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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재선생실기(惟一齋先生實記)
이 책은 원주변씨 간재종택에 소장되었던 김언기(金彦機, 1520~1588)의 『유일재선생실기(惟一齋先生實記)』이다. 김언기의 저술들을 총1책으로 묶어 석인본으로 간행하였다.
『유일재선생실기』는 총2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권1에는 시(詩) 6제 7수, 부(賦) 1수, 서(書)로 권문해와 금윤선에게 보낸 편지 각각 1편, 지(識)로 「서안동복호소후(書安東復號疏後)」가 실려 있다. 이 중 김언기의 시는 7수이지만, 김언기의 시에 차운한 여러 사람들의 시를 빠짐없이 실어 놓았다. 권2는 부록으로 김언기에 대한 만사, 제문, 행장, 행장후서, 묘갈명, 유사, 유사후서, 문인록발, 동문통유문, 옥계서원봉안문, 용계서원보덕사상향축문, 문인회전문, 회전상향축문, 문견록, 문인록이 실려 있다. 이외에 추가로 김언기의 편지글 2편이 실려 있다.
유일재(惟一齋)는 김언기의 호이다. 김언기는 본관이 광산(光山)이고, 자는 중온(仲瑥)이다. 이황(李滉)의 문인으로, 도산(陶山) 근처에 살면서 서사(書舍)를 지어 ‘유일’이란 편액을 걸어 놓고 후진을 교육하였다. 문하에서 남치리(南致利), 정사성(鄭士城), 권위(權暐), 박의장(朴毅長), 신삼제(申三悌), 권태일(權泰一) 등 훌륭한 인물들이 배출되어 당시 안동의 학문 진흥의 창도자로 알려졌다. 이황이 죽은 뒤에는 여강(廬江)에 서원을 세우고, 백련사(白蓮寺)를 철거하여 유학을 숭상하고 불교를 배척하는 데 노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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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악선생유고(南嶽先生遺稿)
이 책은 의성김씨 청계종택에서 소장하던 필사본 『남악선생유고(南嶽先生遺稿)』이다.
『남악선생유고』에는 시(詩) 8수, 묘갈 1편, 비명(碑銘) 2편,「금곡서당창립문(金谷書堂創立文)」,「여강서원정문(廬江書院呈文)」이 실려 있다. 시 중 차운한 시는 반드시 원운(元韻)의 시를 붙여 놓았다. 여강서원(廬江書院)은 퇴계 이황을 기념하여 안동 여산(廬山)에 창립한 것으로 이 정문(呈文)에서 서원의 약사를 논술하고 퇴계의 덕망과 학식을 찬양하고 서원 건립의 경위와 서원에 부치는 기대를 말하고 있다.
김진(金璡)의 다섯째 아들인 김복일의 자가 계순(季純)이고, 남악(南嶽)이 그의 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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惟一齋先生實紀辨破錄
표제/저자사항惟 / 김언기
판사항木活字本
발행사항[刊寫地未詳] : [刊寫者未詳], ---------
형태사항TIFF27張: 四周雙邊 半郭 20.5 x 15.9 cm, 10行18字 註雙行, 內向2葉花紋魚尾; 32.1 x 21.5 cm
주기사항印記: 儒子眞寶, 世傳公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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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준번호/부호UCI G701:B-00047974979
분류기호한국십진분류표(박봉석편)-> 2511
주제명유일재선생실기변파록 유일재선생실기 유일재실기
유일재선생실기변파록(惟一齋先生實紀辨破錄) | 어문 | 공유 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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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嶽先生呈文辨誣錄
표제/저자사항南嶽先生呈文辨誣錄 / 金永愿(朝鮮) 著
김영원 김복일 김언기
판사항木活字本
발행사항[刊寫地未詳]: [刊寫者未詳], [刊寫年未詳]
형태사항1冊(32張): 四周單邊 半郭 24.5 x 16.6 cm, 有界, 10行20字, 內向2葉花紋魚尾; 32.7 x 22.4 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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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장정보
소장정보 표 - 체크박스, 편/권차, 편제, 저작자, 발행년, ISBN, 청구기호, 자료이용장소, 자료상태로 구성됨전체선택편/권차편제저작자발행년ISBN청구기호자료이용장소자료상태
| 南嶽先生呈文辨誣錄 | 金永愿(朝鮮) 著 | [刊寫年未詳] | 古3649-216 | 디지털도서관 디지털자료실 | 원문이용 |
KOL000057442
1. 개요
여강서원(廬江書院)의 사액(賜額)을 청하는 정문(呈文)을 누가 작성하였는가에 대하여 남악(南嶽) 김복일(金復一)의 후손과 최일재(惟一齋) 김언기(金彦璣)의 후손 사이에 있었던 논쟁을 변석(辨析)한 것으로 김언기의 12세손 김영원(金永愿)이 김복일의 12세손 김정식(金庭植)이 엮은 『유일재선생실기변파록(惟一齋先生實紀辨破錄)』의 체제에 따라 조목조목 자신의 문중의 입장을 밝힌 것이다.
2. 저자사항
본서는 김복일과 김언기의 후손 사이에 벌어진 논쟁을 다룬 것으로 여강서원 청액(請額) 정문을 작성한 인물로 각각 문중에서 주장하는 김복일과 김언기를 조사하였다.
김복일(金復一, 1541-1591)은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의성이고 자는 계순(季純), 호는 남악(南嶽)이다. 아버지는 생원 진(璡)이며, 병마절도사 성일(誠一)의 아우이다.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그는 1564년(명종 19)에 진사가 되고, 1570년(선조 3)에 식년문과에 예천 사람 김대명, 노전, 정윤우와 함께 급제하여 1575년 성균관 학유, 1579년에 박사, 전적을 거쳐 1580년에 형조 좌랑을 시작으로 호조 좌랑, 공조 좌랑을 지내고 1583년 호조 정랑에 올랐다. 그 뒤 전라도어사로 나가 탐학한 관리들을 숙청하였으며, 1587년 울산군수에 이어 창원부사가 되어 폐단이 심한 그곳을 잘 다스렸다. 이어 경주교수(慶州敎授)가 되어 학생들을 경학으로써 인도하여 도의를 크게 일으켰으며, 성균관의 사예ㆍ사성 및 풍기군수 등을 지냈다.
그는 풍기군수를 끝으로 벼슬생활을 그만두고 안동 용문면 죽림리에 가학루(駕鶴樓)라는 집을 짓고, 그 옆에 남악정을 세워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 노력하였다. 안동의 사빈서원(泗濱書院)에 제향되었다.
김언기(金彦璣, 1520-1588)는 조선 중기의 학자로 본관은 광산(光山)이고 자는 중온(仲昷). 호는 유일재(惟一齋)이다. 아버지는 성균진사 주(籌), 어머니는 순흥안씨(順興安氏) 처정(處貞)의 딸이다.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그는 1567년(명종 22) 생원시에 합격하였는데, 일찍이 구봉령(具鳳齡)과 함께 청량산(淸凉山)에 들어가 10년을 기약하고 글을 읽다가 연고가 있어 구봉령보다 1년 앞서 돌아왔다. 1561년부터 안동 와룡(臥龍) 가야동(佳野洞)에 서당을 짓고 수십 명의 문도들을 양성하였다. 이후에도 후진양성과 학구생활로 일생을 지냈다. 문하에서 남치리(南致利)ㆍ정사성(鄭士誠)ㆍ권위(權暐)ㆍ박의장(朴毅長)ㆍ신지제(申之悌)ㆍ권태일(權泰一) 등 훌륭한 인물들이 배출되어 당시 안동의 학문진흥의 창도자로 알려졌다. 이황이 죽은 뒤에는 여강서원(廬江書院)을 세우고, 백련사(白蓮寺)를 철거하여 유학을 숭상하고 불교를 배척하는 데 노력하였다.
