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제5장 민수의 꿈 – 어린 시절의 기억
2023년 여름, 우리 초등학교 동창 열한 명은 알래스카로 향하는 11박 12일 크루즈 여행길에 올랐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어느덧 일흔을 앞두고 있었다. 서로의 주름진 얼굴과 희끗희끗해진 머리를 바라보며 우리는 종종 웃었다. 어린 시절, 학교 운동장에서 흙먼지를 일으키며 뛰놀던 그 꼬마들이 이렇게 오랜 세월을 돌아 다시 하나의 배에 올랐다니, 그 자체가 기적처럼 느껴졌다.
이번 여행은 민수가 주도했다. 언제나 앞장서서 사람들을 챙기고, 누구보다 따뜻한 눈으로 친구들을 바라보던 민수. 그는 오랜 시간 함께해온 우리 열한 명의 우정을 기념하기 위해 이 크루즈 여행을 제안했고, 꼼꼼한 준비와 세심한 배려로 우리 모두를 감동하게 했다.
“우리 회갑 여행을 베트남, 태국, 라오스 그리고 다낭, 순으로 동남아만 여행이었잖아. 한 번쯤은 크게 가보자, 알래스카 어때?”
그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민수는 열한 명의 여정을 위해 단체 카카오톡 방을 만들고, 항공권과 선실, 일정까지 도맡아 처리했다. 그 열정은 마치 소풍 전날 들뜬 아이처럼 반짝였고, 덕분에 우리 여행은 시작부터 따뜻한 기운으로 가득했다.
크루즈는 태평양을 가르며 느릿하게 북쪽으로 향했다. 바다 위를 날아오르는 갈매기, 수면을 가르며 솟아오르는 고래의 등, 밤하늘을 수놓은 별들이 우리가 지나온 시간을 말없이 위로해주었다. 갑판에 둘러앉아 술잔을 기울이던 어느 날 밤, 민수가 불쑥 말했다.
“얘들아, 혹시 너희, 자기 꿈 기억나냐?”
모두가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곤 누군가가 웃으며 말했다.
“난 우주비행사가 되고 싶었지.”
“나는 기차 기관사였어.”
“나는 야구선수! 그런데 지금은 어깨가 아파서 공도 못 던지겠네.”
웃음이 이어졌지만, 민수는 조용히 말했다.
“나는… 친구들이랑 늙어서도 같이 여행 다니는 게 꿈이었어. 그게 진짜 내 꿈이었어.”
그 말에 모두가 잠시 멈췄다. 그리고 우리는 알았다. 지금, 이 순간, 그 꿈은 현실이 되었고, 우리는 모두 민수의 꿈속을 함께 항해하고 있다는 것을.
여행은 그렇게 우리 모두에게 두 번째 유년기 같은 시간을 선물해주었다. 과거를 회상하며 웃고, 현재를 함께하며 울고, 미래를 상상하며 노래했다.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나는 창밖을 보며 생각했다. 민수의 꿈은, 어쩌면 우리 모두의 꿈이었는지도 모른다. 어린 시절의 놀이처럼, 아무 이유 없이 즐겁고, 따뜻하고,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그런 꿈. 그 꿈이 우리 삶의 긴 여정 속에서 다시 시작되었다.
그리고 나는 믿는다. 민수의 그 말처럼, 우리에겐 아직 함께할 시간이 남아 있다는 것을.
제6장 2023년, 크루즈 여행
– 안다태와 친구들, 얼음 바다 위를 걷는다
알래스카의 바람은 얼음처럼 차가웠지만, 우리들의 웃음은 그 바람조차 녹일 만큼 따뜻하고 힘이 셌다. 초등학교 시절, 남녀 합쳐 겨우 두 반이던 시골 학교를 함께 다녔던 친구들이 어느덧 회갑을 넘기고 칠순이 점점 다가오는 시점에서, 다시 모였다. 11명의 친구. 그 시절 운동장을 함께 뛰놀던 발걸음들이, 이제는 태평양 위에서 부드럽게 흔들리는 크루즈 갑판 위로 다시 모여든 것이다.
“우리 초등학교, 지금 보면 분교야. 졸업생이 70명이었으니까.”
태수가 꺼낸 말에 모두가 피식 웃었다. 하지만 그 웃음 속엔 묘한 진심이 담겨 있었다.
그 시절, 우리 학교는 작았다. 교실 창문으로 들이치던 바람은 유난히 시렸고, 운동장은 한눈에 다 들어오는 크기의 자갈밭이었다. 겨울이면 석탄 난로 위에 도시락을 얹어 데우던 냄새가 교실 가득 퍼졌고, 봄이면 교정 가장자리 개나리꽃 아래서 서로의 도시락 반찬을 바꿔 먹으며 웃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선생님은 늘 우리 이름을 외우는 대신, 서로를 '누구네 집 몇째'라 불렀고, 종종 염소나 개가 운동장으로 들어와 아이들과 함께 어울렸다. 초라했던 외관과는 달리, 그 안에서 흘러나온 시간은 언제나 따뜻하고 순수했다. 가난했지만, 마음은 부유했고. 가진 게 없었지만, 손을 잡아주던 온기가 늘 곁에 있었다. 작은 분교였지만, 우리에겐 세상에서 가장 큰 배움터였고, 삶의 뿌리를 내린 첫 번째 둥지였다.
