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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참 좋게 본 글입니다.
함께 나눠 읽어보면 좋겠다 싶어서 올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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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기행문
우리가 희망입니다
“Somos La Esperanza!”
장윤재
미국 유니온 신학대학원 박사과정
“더 이상 여행 허가는 필요 없습니다.”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그럴 리가. 학교가 여행 경비에다 학점까지 주는 천금의 기회였지만 나의 여권 맨마지막 페이지에 적혀 있는 “여권법령 관계규정에 의한 여행 제한국(외무부 장관이 지정하는 국가)에 여행코자 하는 자는 별도로 외무부장관의 사전 허가를 받아야 한다”는 ‘유의사항’을 확인해야 했다. 그런데 대한민국 뉴욕 총영사관의 답변은 의외의 것이었다. 무언가 잘못됐겠지. 나는 잠시 후 다시 전화를 걸었다. 이번에는 짐짓 목소리를 바꿔서.
“글쎄 말씀드렸잖아요. 이제 쿠바 여행 사전 허가는 필요없다니까요.” 어떻게 내 목소리를 알았을까.
쿠바라는 나라는 그렇게 나로부터 멀었다. 그 나라는 나에게 일종의 ‘금단의 열매’(forbidden fruit) 혹은 ‘판도라의 상자’(Pandora’s box)와 같은 것이었다. 내가 쿠바로 여행을 간다고 하자 내가 전도사로 일하고 있는 뉴욕 한인교회의 교인들은 대단히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쿠바? 쿠바라고요? 아니 거기 가서 뭐 하시게요? 신학생들이 공산당 국가에 가선 대체 뭣한데요?” 쿠바는 지금도 그렇듯 나에게서 멀었다.
하지만 그 나라가 나에게서 멀면 멀수록 이번 여행은 나를 더욱 흥분시키는 것이었다. 왜, 금지된 열매가 더 달다느니 몰래 먹는 빵이 더 맛있는 법이라느니 하는 말들이 있듯이. 나는 선악과 앞의 이브나 절대로 열지 말라는 상자 앞에 선 판도라가 된 기분이었다. 하지만 내가 그 “금단의 열매”에 손을 댄다면 내 눈이 밝아질까? 혹 내가 그 “금지된 상자”를 열면 온갖 질병들과 문제들만 풀어놓는 것은 아닐까?
쿠바에 도착해 그 열매와 상자에 손을 대자마자 나는 혼란에 빠졌다. 도대체 쿠바라는 나라는 내가 전에 가봤던 인도차이나 반도나 동유럽의 사회주의 국가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이상한 나라였다. 떠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내내 나의 머리를 떠나지 않은 의문은 왜 군인들을 하나도 볼 수 없었는가 하는 것이었다. 피델 카스트로의 집무실 외에서 나는 단 한 명의 군인도 보지 못하였다. 그렇게 여러 곳을 싸돌아다녔는데도 한 군데의 검문소도 통과한 적이 없었다. 돌을 던지면 닿을 가까운 거리에 미국이라는 ‘적대’국가와 팽팽하게 대치하고 있는 이 나라의 해변가에서(미국의 플로리다와 가장 가까운 곳은 약 150킬로미터밖에 안 떨어져 있다) 나는 한국의 동해안에 가면 흔히 볼 수 있는 참호나 철조망 하나 발견하지 못했다.
내 예상과 정반대로 이 나라의 분위기는 한마디로 ‘자유분방’ 그 자체였다.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의 얼굴은 밝고 구김살이 없었으며 표정이 풍부했다. 침울하거나 딱딱하거나 경계심이 가득한 표정들이 아니었다. 거리마다 풍만한 몸매를 도발적으로 드러낸 남국의 여인들이 활보하고 다녔다. 해변가 곳곳에서는 사랑하는 연인들이 마음껏 포옹하고 입맞춤을 하고 있었다. 주민들의 이주나 여행은 자유로웠다. TV를 켜면 CNN 스페인어 방송이 하루종일 흘러나왔고 내가 며칠전 뉴욕의 채널 11(워너 브라더스사 소유)에서 보았던 인기 한창의 미국 코미디 프로그램이 그대로 방영되고 있었다. 남미 특유의 낭만과 열정이 담긴 약간은 자극적인 노래들이 쉬지 않고 라디오의 전파를 탔다. 그리고 길거리에 나가 1분만 서 있으면 왜 한국정부가 쿠바 여행을 자유화시켰는지를 곧 눈치채고 만다. 도로를 달리는 자동차들의 거의 절반은 한국산 자동차들이다. 나는 한국에서 새로 나온 신차들을 쿠바에서 타보았다. 미국의 경제제재로 그 자동차들은 캐나다를 통해 수입되고 있었다.
사실 카리브해의 아열대 지역에 있는 이 작은 섬나라의 자연환경에 주목하면 겉으로 드러나는 쿠바 사회주의의 ‘낭만성’을 이해하는 데 어려운 점은 없다. 사람은 자연을 닮는다고 하지 않는가. 나는 세상에 태어나서 그렇게 투명하고 명징한 하늘을 본 적이 없다. ‘화창하다’는 표현으로는 모자랐다. 한마디로 ‘눈부셨다.’ 카메라의 광선 조리개를 최대로 열어놓은 느낌이라고 할까. 그런 태양 밑에서 자라나는 울창한 수목들은 일년 내내 풍성한 열매를 맺고 있었다. 침울한 겨울이 없는 이 나라 사람들은 사회주의도 자기네 자연환경처럼 하는가 보다.
나는 사회주의도 하나의 판에 박힌 틀이 아닐 수 있다는 사실을 생생히 체득하는 데 꼬박 2주를 바쳐야 했다. 트린 민 하(Trinh T. Minh-ha)가 이야기했던가. “떼어놓고, 가두고, 그리고 수선하려는 우리들의 결사적이고도 영구적인 시도에도 불구하고 범주(categories)란 언제나 샌다”(Despite our desperate, eternal attempt to separate, contain, and mend, categories always leak). 사회주의에 대한 나의 범주와 고정관념이 새고 있었다. 사회주의에도 여러 가지 얼굴이 있었다.
