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손암(巽庵)· 정약전 (丁若銓)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나주(羅州)이며 자는 천전(天全),
호는 손암(巽庵)·연경재(硏經齋) 매심(每心)이다. 항진(恒鎭)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지혜(志諧).
아버지는 진주목사 재원(載遠)이다. 어머니는 해남윤씨(海南尹氏)로 윤덕열(尹德烈)의 딸이다.
정약용(丁若鏞)의 형이다.
정약전의 본관은 압해(押海)였다. 지금은 전라남도 신안군에 속한 섬이다.
조선시대에는 나주에 속한 압해(押海)이다. 압해 정씨는 나주 정씨로도 불리었다.
팔대옥당(八代玉堂)이라고 자랑할만큼 대단한 명문가이다.
선조 여덟 명이 내리 옥당(玉堂) 홍문관(弘文館) 관리를 지냈다고 한다.
그 팔대옥당의 전통은 정약전의 5대조 정시윤(丁時潤) 대에서 끊긴다.
숙종 20년(1694)의 갑술환국으로 서인들이 집권한다. 이때 남인 영수 우의정 민암(閔黯)이 사형당했다.
정시윤은 이 환국 때 겨우 목숨을 건진다. 2년 뒤 남인으로는 드물게 세자시강원 필선(弼善)에 재등용되었다.
그는 그 필선 직에 나가지 않았다. 심한 당쟁이 더이상 싫었다. 서울을 떠나 시골로 가기로 결심했다.
북한강과 남한강이 서로 만나면서 경안천(慶安川)이 흘러 들어오는 아름다운 풍광의 마재로 낙향한 것이다.
서인 노론이 계속 집권하면서 정시윤으로부터 그 후손들은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그의 외가도 당쟁에 휘말린다. 어머니 윤씨의 할아버지는 문인화의 대가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이다.
정약전 형제의 뛰어난 그림 솜씨는 공재 윤두서의 기질을 타고난 것이다.
노론의 영수 송시열과 맞섰던 남인 영수 고산 윤선도는 윤씨 부인의 증조부 윤이석의 조부였다.
한때 송시열과 역적 논쟁을 주고 받으며 싸웠던 윤선도의 뜨거운 피가 정약전 형제에 흘렀던 것이다.
정약전 형제는 어린 시절부터 외가 형제들과 가깝게 지냈다.
정약용과 동갑이었던 윤지눌(尹持訥)과 육촌형 윤지범(尹持範) 등이 그들이었다.
정약용은 평소 "나의 정분(情分)은 외가에서 물려받은 것이 많다"고 자주 회상했을 정도이다.
그의 외가도 천주교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정조 15년(1791) 부모의 신주(神主)를 불태웠다가 사형당한 진산사건의 주인공 윤지충(尹持忠)은
정약전의 외육촌 또는 외재종이었다.
영조가 탕평책을 내세우면서 정약전의 아버지 정재원이 처음으로 벼슬에 나선다.
영조가 정재원에게 경기전 참봉을 제수한 것이다. 그는 과거 출신이 아니라 높은 벼슬은 하지 못한다.
음직으로는 드물게 형조좌랑(정6품)이라는 요직까지 오른다.
1776년 아버지 정재원이 호조좌랑(戶曹佐郞)이 되어 서울에서 살게 되면서 성호(星湖) 이익(李瀷)의 학문을 접하게 되어
영향을 받았다. 권철신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다. 같은 문도인 이윤하, 이승훈, 김원성 등과 함께 학문을 닦았다.
그가 권철신의 문하로 들어갔을 때는 이미 권철신이 양명학(陽明學)을 수용한 뒤였으므로 정약전도 자연스럽게 양명학을
계승하게 되었다. 정약전은 서학도 접하였다. 이벽을 통하여 알게 되었으며 종교 활동에 상당히 열심이었다.
1783년(정조 7) 사마시에 합격하고, 1790년 증광문과에 급제해 전적·병조좌랑 등을 역임했다.
1800년 정약전을 아끼던 정조가 죽는다.
순조가 즉위한 뒤 정순대비의 섭정과 함께 천주교 탄압이 시작되었다.