안다태, 해결사
태수는 예나 지금이나 ‘다 안다, 태’였다. 누군가 “태수야, 이거 좀 봐줘.”라고 하면,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이미 손에 답을 쥐고 돌아오는 사람이었다. 방콕 여행 경로도 태수가 짰고, 태수가 이번 여행도 총괄했다. “내가 다 안다니까.” 농담처럼 말했지만, 그의 말에는 언제나 책임감이 실려 있었다. 그 누구보다 계획에 철저하고, 꼼꼼했다.
이번 여행에서도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출발을 앞두고, 두 명의 친구가 개인 사정으로 함께할 수 없을 것 같다고 연락이 온 것이다. 모두 당황했다. “그럼 표는 어쩌고, 방은 또 어떻게 나누지?” 걱정이 번지자, 태수는 침착하게 말했다.
“잠깐만. 내가 해결할게.”
그는 항공사와 크루즈사에 직접 전화를 걸고, 동선을 조정하고, 환불이 아닌 일정 변경이 가능한 루트를 찾아냈다. 심지어 사정이 있던 친구들 집까지 들러 필요한 서류를 대신 챙겨주고, 결국은 출항 하루 전, 친구 두 명을 무사히 합류시켰다. 그날 밤, 우리는 크루즈 객실에서 늦은 시간까지 얘기를 나누었다.
“야, 너 없었으면 우리 둘 빠질 뻔했어.”
“그럼 재미 반은 날아갔지. 역시 안다태야.”
태수는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사람끼리는… 같이 가야 의미가 있지 않냐?”
얼음 바다 위의 기술자
항해 중 또 하나의 일이 벌어졌다. 갑자기 크루즈의 와이파이가 먹통이 되면서, 친구들 사이에 불안한 기색이 번졌다.
“이거 안 되면 가족들이랑 연락도 못 하고, 사진도 못 올리잖아?”
“카톡도 안 돼… 우리 이렇게 고립되는 거야?”
그 순간에도 태수는 흔들림이 없었다.
“기다려봐. 이건 네트워크 문제 같아. 내가 가서 얘기해볼게.”
그는 곧바로 승무원을 찾아가 네트워크 채널의 상태를 물었고, 어떤 설정 변경이 가능한지 차분히 설명을 들었다. 일반인은 이해하기 어려운 전문용어가 오갔지만, 태수는 낯선 말들 속에서도 정확한 방향을 읽어냈다. 얼마 후, 와이파이는 다시 살아났고, 메신저 알림이 일제히 울려 퍼졌다.
“이거 기술 문제야. 채널 간섭 때문에 그런 거니까, 채널 바꾸면 돼.”
태수는 무심한 듯 말했지만, 모두는 감탄과 함께 손뼉을 쳤다. 그가 무엇을 했는지 정확히 아는 사람은 없었지만, 중요한 건 언제나 그가 해냈다는 것이었다. 그날 갑판 위로 불어온 알래스카의 바람은 여전히 매서웠지만, 그 바람을 뚫고 울려 퍼진 웃음은 더없이 따뜻하고 끈끈했다.
민수, ‘자기만의 타이밍’
민수는 언제나 조금 늦게, 남들과는 다른 리듬으로 대화를 살아낸다. 늘 그렇듯, 이야기의 중심이 한참을 흐르고 나서야 어딘가 어설프고도 순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하며 묻곤 한다. “어? 너희 중학교도 같이 다녔어?” 이번 크루즈 여행에서도 그런 민수의 타이밍은 어김없이 우리를 웃음 짓게 했다. 어느 맑은 오후, 유유히 항해하던 배 위의 점심 뷔페 테이블에서, 우리는 그 시절 학예회 얘기로 한껏 들떠 있었다. 각자 자신이 맡았던 역할, 선생님의 특이한 지도 방식, 객석에서 빵 터졌던 실수 하나까지, 기억 속 조각들이 넘실거리는 바다 위에 살포시 펼쳐지고 있었다.
그때 민수가 숟가락을 내려놓으며, 마치 다른 시간에서 막 건너온 사람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어? 우리 그때 학예회 했었어?” 순간 테이블 주변에 폭소가 터졌다. 어떤 이는 물을 뿜을 뻔했고, 또 다른 이는 웃다 말고 기침을 하며 등을 두드렸다. 누군가는 진지하게 말하듯 농담을 건넸다. “민수는 말이야, 자기가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하는 특별한 재능이 있어.” 모두 웃었지만, 그 말엔 어떤 부러움 같은 것도 섞여 있었다. 민수는 무심한 듯하지만, 그 무심함이 묘하게 따뜻하고 사람을 안심시키는 매력을 가지고 있다. 세상의 온갖 일들에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고, 오직 마음속에 남기고 싶은 장면들만 고르고 골라 간직하는 듯한, 그런 사람. 그래서일까. 그의 늦은 반응조차 어쩐지 정겹고, 또다시 우리를 미소 짓게 만든다….