내가 쿠바를 방문한 때는 그 나라가 커다란 위기와 전환기에 처해 있을 때였다. 나는 그 쿠바의 ‘위기’라고 하는 것을 거리에서 마주친 청년들을 통해 직접 느낄 수 있었다. 하바나에서 좀 떨어진 마탄자스라는 작은 도시의 거리에서 나는 올해로 20살난 죠세파니라는 청년을 만났다. 그가 먼저 다가와 말을 걸었을 때, 나는 단지 그가 한 외국인에게 흥미를 느꼈을 것이라고 순박하게 생각했다. 죠세파니는 묻지도 않았는데 먼저 자신은 군대에 가고 싶지 않다는 말부터 꺼냈다.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였다. 나도 그랬으니까. 그러나 그가 너무도 태연하게 내가 쓰고 있던 뉴욕 양키즈 야구팀의 모자와 몇 년째 입고 있던 나의 청색 티셔츠를 달라고 하자 나는 너무도 황당했다. 그는 아주 태연하게 그것들을 선물로 달라고 했다. 제3세계의 가난한 마을들을 많이 다녀보았지만 이렇게 처음 보는 이방인에게 모자와 옷을 벗어달라는 요구는 처음이었다. 그것도 선물로. 내것이 네것이고 네것이 내것인 사회주의 체제에서 살아와서 그런가? 하지만 속으로 욕이 나왔다. ‘이 자식아, 자존심 좀 지켜라.’ 나는 당연히 거절했다. 그러자 그가 이번에는 현찰을 달라고 한다. 그것도 단지 1불을. 나는 그 돈이 쿠바에서는 큰돈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No’라고 말했다. 그가 점점 나를 걸어 다니는 ‘돈’ 정도로 대하는 것이 나는 매우 불쾌했다. 우리의 대화는 거기서 어색하게 끝났다. 하지만 그는 나를 떠나지 않았다. 잠시후 그는 다시 다가와 똑같은 것들을 달라고 요구했다. 죠세파니는 내가 쿠바에서 실망을 느끼게 한 첫 쿠바인이었다. 그런데 내가 죠세파니를 통해 엿본 쿠바의 ‘위기’라는 것은 어떤 종류의 ‘위기’일까?
나는 두 명의 또 다른 청년들을 마탄자스의 시청 앞 광장에서 만났다. 그들은 각각 26살과 20살난 젊은이들이었는데 씨거(cigar)를 팔고 있었다(쿠바산 씨거는 세계 최고의 하나이며 물론 그런 판매는 불법이다). 한 청년은 자기가 기계공이고 다른 한 청년은 화학을 공부하는 대학생이라고 말했다. 믿어지지는 않았다. 나이가 더 든 청년은 죠세파니처럼 묻지도 않았는데 군대이야기부터 시작했다. 그는 자기가 어떻게 정신과 의사에게 뇌물을 먹여 군복무를 피했는지를 자랑스럽게 말했다. 이어 그들은 자신들의 경제적으로 궁핍한 상황을 장황하게 설명하기 시작하였다. 씨거를 팔 수 있는 잠재적 고객의 동정을 사려는 것인가. 더 이상 끌려가지는 말자 싶어 나는 내가 대화의 ‘공세’를 취하기로 했다. “잠깐만, 그런데 만약 지금 너희에게 20불이 있다면, 그걸 가지고 뭣하겠니?” 공수가 바뀌었다. 나이가 더 많은 청년이 대답한다. “아 그렇다면요, 난 우리 가족을 위해 닭 두 마리와 수프와 식용유를 사겠어요. 그리고 엘레구아(아프리카에서 유래한 토속신으로서 쿠바인들의 대중적 사랑을 받음─필자 주)에게 바칠 단 음식들과 오충(역시 대중적 사랑을 받고 있는 아프리카에서 유래한 토속신─필자 주)에게 바칠 촛불을 사겠어요.” 나는 공세를 늦추지 않았다. “만약 100불이라면?” 인상된 액수에 그들은 적이 당황하는 눈치들였다. 왜냐하면 그 액수는 교수나 의사 등 쿠바 전문직의 일년치 봉급에 해당하는 큰돈이었기 때문이다. “글쎄요 … 음 … 그렇다면 우선 어머니와 아버지에게 현찰을 좀 드리고요 … 그리고 나서는 우리 젊음을 위해 써야지요. 예를 들어 술집에 간다던가 말이지요. 보시다시피 우리는 젊거든요.” 역시 나이가 좀 더 든 청년이 대답했다. 내가 이 두 다른 청년들에게서 엿본 오늘날 쿠바의 ‘위기’란 과연 어떤 위기였는가?
89년 무렵 나는 잠시 필리핀의 네그로스 섬에 머무른 적이 있었다. 그 곳은 세계 사탕수수의 주산지였는데, 대규모 플랜테이션 농업이 일어난 곳은 어디나 그렇듯이 대다수의 소농들은 비참한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자기 집 앞마당에 사탕수수대신 쌀을 심었다고 자경단에 의해 지경이었다. 거기에서도 나는 마탄자스의 두 청년들에게 던졌던 것과 같은 질문을 필리핀의 농부들에게 던진 경험이 있다. 고된 노동을 끝내고 석양이 아름답게 내리는 시간에 사탕수수를 베어낸 고즈넉한 언덕 위로 ‘꼬레아’에서 왔다는 ‘리포터’를 구경하러 온 동네 사람들이 다 몰려나왔다. 모깃불 냄새는 구수하게 피어오르고 뗏국물에 절은 아이들은 그 왕방울 만한 눈들을 엄마의 치마 뒤에 감추고서 내 일거수 일투족을 지켜보고 있었다. 하지만 내 마음은 이미 형언할 수 없는 슬픔으로 가득차 있었다. 마을주민의 대표가 나에게 들려준 그 가난과 핍박의 이야기들 때문이다. 나는 더 이상 물어볼 것이 없었다. 그래서 서둘러 ‘인터뷰’를 끝내려고 물은 것이 이 질문이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묻겠습니다. 만약 지금 미화 100불을 가지고 계시다면 무엇부터 하시겠습니까?” 그 질문은 네그로스 사탕수수 노동자들의 고통스런 삶을 내가 쉽게 요약할 수 있는 방식으로 설명해 달라는 주문이었다. 통역자가 그들의 지방어로 내 말을 통역하는 동안 내 머리 속에는 보통 사람들이 갑자기 금전적 행운이 따랐을 때 하고 싶어하는 것들의 목록이 떠오르고 있었다. 옷을 좀 산다든지, 구두를 산다든지, 여행이나 유흥을 즐긴다든지, 아니면 일부를 저축한다든지 하는 것들 말이다. 그런데 약 30명 정도 되는 마을의 성인들은 내 질문의 통역이 끝나자마자 마치 합창을 하듯이 “부가스” 라고 소리를 질렀다. 깜짝 놀란 내가 “부가스”가 뭐냐고 통역자에게 묻자 그들은 자기들의 ‘합창’에 내가 놀란 것을 미안해하는 눈치였다. 통역자가 잠시 웃더니 이렇게 말했다. “부가스는 쌀이란 말입니다.” “쌀? 쌀이라고?” 나는 잠시 멍해졌다. ‘겨우’ 쌀이란 말인가? 일년치 이상의 임금인 그 큰 ‘여윳돈’을 가지고 쌀을 사겠다고? 내가 지금까지 저들의 이야기의 무엇을 들었단 말인가? 그 때 그들의 “부가스”라는 외침은 내 가슴에 비수처럼 박혔다. 그렇구나, 쌀, 쌀이다! 저들이 지금과 그리고 앞으로도 조금의 여유도 없이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 쌀, 쌀이다, 밥이다! 그 때 그들은 제3세계 민중의 고난을 제법 이해한다는 내가 던진 질문이 얼마나 ‘사치스럽고’ ‘여유 있는’ 말장난인가를 사정없이 폭로해버렸다. 나의 민중 이해는 그렇게 관념적이었다. “부가스!” 이후로부터 그 외침은 내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그 외침은 이 세상의 맨 밑바닥 막장에서 울려나오는 하나님의 음성이었다. 내 눈에서 비늘이 떨어졌다. 그들이 나에게 빛을 보게 한 것이다. 그 때 거기에서 나는 어떤 종류의 ‘위기’와 또 어떤 종류의 ‘희망’을 읽었던가?
