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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장. 핵폐기물 ㅡ'화장실 없는 아파트'
― 전기를 생산한 뒤에 핵폐기물의 책임이 시작된다
이정윤 (원자력안전과미래 대표)
대부분의 산업은 제품을 생산하고 판매하면 생산자의 역할이 상당 부분 끝난다. 발전산업도 석탄이나 가스를 태워 전기를 만들고 나면 발전소의 운영과 환경오염을 관리하는 문제가 주로 남는다.
그러나 원자력은 다르다. 원자로에서 전기를 생산하는 순간부터 방사성폐기물이 만들어지고, 그중 일부는 발전소의 수명보다 훨씬 긴 시간 동안 인간과 환경으로부터 격리해야 한다. 따라서 핵폐기물은 원자력산업의 '뒷처리'가 아니다. 오히려 원전을 시작하는 순간 국가가 함께 떠안는 장기적인 의무다.
문제는 시간의 비대칭성이다. 원전 한 기의 운전기간은 수십 년이다. 발전소를 건설한 기업도, 운영하는 회사도, 규제기관도 언젠가는 조직이 바뀌거나 사라질 수 있다. 원전에서 생산된 전기도 생산되는 순간 소비된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발생한 사용후핵연료와 고준위방사성폐기물은 그보다 훨씬 긴 시간 동안 관리되어야 한다.
IAEA도 방사성폐기물 관리의 최종단계를 단순한 저장(storage)이 아니라 적절한 공학적·자연적 다중방벽을 이용한 처분(disposal)으로 보고 있다. 특히 사용후핵연료와 고준위폐기물의 최종처분은 세계 방사성폐기물 관리에서 가장 어려운 과제로 남아 있다.1
한국의 사정은 더욱 절박하다. 원전은 이미 수십 년 동안 가동해 왔고 사용후핵연료는 계속 발생하고 있지만, 최종 처분할 장소는 아직 정하지 못했다. 원전 부지의 저장공간이 부족해지자 건식저장을 확대해야 한다는 압박은 커지고 있고, 한편에서는 영구처분장 부지 선정에 앞서 연구용 지하연구시설(URL·Underground Research Laboratory)을 건설하는 정책도 추진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반드시 물어야 할 질문이 있다. 우리는 폐기물을 만들어내는 기술뿐 아니라 그것을 마지막까지 책임질 기술·제도·비용까지 준비하고 원전을 확대하고 있는가?
이 질문을 생각해 보기 위해 멀리 갈 필요도 없다. 우리에게는 이미 하나의 중요한 경험이 있다. 경주의 중·저준위방사성폐기물 처분장이다.
1절. 경주 방폐장이 우리에게 남긴 교훈
― 처분장은 땅속에 시설을 짓는 토목공사가 아니다
1. 처분장 하나를 정하는 데만 20년이 걸렸다
한국은 1978년 고리 1호기를 상업운전하기 시작했지만 방사성폐기물을 처분할 장소는 없었다. 원전에서 발생하는 중·저준위폐기물은 각 발전소에 쌓아두었다.
정부가 본격적으로 처분시설 부지 확보에 나선 것은 1980년대 중반이었다.2 이후 여러 지역에서 후보지 선정이 추진됐지만 번번이 무산됐고, 결국 2005년 주민투표를 거쳐 경주시가 부지로 선정됐다. 사업을 시작한 지 약 20년 만이었다.
여기서부터 중요한 교훈이 시작된다. 한국이 어렵게 확보한 첫 처분장은 사용후핵연료나 고준위방사성폐기물을 묻는 시설이 아니다. 작업복, 장갑, 필터, 폐수지, 오염된 기기 등 상대적으로 방사능 준위가 낮은 중·저준위폐기물을 처분하는 시설이다. 그런 중·저준위폐기물 처분장 하나의 부지를 확보하는 데에도 약 20년이 걸렸다.
그렇다면 수십만 년 이상의 장기 안전성을 논해야 하는 고준위방사성폐기물 처분장은 어떨까. 경주 방폐장은 이 질문에 대한 일종의 예고편이었다.
2. 땅을 파보니 예상보다 문제가 복잡했다
경주 방폐장 1단계 시설은 지하에 여섯 개의 대형 사일로를 건설하여 약 10만 드럼을 처분하도록 설계됐다. 사일로는 해수면 기준 약 80~130m 아래에 위치한다. 2008년 건설이 시작됐으며 운영 승인은 2014년 말에 이루어졌다.
그러나 건설과정에서 지역사회가 가장 크게 문제를 제기한 것이 암반과 지하수였다. 2014년 안전성 공개토론회에서는 차수공사를 했음에도 하루 약 1,300톤의 지하수가 배수되고 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이를 장기안전성의 문제로 볼 것인지 관리 가능한 유입으로 볼 것인지 의견이 갈렸다.3 따라서 '1,300톤'이라는 숫자만으로 방폐장이 위험하다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
중요한 것은 다른 데 있다. 지하처분시설에서 지하수는 단순히 공사할 때 퍼내면 끝나는 물이 아니다. IAEA의 지질처분 연구자료에서도 지하시설 굴착은 터널로 지하수를 유입시키고 주변의 수두와 지하수 흐름조건을 변화시킨다고 설명한다. 처분시설의 장기안전성에서 수리지질 조건을 중요하게 다루는 이유다.4
방사성폐기물을 처분하고 시설을 폐쇄한 뒤에는 상황이 더 중요해진다. 펌프도 언젠가는 멈추고 인간의 관리도 종료해야 하기 때문이다. 처분장은 사람이 계속 물을 퍼내야 안전한 시설이어서는 곤란하다. 바로 이것이 '저장'과 '처분'의 근본적인 차이다.
3. 더 중요한 문제는 '무엇을 묻는지(매장하는지) 정확히 아는 것'이다
경주 방폐장이 보여준 또 하나의 중요한 교훈은 폐기물 자체의 특성을 정확히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방폐장에는 아무 드럼이나 가져와 묻을 수 없다.
