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본님등 많은 분들의 도움으로 이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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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 집안지역의 한민족 피라미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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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유명한 장군총.
한 밑변 길이 32미터, 높이는 12미터가 넘는다. ( 4~5층 아파트 높이)
그런데 장군총은 '고구려 임금의 무덤'이 아니다.
장군총은 고구려보다 훨~씬 더 오래된 무덤이다.
장군총에 기대어 세워진 12개의 [선돌(자연석 돌기둥)]과 장군총의 배총인 4개의 [고인돌]도 이를 밝혀준다.
[장군총 고인돌 - 원래는 4방에 있는데 지금은 1개 남음.]
[선돌]과 [고인돌]은 대강 기원전 2세기까지 쓰던 것.
즉 광개토대왕때보다 6백년 전에 이미 그만 만들던 것들.
그런데 6백년 후인 광개토대왕때 갑자기 다시 세웠다고?
그것도 광개토대왕 무덤에만?
장군총이 고구려때 만들어진 것이라는 근거는 아무것도 없다.
[장군총 내부]
장군총은 [고구려 무덤들]하고 완전히 다르다.
형식도 완전히 다르고 벽화도 없다.
[고구려 무용총 천장]
무용총 천장과 장군총 천장을 비교해 보시라.
만일 장군총이 광개토대왕의 무덤이라면
벽화도 없이 저리 만들어 놨을까.
그 수많은 고구려 벽화를 생각해보시라.
[백제 무령왕릉]
진짜 고구려 무덤은 대강 위와 같이 생겼다.
[고구려 각저총 구조도]
진짜 고구려 무덤은 땅 속에 들어가 있다.
그리고 고구려 무덤은 천장이 저렇게 [돔] 모양
즉 대강 둥그렇다.
장군총은 벽화도 없다.
도대체 장군총이 고구려 무덤이라는 근거가 없다.
단지 [장군총이 고구려 무덤이라고 믿게 하고픈 사람들]이 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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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시조 동명왕릉 - 평양 역포구역 용산리]
처음 장군총 내부를 발굴한 학자는 일본인.
그 일본인 학자는 말했다.
" 장군총 내부에서 '호태왕'이라는 위패를 봤다." 고.
그래서 장군총이 광개토대왕의 무덤이라고
즉 고구려때 만들어진 거라고 '확실히' 여겨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의 말이 웃기지 않는가.
위패를 봤다?
그 위패를 어떻게 했는데.
명색이 학자라는 자가 그걸 그냥 놔두고 나왔나? 도굴당하라고?
그는 장군총에서 발굴했다는 어떠한 유물도 제시하지 않았다.
물론 다 도굴당했다고 했겠지.
다 도굴당했는데 위패만 남아있었나^^
만약 위패가 있었다면 '그게 얼마짜리인데' 도굴범들이 그냥 놓고 갔을까.
그 일본인의 의도는 간단하다.
' 장군총은 고구려때 거니까 그리들 알고 있어. 딴 생각 말고.
고구려때 거라고~~~'
왜냐하면
일제는 고구려, 백제, 신라 이전의 한국사는 없게 하고 싶었다.
일본의 쌀농사, 금속문명이 한반도에서 건너간 사람들에 의해서
불과 2천4백년전에 시작했기 때문에 (야요이 문명)
그들은 그 이전의 한국사는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고구려, 백제, 신라 이전의 한국에는 변변한 문명이 없는 것처럼 많드는 것이
일제총독부의 큰 임무중 하나였다.
자존심도 상하고 또한 [뿌리가 얕은 일본]이
[뿌리가 깊은 한국]을 통치하는 것이 명분이 안 서기 때문.
그래서 그들은 한국의 고대역사책들을 강제수거해서 불태워버리고
(일부는 일본으로 가져감.)
여러 유물을 부숴버렸다. (단군릉 등)
이는 일본만이 아니라 식민통치를 하던 나라들이 흔히 했던 짓.
어찌됐던 장군총은 고구려때 만들어진 거라고 알려졌다.
근거는?
없다.
어느 일본인의 '호태왕 위패 봤어요~' 하는 헛소리밖에는.
요새는 어떤 중국인들이 좀 더 '고도의 공작을 부리신다'
장군총과 태왕릉이 '고구려 무덤' 이라 믿게 하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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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왕릉]
태왕릉은 원래 장군총과 똑같이 생겼다.
지금은 많이 무너졌지만 장군총과 같은 [피라미드]인 태왕릉.
