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열의 물방울은 누게 눈물이렌?
작성/ 도슨트 이상현
삼춘돌! 서귀포시 한경면 저지리 가민 하영 특별헌 미술관 하나 이수다. 바로 김창열미술관이우다. 제주도에서 지어신디 제주도가 운영허는 도립미술관이우다.
경혼디 한번 생각해 봅서게.
세계적으로 소문다난 화가의 미술관이민 서울에 이서도 될 것이고, 파리에 이서도 될 것인디, 무사 제주에 이신고마씸?
그 답은 김창열 선생의 젊은 시절로 돌아가 봐야 알 수 이수다.
김창열은 평안남도 맹산에서 태어난 사람이우다. 해방 후 열일곱 솔 때 남쪽으로 내려완 마씸. 그로후제 서북청년회에 들어강 합숙 생활을 1년간 허영, 경찰이 되엉 1951년에 제주로 부임호게 되어수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서북경찰이엇수다.
그 시절 제주에는 4·3의 토벌작전이 계속 이어지고 이서수다. 1951년 경찰은 56여명의 무장대원를 사살했다고 발표해서 마심.
김창열은 훗날 그때 일을 침묵으로 일관허멍 말하길 "나는 너무도 많은 주검과 비참한 꼴을 보았소"라고 회고하는 말을 남겼수다.
우리덜은 그 양반이 제주에서 정확허게 무슨 일을 허고 무슨 것을 보앗는지 알지 못헙주. 하난 제주에서 겪은 일이 그 양반 가심에 깊은 상처로 냉겨졌다는 것은 알 수 이수다.
그 양반은 예순이 넘어서도 그 기억을 빗데어 마치 "맹수한테 물어뜯기는 것"추룩 속이 아프다고 허엿수다.
경찰을 그만둔 후 김창열은 화가의 길을 걸어 갑주게.
처음에는 자기 안의 불안과 고통을 거칠곡 어두운 추상화로 표현허엿수다.
그러당 프랑스로 건너강 그림을 그리던 어느 날 새벽 , 세수를 하다 캔버스에 맺힌 물방울을 보는 순간"유레카"라고 외울럿주마씸.
그 물방울이 어떵 보엿을까마씸?
아마도 누겐가의 눈물로 보엿을 것이우다.
제주에서 4 3 때 보앗던 누겐가의 눈물일 수도 잇고, 이녁이 그때 흘린 눈물일 수도 이수다.
김창열은 몸소 이렇게 말헌 일이 이수다
"물방울들이 눈물처럼 보이기도 하오."
게난 많은 사람들은 김창열의 물방울을 단순헌 물방울이 아니라 피눈물로 읽어부는 것이우다.
1972년 처음 물방울을 그린 뒤로, 그는 이승을 허직하는 날 까정 평생 물방울만 그려수다.지워지지 않는 아픈 상처가 자꾸 살아나민, 그 아픔을 이져불쿠정 붓을 들엇주 마씸.
그 양반은 수행허듯 그림을 그려수다.
"나는 스님이 염불 외우듯 물방울을 그리오'
세월이 흘러가면서 김창열은 세계적인 거장이 되어서예.
경헤도 가심속에는 제주도에서 겪은 일이 미음의 빚으로 계속 남아있어주 마씸 . 이 마음의 빚을 갚기 위호영 자기 대표작 220여 점을 제주도에 기증허였다고 생각되어 마씸.기증헌 것을 돈으로 계산하민 200억원이 넘어마씸.
게난에 2016년 이곳에 김창열미술관이 문을 열엇수다.
근디 미술관 중정에는〈3신〉 이라는 설치작품이 이수다. 화백께서 몸소 맹근 것이우다.
자갈 깔린 물통 가운데 큰 엉장 돌 하나 놓여 있곡 그 우에 물방울 세 개가 자리 잡고 이수다.
처음 보민 보통의 설치 작품 같주만, 촌촌히 베려밤시민 마치 굿당의 제단인 것추룩 보이기도 허곡 제삿상 인것 추룩 보여져마씸.
그 제단은 참말로 누겔 위호영 멘들아 신고예.
정답은 여러분에게 있어 마씸.
김창열은 끝내 설명허지 않앗수다마는 제가 이 작품을 볼 적마다 제주4·3 희생자들과, 김창열의 기억 속에서 평생 떠나지 못헌 이름 없는 영혼들을 떠올리게 됩주게. 그 양반은 이 작품을 멩글면서 그들을 기억했는지도 모릅주게.
물론 요건 제 해석일 뿐이우다.
하난 김화가가 이추룩 헌 말이 이서 마씸. "그림을 그리는 것은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의 영혼을 위로하는 살풀이 내지 진혼곡이우다."
삼춘덜도 김창열의 물방울 그림을 보신 적이 이실 것이고, 훗날에 보게 될 날도 이시거우다.그때랑 한번쯤 속음으로 물오봅서.
"김창열은 평생 누게를 기억허멍 이 물방울을 그렸을까?"
나는 김창열의 물방울을 볼 적마다, 서북경찰로 제주에 와부난 생긴 마음창을 안곡 수십만개의 물방울을 그려내몽 한 평생을 진주조개처럼 살아내신 위대한 예술혼을 가슴속이 는착헐정도로 느껴져마씸.
들어줭 고맙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