원자력안전위원회 기준에 따라 처분시설 운영자는 그 시설의 특성을 반영한 폐기물 인수기준을 설정해야 한다. 폐기물을 넘기는 쪽은 포장물 단위의 방사능 농도 등 정해진 조건을 만족시켜야 한다.5
이것은 서류를 위한 행정절차가 아니다. 처분장 안전성평가는 어떤 핵종이 얼마만큼 들어 있는지를 전제로 계산한다. 코발트-60, 세슘-137, 탄소-14처럼 핵종마다 반감기와 환경에서의 이동특성이 다르다. 폐기물에 무엇이 얼마나 들어 있는지 잘못 알고 있다면 그 데이터를 이용해 계산한 장기 안전성 역시 신뢰하기 어렵다.
실제로 2019년 원자력안전위원회 조사에서 충격적인 결과가 나왔다. 한국원자력연구원이 2015년 이후 경주 방폐장에 인도한 2,600드럼의 분석자료를 전수검증한 결과, 2,111드럼에서 핵종농도 정보의 오류가 확인됐다. 원안위는 분석절차와 감독의 부족, 검증되지 않은 자체 개발 소프트웨어를 원인으로 지적했다. 다행히 다시 평가한 결과 처분농도 제한치를 초과한 폐기물은 없었다.6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실제 방사능이 제한치를 넘었느냐만이 아니다. 처분시설의 안전성을 입증하는 가장 기초적인 입력자료 자체가 제대로 관리되고 있었느냐는 문제다.
그런데 2026년 비슷한 문제가 또 나타났다. 한국원자력연구원이 2025년에 보낸 694드럼의 인수검사 과정에서 제출서류와 실제 검사내용의 불일치가 발견되어, 해당 물량은 처분되지 못한 채 원안위 조치를 기다리게 됐다.7 대규모 핵종분석 오류를 겪고도 몇 년 뒤 다시 폐기물 정보의 신뢰성 문제가 제기된 것이다.
4. 처분장의 안전은 세 가지가 동시에 맞아야 한다
경주 사례를 통해 처분의 원리를 오히려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다. 처분장의 안전은 크게 세 요소가 동시에 맞아야 한다.
첫째는 폐기물이다. 어떤 핵종이 얼마만큼 들어 있고, 어떤 물리·화학적 형태로 존재하며 앞으로 어떻게 변할 것인지 알아야 한다. 둘째는 공학적 방벽이다. 드럼, 콘크리트 구조물, 충전재와 처분고 등이 방사성물질의 이동을 억제해야 한다. 셋째는 자연방벽이다. 암반, 지하수 흐름, 지질구조와 지구화학적 환경이 방사성핵종의 인간 생활권 이동을 지연시키고 제한해야 한다.
어느 하나만 좋아서는 충분하지 않다. 좋은 용기를 만들었다고 나쁜 부지가 좋은 부지가 되지 않고, 좋은 암반을 찾았다고 핵종분석을 부실하게 해도 되는 것이 아니다. 이 세 요소를 여러 겹으로 배치해 하나가 열화되더라도 나머지가 이동을 늦추도록 하는 것이 '다중방벽' 개념이다.
그래서 IAEA는 처분시설의 안전성을 개별 설비가 아니라 부지와 시설, 폐기물 특성, 장기간의 변화와 불확실성을 종합한 Safety Case(안전성 입증체계)로 설명하도록 요구한다.8
이 원칙은 다음의 한 문장으로 압축할 수 있다. 처분은 폐기물을 땅속에 넣는 기술이 아니라, 그 폐기물이 다시 인간의 생활환경으로 돌아오지 않도록 전체 시스템의 안전성을 입증하는 기술이다.
5. 경주의 진짜 교훈은 고준위폐기물에 있다
경주 방폐장을 실패한 처분장이라고 단정할 필요는 없다. 현재 운영되고 있으며 규제기관의 관리도 이루어지고 있다. 오히려 그렇게 접근하면 이 사례의 더 중요한 의미를 놓치게 된다. 경주가 보여준 진짜 교훈은 방사성폐기물을 실제로 처분하는 순간부터 우리가 마주하게 되는 문제의 복잡성이다.
그런데 이것은 어디까지나 중·저준위방사성폐기물 이야기다. 앞으로 우리가 해결해야 하는 사용후핵연료와 고준위방사성폐기물은 차원이 다르다. 강한 방사선과 붕괴열을 발생시키며, 훨씬 긴 시간 동안 안전성을 고려해야 한다. 저장용기와 처분용기, 완충재와 암반, 지하수와 핵종의 이동을 하나의 시스템으로 다뤄야 한다.
그래서 경주에서 던져야 할 질문은 "방폐장이 안전한가" 하나가 아니다. 중·저준위폐기물 하나를 처분하는 데도 이만큼 많은 문제가 뒤따랐다면, 우리는 수십만 년을 내다봐야 하는 고준위방사성폐기물을 처분할 준비가 정말 되어 있는가.
경주 방폐장은 그 답을 주지는 않는다. 대신 우리가 앞으로 무엇을 물어야 하는지를 가르쳐준다. 그리고 그 질문은 곧바로 다음 문제로 이어진다. 폐기물을 만들어낸 원전사업자와 수십 년, 수백 년 뒤까지 그것을 관리해야 할 국가 사이에서 과연 누가 마지막 책임을 지는가.
2절. 원전에서 폐기물은 나오는데 최종 목적지는 없다
― 발생자의 책임과 국가의 책임 사이
1. 전기는 팔렸지만 사용후핵연료는 발전소에 남았다
원자로 안에서 핵분열을 마친 핵연료는 더 이상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어려워지면 원자로 밖으로 꺼낸다. 이를 사용후핵연료라고 한다. 그러나 '사용후'라는 말 때문에 일반 산업폐기물처럼 처리가 끝난 물질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원자로에서 갓 꺼낸 사용후핵연료는 강한 방사선과 붕괴열을 내뿜는다. 먼저 원자로 건물 안의 수조에서 여러 해 동안 냉각해야 하고, 이후에도 장기간 안전하게 저장해야 한다. 최종적으로 폐기하기로 결정한다면 고준위방사성폐기물로 분류하여 인간의 생활권으로부터 격리해야 한다.
문제는 한국의 원전이 1978년부터 상업운전을 시작했지만 사용후핵연료가 도달할 최종 목적지를 아직 마련하지 못했다는 데 있다. 그 사이 사용후핵연료는 고리·한빛·한울·월성 각 부지에 쌓였다. 처음에는 수조에 보관했고, 월성원전에서는 공간이 부족해지자 캐니스터와 맥스터라는 건식저장시설을 추가했다.
