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슬픈 구원
"축하, 축하, 또 축하!"
기쁨이 넘쳐 내달아온 강숙자가 거침없이 손을 내밀었다.
"축하하긴요, 시시한 대학."
유일표는 쑥스러운 얼굴로 주위를 살피며 강숙자의 손을 맞잡았다.
사람 많은 빵집에서 여자와 악수를 하는 건 처음이었다. 외국 영화에서
나 보아온 그 행위는 무척 낯설고 어색스러웠다.
"어머, 배부른 소리 하지 말어. 국가고시 합격자가 한 명도 나오지 않
아 초상집 된 고등학교가 한둘이 아니라는데. 그 대학도 엄연히 일류대
학인데 얼마나 장해. 그럼, 장하고말구. 난 일표가 대학생이 되길 얼마
나 기다렸다구."
시간이 지나도 강숙자는 손을 놓지 않고 자기 말에 맞추어 왼손으로 유일표의 손등을 토
닥거리거나 쓰다듬으며 오른속에 점점 힘을 가하고 있었다.
"장하긴요. 과도 한심하고....."
유일표는 민망함을 견디기 어려워 손을 빼려고 꼼지락거렸다.
"에이, 이제 보니 일표는 기본 예의가 없네. 악수는 상대방이 손을 잡
는 강도에 맞춰서 맞잡아야 하는 거야. 악수는 순수한 마음의 교환이거
든. 근데 일표는 이게 뭐야. 왜, 남들이 볼까 봐 창피해서? 그게 무슨 상
관이야. 남들한테 피해주는 것 아닌데. 빨랑 내가 보내는 만큼 축하를
받아들여. 그렇지 않으면 오늘 내내 이 손 안 놓을 테니까."
"네, 좋아요. 축하 고마워요."
유일표는 씩 웃으며 강숙자의 손을 지그시 맞잡았다.
"그래, 철학과는 나도 뜻밖이었어. 그치만 얼마나 매력적이야. 남자라
고 생긴 것은 그저 어중이떠중이 법대, 상대, 의대로 박 터지게 몰려가
는 꼴이란. 아니, 새로 유행하기 시작한게 또 있지. 그 잘난 약대, 그따
위 것들에 비하면 철학과는 얼마나 고상하고 멋져. 어찌 보면 일표한테
잘 어울려."
악수를 끝낸 강숙자가 빵집의 아가씨를 손끝으로 불렀다.
"글쎄요 ..... 밥 굶어죽을지도 몰라요."
유일표가 씁쓰레하게 웃었고,
"걱정 마. 내가 먹여살릴 테니까."
강숙자의 환하게 웃는 농담이었다.
유일표는 '군중 속의 고독'이라는 말을 얼핏 떠올렸다. 지금 축하를
받고 있지만 마음은 한없이 쓸쓸했고, 자신의 깊은 속내를 모르기로는
강숙자나 다른 사람들이나 그 거리가 마찬가지라는 사실이 외로움을 더
하게 했다.
"글세, 뭐라고 말하기 참 딱한데..... 그러니까..... 솔직하게 말하
자면 말야, 반공주의는 앞으로 갈수록 강화될 것이 분명해. 그리 되면
그 문제가 걸리지 않을 분야가 어디인지 잘 알 수가 없구나. 그게 꼭 병
역기피자가 모든 사회활동을 금지당하는 것과 다를 게 없거든. 학과 선
택은 최종적으로 형하고 의논하는 게 좋겠다."
판검사 훈련을 받고 있는 이규백 형은 아버지의 월북 문제에 대해서
이렇게 대답했다. 그 문제는 ROTC 장교가 될 수 없듯이 법대를 가서
고등고시에 합격한다 하더라도 판검사가 될 수 없었다. 신원조회라는
것을 필요로 하는 모든 분야에서 아버지의 월북은 극약이었다. 그것을
피할 수 있는 학과를 정하지 못하고 갈팡질팡하다가 이규백 형을 찾아
갔던 것이다.