만수, 약간은 4차원
초등학교 동창 모임의 초대 회장이자, 지금도 전설처럼 회자하는 인물, 만수. 그는 젊은 시절부터 뭔가 달랐다. 20대에 이미 자가용을 몰고 다니며, 산과 들을 누비던 사냥꾼처럼 총으로 꿩을 잡았고, 동네 골목에서는 야구방망이를 들고 고라니를 때려잡았다는, 지금은 믿기 힘든 이야기를 우리는 술잔을 기울이며 들려주곤 했다. 이번 크루즈 여행 중 어느 저녁, 태평양의 짙푸른 물결 위에서 노을이 번져가던 때, 만수는 문득 오래된 기억 하나를 꺼내 들었다.
“내가 그 시절 운동회 대표였잖아. 그런데 말이지, 운동복도 없이 달렸거든. 읍내학교 애들은 말이야, 단체로 운동복을 맞춰 입고 왔더라고.” 그의 말투는 언제나처럼 과장되었지만, 그 과장 속에는 오히려 진심과 낭만이 배어 있었다. 그 말을 듣고 있던 태수가, 특유의 능청스러운 말투로 옆에서 슬쩍 받아쳤다. “그래서 넌 출발 전에 이미 기에 눌렸지.” 순간 웃음이 터졌고, 만수는 머리를 쓰다듬으며 장난스럽게 소리쳤다. “그래도 내가 꼴등은 안 했다니까!” 그 순간, 우리가 모두 손뼉을 치며 환호했다. 그 말이 진실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그가 우리의 이야기를, 우리의 기억을 언제나 뜨겁고 유쾌하게 불러일으킨다는 사실이었다.
만수는 늘 그렇듯, 대화의 가장자리를 툭 건드려 불꽃을 튀기고, 그 불꽃이 이내 따뜻한 모닥불이 되어 모두를 끌어안게 만든다. 그의 4차원 같기도 하고, 엉뚱한 듯 진지한 그 성정은, 우리 사이에 언제나 활기를 불어넣는 가장 귀한 향신료 같은 존재다.
영수, 종수, 관수 – 만수의 연기 같은 단짝들
만수가 어딘가로 가기만 하면, 그 세 사람은 마치 사전에 약속이라도 한 듯, 언제나 그 곁에 딱 붙어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오래된 흑백영화 속의 장면처럼 익숙하고도 변함없었다.
배 위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무리는 언제나 이 삼총사였다. 갑판 한쪽에 마련된 흡연 구역에 서서 바닷바람에 휘날리는 담배 연기를 뿜어내는 모습도, 밤이 되면 만수가 “자, 오늘은 노래방 간다.!”라고 외치면 무조건 반사처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그들의 모습도, 모두 정해진 각본처럼 반복되었다.
셋은 다정했고, 동시에 어딘가 유쾌하게 덜 자란 소년들 같았다. 만수가 무언가를 시작하면, 종수는 웃으며 눈빛을 보내고, 관수는 그 분위기에 장난 섞인 몸짓으로 응답했다. 이렇게 세 사람은 꼭 연기처럼 스며드는 친구였다. 혼자선 가볍지만 셋이 모이면 어디서나 농담과 웃음이 피어나는, 마치 바닷가에 피어오르는 아침 안개처럼 일상 속에 자연스레 퍼지는 존재들이었다.
광수와 한수 – 투덜이 콤비, 그러나 누구보다 따뜻한 사람들
광수는 이번 여행의 총괄 회장답게 일정표를 들고 제일 먼저 일어났지만, 입에서는 항상 같은 말이 흘러나왔다.
“아휴, 난 한숨도 못 잤어.”
하지만 우린 다 안다. 전날 밤, 코를 골며 가장 먼저 잠든 이가 바로 그였다는 것을.
그 옆에는 언제나 한수가 있었다. 늘 고전적인 셔츠에 단정한 바지를 입고, 때때로 헝클어진 머리를 매만지며 조용히 웃는 사람. 고요하고 단정해 보이지만, 술이 몇 잔 들어가면 갑자기 마이크를 쥐고 나와, 진심 어린 창법으로 ‘잊혀진 계절’을 부르는 이중적인 매력의 소유자다.
광수와 한수는 마치 음과 양처럼 서로 다른 결을 가졌지만, 함께 있을 때 가장 자연스러웠다.
광수는 늘 피곤하다고 투덜거렸지만, 누구보다 먼저 자리를 정리했고, 다음 일정을 챙겼다. 그런 모습 속에는 말없이 감당해 온 책임감이 고스란히 배어 있었다. 우리는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었다. 광수의 그 투덜거림은, 사실은 누구보다 우리를 아끼는 방식이었다는 걸.