전기는 발전소 밖으로 나가 전국에서 소비됐지만, 전기를 생산하고 남은 위험은 원전 지역에 머문 셈이다.
이것은 단순한 시설 부족의 문제가 아니다. 언제, 어디로, 어떤 방식으로 옮겨 최종 처분할 것인지 결정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원자력은 연료를 원자로에 넣는 순간 시작되지만, 사용후핵연료의 마지막 행선지를 마련해야 비로소 끝나는 산업이다.
2. 발생자에게 책임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여기서 한 가지는 정확히 짚어야 한다. 원전사업자인 한국수력원자력이 사용후핵연료 관리에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는 것은 아니다.
비용 부담도 존재한다. 「방사성폐기물 관리법」은 원자력발전사업자에게 사용후핵연료관리부담금을 부과하도록 규정하며, 이 부담금은 방사성폐기물관리기금에 귀속된다. 2008년 이 법을 제정한 이유도 발생자가 쌓아두던 충당금만으로는 장기 재원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어렵다고 보았기 때문이다.9
따라서 "원전사업자는 폐기물 관리비용을 한 푼도 부담하지 않는다"고 쓰는 것은 정확하지 않다. 원전사업자는 사용후핵연료를 현장에서 관리하고 법정 부담금을 납부한다.
그러나 여기서 더 중요한 질문이 시작된다. 비용을 납부하는 책임과 폐기물의 안전을 마지막까지 책임지는 것은 같은 일인가?
그렇지 않다. 부담금은 현재의 제도와 가정에 따라 추정한 금액을 적립하는 것이다. 그러나 처분장은 아직 부지도 처분방식도 확정되지 않았다. 건설이 늦어지거나 설계가 바뀌고 안전기준이 강화되면 실제 비용은 추정치를 크게 넘어설 수 있다.
3. 비용을 내는 사람과 최종 책임자가 다르다
한국의 방사성폐기물 관리체계는 발생과 장기관리를 분리한다. 원전사업자는 사용후핵연료를 발생시키고, 관리사업자에게 인도하기 전까지 원전 부지에서 안전하게 관리한다. 반면 사용후핵연료를 인수해 중간저장하고 최종 처분하는 사업은 별도의 공적 관리체계가 맡는다.
이러한 분리는 발생자가 처리와 처분까지 모두 담당할 때 생길 이해충돌을 줄이기 위한 것이다. 2008년 법 제정 당시 정부도 발생자와 처분 담당자가 같으면 안전성과 투명성을 확보하기 어렵다는 점을 들어 별도의 관리공단과 기금을 설치했다.10
2025년 제정된 「고준위 방사성폐기물 관리에 관한 특별법」(이하 고준위특별법)도 발생자와 관리사업자의 책무를 함께 규정하고 있다. 양자는 안전 관련 법령을 준수하고, 주요 정보를 공개하며, 지역사회와 협력해야 한다. 특별법은 고준위방사성폐기물 관리를 단순한 보관이 아니라 인수·저장·처분·운반·안전성 평가를 포함하는 전체 활동으로 정의한다.
원전사업자는 "법에 따라 부담금을 냈다"고 말할 수 있고, 관리사업자는 "아직 인수할 시설과 부지가 없다"고 말할 수 있다. 정부는 "장기계획에 따라 추진 중"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각각의 설명은 제도적으로 틀리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폐기물은 그 사이에도 계속 발생한다.
4. 지연과 비용 증가의 위험은 결국 국가로 돌아온다
사용후핵연료 관리에서는 시간이 곧 비용이다. 중간저장시설과 영구처분장이 예정대로 건설되지 않으면 원전 부지의 저장기간이 늘어난다.
건식저장용기는 한 번 제작해 영원히 쓰는 시설이 아니다. 장기저장 중에는 열화와 부식, 밀봉 건전성, 지진과 침수, 검사 가능성을 계속 확인해야 하고, 기간이 길어지면 교체나 재포장이 필요할 수도 있다. 더구나 최종 처분개념이 확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저장용기를 먼저 대량 제작하면 나중에 다시 옮겨 담아야 할 가능성이 있다.
이 과정에서 비용이 증가하면 누가 부담할까. 원전사업자에게 부담금을 추가로 부과할 수는 있다. 그러나 원전이 이미 폐쇄됐거나 발전사업자의 재무상태가 악화됐을 수도 있다. 전기요금에 비용을 반영하면 현재의 전력소비자가 부담하고, 정부 재정이 투입되면 전체 국민이 부담한다. 부족한 비용을 미래로 넘기면 원전에서 생산된 전기를 사용하지 않은 세대가 부담하게 된다.
결국 고준위폐기물 관리가 실패하거나 장기간 지연됐을 때 국가는 손을 놓을 수 없다. 폐기물을 방치할 수 없고, 관리사업자가 사업성이 없다는 이유로 철수하게 할 수도 없다. 어떤 정부가 들어서든 감시와 저장, 운반과 처분을 계속해야 한다.
이것이 일반 산업폐기물과 다른 핵심적인 차이다. 일반 기업의 제품은 회사가 사라진 뒤에도 국가가 수십만 년 관리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사용후핵연료는 기업이나 원전이 사라진 뒤에도 남는다. 발생자는 비용을 낼 수 있지만 최종 실패의 위험까지 이전할 수는 없다.
5. 발생자는 사라질 수 있지만 폐기물은 사라지지 않는다
원전은 언젠가 폐쇄된다. 발전사업자의 조직과 명칭도 바뀔 수 있다. 관리기관이 통폐합되고 법률과 정책이 달라질 수도 있다. 지금 기금을 관리하는 사람도, 처분장 건설계획을 세운 사람도 수십 년 뒤에는 그 자리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사용후핵연료는 그대로 남는다.
그러므로 고준위폐기물 관리에서 중요한 것은 누가 현재 비용을 내는가가 아니라, 폐기물의 전 수명에 걸쳐 책임이 끊기지 않도록 만드는 일이다. 발생자는 저장과 비용을, 관리사업자는 인수·운반·저장·처분을 책임지고, 규제기관은 사업 추진과 독립하여 심사하며, 국가는 세대가 바뀌어도 제도와 재원을 유지해야 한다.
