 음성도 가늘게 떨려 나왔다. 하지만 금부도사에게는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그것은 '넌, 이제 죽었다!'로. '아이고! 다른 놈을 부를걸. 괜히 장난을 친다고.' 내심 한숨을 내리쉬며 금부도사는 슬며시 서황의 두 손을 잡아 일 으키며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허허허, 됐다. 그만 일어나거라. 내 어찌 너를 박대할 수가 있겠 느냐? 사실은 농을 한 거다." 그러면서 금부도사는 연신 눈을 찡긋거렸지만 굳어진 서황의 표정 은 풀리지 않았을 뿐더러 그는 금부도사의 손을 힘주어 잡으며 끌 어당겼다. '윽!' 뼈가 으스러지는 통증에 내심 비명을 지르는 금부도사의 귓속으로 무서운 협박성 음성이 파고들었다. "너 이 새끼, 다 끝나고 보자." "금부령을 보자고 해서 잠시 주위를 다른 곳으로 돌리려고… 헤 헤, 어쩔 수 없는 일이잖습니까? 그건 부두령이 이해를……." "닥쳐! 그렇다면 다른 놈을 부를 것이지." "나도 지금 그것 때문에 후회하고 있습니다, 부두령." "시끄!" 한번 더 낮게 으르렁거린 서황은 금부도사의 손을 잡고 몸을 일으 키며 큰소리로 말했다. "이렇게 너그러이 용서해 주신다니. 소인, 감격할 따름입니다." '미치겠군. 젠장! 왜 날 남들처럼 흉악하게 낳지 않고 이렇게 잘 생긴 놈으로 낳아 가지고 골치 아프게 만들어.' 잘생긴 것도 탈인가? 그는 자신을 낳아준 부모를 원망하며 어색한 웃음만 흘렸다. "허허허……." 이때, "저, 금부도사님." 금부도사의 고개가 돌려졌다. 단상 바로 밑에까지 다가온 심학균을 보자, 그는 찬바람이 등줄기 를 훑고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하나 짐짓 미간을 찡그리며 불쾌 하다는 듯한 음색으로 물었다. "무슨 일이오? 오호라, 그러고 보니 금부령을 확인하려고 건방지 게 본 도사 앞까지 왔군, 그래. 좋아! 그렇다면 보여주지!" 그러면서 손을 품에 집어넣었고, 손이 나오기 전에 소매 속에 있 던 두 손이 무얼 움켜쥐는 듯했다. 심학균은 파리라도 쫓는 듯 손 을 내저으며 황급히 머리를 조아렸다. "아닙니다! 금부령을 보자는 것이 아니라, 소신이 긴히 드릴 말씀 이 있어서……." "그렇소?" 금부도사의 손이 빠져 나왔다. 당연히 빈손이었고. 그는 자세를 바로 하며 물었다. "그래, 할말이라는 게 뭐요?" 심학균은 머뭇거리다 서황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송구스럽지만 주위를 좀……." "으음." 분명 구린내가 나는 말일 테지만 반가운 현상이다. 그렇다고 반갑 게 맞이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짐짓 시큰둥한 표정을 짓던 금부 도사는 마지못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서황, 잠시 물러나 있게." 심학균 앞이다. 속은 뒤틀리지만 서황은 깊숙이 허리를 굽혔다. "분부대로 따르겠습니다." 서황이 뒷걸음으로 제자리로 돌아가자, 금부도사는 위엄 어린 음 성으로 말했다. "현감은 가까이 오시오." "예, 감사합니다." 일곱 개의 계단을 올라가는 짧은 시간에 심학균의 머리는 민활하 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가 본 금부도사는 정일품(正一品)이라는 높은 관직에 있는 사람 답지 않게 너그러웠다. 