용수와 재수 – 민수의 기억을 지켜주는 든든한 그림자들
민수는 가끔 말을 하다 멈추고, 뭔가를 떠올리려 애쓰곤 했다. 그럴 때면 어김없이 옆에 있던 용수와 재수가 도와주었다.
“그때 너도 있었잖아. 우리가 같이 찍은 사진 있어. 봐봐.”
그들은 마치 민수의 외장 하드 같았다. 기억이 흐릿해질 때, 두 사람은 조용히 파일을 열어 보여주듯 이야기의 조각을 꺼내 들려줬다.
용수는 차분했고, 재수는 유쾌했다. 민수가 헷갈리는 기억에 머뭇거릴 때마다 한 명은 웃으며 설명했고, 다른 한 명은 휴대전화를 꺼내 사진을 보여줬다. 그들의 존재는 눈에 띄지 않았지만, 민수의 세계를 정돈해 주는 중요한 중심축이었다. 민수는 종종 말없이 그들을 바라봤다. 우리가 보지 못하는 깊이에서, 민수는 이미 오래전부터 그 두 사람에게 감사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혼자만의 세계, 영수
영수는 이번 여행에서도 변함없었다. 늘 조용했고, 말이 없었다.
함께 밥을 먹고, 함께 노래방에 가고, 함께 사진을 찍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항상 거리를 둔 채, 자신만의 세계 안에서 사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는 갑판 난간에 기대어 한참을 바다만 바라보았다. 그 눈길은 먼 곳을 향하고 있었고,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우리는 알지 못했다. 어느 날은 책을 펴고, 고요히 앉아 파도 소리와 어우러진 활자의 물결을 따라가기도 했다.
영수는 말이 없어서 신비로웠고, 신비로움 속에서 우리는 그를 이해하려 애쓰며 조금씩 다가섰다. 하지만 그는 언제나 일정한 거리에서 우리를 바라볼 뿐, 쉽게 다가오지 않았다.
그런데도, 우리는 영수가 있는 자리를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그의 고요는 우리 사이에 작은 쉼표가 되어주었고, 그 존재 자체가 어떤 위안이 되었다. 모두가 북적이는 공간 속에서도 한 사람쯤은 이렇게 조용히 자신의 방식으로 우리와 함께 있어야 한다는 걸, 우리는 은연중에 알고 있었다.
제7장 중학교, 자전거와 도시의 그림자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민수는 처음으로 자전거를 탔다.
아버지가 읍내 장터에서 중고로 사다 주신, 앞바퀴가 살짝 휘어진 자전거였다.
페달을 밟을 때마다 “삐걱삐걱” 소리가 나면서 마치 무슨 말을 하는 것 같았다.
“천천히 가라, 민수야… 나도 힘들다…”
그래도 민수는 그 자전거를 타고 매일 학교까지 열심히 달렸다.
흙먼지 날리는 시골길도, 비 오는 날 진창길도,
자전거와 민수는 한 몸이 되어 꿋꿋이 걸었다.
중학교는 읍내에 있었고, 세상도 조금 달라졌다.
학생 수는 부쩍 늘었고, 도시에서 전학 온 친구들은
말투도 빠르고 머리 스타일도 어딘가 ‘도시 냄새’가 났다.
처음엔 그런 친구들 앞에서 말도 제대로 못 꺼냈다.
“야, 너네는 ‘어데 가노’ 안 하고 ‘어디 가?’라고 하더라? 신기하데이…”
하지만 며칠 지나니 금세 친구가 되었고, 쉬는 시간마다 웃음꽃이 피었다.
그 무렵 민수는 개근상을 받았다.
감기몸살이 나도, 종이 울리면 어김없이 교실에 앉아 있었다.
“학교 안 가면 내가 교장 선생님이 될 수가 없으니까요!”
그 말에 담임선생님도 웃었고, 반 아이들도 손뼉을 쳐줬다.
줄넘기 대회 땐 반 대표로 나가기도 했다.
평소엔 좀처럼 튀지 않던 민수였지만,
그날만큼은 체육복 입고 앞머리 쫙 넘긴 채
“하나, 둘, 셋!” 줄을 넘으며 모두의 응원을 받았다.
그 순간, 민수는 진짜 ‘주인공’이었다.
“내가 오늘 교장 선생님보다 더 주목받는 것 같다카이.”
그 시절 민수의 꿈은, 단순하고도 진지했다.
“운동장에서 팔짱 끼고 걷다가, 종 치면 교탁 앞에 서서
‘학생 여러분, 오늘도 성실하게 살아야 합니다!’ 멋지게 말하는 그런 어른이 되고 싶었지.
왜냐면… 그게 멋져 보여서라기보다,
솔직히 매일 야단치는 선생님 중에 제일 덜 혼내는 사람이
교장 선생님이었거든. 그게 제일 부러웠던 거야.”