이규백 형은 좋게 말하면 말조심을 한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책임회
피를 한 거였다. 문과 대학의 모든 학과를 펴놓고 밤새도록 생각해 보아
도 사회 진출을 하는 데 신원조회를 피할 수 있는 학과는 하나도 눈에
띄지 않았다. 마지막 남은 단 하나, 대학에 가지 않는 것이었다. 대학 공
부하지 말고 농사를 짓거나, 대학 등록금을 밑천삼아 일찌감치 행상이
라도 시작하는 길밖에 없었다.
입시 서류를 내야 하는 마지막 단계에서 철학과로 정해 형에게 편지
를 보냈다. 취직이 잘된다는 학과를 나와서도 고등실업자들이 드글거리
는 세상에서 철학과는 실업과를 넘어 굶을과로 통하고 있었다.
".....그래, 잘 생각했다 일단 다녀라. 대학공부는 먹고살자고만 하
는 것이 아니다. 속단하지 말고, 먼저 좌절하지 말고.....우리, 어머니
를 생각하자....."
형의 답장은 어느 때 없이 짧았다.
"빵 어서 먹어. 양복 맞추러 가게."
강숙자는 여전히 기쁨 넘치는 얼굴로 말했다.
"무슨 양복이오?"
유일표는 의아스럽게 반문했다.
"으응, 일표 양복! 입학 선물이야."
"허 참, 별말 다 듣겠네요. 양복이 나 같은 놈한테 어디 어울립니까.
저한테는 이 물들인 작업복에 군화면 제격이에요."
유일표는 자신의 작업복을 가리키며 헛웃음을 흘렸다. 그 작업복은
새것이 아니라 검정물이 바래 양쪽에 어깨 어름에 불그스름한 기가 드
러나고 있는 헌것이었다. 그는 형이 벗어두고 간 것을 걸친 거였다.
"아니, 그게 무슨 소리야. 대학생이면 사회인인데 격에 맞게 양복 한
벌쯤은 있어야지. 내가 오늘을 위해 돈 모아온 것 모르지? 옛날에 교복
거절한 것처럼 또 거절하면 알지?"
강숙자는 제 눈앞에다 주먹을 쥐어 보이며 유일표를 흘겨보았다.
"하 참, 생각해 보세요. 저 같은 놈한테 양복은 거지한테 비단옷이고
장님한테 색안경이라구요. 모든게 격에 맞아야 되잖아요. 괜한 자존심
때문에 그러는 게 아니니까 이해해 주세요."
유일표는 장난기를 앞세워 밀어붙이려는 강숙자를 똑바로 쳐다보며
침착하게 말했다.
"어쩜, 그렇게 말하는 걸 보니까 정말 의젓한 남자네. 알았어, 그럼 양
복 대신 교복을 해입고 나머지 돈으로 책을 사든지 어쩌든지, 딴 선물을
생각해 보기로 해. 난 꼭 그 액수만큼 선물을 해주고 말 테니까."
"그런 거액의 선물은 기쁨이 아니라 오히려 고통이 된다는 걸 뻔히 알
면서 왜 그러세요."
"일표, 제발 아무 말도 하지 말어. 그동안 쌓여온 내 정이니까. 그렇잖
아도 나 요새 세상 살맛 떨어져 괴로워 죽겠는데 일표까지 날 괴롭히면
어떡해."
강숙자의 눈에는 금세 눈물이 번졌다.
"아니, 왜요?"
유일표는 강 의원이 또 무슨 곤란한 일을 당했나 생각했다.
"말 마, 나 요새 자살하고 싶어. 아버지가 아버지 맘에 든 남자한테 시
집을 가라고 성환데, 사람 환장할 지경이야. 그 상대가 누군지 알아? 이
규백 영감님이셔, 이규백!"
"규백이 형....."
유일표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강숙자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글쎄요..... 그게 그러니까..... 으음....."
유일표는 복잡한 속마음을 뭐라고 표현할 길이 없었다. 이규백이란
이름을 듣는 순간 일어난 놀라움은 놀라움이 아니었다. 그 놀라움 속에
들어 있는 진짜 감정은 그 사실 자체가 아주 기분 나쁘고 싫었다. 그런
감정은 처음 겪는 것이 아니었다. 국민학교 4학년 때였던가, 풍금 잘 치
고 노래 잘하는 담임선생님이 술도가집 아들한테 시집간다는 것이 얼마
나 서운하고 분했던가. 그리고 중학교 1학년 때, 세상을 떠난 누나 대신
정을 나누었던 옆집 누나가 육군 중위한테 시집가는 것을 알았을 때 어
떠했던가. 두 번 다 소중한 것을 빼앗겨버리는 허망함 때문에 밥맛을 잃
었고 학교 가기도 싫었었다.
