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년 4월 28일(화) 히브리서 2:5-18 찬송 337장
5 하나님이 우리가 말하는 바 장차 올 세상을 천사들에게 복종하게 하심이 아니니라
6 그러나 누구인가가 어디에서 증언하여 이르되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7 그를 잠시 동안 천사보다 못하게 하시며 영광과 존귀로 관을 씌우시며
8 만물을 그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셨느니라 하였으니 만물로 그에게 복종하게 하셨은즉
복종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어야 하겠으나 지금 우리가 만물이 아직 그에게
복종하고 있는 것을 보지 못하고
9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시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10 그러므로 만물이 그를 위하고 또한 그로 말미암은 이가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하심이
합당하도다
11 거룩하게 하시는 이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한 근원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12 이르시되 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고 내가 주를 교회 중에서
찬송하리라 하셨으며
13 또 다시 내가 그를 의지하리라 하시고 또 다시 볼지어다 나와 및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자녀라 하셨으니
14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15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16 이는 확실히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17 그러므로 그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속량하려 하심이라
18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
(개역 개정)
- 그리스도의 한시적 비하와 그 의미 -
그리스도가 천사보다 우월하시다는 논증이 기록된 1:4-2:18의 일련 기사 가운데
하나의 삽화처럼 천사보다 탁월하신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지는
구원을 가볍게 여기지 말라는 경고의 말씀이 어제 말씀(1-4절)에 삽입되어 있고,
이제 오늘 말씀에서는 다시 1:4-14의 천사보다 우월하신
그리스도라는 본래의 내용으로 돌아간다.
즉 저자는 1장에서는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과 동등한 권세와
능력과 지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천사보다 우월하다고 논증한 반면,
본문에서는 그 아들이 인간의 비천한 형제를 입고 오셨음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죄의 노예 상태에 있는 인간들을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그들에게 생명과 영광과 충만을 주시기 위함이지,
결코 영원히 자기를 비하(卑下)시켜 낮은 자리에 있기 위함이 아니다.
따라서 저자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하는
이 땅에서의 사역을 완성하면 승리의 주로서 다시 본래의 신적 지위를
회복하여 천사보다 우월한 지위에 있으리라는 것을 논증한다.
그리고 저자는 또한 이것을 논증하면서 인간을 대표해서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는 앞으로 언급될 대제사장으로서의 직무를 감당할 기초를
완전히 닦아 놓으셨다는 것을 독자들에게 암시시켜 놓고 있다.
한편 저자가 이처럼 그리스도가 성육신하시고 고난받으시고 죽으신 것은
자기 백성의 구원을 위한 목적을 지닌다는 것과 시간적으로도 한시적 비하이며
영원한 비하가 아니라는 것을 논증하는 것은 당시 유대인들이 성육신하신
그리스도는 비천한 인간의 몸을 입고 있었으므로 천사보다 못한 존재이거나,
못한 존재가 되었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그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함이었다.
그리스도는 본질상 하나님과 동등한 분으로서(빌2:6) 그 어떤 피조물과도
감히 비교할 수 없는 가장 높으시고 위대하시며 영광된 분이시다.
그러나 그는 죄를 지음으로 사망 가운데서 헤어나지 못해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긍휼히 여기사 다시 살리시기 위해 자기의 높으심과 위대함과 영광을
버리시고 비천한 우리의 형체를 입고 오셔서(빌2:7) 우리가 받아야 할 고난과
질고를 대신 받으시고(사53:1-6) 친히 체휼하셨으며(히4:15) 끝내는 우리의
생명을 위하여 자기 생명을 화목 제물로 바치셨다.(롬3:25; 5:10; 빌2:8; 요일2:2; 4:10)
따라서 그리스도의 자기 비하는 우리에게 생명과 영광을 주시기 위한 것이므로
우리는 본문에 나오는 어떤 유대인들처럼
그것을 그리스도를 믿지 아니하는 논거로 삼아서는 안된다.