자신의 수하의 손을 잡고 손수 일으킬 정 도로 말이다. 하나 그것이 어쩌면 자신에게 보여주기 위한 거짓 행동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그는 가슴이 서늘해졌다. 그러는 사이 계단을 다 올라간 심학균은 평소대로 일단은 생각하 고 행동하기로 마음먹었다. ③ 심학균의 장황한 이야기가 끝났다. 자신의 목적과는 아무 상관없는 이야기를 정말 지겨운 표정으로 들은 금부도사는 심드렁하게 중얼거렸다. "뭐, 별거 아니구먼." 심학균의 눈이 반짝 빛났다. "그렇습니다. 대충 아들을 죽인 놈을 죽이고 싶다는 이런 이야기 지요, 예. 그것 때문에 서문대인과……." 말을 흐린 심학균의 허리가 더욱 깊숙이 숙여졌다. "아무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심려를 끼쳐드려 정말 죄송합니다, 금부도사님." "괜찮소. 그 일은 현감이… 오! 저기들 나오는군." 손을 휘휘 젓던 금부도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굴비처럼 줄 줄이 엮여 나오는 죄수들을 보는 그의 모습이 마치 죽은 조상님이 살아 돌아오는 듯 반기는 듯해 누구라도 이상한 느낌을 받을 만했 다. 하나 지금 큰짐을 덜은 심학균의 머리에 그런 생각이 들 리 만무하였다. '휴! 이렇게 수월하게 넘어갈 줄 알았으면, 괜히 졸았잖아.' 이래서 사람 마음이 간사하다는 걸까? 심학균이 안도의 한숨과 더 불어 가슴 졸였던 것을 원통해할 때였다. "탈옥이다!" "단호삼이 도망친다! 잡아라!" 감옥 쪽이다. 광장에 오체복지하고 있던 관병(官兵)들이 '뭐야?' '왜 이리 소란 스러워?' 하며 저마다 한마디씩 하는 가운데 한 사람이 광장으로 뛰어들었다. 그는 훌쩍한 키에 근육으로 똘똘 뭉친 단호삼이었다. '저놈이!' 심학균의 눈썹이 성큼 치솟으며 벼락같은 음성이 터져 나왔다. "놈을 잡아―!!" 삽시간에 포졸들에게 포위된 단호삼은 인질로 삼고 있는 포졸을 자신이 도는 방향으로 돌리며 소리쳤다. "가까이들 오면 죽이겠소!" 그러면서 팔에 힘을 주자 포졸은 캑캑거리며 곧 숨이 끊어질 듯 혀를 빼물었다. 동료를 죽인다는데 이를 무시하고 공을 세울 만큼 인간성을 상실 한 포졸은 없었다. 그들이 주춤하는 사이로 표인랑이 나타났다. "알았어. 알았으니까 진정하게." 이어 포졸들에게 함부로 나서지 말라고 눈짓을 보낸 그는 단호삼 에게 말했다. "여보게, 호삼. 심정은 이해하네만 이런다고 자네에게 이로울 것 은 없지 않은가? 이러지 말고 이(李)포졸을 풀어주고 우리 대화로 해결하세." 바라던 바다. "좋습니다! 하지만 포두님과 대화를 나누고 싶지는 않소." 고개를 끄덕인 단호삼은 단상을 턱짓으로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금부도사에게 할말이 있다고 전해 주시오. 만약 그렇게 못하겠다 면… 흥! 앞으로의 행동은 나 자신도 장담할 수가 없소이다." 표인랑의 몸이 움찔했다. 금부도사를 만나겠다는 말은 이미 예견했던 거라 그리 놀랄 만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단호삼의 표정과 말씨에는 섬뜩한 살기마저 담겨 있어 지금 저 모습이 과연 자신이 알던 단호삼인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사람이 환경에 따라 저렇게 변할 수도 있구나, 하며 표인랑이 입 을 열려 할 때였다. "그 자를 본 도사 앞으로 데려오라!" 