필리핀과 쿠바에서의 두 가지 이야기들을 비교하면 이른바 오늘날의 쿠바의 ‘위기’의 실체가 무엇인지 잘 드러난다. 쿠바의 위기는 전형적인 제3세계의 위기가 아니었다. 굶어 죽고, 얼어죽고, 병들어 죽고, 교육을 못 받아 가난을 대물림하는 그런 위기가 아니었다. 오늘날 쿠바의 ‘위기는 인간의 기본적인 필요(basic human need)의 위기가 아니었다. 쿠바인들이 그토록 자랑스러워하는 것처럼, 1959년 ‘혁명’ 이후 음식과 주거와 의료와 교육이라고 하는 4대 인간의 기본적인 요구는 보장되고 있었다. 40년간에 걸친 미국의 가혹한 경제제재로 물자가 절대적으로 부족하였지만 그들은 먹고 자고 치료받고 교육받는 데 아무런 걱정을 하지 않았다. 그 단적인 예가 세계최고인 쿠바의 이혼율이다. 3쌍 중 2쌍이 이혼한단다. 페미니즘 때문이 아니고 여자가 이혼을 해도 먹고 자고 병원 가고 자식 교육시키는 데 아무 걱정이 없기 때문에 남자들을 ‘마음놓고 찬다’고 한다. 내가 탄 한 택시의 운전사는 지금 4번째 아내와 살고 있는데 이번에 살고 있는 ‘치노’(중국계 여자)에게 또 언제 차일지 몰라 무섭다고 말하면서 여자들이 너무 ‘막무가내’라고 분개해 했다. 물론 쿠바의 교수나 의사들이 받는 한 달치 봉급의 액수는 우리 나라 초등학교 학생들의 한 주일치 용돈도 안 되는 액수이다. 그러나 그 봉급은 식비, 주거비, 의료비, 교육비로 쓰지 않아도 되는 일종의 순수한 ‘용돈’이다. 하루 저녁 우리 여행자들은 머리를 식힐 겸 하바나의 쿠바 국립극장에서 쿠바 국립 발레단의 차이코프스키의 호두까기 인형을 관람하였다. 뉴욕만큼 눈이 돌아가게 화려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수준은 세계최고의 하나였다. 그런데 그 입장료가 얼마일까 미화로 계산해 보니까 일인당 겨우 3센트(한국돈 30원 정도)였다. 그런 수준의 공연을 내가 사는 맨해튼에서 보려면 나는 무대도 잘 안 보이는 제일 싸구려 자리에 30불(약 3만원 정도)은 내야한다. 1천배나 비싼 돈이다. 내가 그날 앉은 정도의 좌석을 링컨 센터에서 구하려면 3천배 이상의 돈을 지불해야 한다. 달러로 계산된 그들의 임금은 국제 시장에서는 ‘구매력’(buying power)이 하나도 없는 것이지만 그들의 체제 안에서는 여유 있는 문화생활을 누리기에 충분해 보였다.
내가 하바나에 있는 ‘혁명박물관’을 방문했을 때 가장 눈에 띄었던 것은 ‘혁명’ 이전과 이후의 쿠바를 비교한 사진과 통계수치들이었다. “1959년 혁명이전 10살 안팎의 어린이 4백3십7만6천5백29명이 교육받을 기회를 한 번도 얻지 못했다. 1953년의 하바나 시에는 20만 채의 판잣집과 오두막들이 널려 있었다. 같은 해 의료 시설의 부족과 위생상태의 불량으로 4만9백37명의 사람이 병사했다.” 그리스-로마의 신전처럼 거대한 위용과 천장 벽화의 화려함의 극치를 자랑하는 그 혁명박물관은 과거 독재자 바티스타의 궁전이었다고 한다. 거기에서 내가 한 가지 얻은 결론은 쿠바는 확실히 제3세계 빈곤의 사슬에서 벗어나 있다는 사실이었다. 미국에 사는 쿠바 역사연구가 루이스 페레즈 2세(Louis A. Perez, Jr.)가 말하는 대로 1959년 ‘혁명’ 이후 쿠바를 휩쓸었던 것은 자유주의자와 온건주의자들의 “법률적 정의”(legal justice)가 아니라 “즉각적인 정의”(immediate justice)였다. 인간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4대 기본적인 요구를 ‘즉각적으로’ 실현시키는 정의, 그것이 쿠바의 혁명이 이루고자 했던 것이었다.
현재 쿠바의 주택보급율은 95%로 세계 최고라고 한다. 누가 어떻게 집을 배분하는지 또 좋은 집을 서로 차지하려 하면 어떻게 조정하는지 등 상세한 내용까지는 알 수 없었지만 빈민굴이 없었다. 미국의 경제제재로 병원은 심각한 의약품 부족에 시달리고 있었지만 2백 가구당 한 명의 의사가 2시간 이내에 왕진할 수 있는 거리에 배치되어 있다. 쿠바의 의료 수준이 세계 최고라는 것은 미국의 의학계도 인정하고 있는 사실이다. 미국의 경제제재로 식용유, 수프, 세제와 같은 품목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러시아산 식용유가 간간이 지급되긴 했지만 뿌연 부유물로 가득한 이 식용유 대신 자본주의 국가에서 들어온 맑은 식용유를 구하기 위해 사람들은 암시장을 헤매고 있었다. 그러나 쌀, 설탕, 콩, 커피, 성냥, 치약과 같은 일용품은 충분하지는 못하나 보장되고(guaranteed) 있었다. 물론 누구나 다 대학에 가는 것은 아니지만 대학까지의 교육은 절대 무상이었다. 무상이기도 하지만 남는 시간에 하바나의 한 초등학교에 들어가 보았다가 놀란 것은 벽 중앙에 학생들의 ‘의무’(예를 들어 교사의 지시에 따르라든지 등등) 뿐만 아니라 학생들의 ‘권리’(예를 들어 교사가 부당한 지시를 내렸을 경우 이에 저항할 수 있다는 등등)가 나란히 게재되어 있던 것이었다.
