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과 소나기
지루한여름.
12살 소년은 툇마루에서 낮잠을 자다가 후두두둑 바삐 걸어가는 소나기를 보았습니다.
한차례는 담벼락에 빗금 긋는 낙서를 하다 호랑이 할아버지에게 들킨 개구쟁이처럼 후다닥 달아났고, 한 차례는 앙갚음하듯 토방까지 기어 들어와 고무신에 흠뻑 물딱총을 쏘고 달아났습니다.
도망가는 소나기 발뒤꿈치 타는 흙 향이 훅 들어올 때 양철대문 부서지게 두드리는 소리도 함께 들렸습니다.
‘퉁탕퉁탕........주혀나 노올자~,냇갈 가자......’
반가움에 얼른 일어나 신발을 신으려다 개구쟁이 빗물이 고무신에 숨어있어 미끄덩~하고 넘어졌다 일어난 소년은 쨍쨍 햇볕도 친구삼아 전주 천으로 물장구를 치러갔습니다.
좁은 논둑길에서 벼 사이를 지날 때 손으로 사라라락 벼들을 스치며 지나가자 벼들은 후끈 풀냄새를 주었고, 제 키를 키우느라고 왁자지껄 떠드는 소년들 소리를 삼키고 저 멀리 외딴집에서 들려오던 개짓는 소리까지 삼켜 버렸는지 오늘은 들려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외딴집에 당도한 소년들은 겨울도 아닌데 솜털까지 세우는 긴장과 숨소리까지 죽인 뒤에 마당에서 낮잠 자는 무서운 누렁이를 보고서 안도의 숨을 내 쉬며 지나쳤습니다.‘휴~’
그 집에 대대손손 살고 있는 무서운 누렁이는 여러 사람을 물었다는 전설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드디어 전주 천에 당도한 소년들 물놀이가 시작 되었습니다.
옷들을 홀랑 벗어놓고 행여 바람에 옷이 날아갈까 돌을 넣은 고무신을 얹어 놓고 피리와 붕어를 잡으려고 동그랗게 만들어 두었던‘독살’에 갔더니 장마로 떠내려가 다시 만들어 놓고 놀란 개구리처럼 퐁당 퐁당 물속으로 뛰어 들었습니다.
‘야 시원하다~ 어푸어푸.........개굴개굴 개굴........ ’
그러나 나는 수영을 못하기 때문에 독살에 고기가 얼마나 들어왔는지 살펴보고 혹시 바람에 친구들 옷이 날아갔는지 살펴주고 그 댓가로 청색 은색 등줄기 드러낸 피라미가 물위로 힘차게 거슬러 오르려고 도. 미. 솔. 도. 도. 솔. 미. 도.....높낮이로 튀어 오르려다 떨어지는 피라미와 작은 폭포에 합주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바로그때!
저만치서 자맥질하는 친구 옆으로 직사각형 종이 한 장이 떠내려 오고 있었습니다.
‘어? 저것은 백 원짜리 돈인데? 친구가 주어가면 안되는데 나는 수영도 못하는데 어쩌지?’
돈을 보자 안절부절 목구멍에서 뭔가 뜨거운 것이 올라오고 가슴은 고장 난 풍금 건반처럼 불뚝 불뚝 뛰기 시작하자 돈에 눈이 먼 12살 소년은 수영을 못한다는 사실도 잊고 깊은 물속으로 풍덩 뛰어들었습니다.
‘어푸어푸....’
소년을 삼킨 물은 눈앞에 수없이 많은 비누풍선을 뽀그그르 만들고 귓속과 물속은 웅~소리를 내었지만 돈을 잡아야한다는 생각에 발버둥을 치자 자신도 모르게 물위로 떠올라 주변을 살펴보았더니 돈은 3미터쯤 앞에 있었습니다.
이후로도 몇 차례나 ‘뽀그르르...벌컥벌컥’ 물을 먹었지만 돈에 눈이 먼 소년은 생사의 갈림길에서 오로지 돈을 움켜쥐어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습니다.
