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筮法
1 50개의 시초 중 하나를 뽑아 다시 통 속에 넣어 사용하지 않으니 이것은 태극이 아무런 작위로 하지 않음을 상징한다.
2. 나머지 49개의 시초를 임의로 둘로 나누어 각각 왼손과 오른 손에 나누어 가진다. (음양)
3. 오른손의 한 개의 시초를 뽑아 왼손의 넷째 손가락과 새끼 손가락 사이에 걸어 둔다. (삼재)
4. 오른 손으로 왼손의 시초를 네 개씩 셈하여 덜어낸다. (사시를 상징)
5. 네 개씩 덜어 낸 나머지의 시초를 합해서 하나로 하여 왼손 넷째손가락과 가운데 손가락 사이에 끼운다.(윤달은 상징)
6. 왼손으로 오른손의 시초를 네 개씩 덜어낸다.
7. 네 개씩 셈하여 덜어낸 나머지의 시초를 합해서 하나로 하여 왼손 가운데 손가락과 집게 손가락 사이에 끼운다.(윤달 상징)
1변을 통하여 얻어진 시초의 수는 5가 아니면 9이다.
(5를 얻는 경우 3번으로 양수(홀수), 9를 얻는 경우는 1번으로 음수(짝수)이다)
8. 제 1변을 거친 후 1변에서 얻은 시초를 빼버리고 남은 시초를 합하면 그 수는 40 혹은 44이다. 이것을 다시 1변의 순서와 같이 둘로 나누고 한 개를 걸어 두며 넷으로 셈하어 덜어내고 나머지를 하나로 합하는 것을 2변이라 한다. 손가락 사이에 걸어둔 나머지는 4.아니면 8이된다.
(4을 얻는 것은 2번 홀수이다. 8을 얻는 경우는 2번이니 짝수이다.)
9 다시 2변에서 얻은 수 4와 8을 제외하고 남은 시초를 합하면 40, 36, 32의 하나다.
이것을 다시 하면 그 시초의 수는 4와 8이다.
3변에서 5. 4. 4는 노양이된다. 모두 12개이다.
두 개의 홀수와 한 개의 짝수 : 5. 4. 8. : 5. 8. 4 : 9 4 4 = 소음
두 개의 짝수와 한 개의 홀수 : 5 8 8 9 4 8 9 8 4 = 소양
세 개의 짝수는 노음 : 9. 8 .8
효변 : 한 효가 변하면 - 본래 괘의 변하는 효풀이 글로 점을 판단.
두 효가 변하면 - 본래 괘의 변하는 두 효의 풀이글 중 위의 효를 주로한다.
삼 효가 변하면 -본래 괘와 변한 괘의 괘풀이로 점친다.
네 효가 변하면 - 변한 괘의 변하지 않은 두 효의 풀이글로 점친다. 아래 효 위주
다섯 효가 변하면 : 변한 괘의 변하지 않은 효로 점친다.
여섯 효가 변하면 : 변한 괘의 괘풀이. 건과 곤은 용구와 용육으로 점친다.
주역(周易)
1.
주역(周易)은 흔히 복희씨(伏羲氏)가 괘효(卦爻)의 획( )을 긋고, 문왕(文王)이 괘사(卦辭)를 붙이고, 주공(周公)이 효사(爻辭)를 붙이고, 공자(孔子)가 이들에 대한 해설을 붙여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주역은 적어도 네 개의 단계를 거쳐서 만들어진 셈이다. (천부경을 복희씨가 쉽게 가르치기위하여 팔쾌를 만들었으며, 팔쾌를 학문적관점에서 좀더 쉽게 만든것이 주역이다, 그러나 천부경을 이해하지 못했다면 주역은 만들어 질수 없었을 것이다.)
주역은 어떤 관점에 입각해서 만들어진 것인가? 주역의 가장 핵심적인 관점은 세 가지이다. 피아(彼我), 천지인(天地人), 음양(陰陽)이 그것이다.
첫째로, 주역은 모든 상황을 저와 나의 관계로 파악한다.
다시 말해서 세계와 자아의 관계로 파악하는 것이다.