제8장 고등학교, 꿈과 첫사랑 사이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민수는 자전거 대신 시내버스를 타기 시작했다.
“학생, 뒷문 말고 앞문으로 타야지!”
버스 기사 아저씨의 큰소리에 놀라 뒷걸음질 치던 날도 있었다.
처음엔 버스 안에서 균형 잡기가 쉽지 않았다.
손잡이를 꼭 붙들고도 급커브마다 휘청, 급정거 때마다 “어이쿠!”
그럴 때면 민수는 머쓱하게 웃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기사 아저씨도 그를 알아보고 인사를 건넸다.
“민수야, 오늘도 일등승객이네~”
고등학교는 초등학교나 중학교와는 또 다른 세계였다.
교복을 입으면 어른이 된 듯 뿌듯했고,
가끔 책상에 엎드려 졸다가 창밖에서 불어오는 바람결에
‘내 인생에도 뭔가 대단한 일이 생기겠지’ 하고 막연한 상상을 하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봄날,
민수는 교내 방송반 여자 선배에게 첫눈에 반했다.
긴 머리를 하나로 질끈 묶고,
마이크 앞에서 “전교생 여러분, 지금부터 아침 조회를 시작하겠습니다”
라고 말하던 그 목소리는, 민수의 심장에 또렷하게 새겨졌다.
“선배, 그… 방송 잘 들었습니다.”
용기 내어 처음 말을 걸던 날,
입술이 바짝 말라 물을 먹고 나서도 침을 세 번이나 삼킨 후였다.
선배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고마워, 이름이 뭐라고?”
“민… 민수요. 1학년 3반입니다!”
그날 이후 민수는 자습 시간에도 괜히 방송실 근처를 어슬렁거렸고,
방송이 끝날 때마다 혼자 손뼉을 치기도 했다.
친구들이 놀리면 괜히 시큰둥한 척했지만,
속으로는 ‘이게 사랑인가?’ 싶었다.
“내가 나중에 교장 선생님이 되면… 그 선배한테 상장도 줄 수 있을까?”
물론 그 사랑은 소리 없이 끝났다.
선배는 어느 날 졸업했고, 민수는 멍하니 방송실 문을 한참 바라보다 돌아섰다.
그 후론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여자 DJ 목소리만 들어도
괜히 마음이 찡해지곤 했다.
그렇게 민수는
교장 선생님의 꿈은 접었지만,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어른이 되고 싶다는
조금은 더 근사한 꿈을 키워가기 시작했다.
“말 한마디, 눈빛 하나가 누군가의 하루를 살릴 수도 있다는 걸…
그 선배가 가르쳐줬지.”
제9장 입대 전날 밤, 혼자만의 통과의례
고등학교 졸업식 날, 민수는 교문을 나서며
하늘을 한 번, 운동장을 한 번, 교실 창문을 한 번 더 바라보았다.
‘내가 이 교복을 또 입을 날이 있을까… 없겠지.’
가슴 한쪽이 시원하면서도 뻐근했다.
친구들과의 기념사진 속 민수는 웃고 있었지만,
속으론 알 수 없는 허전함이 출렁였다.
시간은 빠르게 흘렀고,
그해 여름 민수에게도 초록 봉투 하나가 날아들었다.
“대한민국 육군훈련소 입영 통지서.”
우표 옆에 찍힌 관인 도장이 유난히 진하게 보였다.
그날 저녁, 민수는 국거리 대신 된장국에 밥을 비벼 먹으며
어머니에게 툭 던졌다.
“엄마, 나… 다음 달 입대야.”
어머니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셨고,
아버지는 숟가락을 내려놓고 한마디 하셨다.
“남자라면 다 다녀오는 거다. 겁낼 거 없다.”
민수는 입술을 다물었다.
겁이 나는 건 군대라기보다,
이제 진짜 어른이 되는 것 같아서였다.
입대 전날 밤, 민수는 방에 불을 끄고 이불 속에 누웠다.
낮엔 친구들과 마지막 당구도 치고,
사진관에서 머리도 짧게 잘랐고,
어머니가 싸주신 김밥에 사이다까지 곁들여 배불리 먹었지만,
막상 밤이 되니
가슴이 쿵쾅거렸다.
‘내가 잘 버틸 수 있을까?
총은 무겁지 않을까?
새벽에 얼차려 받으면 쓰러지진 않을까?’
이불 속에서 뒤척이다,
민수는 오래된 일기장을 꺼냈다.
고등학교 1학년, 첫 시험을 망친 날 썼던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
“언젠가 이날도 웃으며 말할 수 있는 날이 올 거야.”
그 문장을 읽고 나니
문득 마음이 조금은 편해졌다.
‘그래, 이 군대라는 것도 그냥 인생의 하나의 페이지겠지.
나중에 삼겹살에 소주 한 잔 걸치며
“야, 그땐 진짜 죽는 줄 알았다” 하며 웃게 될 날이 오겠지.’