장군총보다도 몇배 크다.
무너진 후 지금 높이만 해도 15미터 - 원래 높이 25미터 추정. (10층 아파트 정도)
한 밑변 길이 64미터 (장군총은 32미터)
태왕릉이 너무 커서 한국인의 자부심을 죽이려고
누군가가 일부러 돌을 끌어가고 무너뜨린 것 같다.
좀 작은 장군총은 남겨두고.
태왕릉의 그 수많았던 큰돌들을 개인이 가져가기는 어려웠을 것이고
일제 등 어떤 조직적인 세력이 가져갔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일.부.러.
태왕릉 같은 피라미드들을 일제는 많이 없앴을 것이다.
장군총은 '작아서' 살아남아 있고.
1990년도부터 중국학자들이 태왕릉을 본격발굴했다.
그런데 발굴한 유물은 하나도 공개하지 않는다.
하.나.도.
단지 태왕릉에 [태왕릉]이라는 이름이 붙게 된 이유는
[태왕릉]이라는 글자가 써진 벽돌이 발견된 곳이 거기라고
[누군가]가 말했기 때문.
저 명문전(글자 써진 벽돌) 중에 [원태왕릉안여산고여악(願太王陵安如山固如岳)]
즉 태왕릉이 산처럼 변하지 않기를 기원한다는 귀절이 있다.
태왕릉은 장군총처럼 생긴 [돌 피라미드]이다.
그런데 난데없이 무슨 벽돌인가.
장군총에 벽돌같은 건 없다.
벽돌은 다음과 같은 무덤에 쓰이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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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무령왕릉 내부 - 온통 벽돌]
태왕릉은 크기만 클뿐 장군총과 똑같이 생긴 [돌 피라미드]
장군총에는 벽돌이 없다. 돌만 있다.
당연히 태왕릉에도 벽돌같은 건 없다.
만약 태왕릉 위에 [사당]을 지었다 해도
기둥하고 기와는 나오겠지만
거기서 벽돌이 왜 나오나.
그런데 왜 [태왕릉 벽돌]이 현 [태왕릉이라 부르는 피라미드]에서 나왔다 하는가.
1990년도부터 본격 발굴 해놓고
유물 공개 하나도 안하는 것도 이상하고.
" [태왕릉 벽돌] 그거 지금 [태왕릉이라 부르는 피라미드]에서 나온 거야.
그거 그러니까 고구려 무덤이야.
딴 생각 말어. 알았지? "
해놓고는
'그들'은 얼마전에는 다시 한번 '쐐기'를 박았다.
" [태왕릉이라 불리는 피라미드]에서 '호태왕'이라고 써진 방울(종)이 나왔거던.
그게 진짜 거기서 출토된 건지는 의심하지 말어...허엄...
그거 고구려때 무덤이야. 알았지?
호태왕 방울(종)이 진짜 거기서 출토된 증거는 ...없지만...허엄..."
이러고 있다.
국내학자들도 말하기를 특히 동북꽁정 이후에는
중국이 발표하는 고구려 등 고대한국사 관련 유물 출토지는
- 믿을 수 없다.
일본학자는 " 장군총에서 호태왕 위패를 봤는데...안갖고 나왔다..."
어쩌고 횡설수설 하면서 장군총이 고구려 거라고 믿게 하려고 하더니
중국학자는 돌 피라미드에서 왠 벽돌이 나왔니 어쩌니 하더니
호태왕 청동방울(종)이 거기서 나온거라 하고...
둘 다 필사적으로 장군총이 고구려때 거라 믿게 하려 한다.
그들은 [기만전술]을 쓰고 있다.
장군총과 태왕릉에서 발견되었다는 유물은 딱 3개.
( 그 중 1개는 단지 봤다는 것.)
그런데 희한하게 그 3개가 모두 [태왕]이라는 글자가 써있는 것들.
1. 장군총에서 [호태왕] 위패 봤다. - 일본 학자
2. [태왕릉] 이라 써진 벽돌 발견한 곳은 태왕릉. - 중국학자
3. [호태왕] 이라 써진 청동방울종 발견한 곳도 태왕릉. - 중국학자
감이 오시는가.
장군총과 태왕릉에서 발견되었다는 유물이 단 3개인데
모두 [태왕]이라는 글자가 써진 것들.
'우연'치고는 너무 공교롭지요^^
그들은 장군총과 태왕릉이 고구려때 것이라 믿어지기를
'너무나 간.절.히.' 바라고 있다.