그러므로 원자력의 경제성을 평가할 때에는 부지 내 저장부터 중간저장, 운반, 처분장 건설과 폐쇄 후 안전관리까지 포함한 전체 비용을 물어야 한다. 그 비용이 불확실하다면 불확실성 자체도 원전의 비용이자 위험으로 다뤄야 한다.11
원전의 책임은 전기를 판매한 날 끝나지 않는다. 마지막 사용후핵연료가 안전하게 처분되고 그 안전성이 장기간 유지될 때까지 계속된다. 그런데 최종 처분시설이 없는 현실에서 저장수조의 포화가 다가오고 있다. 정부와 사업자는 우선 부지 안에 건식저장시설을 확대하려 하지만, '임시'라고 부르는 저장이 얼마나 오래 지속될지는 아무도 확정할 수 없다.
3절. 처분장은 없고 건식저장시설부터 늘어난다
― 임시저장이 사실상의 장기저장으로 굳어지는 것은 아닌가
1. 저장수조가 차면 원전을 멈춰야 한다
원
자로에서 꺼낸 사용후핵연료는 곧바로 건식저장용기에 넣을 수 없다. 처음에는 물이 담긴 저장수조에서 강한 방사선을 차폐하고 붕괴열을 식혀야 한다. 일정 기간 냉각해 열이 충분히 낮아진 뒤에야 금속용기와 콘크리트 구조물 등을 이용한 건식저장으로 옮길 수 있다.
문제는 원전 부지의 저장수조 용량이 무한하지 않다는 데 있다. 저장수조가 가득 차면 새로 발생하는 사용후핵연료를 넣을 공간이 없어진다. 원자로에서 핵연료를 꺼낼 수 없으므로 결국 원전 가동도 계속하기 어렵다. 사용후핵연료 저장공간은 원전의 부속시설이 아니라 원전의 계속운전을 결정하는 핵심 설비인 셈이다.
정부가 2023년 제10차 전력수급기본계획을 반영해 다시 계산한 결과에 따르면, 별도의 저장시설을 확충하지 않을 경우 한빛원전은 2030년, 한울원전은 2031년, 고리원전은 2032년부터 저장시설 포화가 예상됐다. 발전량과 저장수조 운영방식 등에 따라 포화시점은 달라질 수 있지만, 한빛·한울·고리의 경우 2030년대 초반부터 대응이 필요하다는 사실은 분명하다.12
월성원전은 이미 오래전부터 저장수조만으로 감당하기 어려워졌다. 중수로여서 경수로보다 훨씬 많은 다발이 나오기 때문이다. 이제 경수로인 고리·한빛·한울에서도 부지 내 건식저장시설 건설이 현실로 다가왔다.
건식저장은 충분히 냉각된 사용후핵연료를 밀봉 용기에 넣고 자연대류로 열을 제거하는 방식이다. 냉각수를 계속 순환시키는 습식저장에 비해 능동설비 의존도가 낮아, 저장수조 포화에 대응해 건식저장으로 전환하는 것 자체는 국제적으로 일반적인 방법이다.
그러나 기술적으로 가능하다는 것과 정책의 순서가 타당하다는 것은 다른 문제다. 한국에서는 최종 처분장의 부지도, 지질환경도, 처분개념도 정해지지 않았다. 중간저장시설 역시 아직 부지가 없다. 그런데 원전 운영을 계속하기 위해 가장 앞단에 있는 부지 내 건식저장시설부터 확대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핵연료주기의 마지막 단계는 결정하지 못했는데, 저장수조 포화라는 시계는 이미 돌아가고 있다.
2. 법에는 '부지 내 저장', 현실에서는 얼마 동안인가
고준위특별법은 부지 내 저장시설의 용량을 해당 부지 원자로의 설계수명 동안 발생할 예상량을 넘지 못하도록 했다. 원전 지역이 사실상의 전국 단위 저장소가 되는 것을 막으려는 장치다.
그러나 저장할 수 있는 '양'을 제한한 것과 실제 '저장기간'을 보장한 것은 다르다. 특별법은 중간저장시설은 2050년 이전, 처분시설은 2060년 이전에 운영을 시작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규정한다. 여기서 중요한 표현은 '운영을 개시해야 한다'는 확정적 의무가 아니라 '운영을 개시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점이다.13
부지선정이 지연되거나 주민투표에서 무산되거나 인허가가 늦어지면 그 시점은 뒤로 밀린다. 한빛원전의 건식저장시설이 2030년대 초에 필요해지고 중간저장시설이 2050년에 운영된다고 가정해도 부지 내 저장기간은 이미 약 20년이다. 2060년이나 2070년으로 늦어지면 30~40년으로 늘어난다.
더 큰 문제는 중간저장시설이 생겼다고 곧바로 처분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거기서도 처분장이 운영될 때까지 다시 수십 년을 보관해야 한다. 먼저 발생한 사용후핵연료는 부지 내 저장과 중간저장을 합쳐 100년 이상 관리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IAEA도 50~100년 저장이 기술적으로 가능하다고 보면서, 저장능력이 있다는 사실이 최종 관리방안의 결정을 무기한 미뤄도 된다는 뜻은 아니라고 지적한다.14
건식저장은 처분을 대신하지 않는다. 저장시설은 감시하고 점검하며 필요하면 꺼낼 수 있도록 관리하는 시설인 반면, 처분시설은 폐쇄 후 인간의 관리에 의존하지 않고 장기 안전성을 확보해야 한다. 따라서 '임시'라는 명칭만으로 임시성이 보장되지 않는다. 임시저장이 언제 끝나는지는 폐기물을 옮겨갈 다음 시설이 실제로 운영될 때 결정된다.
3. 저장용기·운반용기·처분용기는 같은 물건이 아니다
사용후핵연료를 담는 용기는 겉보기에는 모두 두껍고 견고한 원통형 구조물처럼 보이지만, 수행해야 할 기능은 서로 다르다.
하나의 캐니스터를 저장과 운반에 함께 쓰는 이중목적용기도 있다. 그러나 저장 승인을 받았다고 자동으로 운반에 적합한 것은 아니다. 미국 NRC도 실제 운반 전에 캐니스터와 내용물이 운반규정을 충족하는지 별도로 확인해야 한다고 설명한다.15
처분은 한 단계 더 복잡하다. 처분용기의 재질과 두께, 크기와 형상은 사용후핵연료의 특성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처분장 암반의 종류, 지하수의 화학성분과 흐름, 온도, 처분공 간격, 완충재의 종류, 용기 회수방식까지 함께 고려해야 한다.