지금의 심정도 그때와 마찬가지였다. 그런 감정을 애써 감추면서 유
일표는 그동안 강숙자와 그렇게 정이 들었었던가 새삼스럽게 느끼고 있
었다. 언제나 쾌활하고 솔직하고 인정 많고..... 강숙자는 지난 3년 동
안의 고달프고 외롭고 찬바람만 휘몰아친 자신의 서울살이를 부축해 준
적잖은 힘이었고 바람막이였다. 아버지가 고약한 친일파라는 것뿐, 여
자로서 흠잡을 데가 거의 없는 강숙자를 차지하게 될 이규백에게 강한
질투심이 솟았고, 그 가당찮고 엉뚱한 스스로의 감정에 유일표는 쓴웃
음을 짓고 있었다.
"끙끙거리지 말고 솔직히 대답해."
강숙자가 어깨를 늘어뜨린 채 서글픈 얼굴로 말했다.
"이규백이와 결투하고 싶어요."
강숙자의 그런 가엾은 모습에 가슴이 뭉클해져 유일표는 자신도 모르
게 불쑥 말했다.
"어머머머, 어쩜 좋아, 어쩜 좋아. 여기가 빵집이 아니라 우이동 골짜
기나 뚝섬 같은 데면 얼마나 좋겠어. 나 너무나 좋아서 팔딱팔딱 뛰고
막 소리소리 지르고 싶어 미치겠어."
두 팔을 바르르 떨어대는 강숙자의 얼굴은 정말 발갛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그러나 유일표는 이내 풀죽으며 고개를 떨구었다. 완력으로 한다면야
이규백 같은 체구면 둘 아니라 셋도 자신 있었다. 이규백 보다 몸집이 클
뿐만 아니라 주먹을 쓰는 체력에 자신이 있었다. 늘 아슬아슬하고 조마
조마한 서울 살이를 해나가면서 누구를 먼저 때릴 건 없지만 허약하게
얕보여 얻어맞거나, 어떤 위기에 처했을 때 그냥 당하지 않기 위해서 나
름대로 체력단련을 했던 것이다. 돈이 드는 구기는 할 수가 없었고, 돈
이 안드는 철봉 평행봉 링 같은 것을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고 3년동
안 해왔다. 그 덕에 팔씨름 세기로 소문이 났고, 대입 국가고시에서 큰
비중을 차지한 체력검시에서는 거뜬히 만점을 맞았다.
그러나 사람은 완력으로만 겨루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이제 이규백
이란 존재는 감히 어찌해 볼 수 없는 거대한 대상이었다. 강 의원 같은
사람이 사위를 삼으려고 한 것이 벌써 그가 얼마나 대단한 인물이 됐는
지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옛날에 그랬던 것처럼 강숙자도 허전한 바람
만 남기고 이규백에게 시집을 가리라는 것을 유일표는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왜 갑자기 맥이 빠졌어? 그 사람 지위가 겁난 거야?"
강숙자는 얼굴을 찡그렸다.
"몰라요. 결혼식은 언제지요?"
강숙자를 쳐다보지 않은 유일표의 목소리는 퉁명스러웠다.
"무슨 소리야, 지금. 그 남자 싫대니까. 아직 데이트도 한 번 하지 않
았는데 결혼식은 무슨 결혼식."
"체, 그런다고 무슨 소용이 있나요. 결국 결혼하게 될 건데요, 뭘."