저러한 기만전술을 쓸 정도로.
( 그나저나 [호태왕 벽돌]하고 [호태왕 청동방울(종)]이 나오긴 한 걸 보면
어딘가에서 진짜 호태왕릉을 발견했다는 얘기.
벽돌을 많이 써서 만들어진 땅속 진짜 호태왕릉이.
그게 어딘지 중국당국은 밝혀라.
그리고 [태왕릉이라 불리는 피라미드]에서 나온 유물들 좀 공개해주면 고맙겠다.)
그런데!
이집트 대피라미드들과 장군총은 극히 비슷하다.
겉 모양도 장군총을 그대로 크게 만들면 이집트 대 피라미드.
이 글 위에서 다루었듯이
이집트 대 피라미드 들은 그 만든 양식이 다른 이집트 피라미드들과 많이 다르다.
게다가 다른 이집트 피라미드들에서 숱하게 나오는 [이집트 벽화]도
대 피라미드 들에는 전혀 없다.
다른 유물도 전혀 없다.
이는 장군총의 경우와 똑 같다.
장군총도 다른 진짜 고구려 무덤들하고 형식이 완전히 다르다.
장군총도 다른 [진짜 고구려무덤]에서 숱하게 나오는
[고구려 벽화]가 전혀 없다.
다른 유물도 전혀 없다.
[이집트 대피라미드 왕의 방]
위 사진에도 보이듯이 [이집트 대피라미드 왕의 방]은 장군총과 같은 모양.
단지 이집트 피라미드 지역이 건조하기 때문에 곰팡이가 덜 생겼다는 정도.
[장군총 내부]
장군총 내부 저 방의 천장 돌은 무게가 무려 백톤!
이건 이집트 대피라미드 것보다 훨씬 더 크다.
[장군총 내부]
장군총에도 이집트대피라미드 왕의 방에 있는 것 같은
석관(돌관)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석관(돌관)은 고대한국에서 흔히 만들던 것.
한반도에는 고인돌처럼 석관이 널려있다.
아래 사진은 그 중 한 예.
‘마산 진동리 유적(馬山 鎭東里 遺蹟)’의 석관묘.
국가지정문화재 사적 제472호
-------------------------------------
일반인의 무덤으로 보이는 위 석관이 여러개의 판돌을 써서 만들었다면
장군총 정도 되는 데에는 이집트 대피라미드처럼 통석관이 있었다고 보인다.
도굴꾼이나 어떤 나라의 학자가 장군총에서 훔쳐갈 거라고는
그 통석관 밖에 없었다.
즉
장군총과 이집트 대피라미드가 내부도 아주 비슷하다.
돌 쌓은 모습도 비슷하고 둘 다 벽화도 유물도 전혀 없다.
장군총도 통석관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대피라미드의 표면에 작은 돌들로 덧쌓은 것만 걷어내면
대피라미드는 장군총과 겉모양도 똑같다.
즉 이집트 대피라미드와 장군총은 같은 문명의 유물.
그런데 고대 이집트인이 한국에 온 흔적은 전혀 없다.
고대한국인이 이집트에 간 흔적은 많다.
세계 학자들은 [고대 동북아에서 이집트로의 이동]이라는 표현을 쓴다.
그 [동북아]가 바로 고대한국.
위 사진은 요녕(만주 서부) 홍산문명의 피라미드 무덤.
일종의 돌관(석관)묘인데
겉모양은 피라미드.
석관묘가 피라미드로 발전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하겠다.
압록강 주변에는 장군총 말고도 저것보다 훨씬 더 큰 피라미드들이
무려 1만2천기나 있다.
황하문명의 뿌리인 만주서부 홍산문명이라는 것도
[환인 환웅 배달문명]의 한 지류(가지)에 불과하다.
만주남부 압록강 지역에 널려있는 저 한민족 피라미드들.
이에 대한 발굴은 중국당국이 이미 오래전에 했고
유물은 하나도 공개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시작한 것이 동북꽁정.
때가 되면 중국당국은 세계에다 대고 대대적으로 선전할 것이다.
' 고조선사도 쭝국역사라고 보고...허험...
그러므로 고조선 전 역사도 쭝국역사라고 보고...흐허허험...
그러므로 저 피라미드들도 쭝국역사라고 보고...크하하하...
거래서 피라미드도 쭝국의 창조물이고...캬캬캬캬...
쭝국인들이 이집트가서 피라미드 만들었네...쿄쿄쿄쿄...