그 어떤 것도 독자적으로는 존재할 수 없고 자아와 세계의 관계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둘째로, 주역은 모든 존재는 천지인(天地人) 삼재(三才)로 이루어져 있다고 본다.
하나의 존재는 이 세 가지가 어울려서 비로소 성립하는데, 이를테면 천(天)은 이상(理想)을, 지(地)는 현실(現實)을, 인(人)은 주체(主體)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주체가 현실적 토대 위에서 이상적 지향을 가지고 있을 때 비로소 하나의 존재로서 존재한다는 것이다.
셋째로, 주역은 천지인 삼재 각각이 음(陰)일 수도 있고 양(陽)일 수도 있다고 본다.
그래서 음일 적에는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반면, 양일 적에는 능동적이고 적극적이라는 것이다.
주역은 왜 육십사괘(六十四卦)인가? 주역의 괘가 육십사괘인 것은 주역의 세 가지 관점에 따른 필연적인 결과이다.
모든 상황은 피(彼)와 아(我)의 관계이고, 피(彼)와 아(我)는 각각 천지인(天地人) 삼재(三才)로 이루어져 있고, 천지인 삼재는 각각 음(陰) 또는 양(陽)일 수 있으니, 음 또는 양일 수 있는 천지인 삼재로 이루어진 피(彼)가 될 수 있는 경우가 여덟 가지이고( 건(乾), 태(兌), 이(離), 진(震), 손(巽), 감(坎), 간(艮), 곤(坤)), 마찬가지로 음 또는 양일 수 있는 천지인 삼재로 이루어진 아(我)가 될 수 있는 경우도 여덟 가지이니, 이러한 피(彼)와 아(我)가 만나서 이룩할 수 있는 관계는 예순 네 가지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주역에서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그것은 주역을 대하는 태도에 따라서 달라질 수가 있다.
주역을 점치는 책으로 볼 적에는 운명에 대한 예언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주역을 점치는 책으로만 보면 미신(迷信)에 빠지게 된다.
우리 자신의 지향과 의지와 결단을 간과하기 때문이다.
운명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운명은 운명 스스로 굴러가는 것이 아니라 운명을 감당하고 있는 우리 자신과의 관계 속에서만 굴러가는 법이다.
그러므로 설령 주역을 사용하는 점술가를 찾아간다고 해도 그것은 벌써 주역의 본질로부터는 멀어지는 일일 수밖에 없다.
주역을 도덕 교과서로 볼 적에는 윤리적 행동 지침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주역을 도덕 교과서로만 보면 독단(獨斷)에 빠지게 된다.
우리 자신을 둘러싼 세계의 고유한 속성을 고려하지 않기 때문이다.
윤리적 결단도 꼭 필요한 일이기는 하지만 그 윤리적 결단이 온당하려면 윤리적 결단을 하는 시점에 자신을 둘러싼 세계의 상태와 조화되어야 한다.
따라서 아무리 주역을 통하여 고담준론을 편다 해도 그것은 실제와는 동떨어진 부질없는 담론이기 십상이다.
주역을 사회과학 서적으로 볼 적에는 세상 돌아가는 원리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주역을 사회과학 서적으로만 보면 냉소주의(冷笑主義)에 빠지게 된다.
운명에 대한 예감과 윤리적 결단이 소거되기 때문이다.
세상 돌아가는 원리는 그 자체로서 귀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우리 자신의 현재와 미래에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을 때 소중한 것이다.
원리가 원리 자체로만 있고 우리 자신과 연결되어 있지 않으면 그 원리로부터 우리는 어떠한 예감이나 결단도 이끌어낼 수가 없다.
주역은 점치는 책이기도 하고, 도덕 교과서이기도 하고, 사회과학 서적이기도 하다.
따라서 우리는 주역에서 동시에 운명에 대한 예언도 듣고, 윤리적 행동 지침도 얻고, 세상 돌아가는 원리에 대한 지식까지 얻어내야 한다.