하늘같이 높은 분의 말씀이다. 단호삼의 요구에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던 표인랑에게는 단비같이 반가운 음성이었다. 그는 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길을 터라!" 그 말이 떨어지자 포위망을 구축하고 있던 포졸들의 중앙이 쫘악 갈라졌다. 표인랑은 단호삼을 향해 흐릿하게 웃으며 말했다. "호삼, 가 보게." "고맙습니다." 고개를 슬쩍 숙여 보인 단호삼은 여전히 인질인 이포졸을 데리고 걸어가 계단 밑에서 걸음을 멈추고 호연히 금부도사를 응시하였 다. 남의 일이라 그런지 싱글거리며 웃고 있던 금부도사가 입을 열었 다. "그대는 탈옥이 얼마나 큰 죄인 줄 아는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 죄도 없는 사람을 가두는 법은 또 어디 있습니까?" "호, 아무 죄도 없이 갇혔다?" 금부도사의 머리가 옆으로 돌아갔다. "심현감, 저 자의 말이 맞소?" 가슴이 뜨끔한 심학균은 재빨리 허리를 꺾었다. "확실한 증인도 있는데… 그럴 리가 있습니까요." "하긴 죄 지은 놈치고 죄 있다고 하는 놈은 못 봤지." 고개를 주억거리며 낮게 읊조리던 금부도사의 눈이 동그래졌다. 재차 독심검 팽후의 전음이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마광수(馬光秀), 너 이 자식! 자꾸 쓸데없는 짓으로 시간 끌 거 야! 어서 시킨 대로 해!!) '씨이. 이때 아니면 내가 언제 관아에서 또 이런 대접받겠어? 젠 장할!' 내심 투덜거리는 바람에 심학균의 아부성 대답인 '옳으신 말씀입 니다요.'마저 놓쳐버린 금부도사, 즉 곡서성 산적 떼의 소두령인 마광수는 재밌는 짓거리를 끝내야만 했다. ④ 내공이 부족한 관계로 전음을 펼칠 수 없는 마광수는 주둥이를 불 쑥 내민 상태로 고개를 작게 끄덕여 보였다. (빨리 해!) 팽후로부터 또 한 번 독촉을 받은 마광수는 다급히 입을 열었다. "네 말이 무엇인지 알았으니, 이제 그만 인질을 풀어 주어라." 밑도끝도없는 말에 단호삼은 미간을 찌푸리며 물어볼 수밖에 없었 고. "인질을 풀어 주면 나도 풀어 준다는 겁니까?" 마광수는 손을 휘휘 저었다. "그게 아니라, 일단 본 도사와 함께 연경(蓮京)의 금부로 가서 진 실을 가리자는 말이다." 그 말은 곧 여기서 죽지 말고 연경에서 죽으라는 말이다. 단호삼 의 짙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건 안되오!" 절규하듯 고함을 지른 단호삼이 이포졸의 목에 감은 팔에 힘을 줄 때였다. (이봐, 호삼. 금부도사는 내 수하일세. 내가 이미 대충 자네 이야 기를 전했으니 아무 말 말고 그가 시키는 대로 대답이나 하게. 어 쨌든 자네나 나나 이곳을 빨리 벗어나는 것이 피차 좋지 않겠나?) 하룻동안 귀에 익은 음성이었다. 팽후의 전음을 들은 단호삼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당당하게 자신 의 무죄를 입증한 뒤에 형의 죽음을 파헤치려고 목숨을 걸고 탈옥 한 것이 바보 같은 짓으로 판명되는 순간이었다. 놀랍게도 산적들에게도 의리란 놈이 있었던 것이다. '이럴 수가…….' 전신의 힘이 모조리 빠져 나갔다. 이때, 단호삼의 팔이 느슨해진 틈을 타 이포졸이 재빨리 후다닥 튀어나오자, 차창―! "꼼짝 마라!" 무엇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지만 이 순간만을 기다린 포졸들은 장창(長槍)을 들이밀며 고함을 질렀다. 