"아니야, 난 정말 그런 남자가 싫어. 남보다 머리 좀 좋다고 혼자 잘난
체 다 하고, 공부가 뭐 인간 능력의 다라고 공부 잘 못하는 사람은 무조
건 무시하는 그런 인간들이 고등고시까지 패스했으니 어쩌겠어. 아이
구, 생각만 해도 징그러 우리 아버지가 이규백을 사위 삼으려고 신짝을
붙이는 건 지금 갓끈 떨어진 초라한 처지에서 울타리를 든든히 하자는
것만이 아니야. 이규백이네 동기생들이 군사정권 아래서 첫 번째 합격
자라는 점이 더 중요해. 우리 아버지 판단으론 그들에게 앞으로의 출세
길이 환히 열렸다는 거지. 우리 아버지는 이규백의 판검사 권력이 필요
하고, 이규백이는 우리 아버지 재산이 필요하고, 두 사람이 야합을 해대
는 데 난 중간 이용물일 뿐이야. 그런 걸 뻔히 알면서도 내가 결국 결혼
할 거라구? 어림없는 소리 하지도 말어. 난 죽기가 쉽지 애정 없는 결혼
은 절대로 안 해."
강숙자는 고개를 짤짤 흔들었다.
"....."
유일표는 빈 빵접시에 눈길을 떨군 채, 당신은 결국 그 남자와 결혼할
거야. 판검사 사모님이 되시는 건데,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답답한데 우리 나갈까?"
강숙자가 먼저 일어섰다.
어스름을 타고 부는 실바람 속에 봄기운이 서려 있었다.
"세상에, 대학생이 된 모습이 이렇게 다를 줄은 정말 몰랐어.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는 나하고 키가 비슷했는데 글쎄."
자신에 비해 머리 하나가 더 있는 유일표를 강숙자는 실눈을 뜨고 올
려다보며 더없이 다정하게 웃었다.
"그리 잘 묵덜 못허고 하는디도 키가 쑥쑥 큰다 이. 아부지 탁해서 긍
가 어쩐가....."
유일표의 뇌리에는 어머니의 말이 떠올랐다. 눈물 탓이었는지 어머니
의 말끝은 잦아들고 말았다.
"명동 가주세요, 명동."
강숙자가 시발택시에 오르며 말했다.
머지않아 이런 자유로운 만남도 끝나리라는 생각과 함께 유일표는 가
슴 허전한 쓸쓸함에 젖어들고 있었다.
"술 마실 줄 알아?"
강숙자는 속삭이듯이 물었다.
"담배도 피울 줄 알아요."
"어머나 역시 일표는 매력 만점이야. 담배는 언제부터 배웠는데?"
"한 서너 달 돼요. 벼락치기로 밤샘 시험공부 하면서부터요."
"저런, 저런 불량학생. 딱 퇴학감이었네. 담뱃값이 얼마나 궁했을까."
강숙자가 웃으며 혀를 찼다.
"함께 자취하는 애가 다 댔어요. 개가 골촌데다가 나보다 형편이 낫거
든요."
"어쨌든 멋져. 규율 위반하면서도 자기 할 일 다 하고, 남들보다 먼저
남자의 기본조건을 갖췄으니까."
강숙자는 명동 중에서도 제일 번화한 양장점과 양화점 길목으로 앞장
섰다.
"교복은 학교에서 지정하는 데가 있을 테니까 오늘은 구두를 맞춰. 언
제 신사화 신을 일이 생길지 모르거든."
"글쎄, 그건....."
"잠깐, 잠깐, 다 알았으니까 더 말하지 말어. 또 딴소리하면 나 정말
화낼 거야."
강숙자는 아랫입술을 물며 유일표를 쏘아보았다.
"차암, 이승만 독재 닮았나....."
유일표는 어깨를 늘어뜨리고 말았다.
대학생들의 교복 착용은 재건 국민복을 공무원은 물론 선생들까지 입
게 되면서 함께 시작되었다. 그 명분은 사치 근절 검소한 생활이었다.
그러나 그건 군대식 통일을 기하는 단견에 지나지 않았다. 왜냐하면 대
학생들 절대다수는 사치를 할 수 있는 생활적 여유가 없었다.
유일표는 쭈뼛쭈뼛하며 강숙자를 따라 휘황하게 불을 밝힌 양화점으
로 들어갔다. 서울생활이 4년째지만 양화점에 들어가는 것은 처음이었
다. 그것도 명동에 있는 최고급 양화점을. 괜히 주눅들고 얼떨떨한 기분
을 떼칠 수가 없었다.
"1주일 후에 찾으러 오세요."
깔판의 종이에 발 모양새를 그리고, 줄자로 발 두께를 잰 종업원이 말
했다.