저서로는 『유일재집』 1권이 있다. 안동의 용계서원(龍溪書院)에 제향되었다.
3. 구성 및 내용
『남악선생정문변무록』은 여강서원의 사액(賜額)을 청하는 정문(呈文)을 누가 작성했는가를 놓고 의성김씨 문중과 광산김씨 가야문중 사이에 벌어진 논쟁에 관한 것이다. 먼저 의성김씨 김복일의 12세손 김정식이 이 논쟁에 대하여 『유일재선생실기변파록(惟一齋先生實紀辨破錄)』을 지어 변석한 바 있다. 이에 김언기의 12세손 김영원이 『유일재선생실기변파록』에 변석한 조목에 따라 자신 집안의 입장을 밝힌 것이다.
본서의 논쟁은 김복일 후손은 『연방세고(聯芳世稿)』에 수록된 <여강서원 정문>과 『학사집(鶴沙集)』에 실린 남악 김복일의 행장(行狀)을 근거로 남악 김복일이 지은 것이라고 주장하고,
| 聯芳世稿 | 金克一, 金明一, 金復一, 金誠一, 金守一, 金璡 | 金龍普, 李象靖 |
김언기의 후손은 갈봉(葛峯) 김득연(金得硏)이 유일재(惟一齋) 김언기(金彦璣)의 문적(文蹟)을 수습하면서 자제(自製)라고 했다는 것과 눌은(訥隱) 이광정(李光庭)이 지은 <용산세고서(龍山世稿序)>와 <유일재김선생행장(惟一齋金先生行狀)>을 근거로 김언기가 작성하였다고 주장하였다.
| 金得硏 | 1555 | 1637 | 光山 | 汝精 | 葛峯 |
| 龍山世稿 | 金光源, 金得䃤, 金得硏, 金彥璣 | 金寅鐸, 金致昌, 柳長源, 李光庭 等 | 金範九, 金宅九, 李光庭 |
본서의 구성은 『유일재선생실기변파록』에서 변석한 조목과 의성김씨가 변석한 글을 먼저 수록하고, 그 다음 자신들의(광산김씨) 입장을 변석하는 글을 수록하는 방식을 취하였다.
먼저 <상부백권초간(上府伯權草澗)>에 대하여 의성김씨의 변파록 내용을 수록하고(뒤에 ‘辨破’라 주를 붙임), 이에 대한 자신들의 입장을 밝혔다(뒤에 ‘辨誣’라 주를 붙임). 그런 다음 변파록에서 여강서원 정문 가운데 “獲忝函丈久襲春風薰沐而親炙之”, “具告前府使”, “卽擧上舍秀才以幹其事”, “官又助之”, “上年秋七月始役今年夏五月功訖”, “伏惟閤下任一府之責崇敎化之本止申報監司” 등 6개 조목에 대한 의성김씨의 변석하는 글을 모두 싣고, 이에 대한 반론의 글을 수록하였다.
이렇게 의성김씨의 변석 글을 먼저 수록하고 이에 대해 광산김씨 문중에서 재반론하는 형식으로 변무의 글을 수록한 것이다. <속구(續具)>, <출지지(出地誌)>, <여사빈급답천전제일서(與泗濱及答川前第一書)> 등에 대해 변무하였고, <행장(行狀)>도 눌은 이광정이 지은 김언기의 행장을 수록하고 뒤이어 <행장후서(行狀後敍)> 즉 이광정이 지은 행장에 대한 후서를 수록하였다. 그리고 <답천전최후서(答川前最後書)>에서 “始覺此書爲洞主書簡而決非多士呈文”, “獨不可貽書於同門之城主以稟院中之大事乎”, “呈文末有拜書以稟之語乎呈文下有續具一項之例乎”, “呈文則必有多士題名而院藏此書無之呈文則必有城主題辭而院藏無之呈文則必有署押印迹而院藏無之”, “以穪引世德爲辨證此事之一大關樓捩”, “未知尊門世稿其可爲百世尊信之書而得不見疑於公議耶” 등에 대해 조목조목 변무하는 글을 편차하였다.
<발(跋)>에서도 역시 “載錄龍山世稿行于世有年矣”, “創設規撫皆其職任則必不推委於人”, “鶴沙先生依而書之”에 대한 의성김씨의 변석과 이에 대한 반론을 제기하였다. 그리고 말미에 김정식이 지은 『유일재선생실기변파록』의 발문을 수록하고 이어 김영원이 지은 발문이 있다.
4. 서지적 특성 및 자료의 가치
본서는 여강서원 정문을 누가 지었는가를 놓고 의성김씨 남악종중과 광산김씨 가야문중 사이에 벌어진 논쟁을 광산김씨 문중에서 엮은 것이다. 본서는 국립중앙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는 『유일재선생실기변파록』에 대한 변무록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같은 책이면서 서명만 다른 『남악선생정문변기록(南嶽先生呈文辨記錄)』이 안동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본서는 『유일재선생실기변파록』과 같이 영남지역 두 집안간의 논쟁을 엮은 것으로 두 집안의 문중사 연구에 소중한 자료라고 생각한다. 본서는 『연방세고(聯芳世稿)』, 『용산세고(龍山世稿)』, 『유일재선생실기(惟一齋先生實紀)』, 『남악선생일고(南嶽先生逸稿)』 등과 함께 다룬다면 영남지역 학파 및 학풍 연구에도 필요한 자료라고 생각한다. (이연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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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집(鶴沙集) 김응조(金應祖)생년1587년(선조 20)몰년1667년(현종 8)자효징(孝徵)호학사(鶴沙), 아헌(啞軒)본관풍산(豐山)특기사항유성룡(柳成龍), 장현광(張顯光), 정경세(鄭經世)의 문인
鶴沙先生文集卷之九 / 行狀 / 成均館司成南嶽金公行狀
| 金復一 | 1541 | 1591 | 義城 | 季純 | 南嶽 |
