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항하라! 페스트가 오고 있다!>
오랑이라는 도시에 갑자기 페스트가 발병한다. 사람들은 초기의 페스트에 별다른 관심 없이 자신만의 일을 해나간다. 하지만, 사람들의 무관심이 페스트라는 엄청난 병을 사라지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페스트란 병은 정말 굉장한 존재인 것이다. 그 어떤 누구도 오랑시의 사람들의 일상을 해칠 순 없었다. 지금까지 오직 페스트만이 그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결국 페스트로 인해 시의 외곽에는 담장이 쳐져 누구도 시 밖으로 떠날 수 없게 되었다. 페스트가 발병한 그 순간 그곳 사람들은 나가지는 못하고 들어올 수는 있었다. 즉, 장소이동을 금지 당하고 대화마저도 끊어지게 된 것이다. 요새는 전화라도 할 수 있었지만, 그 때 당시에는 전화도 없었다. 오랑 사람들은 페스트가 생기기 전 까지 자신들이 자유롭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하지만, 페스트 같은 재앙이 존재하는 한 누구도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을 깨달았다. 자유는 인간에게는 정말 소중한 권리이다. 아무리 하찮은 것을 누릴 수 있는 자유, 어떤 누구도 간섭할 수 없는 인간적인 자유이다.
감금상태가 계속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아무도 막을 수 없는 페스트가 휘젖고 다니는 도시의 모습은 살벌한 기운이 감돈다. 그렇다면, 이제 어떤 행동만이 남아 있는가? 이제 죽기만을 기다려야 하는가? 그건 아니라고 본다. 이 책의 곳곳에서 이런 문제에 대해 답을 말하고 있다. 이제 누가 죽을지도 모르는 참혹한 현실 속에 오랑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쩔 것인가? 답은 간단하다. 여기서 이렇게 멈출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의 자유가 여기서 멈출 수는 없는 것이다.
이 책은 인물들에게서 서로 다른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반응은 하나같이 제각각이었다. 어떤 이들은, 이 같은 재앙에 직면하여, 다른 많은 고난들과 같이 그 문제들로부터 도피하는 길을 선택했다. 어떤 이는 그들 자신의 이익에 보탬이 된다고 생각하여 페스트를 환영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페스트에 맞서서 싸우고자 하는 사람들의 부류에 합류했다.
나는 코타르(Cottard)의 존재가 페스트를 환영하는 이라고 설명하겠다. 그는 범죄인이며 페스트로 거의 절멸상태에 이른 오랑의 상황이 오히려 편안하다. 모든 이들이 죽음으로부터 위협을 받고 있을 때 그 때문에 자신의 사형집행이 연기된 것을 그는 즐기고 있다. 그의 죄가 무엇으로 언명되든, 무엇보다도 먼저 그는 그 결과로부터 벗어나고자 했다. 그는 판결을 받기보단 자살하는 게 더 낫다고 여긴다. 그래서 그는 초기에 자살을 기원하기도 한다. 페스트는 코타르에게 미래를 위한 희망을 제공해 주었던 것이다.
반면 페스트를 물리치는데 동참했던 사람으로 오랑시의 방문자인 타루(Tarrou)가 있다. 타루는 이념과 그의 믿음, 자신이 갖고 있었던 마음을 가장 잘 전달한다. 타루란 인물의 존재를 이 소설의 주제로 나타내는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 같다. 그는 오랑시의 거주민이 아니며 사업차 오랑시에 온 것도 아니다. 그는 휴가중이었다. 페스트가 그 도시를 휩쓸었을 때, 타루는 그 도시의 시민들을 도울만한 어떠한 외부적인 동기도 없었다. 하지만 타루는 모든 행위를 멈추고, 이기심없고 순수한 성자로 나가는 길을 찾는다. 그는 어떠한 악의 일부분도 원치 않는다. 페스트가 만연하는 동안, 그는 결국엔 자신의 목숨을 앗아간 그 페스트균과 싸우는 자원봉사단에 힘을 준다. 타루는 대단한 사람이 아니고, 그저 우리와 같은 처지에 있는 한 인간일 뿐이다. 그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데로 살고 또 행동하며, 그렇게 살아가는 것 안에서 그는 자신이 갖고 있었던 믿음을 그대로 펼쳐 보일 수 있었던 것이다. 타루와 리유는 함께하며 별들이 무수히 넘쳐나는 밤에 몇 번의 침묵을 교환한다. 그들은
"행복이란 모든 것을 잊지 않는 것, 살인까지도 잊지 않는 그것" 이란 정의에 공감을 보낸다. 그 정의는 다소 모순 돼 보인다. 왜냐면 타루는 고통스럽기 그지없고 또한 그 고통이 자신의 죽음에 이르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까뮈는 타루라는 인물을 통해, 인간이 내부에 지니고 있는 `본질적인 선의지'를 갖고 바르게 행동해야 한다는, 그의 신념을 보여준 것 같다. 타루는 도덕적으로 완전한 인간이 되길 원치 않았고, 영웅적인 사람이 되기를 바라지도 않았다. 단지 그는 성자가 되고 싶었다. 타루는 그의 생애를 통해 그 길을 따르며, 고통당하는 사람들에 대한 사람들의 무관심을 극복하기 위해 싸우고, 다른 이들을 돕기 위한 목적으로 일한다.