유일표는 양화점을 나오면서도 팔자에 없는 맞춤 구두를 신게 된 것
이 실감나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았다. 청계천 일대에서 팔고 있는 기성
화에 비해 두 배 이상 비싼 맞춤 구두의 값이 잔뜩 부담스럽기만 했다.
강숙자가 뒷골목을 이리저리 돌아 찾아 들어간 곳은 술집이었다. 그런
데 그곳은 보통 흔한 술집이 아니라 새로 유행하기 시작하는 맥주집이
었다. 어둠침침한 붉은 조명등 아래 시끄러운 음악이 출렁거리고 있는
실내에는 여자들도 더러 눈에 띄었다.
"술 잘 마셔요?"
유일표가 의자에 몸을 부리며 물었다.
"왜애? 여자가 술 마시는 게 불만스럽다는 말툰데?"
"....."
"호오, 이제 보니 일표도 남녀차별주의자네? 어쩔 수 없지, 유치원생
도 여자를 우습게 아니까. 그치만 대학생이 됐으니까 환경에서 주입된
고정관념에 빠져 있지 말고 남녀평등 문제도 차츰 생각해 보는 게 좋을
거야." 강숙자는 정색을 하며 말하고는, "너무 걱정하지 마. 술고래는
아니니까. 답답하거나 속상하거나 할 때 어쩌다가 한 번씩 오는데, 맥주
두 잔 정도면 충분해 술을 마시는 게 아니라 분위기를 마시는 거니까."
그녀는 희미하게 웃었다.
역시 강숙자는 맥주 두 잔째를 마시며 술기운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일표네 형 잘 있다고 했지? 으응. 나 요새 유일민이란 사람 가끔 생각
해. 그 사람, 형편이 급하면서도 3년 전에 내 동생 가정교사를 거절한 건
아마 우리 아버지가 친일파라 그랬을 텐데, 장학사에서 찍소리 하지 않
고 편히 밥 얻어먹고 있는 그 수많은 수재들에 비하면 참 장해. 나 이제
사학과 졸업반인데, 그동안 들은 풍월 가지고 생각해 보면 장학사의 머
리 좋다는 것들 다 인간 쓰레기야. 다들 그렇게 비겁하니까 우리 아버지
같은 사람들이 떵떵거리고 폼잡고 살지. 나 할말 많고, 슬픈데 ..... 오
늘 일표가 크게 위로해 줬어."
강숙자의 취기 어린 얼굴에 쓴웃음이 번지고 있었다.
"야, 저기 저 구석에 있는 사람이 누구야? 저 이상한 몸짓 하고 있는
사람 말야. 어디서 많이 보던 얼굴인데."
최주한이 어설프게 담배연기를 내뿜으며 눈짓했다.
"어디? .....으응, 저 사람 몰라? 액션 영화에서 깡패 역으로 잘 나오
는 배우잖아. 라디오 성우로도 나오고."
이상재도 서투르게 담배를 뻐끔거리며 한쪽 눈을 찡그렸다.
"아, 맞다. 맞다. 맨날 박노식이 꼬붕으로 나오는 그 사람이구나. 생김
은 실물이 훨씬 더 낫다 야."
"야, 그 정도로 해서 들리겠냐? 더 큰소리로 해."
이상재가 담배를 끄며 눈총을 쏘았다. 최주한은 움찔하면서도 흥나는
이야기를 멈출 수 없다는 듯 말을 계속했다.
"역시 액션스타로는 박노식이 당할 사람이 없어. 얼굴 야성적인 미남
에다. 남자답게 큼직하면서도 딱 균형잡힌 체구, 손가락 잘라버린 가죽
장갑을 끼고 상대방들을 이리 치고 저리 치고 하는 폼이란 참으로 통쾌
하고 기막히지. 그걸 감히 누가 당하겠어."
"순진하긴. 그거 다 연기야, 연기."