일개 관헌의 병졸치고는 눈부시게 빠른 대응이었다. '이런, 쩝!' 졸지에 장창 사이에 갇힌 단호삼은 입맛이 썼다. 잠깐의 방심이 화를 부른 것이다. 심학균의 눈이 반짝 빛났다. 금부도사 앞에 못 보일 것을 보였던 그의 숨통이 터졌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 죽이고 싶은 것을 간 신히 눌러 참으며 입을 열었다. "괘씸한… 묶어라!" "예." 우렁찬 대답에 이어 한 사람이 나섰다. 포두인 표인랑이었다. 그 는 허리춤에 꿰고 있던 포승(捕繩)으로 단호삼을 묶으며 몹시 미 안한 듯 귀엣말을 속삭였다. "호삼, 너무 걱정 말게. 자네의 결백을 믿는 사람이 많으니 잘될 걸세." 끝까지 자신을 믿어주는 그의 말에 단호삼은 마음이 찡한 것을 느 끼며 재빨리 물었다. "형의 유골은요?" "아! 유골." 표인랑은 머뭇거리다 한숨을 쉬었다. "다 타버리고 겨우 뼛골 몇 개만 남아서 강노인과 함께 묻었다고 하는데. 위치는 모르겠네." 표인랑의 말은 거짓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포졸들은 거짓 보고를 한 것이 틀림없다. 묻었다면 왜 그 위치를 상관인 표인랑에게 가 르쳐 주지 않았겠는가. 분명 귀찮아서 어디다 버렸으리라. 단호삼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형…….' 살아온 삶도 자신 때문에 비참했다. 그런데 죽음은 더욱 비참했 다. 단호삼은 고개를 들었다. 푸른 창공을 보기 위함이 아니다. 눈물 이 쏟아질 것만 같아서였다. 하나 눈물을 흘리기에는 그의 마음이 너무 삭막해져 있었고, 이는 형의 바람을 저버리는 배반 행위였 다. 부모가 죽은 뒤 형은 단호삼의 손을 꼭 잡고 이렇게 말했었다. "이제 이 넓은 세상에 우리 둘뿐이다. 우리가 살아 남으려면 우선 강해져야 한다. 몸도 마음도. 호삼아, 넌 착하다. 그 선한 마음을 이 형도 좋아한다. 그러나 이제는 바뀌어야 해. 너의 그 선한 마 음을 지키기 위해서도 힘을 길러야 한다, 호삼아." 단호삼은 두 주먹을 불끈 쥐며 이를 악물었다. '그래, 형. 이제 달라질 거야. 두고 봐!' 또 옆구리를 찌른다. 심학균의 머리가 신경질적으로 돌려졌다. 그러나 음성은 바로 앞 에서 걸어가는 금부도사의 귀에 들어갈세라 낮게 가려 나왔다. "이제 본관의 손을 떠난 일이오." 서문영호의 눈썹이 치솟았다. "약속과 틀리지 않소?" 이 판국에 약속이라니? 심학균은 내심 한심스러워하며 담담하게 대꾸했다. "정 뜻이 그렇다면 직접 말해 보시오. 그리고 그 약속 말인데… 돈은 돌려주면 될 것이 아니오." "으음! 출세에 눈이 어두워 감히 약속을 저버리다니. 노부가 가만 있지 않겠다!" 화가 났기 때문인지 서문영호의 음성이 좀 높았던 모양이었다. 앞서 가던 마광수의 고개가 돌려졌다. "무슨 얘기를 하는 중이오?" 심학균은 얼른 웃는 낯으로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금부도사님." "그렇소?" 미심쩍은 듯 고개를 갸웃거리던 마광수는 부드럽게 웃으며 심학균 을 치하했다. "아무튼 이번에 심현감의 공이 컸소. 하하, 내 연경에 도착하는 즉시 폐하께 상소를 올린 후 곧 부르리다." 귀가 번쩍 뜨이는 말이었다. "아이고! 이렇게 황송할 때가…….