公諱復一。字季純。自號南嶽。新羅敬順王之子錫。封義城君。子孫仍居焉。遂爲義城金氏。有諱龍庇。高麗太子詹事。至今血食縣祠。高祖諱漢啓。副知承文院事。魯山禪。不復仕。曾祖諱萬謹。贈左通禮。祖諱禮範。贈左承旨。考諱璡。贈吏曹判書。妣贈貞夫人驪興閔氏。諱世卿之女。文度公霽之後。以嘉靖辛丑。生公于安東臨河縣之川前里第。甫六歲。母夫人卒。判書公憐其早失所恃。敎而不督。稍長。始發憤讀書。功力兼人。數年間。詞華蔚然。中甲子司馬。隆慶庚午文科。聲望藉甚。有媢嫉者擠之。分成均館。乙亥。補學諭。赴朝作詩曰。定省歸何晩。經綸計已乖。乃棄官歸。己卯。陞博士典籍。庚辰。遷刑曹佐郞。四月。判書公卒。服闋。荐拜工戶曹佐郞。移典籍。公以累次稽謝。於義不安。強疾就職。爲咸鏡都事。不赴。癸未。除戶曹正郞。吏懾而職擧。秋。拜京畿道災傷敬差官。又除全羅道御史。直聲著聞。汚吏有望風解印去者。甲申。由刑曹。出爲江原道都事。監司鄭公崑壽深加敬重。每有大事。必咨決焉。丁亥。除蔚山郡守。治爲一道最。繡衣馳啓。命陞秩爲昌原府使。府近節鎭。弊端滋蔓。公至。守正不撓。凡有民瘼。一切痛掃除。終忤方伯罷歸。秋。授慶州敎授。公歎曰。朝廷雖授我以邊將。猶當盡心。況師儒乎。引諸生敎導以經學。勸勉以道義。多士風勵。庚寅。拜丹陽郡守。病不赴。除成均館司藝。陞司成。旋除豐基郡守。臥閤三月。闔境大治。遂引疾歸。以辛卯八月十七日。終于正寢。享年五十一。同年月日。葬于醴泉郡北龍門山艮坐之原。嗚呼。公性孝。髫齔遭前喪。郤海藻不食曰。恐其曾混藏於海魚中也。逮丁判書公憂。廬墓三年。一不下家。哀毀成疾。幾危而僅甦。遂爲平生之患。自少立志不凡。年十九。與鶴峯先生讀書白雲洞。仍徒步立雪于退陶門下。得聞旨訣。遂自刻勵爲學。平居。衣帶必飭。對案看書。如朱書節要,大學衍義,心經,近思錄等書。手不釋卷。用工積久。所造益深。鶴峯先生祭公文曰。克治心性。矯揉氣質。昔焉剛厲。今乃和平。始焉鈍魯。終乃敏明。其得力於學如此。嘗寓居醴泉之金谷。其俗以貨財相尙。不屑學業。公爲文勸諭父老。共立書堂於德進洞。爲多士講學之所。後移於鼎山爲書院。自是絃誦遍於一境。而金谷尤盛。髦士輩出。遂爲嶺底名村。興學明敎。其功偉矣。安東建廬江書院。廟享退溪先生。士林將請額。呈文于本府。推公製文。累千百言。覽者皆以爲非知道者不能如此形容盛德。淸修苦節。遠近所敬服。有悖行人搆亭于路傍。極其奢麗。聞公將過亭下。卽毀撤之。權草溪▣▣枕衾華美。嘗與公同寢。見公布被弊枕。心愧終不敢自設寢具焉。及其不容於朝而棲遲於下邑。則又不鄙夷其民。日具冠帶以莅事。爲治。專尙文敎。而先彝倫後文藝。至誠開導。孜孜不倦。以至經紀庶務。綜理微密。不朞年。治化旁達。士勤學武勤藝民勤耕。擧一境之民。無敢佚遊惰慢。而士學知方。武藝成才。民有餘粟而頌聲作焉。撫摩民庶。不啻赤子。然其有罪過。略不容貸。而民自心悅誠服。神明敬而父母愛焉。方其遞蔚而移昌也。一郡老少驚遑。攀轅臥轍。至於驅逐昌原吏卒。及其見黜於昌也。士子則懷疏叫閽而攻方伯。民庶則齊進巡營而歸怨毒。雖被囚受刑而終不悔。以至基城數月之政。民有抱碑而泣者。實今古所未聞。非其德政有以大過人而大感人。能如是乎。若其自奉如寒士。氷蘗之聲。聳動遐邇。沒世而猶見稱。特其餘事。豈可以此求多于公哉。惟其素性。剛直簡亢。不能俯仰流俗。儕流入要路。絶不與過從。嘗與鶴峯先生同邸舍。一時名流輻輳其門。而引避不見焉。奉命畿甸之日。江華伯以重臣被黜。按事湖南。則全州府尹。以貴戚見斥。聞者吐舌。其在蔚山。有海警。公領兵船先登。兵使後至。公抗義責之。兵使大慙。嘗出待巡使于境上。巡使到處荒酗。庵期不至。公徑歸曰。吾不忍重困田民也。方伯又以貴戚關節。橫暴小民。公報曰。奪原憲之貧。資季氏之富。方伯慙而止。有自稱監營裨將者至府。勒徵祭需。公怒而囚之。具由報巡營。監司勉從而心怒。至追還。殿最狀啓。改最爲殿。其直道不撓。多此類也。世之不知公者。固不足道。知公者。亦慮其過剛難容。畢竟與世抹摋而齟齬。窮末年北節之議擬。亦非所以待公者。而公已病矣。嗟呼。豈非天哉。完平李相國元翼。寒岡鄭先生逑。嘗稱公節行之高。今世無其人。豈阿好言耶。公前配淑人醴泉權氏。贈參議祉之女。後配安東權氏。縣監審言之女。先淑人。生二男二女。男長潪。宣敎郞。次潚。有俊才早夭。女長適監司崔晛。追封完城君。次適正言崔挺豪。宣敎生二男。曰是振。永興殿參奉。曰是桷。女適金𩑃左通禮,朴景賢,李晊,朴時華。監司生一男。曰山輝。靑松府使。追封完海君。正言生二男。曰忠望,忠亮。三女。適琴養中,南磁,生員金礪。內外曾玄孫男女若干人。後淑人。無子女。嗚呼。公之沒。于今六十有七年。而墓道無顯刻。公之曾孫進士𨏃。袖其先人所撰行錄。將以求銘於能言之君子。以爲垂光照世地。所謂佳子孫者。而拙劣之文。不足爲秉筆者取信。姑以塞其謬囑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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嶺南人物考 卷一 / 安東一
金彦璣
金彦璣字仲昷, 號惟一齋, 光州人。 中宗庚辰生。 宣祖丁卯生員。 宣祖戊子卒。
公嘗與具栢潭鳳齡入淸涼山, 期以十年讀書, 公有故, 不及栢潭一年, 然出山, 嵒崖草木, 盡成所讀書字云。
公晩卜佳野, 去陶山近, 與金後凋富弼諸晜仲及具栢潭鳳齡、權晦谷春蘭、權松巖好文、金芝山八元諸賢設約於山寺, 講學於洞口水石, 至今號爲九仙臺, 蓋會者九人云。
搆書舍數間, 扁以惟一, 敎授後進, 學者坌集, 不能容。 日與講說, 成就者甚衆, 如南賁趾致利、鄭芝軒士誠、權玉山暐、朴判書毅長、申梧峯之悌、權蘆川泰一諸公, 或以學問著, 或立身于朝, 爲時名人, 蓋福州文學之盛, 多自先生倡導云。
退陶易簀後, 營建書院于廬江, 撤白蓮寺, 毁其佛像, 投之江。 僧徒初欲拒之, 旣聞鶴峯金先生與先生來, 皆散去云。
先生少時, 爲寧海府學敎, 不以官卑自沮修治講樓, 申明學規, 奬勵勤至。 李光庭撰行狀。
[주-D001] 宣祖 : 底本에는 “明宗”으로 되어 있다. 《惟一齋實紀・行狀》, 《龍山世稿・惟一齋先生逸稿・行狀》, 《國朝蓮榜》에 根據하여 修正하였다.[주-D002] 自沮 : 《惟一齋實紀・行狀》, 《龍山世稿・惟一齋先生逸稿・行狀》, 《訥隱集・惟一齋金先生行狀》에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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눌은집(訥隱集) 이광정(李光庭)생년1674년(현종 15)몰년1756년(영조 32)자천상(天祥)호눌은(訥隱)본관원주(原州)특기사항이현일(李玄逸), 권두경(權斗經), 권두인(權斗寅)의 문인. 김성탁(金聖鐸), 권구(權榘) 등과 교유
訥隱先生文集卷之十九 / 行狀 / 惟一齋金先生行狀
