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베트 불교의 두드러진 상징인 만트라(呪文,眞言) ‘옴 마니 반메 훔’에 대한 해설을 보자. 티베트 사람들에게 아주 큰 의미를 갖고 있는 이 만트라는 고원 어디든 없는 곳이 없다. 기도 깃발, 길가에 놓인 글을 새긴 마니 돌, 산비탈에 서 있는 비석, 바람에 팔락이는 종이 조각들, 가정이나 승원 입구에서 올리는 기원, 순례자들이 염주를 돌리며 외는 지칠 줄 모르는 염송, 아이들이 처음으로 떠듬거리는 말······. 온 티베트가 한 세기에서, 한 시대에서, 한 생에서 그 다음 세기, 시대, 생으로 이어가며 이 유구한 주문으로 자신을 확인한다. 일반적인 번역은 ‘연꽃 속의 보석을 보라’라는 간단한 말이다. 삶의 상징이요 하나의 존재 방식이 된 이 주문은 스승에서 스승에게 이어지면서 수세기에 걸쳐 수천 가지 주석과 해석을 낳았다. 달라이 라마는 그 분분한 설명을 더할 수 없이 완벽하게 요약한다.
만트라 ‘옴 마니 반메 훔’을 외는 것은 좋지만, 그것을 욀 때는 그 의미도 함께 생각해야 합니다. 이 육자진언이 아우르고 있는 뜻은 매우 넓고 지극히 깊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 음절 ‘옴’은 세 개의 자모 A · U · M이 결합된 것입니다. 이 낱자들은 수행하는 불자의 몸과 말고 마음 (身 口 意)을 상징합니다. 그와 동시에 그것들은 붓다의 청정하고 거룩한 몸과 말과 마음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부정한 몸 · 말 · 마음이 청정한 몸 · 말 · 마음으로 변화될 수 있는가? 아니면 이 두 가지는 완전히 별개인가? 모든 붓다는 원래 우리와 같은, 도를 따름으로써 깨달음을 얻은 존재들입니다. 불교는 애초부터 결함이 없고 모든 좋은 자질을 구유한 사람이 있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청정한 몸과 마음은 부정한 상태를 여의는 것으로부터 점진적으로 계발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청정한 상태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떻게 이룰 수 있는가? 그 길은 그 다음 네 음절로 제시됩니다.
보석을 뜻하는 ‘마니’는 방편의 요소들, 곧 이타적인 목적으로 깨달음을 얻으려는 의지와 자비와 사랑을 상징합니다. 보석이 가난을 몰아낼 수 있듯, 깨달음을 이루여는 이타적 의지는 윤회와 혼자만의 평온(solitary peace)이라는 빈곤을 없이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보석이 유정들의 욕망을 채워주든 깨달음을 얻으려는 이타적 의지는 중생의 소원을 이루어줍니다.
연꽃을 뜻하는 ‘반메’는 지혜(般若)를 상징합니다. 연꽃이 흙탕에서 나오면서도 더러워지지 않듯이 지혜는 여러분을 모순이 없는(不二)상태로 이끌어 주는 반면, 지혜를 갖추지 못하면 모순에 떨어집니다. 지혜에는 영원함이 없음을 깨닫는 지혜, 실체 혹은 자성自性을 갖춘 존재가 없음을 깨닫는 지혜, 주관과 객관은 본질이 다르다는 이원론의 공허함을 깨닫는 지혜가 있습니다. 비록 여러 가지 지혜가 있지만, 그 중에 으뜸은 공성空性을 깨닫는 지혜입니다.
청정한 상태는 방편과 지혜의 불가분한 통일을 통해 얻을 수 있는데, 마지막 한 음절 ‘훔’은 이 불가분성을 나타냅니다. 수트라(經) 체제에서는, 방편과 지혜의 불가분성이란 지혜가 방편에 영향을 미치고 방편이 지혜에 영향을 미침을 가리킵니다. 만트라송(眞言乘) 혹은 탄트라승(密乘)에서는, 그것이 지혜와 방편 둘 다의 총체적 형태가 아무런 차별 없이 하나가 된 의식意識을 가리킵니다. 다섯 승리자 붓다(五方勝佛)의 종자음種子音으로 보면, 훔은 아크쇼비야(阿閦佛-흔들 수 없는 자, 곧 불가변자, 무동자無動者)의 종자음입니다.
따라서 여섯 음절 ‘옴 마니 반메 훔’은 여러분이 방편과 지혜의 불가분한 결합인 도를 수행해 여러분의 부정한 몸 · 말 · 마음을 붓다의 청정하고 거룩한 몸 · 말 · 마음으로 바꿀 수 있음을 나타냅니다. 불성은 자기 밖에서 찾을 수 없다고 합니다. 그것을 이루는 재료는 내부에 있습니다. 마이트레야는 자신의 경 『커다란 수레의 장엄한 연속체』(大乘莊嚴經論, 우타라탄트라)에서 모든 중생은 자신의 연속체 속에 원래부터 불성을 갖추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우리 내부의 청정한 씨앗, 불성으로 바꾸고 완전히 계발해야 할 여래(깨달음)의 본성, 곧 타타가타가르바(如來藏)를 갖추고 있습니다.
-달라이라마 평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