"무식할 때는 입을 얌전하게 닫고 있어야 50점이라도 하는 것 모르
냐? 박노식이는 진짜 복싱선수야. 고등학교 때 벌써 전남 대표선수였다
그거야. 그 사람 연기는 그냥 가짜로 하는 연기가 아니라구. 박노식은
순천사람인데, 그가 쇼단을 따라 내려오면 그때는 순천 뒤집히는 날이
야. 남자들보다 여자들이 더 환장하는데, 그 인기는 광주에서도 마찬가
지야. 한번은 광주 충장로에서 여자들에게 둘러싸여 꼼짝을 못하다가
경찰들이 와서야 풀려났는데, 그 능글맞은 것 같기도 하고 징그러운 것
같기도 하고 그러면서도 여유 있고 정다운 그 사람 특유의 웃음을 사람
들에게 보내며 사라지는데 과연 멋진 사나이더군."
"아이고, 이거 큰 실수챘네. 같은 고향사람인 줄도 모르고. 그거, 진짜
권투선수였다는 건 금시초문이네 ."
이상재는 미안한 듯 웃음지으며 다른 한 가지 말은 꺼내지 않았다. 최
주한의 그런 열렬한 반응은 완력 쓰는 데 약한 그의 열등감의 표현인지
도 모른다 싶었다. 최주한은 대입 체력검시의 성적이 너무 나빠 하마터
면 떨어질 뻔해서 맨 꼴찌로 가까스로 들어갔던 것이다.
"근데 저 사람 지금 뭐 하는 거지? 무슨 연기 연습하는 건가?"
"그런 것 같은데, 저 자꾸 들여다보는 게 방송국 대본이고, 저쪽 건너
편이 KBS잖아."
"글쎄, 성우들도 진짜 배우들처럼 저렇게 손짓발짓하고 얼굴도 찡그
리고 그러나?"
"아마 그래야 될걸? 방송극 들어보면 책 읽는 것 같지 않고 아주 실감
나잖아 성우라는 게 말로 하는 배우라는 뜻이니까."
"근데 저 성우들도 이제 한물가게 생겼잖아. 작년 말에 텔레비전 방송
국이 생겼으니 말야."
"응, 그거 그렇겠는데. 텔레비전 때문에 영화 다 망하게 생겼다고 영
화계가 벌써부터 시끌시끌 야단이잖아."
"나야 영화업자들 사정은 잘 모르겠고, 국민들이 라디오를 반도 가지
고 있지 못한 상태에서 과연 텔레비전 방송이 필요한 것인지 의문이야."
"그래, 밥술이나 먹고 사는 사람들이나 안방에 영화관 하나씩 들여다
놓는 혜택을 누리는 거지. 텔레비전 한 대 값이 쌀 열 가마값이라니까
말야. 빈부격차의 위화감만 더욱 커지고, 정부에서 무슨 짓을 하는 건
지 원."
이상재가 쓴 입맛을 다셨다.
"응, 저기 허진이 왔다."
최주한이 문 쪽을 향해 팔을 흔들며 웃었다.
"일표는 어떻게 됐어?"
허진은 가까운 거리의 이상재와 먼저 악수를 나누며 다급하게 물었다.
"글쎄, 아무리 알아봐도 알 수가 없어."
이상재는 얼굴에 금세 그늘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게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니야. 무슨 큰 문제가 아니고서야 우리한
테까지 그렇게 소식을 끊을 수가 있나?"
최주한이 긴 한숨을 토해냈다.
"비관 자살 아닐까?"
"아니, 왜?"
"그럴 이유가 뭔데?"
최주한과 이상재가 동시에 되물었다.
"아니, 느네들 일표네 딱한 가정 사정을 모르는 모양이구나? 아버지
가 월북하신 거 말야."
"뭐? 월북?.
"그게 무슨 소리야?"
이상재와 최주한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으응, 그게 말야.....느네들 셋이 내 병문안을 온 다음 며칠 뒤에
일표 혼자서 또 왔었는데, 그때 날 위로하느라고 자기네 집안 형편을 다
얘기했어. 자기는 빨갱이의 자식으로 감시당하면서 장래 희망이 아무것
도 없이 사는데, 너는 독립투사 자손으로서 너무 떳떳하니까 이까짓 가
난이나 병 같은 것에 마음 약하게 굴복하지 말고 힘내라며 날 위로하는
거야."
"야, 그렇게 대충 말하지 말고 자세하게 얘기해 봐."
최주한이 담배를 뽑으며 말했고,
"아니, 넌 중학교 동창인데도 그런 걸 몰랐어?"