파늘루(Paneloux)신부는 신의 화해를 시도하고 있다. 그는 페스트를 막기 위해 노력한다. 이 소설의 초반부를 살펴보면, 파늘루 신부는 확고한 기독교인이라는 걸 알 수 있다. 그는 페스트가 확산되는 가운데 열린 그의 첫 강론에서, 페스트는 ‘악인들의 죄를 응징하기 위하여 신이 친히 보낸 것이다’라고 선언한다. 그는 후에 리유나 타루처럼 사람들을 도우며, 페스트에 맞서 투쟁하는 일에 동참하지만, 그의 믿음은 흔들리게 된다. 이 흔들림은 소설의 인물들이 무구한 아이가 하나둘씩 고통을 받으며 죽게 되는 것을 지켜보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놓였을 때 극에 달한다. 고통받는 아이들의 죄가 무엇이건데 그 죄를 벌하기 위해 무구한 아이들의 목숨을 빼앗는단 말인가? 아이들은 잘못이 없다, 하지만 그들은 바로 자신들 앞에서 아이들이 하나둘씩 죽어나가도록,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하고,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이 일이 있은 후에, 파늘루는 새로운 강론을 쓰기 시작한다. 이것은 첫 강론과는 다른 것이었다. 그는 그 강론에서, 자신이 직접 체험했던 사실을 반영한다. 두 번째 강론에서 파늘루는 페스트가 신이 보낸 것이 아니라고 단언한다. 페스트를 악의 일부분으로 규정하고, 기독교는 그것을 직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실패하고 말았다. 파늘루 신부가 죽어버렸기 때문이다.
리유는 그 도시에서 페스트가 진정 무엇을 의미하는지 제일 처음 깨달은 사람이다. 그리고 그것에 대항하는 싸움을 주도하는 일을 돕는다. 리유는 자신이 알고 있는 악에 맞서 싸우는 진정한 반항인이고, 그의 투쟁은 인간의 부당한 현실에 대한 항의였다. 그는 평범한 반항인이 아니었다. 그는 의사였다. 의사로서, 감염에 대한 위험과 공포심이란 보통 사람이 견디어 내야할 것 이상이었다. 리유는 매일 그의 일 속에서 이 같은 사실에 직면한다. 리유는 정말로 자기 스스로 무관심을 실천하는 것처럼 보이게 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리유는 모든 환자들에게 동정을 가질만한 여유가 없었다. 그는 자신의 의무에 전념해야만 했다. 자신의 감정을 다스리고 동정심을 묶는 것 외에는 어떤 방책도 없었던 것이다. 리유는 타루가 찾고 있던 것과 같은 평화를 분명하게 단정치 못한다. 리유는 그가 참여했던 그 투쟁이 결코 끝나지 않을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까뮈는 이소설을 통해서 사회가 인간에게 주는 고통스런 무관심의 문제를 막아낼 수 있는 이념으로 실존주의를 인식한 것 같다. 그의 소설로서 말이다. 까뮈는 아마도 독자들에게 그들이 비극의 세계에 처한다면 자신을 생각할 수 있게 만든 것 같다. 그들에게 그는 아마도 이렇게 말할 것이다. 리유처럼 반항하라고... 당신의 인간적인 충실함을 이길 수 없도록 발버둥치라고...
글쓴이-대일 김준우
첫댓글 오늘부터 대일 거사의 독서일기를 게재합니다. 이 글은 무진당이 대일 거사한테 단지 엄마라는 이유만으로 저작권료 500원을 지불하고 올린 글이오니 많은 분들의 열람을 바랍니다. 아울러 많은 격려와 비판을 부탁드립니다- 무진당 합장
대일 엄니! 책정한 고료에 동그라니 하나 더 붙여야 할 걸요. 저도 200원으로 책정했다가 실패했으니 참고하세요.그나저나 참, 부럽습니다. 두 아드님 다 예비 작가의 재질을 충분히 지니고 있군요. 동글이, 대일이 엄니! 화이팅!!_()_
와 진짜 "무"지하게 복이 많으신무진당님 "진"짜배기 두아드님의 좌청룡 우백호 협시를 받으시는 무진당님 "당"당한 음성과 미소, 무량한 복전속에 세상사를 모두 통관하시는 "관법"거사님도 함께 하시는 공간은 정토세계가 아닌가 합니다.아미타불.무진당 님을 능가할 소질이있는 대일거사님
원고료 인상...