그날 밤, 민수는 처음으로
아무 소리 없이 어른이 되어가고 있었다.
제10장 훈련소 첫날, 낯선 땅에 발을 딛는다
입대 당일 아침,
민수는 이른 새벽부터 눈을 떴다.
어머니가 새로 사주신 회색 운동화와
아버지가 손수 다려준 흰 셔츠,
가방 안엔 속옷 세 장과 세면도구,
그리고 어느 날 몰래 쓴 아버지의 짧은 메모 한 장.
“사람 많은 데선 눈치도 실력이다….
너무 튀지도 말고, 너무 쪼지도 말고.
다 지나간다….
아버지”
논산역에서 훈련소까지 이어지는 셔틀버스 안,
민수는 창밖만 바라보았다.
논밭 사이로 뿌연 안개가 깔려 있었고,
저 멀리 훈련소 입구엔
“충성! 신병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라는 현수막이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다.
버스에서 내리는 순간,
곧장 들이닥친 건
“신병들! 똑바로 서!”
라는 고함과 함께 시작된 군기.
사람은 많았고, 머리는 짧았고,
누가 누구인지도 모를 만큼 정신이 없었다.
민수는 자신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주변을 둘러보니
누군가는 이를 악물고 있었고,
누군가는 벌써 울먹이고 있었다.
그때, 옆에 서 있던 한 청년이 민수에게 말했다.
“야, 너도 겁나냐?”
민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 미치겠어. 나 진짜 게임을 하다가 바로 온 기분이야.”
그 말에 민수는 피식 웃었다.
“그래도 게임보다 원위치는 안 되겠네, 여긴.”
둘은 잠시 눈을 마주 보다,
작게 웃었다.
그 청년의 이름은 병우다.
말수가 적지만 눈빛이 따뜻했고,
훈련소 생활이 이어지는 동안
그는 민수의 가장 든든한 ‘전우’가 되어주었다.
저녁 점호 시간,
지친 몸으로 무릎 꿇고 앉아 있던 민수는
문득 하늘을 올려다봤다.
전깃줄 사이로 걸려 있던 별 하나,
어디선가 들려오는 귀뚜라미 소리,
그리고 저 멀리 고향 집에서 울었을지도 모를
어머니의 기침 소리 같은 환청.
‘여기도…. 하루는 가는구나.’
그날 밤, 민수는 처음으로
철제 침대 위, 얇은 담요 속에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몸은 고단했지만,
어쩌면… 마음은 조금 더 단단해지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제11장 자대 배치, 생존의 첫 관문
훈련소 수료식을 마치고
민수는 '어디로 보내질까?' 하는 복불복의 긴장 속에서
자대 배치를 받았다.
"육군 제xx 사단, 백마부대 보병대대!"
민수의 이름이 불리자
옆에 있던 태식이 귓속말을 했다.
"야, 백마면 좀 힘들다는데…?"
민수는 애써 웃으며 말했다.
"뭐, 말 타고 출근하진 않겠지."
둘은 그렇게 어깨를 두드려주며 헤어졌다.
트럭에 실려 부대 정문에 도착했을 때,
민수는 전쟁영화 한 장면에 들어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회색빛 철조망, 군용 텐트 같은 생활관,
그리고 거기서 다가오는 누군가의 구두 소리.
“어이, 신병! 넌 이름이 뭐냐?”
말끔한 군복을 입은 상병 하나가
군기 충만한 얼굴로 다가왔다.
“이, 이민수입니다!”
“이민수. 오케이, 민수야. 오늘부터 넌 내 새끼다.”
그의 미소는 다정했지만,
민수는 직감했다.
이 말의 뜻은
‘오늘부터 제대로 군대란 걸 보여주겠다’라는 거라는 걸.
그날 저녁, 민수는
선임들이 다 마신 라면 국물 그릇을 치우고 있었고,
누가 숟가락을 놓치는 소리에도 자동 반사처럼 움직여야 했다.
군대란,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움직여야 살아남는 곳”이라는 걸
첫날부터 체감했다.
밤 10시.
자기 전 줄을 서서 위병소 당직자에게 인사하며 돌아오던 중,
민수는 한 선임의 샤워 수건을 밟고 말았다.
“야, 신병! 수건 밟으면 안 배웠냐?”
목소리는 칼날 같았고,
민수는 그날 밤 내내
행보관 몰래 화장실 청소를 하며 벌을 받았다.
기분은 서럽고,
눈물은 나지 않았지만
마음은 꾹꾹 눌러앉은 먼지처럼 무거웠다.
그러나,
그날 밤, 누군가 몰래 건넨 초코파이 하나.
“야, 신병. 그거 힘들 때 하나 먹어.
근데 절대 선임들 앞에선 까지 마라. 쓸데없이 정 들까 봐.”
그건 병장 윤배였다.
거칠지만, 따뜻한 선임이었다.