이상재는 핀잔하듯 말하며 그때를 퍼뜩 떠올렸다. 바뀐 시험 제도에
대해 설명을 듣던 날 유일표가 고민했던 것은 어머니가 아픈 것이 아니
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러니까 말야, 그 일로 당하는 고통이 우리들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데 말이지..... "
허진은 유일표의 이야기를 해나가기 시작했다. 그런 그의 얼굴에는
이제 별다른 병색은 보이지 않았다.
"..... 내 생각에는 아무래도 그 일 때문에 또 무슨 사태가 벌어진 것
같은데....."
허진이 이상재와 최주한에게, 너희들은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눈으로
묻고 있었다.
"일표가 그런 고통 속에서 어쩔 수 없이 철학과를 가다니 참 기막히구
나. 그나저나 네 말이 맞는 것 같은데 어떻게 찾지?"
이상재가 침울하게 말했고,
"그래, 우리 눈치가 정확했어. 작년 5,16 직후에 일표가 아무래도 이
상해서 우리가 무슨 근심이 있느냐고 자꾸 물었었잖아. 그때가 바로 형
이 잡혀갔었을 때야. 근데 말야, 이번에 또 무슨 일이 생겨 경찰에서 군
대 나간 형 대신 일표를 잡으려고 하니까 눈치 빠른 일표가 어디로싹
피해버린 거 아닐까?"
최주한이 둘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럴 수도 있는데, 어쨌거나 이 일을 어떡해야 좋지....."
허진이 근심스러운 한숨을 내쉬었다.
최주한과 이상재는 담배를 피워대고, 허진은 성냥개비를 부러뜨리며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었다.
"야 허진, 그 의논할 일이란 일표가 없으면 안 되는 거냐?"
이상재가 담배를 끄며 그동안 묻어두었던 궁금증을 드러냈다.
"글쎄, 뭐 꼭 그렇지는 않은데 ..... 계획에 좀 차질이 생기기는 하지."
허진은 못내 주저하며 말했고,
"무슨 일인지 속시원하게 얘기해 봐. 우선 우리끼리 들어보자."
최주한이 의자에서 등을 떼며 다가앉았다.
"응, 그게 다른 게 아니고 내 입원비 보증금 빌려주신 분 있잖아. 그분
이 날 도와주시겠다고 대학 갈 공부를 하라는데, 그분이 나한테 한 가지
부탁하시는 게 있어. 그분이 데리고 있는 근로재건단 단원들이 30여 명
인데, 개네들한테 글을 좀 가르쳐달라는 거야."
"야학 같은 거 말이냐?"
이상재가 말을 받았다.
"그래, 바로 야학이야. 낮에는 넝마를 줍고 밤에 초등반, 중등반으로
나눠 두세 시간씩 가르쳐주기를 바래. 그런데 말야, 초등반에 국어,산
수, 중등반에 국어, 수학, 영어를 가르치려면 선생을 아무리 적게 잡아
도 넷은 필요하잖아."
"그건 그렇지. 그런데 좀 미안한 말이지만 그분은 널 어떻게 도와줄
건데 그런 요구를 하는지 알면 안 될까?"
최주한이 말틈을 비집고 들었다.
"응, 검정고시 공부를 하는 동안에는 책값과 생활비를 대주고, 대학에
가게 되면 학비와 생활비를 대주실 모양이야. 확실하게 한 말은 아니고
대충 그래."
"그거 아주 호조건이다. 가난하고 불쌍한 애들을 위해서 대학생들이
야학에 그냥 봉사활동도 하는 판인데 널 그렇게 도와준다면 우리가 당
장 나서야지."
최주한이 흔쾌하게 말했다.
"그래, 그거 정말 잘된 일이다. 일표와 소식이 닿을 때까지 우리 동창
들 중에서 누구 하나를 끌어다 쓰기로 하고 빨리 시작하자. 그래야 너도
맘 편하게 공부를 시작할 수 있을 테니까."
이상재도 밝게 웃으며 동의했다.
"다른 사람 생각할 거 뭐 있냐. 장경식이 끌어오면 되지."
"경식이? 글쎄, 그 새끼 그거 다 좋은데 한 가지 곤란한 점이 있잖아?