교육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이제 신학을 공부하러 꼭 미국이나 독일로만 유학을 갈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최소한 경제적인 측면에서는. 마탄자스에 있는 한 복음주의 신학교를 방문했을 때는 나는 미국에 유학하는 것이 얼마나 비싼 것인가를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다. 그 신학교에서 한 학생이 일년 동안 공부하는 데 드는 총비용은 50불도 채 안 된다. 기숙사비와 식비를 전부 포함해서. 나는 뉴욕에서의 엄청난 교육비용이 떠올랐다. 내가 다니는 뉴욕의 유니온 신학교의 박사과정 학생이 여름방학 3개월을 제외하고 9개월간 드는 수업료, 의료보험비, 기숙사비, 식사, 그리고 책 등을 최저로 계산한 것이 2만9천불로 공시되어 있다. 여름방학 동안의 기숙사비와 생활비를 감안하면 뉴욕에서의 신학교육에는 마탄자스에서의 그것보다 약 7백 배 이상의 돈이 필요하다. 하지만 뉴욕의 신학생들이 마탄자스의 신학생들보다 7백 배의 질 좋은 교육을 받는다고 할 수 있을까? 할렘 가까이 사는 나의 생활수준이 마탄자스 신학생들의 그것보다 7백 배나 안전하고 만족스럽다고 말할 수 있을까?
물자가 풍부하지는 않았지만 쿠바인들의 삶의 질이 다른 나라 사람들의 그것보다 못하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만약 음식, 주택, 교육, 의료가 무상제공되는 것을 모두 달러화로 계산하여 수입에 집어넣는다면 아마도 쿠바인들의 GDP는 선진국 수준에 이르지 않을까. 그런데 왜 그러한 무상 음식과 무상 교육과 무상 의료와 무상 주택이 소득으로, 부로, 그리고 경제적 가치로 인정되지 않는가? 그것들을 내 돈을 주고 구해야만 가치가 발생하나? 오직 각 개인이 돈으로 지불할 때에만 그것들은 경제적 가치로 인정되는가? 그렇다면 얼마나 우스꽝스런 경제학 산수법인가. 왜 지난 40년간 쿠바인들이 이루어 놓은 사회적 약자를 위한 제도는 경제적, 정치적, 나아가 정신적으로도 평가절하 되고 있는가? 대체 ‘가치’와 ‘무가치’의 경계선은 누가 어떤 기준으로 긋는가? 이 ‘평가절하의 테러’(terror of devaluation)의 배후에는 무엇이 있는가?
나는 지금까지 현재 쿠바의 ‘위기’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물어왔다. 마탄자스의 청년들과 네그로스의 농민들 사이의 차이에서 드러난 것처럼 만일 쿠바의 현 ‘위기’가 인간의 기본적인 필요의 위기가 아니라면 그것은 무엇인가? 이번 여행에서 확실히 깨달은 것은 이른바 쿠바의 ‘위기’는 ‘쿠바의’ 위기가 아니라 ‘세계의’ 위기라는 점이다. 나는 쿠바에서 ‘쿠바의’ 위기가 아니라 ‘세계의’ 위기를 보았던 것이다. 그것은 ‘그들의’ 위기가 아니라 ‘우리의’ 위기였다. 그 위기는 가치(value)의 위기였다. 무엇이 진정으로 가치 있고 무엇이 그렇지 않은지에 대한 우리의 우선순위(priority)의 위기이며, 가치평가 방식의 위기이며, 그것들을 뒷받침하는 철학의 위기였던 것이다. 기회만 닿으면 자기나라를 탈출하려는 수많은 쿠바 청년들을 통해 내가 직접 보고 느낀 위기는 인도의 환경여성주의자 반다나 쉬바(Vandana Shiva)가 말하는 “생계의 관점”(subsistence perspective)의 위기였던 것이다. 그녀는 음식과 주거와 의복과 의료와 교육과 같은 인간의 ‘기본적인 요구’(basic needs)를 자유, 지식, 문화, 소비와 같은 ‘고차원적 요구’(higher needs) 보다 평가 절하하는 것이 현대 문명의 문제라고 지적한다. 내가 쿠바에서 본 우리의 위기는 다양한 삶의 방식과 각 지역적 특성을 무시하고 가치를 평준화하고 균질화하는 지구촌 경제의 문제였다.
우리가 만난 ‘쿠바친선협회’(Instituto Cubano Amistad con los Pueblos)의 북미주 국장 바실리오 구티에레즈 가르시아(Basilio A. Gutierrez Garcia)는 ‘쿠바 위기’의 본질을 잘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소련 유학도 다녀오고 여러 나라에서 외교관 경험도 두루 쌓은 36살의 젊은이가 어찌나 막힘 없이 세계정세와 쿠바-미국간의 관계를 설명하던지 방문자들은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우리 여행자들 중에는 푸에르토 리코(Puerto Rico) 출신 학생이 몇 있었는데(푸에르토 리코와 쿠바의 국기는 모양은 똑같으나 색깔은 정반대로 되어 있다. 전자는 미국의 52번째 주로의 편입을 희망하고 후자는 미국으로부터의 완전한 엑소더스를 추구한다. 그래서 그런지 두 나라 사람들 사이는 종종 견원지간인 경우가 많다─필자 주) 그는 왜 쿠바인들이 대규모로 쿠바를 탈출하느냐고 꽤 아픈 곳을 찔렀다(참고로 무작정 배를 타고 미국으로 떠나는 쿠바인들이 늘자─쿠바 정부는 이를 막지 않는다─오히려 다급해진 미국이 쿠바와 협상을 벌여 현재 한해 2만 명씩 ‘합법적’으로 미국에 받아들이고 있다─필자 주). 가르시아의 대답이 걸작이었다. 그는 우선 인정할 사실을 인정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나라를 떠나고 있습니다. 보다 나은 경제적 기회를 찾아서 말입니다.” 그리고 그는 대답대신 역질문을 던졌다. “그러면 왜 당신은 멕시코인들과 필리핀인 등 이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이 미국으로 악착같이 이주하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물론 질문자의 나라 푸에르토 리코는 여기서 빠졌지만 그의 역질문에는 그 나라가 충분히 시사되어 있었다. 원질문자가 답을 찾지 못하고 있는 동안 가르시아는 이렇게 자신의 답변을 마무리했다. “우리의 경우도 그들과 똑같은 경우입니다. 진짜 이슈는 쿠바인의 탈출이 아니라 가난한 ‘남’으로부터 부유한 ‘북’으로 민중의 이주 현상입니다.”