또 하나의 위로는
같은 날 들어온 동기, 태호였다.
“야, 우리… 전우 맞지?”
둘은 하루하루를 함께 견뎠고,
서로의 표정만 봐도
‘지금 누가 또 까였는지’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로
서로에게 익숙해졌다.
그렇게,
기합 속에서 시작된 관계가
밤마다 속닥속닥
“니 고향은 어디고?”
“나, 시골 논두렁 건너다녀서 발이 이 모양이다.”
“에이, 나는 도시인데…. 인생이 시골이다.”
웃기고도 슬픈 대화 끝에
작은 전우애로 꽃피어가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인정' 받던 날
그날은 유난히 추웠다.
훈련장은 진흙탕이었고,
모두가 군장에 젖은 채 훈련소보다도 빡빡한 ‘유격 훈련’을 받고 있었다.
“이번엔 철봉 구간이다! 못 넘으면 다시 한다.!”
조교의 외침에 모두 숨을 몰아쉬었다.
민수는 이미 팔이 후들거리고,
손바닥에 물집이 터져 흙이 스며들었다.
동기 형구가 넘어지며 허리를 다쳤고,
누군가는 구토하며 구석에 앉아 있었다.
선임들은 그런 그들을 무표정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이건 전투가 아니라 생존이다.
살고 싶으면 일어서.”
민수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딴 게 무슨 생존이야. 이건 그냥, 견디는 거지.’
그러나 그 순간,
민수의 눈에 들어온 건
고꾸라진 태호의 군장을 들고
힘겹게 따라오는 그의 모습이었다.
민수는 고민하지 않았다.
태호의 군장을 자신의 등에 함께 메고,
입술을 질끈 깨물며 걸었다.
“야, 이민수! 너 뭐하냐, 지금?”
조교가 소리쳤지만,
민수는 돌아보지 않았다.
그저 한 걸음, 또 한 걸음.
진창 위를 기어가며 태호를 끌어냈다.
그날 저녁,
생활관에서 선임 윤배가 다가왔다.
“야, 이민수.”
“네, 병장님.”
“너… 오늘 잘했더라. 진짜 군대에 어울리는 놈은
몸 좋은 놈이 아니라
옆 사람 안 버리는 놈이야.”
말없이 민수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고
그는 돌아섰다.
그날 이후,
민수는 선임들 사이에서 '사람 구실 하는 신병'이 되었고,
동기들 사이에선 ‘믿을 놈’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한밤중,
태호가 조심스레 민수에게 말했다.
“야… 오늘, 진짜 고마웠다.
나 진짜 혼자였으면… 무서웠을 거야.”
민수는 웃으며 말했다.
“야, 우리가 감방은 아니지만,
진짜 의리는 여기서 배운다.”
둘은 눈을 맞추고
말없이 손을 맞잡았다.
그 손은
흙투성이였지만
그 속엔 서로를 지탱할 힘이 담겨 있었다.
그 밤, 태호가 잠든 날
그날은 구름이 짙고, 달빛마저 숨은 밤이었다.
민수와 태호은 ‘1초소’ 야간 경계근무를 함께 서게 되었다.
초소 안은 차가웠고, 군복 사이로 바람이 스며들었다.
“야… 민수야, 이게 진짜 사람 사는 데가 맞냐?”
태호은 웃으며 중얼거렸다.
“말 붙이지 마라. 졸리려 하네.”
민수는 멍하니 초소 바깥을 바라보며 총을 꼭 쥐고 있었다.
30분쯤 지났을까.
잠깐 눈을 깜빡였는데,
옆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쿨… 쿨…”
태호었다.
“야, 야, 태호아!”
민수가 급히 흔들었지만
태호은 턱 끝까지 파카를 당긴 채 꿈나라에 가 있었다.
그 순간,
무전기가 울렸다.
“1초소 응답 바람. 이상 없음 확인.”
민수는 다급히 응답했지만,
이미 위병소 근무자가 ‘카메라 확인’을 했다는 건
다음 날 아침에야 알았다.
결과는 ‘소대 전체 기합.’
모든 동기가 기마자세로 주차장 한복판에 앉았다.
“한 놈이 졸았다고? 그래, 다 졸았다고 생각해라.
군대는, 네 잘못이 내 잘못되는 곳이니까.”
기합은 고통보다 서러움이었다.
누구도 태호을 원망하지 않았지만
태호은 울먹이며 말했다.
“내가… 진짜 미안하다.
나 때문에… 너희가…”
그 순간 민수가 말했다.
“야, 기합보다 무서운 건
우리 중 하나가 마음 접는 거다.
우리는, 한 조각 빠져도 무너진다.”
현구가 받아쳤다.
“야, 태호도 인간이네.
기계도 방전되면 꺼진다. 우리 다 졸았잖아, 솔직히.”
그러자 현구가 웃으며 말했다.
“야, 그럼 우리 단체로 졸다가 단체로 전역하자.”