따라서 다음 질문은 충분히 타당하다. 처분용기와 처분환경이 결정되지 않았는데 저장용기를 먼저 대량 제작하면, 결국 저장용기·운반용기·처분용기를 각각 따로 만들어야 하는 것 아닌가?
다만 이를 "반드시 세 번 옮겨 담아야 한다"는 뜻으로 단정해서는 안 된다. 저장 캐니스터를 그대로 운반하고 처분장에서 덧용기에 넣는 개념도 가능하다. 반대로 크기나 재질이 미래 처분개념과 맞지 않으면 집합체를 꺼내 다시 포장해야 할 수도 있다.
핵심은 저장용기와 처분용기가 서로 다르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다. 처분개념과 운반체계를 확정하지 않은 채 저장시스템을 먼저 대량 도입하면, 미래의 선택 폭이 좁아지고 추가 이송·재포장·시설 건설 비용이 커질 수 있다는 것이다.
4. 100년 저장에서 가장 어려운 것은 '나중에 꺼낼 수 있는가'이다
건식저장용기는 설치하는 날의 성능만으로 평가할 수 없다. 수십 년 동안 온도와 방사선, 염분과 습기에 노출되면 재료는 변한다. 금속 캐니스터 용접부에서는 응력부식균열이 생길 수 있고, 콘크리트는 염분 침투와 철근 부식의 영향을 받으며, 밀봉재와 차폐재의 성능도 달라질 수 있다.
사용후핵연료 자체도 그대로가 아니다. 피복관은 운전 중 이미 고온·고압·방사선에 노출됐고, 저장 중에는 크리프와 수소화물 재배열, 취성화 가능성을 검토해야 한다. 특히 고연소도 연료는 장기 저장 후 취급과정에서 건전성이 유지되는지 별도로 확인해야 한다.
미국 NRC의 NUREG-2215는 건식저장시스템의 심사를 부지특성과 설계기준, 구조·열·차폐·임계 안전성, 재료와 피복관, 밀봉과 방사선방호, 운전절차, 폐기물 관리와 해체, 사고분석으로 폭넓게 나눈다. 건식저장의 안전성은 '두꺼운 용기에 넣었으니 안전하다'는 한 문장으로 설명할 수 없다는 뜻이다.16
한국에서는 해안에 원전이 집중돼 있다는 특성도 중요하다. 해염입자가 유입되는 환경에서 용기 표면의 염화물 축적을 어떻게 감시할지, 캐니스터 용접부와 접근이 어려운 부분을 어떤 방법으로 검사할지 기준이 필요하다. 그러나 아직 한국에는 구체적인 건식저장 안전기준이 마련되어 있지 않다. 기준이 없는 상태에서 시설 공사가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더 어려운 문제는 이상을 발견한 뒤다. 밀봉 캐니스터에 균열이 의심되면 현장에서 검사와 보수가 가능한가. 다시 꺼내야 한다면 차폐하면서 정비할 습식시설이나 핫셀이 준비되어 있는가. 원전이 해체된 뒤에도 그 설비를 쓸 수 있는가. 저장수조와 취급설비를 먼저 철거하고 용기만 남겨두었다가 문제가 생기면 재포장 시설을 새로 지어야 할 수도 있다.
그래서 장기저장의 핵심은 단지 용기가 견디는가가 아니다. 필요할 때 검사하고, 보수하고, 회수하고, 다시 포장하여 운반할 수 있는가가 장기저장의 진짜 안전성이다.
5. 급하니까 저장부터 하자는 정책이 남길 비용
저장수조 포화가 다가오는 상황에서 건식저장시설을 건설하지 않으면 원전 가동이 어려워질 수 있다. 따라서 현실적으로 부지 내 건식저장시설은 필요하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더 엄격한 원칙이 필요하다.
1) 부지 내 저장기간을 40∼60년으로만 가정해서는 안 된다. 중간저장과 처분의 지연 가능성을 고려해 100년 이상으로 연장될 경우를 가정하고, 그에 필요한 감시·검사·보수·재포장 전략까지 미리 마련해야 한다.
2) 용기 선정 단계부터 미래의 운반 가능성과 처분개념과의 연계성을 함께 검토해야 한다. 처분장 부지가 정해지지 않았더라도, 저장 캐니스터의 크기와 재질과 용량이 미래의 선택을 지나치게 제한하지 않는지 평가할 수 있다.
3) 원전 해체계획과 건식저장계획을 함께 세우고, 비용도 전 수명주기로 계산해야 한다. 최초 건설비만이 아니라 장기 감시와 검사, 용기 교체, 재포장시설, 중간저장시설로의 이송, 처분용기 제작까지 포함해야 한다.
이런 준비 없이 "원전 부지 안에 건식저장시설을 지으면 당장의 포화 문제는 해결된다"고 설명하는 것은 절반의 해답에 불과하다.
그 부담은 원전 지역에 집중된다. 전기는 전국이 사용했지만 고준위폐기물은 원전이 폐쇄된 뒤에도 해당 지역에 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시설의 이름을 '임시저장' 또는 '부지 내 저장'이라고 정하는 것만으로 이러한 지역의 우려를 해소할 수는 없다.
건식저장은 필요하다. 그러나 처분정책 없이 저장시설부터 늘리는 것은 해결책이 아니라 문제의 시간을 뒤로 미루는 일일 수 있다. 지금 결정해야 할 것은 용기 제품 하나가 아니라 저장에서 운반, 중간저장과 처분까지 이어지는 전체 시스템이다.
그리고 이 문제는 자연스럽게 다음 질문으로 이어진다. 우리는 아직 처분장 부지도 정하지 못했는데, 처분기술을 연구한다는 지하연구시설부터 먼저 건설하려 하고 있다. 그렇다면 지하연구시설은 무엇을 검증해야 하며, 실제 처분부지와 분리된 연구시설이 처분장의 안전성을 어디까지 입증할 수 있는가.