先生諱彦璣。字仲昷。金氏系出新羅。羅季。王子興光知世將亂。遯于光州之平章洞。至孫吉。佐麗太祖有功。官至左僕射司空。司空之後。連世爲輔相。其洞名平章以此云。我朝。光城君若采生刑曹佐郞閱。號退村。以文章顯。事具洪虛白貴達氷玉稿序。其曾孫曰進士用石。號潭巖。先生大父也。遊佔畢齋門。嘗與南秋江孝溫,姜冲和應生諸名勝。同遊太學。修朱夫子鄕約。月朔。講論小學。秋江錄。以公及申公從濩爲尤。旣而見燕山政亂。遯跡福州之九潭。生八子。其第三諱籌進士。娶竹溪安氏僉正處貞之女。以正德庚辰某月日。生先生。先生天品淸高方質。有器局。不苟言笑。事父母。盡其方。與兄弟友愛。篤志講劘。以成就其業。嘗與具栢潭鳳齡入淸凉山。期以十年讀書。而先生有故。不及栢潭一年。然出山。巖厓草木。盡成所讀書字云。先生於時文。不求甚異於人。隨衆擧選。屢貢於鄕。輒見抳省闈。四十八。始成生貟。其於名利。泊如也。先生始居九潭。中移于伊溪。晩卜佳野。以其去陶山不遠。且與烏川宗人後凋堂富弼諸從兄弟隔岑而近。栢潭及權晦谷春蘭,權松巖好文,金芝山八元諸賢相距不遠。相與設約於山寺。相聚講學。洞口佳水石處。至今號爲九仙臺。蓋以諸先生所嘗遊息而名云。辛酉。搆書舍數間。扁以惟一。日敎授生徒。生徒坌集。至不能容。其生徒所止宿。名以觀善。合以扁之曰光風軒。其前鑿半畝塘曰止水。日與諸生講說經業。勤劬不怠。有時逍遙水石。以皷發其志意。使之自得而隨材誘掖。至啓手之年。皷篋執經者。日踵于門。蓋以是樂而終其身。其所成就者甚衆。如南賁趾致利,鄭芝軒士誠諸公。先生使之卒業陶山。以學問著。如權玉山暐,朴節度毅長,申梧峯之悌,權蘆川泰一諸公。立身于朝。爲時名人。金北厓圻,琴守靜撥。以操行重。權方潭杠。訓誨後進。一時名人。多出其門。福州文學之盛。多自先生倡導云。退陶先生易簀五年。而士林營建書院于廬江五老峰下。首以先生爲洞主。撤白蓮寺。毁其佛像。投之江。僧徒初欲拒不受。旣聞先生與鶴峯金先生來。皆惶散云。先生與同門諸先生。講求矩矱。累至陶山與本院。參正䂓約。又呈書于府伯草澗權公文海。欲依退陶先生爲白雲洞。上書方伯故事。陞之爲國學。其書數千餘言。先生手筆也。先生杜門靜修。無求仕之意。而嘗一爲寧海府學敎。亦不以官卑。修治講樓。申明學䂓。奬勵勤至。至今海鄕長老多誦說者。先生晩罹巨創。已踰不毁之年。而執喪甚固。喪葬祭。一以家禮。雖以滅性爲戒。强進䟽糲。而竟以哀毁成疾。以萬曆戊子三月十五日。考終于正寢。享年六十九。以其年某月某日。葬于卧龍山南麓丑坐之原。先生家自王子知幾遯世。高風邈焉。勝國之時。世爲名公卿。入我朝。爲名士大夫。而退村之文章。潭巖之學術。足以垂光燾後。而潭巖之炳幾爲明哲之首。子孫蕃昌。擩染庭訓。多以文行名世。先生資稟超詣。襲訓趾美。固有以異乎人者。及親大賢。與及門諸賢。往來切磋。其學問之醇深。德業之成熟。宜有本末。而回祿之災。遺文遺蹟。蕩無一存。無以攷尋其緖餘。而今所存。精舍韻一首,上草澗書一紙而已。或者謂退溪集中。無與先生酬酢文字。其姓名又不載門人錄中。疑先生不及其門。然先生少先師十九歲。少時與栢潭攻苦淸凉。路經退溪。其往來栢潭。豈不曾問業請益。而先生不與之偕乎。先生棲淸凉八九年。而退陶先生每歲棲息其中。其奉杖屨。周旋丈席。非止一二。而况先生之移卜嘉野。去陶山不及一舍。與退門諸子。講劘所聞。而顧不能親炙師門邪。其上草澗書。有曰退陶先生天資近道。穎悟出人。自少志學。動慕聖賢。超然獨詣。不由師承。其爲學也。竆理致知。反躳踐實。先近而及遠。自下而達上。進德之志。堅如金石。操省之功。著於日用。博約兩極。敬義夾持。精純溫粹。不露圭角。充養旣久。英華日章。其敎人也。自致知至於誠正。自修身至於齊治平。灑掃應對。至於竆理盡性。循循有序。莫不因其資稟而成就之。行己則動靜有常。內外一致。常如上帝之臨女。父師之在前。而威儀容止之則。自少至老。祁寒盛暑。造次顚沛。未嘗少異焉。接物。如春陽之溫。感人。如時雨之潤。應事則雖萬變交於前。而燭之不失毫釐。權之不失輕重。愛君憂國之心。雖閑居。未嘗一日而忘于懷。拳拳以開導聖學。輔養君德。爲致治之大本焉。進十圖以端出治之原。䟽六條以陳切時之務。所言皆至誠惻怛之所發。而樂行憂違。合乎古人出處進退之義。雖久去朝廷。而人常以其出處。爲吾道之盛衰國家之安危。至於晩歲道成德立。猶以義理無竆。歲月有限。常歉然有不足之意。向上之功。進進不已。至死如一日。先生之於道。眞所謂自彊不息者歟。若其著天命圖說。以闡性理之源。撰理學通錄。以明斯道之傳。啓蒙傳疑。所以發易學精微之蘊也。朱書節要。所以著先儒用功之旨也。至於經傳訓釋之間。旣皆參互考證。以正俗儒曲說之誤。講論辭說之際。亦必毫分縷析。以一後學向道之方。論理氣之先後辨。朱陸之異同。屹然如砥柱中流。昭乎如日星麗天。東人之仰之也。若泰山喬嶽之巍然。皆得聞此學之要此道之正。先生之於道。其講明羽翼之功大矣。自有東方以來。文章節義之士。代不乏人。間或以道學名世者。亦非一二。而表裏精粗。粹然一出於正。光洙泗之嫡統。紹程朱之宗派者。惟先生一人而已。又曰。幸同一時。得侍隣鄕。獲忝函丈。久襲春風薰沐而親炙之。則目想心思。其所以興感於胷中者。益深且切矣。詳味此書。先生果不及師門歟。其敍次有條。數百餘言之中。包括先師始終。殆無遺欠。非知足以知聖人。而從遊之久。心悅誠服。審視而默識之。固不能形容及此。然則先生之學之所造可知也。先生於家藏中庸心經紙頭。手錄先師與月川問答文義。間記自己所聞。以開釋後學之疑晦。則其學之出於陶山者。又可見矣。先生容貌魁偉。嚴正確實。喜怒不見於色。村老相傳我輩未嘗見此爺啓齒。平居靜默。媍孺不敢近。而至待人接物。寬而有容。和氣薰然。賢者愛敬。不肖者有所觀感。臨事酬酢。雍容不迫。而動合義理。鄕有大事。輒就先生而稟質焉。訓誨生徒。嚴立課程。不惟句讀之是先。而反復乎精微之旨。不惟詞華之是尙。而剖析乎義利之分。本之孝悌忠信。使知事親事君之道。正其趨向。俾達成己成物之功。以提撕代夏楚。諄諄啓迪。先河後海。循序策進。課誦之暇。引諸生升堂。講究聖賢之蘊。討論古今之得失。以開拓其門路。講罷。儼然端坐。沉潛玩索。遇興則杖屨逍遙。諷詠自適。翛然有出塵之想。學子之有所成就者。不但善牖之是賴。亦多得於觀感之間云。先生前後娶。前配英陽南氏。主簿世容之女。生一男二女。男得硏。女適士人南太華,權混。後配永川李氏。參奉仁弼之女。生二男一女。男得䃤,得礒。女適士人金泳。長公號葛峯。俱中生進。以文學重一代。生二男四女。男光澍生貟,光溥。女適士人李禮遵,朴大有,李振南,權楫。仲公才行夙詣。早卒無子。以光溥後。季公出後叔父。生一男四女。男光源進士。以文行名。女適士人權中正,朴承燁,柳极,柳橒。南太華有二男愿,恕縣監。二女適某某。權混有一男守一。金泳有二男繼道,繼志。二女適士人朴𤫉,權敏行。內外曾玄百餘人。先生敦實絀華。跡不近名。澡身潔行。不蘄見知。從事乎日用常行之則。而未嘗爲驚世震人之行。隱居求志。行尊德邵。而世罕有知先生所造者。松巖與先生道同志合。俱隱於世。而松巖晩除齋郞。先生聞之曰。章仲亦有知之者乎。松巖亦不出。於乎。先生其眞隱矣。先生旣歿。