대일거사님께서 쓰신 독서일기라고 보기에는 너무도 예리한 면이 곳곳에 숨어있네요. 언제 읽었는지도 모를 "페스트"기억이 가물가물한데~이 기회에 다시 한번 더 읽어볼까? 기독교의 교리 가운데 맹점은 바로 "악"이라는 존재. 하지만 그것은 인간의 세계와 하느님이 존재하는 세계와의 헛점을 실랄하게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보았는데, 그래서 내 자신은 아마도 기독교를 믿지 않는 가장 큰 이유라고 봅니다. 대일님~ 기대합니다. 아주 멋진 일을 해내셨군요. 쉽지않았을텐데.....
감사합니다... 앞으로 더 좋은 작품을 읽어서 더 좋은것을 써보이겠습니다
대일 부처님 엄마 부처님께서 저작권료를 스스로 기쁨으로 올려 주실수 있도록 독서일기 잘 쓰시길...대일 부처님 아미타불! 화~이~팅~ ^^ _()_ 아미타불!
감사합니다 ㅎㅎㅎ 화이팅~~~
대일거사님! 좋은 글, 고맙습니다. 엄마에게 고료 올려달라고 하세요. 미래의 베스트 작가를 너무 무시하는 것 아니냐고.. _()_
ㅎㅎㅎㅎㅎ감사합니다 나중에 해야죠..^^
대일님은 참 인생일대의 커다란 공부를 하고 계십니다. 고등학교때 읽은 책은 평생을 두고 두고 그 진영이 남습니다. 뜻도 모르고 읽어도 결국은 그 의미가 툭 하고 열리는 체험도 하고요. 아...저는 대일님이 참으로 복이 많은 분이구나 다시 한번 더 느낍니다. 복이 많은 사람은 그만큼 이웃을 위해 할 일이 많다는 것이겠지요. 갑자기 유년시절로 돌아간 기분이 들어서 참 기분 묘하고 좋습니다. 에고 한때 까뮈를 넘 죠아한 문학쇼녀였는디 세월아 네월아 와이리 빨리 왔노 ㅋㅋㅋ
그라고 무진당 보살님은 원고료를 인상하라 인상하라
승진행님부터 시작된 원고료 인상 여론에 기가 산 대일 거사의 압력으로 10배 인상했습니다. 책 사줘야지, 한 권 읽을 때마다 만원 줘야지, 이젠 원고료 5천원까지 더하면 저는 얼마
그래도 잘 하셨습니다. 대일엄니~~ 나중에 효도받으시려면 지금부터 인심 팍팍 써야죠. 화이팅! _()_
대일님! 원고료 인상되는 데 제 공로도 큰 듯 하오니 한턱 써야되지않겠3 ㅋㅋ _()_
와대일님.....역시.......지는 진작부터.....알아봤지요......댓따 큰일 낼 청소년이란걸......대일님........................아미타불.................()()()
멋진 글 솜씨을 보니 모전자전이란 말을 새로 만들어야 하겠습니다. 훌륭한 아들을 두신 무진당님 부럽심더 좋은 독자가 되겠습니다. 감사합니다_()_
본래의 자신(대아)과 내(소아)가 만든 업(카르마), 태양과 그것을 잠시 가릴 뿐인 구름, 완전한 사랑이신 신은 절대로 인간을 시험하지 않으며 인간이 만든 핑계이며 업의 그림자일뿐이란걸 느낍니다. 마음공부를 하면서 고전을 보는 눈이 새로워짐을 느낍니다. 대일거사님. 고맙습니다. 묶이지 말라, 자유로워라. 나무아미타불
대일님
제 아들놈과 비교 됩니다..... 파이팅! _()_()_()_
이렇게 예리하게 작품을 보시다니 까뮈가 살아온다면 형님하겠습니다 앞으로도 좋은글 많이 부탁합니다
대단한 실력입니다. 대일님 화이팅_()_
행복한 대일거사님... 좋은 부모님에, 고료인상을 부추기는 좋은 금강 도반님들에, 줄줄이리는 꼬릿말에` 대링거사님의 겨울방학이 보람되겠습니다...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대일거사 `
대단하세요. 대일님. 더욱 발전하시길 기원합니다. ^^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