4절. 세계는 왜 60년 동안 핵폐기물의 마지막 문을 열지 못했는가
― 유카마운틴이 보여준 영구처분의 기술적 난제
1. 땅속 깊이 묻는다고 끝나는 문제가 아니었다
1957년 미국 과학아카데미는 고준위방사성폐기물을 깊은 지질층에 격리하는 방식이 가장 유력하다고 제안했다.17 지하 수백 미터의 안정된 암반에 처분시설을 만들고 금속용기와 완충재로 둘러싼 뒤 터널을 폐쇄한다는 구상이었다. 앞서 1절에서 본 세 요소를 여러 겹으로 배치하는 다중방벽 개념이 그 원리다. 원자력발전은 1950년대부터 상업화됐지만, 최종 처분을 어떻게 할 것인지는 해결되지 않은 채 발전소부터 지어졌다.
그러나 원리를 설명하는 것과 실제 부지에서 장기 안전성을 입증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세계 최고의 과학기술과 자본을 가진 미국도 60년이 넘도록 상업용 처분장을 운영하지 못했다. 네바다주 유카마운틴에는 지질·지하수·화산·지진·부식·핵종이동을 연구하는 데 막대한 비용과 인력이 투입됐고, 미국 회계감사원은 이곳을 세계에서 가장 광범위하게 연구된 후보지 가운데 하나로 평가했다. 에너지부는 2008년 건설허가를 신청했지만 처분장은 건설되지 않았다.18
핀란드의 온칼로가 세계 최초의 상업용 처분장 운영을 눈앞에 두고 있다는 점은 함께 보아야 한다. 다만 이는 처분 문제가 쉽게 해결됐다는 사례가 아니다. 부지조사와 사회적 합의, 지하연구시설 건설, 안전성 평가에 수십 년이 걸린 결과다. 온칼로는 오히려 처분장을 하나 열기 위해 얼마나 긴 시간과 일관된 정책, 지역사회의 신뢰가 필요한지를 보여준다.19
따라서 유카마운틴을 보며 던져야 할 질문은 "미국에 터널을 뚫을 기술이 없었는가"가 아니다. 처분기술이 없어서 못 지은 것인가, 아니면 수십만 년 뒤의 안전을 과학적으로 입증하고 사회적으로 승인받는 일이 생각보다 훨씬 어려웠던 것인가? 유카마운틴이 멈춘 이유를 살펴보면 후자에 더 가깝다.
2. 유카마운틴에서 드러난 것은 '암반 하나'의 문제가 아니었다
유카마운틴은 네바다 사막의 화산암 지대에 있다. 강수량이 적고 처분터널이 지하수면보다 높은 불포화대에 있어 처음에는 유리한 곳으로 평가됐다. 그러나 건조한 지역이라고 물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비와 눈이 암반의 균열을 따라 이동해 처분터널에 도달하면 용기를 부식시키고, 손상된 뒤에는 방사성물질을 지하수계로 운반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지금 물이 얼마나 적은가만이 아니라, 수만 년 뒤 기후가 변해 강수량이 늘어날 가능성까지 다루어야 한다는 점이다.
붕괴열도 문제를 복잡하게 만든다. 높은 온도는 터널 주변의 물을 증발시키지만, 폐기물이 식으면 수증기가 다시 응축될 수 있다. 온도 변화는 암반의 응력과 균열, 지하수 화학, 금속 부식에도 영향을 준다. 열과 물과 응력과 화학반응을 각각 떼어 분석해서는 실제 처분환경을 설명하기 어렵다.
NRC 인허가 과정에서 유카마운틴을 두고 검토된 핵심 쟁점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20
그렇다고 이것을 "유카마운틴이 기술적으로 불가능하다는 판정을 받았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미국 원자력규제위원회 심사팀은 중단된 절차 속에서도 안전성평가보고서를 작성했고, 일정한 조건과 모델을 전제로 폐쇄 전 안전성과 폐쇄 후 성능이 대체로 규제요건을 충족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반면 토지소유권과 수리권 등 일부 법적·행정적 요건은 충족되지 않았다고 보았다.22 유카마운틴은 기술적 부적합 판정을 받아 폐기된 부지도, 최종 허가를 받아 건설된 처분장도 아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기술적으로 가능하다"와 "실제 부지에서 장기 안전성이 최종 입증됐다"를 구별하는 일이다. 심층처분은 공학적으로 구현할 수 있는 기술이지만, 처분장의 안전성은 터널의 깊이나 암반의 강도 하나로 입증되지 않는다. 지질과 지하수, 용기와 완충재, 열과 부식, 핵종이동과 지진과 인간침입이 오랜 기간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를 하나의 논리체계로 설명해야 한다. 앞서 본 Safety Case가 바로 이것이다.
3. 1만 년이면 충분했던 기준이 왜 100만 년이 되었는가
미국 환경보호청은 2001년 유카마운틴 방사선방호기준을 제정하면서 처분 후 1만 년까지의 개인 피폭선량을 규제기준으로 삼았다. 인간이 기록한 역사와 견주어도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긴 시간이다.
그러나 고준위폐기물의 시간은 인간의 역사와 다르게 흐른다. 요오드-129의 반감기는 약 1,570만 년, 넵투늄-237은 약 214만 년, 플루토늄-239는 약 2만 4천 년이다. 처분 초기에는 용기가 방사성물질을 가두고 있어 위험이 낮게 계산되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 용기가 부식되고 핵종이 지하수로 이동하면 위험의 정점이 1만 년 이후에 나타날 수 있다.
미국 과학아카데미는 방사선방호기준이 위험이 최대가 되는 시기까지 고려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위험의 정점이 1만 년 뒤에 나타날 수 있는데도 거기서 계산을 끝내는 것은 과학적 근거가 부족하다는 취지였다.
2004년 워싱턴 D.C. 연방항소법원은 이 문제에 결정적인 판단을 내렸다. 환경보호청의 1만 년 규제기간이 「에너지정책법」이 요구한 과학아카데미의 권고와 일치하지 않는다고 보아 해당 규정을 무효화한 것이다.23 법원이 직접 100만 년의 안전을 요구한 것이 아니라, 기간의 선택에 충분한 근거가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 결과 환경보호청은 2008년 기준을 개정해, 최초 1만 년에는 연간 0.15밀리시버트, 그 이후 100만 년까지는 연간 1밀리시버트의 개인선량한도를 적용하도록 했다.24
이 과정이 보여주는 교훈은 명확하다. 인간이 규제기간을 짧게 정한다고 방사성핵종의 수명이 짧아지는 것은 아니다. 안전평가의 시간은 행정기관이 다루기 편한 기간이 아니라, 위험이 나타나는 시간에 맞춰야 한다.