그는 쿠바가 직면한 문제가 세계 많은 나라들이 동일하게 직면하고 있는 “자유주의 시장경제의 세계화”(globalization of free market economy) 문제의 일환으로 보고 있었다. 그의 이 문제가 “선도 악도 아니며 단지 쿠바인들이 헤쳐나가야 할 하나의 도전일 뿐”이라고 말했다. “문제는 쿠바 페소가 가치를 잃어 가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것은 임시적인 현상일 뿐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쿠바만의 문제도 아닙니다.” 그리고 그는 순순히 IMF의 처방을 따르는 많은 나라들에 귀감이 될 만한 이야기를 하였다. “쿠바의 재정 위기를 해결하는 우리들의 방식은 국제통화 체제의 처방과는 다릅니다. 우리는 특정 사회부문이 희생을 감수할 것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탈출방식은 고통의 나눔입니다. 비록 그것 때문에 탈출에 더 긴 시간이 필요하더라도 우리는 그 길로 갈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그는 ‘쿠바 문제’의 본질을 이렇게 정리했다. “이슈는 더 이상 사회주의 대 자본주의가 아닙니다. 진정한 이슈는 자유주의 시장경제가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이때 어떻게 인간이 생존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전지전능한’ 시장경제의 지배 속에 인간 생존의 희망은 있는 것인가? 가르시아는 신중하지만 확신에 찬 말로 이렇게 대답했다. “아무도 그것에 답을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다. 우리의 미래는 여러 요인에 달려있지요. 하지만 우리는 자신 있습니다. 그러나 싸워야 합니다.”
하지만 쿠바의 위기를 시장경제의 세계화 과정에 위치 지운다고 해서 현재 쿠바 민중이 치르고 있는 고통이 완화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쿠바 안에서 ‘정치적 미래’가 밝아보이는 이 젊은 가르시아와 공교롭게도 성(姓)이 같은 또 다른 가르시아로부터 현재 쿠바가 당면하고 있는 위기의 구체성과 심각성을 전해들을 수 있었다. 후안 가르시아(Juan Garcia)는 현재 영어교육기관인 ESL에서 강사로 일하며 유창한 영어를 구사하는 50대 초반의 남자인데 전에는 쿠바 정부 교육부 공무원이었다. 그는 지적이면서도 솔직한 사람이었다. 그는 자기 집에 나와 몇 사람을 초대해 직접 자기가족의 ‘배급카드’(ration card)를 보여주며 쿠바 일반 가정들에서 실제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아주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었다. 그는 자신을 ‘초혁명가(super-revolutionary)도 반정부 인사도 아닌 평범한 생활인’이라고 소개했지만 그의 말 구석구석에는 무너져 가는 쿠바 사회주의에 대한 아쉬움과 무능력한 카스트로 정부에 대한 비판이 짙게 배어 있었다.
“쿠바는 현재의 위기를 대처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 위기의 원인이 어디에 있느냐고 묻자 그는 비판의 화살을 내부로 돌렸다. “아니, 아니에요, 미국의 경제제재만이 이유는 아니란 말입니다. 동구 사회주의의 몰락과 쿠바 체제의 비효율성도 위기의 원인입니다. 이것들의 결합이 위기의 진짜 원인입니다.” 그리고 그는 쿠바 사회 일각의 한 비판적인 의견을 전했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미국 보고 경제제재를 해제하라고 해라, 그리고 나서 피델 카스트로가 어떻게 체제의 비효율성을 변명하려 드는지를 보라’고. 클린턴은 바보예요.” 미국의 경제적 압박은 쿠바 민중들만 고통으로 몰아넣고 카스트로는 건재하도록 명분을 주고 있다는 시각이다(미국내 온건파의 시각이기도 하다).
교육계에 오래 몸담았던 교육가 가르시아는 자신의 피와 땀이 시멘트가 되어 이룩된 쿠바 사회주의 체제가 무너져 가는 것을 이렇게 개탄했다. “교사들은 교실에서 학생들에게 ‘이기적이지 말아라, 개인주의적이지 말아라, 근면하게 일해라, 다른 사람을 도와라, 그리고 나라에 헌신해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그런 공들인 교육은 학생들이 그들의 부모가 지하시장에서 불법으로 물자를 거래하는 것을 보는 순간 순식간에 땅에 떨어지고 맙니다. 인위적인 공간인 교실보다 실제의 세상이 훨씬 강력합니다.” 그의 비판은 쿠바에 도입되기 시작한 시장경제 요소에 맞추어졌다. “노하우(know-how)를 가진 사람들이 모두 설자리를 잃어버렸습니다. 지금은 오직 ‘달러가 말합니다’(dollar talks).” 교육이라는 전문직에 종사한 바로 그가 “노하우”를 가진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의 “노하우”는 사회적으로 더 이상 존중되지를 않는다. 달러에 접근할 수 있는 능력만이(현재 쿠바에서는 페소화와 달러화 모두를 자유롭게 쓸 수 있다─필자 주) 가치로 인정받는 것이다. 현실에 대한 그의 깊은 실망감 때문일까, 그의 말에는 다분히 ‘예언자적’ 냄새가 풍겨 났다. “쿠바는 어떤 사회적 계획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내 생각에 그것은 실행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어떤 사람들은 ‘외부의 체제’에 순응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지금 최악의 경우는 (나처럼) 달러를 벌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지금 새로운 가난한 자들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아직까지는 쿠바에 사회 계급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지금 빈부의 격차가 벌어집니다. 조만간에 당신은 쿠바에 사회 계급이 존재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의 ‘예언’에는 비통함이 배어 있었다.