1801년 신유박해 때 정약종은 그의 아들과 함께 순교하였다. 정약전과 정약용은 취조를 받은 후 귀양길에 오르게 되었다.
정약용은 경상도 장기로 유배되었다가 전라도 강진으로 옮겨지고 정약전은 신지도에 유배되었다가 흑산도로 옮겨졌다.

손암 정약전은 흑산도 섬에 갇혀 살다가 그 섬 밖으로 한발짝도 내딛지 못한 채 비극적으로 비참하게 죽었다.
정약전은 소흑산도(이하 우이도)에서 9년, 대흑산도에서 7년을 갇혀 살았다.
흑산도는 서남해 전남 신안군의 진한 쪽빛 바다 한가운데에 떠있는 섬이다.
그는 유배지 흑산도로 가는 길에 “아아 이것은 지옥행이다”고 외친다.
“지긋지긋하여 눈을 감아 버렸다. 악몽 같은 생각들이 밀려들었다.
그들은 왜 나를 하필 머나먼 고도인 흑산도로 유배 보내는가?
이 배에 오르면서 내 삶은 나락의 끝장, 물지옥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는 흑산도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복성재(復性齋)를 짓고 섬의 청소년들을 가르치며 저술활동을 하다가 16년 만에 죽었다.

유배지에서 10여 년간의 정성을 쏟아 저술한 자산어보에는 흑산도 인근 해역의 226종의
해양생물을 망라되어 있다. 어류를 비롯하여 해조류․ 패류․ 새우류․ 복족류(腹足類) 및
기타 해양 생물의 자세한 특징과 쓰임새, 약성(藥性)까지 언급되어 있다.
자산어보의 머리글에 그가 이 책을 저술하는 의도와 바램이 잘 나와 있다.
여기에는 그의 실학자로서의 성격이 잘 나타나 있다고 할 수 있다.
"후세의 선비가 이를 수윤(修潤)하게 되면 이 책은 치병(治病)․ 이용(利用)․ 이치(理致)를
따지는 집안에 있어서는 말할 나위로 없이 물음에 답하는 자료가 되리라.
그리고 또한 시인(詩人)들도 이들에 의해서 이제까지 미치지 못한 점을
알고 부르게 되는 등 널리 활용되기를 바랄 뿐이다."
그는 자산어보를 저술하는데 마을 사람이었던 장덕순(昌大)의 도움을 받았다.
또한 그 지역인들의 도움을 받아 방대한 양의 해양생물의 생태와 습성에 대해
정리할 수 있었다. 그는 단지 백과사전식으로 정리한 것뿐 아니라 이 책을 통해 백성들이 실생활에 필요한 정보를 얻고 그들의 삶에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을 갖고 저술했다고 볼 수 있다.
"공(정약전)은 바다 가운데 들어온 때부터는 더욱 술을 많이 마셨는데 상스러운 어부들이나 천한 사람들과
패거리가 되어 친하게 지내면서 다시는 귀한 신분으로서 교만 같은 것을 부리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섬사람들이
기뻐하며 서로 싸우기까지 하면서 자기 집에만 있어 주기를 원했다." -다산의 <선중씨묘지명(先仲氏墓誌銘)>에서-
정약전은 섬 생할에서 학문에 몰두하는 대신 어부나 천인들과 어울리면서 술을 마셨다.
그는 서학에 깊은 관심을 가져 당시 중국에 와 있던 예수회 신부들이 번역한 유클리드의 〈기하원본 幾何原本〉을 읽고
깊이 탐구했으며, 이벽의 권유로 〈천주실의 天主實義〉·〈칠극 七克〉 등 천주교 관계 서적을 탐독했다.
흑산도에 유배되어 있을 때 지은 〈자산어보 玆山魚譜〉는 흑산도 근해의 수산생물을 실제로 조사·채집·분류하여
각 종류별로 명칭·분포·형태·습성과 그 이용에 이르기까지 자세히 기록한 것이다.
이 책은 우리나라 최초의 수산학 관계 서적으로서 실제조사에 의한 저술이라는 점에서
그의 학문적 관심이 실학적 성격의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밖의 저술로 〈논어난 論語難〉·〈동역 東易〉·〈송정사의 松政私議〉·〈영남인물고〉 등이 있으나 전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