사실은 세계 문명이 쭝국에서 시작됐네...켁켁켁켁...
그동안 공개안한 이 경악스러운 유물들을 보시라~~~봐봐봐~~~
만주에서 나온 이거 다 쭝국거거든~~~
사실은 북한까지 다 쭝국역사거던~~~"
이런 의도로 동북꽁정을 지나서 그들은 '탐원꽁정'이라는 이름까지 붙인것.
탐원이란 근원을 찾는다는 것인데
탐원꽁정이란 중국의 근원만 찾겠다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세계 문명의 근원인 고대한국문명을 통째로 삼키시겠다는 말씀.
사실 으스스한 짓거리다.
하나
세계 학자들을 모두 포섭하기는 불가능할 것이고
결국 동북꽁정, 탐원꽁정은 역사왜곡의 대표적인 사례로
역사에 기록될 것이다.
그래서 중국에서도 양심적인 학자들은
동북꽁정, 탐원꽁정을 굉장히 우려하고 있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수는 없으므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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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사진들은 단군릉 사진들 (북한 복원)
일제가 때려부순 단군릉을 복원 (재건) 하면서
북한은 장군총과 거의 똑같은 모습으로 했다.
만약 북한이 단군릉을 조작한 것이라면
장군총과 거의 비슷하게 만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장군총을 고구려때 것이라 알고 있는데
고조선 무덤을 장군총과 같게 만들어 놓으면
조작한 거라는 의심을 살게 뻔하기 때문.
단군릉이 장군총과 비슷한 모양인 것에 대해서 북한 측은
" 모르겠다. 고구려인들이 단군릉을 재건축한 걸수도 있고..." 라고 했다.
조작이라 하기에는 좀 어설픈 모습.
단군릉은 조작된게 아닌것 같다.
단지 [문제]는 그게 단군릉이 아니라 그 이전의 무덤이라는 것.
북한은 단군릉의 유골이 [5,011±267년]전 사람의 것이라 말했다.
5천년도 더 전 사람의 유골이라는 것.
단군왕검은 약 4천3백여년 전 분이라 알려져 있는데
7백년 정도 차이가 난다.
만약 북한이 조작을 했다면
유골이 4천 3백~4백년 전 사람의 것이라 했을 것이다.
'엉뚱하게도' 5천년전을 이야기 하는 것을 보면
단군릉은 조작된게 아닌 것 같다.
재건하면서 단지 규모를 좀 더 크게 지었는지는 모르겠다.
장군총, 태왕릉도 단군릉과 비슷한 시기의 것이라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아리안(알이안)을 찾아온 독일학자]들도 만주 한민족 피라미드들의
유물 공개를 중국당국에 촉구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물론 황해 바다 속에는 1만년 이상 전의 초거대 피라미드들이 있겠지만.
이집트 최대 피라미드들의 원형인 거대 피라미드들이.
남한에도 장군총과 비슷한 형식의 [피라미드]들이 있다.
물론 큰건 일제가 모두 부수고 비교적 작았던 것들만 남아있다.
(나이가 많으신 분들 중에는 일제시대에 신작로(새길)를 만들 때
일제가 수많은 고인돌 등을 가져다가 길 만드는데 썼다고 증언하는 분들 많다.
일제는 일부러라도 고인돌 등 [한국 고대 거석문화] 유물을 끌어다가 썼을 것이다.
약 2천4백년전에야 한국으로부터 쌀농사, 금속문명을 배워간 일본이니
식민지배를 정당화시키기 위해서라도
일제는 고구려,백제,신라 이전의 한국역사는 없는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간.절.히.
그래서 " 삼국사기 초기기록은 믿을 수 없다." 어쩌고 하는 조작도 해댄다.
고구려,백제,신라가 당시 일본보다 훨씬 뛰어났다는 것을 숨기고 싶어했기 때문.
그러한 일제시대 일본인 학자들의 제자가 해방후에도 한국 국사학계의 '원로'가 되었고
그 제자들이 계속 한국 역사학계의 실세가 되었다.
이것이 현 한국 역사학계의 비극이다.
(물론 양심적인 사학과 교수분들도 많다.)
일제가 단군릉 피라미드를 부수고 (북한이 다시 복원)
장군총이 고구려 때 것인 것처럼 필사적으로 우겨댄 것은
진한 (북부 고조선)의 존재를 없애고 싶었기 때문이고
일제가 남한의 피라미드들이 백제 것인 것처럼 우겨댄 것은
마한 (남부 고조선)의 존재를 없애고 싶었기 때문.
