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산은 예로부터 유난히 나무가 빽빽하고 짐승이 많아 ‘왕의 사냥터’로 유명했다.
단종은 청계산에서 두 번 사냥했고, 세조‧성종은 청계산에 와서 주로 사냥하는 것을 구경했다.
‘세조실록’에 보면 ‘짐승 잡은 것이 많았다’ ‘새를 잡은 것이 많았다’는 기록이 나오고
이들이 잡은 동물의 종류로는 사슴 노루 멧돼지 토끼 등이 있다.
청계산은 산자락이 깊고 넓어 나라가 평안할 땐 왕의 사냥터로 주로 이용했다.
나라가 혼란스럽고 탐관오리가 들끓을 때는 산적과 범죄자들이 들끓었다고 한다.
조선 초기 단종과 세조, 성종과 연산군 등이 주로 청계산에서 사냥을 즐겼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당시 청계산에서 각종 새들과 노루, 멧돼지, 토끼 등을 많이 잡았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시대 왕들이 사냥을 했던 실제 이유는 개인적인 유희보다는 중국의 감시를 벗어나 군사를 훈련하고,
사람과 곡식을 해하는 맹수의 포획하는 데 있었다.
“제물포를 휘젓던 도적들이 포도청 군사들에게 쫓겨 청계산으로 숨어드니, 나무를 베어 그들을 일망타진해야 한다”
중종 때 어느 경기관찰사가 상소를 올려 이같이 말한 걸 보면 청계산이 은둔자들에게도 안성맞춤이었던 모양이다.
연산군이 특히 즐겨 찾은 사냥터는 능선의 비탈면이 완만하고 산세가 수려한 청계산이었다.
그가 청계산에 한번 거동할 때에는 약 5만명이나 되는 어마어마한 인원이 동원되곤 했다.
사냥을 위해 징집한 군사 3만명에 대신들로부터 하인 5~10명씩을 차출하여 2만명의 인원을 보탠 것이다.
만약 이에 응하지 않는 신하가 있을 시에는 사헌부에서 잡아들여 죄를 묻게 했다.
1505년(연산 11) 10월 25일 연산군은
“오늘 눈이 올 징조가 있으니 박숭질, 권균 등을 시켜 청계산에 가서 사냥하는 것을 감독하라”는 명을 내렸다.
그날 저녁 좌의정 박숭질 등이 청계산으로부터 돌아와 잡은 것을 임금에게 바쳤는데, 포획물은 통틀어 꿩 한 마리에 불과했다.
그것을 본 연산군은 “정승으로서 5만명을 데리고 가서 겨우 꿩 한 마리를 잡았는가”라고 비웃었다.
사냥하러 청계산에 간 국왕들은 수원도호부 관아까지 가서 숙박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과천관아에서 숙박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국왕은 온양온천으로 휴양을 떠날 때 반드시 관악산에 올라 제사를 지내야 했기에 과천행궁에서 머물렀던 것이다.
당연히 과천관아는 국왕의 주정소 역할을 하였고 자연스럽게 행궁으로 이용되었다.
조선 후기에 청계산 일대로 사냥을 나간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주로 조선 초기에 행궁으로 사용된 것으로 파악된다.
연산군은 자신의 사냥터를 만들기 위해 민간인의 출입을 통제하는 '금표'를 세우고 금표 내에 있는 민가를 강제로 철거해
무고한 백성들을 내쫓기도 했다고 한다. 이런 일이 반복되니 백성들의 원성과 분노가 아주 컸다고 한다.
보다 못한 신하들이 연산군에게 쓴소리를 하였다. 연산군은 이런 말들을 전혀 귀담아듣지 않았다.
"전하, 지금 청계산에서 사냥을 하시면 그곳의 농부들이 농사지은 벼를 대부분 수확하지 못했을 것인데
자칫 사람과 말이 벼를 밟아 손상시킬까 염려됩니다."
영의정 한치형이 왕에게 아뢰웠다. 연산군이 사냥을 나서면 병사와 노비가 5만명이나 동원되었다고 한다.
그들이 짐승을 쫓아 논과 밭을 헤집고 다니면 그야말로 쑥대밭이 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한치형이 이렇게 아뢴 것이다.
지금이 바로 사냥할 시기이다. 백성들이 수확을 하지 않은 것은 백성들의 잘못이니 이 때문에 사냥을 그만둘 수는 없다!"
연산군은 기가 막힌 대답을 내놓는다.
백성들의 삶이나 형편을 헤아리기는커녕 자기 때문에 벌어질지도 모르는 일의 책임을 오히려 백성의 탓으로 돌린 것이다.
성종실록(성종 6년 1475)에 나오는 청계산 사냥과 관련한 기사이다.
"청계산에서 사냥을 구경하고 돌아오다 한강의 바람이 사나워서 방선을 타고 건너다"
"청계산 사냥에서 사슴을 쏜 은천군에 녹비 1장을 하사하다"
성종은 청계산에서 노루·사슴·멧돼지·토끼 등 25마리를 잡아 종묘에 바쳤다. 지금도 청계산엔 멧돼지와 너구리가 산다.
왕이 사냥할 때 짐승이 포위망을 뚫고 빠져나가면 해당 장수나 병졸은 큰 형벌을 받았다.
단종 2년(1454) 10월 2일, 경기도 청계산 사냥 때 좌상대장(左相大將) 성원위(星原尉) 이정녕(李正寧)과
위장(衛將) 봉석주(奉石柱) 등에게 참형을 내려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 것이 좋은 보기이다.
이정녕은 부마(駙馬)이고, 봉석주는 정난공신(靖難功臣)인 덕분에 특별 사면되었다.
또 화살에 표를 붙여서, 누가 짐승을 얼마나 잡았는지 알 수 있도록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