어느 하나에만 귀를 기울여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예컨대 주역으로부터 얻는 운명에 대한 예언이 의미 있는 것이 되려면 그 예언이 윤리적 행동 지침과 세상 돌아가는 원리를 전제로 한 것이어야 하는 것이다.
2.
고려말에 성리학이 들어온 이후로 우리 나라에서는 주로 정자(程子)와 주자(朱子)의 해석에 의거하여 주역을 공부하였다.
그런데 정자나 주자의 주역 해석은 그 초점이 중(中)과 정(正)에 맞추어져 있다.
중(中)이란 치우치지 않는다는 뜻인데, 구체적으로는 육효(六爻) 가운데 제이효(第二爻)와 제오효(第五爻)를 가리킨다.
제이효는 하괘(下卦)의 가운데 효이고 제오효는 상괘(上卦)의 가운데 효이기 때문이다.
정(正)이란 바르다는 뜻인데, 구체적으로는 양효(陽爻)가 양(陽)의 자리 곧 홀수 자리에 있고 음효(陰爻)가 음(陰)의 자리 곧 짝수 자리에 있는 것을 말한다.
그리하여 중(中)하고 정(正)한 것은 좋은 것이고, 부중(不中)하고 부정(不正)한 것은 나쁜 것이라고 해석한다.
예컨대 초효(初爻) 곧 제일효(第一爻)가 양효(陽爻)이면 양효가 양의 자리에 있으므로 정(正)하나 하괘의 가운데인 제이효나 상괘의 가운데인 제오효가 아니므로 부중(不中)하다고 보고, 제오효(第五爻)가 음효(陰爻)이면 상괘의 가운데이므로 중(中)하나 음효가 양의 자리에 있으므로 부정(不正)하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해석에 따르면, 중(中)하기 위해서는 한 괘의 여섯 효 가운데 제이효와 제오효에만 꼼짝 말고 있어야 되고, 정(正)하기 위해서는 홀수 자리에서는 양의 상태를 굳게 지키고 짝수 자리에서는 음의 상태를 굳게 지켜야 되며, 중(中)과 정(正)을 동시에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제이효에서 음의 상태로만 있거나 제오효에서 양의 상태로만 있어야 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부중(不中)이나 부정(不正)을 면할 수가 없다.
이게 과연 주역의 본뜻일까?
복희씨가 육십사괘를 그릴 적에 그런 생각을 하며 그렸을까?
문왕과 주공이 괘사와 효사를 붙일 적에 복희씨의 생각이 그럴 거라고 여겼을까?
공자가 해설을 붙일 적에 제일효가 음인 사람은 두 말할 것도 없이 부중(不中)하고 부정(不正)한 사람일 수밖에 없다고 단정했을까? 아닐 것이다.
그럴 리가 없다.
3.
그러면 이제 구체적인 괘와 효를 들어서 한번 해석을 시도해 보자. 주역의 서른 네 번째 괘에 대장(大壯)이라는 괘가 있다.
피(彼)에 해당하는 상괘(上卦)가 우레를 나타내는 진괘(震卦, )이고, 아(我)에 해당하는 하괘(下卦)가 하늘을 나타내는 건괘(乾卦, )이기 때문에 흔히 '뇌천대장(雷天大壯)'이라고 일컫는다.
상괘는 또한 밖을 나타내기도 하고, 하괘는 안을 나타내기도 하므로, 이 뇌천대장은 안으로는 건괘의 씩씩함이 있고, 밖으로는 진괘의 진행, 나아감, 움직임이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내적으로는 하늘의 운행을 닮은 그런 포부랄까 기상이랄까 자질이랄까, 이런 것들을 갖추고, 외적으로는 우레와 같은 추진력을 보이는 사람, 이를테면은 임금된 사람이 천하를 호령하는 그런 형국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세상을 바꾸어 새로운 세상을 진행시키는 것이다.
이 뇌천대장괘는 실수같은 것은 크게 문제삼질 않는다. 대세가 뭐냐, 하늘의 뜻이 어디에 있느냐, 민심의 향방이 뭐냐, 이런 것들이 문제가 될 뿐이고, 그러한 것들이 결정이 되고 나면 조금도 의심치 않고 추진해 나간다.
