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서 저패니메이션의 마지막 승부가 펼쳐진다. [이웃집 토토로]는 일
본 대중문화 개방과 함께 가장 위력적인 공세를 펼칠 것으로 예상되었던 저패니
메이션의 최종 승부처다. 당초의 예상과는 다르게 일본 영화들은 국내에서 큰
힘을 발휘하지 못했었다. 기타노 다케시의 [하나비][소나티네]같은 수준 높은 영
화들도 그렇고 [춤추는 대수사선][철도원][러브레터]로 이어지는 대중영화들도 당
초의 기대를 밑돌았었다.
일본 대중분화 개방시 가장 위력적인 존재로 예상되었던 것은 영화가 아니라
애니메이션이었다. 일본의 애니메이션이라는 뜻으로 저패니메이션이라는 신조어
까지 만들어내며 전세계를 공략했던 오시이 마모루나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
이션들은 이상하게 우리나라에서는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그 유명한 미야자키
하야오의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나 오시이 마모루의 [인랑]같은 작품들이 개봉되
었지만 관객들의 반응은 미미했다.
이제 그 결정적 승부처가 [이웃집 토토로]인 것이다. 만약 이 작품이 국내 흥
행에서 실패하면 상당기간 저패니메이션은 적어도 우리나라에서는 통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어도 좋다. 그만큼 [이웃집 토토로]는 저패니메이션의 모든 장점을
한 몸에 담고 있는 작품이다. 물론 지부리 스튜디오의 작품으로는 아직 국내 개
봉을 하지 않은 [천공의 성 라퓨타](86년)[반딧불의 묘](88년)[마녀 키키의 특급
배달](89년)[붉은 돼지](92년)[원령공주](97년)같은 화려한 작품들이 즐비하게 늘
어서 있지만, 확실히 승부처는 [이웃집 토토로]이다.
스튜디오 지부리는 가령 [인어공주][알라딘][미녀와 야수] 등을 만들어 낸 디즈
니 스튜디오나 제프리 카센버그가 디즈니에서 독립해서 스필버그와 함께 손잡고
[이집트 왕자][슈렉]을 만든 드림웍스 스튜디오와 견줄만 하다. [사하라 사막을
통해 불러오는 뜨거운 바람]을 의미하는 지부리 스튜디오에서는 미야자키 하야
오와 다카하다 이사오 감독 등이 포진하고 있다. 지부리 스튜디오의 저패니메이
션은 할리우드 애니메이션과 뚜렷하게 차별화 되고 같은 일본 내에서도 [공각기
동대]를 만든 오시이 마모루나 오토모 가쓰히로 감독 등의 공상과학 애니메이션
과도 선명하게 구별되는, 동양적 서정을 바탕으로 한 뛰어난 상상력의 세계를
제공했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1941년 생으로서 대학 졸업후 도에이 동화에서 애니메이션
기획 제작 일을 배운 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를 흥행 성공시키고 지부리 스튜
디오를 건립하여 수많은 명작 애니메이션들을 만들었다. 특히 97년 개봉된 [원령
공주]는 일본 내에서 1천 4백만명을 동원하는 대박을 터트려서 다시 한 번 그의
명성을 재확인시켜 주었다.
[이웃집 토토로]는 요즘 유행하는 3D 애니메이션이 아니다. 실제와 거의 흡사
한 캐릭터들이 등장하여 입체적 사실감을 갖고 진행되는 3차원 그래픽과는 다르
게 수채화 풍의 담백한 2차원적 셀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져 있다. [슈렉]이나
[파이널 판타지]같은 3차원 그래픽의 놀라운 기술력과 비교해보면 어린아이 수
준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어떤 장르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만화만이 갖고 있는
특유의 활달한 상상력과 서정성이 장점으로 부각되어 있다.
11살 사츠키와 4살 메이. 이 어린 형제들은 도시를 떠나 시골로 이사를 온다.
불치병을 앓고 있는 엄마가 시골의 맑은 공기를 쐬어서 건강을 찾을 수 있게 하
기 위해서이다. 아버지는 도쿄에서 대학 연구원으로 일했었지만 가족들을 위해
결단을 내린 것이다. 그러나 아이들은 비극적 가정사의 문제는 관심 밖이다. 아
니, 아직 그들을 둘러싼 세계의 시스템에 대해 알지 못하고 관심도 없다. 그들은
오직 지금 당장 눈 앞에 보이는 자신과 세계와의 부딪치는 단선 조직에만 관심
이 있다.
사츠키가 학교에 간 뒤 혼자 숲 속에서 놀고 있던 메이. 눈앞을 지나가는 쪼
그맣고 이상하게 생긴 동물을 발견한다. 꼬불꼬불 구부러진 길을 따라 숲 속으
로 들어간 메이가 발견한 것은?
거대한 숲의 정령 토토로. 2미터가 넘는 거대한 체구. 복슬복슬한 털에 둘러
쌓여 있으며, 사람이 살기 훨씬 이전부터 숲 속에서 살고 있다고 전해지는 동물
인 토토로는 부엉이와 너구리, 곰을 뒤섞어 놓은 모습이다. 토토로의 캐릭터는
바로 미야자키 하야오 자신을 닮은 것이라고 한다. 코다란 머리, 늘 벌름벌름하
는 코, 하얀 치아가 드러난 커다란 입. 토토로의 가장 큰 매력은 순진무구하게
활짝 웃는 모습이다. 도대체 누가, 토토로의 웃는 모습을 보고 사랑하지 않을 것
인가.
메이의 말을 믿지 않던 사츠키도 비가 쏟아지는 날 정류장에서 우산을 들고
아버지를 기다리다가 토토로를 만나게 된다. 비를 맞고 있는 토토로에게 사츠키
가 우산을 빌려주자 토토로는 도토리 씨앗을 답례로 건네준다. 이제 그들은 친
구가 된 것이다.
어른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고 맑은 아이들의 동심어린 눈으로만 볼 수 있는
토토로는, 이 어린 형제들을 위해 수고를 아끼지 않는다. 토토로가 숨을 크게 내
쉬면 마을에 부드러운 바람이 불고, 손을 합장하고 기도를 하면 나무가 새싹을
틔우고 도토리가 자라난다. [이웃집 토토로]의 마력은 우리 모두가 건너왔던 어
린 시절의 이야기를 폭넓은 상상력으로 어우르고 있다는 것이다.
모든 자연에 정령이 있다고 믿는 일본 전래의 신앙에다가 환경친화적인 이야
기를 섞어 동심의 만남을 아름답게 펼쳐 보여주고 있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이
웃집 토토로]는, 세계를 바라보는 맑은 시선을 제공함으로써 탐욕에 가득 찬 우
리 현실세계를 넘어서게 한다.
생각해보면, 우리들도 삶의 순수했던 어린 시절, 토토로와 함께 자랐었다. 그
러나 세상의 흙먼지 속을 걸어오면서 우리 눈에 보이던 토토로는 점점 희미해져
가고 어느 순간, 형체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멀어져 버렸다. 이 영화는 이제 사
라진 당신의 어린 시절 순수한 추억을 불러모으기 위한 하나의 계기로 작용할
것이다. 그것은 추억의 얄팍한 감상을 제공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맑은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때 이 세계는 얼마나 풍부한 울림을 갖고 우리 앞에 나타나는 것
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