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소인 결 코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마광수의 손을 잡았다가 놓았고, 마광수는 손에 쥐 어지는 촉감에 하늘을 보고 크게 웃었다. 정말 기분 좋은 일이 아 닐 수 없었다. 지금 마음 같아서는 비적질을 때려치우고 계속 금 부도사로 남고 싶었다. '이 기회에 직업을 한 번 바꿔봐! 사기꾼으로…….' 어쩌면 될 것도 같았다. 하나 그것도 이곳을 벗어난 뒤에 결정할 일이었다. ⑤ 침상 밑에 숨겨 두었던 백혼검을 꺼내 왼손에 들고 있던 단호삼은 찬찬히 모옥 안을 살폈다. 그때의 악몽에 시달리지 않으려면 오직 일에 매달리는 것뿐이었 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어젯밤처럼 악몽을 꾸지 않을지도 모른다. 다시는 이 집에 못 올지도 모르니까. 기실 집이 문제가 아니라 형 이 없기에 그럴 것이다. 한데 왜 이리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가? 이 집에 정이 들어서? 실내의 먼지 한 홀이라도 눈에 새기듯 찬찬히 살핀 단호삼은 몸을 돌려 문을 밀었다. 삐이익―! 귀에 거슬리는 소리에 단호삼은 흠칫 놀라는 자신에게 쓴웃음을 보냈다. 장석이 녹슨 모양이었다. 십 년을 살면서 단 한 번도 귀 를 기울이지 않았던 소리가 오늘은 유난히 크게 들려왔다. 그때, "그게 자네가 말한 보검인가?" 눈부신 햇살을 머리에 인 한 사내가 다가왔다. 햇살 때문인지 무 척이나 괴상한 그림자를 가진 사내였다. 아니 그림자가 괴상한 것 이 아니라 사내의 행색이 괴상하다 함이 옳으리라. 왜냐면 사내는 목에 긴 칼을 차고 있었기에. "그렇소. 그런데……." 말을 흐린 단호삼은 턱짓으로 한참 비명이 들리는 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적당히 하지. 저러다 죽이겠소." 독심검 팽후는 하얀 이를 드러내며 씩 웃었다. "그럴까?" 이어 그는 고개를 돌리지도 앉은 채 소리쳤다. "부두령, 그만 때려! 그러다 애 하나 죽이겠다." 그의 말이 끝나는 순간 토닥거리는 소리와 '사람 살려.' 하는 소 리가 멈추었다. 잠시 후, 단호삼이 팽후의 목에 걸린 칼이며 철갑 을 자르려고 백혼검을 뽑아 들었을 때였다. 한 사내가 씩씩거리며 다가왔다. 볼이 잔뜩 부어 있는 그는 금부의 관인 차림을 한 부두 령 서황이었다. "두령님, 저 멍청이를 아예 죽여버립시다." "안된다. 생사(生死)를 같이한 형제를 죽이는 법은 없다, 부두 령." 서황은 거칠게 대답했다. "저 자식은 우리 형제가 아니라, 웬숩니다! 자식이 말야… 빼먹을 걸 빼먹고 와야지." 팽후의 눈썹이 꿈틀했다. 점잖게 타일렀음에도 불구하고 기어오르 니까 은근히 부화가 치밀어 올랐다. 기실 금부도사로 변장한 마광수가 급히 서두는 바람에 철수갑을 여는 열쇠를 받지 않고 그냥 온 것이다. 물론 일갑자의 내공만 있 다면 이까짓 철수갑이야 끙 하고 힘을 주면 끊어질 테지만 팽후에 게는 그런 내공이 없다. 하니 천상보검이나 보도의 힘을 빌릴 수 밖에 없었고. 그래서 팽후의 묵인과 수하들의 열화 같은 성원에 힘입어 인간 타작을 하던 중이었다. 서황이 타작을 하면서 지껄이는 말을 듣자하니 약간은 개인적인 감정도 있는 듯했다. "그만 하라 했잖아! 빨리 이곳을 벗어나야지 언제까지 뭉그적거리 고 있을 거야." 지당하신 말씀이다. 부어 있던 볼이 쏙 들어갔다. "그러지요, 뭐." 마치 선심을 서는 듯한 말투다. 팽후의 미간이 찌푸려졌다가 펴졌 다. '날 탈출시킨 공(功)도 있으니까 한 번 봐주자.' 