일제의 목적은
" 한국 역사는 고구려, 백제, 신라부터 시작이에요오오~
그 전 한국역사는 없는 것이에요오오오~ 믿어 주세요오오~"
하는 것.
그래서 서울 석촌동 [피라미드] 들도 백제 것으로 오인되고 있다.
[서울시 송파구 석촌동의 석촌동고분]
위에서부터
1.장군총
2,3. 서울 석촌동 고분
장군총 등 만주,북한의 1만개도 넘는 [한민족 피라미드]들이
고구려때 것이라는 증거는 하나도 없다.
오히려 고구려 훨씬 이전 즉 고조선이나 그 이전 것이라 보여지는 근거는 많다.
마찬가지로 위 석촌동 피라미드도 백제 것이라는 근거가 없다.
단지 일제의 [마한 죽이기 공작]의 망령에서 벗어나지 못한 어떤 사람들의 '우김질'만 있을 뿐.
일제는 지독한 [마한 죽이기 공작]에 나선다.
" 고대 일본이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어요오오~ 믿어주세요오오~근거는 없지만~" 하는
소위 [임나일본부썰]을 진짜인 것처럼 만들자면
남한에서 발견되는 당시 일본보다 훨씬 앞선 숱한 문물을
모두 훨씬 나중인 백제의 것으로 '둔갑'시켜야 했기 때문.
당시 일본이 한국보다 앞선문명이었던 것처럼 만들기 위해서
백제보다 훨씬 전인 마한의 문물을 백제의 것인 것처럼 우긴 것.
장군총이 고구려 것이라 우기는 이유와 비슷하다.
그래서 숱한 [마한의 유물]이 지금도 백제의 것으로 둔갑되어 있다.
한국고고학계의 불가사의 중의 하나가 백제 왕궁이 발견되지 않는 것.
고구려는 안한궁, 장안성 등 왕궁이 이미 발굴되었는데
백제의 왕궁은 어디있는지 아직도 모른다.
그래서 고고학계는 백제 왕궁이 한강가의 몽촌토성이다, 풍납토성이다 하고 박이 터지고 있는데
몽촌토성, 풍납토성은 백제의 성이 아니라 마한의 성.
풍납토성은 서기전 1세기 즉 2천1백년 전에도 이미 있었던 성.
이때는 백제가 건국도 하기 전.
당시 존재도 하지 않던 백제가 어떻게 풍납토성을 만드는가.
서울대 최몽룡교수는 국립문화재연구소의 풍납토성 서벽 발굴조사 지도위원회에서
“탄소방사성연대 측정결과와 삼중의 환호·판축토성·제사터·회청색경질토기 등 발굴유물을 볼때
풍납토성 축조연대는 기원전 1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사실이 국립문화재연구소에 의해 확인됐다”고 보고했다.
[문화일보 보도 2003-03-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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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유명한 [하남(河南) 위례성]은 백제의 시조 온조왕(溫祚王)이 처음으로 나라를 세운 곳으로 475년까지의 도읍지.
이 [하남(河南) 위례성]이 있던 위치가 어딘지 일제는 안다. (발굴했을 것이므로.)
그런데 일제는 절대 그 위치가 북한이라는 것을 말안한다.
그들은 백제 전반기 수도였던 [하남(河南) 위례성]이 남한에 있었던 것으로 만들고 싶어한다.
마한의 존재를 [없애고] 싶기 때문.
남한에서는 서기 475년 이전의 백제 왕궁은 찾을 수 없다.
원래 없는 건데 어떻게 찾나.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13년에 보면 다음과 같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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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월에 왕이 신하에게 말하였다.
“우리 나라(백제)의 동쪽에는 낙랑이 있고 북쪽에는 말갈이 있어...
도읍을 옮겨야 하겠다. 내가 어제 순행을 나가 한수(漢水) 남쪽을 보니
땅이 기름지므로 마땅히 그곳에 도읍을 정하여..."
가을 7월에 한산(漢山) 아래로 나아가 목책을 세우고 위례성의 민가들을 옮겼다.
8월에 사신을 마한에 보내 도읍을 옮긴 것을 알리고
마침내 강역을 구획하여 정하였는데...]
위에 나오는 [낙랑]은 한사군의 낙랑이 아니라
고조선의 일부였다가 후에 독립한 [최씨 낙랑국]을 말한다.
( 한사군은 요서(만주서부), 북경부근 지역에 있었다.