후안 가르시아와 같이 기존 시스템의 지도적 위치에서 성실하게 자기 역할을 담당했던 전문직 종사자들은 쿠바 ‘이중경제’(dual economy)로 이전하는 과정에서 심각한 상처를 입고 있었다. 누군가 이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사회적 이전(social transition)이란 이해관계를 둘러싼 주도권의 재편성에 지나지 않는다”고. 그 이전과정에서 ‘뜻하지 않게’ 덕을 보게 된 사람들은 다음과 같다. 우리 여행자들이 묶고 지나간 숙박업소에서 빨래와 청소를 해주는 아주머니들. 그들은 운이 좋으면 하루에 20불을 팁으로 벌었다. 1불짜리로 20장 … 큰 돈이다. 우리가 묶었던 어느 아름다운 해변가에 밤새 불을 반짝이고 있는 호텔들에서 외국 관광객들을 상대하는 ‘아가씨’들. 이들은 운이 좋으면 하루에 100불도 번다고 했다. 이렇게 달러에 접할 수 있는 사람들(people who have access to dollars)이 “외부의 체제”에 성공적으로 적응한 신흥 부자들로 떠오르고 있었다. 그러나 가르시아와 같이 “기존의 체제”에 성공적으로 적응했던 많은 사람들은 급속히 추락하고 있었다. 오랫동안 금지되어 왔던 “동산의 중앙에 있는 나무의 과일”을 따먹는데 재빠르지 않았기 때문이다(사실 그래서 이것은 또 다른 ‘실락원’의 이야기이다). 가르시아는 그의 삶을 바쳐 헌신했으나 더 이상 그를 지켜주지 못하는 쿠바의 사회주의 체제와 카스트로 정부의 무능력에 비통해 하고 있었다. 유난히도 크고 순박해 보이던 그의 눈 속에서 나는 그의 상처입은 자존심을 보았다. 언젠가 카스트로는 이렇게 말했다. “빈곤은 지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불명예는 영원합니다”(Poverty passes; dishonor is forever). 하지만 가르시아의 명예와 자부심은 지금 ‘새로운 가난’, 즉 달러의 빈곤에 의해 심각하게 손상받고 있었다. 아마도 그의 불명예는 적어도 그가 그의 생이 마칠 때까지는 영원할 것 같았다.
가르시아는 다음날에도 자청해서 우리 그룹의 통역과 안내와 자료제공을 도우러 왔다. 그의 예상을 넘어선 친절은 우리가 그의 수고에 정당한 사례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부담을 느낄 때까지 계속되었다. 쿠바에서의 마지막 저녁 그와도 헤어지지 않을 수 없게 되었을 때 우리는 20불짜리 하나를 손에 쥐어주었다. 그는 사양하지 않았다. 예상하고 있었던 것처럼. 그렇다고 뉴욕거리의 ‘홈리스’들처럼 호들갑스럽게 감사를 표현하지도 않았다. 정중한 “Thank you” 한마디뿐이었다. 나는 안다. 그는 서둘러 귀가하는 길에 암시장에 들러 자본주의 국가에서 온 식용유와 몇 가지 식구들이 원했던 물건들을 살 것이다. 허연 부유물이 떠있어서 양치질하다 버린 물 같은 그 러시아산 식용유 대신 노모와 아내와 두 자녀 앞에 그 맑고 깨끗한 자본주의산 식용유 한 병을 내놓을 기쁨으로 서둘러 그의 밤길을 재촉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내 가슴이 찢어지듯 아팠다는 것은 몰랐을 것이다.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면서 나는 자유주의 시장경제가 세계를 지배하는 이때, 달러에 대한 ‘접근수단’(access)이 없는 사람들이 예수가 말한 “가장 작은 자”(the least)가 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번 여행에서 확인한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사회주의 국가 쿠바에 비정부단체(NGO)들이 비온 뒤 대나무 자라듯 퍼져가고 있다는 것이다. 더 이상 정부를 믿고 앉아있을 수만은 없다는 대중적 각성의 표현인 것 같았다. 정부도 적극 권장하는 눈치였다. 여행기간 동안 우리는 참으로 많은 NGO들을 방문할 수 있었다. 그들의 분야는 각기 다양하였지만 “과도한 중앙화와 비효율적 동기부여”(over-centralization and ineffective incentives)의 극복이 공동목표인 것처럼 보였다. 지난 40년간 이 사회를 지탱해 온 “자기희생과 도덕적 동기부여”(self-sacrifice and moral incentives)에 이제 사람들은 식상한 것인가.
루이스 페레즈 2세에 의하면 쿠바정부가 추진해 온 1965년 이후의 국민동원 전략 목표는 ‘신인간’(hombre nuevo)의 창조였다. 신인간이란 개인적 이해를 위해서가 아니라 집단적 진보를 위하여 사심을 비우고 스스로를 희생할 줄 아는 인간이라고 정의한다. 강조점은 새로운 의식의 창조에 의한 혁명적 윤리관(revolutionary ethics)의 도출이다. 그러나 스페인 사람으로서 쿠바의 가톨릭 교회를 위해 파송된 라몬 신부는 바로 이러한 혁명적 덕성(revolutionary morality)의 요구가 ‘이중적 덕성’(double morality) 혹은 ‘이중적 삶’(double life)을 낳았다고 보았다. 마탄자스에서 만난 그는 쿠바인들이 일종의 “일반적 피로 증후군”(general fatigue syndrome)을 넘어서 자기분열증에 시달린다고 하는 한 외국인의 진단을 들려주었다. 공적인 장소에서의 언행과 사적인 장소에서의 언행이 다르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미 그 경계선에 익숙해져 있고. 쿠바인들은 ‘이것’ 아니면 ‘저것’을 택일을 해야 하는 압력밥솥 안과 같은 고도의 중압적인 상황에 지난 40년간을 살아온 것이다.
나는 쿠바인들이 느꼈을 그런 정신적 중압감을 내 주머니에 굴어 들어오게 된 한 쿠바 동전을 무심코 뒤적여 보다가 발견할 수 있었다. “Patria o Muerte”(국가냐 죽음이냐)! 한 동전에는 그렇게 쓰여 있었다. ‘빠뜨리아’(patria) 곧 국가가 생명이고 그것이 아닌 것은 모두 죽음으로 간주되었다. 중간지대라고는 없었다. 혹자는 ‘겨우 40년 혁명하고 지쳐버리면, 500년된 식민제국주의의 뿌리는 어떻게 뽑겠느냐’고 다그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가들의 산수에서 40년과 500년은 크게 차이가 나지만, 60이 넘으면 은퇴하는 우리의 인생에 40년은 결코 ‘겨우’가 아니었다. 쿠바인들뿐만 아니라 남미인들의 커다란 추앙을 받는 쿠바의 민족시인 호세 마르티(Jose Marti)는 이렇게 노래했다. “나의 포도주는 씁니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포도주입니다”(My wine is bitter; but it is my wine) 하지만 심지어 예수도 그의 쓴잔을 피할 수 있으면 피해 보려고 온갖 번민과 피눈물을 쏟지 않았던가. 이제 앞에서 끌고 가는 것에는 한계가 온 것 같았다. 바로 이 지점에 쿠바라는 사회주의 국가에도 NGO들이 우후죽순으로 만들어졌던 게 아닐까.