팽후는 산적 두령답지 않게 마음이 넉넉한 사람이었다. 그는 이를 악물며 단호삼에게 말했다. "어서 시작하지." 단호삼은 고개를 끄덕여 대답을 대신한 후에 백혼검을 들었다. 백 혼검의 무게 때문에 힘을 줄 필요도 없었다. 그냥 자르고 싶은 목 표물 위에 툭 갖다대면 만사형통이었다. 팽후의 눈에 언뜻 감탄이 스쳤다. 설마 했던 것이 사실이었던 것이다. 오랜만에 자유를 찾은 손목을 돌리자 찌릿찌릿한 전류가 타고 흘렀다. 그는 손목을 주무르며 물 었다. "호! 정말 대단한 보검이군. 그래 그 보검이 사 아저씬가 하는 사 람이 주었다는 것인가?" 쇠를 무같이 자를 보검이 집에 있다는 말에 대해 단호삼에게서 대 충 들은 터였다. 단호삼은 팽후의 목에 걸린 칼의 자물통으로 백혼검을 가져가며 가볍게 대꾸했다. "그렇소." 칼이 떨어져 나가고, 발을 묶은 족쇄도 잘렸다. 완전한 자유를 찾은 것이다. 팽후는 몸을 한차례 움직여 보았다. 그 동안 꾸준히 운공을 하고 있었기에 손발이 저린 것만 빼고는 크게 불편한 곳은 없었다. 팽후는 만족했다. 그래서 단호삼을 향해 고개를 까딱였다. "고맙네." "별말씀을. 이제 다른 사람들도 해야지요." "그래야겠지." 이어 팽후는 몸을 빙글 돌렸다. 소리를 칠 필요도 없었다. 누가 지시한 것도 아닌데 그의 뒤에는 질서정연하게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팽후는 한걸음 뒤로 물러나며 말했다. "부두령부터 하게." ⑥ 제아무리 천하의 보검이라 하더라도 육십 명의 철수갑을 자르는 일은 결코 수월한 일이 아니다. 더욱이 손목이 다치지 않도록 조 심스럽게 해야 하니 더 말할 나위도 없지 않겠는가. 이 지루하고 조심스런 작업을 싫은 기색 하나 없이 단호삼은 해내 고 있었다. 그러다 시간이 흐르고 단아한 이마에 땀방울이 송글송 글 맺힐 무렵 그는 마침내 모두에게 자유로운 육체를 선사할 수가 있었다. 철컹! 하는 소리가 나도록 백혼검을 검집에 꽂은 단호삼은 고개를 돌렸다. "다 됐소. 그럼, 이만." "잠깐 기다리게." 고개를 까딱여 보이고 이내 발을 옮기는 단호삼을 다급히 불러 세 운 팽후는 걱정 어린 어투로 물었다. "자네 정말 거 뭐야, 서문 뭐라는 늙은이에게 갈 참인가?" "당연한 일 아니겠소." 너무나 쉬운 답변에 팽후는 기가 찼다. 이런 벌건 대낮에 연경으 로 후송되고 있을 죄수가 당당하게 걸어 장안현에 들어간다면? 결 과는 명약관화(明若觀火)한 일이 아니겠는가. 단천목의 죽음 뒤에 서문영호가 있어 복수를 할 수가 있다손 치더라도 단호삼 자신은 개미 떼같이 모여든 관군들에게 꼬치처럼 찔려 죽을 것이다. 그리고 추격전이 시작 될 것이다.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팽후가 입을 열려 할 때 단호삼이 먼저 말했다. "지금 가지 않고 밤에 갈 작정이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팽후는 흠칫 놀랐다. 단호삼 또한 그런 사실을 직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속마음을 들킨 팽후는 조금 쑥스러운 듯 눈을 끔뻑이며 물었다. "그런데 왜 벌써 가려 하나? 이곳에서 밤이 되기를 기다렸다가 가 지 않고서?" 그의 멍청한 질문에 잠시 물끄러미 쳐다보던 단호삼은 피식 웃으 며 대답했다. "훗, 진짜 금부도사가 언제 도착할지도 모르는 판국에 이곳에 죽 치고 있을 수는 없지 않소? 