그 야학의 분위기가 독특할 텐데 경식이가 자연스럽게 어울릴 수 있을
까? 개는 친일파 문제에 관해서는 언제나 생각이 삐딱하니까 말야."
"응. 그런 점이 없진 않은데, 경식이도 자신의 그런 점을 꽤나 괴로워
하고 있어. 친일을 비판하자니 아버지한테 불효하는 것 같고, 아버지 편
을 들자니 친일을 옹호하는 것 같고, 걔도 어찌 보면 참 불행한 놈이야.
우리가 경식이 입장이 됐더라도 아주 괴롭고 난처했을 거야. 이런 기회
에 경식이를 끌어들여 자연스럽게 생각을 바꿀 수 있도록 해주는 것도
좋지 않을까? 경식이는 그래도 홍성기하고는 다르잖아."
"으응, 그것도 괜찮은 방법이긴 한데. 물론 경식이가 수치도 모르고
염치도 없이 나대는 홍성기하고야 많이 다르지 뻔뻔한 홍성기나 당당
한 그의 아버지나 아주 잘 어울리는 부전자전이야."
"그래, 그 붉은 자지. 아 참, 너 그 얘기 들었어? 붉은 자지 아버지가
중앙정보부로 뽑혀 갔다는 거 ."
"뭐라고? 그 악질 고등계 형사가 중앙정보부로 뽑혀가? 아주 승승장
구 출세로구나. 말끝마다 그저 혁명, 혁명 해대면서 잘하는 짓들이다."
"야, 야, 말 조심해. 혁명정부 욕하다가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아주 혼
쭐났다는 소문들 듣지도 못했어?"
허진이 황급히 말하며 주위를 살폈다.
"붉은 자지 그런 게 법대를 갔으니, 그게 판검사 되면 사람 여럿 잡을
텐데 말야."
이상재가 언짢은 얼굴로 혀를 찼고,
"그놈이 서울 법대 못 들어간 게 천만다행이지. 그놈 대가리나 불량기
로는 고등고시 안돼. 고등고시가 나이롱뽕인가?"
최주한이 노골적으로 험담을 했다. 나이롱뽕은 새로 퍼지고 있는 화
투놀이의 한가지였다.
"아니, 꼭 그렇지도 않아. 걔네 아버지의 최대 소망이 아들을 판검사
만드는 거라는데, 붉은 자지가 말이지, 즈네 아버지가 평생 형사질하며
판검사들 앞에서 빌빌 기죽어 살아온 심정을 이해하고 마음 독하게 먹
으면 고등고시 패스 못할 것도 없다구. 사실 고등고시가 뭐 별거냐? 우
리 정도 머리 플라스 집중적 노력이면 되는 거잖아."
"그래, 홍성기 걔 함부로 보면 안 돼. 중학교 때 나하고 한 반이었는
데, 거칠기도 하고 독기도 있고 아주 묘해. 수학시험을 50점 맞고 선생
님한테 야단을 맞으면 다음 시험에서는 100점을 맞기도 해."
허진이 무언가 생각 깊은 얼굴로 말했다.
"맞어, 주먹 쓰기도 좋아하고, 붉은 자지 그게 아주 괴물이야."
최주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필 '성기'인 그의 이름은 짓궂은 아이들사이에서 '자지'로 변했고,
거기에다 성이 합해져 '붉은 자지'로 별명이 굳어지고 말았다.
"그럼 야학은 어디서 하는 거지?"
이상재는 남아 있는 커피를 마셨다.
"응, 거기 근로재건단 합숙소. 여럿이 쓰는 방들이니까 바로 교실을
겸용할 수 있대."
"시작은 언제부터고?"
최주한이 담배를 끄며 물었다.
"그분은 빨리 시작하기를 바라는데 어쩌면 좋지?"
허진이 둘의 눈치를 살폈다.
"그럼 이러고 있지 말고 장경식이를 찾아가자 허진이 너 공부가 급
한데 ."
이상재의 말에 그들은 함께 일어났다.
"그 단장은 유식하냐?"
"아니, 학교 못 다녔대. 독학으로 겨우 읽고 쓴다고 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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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래님의 한강
한 강 = 제 1 부 격랑시대 (3권)ㅡㅡㅡ 40. 슬픈 구원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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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02.10 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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