[낙랑]이란 한국어 [나라(국가)]를 뜻한다.
[최씨 낙랑국]은 옥저 즉 지금의 함흥쪽 지역에 있었고
위에서 온조왕이 "우리 나라(백제)의 동쪽에는 낙랑이 있고" 라 말하듯이
백제의 첫 수도는 청천강 부근 지역이었고
[ 한수(漢水) 남쪽]으로 수도를 옮기는데
여기서 [한수(漢水)]란 대동강으로 본다.
고대 한강(漢江) 즉 황해대강으로 흘러드는 한반도쪽 강 중에서
대표적인 것이 대동강과 (서울)한강.
( 압록강 쪽은 너무 추워서 저기한 면이 있다.)
그래서 대동강과 (서울)한강을 [한수(漢水)] 또는 [한강(漢江)]으로 부른 것으로 본다.
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
ㅇ 대동강
ㅇ
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
대 ㅇ 한강
강 ㅇ
ㅇ
ㅇ
백제의 [하남(河南) 위례성]은 [대동강 남쪽의 위례성]을 뜻하고
예(례)성강이란 이름도 [위례성강]의 준말 정도로 보이고
[대동강~예성강] 지역이 하남 위례성 지역으로 본다.
원래 하(河), 강(江), 한(漢) 등이 모두 황해대강을 부르는 말인데
이 말들은 한마디로 [위대한 지역의 물]이란 뜻이고
이 [위대한지역]이란 마고성을 뜻한다. [대강 삼각주]
[ 사신을 마한에 보내 도읍을 옮긴 것을 알리고
마침내 강역을 구획하여 정하였다.] 는 귀절을 보아도
당시 대동강 이남은 마한의 상당한 영향력 하에 있었으며
마한의 중심지는 한강이남이기 때문에 [대동강~예성강] 지역에 백제가 수도를 만드는 것을 허용하고
마한과 백제가 예성강 정도를 경계로 국경이 있었다고 본다.
백제는 서기 475년까지 수도를 남한으로 옮기지 못한다.
이는 마한이 그만큼 왕성했다는 것.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pds22.cafe.daum.net%2Fdownload.php%3Fgrpid%3DNUwZ%26fldid%3D_album%26dataid%3D649%26fileid%3D1%26regdt%3D20060805214525%26disk%3D7%26grpcode%3D121315%26dncnt%3DN%26.jpg)
영산강 유역에서 발굴된 마한시대의 대형옹관.(도자기 관)
이 지역의 옹관문화는 고려청자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출처 : 경향신문 2006년 5월 15일]
고려청자의 대부분은 전남 강진 등 전라도에서 만들어진다.
유명한 신안 앞바다 도자기 들도 전라도 도자기를 고려 수도 개경으로 실어나르다 가라앉은 것.
전라도가 도자기로 유명한 이유는?
황해대평원 원조 한문명(마문명)의 전통이라 볼 수 있다.
1만 수천년전 토기(고산리 토기)가 나온 제주도도 당시에는 전라도에 붙어 있었다.
이렇듯이 몽촌토성, 풍납토성도 백제의 성이 아니라 마한의 성.
아리랑2호에서 본 풍납토성 (서울 한강 이남)
[풍납토성 성벽 단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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ㅣ ㅣ
높이 ㅣ ㅣ
15미터 ㅣ ㅣ
ㅣ ㅣ
ㅣ 너비 50 ~ 60 미터 ㅣ
풍납토성 경당지구 전경
풍납토성 발굴설명회
풍납토성 유물
풍납토성 항아리
마한의 풍납토성은 둘레 3,740m( 약 3.7 킬로미터)에
성벽은 밑바닥층의 너비가 50~60m,
높이는 15m ( 6층 아파트 높이)의 거대한 성벽.
(국립문화재연구소(소장 김봉건) 발표)
몽촌토성 지도
몽촌토성
몽촌토성 산책로 진입 계단
무너진 몽촌토성 성벽 위로 만들어진 산책로
원래는 저것보다 몇배 더 큰 거대한 성벽.
몽촌토성도 풍납토성처럼 거대하다.
몽촌토성 출토 항아리들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은 백제성과는 형식이 다른 토성(자갈, 찰흙, 모래 등을 함께 사용)이다.
한강가에 많은 자갈, 진흙, 모래를 가져다가 사용하는 것이 편했을 것이다.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이 백제성이라는 근거 없다.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을 백제가 만든 거라고 강박관념을 갖을 필요는 없다.