그러나 100만 년의 미래를 정확히 예측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장기 성능평가는 미래를 예언하는 작업이 아니라, 가능한 현상과 불확실성을 체계적으로 분류하고 여러 시나리오를 통해 규제기준을 넘지 않는지 확인하는 작업이다. 평가기간이 길어질수록 모델의 불확실성도 커진다. 결국 처분장의 안전성은 100만 년 뒤를 알고 있다는 주장이 아니라, 알지 못하는 범위까지 포함해도 위험이 허용한도를 넘지 않는다는 합리적 확신을 제시하는 데 달려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과학은 기술자의 계산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어떤 현상을 포함하고 제외할 것인지, 어떤 확률을 받아들일 것인지, 미래세대에게 어느 정도의 위험을 허용할 것인지라는 규제적·윤리적 판단이 개입한다.
4. 기술문제는 정치·사회문제와 분리될 수 없었다
유카마운틴이 중단된 이유를 주민들이 과학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는 것은 지나치게 단순하다. 1982년 「핵폐기물정책법」은 여러 후보지를 조사해 비교하는 절차를 마련했으나, 1987년 법 개정으로 다른 후보지 조사가 중단되고 유카마운틴 한 곳에만 집중됐다. 네바다주는 이를 공정한 과학적 비교가 아니라 정치적으로 힘이 약한 지역에 부담을 떠넘긴 결정으로 받아들였고, 이 개정은 '네바다 때리기 법안'으로 불리기도 했다.
이후 절차는 상당히 멀리 진행됐다. 2002년 대통령이 부지로 추천하고 의회가 승인했으며 2008년 건설허가가 신청됐다. 그러나 2009년 정권이 바뀌며 사업 종료 방침이 밝혀졌고, 이듬해 허가신청 철회 요청과 예산 중단이 이어지면서 절차는 사실상 멈췄다.25
따라서 유카마운틴을 기술적으로 실패한 처분장이라 단정하는 것도, 주민 반대 때문에 무산됐다고만 말하는 것도 정확하지 않다. 장기 안전성을 둘러싼 과학적 불확실성, 규제기준 논쟁, 단일부지로 압축된 선정절차의 정당성 문제, 지역사회의 불신, 연방정부와 의회의 갈등, 정권교체가 중첩되면서 멈춘 사업이다.
심층처분이 공학적으로 가능하다는 판단과, 특정한 부지에 실제로 처분장을 건설할 수 있다는 사회적 결정은 같은 말이 아니다. 처분시설은 지질조건만으로 선정되지 않는다. 수십 년간 전국에서 운반해야 하고, 폐쇄 후에도 규제기관과 사회가 안전성 입증을 신뢰해야 한다. 선정 과정이 불공정했다고 인식되면 아무리 많은 기술자료를 제시해도 신뢰를 회복하기 어렵다.
핀란드 온칼로가 다른 길을 걸은 데에도 이러한 차이가 있다. 핀란드는 원전 지역과 지방자치단체가 초기부터 의사결정에 참여했고, 지방정부가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는 구조에서 수십 년에 걸쳐 합의를 축적했다. 암반이 특별히 완벽했기 때문만이 아니라 기술개발과 사회적 동의가 함께 진행됐기 때문이다.
처분장의 안전성은 지질학자가 발견하고 기술자가 계산한 뒤 정부가 발표하면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그 계산을 규제기관이 검증하고, 지역사회가 선정절차를 신뢰하며, 국가가 세대를 넘어 책임지겠다고 약속할 때 비로소 성립한다. 그렇다면 그 신뢰는 어떤 절차를 통해 만들어지는가. 이 물음은 이 책의 4부, 특히 11장에서 본격적으로 다룬다.
5. 그런데 한국은 처분부지를 정하기 전에 URL부터 짓는다
고준위특별법은 두 종류의 지하연구시설을 구분한다. 하나는 처분부지 선정 전에 유사한 지질환경에서 처분시스템의 성능을 연구하는 연구용 지하연구시설이고, 다른 하나는 실제 처분부지가 결정된 뒤 그 부지의 지질특성을 연구·실증하는 부지 내 지하연구시설이다.
연구용 지하연구시설을 건설하는 것 자체가 잘못은 아니다. 암반의 굴착손상과 균열을 통한 물의 이동, 완충재의 팽윤과 침식, 용기의 부식, 터널 밀봉과 장기 모니터링을 연구하려면 실제 지하공간이 필요하다. 지상 실험실과 컴퓨터 모델만으로 확인하기 어려운 현상을 실규모로 시험할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기술개발시설이다.
문제는 연구용 URL에서 얻은 결과가 미래의 처분부지에 어느 범위까지 적용될 수 있느냐는 것이다.
화강암이라고 모두 같은 화강암은 아니다. 암반의 생성과 변형 이력, 단층과 절리의 방향과 연결성, 수리전도도, 지하수의 염도와 산화환원조건이 부지마다 다르다. 특히 핵종이동은 암반의 평균적인 성질보다 일부 연결된 균열과 우선 흐름경로에 좌우될 수 있다. 연구용 URL에서 개발한 계측기술과 해석모델은 다른 부지에도 활용할 수 있지만, 거기서 얻은 수리전도도나 부식자료를 미래 처분부지의 값으로 그대로 대체할 수는 없다.
따라서 연구용 URL과 처분부지 내 URL의 역할은 명확히 구분해야 한다.
더욱 경계해야 할 것은 URL 건설 자체가 사업의 성과로 바뀌는 것이다. 처분정책의 목적은 지하연구시설을 건설하는 데 있지 않다. 부지배제기준과 적합성 기준을 세우고, 복수 후보지를 과학적으로 비교하고, 지역사회가 참여하는 절차를 거쳐 실제 처분부지를 선정한 뒤, 그 부지의 Safety Case를 만드는 것이 목적이다.
처분부지의 수리전도도 기준조차 명확하지 않고, 단층과 지진, 해수 또는 심부 염수의 영향, 장기 기후변화에 대한 규제요건도 구체화되지 않은 상태라면, 연구용 URL부터 짓는 것만으로 처분정책이 진전됐다고 말하기 어렵다. 공간보다 먼저 필요한 것은 질문이다.