모두가 그 말에 픽 웃었고,
기합 도중 터진 그 웃음은
이상하게 마음을 데워주었다.
그날 저녁,
생활관에선 라면이 끓고 있었다.
누군가 몰래 가져온 라면 10개를
하나의 양은냄비에 몰아넣고,
둘러앉아 먹었다.
“야, 이거 뭔 줄 아나? 단체라면 벌칙이다.”
형구가 말하자,
태식이 웃으며 대답했다.
“내 실수 벌로 끓인 거니까
내가 먼저 한 젓가락 한다.”
그리고 나눠 먹은 그 라면은
어쩌면 군 생활 내내 가장 맛있었던
‘인간 냄새나는’ 한 끼였다.
고된 훈련에 쩔쩔매던 날, 야간 경계근무 도중 잠든 태식이 걸려 모두 기합받던 날,
점호 시간 몰래 라면 끓여 먹다가 선임에게 걸려 ‘단체라면 벌칙’ 받던 일까지…
희로애락, 그 시절의 모든 감정이
그 밤, 다시 살아났다.
제12장 상처와 회복, 동기 애의 깊이
민수는 조용히 한 모금을 들이켜고 입을 열었다.
“그땐…. 진짜로 서로가 없었으면 못 버텼을 거야. 솔직히 나, 자대 처음 갔을 때 진짜 무서웠거든.”
현구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나도 매일 밤 눈물 찔끔찔끔 흘렸어. 근데… 옆에 너희가 있었지.
밤마다 서로 어깨 대고 속마음 털어놓던 거, 그게 살길이었어.”
상호가 웃으며 말했다.
“야, 그러고 보면 우리는…. 감방에서 만난 건 아닌데, 전우는 맞는 거네?”
그들 모두가 웃었고, 웃다 울었다.
시간은 흘러도 우정은 남아
“우리, 왜 이렇게 오래 안 만났지?”
창수의 말에 민수가 대답했다.
“다들 바빴지. 인생에 치이고, 현실에 치이고… 그래도 이렇게 모였잖아. 지금, 이 순간이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
준식이가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단톡방 다시 살리자. 이제는 정기적으로 보자. 안 그러면 또 10년 훅 간다.”
창수가 마무리하며 잔을 들었다.
“이 잔은, 우리가 ‘살아있다’라는 것에! 그리고 살아남아 다시 만났다는 것에!”
제13장 시골의 아침은 닭이 먼저 안다….
민수는 라스베이거스 숙소의 커튼을 걷고 햇살을 바라보며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이 햇빛이. 고향 논둑길에도 비치던 햇살이었는데.”
머릿속에 떠오른 건 1960년대 초,
경상도의 한 시골 마을,
흙벽돌로 지은 초가집, 마당에 깔린 동그란 멍석,
그리고 아침마다 울어대던 수탉 소리였다.
“꼬끼오 오오—”
닭이 울면, 어김없이 어머니는
“민수야, 일어나야지. 학교 가야지잉—”
하고 이불을 걷었다.
겨울이면 군불 들어온 방구들에서 이불 밖으로 나가는 게 세상에서 제일 힘든 일이었고,
여름이면 모기장을 걷으며 땀범벅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학교 가는 길은 늘 모험이었다.
비 오면 진창에 신발이 빠지고,
개울가 징검다리를 건널 땐
넘어져 옷 다 젖히고… 그래도 웃으며 갔다.
왜냐면, “지각하면 회초리”였기 때문이다.
흑백 교실의 웃음소리
시골 초등학교는
교실보다 운동장이 더 컸고,
칠판보다 창밖 풍경이 더 신났다.
“야, 너 분필 좀 줘봐라.”
분필이 없어 연탄재를 갈아 글씨 쓰던 시절,
빨간 펜은 선생님만 쓸 수 있었고
잘못하면 귀를 ‘쭉’ 잡고 벌서는 게 일상이었다.
그러나,
소풍날만큼은 모두가 주인공이었다.
양은도시에 찬 김밥, 삶은 달걀, 사이다 한 병이면
온종일 뛰놀 수 있었다.
“민수야, 너 김밥에 소시지 들었나?”
“무라. 우리 엄마가 특별히 싸주셨다가 아이가.”
그 시절엔
별것 아닌 것에 기뻐하고,
작은 일에도 감동했다.
그래서 더 오래 기억에 남는 건지도 몰랐다.
중학교, 자전거와 도시의 그림자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민수는 처음으로 자전거를 탔다.
“삐걱삐걱” 소리가 났지만,
바퀴 하나로 세상을 달릴 수 있다는 게
기적처럼 느껴졌다.
중학교는 읍내에 있었고,
학생 수는 갑자기 많아졌으며
도시에서 전학 온 친구들 말투는 어딘지 세련돼 보였다.
그래도 민수는 ‘개근상’도 받았고,
줄넘기 대회에서는 반 대표로 출전도 했었다.
“그때만 해도 내 꿈은 교장 선생님 되는 거였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