이럴 때에 옳으네 그르네와 같은 시비는 문제꺼리도 되지 않는다.
모든 주도권은 나한테 있다.
나는 아무도 거역할 수 없는 대세를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뇌천대장괘의 괘사는 "대장이정(大壯利貞)"이다. 이것을 정자나 주자는 "대장(大壯)은 이정(利貞)하니라.
" 곧 "큼이 씩씩함은 곧음이 이로우니라"로 해석을 한다.
다분히 도덕주의에 입각한 해석이다. 도덕주의가 반드시 나쁘다고만 할 수는 없지만, 주역을 해석할 때의 정자나 주자의 도덕주의는 신분질서에 입각한 폐쇄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문제다.
정자나 주자가 "큼이 씩씩함은 곧음이 이로우니라"로 해석을 하는 것에는 곧지 않으면 큼이 씩씩함이 오히려 문제일 수 있다는 불안감이 전제되어 있다.
단적으로 말해서 씩씩함은 위험할 수 있다는 생각이 깔려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 위험 요소를 '곧음'이라는 도덕에 의거하여 미리 제거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위험한 요소만을 제거한다면 문제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위험 요소에 대한 불안감이 극대화되면 아기장수를 죽이는 불행을 초래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더구나 내세우는 '곧음'이라는 도덕 자체도 폐쇄적인 신분질서에 근거하여 판단한 것이라면 새로운 질서의 세계를 열어갈 수 있는 미래를 가로막게 될 것이다.
그러면 "대장이정(大壯利貞)"을 달리 해석할 방법도 있는가? 건괘(乾卦)의 문언전(文言傳)에 의거할 때 "대장이정(大壯利貞)"은 "큼이 씩씩함은 이롭고 곧으니라," 이렇게 해석할 가능성도 다분히 있다.
문언전에서는 "원형이정(元亨利貞)"을 사덕(四德)으로 보고 해석을 했었다. 이에 따르면 이정(利貞)은 사덕 가운데 두 개의 덕을 가리키는 것이어서, 이(利)는 거둔다,
수확한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고, 정(貞)은 일을 추스린다,
현 상태를 유지한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니까 "대장이정(大壯利貞)"은 "큼이 씩씩함은 거두어서 현 상태를 유지한다,"
다시 말해서 "큼이 씩씩함은 자기 방식대로 밀고 나가서, 그 방식이 먹혀들어가서, 그래서 하나의 세상을 이루어서, 그 체제를 한동안 유지할 수가 있다"는 뜻인 것이다.
이건 마치 무왕(武王)이 은(殷)나라를 처단하고 주(周)나라를 세워서, 몇 백년 동안 이 주나라를 유지한 것과 같다고 할 것이다.
만일 정자나 주자의 해석대로 하면 무왕이 아기장수처럼 우물에서 나오지도 못한 채 죽임을 당해서 새로운 세상은 영원히 열어 보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이런 문제는 대장괘 제일효의 효사 "초구장우지정흉유부(初九壯于趾征凶有孚)"를 해석하는 데서도 나타난다.
이것을 정자나 주자는 "초구(初九)는 장우지(壯于趾)니 정(征)하면 흉(凶)이 유부(有孚)리라," 다시 말해서 "처음 아홉은 발뒤꿈치에 씩씩함이니 가면 흉함이 틀림없으리라"로 해석하고 있다.
발뒤꿈치는 맨 아래에 있는데, 거기서는 씩씩하지 말아야 되는데 씩씩하다,
그러니 이대로 가면 흉할 것이 틀림없다, 이런 뜻이다.
그런데 여기서 가장 어색한 것은 '유부(有孚)'를 '틀림없이'로 해석한 것이다.
보통 '유부(有孚)'는 '미쁨이 있다,'
'믿을 것이 있다,
'정도의 뜻을 가지고 있다.