오히려 감사의 근거로 삼아 하나님이시면서도 우리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스스로 낮아지신 그리스도를 항상 묵상하면서 감사하고,
또 그 감사에 부응하여 우리도 다른 이들에게 조그마한 일에서부터
희생하고 양보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빌2:3; 골1:12)
15절)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15절 말씀에서 불신자들이 가지고 있는 특성을 알 수 있다.
불신자들에 대해 어떻게 묘사하고 있는가?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 노릇하는 모든 자들’이라고 한다.
곧 주님을 믿지 않는 자들은 죽음을 두려워한 나머지
죽음의 노예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 살면서 내가 사랑하며 살던 것을 두고
떠나야 하는 심정은 누구에게나 힘든 것이다.
또 세네카의 서간집에 쓰여 있듯이 ‘죽음이 어느 장소에서 그대를 기다리고 있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 두려움은 더한 것이다.
죽음의 파괴성과 의외성, 그리고 사후 세계의 미지성 때문에 인간은 죽음을 두려워한다.
톨스토이는 사후 세계의 미지성에 대해
‘죽고 나서 어떻게 되는가를 알 수 있다면 우리들은 단 한 사람이라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이렇듯 사후의 세계에 대해 모르는 인간이
죽음 앞에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는 한 심리학자(엘리자베스 큐블로 로스)의 임상 기록에서도 증거되는 사실이다.
그녀가 사형 선고를 받은 환자들을 인터뷰한 기록에 따르면,
죽음을 받아들이는데 대체로 다섯 단계의 과정을 거친다고 한다.
그 첫 번째가 ‘내겐 일어날 수 없는 일다’라고 완강히 ‘부정’하는 것이며,
두 번째가 ‘하필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났느냐’라고 반문하는 강한 ‘분노’이며
세 번째는 ‘산다면 어떻게 어떻게 하겠다’라고 ‘협상’하는 것이며
네 번째는 ‘더 이상 부정할 수 없음’을 알고 깊은 ‘우울함’에 빠지는 것이며,
마지막으로는 조용히 죽음을 기다리는 체념과 같은 ‘수용’이라고 한다.
이를 종합하면, 인간은 죽음을 받아들이되
아주 고통스럽게 받아들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인간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려고 갖가지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고대 이집트의 피라미드가 왜 생겼는가?
왜 진시황제는 불로초를 찾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는가?
요즘 사람들에게 건강에 대한 문제가 왜 그렇게 큰 관심거리가 되었는가?
또 인간 유전자 지도를 만든 이유가 무엇인가?
이것이 다 죽음과 사후 세계에 대한 나름의 대비책을 세우려는 노력이다.
이러한 인간의 노력은 ‘좀더 오래 건강히 사는 것이 행복한 것이다’라는 생각에서
기인된 것인데, 이 슬로건 이면에는 ‘죽는 것은 불행한 것’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이를 통해 재차 수긍할 수밖에 없는 사실은
지금도 인간은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인간의 노력이 죽음에 대해 충분한 해결책이 되는가?
절대 그렇지 않다.
의학 기술이 제아무리 발달하고, 아무리 세심한 주의 속에 건강을 돌본다 해도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히9:27)이란 말씀은 변합없는 진리이다.
따라서 그들의 노력은 허사일 뿐이다.
그러면 죽음과 사후 세계에 대한 해결책이 전혀 없는가? 그렇지 않다.
이 문제에 대한 가장 현명하고 확실한 방법이 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죽음의 파괴성, 의외성, 그리고 사후의 미지성에서 탈피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을 정복하셨고
그로 말미암아 그를 믿는 자에게 부활과 영생을 허락하셨기 때문이다.
죽음은 사람들에게 공포와 억압의 사신이지만
주를 믿는 우리에게는 더 이상 공포의 대상이 아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죽음은 잠시 후에 깰 잠과 같으며
이 땅의 모든 고통의 짐을 벗고 영원한 생명과 안식으로 들어가는 과정일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음 앞에서 소망없는 불신자들과 같이 두려워하며 떨 것이 아니라
영생의 소망 가운데에서 죽음마저도 기쁨으로 맞이할 수 있어야 한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은 것도 유익함이라」
(빌1: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