쿠바의 NGO들이 자신들의 존재이유와 방향에 대해 설명한 것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체제 전반이 비효율적이게 된 원인은 국가의 온정주의(paternalism of the state)에 있으며, 둘째, 따라서 민중의 참여(people? participation)가 절실히 요구되고, 셋째, 그것을 위해서는 새로운 덕성(new morality) 혹은 새로운 영성(new spirituality)이 고양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이 “새로운 영성”(new spirituality)라는 단어가 종교, 비종교 단체를 막론하고 거의 모든 NGO들 사이에 ‘화두’처럼 말해진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들이 말하는 “새로운 영성”이란 대체 뭘까? 정부가 40년을 이끌어온 “혁명적 덕성”과는 어떻게 다른 ‘새로운’ 영성인가? 그것은 시장경제의 도입으로 두 가지 이질적 체제가 공존하게 된 가치혼란적인 쿠바사회에서 물질적 인센티브를 제어할 수 있는 어떤 힘을 발휘할 수 있을까?
내가 보기에 NGO들이 말하는 “새로운 영성”은 정부의 “혁명적 덕성”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인간의 의식에 호소한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차이가 없는 것 같다. 시장경제의 도입으로 물꼬가 트인 물질적 인센티브를 ‘영성’이 제어해 나갈 수 있을지도 의심스럽다. 덕성이든 영성이든 사실 새로운 내용은 아니다. 단지 새로운 점이 있다면, 새로운 내용이 없는 것을 ‘새로운 얼굴이 새로운 방식으로 호소하려는’ 것이라고 할까. 솔직히 나는 “새로운 영성”이라는 말에 약간의 거부감을 느꼈다. 그 이유는, 쿠바 민중이 지난 40년 간 하나의 사회 시스템 속에 구현(embody)하려고 애썼던 바로 어떤 것이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갈구하는 새로운 영성과 무엇이 다르냐는 의구심이 들었기 때문이다.
예수는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쳤다. 나 혼자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내일을 위한 비축이 아니라 “오늘 일용할” 것을 구하라고 가르쳤다. 쿠바인들의 언어인 스페인어로 이 “일용할 것”을 ‘로 꼬또디아노’(lo cotodiano, the daily)라고 하는데, 나는 이것이 자연에 대한 수탈과 가난한 자들의 눈물 위에 살을 찌우고 있는 오늘날 부자 중심의 문명에 가장 새로운 대안이라고 생각한다. 바실리오 가르시아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쿠바 사회주의는 엄청난 것을 약속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약속한 것은 충분히 먹을 것과 집과 건강한 삶이었습니다.” 내가 쿠바 사회주의를 굳이 기독교적으로 해석해 본다면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 즉 ‘로 꼬또디아노’를 하나의 사회 시스템에 구현해보려는 실험이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세상이 부유한 ‘북’과 가난한 ‘남’으로 찢겨진 이 시대에 나에게는 여전히 신선하기만 한 예수의 ‘로 꼬또디아노’를 대체할 새로운 영성이란 과연 무엇일까?
이런 나의 의문을 푸는 데 쿠바의 신학자들이 도움을 주었다. 오늘날 쿠바가 처한 상황을 성서의 어느 부분 혹은 이미지와 동일시하느냐고 물었을 때, 그들은 이스라엘이 사사시대에서 왕조시대로 전환하던 시기라고 했다. 그들에게는 많은 제3세계 신학자들과 같이 ‘출애굽’의 이야기가 더 이상 중심적 성서의 이미지가 아니었다. 이미 쿠바는 ‘애굽땅’에서 탈출한 공동체로 보는 것이다. 쿠바의 신학자들은, 이스라엘 민중들이 주변 팔레스타인 부족국가들의 발달된 철기문명과 왕권체제에 자극을 받아 자기들에게도 왕을 달라고 요구하던 것과 마찬가지로 지금 쿠바 민중들도 자본주의 국가의 발달된 ‘철기문명’(소비와 경쟁의 문명)에 자극을 받아 자기들에게도 그것을 가져다줄 수 있는 왕권체제(시장경제)를 달라고 요구하고 있다고 보고 있었다. 하지만 왕을 세워 달라고 요구하는 백성들에게 야웨는 사무엘을 통해 그 왕이 할 일들을 열거한 다음 마침내는 그가 모두를 종으로 삼을 것이며 그 때 가서 이스라엘은 스스로 택한 왕 때문에 울부짖겠지만 야웨는 그들의 기도에 응답하지 않겠다고 말한다(사무엘상 8:10-18). 쿠바의 신학자들은 바로 그와 같은 상황에서 쿠바의 교회가 무엇을 선포해야 하는지 깊이 사색하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이런 맥락이라면 NGO들이 말하는 “새로운 영성”이 보다 쉽게 이해될 수도 있을 듯 싶었다.
그런데 NGO중의 하나인 ‘성찰과 대화를 위한 기독교 센터’(Centro Christiano e Reflexion y Dialogo)의 소장 라이문도 가르시아 프랑코 목사는 차라리 솔직했다. “필요한 것은 제2의 의견(the second opinion)입니다.” 그는 자신이 쿠바정부의 적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서로 다른 관점을 가졌다”고 말했다. 비슷한 관점에서 ‘마틴 루터 킹 2세 센터’의 데이지 로하스 고메즈(Daisy Rojas Gomez)도 자신과 자신의 단체를 “혁명의 불편한 친구들”(uncomfortable friends of revolution)이라고 정의하였다. 나는 사실 이러한 표현을 대단히 예민하게 듣고 있었는데 왜냐하면 이 “서로 다른 관점을 가진 불편한 친구들”의 발언권이 사실은 막대한 해외원조로 이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우리가 방문하는 NGO마다 빠짐없이 한 가지 ‘불편한’ 질문을 던졌다. 사업의 재정을 어디에서 충당하는가? 거의 100%가 해외 NGO들을 통해 들어오는 돈이었다. 바로 전에 언급한 프랑코 목사의 기독교 센터의 연간 예산은 무려 2백만 달러라고 했다. 쿠바 페소화의 현재의 가치를 감안하면 상상할 수 없는 거액이다.
