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에 서기를 꿈꾸다
김남희, ‘소심하고 겁 많고 까탈스러운 여자 혼자 떠나는 걷기 여행’
부석사의 당간지주 앞에서 무량수전까지 걸어보라고 했던 사람이 있었다. 우리나라의 절집이 대개 산 속에 있게 마련인데 부석사는 산등성이에 있다고 했다. 개울을 건너 일주문에 들어서면 양쪽으로 사과나무들이 펼쳐져 있다고. 문득 뒤돌아보면 능선 뒤의 능선 또 능선 뒤의 능선이 펼쳐져 있어 그 의젓한 아름다움을 보고 오면 한 계절은 사람들 속에서 시달릴 힘이 생긴다고 했다. - 신경숙, 부석사
자꾸만 그 길이 그리웠다. 한 계절 사람들 속에서 시달릴 힘을 준다는, 의젓한 아름다움이 있다는 그 길. 봄에는 사과 꽃이 흩날리고 가을에는 사과향기 가득할, 연인끼리 친구끼리 사랑하는 가족끼리 손을 잡고 걷고 있을 그 길. 날씨가 찌면 찔수록, 내 속이 복잡하면 복잡할수록, 그 길이 그리워졌다.
하지만 매번 마음 뿐, 가방 하나 메고 전국을 일주해 보고 싶다는 내 소망은 이번 여름에도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동생이 수험생인 탓에 멀리 가지도 못하고, 동생을 제외한 가족들끼리 다녀온 당일치기 남도 여행이 전부. 유난히도 더웠던 올 여름, 사춘기 소녀도 아닌데 내 마음은 유난히도 바다를 그리워했고, 산을 그리워했고, 그리고, 그 길을 그리워했다.
이 책은 제목부터 나를 위한 책 같았다. ‘소심하고 겁 많고 까탈스러운 여자 혼자 떠나는 걷기 여행’이라니. 계획은 거창하지만 떠나는 것이 두려워 쉽사리 짐을 꾸리지 못하고, 번번히 계획만 세우고 포기하던 나를 위한 책.
이 책의 글쓴이 김남희 씨는 지금 대중교통과 걷기만으로 중국, 라오스, 미얀마, 캄보디아, 태국, 네팔, 인도까지 여행하고 있다. 지구를 한바퀴 돌겠다는 멋진 계획의 예행연습 겸으로 떠났던 땅끝 마을에서부터 통일전망대까지의 국토종단기가 이 책의 1장이다. 그리고 두 번째 장은 우리나라의 숨어있는 흙길 열 곳에 대한 맛깔스런 소개글이다.
혼자서, 걷기만으로, 그것도 여자가. 이런 소리가 나올 법도 하다. 쉽지만은 않았겠지만, 울기도 많이 울고 혼자 후회하고 회의도 했겠지만, 결국 그는 해냈다. 스스로 어디 하나 잘난 구석 없다는 사람. 자신 인생의 최고의 용기를 내서 올랐다는 그 길의 끝에 서서, 길은 위대한 학교였다고 말하는 아름다운 이. 서른 둘의 여름에, ‘익숙한 것들과의 헤어짐을 꿈꿀 수 있는 용기’로 다시 북녘 땅과 시베리아와 유럽과 아프리카를 말하는, 아름다운 이.
땀과 눈물의 흔적이 남아있는, 싱그럽고 향기로운 추억이 깃든 사진들을 보며, 나는 다시 ‘떠남’을 꿈꾼다. 일상에 묶여 지치고 느슨해질 즈음 짐을 꾸리고 떠날 수 있는 그 용기가, 나에게도 있기를 소망해본다. 그리고 답답한 일상에서 사과 꽃 흩날리는 그 길만 떠올리고 있던 나에게 한줄기 힘을 불어넣어 준 이 책에 감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