수많은 마한, 진한,변한의 유물들이 후대인 고구려, 백제, 신라
또는 중국의 유물로 '둔갑'되어 있는 현실이 가슴 아프다.
재야사학이 다 맞다고 보지는 않지만
그리고 강단사학의 공로도 크다고 보지만
이제는 식민사학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런데 왜 마한은 한강가에다가 저렇게 거대한 성을 쌓았을까.
기원전 1세기 즉 2천1백년전경 고조선이 문을 닫고
고조선 각지역이 부여 등 각기 여러나라로 독립한다.
마한도 역시 다시 따로 독립국이 된다.
그런데
한강은 마한의 전통적인 절대 방어선.
대략 대동강 이남은 전통적 마한 땅이지만
특히 한강 이남은 절대적인 마한의 영역.
그래서 한강 이남에는 북방식 고인돌이 거의 없고
대부분 마한 고유 형식인 남방식 고인돌.
마한은 지리적으로 고대 원조 한문명 (마고성)과 가장 가깝다.
즉 원조 한문명의 중심지는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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ㅣ 강화도 <- (서울) 한강(漢江) 금강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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ㅣ ㅣ
ㅣ ㅣ
ㅣ ㅣ 동
ㅣ ㅣ
ㅣ 한강 ㅣ
ㅣ (漢江) ㅣ 마고성 해
ㅣ ㅣ 마고성
ㅣ = 황해 ㅣ 마고성
ㅣ대강 ㅣ 부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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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 다
[마고성]이 제1 중심지이고
위 지역 전체가 말하자면 제2중심지역.
간략하게 그려보면
강화도 -------- 금강산
ㅣ ㅣ
ㅣ ㅣ
ㅣ ㅣ
마고성 --------- 부산
위 영역은 마한으로서는 절대 포기할 수 없는 영역.
나중에 가야가 남한으로 들어오는데 마한인들 때문에
가장 넓은 들인 경기 충청 전라 평야로는 못오고 경남으로 간다. (김해평야지대)
그 후에 신라가 남한으로 들어오는데
마한과 가야 때문에 할수 없이 경북으로 간다.
그리하여 남한에 마한, 변한(가야), 진한(신라) 가 모두 있게 된다.
이것은 [원삼한]과는 다른 [후삼한(남삼한)]
마한은 단군왕검의 (원)삼한통합 당시 스스로 고조선으로 통합하지만
기원전 1세기 고조선이 문을 닫은 후에 다시 독립국이 되어
공식적으로도 최소한 서기 3~4세기 까지 존재한다.
그러므로 남한에서 출토되는 [초기 백제 유물]이라는 것은
대부분 [마한의 유물]이라고 보는 것이 적당할 것.
마찬가지로 북한, 만주의 [고구려 유물]이라 알고 있는 것 중 많은 수는
고조선의 [진한 유물] 되겠다.
고구려가 진한을 이어받은 나라이니 그 형식은 비슷한 것도 많을 것.
과학기술이 발전할수록 연대 측정기술도 발전될 것인데
한국의 고대유물들 중에서는 놀랄만큼 오래된 것들 많다는 것이 자꾸 밝혀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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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조 바벨탑]도 황해바다 속에 있을지도 모른다.
문명이 발달하다보니 너무 큰 걸 지으려다가
벼락맞고 물에 잠긴 원조 바벨탑.
1만년 이상 전 당시에는 [제대로 된 언어]는 황해대평원 원조 한문명의
고대한국어가 유일했을 것이라 본다면
원래는 언어가 하나였다는 바벨탑 이야기가 이상할 것도 없다.
( 중동으로 건너간 고대한국인들이 거기서 또 바벨탑을 지었을 수도 있다.)
한민족이 오랫동안 [정신문명]을 [물질문명]보다 좀 더 강조해온 이유가
물질문명이 정신문명보다 좀 더 앞서 나가다가 벌을 받아서
황해대평원이 물에 잠겼다고 생각한 것은 아닐까.
물질문명 뿐만 아니라 정신문명 또한 세계에서 독보적인 문명을 이루었지만
교만해지면 무너진다는 뼈아픈 교훈.
그래서 한민족은 그토록 겸손을 강조해온 것은 아닐까.
남도의 판소리. 그 애절한 노래가락의 근원은
[잃어버린 이상향] 원조 한문명을 그리워하는 건 아닐까.
