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도는 어렵지 않음에도 어렵다고 말 할 뿐이다
명당에다 조상의 묘를 쓰면 자손이 흥왕한 다는 풍수설이 지난 1,000년의 이 나라 역사를 지배해 왔다.
엉뚱한 일은 명당을 논하는 대가라 칭하던 인물이 불가의 승려였다는 것이다.
부처의 가름침이 광대무변한들 거짓으로 인성을 속이는 것은 바르지 않다.
이들은 당시 지식층으로 살아남기 위한 수단의 하나로 그들의 주군(主君)을 속여야 했으며 무지막지한 주군의 미래를 화려하게 꾸며 주어야 했던 것이다.
이들이 위나라의 명운을 뒤 흔들어 재력이 있거나 군권을 장악한 자를 위하여 아첨하여 목숨을 붙여 살고자 하는 수단의 하나로 풍수지리설을 말한 것이 이 나라 풍수설의 기원이 된 것이다.
신라 말 고려에 들어서는 혼란의 시기에 궁예나 견훤 같은 당대의 권세가들을 농락하는 수단은 이들 무식한 자들의 귀를 긁어주려면 그들의 후사를 미리 점처주어야 했고, 그 수단의 하나로 자손에 대한 저울질을 하는데 필요한 장차 닦처 올 내세관을 보장 받아 내기 위한 방법으로 이 나라 조선 땅이 자녀 온 특징을 살려내어 그들 나름대로 그림을 그린 것이 곧 오늘의 풍수설이다.
풍수는 점술과 더불어 세상이 어지러운 때일수록 기승을 부려 온 것이 그들만의 독특한 역사였으며 지금까지 연명해 온 수단이요 방법 이였던 것이며 그들은 세상환경이 만들어 준 하나의 뿌리 없는 기생초(寄生草)와 같은 존재였다.
뿌리 없이 자라는 식물 중에 "새삼"이라는 풀이 있는데 이것은 붉은 색으로 주로 콩의 줄기에 기생하며 살다가 콩줄기가 마르는 가을이 되면 살아진다.
이것은 긴 장마가 계속되면 반드시 콩줄기에 들어붙어 연명하는 것이다.
풍수(風水)나 점술(占術)은 모두 난세가 되면 반드시 들고 나서는 뿌리없는 잡설이며 혹세무민(惑世巫民)의 수단이 되어 세상을 논단하는 예정 가격 많았다.
정치가 잘되면 이러한 일은 없으나 정치가 흐려지면 이러한 풍조가 일게 되고, 경제가 흔들리면 민심을 흔들리어 마침내 정치를 뒤집는 수단이 되어 온 것도 역시 오늘의 역사 속에서 많이 읽혀지는 경험이고 우리나라 역사였다.
주로 묘를 쓸 때에 말하는 명당에는 크게 다섯로 나누어
그 조건이 맞아야 명당이라 했다.
용. 혈. 사. 수. 향
먼저 용(龍)이라는 것인데 묘의 배경이다.
묘는 산에만 쓴다는 통념에 근거한 우리나라 반도에서 만 논하는 방식이다. 산의 줄기가 마치 용의 모양처럼 꿈틀거리는 형국을 가지고 웅장한 형용을 갖추어야만 된다는 조건에 불과한 이론이다.
다음 혈(穴)은 묘를 쓸 자리를 말하는 것으로
바로 땅으로부터 기운을 받아야 한다는 조건을 의미한다.
기운이라는 것이 곧 추상적인 표현에 지나지 않지만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하나의 기술에 속하는 것이다.
세번째. 사(紗)는 위치를 정하는 것이고 주로 좌청룡,우백호, 전주작, 배현무라는 형식으로 무덤의 위치를 정하는 방법에 속하는 것이다.
네째, 수(水)는 역시 땅은 물에 의하여 지배되는 것으로써 물의 방향을 의식하지 않으면 무덤의 영속성을 보장받는 방법의 하나로 선택되어야 하는 조건이다.
묘지가 물을 피하거나 물이 흐르는 방향을 의식하여 물의침입을 방어하여 묘지의 장래 수한(壽限)을 보장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다섯, 향(向)으로 이는 묘의 꾸미는 모습을 정하는 것이다. 묘지는 곧 좌향을 정해야 하는데 좌(坐)는 뒷산을 기준으로 방향을 잡고 향(向)은 묘의 정면을 어디로 하냐에 따라 묘지의 안정감을 지키려하는데 있다.
따라서 오래된 조상 묘를 찾는 방법도 주로 족보에 좌향만 알고 산의 이름을 알면 그 위치는 알 수 있게 된다.
우리나라의 산은 주로 백두산을 대맥으로 삼아 골짜기마다 그림 같은 형상을 상상 할 수 있지만, 시베리아나 황하 이북의 벌판, 양자가 넒은 초지에서는 이러한 주맥(主脈)을 찾을 수 없어 무엇보다 주산(主山)이 남기는 기(氣)가 없으며, 기가 없음으로 흐름이 없고 따라서 운(運)이 없으니 곧 자손들이 기대하는 묘에 대한 가치를 느끼지 못하며, 한낱 살아지는 모래언덕이고 잊어지는 그야말로 무덤에 불과하다.
이러한 환경 하에서 묘가 없는 조상은 모르고 자라게 되고, 그 계통과 줄기가 어디에서 온 것인지, 방향을 가늠하지 못하고 떠돌아 다니는 먼지처럼 사는 것이지만 우리나라는 그나마 조사의 묘를 통하여 훌륭하신 조상님과의 대화를 할 수 있는 자손으로서 살아 온 것이다.
이 세상에서 참으로 다행하지 않는가?
훌륭하신 조상님을 모신 자손의 처지에서 볼 때, 묘에서 조상의 유골을 보존해 왔다는 자부심과 함께 오늘의 과학이 또한 이를 뒷받침하여 마침내 훌륭하신 유전인자를 더욱 자손만대에 이어 나갈 수 있게 하는 대화(對話)의 자리가 되어 주었다는 묘지야말로 오늘날 인류역사 발전에 크게 해택을 입고산다는 은혜로은 자손임을 자부하고자 한다.
그러나 명당이라는 정의는 이것이 아니다.
생각해 보면 명당이라 하여도 자손들이 찾아오지 않아 망망대해에 일엽편주처럼 떠도는 무덤이 되었다면 무슨 뜻이 있으며,
첩첩산중 깊은 골짜기에 숨겨 둔 명당에도 발복이 없어서 자손들이 가난하고 핍박받으며 살고 있다면 묘지를 찾아 올 능력이나 있겠는가?
그러므로 앞으로 명당을 정하려면
묻히는 자신의 마음이 안정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되, 일단 무덤속에 들어 간자는 사지를 꽁꽁묶여 있어야 할 것이니 보고싶은 자손도 찾지 않으면 볼수 없다.
자손들이 마음 내키는 대로 종종 찾아 줄 만한 가까운 곳에 자리하여 있다면 자손들 역시 편하여 부담이 덜되고 ,언젠가 어차피 오게 될 자리가 장차 묘지일 터인데 멀리갈 필요도 없이 함께 할 자리라면 미리 자리를 정하여주는 가족묘지의 지혜로운 우리나라 풍습도 생각 헤 볼 문제로 볼 때 자손으로 부터 효도를 받아 가면서, 자손에게도 부담 않 주는 곳이야 말로 하늘이 준 명당이라 할 만하다.
이글은 명당을 가까운 곳에 두고 방황속에 사는 자에게 고한 것이다.
2244 이관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