'흉함이 틀림없으리라'는 뜻을 말하고자 했다면 '필흉(必凶)이라'고 하면 자연스러울 것을 왜 하필 '흉(凶)이 유부(有孚)리라'로 했겠는가? 여기에도 정자나 주자의 씩씩함에 대한 두려움, 아기장수에 대한 두려움이 작용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러면 이 구절을 어떻게 해석할 수 있는가? "초구(初九)는 장우지(壯于趾)니 정(征)하면 흉(凶)하나 유부(有孚)리라," 다시 말해서 "처음 아홉은 발뒤꿈치에 씩씩함이니 가면 흉하나 미쁨이 있으리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씩씩해야 되긴 하지만, 그 씩씩함의 단계가 발뒤꿈치의 단계, 곧 공자가 열 다섯의 나이에 배움에 뜻을 세운 단계이므로, 꼼짝 말고 공부하면서 서른에 설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야지, 그렇지 않으면 흉할 것이다, 그러나 배움에 뜻을 둔 열 다섯의 어린 공자가 얼마나 믿음직스럽냐, 이런 뜻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아이는 잘 기르기만 하면 세상을 바꿀 동량지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지금 이 상태에서 무슨 일을 하면 실패하기 마련이지만, 그러나 그 아이가 마음으로 품은 것은 아주 믿음직스럽다는 것이다.
아기장수와 같은 이 아이에게 지금 뚜껑을 열어 뜨거운 물을 붓는다면 그 아이는 더 이상 일어설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믿을 것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곤궁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지금은 적극적으로 보호해야 할 것이다.
맹자가 훌륭한 인물이 된 것도 맹모삼천지교에서 알 수 있듯이 어려서 철저하게 보호를 받았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아기장수가 실패한 것은 보호받아야 할 때 보호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장우지(壯于趾)란 그러니까 아직 보호를 받아야하는 곤궁한 상태에 있는 아기장수를 말하는 것이다.
이 때에 문득 세상에 나서면 실패할 수밖에 없으니, 그래서 정흉(征凶)인 것이다.
4.
정자와 주자의 주역 해석이 반드시 기피해야 할 것만은 아니다.
우리가 옷깃을 여미고 귀를 기울여야 하는 해석을 하는 경우도 많다.
깊이 생각하고 넓게 고찰할 뿐만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나는 통찰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정자나 주자는 때때로 우리를 답답하게 하는가?
그것은 괘와 효를 바라보는 기본적인 관점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정자나 주자는 하나의 괘를 하나의 사회 체제로 보는 경향이 있다.
그리하여 그 안에 배치되어 있는 효들은 그러한 사회 체제에 상하로 정연하게 배치되어 있는 신분적 위계(位階)들로 보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가장 경계하는 것은 사회 체제를 흐트러뜨리는 것, 질서를 어지럽히는 것이다.
사회 체제를 흐트러뜨리지 않고 질서를 어지럽히지 않으려면 모든 사람은 자신의 신분에 맞는 행동을 해야만 된다.
더 나아가 신분에 맞지 않는 것은 생각하지도 말아야 한다.
이런 관점도 타당한 측면이 없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안정된 사회를 안전하게 지키려는 한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마땅히 그래야 할 것이다.
사람들이 자신의 신분에 맞지 않는 생각과 행동을 자행하게 될 때 그 사회가 안정될 리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관점을 취하게 되면 한 개인의 변화 내지 한 사회의 변화를 포착하기가 어렵다.
한 개인의 변화 내지 한 사회의 변화를 포착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괘를 한 사람이 처한 국면으로 보고, 하나의 효는 그러한 국면에 대처하는 하나의 단계로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정자나 주자처럼 하나의 괘를 하나의 사회 체제로 볼 때에는 그 안에 배치되어 있는 효들은 각기 다른 신분의 사람들을 나타내게 되지만, 하나의 괘를 한 사람이 처한 국면으로 보면 그 안의 효들은 그 사람이 그러한 국면에서 성장해 나가는 단계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하나의 괘와 효를 자신이 처한 국면과 대처 단계로 보게 되면, 현재 자신이 어떤 위치에 있으며, 앞으로 어디로 나아갈 수 있으며, 그러기 위해서는 어떤 일을 하고,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결단을 하여야 하는지를 보다 친절하게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준비물:점치는 산가지 50개,
산가지는 구하시기 여려우시다면 연습용으로 나무젓가락같은 것도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주역점에는 본서법과 그 과정을 간략하게 한 육변법, 구변법등이 있습니다.