임진왜란때 일본군이 호남 앞바다를 통과하지 못해서 실패했는데
호남앞바다는 원조 한문명의 중심지였다고 볼 때
보이지 않는 그 거대한 힘이 일본군의 통과를 허용하지 않은 것은 아닌가.
이순신 장군은 책도 많이 읽었었다는데
옛책에는 고대 한문명을 내비치는 글도 많다.
그런데 지금 전라도를 왜 [호남(湖南)]이라 부르는가.
답하는 이가 없다.
경상도는 산맥(백두대간)의 남쪽이라 하여 영남이라 부른다 하지만
전라도를 왜 [호남(湖南)]이라 부르는가. 그럴만한 호수도 없는데.
원래는 [호(湖)]는 바이칼호수 즉 밝할호수를 뜻한다.
거대한 호수다. (세계 민물의 20%)
원래 [강(江)], [하(河)]는 황해 대강을 뜻한다.
거대한 강이다.
빙하로 고립된 바이칼호수 즉 밝할호수를 벗어난 분들은
따뜻한 남쪽나라가 그리웠을 것이다.
그래서 무조건 남하한다.
그래서 결국 황해대평원을 만난다.
이는 대부분의 가창오리(바이칼 오리)가 한국땅으로 매년 날아오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호남(湖南)]이란 [바이칼호수의 남쪽 끝] 이란 뜻.
예로부터 [강호(江湖)]라는 말이 있다.
흔히 이를 상상의 세계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황해대강과 바이칼호수 지역을 뜻하는 것으로 본다.
고대 문명의 중심지.
강호(江湖)라는 말에서 [강(江) 즉 황해 대강]이 [호(湖) 즉 바이칼(밝할)호수 ]보다 먼저 나오는 것으로 보아도
[진정한 문명]이 일어난 곳은 황해대평원인 것으로 보인다.
아버지격인 바이칼리안(밝할인)과 어머니격인 황해대평원-한반도 원주민의
[황해대평원에서의 건설적인 만남]이 세계의 근본문명을 시작한 것.
2만년전~1만2천년전 당시에는 바다가 지금보다 얕았고
그러므로 태평양에는 더 많은 섬들이 있었고
지금 섬들은 더 컸다.
즉 태평양 섬들을 건너다니기가 지금보다 훨씬 더 편했다.
모아이 (칠레 이스터섬)
저 모자는 털모자를 뜻하는 것으로 본다.
이 석상을 만든 사람들은 원래 겨울이 있는 곳에서 왔다는 얘기.
제주도 돌하루방과 비슷하다.
배앞으로 두 손을 모은 것도 비슷하다.
[예절]인것 같다.
제주도는 당시에도 바닷가였다. (육지의 끝부분)
바닷가에 석상을 세우면 배를 타고 가다가 볼 수 있다.
나무로 세우면 바다가에서는 쉽게 삭는다.
저 석상을 만든 이유 중 하나는
" 우리가 여기에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배타고 뒤따라 올지도 모르는 그들 고향의 사람들에게.
이 모아이를 만든 사람들의 유적은 아래 사진 같은 것도 있다.
사진출처-
이스터섬
이스터섬
저 돌쌓는 기법들은 한국의 것과 비슷하다.
만주 장군총
위 장군총 사진에 보면 이스터섬의 돌쌓기에 사용된 [돌 끼워넣기]공법이 보인다.
이러한 기술의 원조는 황해대평원 원조 한문명으로 본다.
'잃어버린 무대륙'의 저자가 무대륙이 태평양의 절반 정도로 컸다고 한 것은
사실은 지금보다 훨씬 많았던 섬들을 모두 대륙인 것으로 착각한 것 같다.
즉 태평양의 많은 섬들에는 당시 무(마)사람들
즉 원조한문명분들이 많이 건너가서 문명을 전한 것 같다.
그 유적들은 대부분 지금 바다 속에 있을 것이다.
주로 평야에서 살았을 것인데 그 당시 평야들이 지금은
대부분 바다속에 잠겨있을 것이므로.
위 부분에 언급한 오키나와 피라미드도 그 중 하나인 것으로 보인다.
중남미의 불가사의한 거대피라미드등은
원조 한문명 즉 [황해대평원 마문명]의 문명수준을 보여주고 있다 하겠다.
마야는 마이아 즉 [마이의 땅]
모아이는 즉 마아이 즉 [마땅의 사람]
( 4편으로 계속)
[밝은 앞날 되시기를]
[꿈은 이루어진다]
[꿈은 미래의 현실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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