• 어떤 지질조건이면 처음부터 처분 후보지에서 제외할 것인가.
• 수리전도도와 균열 연결성을 어떤 방법과 규모로 평가할 것인가.
• 어떤 핵종과 피폭경로가 장기 위험을 지배하는가.
• 모델의 불확실성과 지식의 한계를 규제판단에 어떻게 반영할 것인가.
이 질문이 정립되지 않으면 URL은 거대한 연구시설이 될 수는 있어도 처분장을 향한 올바른 출발점이 되기는 어렵다.
유카마운틴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것은 터널을 뚫는 기술의 어려움만이 아니다. 100만 년 뒤까지 안전하다는 것을 과학적으로 설명하고, 그 설명을 규제기관과 지역사회와 미래세대가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만드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가 하는 것이다.
한국이 먼저 확보해야 할 것은 지하연구시설이라는 '공간'이 아니다. 어떤 부지를 왜 선택하고, 그곳에서 무엇을 검증하며, 어느 정도의 불확실성까지 허용할 것인지를 판단할 과학적·규제적 기준이다.
결국 원자력산업의 마지막 책임은 원전을 건설하거나 폐기물용기를 만드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수십만 년 지속될 위험을 어느 지역에 맡길 것인지 결정하고, 그 결정의 과학적 근거와 비용과 실패 가능성을 현재세대가 감당하는 데까지 이어진다. 심층처분의 기본원리와 공학기술은 상당히 축적됐지만, 실제 부지의 장기 안전성과 사회적 정당성은 국가마다 새롭게 입증해야 한다.
원전에서 생산된 전기는 오늘 모두 소비한다. 그러나 그 전기를 생산하면서 생긴 고준위폐기물은 전기를 사용하지도 않은 미래세대가 관리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되물어야 한다. 원전이 싸다는 계산에는 핵폐기물의 마지막 한 드럼, 마지막 한 다발이 최종 처분될 때까지의 비용이 정말 들어 있는가?
핵폐기물은 원자력산업의 부산물이 아니다. 원전을 시작하는 순간 국가가 함께 인수하는 장기부채다. 따라서 핵폐기물의 마지막 책임을 설명하지 못하는 원자력 정책은 원전의 경제성도, 지속가능성도, 국가전략산업으로서의 타당성도 완전히 설명한 것이 아니다.
주
1. IAEA No. NW-T-1.14(Rev. 1), Status and Trends in Spent Fuel and Radioactive Waste Management, 2022.
2. 신영림·이종원, 「경주 중·저준위방사성폐기물 처분시설 시공사례 및 현황」, 『한국자원공학회지』 Vol. 54, No. 4(2017), 389-396쪽.
3. 경향신문, 「"암반 무르고 지하수 타고 오염 우려" 경주 방폐장 안전성 재논란」, 2014.6.24.
4. IAEA TECDOC-1758, Techno-economic Comparison of Geological Disposal of Carbon Dioxide and Radioactive Waste, 2014.
5. 제197회 원자력안전위원회 의안 제2호, 「방사성폐기물시설 건설운영 변경허가(안)」, 2024.7.11.
6. 원자력안전위원회 보도자료, 「원안위, 원자력(연) 방사성폐기물 분석 오류 조사결과 발표」, 2019.6.21. 및 한국원자력환경공단 관련 자료, 2019.7.31.
7. 연합뉴스, 「원자력연구원 방폐물 694드럼 부적합 판정…"서류와 불일치"」, 2026.8.5.
8. E. J. Seo·M. C. Song, "Regulatory Activities and Lessons Learned in Korea for a LILW Repository", 03b–08/ID 30, Disposal of Very Low Level Waste & Low Level Waste, IAEA-CN-242.
9. 「방사성폐기물 관리법」 제정이유(법률 제9016호, 2008.3.28. 제정).
10. 위 법률 제9016호 제정이유.
11. 원전의 비용구조와 투자리스크에 관한 상세한 분석은 이 책 3장(김대경) 참조. 중대사고가 났을 때 사업자가 준비해 둔 배상재원과 국가가 실제로 감당해야 할 피해 사이의 간격에 관하여는 이 책 5장(이정윤) 참조.
12. 산업통상자원부, 「사용후핵연료 저장시설 포화시점 1~2년 단축」, 2023.2.10.
13. 국가법령정보센터, 「고준위방사성폐기물 관리에 관한 특별법」 제정이유 및 주요내용(공포번호 제20843호, 2025.3.25.).
14. IAEA Technical Report Series No. 240(3rd ed.), Guidebook on Spent Fuel Storage Options and Systems, 2024.
15. U.S. NRC, Frequently Asked Questions and Answers: Spent Nuclear Fuel Transportation.
16. U.S. NRC, NUREG-2215, Standard Review Plan for Spent Fuel Dry Storage Systems and Facilities — Final Report, 2020.4.
17. U.S. National Research Council, The Disposal of Radioactive Waste on Land, Washington, DC: The National Academies Press, 1957.
18. U.S. GAO, GAO-17-340, Commercial Nuclear Waste: Resuming Licensing of the Yucca Mountain Repository Would Require Rebuilding Capacity at DOE and NRC, Among Other Key Steps, 2017.5.26.
19. Posiva, 온칼로 사업 현황, https://www.posiva.fi/en/
20. U.S. NRC, NUREG-1949 Vol. 3, Safety Evaluation Report Related to Disposal of High-Level Radioactive Wastes in a Geologic Repository at Yucca Mountain, Nevada — Volume 3: Repository Safety After Permanent Closure, 2014. 및 OECD/NEA·IAEA 공동보고서, An International Peer Review of the Yucca Mountain Project TSPA-SR, 2002.
21. Joint NEA-IAEA International Peer Review of the Yucca Mountain Site Characterization Project's Total System Performance Assessment Supporting the Site Recommendation Process, Final Report, 2001.12.
22. U.S. NRC, NUREG-1949, Safety Evaluation Report Related to Disposal of High-Level Radioactive Wastes in a Geologic Repository at Yucca Mountain, Nevada.
23. Nuclear Energy Institute, Inc. v. Environmental Protection Agency, 373 F.3d 1251 (D.C. Cir. 2004).
24. U.S. EPA, 유카마운틴 방사선방호기준(40 CFR Part 197 개정), 2008.
25. U.S. GAO, GAO-1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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