그러자 소년의 생각보다 돈이 더 빨리 흘러와 저절로 손에 잡혔고 다행이도 떠밀리는 물살에 쉽게 밖으로 나올 수 있었습니다.
‘돈이란 잡으려면 어렵고 기다리면 언젠가 반드시 온다’그러한 진리를 그때 깨달았다면 순전히 거짓말이고 어쨌든 물을 몽땅 먹어 복어처럼 빵빵해진 배를 만지며 하늘을 보니 파랗던 하늘은 노랗고 귀속은 물이차서 써그르륵 소리를 내고 코끝은 쌩~했습니다.
나는 생전 처음 큰돈을 보며 주인을 찾아 돌려 줄 수도 없고 목숨 걸고 챙긴 돈이라 남 주기도 아까워 소나기처럼 달아나려고 후다닥 옷을 주어 입었습니다.
바로 그때.
‘야, 너 뭐허냐 뭐 주었지? 혹시 돈 아녀?’ 자맥질하다 솟구친 친구가 물어 보는데 어쩔 수없이 실토를 하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그 친구는 작은 목소리로 내 귀에 속삭였습니다.
‘야, 주혀나 빨리 가자, 자들한테 말하지 말고 둘이서50원씩 나누어갖자 만약에 자들이 안다고 혀 봐라 니 것이 줄어들잖아 안 그려?’
바로그때 산수 시간에 주산 선생님 승산 제산 가감산 불러주시는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둘이 나누면 50원이요 셋이 나누면 33원이요 넷이 나누면25원이요 다섯이 나누면?”
주판 튕기듯 머리가 휙 휙 돌아가고 내 몫이 줄어든다는 친구 말에 현혹되어 둘은 하나가 되어 도망치기 시작 했습니다.
그러자 또 다른 친구가 황급히 부르며 따라오는데 친구는 내 손목을 잡아끌며 ‘야 빨리 와 이 멍청아 셋이 나누면 니 돈이 줄어들잖아~빨리 가장 게 뭐허냐 이xx야~’
저는 심한갈등을 했습니다.
‘비록 내 몫이 줄어들어도 저 친구가 나중에 이 사실을 안다면 얼마나 서운해 할까’그래서 나는 셋을 만들었지만 제몫이 줄었다고 생각한 그 친구는 나에게 심한 눈총을 쏘며 뛰기 시작했습니다.
‘우다다다다다......’
그러자 또 친구 두 명이 자기들 떼어놓고 달아나는 장난치는 줄 알고 따라붙으며 소리쳤습니다.
‘야 같이 가자 느그들만 가기냐 이 나쁜xx들아’
앞서가던 두 친구는 아까보다 더 쎄게 내 양손을 잡아끌며 ‘야 빨리 가자~자들하고 함께 나누면 니 돈이 적어져 임마 빨리 도망가자 이 멍청한 새꺄~’
나는 어쩔 수없이 개 끌리듯 끌려 뛰기 시작했는데 전설의 외딴집 앞에서 엄청 큰 소리로 컹컹 짖으며 쇠 목줄 철그럭 거리는 소리를 들었지만 여우비 눈 흘기고 지나가듯 그대로 달렸습니다.
‘와 다다다다다.....’
어쨌든 우리는 돈을 갖고 튀어 시장으로 가서 사이좋게 33원씩 나누었고 나는 돈을 주었다는 이유 하나로 34원을 가지고 만화도 보고 그렇게 먹고 싶던 내 얼굴만 한 호떡도 먹고 결국 유흥비로 탕진 한 뒤에 땅거미와 함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동네로 기어들어갔습니다.
아, 그런데 동네 입구에서 심하게 개를 꼬시르는 냄새가 우리들 코를 자극했습니다.
‘야 누구 집에서 개 잡능갑다. 누구네 집이지?’
그때 우리와 합세하지 못한 친구가 집에서 나오더니 물었습니다.