먼저 단어체크
효(爻): -- ㅡ 이런 모양으로 태극기에 보면 건곤감이의 사괘는 이런 모양의 작대기들이 모여 이루어지는데 이 하나를 효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그 효가 3개가 모여 우리가 잘 아는 건곤감이등의 팔괘가 되는데 이것을 소성괘라고 하고 소성괘가 두 개 겹쳐지면 대성괘가 되는데 그 숫자가 64개가 되므로 64괘라고 합니다. 그리고 대성괘는 아래에서부터 위로 초, 1, 2, 3, 4, 5, 상효라고 합니다.
역점에서의 주의사항
옳지 않은 일로 점치지 말 것
같은 일을 번복하여 점치지 말 것
자신의 능력을 다한 후에 점을 칠 것
막연한 대답을 구하는 점을 치지 말 것
건성으로 아무렇게가 점치지 말 것
1.본서법
第一營
마음을 가라앉히고 점대를 모두 왼손에 잡고 그 중 하나를 뽑아 책상 위에 놓고 태극으로 놓는다. 태극이란 불변하는 것이기에 따르 뽑아두는 것이다. 그 다음 나머지 49개를 둘로 나누는데 그 수를 의식할 필요는 없다. 그리하여 양손에 나누어 쥐는데 왼손의 것은 천책이고 왼손의 것은 지책이라고 한다.
第二營
오른손의 지책을 책상 위에 놓고 그 중 하나를 뽑아 왼손 새끼손가락 사이에 끼운다.(이건 익숙하지 않아서 참 힘들군요.) 그것을 인책이라고 한다.
第三營前半
왼손의 천책을 네 개씩 덜어낸다.
第四營前半
그렇게 덜어내면 나머지가 남는데 그것들을 가운데 손가락과 무명지 사이에 끼운다. 나머지가 없이 다 나누어지면 나머지는 넷이다.
第三營後半
지책을 이용해 제삼영전반부터의 과정을 되풀이한다.
第四營後半
그렇게 해서 얻어낸 나머지를 가운데 손가락과 둘째 손가락 사이에 끼운다.
第一變
천책의 나머지와 지책의 나머지와 새끼손가락 사이에 끼워뒀던 인책을 합하면 그 수는 5나 9가 된다.
第二變
앞의 과정에서 생긴 수 5나 9를 따로 놓고 나머지 점대로 앞의 과정을 되풀이하면 그 수는 4나 8이 된다.
第三變
다시 그 점대를 따로 놓고 그 과정을 되풀이하면 이번에도 손가락 사이에 낀 점대의 수는 4나 8이 된다.
이 모든 과정에서 얻어진 점대의 수는 25, 21, 17, 13중 하나이다. 이것을 태극을 제외한 49개의 점대의 수인 49에서 빼면 그 수는24, 28, 32, 36중 하나이다. 이것을 4로 나누어 얻은 수가 6이면 노음, 7이면 소양, 8이면 소음, 9면 노양이 된다.(여기서 노음 소양등은 사상의학의 태음 소양등을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렇게 해서 초효가 되는데 이 과정을 18번 반복하여 대성괘를 이룬다.
육변법
다른 것은 없고 다만 네개가 아닌 여덟개씩 덜어낸다는 점이 다릅니다.
얻은 수가 1 노양 2 소음 3 소음 4소양 5 소음 6 소양 7 소양 8 노음이 되고 이것을 6번 되풀이합니다.
약서법
육변법과 같은 과정을 밟는데 이번에는 사상이 아닌 팔괘를 대입시킨다는 점이 다릅니다.
1 건 2 태 3 이 4 진 5 손 6 감 7 간 8 곤 입니다.
변효를 얻으려면 태극, 천책, 인책을 만들고 천책을 6개씩 덜어내는데 그 나머지에 인책을 더하면 1에서6까지의 수가 생기는데 이 수에 까라 효를 효를 만들어 3번 되풀이하여 효를 얻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