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플라타, 바다 같은 강
유기섭
차라리 바다라면 이해가 빠를 것 같았다. 안내자가 강이라고 하니, 그렇구나 했지 처음에는 바다인 줄 알았다. 유람선 2층 선창에 기대어 사방을 살펴보니 끝이 보이질 않는다. 망망대해를 항해하는 듯한 착각 속에 빠져든다. 아침 여섯시 반,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우루과이 몬테비데오로 가기 위하여 서둘렀다. 쾌속선 부케버스를 타고 라플라타 강을 항해한다.
옛날 강 유역에서 은이 발견되어 스페인 국왕이 ‘은의 강’ 이라고 이름 붙였다는 라플라타 강, 파라과이의 파라나 강과 우루과이의 우루과이 강과 합쳐져서 대서양으로 흘러든다. 망망대해가 아닌 망망대강이라고나 할까. 좁은 쪽 강폭이 4킬로미터고 최대강폭은 250킬로미터다. 세계에서 강폭이 넓기로는 제일이라고 한다. 강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바다라 함이 어울린다. 물빛과 파도의 높이, 당당한 모습에 잠시 할 말을 잊는다. 지금까지 보아온 강의 모습과는 너무 다르다. 내가 보아온 강들은 대개 여성적인 조용함과 침착함이 대표적이었는데, 오늘 만난 강은 두 눈을 부릅뜬 장수의 기개와 용맹성, 충천하는 야성을 내뿜는다.
사방 어디를 보아도 끝이 보이지 않는다. 홀로 항해하는 쾌속선만이 시야에 들어온 유일한 존재일 뿐 아무 것도 없다. 도나우 강이나 나일 강은 주변에 있는 고색창연한 옛 건물들이 강의 흐름과 경관을 더욱 돋보이게 하였는데, 라플라타 강은 원시적인 멋을 풍긴다. 마치 지구가 생성하기 전의 세상길을 무작정 더듬거리며 찾아 나선 것 같은 미망의 세계로 이끈다. 바다 같은 강이라면 띄엄띄엄 섬을 품을만도 한데 눈에 들어오는 것은 광활한 공간뿐이다.
멀리 아마존 밀림지대에서부터 발원하여 흘러내리는 물줄기가 대서양으로 흘러들기 전, 이 강에서 모인다. 오랜 세월 아마존 밀림의 야생 향기를 간직한 채, 먼 길을 달려온 강은 수많은 세월이 흘러가도 그 흐름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강을 왕래하는 배는 유람선 역할도 하지만, 우루과이와 아르헨티나 양국 사이를 오가며 국경을 통과하여 이동하는 수단으로도 운행된다. 강이 바로 국경선 역할을 하는 셈이다. 상대국으로 갈 때는 선착장에서 입국수속을 거쳐야한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끝없는 수평선만이 전개되고 갈 길을 재촉하는 배의 엔진소리만 생명의 소리로 메아리친다. 처음 작은 물줄기로 시작하여 이렇게 큰 강을 이루기까지 얼마나 많은 세월의 끈기와 인고가 필요했을까. 지구가 생성된 후부터 끊임없이 채워진 물방울이 모여 이런 강을 이루게 된 기적이 나타나게 된 것이리라.
어렸을 때 우리나라의 현 위치에서 땅 밑을 일직선으로 파 내려가면 도달하는 곳이 우루과이라는 말을 들었다. 어린 소견에 반신반의 하였지만 호기심은 깊어만 갔다. 그때도 먼 나라를 동경하는 꿈을 가진 사람들은 상상의 나래를 펴며 언젠가 바램이 이루어질 날을 손꼽아 기다렸을 것이다. 나에게도 그것이 동경의 씨앗이 되었는지 모른다.
온갖 영욕의 세월을 살아온 강의 역사가 궁금하다. 그 옛날 강 유역에서 할거하며 조금이라도 땅을 넓히기 위하여 수많은 다툼으로 점철되었을 강의 역사. 모든 것을 포용하며 넓은 도량으로 맞아들이는 강의 큰 뜻을 보지 못하고 펼쳐지는 정경에만 심취해있는 좁은 시야가 부끄럽다. 오늘날 라플라타 강 유역에는 신흥개발국 브라질과 과거의 영광을 되찾기 위하여 매진하고 있는 아르헨티나, 그 중간에 우루과이가 끼여 있다. 두 나라 사이에 끼인 작은 나라, 우루과이가 내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우리와 처한 지리적 상황이 비슷해서일까.
세상의 아름다움과 온갖 추함을 포용하는 여유를 가지고 흐르는 강, 나는 그간 얼마나 관용과 겸양의 마음으로 살아왔던가. 주변을 살필 여유도 없이 살아온 지난날을 돌아보며 바다 같은 너른 도량을 배우고 싶다. 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나아가는 배의 뒤를 따르던 갈매기들도 보이지 않고 까마득한 수평선만이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거듭한다. 우리가 탄 배는 3시간여의 항해 후 몬테비데오 항에 도착하였다. 남한보다 조금 큰 면적을 가진 우루과이는, 우리와는 정반대의 위치에 있다. 지구의 반대편에는 어떤 사람들이 살고 있을까, 궁금해 하던 어린 시절의 소박한 꿈이 현실화하는 오늘, 이국의 하늘도 파란빛으로 동양의 이방인을 맞이하고 있었다.
수많은 사연들을 모두 품어 안고 말없이 흐르는 라플라타 강, 먼 옛날부터 도도한 흐름을 이어온 강의 품은 속뜻을 어찌 알아차릴 수 있으랴. 지구 반대편 이방인에게 광대무변한 라플라타 강의 정기를 허용한 이 순간, 세계의 고대문명이 강을 중심으로 번성하였듯이 훗날 라플라타 강 유역에서도 새로운 문명이 싹트게 되기를 빌어본다.
( 수필문학 2009년 4월호 게재)
첫댓글 가기 어려운 나라에 다녀오셔서...글까지 쓰시고...이곳에 선사해주시고...여러가지로 고맙습니다...삼현님 ! 라플라타강의 그 장엄함이 눈앞에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