門人相率歲一祭先生墓。子孫歲率爲式者。百餘年。可見其慕德者深矣。今上甲寅。士林以先生同麗朝金桑村自粹及金芝山,鄭芝軒。享于玉溪書院。六年而有新設之禁。廢不祀。然於先生何損焉。先生之遺蹟遺行嘉言至論。固宜有賢弟之記,賢子之錄。而泯泯無一存。意者或識先生平日之志。故不敢形諸文字。以犯先生之遺戒乎。抑或有之而兵火之餘。沒而不出乎。光庭老耄無識。息病漁澗之岸。先生七世孫鴻九奉先生遺事。以其家大人書諸尊章之意。屬令撰次爲狀。光庭少不如人。年運而往。精力短乏。何能論次遺行於百歲之下乎。其所輯錄。出於後人之傳聞。而非當時審視而謹記者。則又烏能免懸揣杜撰之譏乎。第以先生之名久而益章。觀其門弟子挽祭文。不敢盛有所稱道。蓋熟知先生平日謙挹畏惡名字故爾。厓,鶴兩先生爲一時司命權衡。而西厓挽先生云。學笑專門陋。鄕推二達尊。鶴峯和草堂韻云。坐來螢榻人如玉。講罷鱣堂舌欲乾。猶可以想見彷彿。而陶門諸賢如栢潭,松巖,後凋,日休,晦谷,芝山,文峯,藥峯所和諸篇。又可以測先生所存之一二。味先生十首詩一篇書。亦可以想像先生於百載之下矣。乃於疾病之暇。取柳裵二君所錄及家中遺聞。櫽括編定。以塞慈孫百世之思。非敢以自託於傳信之地也。後之君子尙有以恕其僭耄而加采擇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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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집(頤齋集) 권연하(權璉夏)생년1813년(순조 13)몰년1896년(고종 33)자가기(可器)호이재(頤齋)본관안동(安東)특기사항유치명(柳致明)의 문인. 이돈우(李敦禹), 김흥락(金興洛), 이만각(李晩慤), 강건(姜楗) 등과 교유
頤齋先生文集卷之十三 / 行狀 / 三餘堂裵公行狀
| 裵行儉 | 1673 | 1752 | 興海 | 守約 | 三餘堂, 梧谷, 迂叟 |
公諱行儉字守約。裵氏興海人。始祖詮受封爲貫。勝國末有諱尙志。見國命將革。屛居金溪村。植柏竹以自號。子孫遂爲安東人。後七世有大司成三益。登退溪先生門。以經術顯穆陵世。號臨淵齋。於公間五世。高祖諱龍吉官藝文檢閱。文章學業著一代。曾祖諱淑全以器局聞。祖諱興胄。考諱冕。以厚德重一鄕。號綯窩。妣密陽朴氏通德郞絢之女。公以崇陵癸丑。生于桃木里第。自幼姿貌瀅秀。器度通豁。性孝友。十二遭先妣喪。守制如成人。先公中歲置庄於桂谷。仍就靜棲息。公家居誦讀之暇。十里日省。不以風雨廢。勵志勤篤。學業日就。南公碩耆來棄仕里。敎授生徒。公往從之。穎悟出衆。詞藝早就。南公歎賞曰吾非敎爾者。爾可爲童子師。諸長老會高林寺。公隨先公往。景玉李公試以古詩。嘉尙曰是遠到之器。自是肘不離案殆四十年。刻勵不輟。若四子朱文。終身成誦。旁及史漢諸書唐宋大家。至於檀箕以下治亂賢否。歷歷貫穿。國朝典故。先賢出處。詳悉參究。嘗與顧齋李公讀書淸凉山寺。歷數嶺中該博之士。有使君與操之語。玉川趙公於人少許可。而每稱公以當世博雅。無過於某。少時往金溪。諸長老咸曰某之通識高論。竹所之賢當讓與一頭。竹所者金公良鉉也。每於先賢闡發之蹟。尤致惓惓。或有事實差謬者。極加辨解。金桑村腏享之論。初發於金鶴沙。再發於權蒼雪而因東史輿覽之誤錄。中致寢格。公裒輯事實。發明其盡節殉國之蹟。士論卒歸正。嘗慕禹文僖先生之邃學直節。採摭事實。以備傳述。孫靖平公麗季名相也。世遠迹湮。公廣搜博采。發揚潛德。惟一齋金先生行狀未具。公輯錄諸賢稱述。爲遺事一通。辛亥豐原君趙公顯命按嶺臬。帖諭列邑。各出訓長。申明學政。本府以訥隱李公光庭爲都訓長。而使各面皆薦其任。公當龜溪書院敎席。公抵書辭免。爲陳文具之無實。訥翁勉以交修共講。公乃與同志立科條勤講課。有觀感之效。少治博士業。年未四十。卽屛擧曰是有命焉。莫若從吾所爲。讀書硏理。以求古人用心。爲文章典雅紆餘。惟主理順。故如布帛適用。非組織工麗者比也。不喜吟咏曰詩本性情。乖却本性而專事聲韻則不如不爲。或爲人強酬而亦不蓄也。嘗與人圍棊。見其爭道不已。卽推枰曰此雖小數。亦致爭端。絶不爲。性恬靜不樂羣居。不欲與世干涉。凡朝政得失。守宰能否。雖入耳而不發諸口。若儒林是非。物論臧否。亦以己意辨白而不以爭氣加焉。家計寒素而不以爲憫曰安貧固窮。亦吾本分。以不怕窮三字爲吾持身之符。嘗曰吾旣不諧於世。惟遨遊水石間。以終吾身。每杖屨逍遙於江上。與同好往淸凉山。經旬而返。愛看先輩遊山錄。以寓物外之趣。家居有至行。事先公先意順志。及遭憂。一從家禮而盡其制。時又罹毒癘。澌薾幾殆。猶茹素以終三年。與季公友愛尤篤。居處飮食必共之。以聯牀講劘爲至樂。季公亦喜文詞。討論辭義。或執之太過而亦不強辨。但示己意而已。族親之間。務盡敦睦。死喪患難。存恤備至。有遺孤無依者。拊視敎誨。俾有成立。敎子弟一以義方而諄諄面誘焉。公自號三餘堂。又稱以迂叟。壬申十二月某甲終于寢。享年八十。塟于淸凉山後蓬壺下丑坐之原。諸子收輯詩文。有若干卷藏于家。配西原鄭氏文興女。判决事士信之孫。柔婉端潔。婦德甚備。生三男二女。男絳,𥿧,䌖。䌖爲季氏嗣。二女適宋春基,李頔。絳一男相復。𥿧三男一女。䌖四男。璉夏自早歲稔聞公事行。今讀其遺文。溫厚有典則。其行誼醇篤可法象。其論議發越可警勵。其後孫淵度示以遺事。責之以敍次之役。璉之荒弊固知不堪。而第以平日嚮慕之餘。不敢終辭。畧綴始終。庶或爲後人攷据之資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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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산집 제49권 / 행장(行狀) / 지헌 정 선생 행장〔芝軒鄭先生行狀〕
| 鄭士誠 | 1545 | 1607 | 淸州 | 子明 | 芝軒 |
| 鄭士信 | 1558 | 1619 | 淸州 | 子孚 | 梅窓, 谷神子 |
공은 휘가 사성(士誠)이고 자는 자명(子明)이며, 성은 정씨로 세상에서 일컫는 서원(西原 청주(淸州))의 대성(大姓)이다. 고려 시대에 신호위 상장군(神虎衛上將軍) 정의(鄭顗)가 역적을 토벌하다 국난(國難)에 죽은 충절 때문에 사적(事蹟)이 열전(列傳)에 실려 있는데, 이때부터 대대로 문장과 덕행으로 역사에 이름을 빛냈다. 중세(中世)에는 휘 침(賝)이 소부정윤(少府正尹)을 지냈다.