만약 지금 도착했다면 호송마차 바퀴 따라 우리를 추적하고 있을지도 모르고." "아!" 순간 팽후의 입이 쩍 벌어졌다. 단호삼은 자신의 생각보다 두 배 나 현명했던 것이다. '기어코 우리 패거리로 만들어야 해!' 단호삼을 향해 진득한 집념 어린 눈을 던진 그는 빙글 몸을 돌렸 다. "부두령." 바로 뒤에 있던 서황은 허리를 꺾었다. "예, 두령님." "수하들을 이끌고 곡서령으로 가게." 서황의 몸이 움찔했다. 비교적 단세포에 속한 그로서도 쉬이 납득 이 가지 않는 지시였다. "곡서령에 가라니요? 산채는 이미 폐허가 되지 않았습니까? 게다 가……." "알고 있네."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짐작한 팽후는 손을 저어 말을 막은 뒤 에 재빨리 말했다. "그래도 산채에는 무기가 있지 않나? 각자의 무기를 찾은 후에 대 기하게. 난……." 말을 흐린 팽후는 고개를 돌려 단호삼의 단아한 얼굴을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이 친구의 일을 끝내고 돌아가겠네." "그게 무슨 말이오? 설마 내 일에 끼여들겠다는 말이오?" 돌려진 단호삼의 미간이 찌푸려져 있었다. 팽후는 당연한 일에 뭘 그리 놀라냐는 듯 히죽 웃으며 대꾸했다. "사람을 도왔으면 끝까지 도와야 한다는 게 내 신조일세. 그렇지 않다면 처음부터 하지 말아야지, 안 그런가?" 이때 눈치 없게도 서황이 불쑥 나섰다. "두령님이 언제부터 그렇게 남을 도왔소?" '이 자식이 초치고 있어!' 팽후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그는 마음이 너 그러운 사람이었다. 필요할 때만. "하하! 이 사람, 비록 직업상 어쩔 수 없었지만… 나야 항상 인정 이 많은 사람이 아니던가? 부끄럽게 꼭 그 일을 내 입으로 말을 해야겠나?" 그러면서 그는 서황의 어깨를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그냥 옷에 먼 지가 묻은 것을 털어내듯이 말이다. 그러나 서황은 어깨가 끊어질 듯한 아픔에 비명을 지르려다 팽후 의 부릅뜬 눈과 마주치자 얼른 입속으로 집어넣었다. '윽! 빌어먹을, 죽으라고 내버려둘 걸 괜히 구해 줬어.' 마음에도 없는 말을 속으로 씨부렁거리며 서황은 몸을 돌렸다. 사실 전 두목인 황영은 수하 알기를 발톱에 낀 때처럼 알던 위인 으로 성질 또한 개차반이었다. 그 놈 손에 맞아 죽은 동료들이 몇 이던가? 그러기에 황영이 죽자 기다렸다는 듯이 항복을 했고, 팽 후에게 두령이 되어 달라고 부탁했던 것이다. "야! 곡서령으로 가자!" 팽후는 투덜거리면서도 자신의 명에 잘 따르는 서황의 등에 대고 말했다. "조심해서들 가. 나중에 보자구." 서황은 손을 들어 흔들어 보였다. "알았소. 두령님도 조심하시오." 그제야 단호삼이 말할 기회가 왔다. 그는 팽후를 똑바로 응시하며 낯빛을 굳혔다. "같이 가시오, 팽두령." 팽후는 못 들은 척하며 배를 슬슬 쓰다듬었다. "어… 이거, 몹시 시장한데그래." 이어 그는 단호삼의 등을 밀며 혼자말처럼 중얼거렸다. "자, 가세. 이곳에서 식사를 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자네 말처럼 놈들이 언제 들이닥칠지를 모르니……. 내가 토끼라도 잡아 구워 주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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