‘야 느그들 왜 아까 도망갔냐? 그리고 어디 갔다 인자 오냐?’
그러나 우리는 돈 때문에 친구를 버리고 달아난 죄로 아무 말도 못하고 망설이다 가만히 살펴보니 낮에는 멀쩡했던 그 친구가 절뚝거리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며 물었습니다.
‘야, 너 왜 그냐~ 왜 절룩거려 임마~ 우리들 따라오다 다쳤냐? 야 정말 미안허다~’
그러나 친구에 입에서 나오는 말에 깜작 놀라고 말았습니다.
‘야, 느그들이 우리들을 띠 놓고 외딴집서 뛰어가 가지고 우리가 뒤 따라가다가 개가 튀어나와 물었는디 나는 엉뎅이를 물었고 친구는 다리를 물었다. 그냥두면 우리가 울 때 개짓는 소리를 낸다고 우리 할머니가 느그집 개털을 잘라다가 꼬실라 가꼬 붙였다. 이히히히.....’
개에게 물리고도 ‘이히히히’ 웃는 친구에게 정~말 미안했지만 돈을 주어서 달아났다고는 더욱 미안하여 말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어느덧 세월이 흘러 고향을 떠난 지 20여년
고3아들이 수능을 본다고 1년365일 한 번도 빠지지 않았던 새벽기도를 마치고 고향에 갔다가 우연히 추억에 전주 천을 걷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저만치서 허옇게 펼쳐진 부챗살 모양의 종이 뭉치가 내 눈에 확 들어오는데 술 취하신 아버지보다 먼저 달려가 보았더니 ‘오 마이 갓!’ 그것은 돈이었습니다.
누가 볼까 얼른 주머니에 넣으며 눈짐작으로 세어보니 족히 200만원에 동그라미가 수없이 찍힌 수표 10여장은 1000만원? 나는 전주 천에서 또다시 돈을 주었습니다.
그때 걸어오신 아버지께서 ‘꺼억 야 주혀나 끄윽~ 뭘 주었냐? 돈이지?’하시며 짧고 가는 목소리로‘야, 빨리 가자’하셨습니다.
그 의미심장한 말씀은 옛날 그 친구처럼 둘이 나누어 갖자는 암시처럼 들려 심한 갈등을 했습니다.
‘그래 아들이 대학을 합격해도 서울에 대학 보낼 형편이 안 되고 당장 하숙비도 없는데 이것은 신께서 내 기도를 들으시고 내려주신 학자금이다.’
그러나 또 한편은 ‘작정기도를 마치자 이아침에 마지막으로 나를 시험 하시려는 신의계획이다. 이 돈을 나누어 쓰게 되면 내 아들은 수능을 망치게 된다.’
이런 두마음으로 망설이다 긴 전주 천을 살펴보니 저 끝에서 시내로 막 들어서려는 유모차 한 대가 보였습니다.
‘그래 이 돈은 분명히 저사람 돈이다 시내로 들어가면 못 찾으니까 빨리 가서 물어보자’ 그 생각이 들자 술 취해 쓰러질듯 한 아버지를 버리고 뛰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시내로 들어가 버린 유모차 새댁을 찾아 유모차 밑에 싣고 가던 봉투에서 흘린 것을 확인하고 돈을 돌려주었습니다.
그때야 휘청걸음으로 오신 아버지께서 물으셨습니다.
‘야 저사람 돈이 끄윽~ 아닐지도 모르는디 줬냐?’
아버지는 서운한 눈총을 심하게 쏘셨지만 나는 그 돈이 내게서 떠났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습니다.
아, 홀가분.......이렇게 기쁠 수가.....
돈에 욕심을 버리니 12살 소년이 소나기후 그날에 보았던 맑은 전주 천처럼 마음이 맑아졌습니다.
물론 아들은 대학에 합격하고 졸업하고 날 빼닮은 30살 청년으로 자랐지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