우리 조선이 천명을 받자, 안동(安東)에 터를 잡고 다시 벼슬길에 나가지 않아 자손들이 마침내 안동 사람이 되었다. 증조 휘 윤소(允韶)는 의영고 직장(義盈庫直長)을 지냈고, 조부 휘 언보(彦輔)는 성균관 생원이었다. 고 휘 두(枓)는 사섬시 첨정(司贍寺僉正)을 지내고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에 추증되었으며, 비 안동 권씨(安東權氏)는 사직(司直) 권식(權軾)의 따님이고, 지평(持平) 징(徵)의 증손녀이다.
공은 가정(嘉靖) 을사년(1545, 인종1) 2월 29일에 태어났다. 공은 어려서부터 자질이 총명하고, 태도가 반듯하고 엄숙하여 이미 어른 같은 풍모를 지니고 있었다. 7세에는 유일재(惟一齋) 김공 언기(金公彦璣)에게 수업받았고, 얼마 지나서는 다시 구백담(具柏潭 구봉령(具鳳齡))과 김지산(金芝山 김팔원(金八元))에게 나아가 학업을 익혔다. 공은 재주가 영민하고 이해가 정밀하여 선생들에게 자주 칭찬받았다.
17세에는 도산(陶山)으로 이 선생을 찾아가 인사를 올리고 배움을 청하였다. 그러자 선생이 말하기를,
“경(敬)은 도에 들어가는 문이다. 반드시 성실하게 한 뒤라야 중간에 그만두는 일이 없게 된다.”
하였다. 그러고는 명(名)과 자(字)를 손수 적어 주었다.
우윤공(右尹公)이 공을 위해서 도산에 조그만 서재를 짓고 머물며 학문을 익히도록 해 주었다. 선생은 이 서재를 ‘동몽(童蒙)’이라 이름 짓고 공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그대는 모름지기 각고의 노력으로 공부하여, 부모의 희망을 저버리지 않도록 하라.”
하였다.
한번은 선생께서 달이 뜬 밤에 공을 데리고 천연대(天淵臺)에 올라서 〈무이구곡시(武夷九曲詩)〉를 외워 보도록 하고는 이어 절구 한 편을 지어 주었다. 공이 일찍이 연대사(蓮臺寺)에 머물면서 《역통(易通)》의 이해되지 않는 내용을 물었더니 선생께서 조목조목 자세하게 답해 주기도 하였다. 공은 선생의 문하에서 십여 년을 머물면서 경사자집(經史子集)에 대해 직접 가르침을 받고는 정밀히 연구하고 깊이 사색하여 학문을 축적하였다.
경오년(1570, 선조3)에 이 선생이 후학들을 버리자, 공은 웃어른의 병을 구완하면서 선생의 상을 치르고 장례에 온갖 정성을 다하였다.
24세에 진사시에 합격하였는데, 병자년(1576)에 대과(大科)에 응시하고자 서울에 올라갔다가 우윤공의 부음을 받고 밤길을 달려 돌아왔다. 상례는 한결같이 《가례(家禮)》를 따랐다.
정해년(1587, 선조20)에는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태릉 참봉(泰陵參奉)을 제수받고, 모친의 뜻을 거역하기 어려워 어쩔 수 없이 직임에 나아갔다.
신묘년(1591)에는 자리를 옮겨 경주(慶州) 집경전(集慶殿)의 참봉을 제수받았다.
다음 해에 섬오랑캐가 난을 일으켜 동래(東萊)와 부산(釜山)이 함락되자, 경주는 아침에 저녁을 장담하기 어려울 정도로 위태롭게 되었다. 같은 직임을 맡은 홍여율(洪汝栗)이 임금의 화상(畫像)을 땅에 묻어 두려고 하자, 공이 의연하게 말하기를,
“이것은 신하 된 자로서 차마 하지 못할 일이다. 모시고 서울로 가느니만 못하다. 만약 멋대로 옮긴 것이 죄가 된다면 내가 그 죄를 감당하겠다.”
하였다.
마침내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 고향 집 앞을 지나면서도 들르지 않았다. 가는 길이 제천군(堤川郡)에 이르렀을 때, 어가(御駕)가 서쪽으로 파천했다는 소식이 전해졌고 길도 오랑캐에게 막혀 버렸다. 공은 충청도 관찰사에게 달려가 보고하고 다시 영남으로 방향을 돌려 퇴계 선생의 서재(書齋)에 임시로 어진(御眞)을 모셔 두었다. 경상 감사 한효순(韓孝純)이 봉심(奉審)하고 행재소(行在所)에 보고했다.
갑오년(1594)에 이조에서 아뢰기를,
“정사성과 홍여율이 임금의 화상을 지킨 공은 한가지입니다. 감사가 봉심하던 날, 정사성은 봉안(奉安)한 장소에 남아 있었고 홍여율은 감사를 따라 안동으로 갔습니다. 그래서 장계를 올릴 때에 홍여율의 관직과 성명만 적고 정사성의 성명을 빠트려서 다른 참봉을 차출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에 감사가 장계로 아뢰어 겨우 옛 관직에 임용될 수 있었지만, 홍여율은 이미 육품관으로 승차(陞差)된 뒤였습니다. 임무가 같고 공로가 동등한 사람에게 포상이 달라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아뢴 대로 하라고 하고, 공을 내섬시 주부(內贍寺主簿)로 승차하였다. 몇 달이 지나서 양구 현감(楊口縣監)에 제수되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모친의 연로함을 이유로 사직하고 돌아왔다. 돌아와서는 문밖출입을 삼가고 책을 읽으면서 자제를 가르치는 일에만 몰두하였다.
정유년(1597, 선조30)에 다시 왜구가 준동하였다. 망우(忘憂) 곽공 재우(郭公再祐)가 화왕산성(火旺山城)으로 들어가 의병을 모집하여 적을 토벌하자, 공도 그곳으로 나아갔다. 당시 상황에 대해서는 《응모록(應募錄)》과 《동고록(同苦錄)》에 적혀 있다.
무술년(1598)에 정부인(貞夫人)의 상을 당했다. 공의 나이는 이미 50세가 넘었지만, 이전과 다름없이 거상(居喪)의 예를 지켰다.
정미년(1607) 2월 16일, 공이 병으로 세상을 떠나니 향년 63세였다. 4월 기사(己巳)일에 우윤공의 묘소 오른쪽, 경방(庚方)을 등진 언덕에 부장(祔葬)하였다. 배(配) 영양 남씨(英陽南氏)는 부장(部將) 남순효(南舜孝)의 따님으로, 판서 남휘주(南暉珠)의 후손이다. 4남 1녀를 두었는데, 장남 기(
)는 종사랑(從仕郞)이고, 차남 전(佺)은 학행으로 천거되어 의금부 도사를 제수받았으며, 면(俛)과 신(伸)은 모두 생원이다. 딸은 사인(士人) 구문기(具文紀)에게 시집갔다. 종사랑은 아들 셋을 두었는데, 기선(基善), 기경(基敬), 기업(基業)이다. 의금부 도사는 아들 둘을 두었는데, 기덕(基德)과 기적(基績)이다. 생원 면은 아들 넷을 두었는데, 기홍(基弘), 기수(基壽), 기중(基中), 기륭(基隆)이다. 생원 신은 아들 여섯을 두었는데, 기발(基發), 기박(基博), 기립(基立), 기익(基益), 기석(基碩), 기달(基達)이다. 기선의 큰아들은 훈(鑂)인데, 증손과 현손 이하는 다 적지 못한다.
공은 매우 후덕하고 마음이 너그러웠으며, 얼굴빛을 온화하게 하여 부모를 봉양하고 부모의 뜻을 따르기에 힘썼다. 어려서는 도산의 문하에 들어가 군자가 지녀야 할 몸가짐에 대해서 들었다. 퇴도 선생이 일찍이 공에게 잠명(箴銘)을 직접 써 주고, 이르기를,
“유가(儒家)는 그 의미가 남다르다. 문예(文藝)를 익히는 것은 유가의 일이 아니고 과거에 나아가는 것도 유가의 일이 아니다.”
하였는데, 공은 선생의 말을 받들고 지키며 감히 어기지 않았다.
학봉(學峯 김성일(金誠一))과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는 함께 공부한 벗인데 이들과는 정성을 다하여 가깝게 지냈다. 또 일찍이 유겸암(柳謙菴 유운룡(柳雲龍)), 이간재(李艮齋 이덕홍(李德弘)), 금일휴(琴日休 금응협(琴應夾)) 등 제공과 기일을 정하고 산사(山寺)에서 만나 《역학계몽(易學啓蒙)》과 《주자전서(朱子全書)》를 강론하기도 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더 이상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으며, 지산(芝山) 남쪽에 집을 짓고 스스로 지헌(芝軒)을 호로 삼았다. 원근의 학자들이 공에게 와서 묻는 일이 많았고, 세 아우를 가르쳐 모두 성취하게 하였는데 매창공(梅窓公) 사신(士信)은 과거에 급제하여 조정에서 영예를 누렸다.
공은 늘 충(忠)과 효(孝) 두 자로 자신을 면려하고 경계하였다. 필법(筆法)도 오묘한 경지에 이르러, 서법을 잘 아는 명나라 장수의 막료(幕僚)는 공의 사마시(司馬試) 시권(試券)을 보더니 반을 잘라 가져가면서, “이는 세상의 지극한 보물이다.”라고 하였다.
임진년(1592, 선조25)에 임금의 화상을 모실 때, 동료의 처사가 인정에 맞지 않은 것이 많았다. 이 때문에 벼슬을 그만두게 되었지만 편안히 있으면서 원망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고, 이조에서 계달(啓達)하고 연신(筵臣)이 임금께 아뢰어 마침내 지위가 올랐으나 역시 기쁜 내색을 보이지 않았다. 일찍이 자제들에게 이르기를,
“모든 일이 스스로 돌아보아 부끄럽지 않다면 득실(得失)은 걱정할 바가 아니다.”
하였다.
공은 비록 낮은 지위에 머물러 품은 경륜을 펼치지 못했지만, 난리를 당하여 일을 처리하고 조처한 것들이 모두 적절하였다. 주변 고을 수령들에게 권하여 의병을 일으켜 조령(鳥嶺)과 죽령(竹嶺)에 진을 치고 적의 진로를 차단하였으니, 공의 지략과 운용 능력을 대략 알 수 있을 것이다.
위험과 고생을 겪으면서 여러 차례 구사일생의 고비를 넘겼지만, 짧은 순간에도 애군 우국(愛君憂國)의 뜻을 잊지 않았으며, 종종 통곡을 하기에 이르렀다. 이것은 아마도 공이 하늘로부터 충의의 기상을 받고 또한 학문을 통해 여기에 이르렀기 때문일 것이다.
공은 고례(古禮)를 믿고 좋아하여 관혼상제(冠婚喪祭)에는 반드시 고례를 따랐으며, 의심스러운 사항이 있으면 사문(師門)에 여쭈었다. 병중에 있으면서 자식들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나는 이 선생님에게 낳아 준 것과 같은 은혜를 입었다. 내가 비록 죽더라도 선생의 기일에는 훈채(葷菜)를 차리지 말고, 잔치에도 참석하지 말아서 내가 선생을 경모(景慕)했던 성의를 저버리지 말라.”
하였다. 병이 위독해졌는데도 오히려 선생이 내려 준 잠명(箴銘)을 한 차례 외니, 스승의 훈계를 가슴에 새겨 두고 일생을 마치려는 듯하였다.
공이 시문을 남기기는 했지만, 집안의 화재와 병란에 산일되었다. 일찍이 공의 덕을 기록한 행장을 창석(蒼石) 이공 준(李公埈)에게 부탁했으나, 이것 역시 화재에 잃어버렸다. 수백 년의 세월이 흘러 공의 아름다운 언행은 인멸되어 거의 전하지 않으나, 아름다운 덕만은 마을 사람들에게 전해져 오래도록 사라지지 않았다. 일찍이 옥계서원(玉溪書院)에 제향하였으나 나라의 명에 따라 철거되었으니 어찌 후학들의 한없는 유감이 아니겠는가.
증손 선(鍹)이 공의 유적을 수습하고 가전(家傳) 한 통을 지어 책 상자에 보관해 둔 지가 오래되었다. 6세손 중묵(重默), 중섭(重燮) 등이 세월이 지날수록 더욱 징험할 방도가 없으리라고 크게 걱정하여 원근을 탐방하고 유고를 모아서 시문과 잡저 약간을 얻었다. 여기에 연보, 만사(挽詞), 뇌문(誄文), 사우들의 간찰을 더해서 두 권으로 만들었다. 그리하여 이것들을 나에게 보내어 공의 덕을 글로 짓도록 하였다.
스스로 생각해 보니, 학문이 미천한 후생으로서 당시에 공을 지척에서 모시지도 못하였으니, 어찌 감히 행적을 기록하여 착오하는 죄를 자초하겠는가. 다만 그들의 청이 더욱 간절하여 감히 끝까지 사양하지 못하였다. 가첩(家牒)에 의거하여 위와 같이 적고, 중간에 마음에 느낀 바를 덧붙여 입언(立言)하는 군자가 상고할 수 있도록 한다.
[주-D001] 사적(事蹟)이 …… 있는데 : 《고려사(高麗史)》 권121에 정의(鄭顗)의 열전이 실려 있다.[주-D002] 무이구곡시(武夷九曲詩) : 주희(朱熹)가 무이산(武夷山) 아홉 굽이의 경치를 읊은 시이다.[주-D003] 역통(易通) : 중국 송나라의 학자 주돈이(周敦頤)가 지은 《통서(通書)》의 처음 이름이다.[주-D004] 응모록(應募錄)과 동고록(同苦錄) : 곽재우가 의령(宜寧)에서 의병을 모집해 활동할 때 함께한 사람들의 명단을 적은 《용사응모록(龍蛇應募錄)》과 화왕산성에 들어가 적과 싸울 때 함께한 사람들의 명단을 적은 《화왕산성동고록(火旺山城同苦錄)》을 말한다. 후에 《창의록(倡義錄)》이라는 이름으로 합쳐 간행되었다.[주-D005] 매창공(梅窓公) 사신(士信) : 정사신(鄭士信, 1558~1619)으로 호가 매창이다. 정사성(鄭士誠)의 동생으로, 25세인 1582년(선조15)에 문과에 급제하였고, 이후 사간원 정언, 밀양 부사(密陽府使) 등을 역임하였다. 문집으로 《매창집(梅窓集)》이 있다.[주-D006] 옥계서원(玉溪書院)에 …… 철거되었으니 : 1731년(영조7) 옥계서원에 위판(位版)이 봉안되었으나, 1741년에 서원철폐령에 따라 철폐되었다.
ⓒ 한국고전번역원 | 정명수 (역)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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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여강서원의 사액(賜額)을 청하는 정문(呈文)을 누가 작성했는가를 놓고 의성김씨 문중과 광산김씨 가야문중 사이에 벌어진 양김시비(兩金是非). 먼저 의성김씨 김복일의 12세손 김정식(金庭植)이 이 논쟁에 대하여 『유일재선생실기변파록(惟一齋先生實紀辨破錄)』을 지어 변석한 바 있다. 이에 김언기의 12세손 김영원(金永愿)이 『유일재선생실기변파록』에 변석한 조목에 따라 『남악선생정문변무록(南嶽先生呈文辨誣錄)』을 지어 자신 집안의 입장을 밝힌 것이다.
2. 갈암 이현일 선생이 여강서원(廬江書院)에 사액(賜額)해 주기를 청하고, 학봉(鶴峯) 김 선생(金先生)의 시호를 청하는 상소(사림(士林)을 위해 짓다.)를 지은 것은 시비가 없습니다. 남악 김복일의 사위가 인재 최현이고 최현의 아들이 영사공신 효헌공 낙남 최산휘이니 외손자입니다. 최산휘는 함양군수, 청송부사를 지냈습니다. 김복일은 또 안동부사 초간 권문해의 매부이니 김복일의 윗 처남이 초간입니다. 김복일이 위 처남에게 서신을 보내기 뭣하여 타인명의로 보낼 수도 있겠습니다만 진위를 발힐 수는 없습니다. 유일재, 남악의 글은 왜 명확하지 않은 것인지 어떤 견해가 있는지 여쭤봅니다.
3. 이연숙의 해제에 본서는 『유일재선생실기변파록』과 같이 영남지역 두 집안간의 논쟁을 엮은 것으로 두 집안의 문중사 연구에 소중한 자료라고 생각한다. .고 했는데 양김시비를 다시 거론하는 것은 인화를 해칠 염려가 있기에 배제한 것으로 봅니다. 지리학박사이시면서 인화를 중시한 결과라 생각합니다. 이 소중한 자료를 전혀 고려하지 않아서 견해를 여쭤봅니다.
4. 여강서원은 오로봉 아래 백련사를 철거하고 세운 것이라 불교신의 보복인지 터가 흉당이어서 그런지, 호병, 병호시비를 야기했고, 다시 양김시비를 야기했고 국학진흥원 곁에 복원한 뒤에도 1면3패시비(도산면 예안향교, 도산서원, 호계서원에 퇴계위패봉안)와 위패철수사태를 야기했으니 불교도 유교도 다 잘 안되는 땅, 애초의 입지가 명당이 아니어서 그런 것인지 지리학박사의 고견을 여쭤봅니다.
5. 한국고전종합DB 고전용어 시소러스에,
옥계서원(玉溪書院) 조선시대 충청도 덕산(德山)에 세운 서원. 김자수(金自粹)ㆍ김언기(金彦璣)ㆍ정사성(鄭士誠) 등이 배향됨. 이라고 되어 있어
지헌집(芝軒集) 芝軒先生年譜
皇明世宗皇帝嘉靖二十四年 仁宗大王元年 乙巳六月二十九日。寅時 公生于安東府北馬巖里第。公先祖正尹公。國初。隨外氏金文英公恂別業。來居安東。考右尹公。自茅沙洞。移卜馬巖里。
英宗大王七年辛亥十一月十八日。奉安位版于玉溪書院。院在府東德山縣。金桑村自粹,金惟一齋,金芝山竝享。辛酉。朝家有新刱書院禁令。故撤享。
영조 7 1731 신해 雍正 9 - 11월, 玉溪書院에 位版이 봉안되다.
서원등록 > 영조 > 영조 > 최종정보
영조(英祖) / 영조(英祖) 17년(1741) 8월 15일
경상도(慶尙道)에서 갑오년(甲午年) 이후에 창건한 서원을 조사하여 장계를 올리는 건
1. 경상 감사(慶尙監司) 심성희(沈聖希)가 올린 계본(啓本)에, “운운(云云)하였습니다. .....모두 고발하였습니다.
대구부(大丘府):민충사(愍忠祠)
안동부(安東府):옥계서원(玉溪書院)은 고려조 도관찰사(都觀察使) 김자수(金自粹), 진사(進士) 김언기(金彦璣), 좌랑(佐郞) 김팔원(金八元), 현감(縣監) 정사성(鄭士誠)에게 제사를 지내는데, 순치(順治 청(淸)나라 세조(世祖)의 연호로 1644~1661) 무술년(戊戌年)에 강당(講堂)과 고사(庫舍)를 건립하였다고 하며, 사당은 신해년(辛亥年) 8월에 창건하였습니다. 그때 재임한 감사는 조현명(趙顯命)이고 부사는 이덕부(李德孚)이며, 그 일을 앞장서서 주도한 유생은 김성월(金聖鉞)입니다.
이를 근거로 여러 번 오류신고하여
옥계서원(玉溪書院): 조선시대 경상북도 안동 덕산현(德山縣)에 세운 서원. 김자수(金自粹)ㆍ김언기(金彦璣)ㆍ정사성(鄭士誠) 등이 배향됨.이라고 개정되었습니다.
논평자는 현재 봉화군 재산면에 가서 물어 면사무소 여직원이 가리킨 대로 옥계서원 터를 찾았는데 표지석 기록에 이건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건 전의 원위치를 알려고 하였으나 못 찾았습니다. 안동의 학문진흥의 창도자로 알려진 스승과 제자들, 선현을 기념하는 유적이니만큼 원위치를 찾아 표석이라고 설치하고 기념하였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부탁드리는 바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