내가 정말로 이해하기 힘들었던 것은 수많은 주권국가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던 미국의 ‘토리쎌리 법안’(Torricelli bill─‘Cuba Democracy Act’ 라고도 하는데 미의회의 승인을 받아 집행중인 이 법은 미국이 아닌 어떤 제3국이 쿠바에 대한 경제적 지원을 하였을 경우 그 3국에 대한 무역보복 등을 통해 그 나라를 제재하도록 되어 있다─필자 주)이 시퍼렇게 살아 있는데 어떻게 천문학적인 액수의 달러가 NGO라는 채널을 통해 쿠바로 쏟아져 들어올 수 있다는 말인가? 혹 쿠바 NGO들을 장래 어떤 시점에서 정치적 지렛대로 활용하려는 계산과 맞아떨어진 것은 아닌가? 과연 쿠바의 NGO들은 언제까지나 거시적(macro) 일은 정부에게 맡겨두고 세부적(mirco)인 일들만 보완적 입장에서 추진할 것인가? 시장경제의 도입과 이중경제로의 이전이라는 환경 속에서 입지와 역할이 강화된 NGO들이 미래의 어느 시점에 쿠바 국내정치의 개혁과 정치적 다당제 혹은 다원주의를 표방하는 정치적 압력으로 표면화되지는 않을까? 즉 쿠바의 NGO들은 스스로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외부체제의 ‘트로이의 목마’가 되어가고 있지는 않은가 말이다. 사실 내가 관심 있었던 것은 쿠바 NGO들의 현재보다도 그들의 미래였다. 나는 정치분석가가 아니기 때문에 내 스스로가 던진 질문에 답을 얻지는 못했지만, 이번 여행에서 한 가지 분명히 확인한 것은 이와 같은 쿠바 NGO들의 미래적 잠재성과 모호성이 이미 현재에 “인권” 문제라는 정치적 지렛대를 쿠바 안으로 깊숙이 밀고 들어갈 수 있는 가장 손쉬운 채널이 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 여행자 그룹 안에 쿠바인이 있었다. 우리 그룹을 이끌던 두 명의 지도교수 중 한 사람이었던 그녀는 정확히 말해 쿠바에서 미국으로 망명한 사람이었다. 괜찮게 살았던 그녀의 아버지는 혁명 다음날 옷가방 하나만 들고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피신 나왔다. 그녀는 현재 미국 내에서 가장 진보적인 여성신학자 중의 한 사람이다. 하지만 쿠바문제에 관해서 만큼은 보수적이었다. 내가 이번에 놀란 것은 쿠바도 한국과 같이 일종의 분단국가라는 점이다. 쿠바는 남쪽의 사회주의 본국과 북쪽의 미국 플로리다주의 쿠바 망명인 집단으로 양분되어 있었다. 한국의 경우도 북에서 내려온 실향민들이 북에 가장 보수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처럼 그들도 그랬다. 나중에 쿠바의 분단 밑바닥에는 경제적 이유가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플로리다로 망명한 쿠바인들은 오렌지를 많이 생산하는데, 쿠바산 오렌지가 더 달고 품질이 좋아 대단히 경계한다고 한다─필자 주), 그녀가 가르치는 신학생들 가운데 망명한 쿠바인들을 교인으로 두고 있는 어떤 학생은 노골적인 반카스트로 비디오를 반입해 시사회를 갖기도 하였다. 그들은 우리가 ‘마틴 루터 킹 2세 센터’를 방문하기 전 “인권” 문제를 이 NGO에 조직적으로 제기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불행히도 데이지 로하스 고메즈가 그 타겟이 되었다. 처음부터 마음을 다져 먹은 질문자들은 왜 미국 흑인 ‘민권’운동의 지도자인 마틴 루터 킹 2세 목사의 이름을 딴 단체가 쿠바의 정치적 ‘인권’ 문제를 다루지 않느냐고 집요하고도 조직적으로 추궁하였다. 그들의 질문의 내용은 CNN 특파원들이 미국의 ‘인권시비’의 타겟이 된 국가에 들어가서 던지는 질문과 흡사했다. 데이지는 미국식 ‘인권’의 관점으로 지금의 쿠바 상황을 재단하지 말라고 응수했다. 그녀는 민중이 먹고 비를 피하고 교육을 받고 치료를 받아야 할 권리는 배제해 놓고 ‘정치적’ 자유만 의미하는 인권은 참 인권이 아니라고 되받아쳤다. 그럼에도 공세는 멈출 줄 몰랐다. 내가 보기에 사회주의 사회 속에서 살아온 ‘순박한’ 사람과 자본주의의 치열한 경쟁사회 속에서 ‘때가 묻은’ 사람들과의 말싸움에선 후자가 유리한 듯 보였다. 사실 그들은 쿠바에 도착한 첫날부터 맨마지막 방문지인 이곳에 이르기까지 똑같은 관점의 질문을 고장난 녹음기처럼 반복하고 있었다. 여행자들에게는 두 가지의 부류가 있다. 하나는 최대한 열린 자세로 ‘현장’을 보겠다는 부류이고 다른 하나는 기존의 생각을 ‘현장’을 통해 더욱 굳히고 가는 부류이다. 그들은 후자에 속했다. 부당하게 곤경에 처한 데이지를 ‘구출’하려는 나의 시도는 그들의 지도교수에 의해 시간이 없다는 이유로 발언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우리쪽 지도교수의 개입이 없었더라면 나는 자리를 박차고 나올 뻔했다. 사실 분단은 우리 내부부터 존재했다.
아직도 우리 그룹이 자료를 사고 다른 직원들과 대화를 나누는 동안(시간은 그렇게 남아 있었다) 나는 데이지와 따로 만나 이야기를 청했다. 먼저 나는 우리들의 대화가 그런 식으로 진행된 것에 대해 유감을 표명했다. 그리고 그녀가 쿠바에 남아 희망을 버리지 않고 하려는 일이 세계와 고립된 외로운 싸움이 아니라 사실은 이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이 각기 다른 환경과 체제 속에서 벌이고 있는 싸움과 본질적으로 맥을 같이 하는 것이라고 말해 주었다. 그리고 나는 스페인어를 공부하다가 외우고 있던 한 문장이 생각나 그것을 그녀에게 들려주었다. “Somos La Esperanza!” We are the hope, 즉 ‘우리가 희망입니다’라는 말이다. 침울했던 그녀의 얼굴에 갑자기 화색이 돌았다. 내가 스페인어를 말해서라기보다는 그 문장이 갖는 함축적 의미를 알아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요, 당신이 우리의 희망이에요. 지치지 말고 그 일을 계속하세요. 그래요, 우리도 당신의 희망이에요. 우리도 지치지 않고 그 일을 계속할 겁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희망입니다.’ “Somos La Esperanza!” 나는 그때 그녀의 그 큰 눈 속에 눈물이 고이는 것을 보았다(쿠바 사람들의 눈은 왜들 그리도 큰지 …). 그녀는 나에게 수없이 고맙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그리고 우리는 서로 깊이 껴앉았다. 나는 그녀의 심장이 고동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그렇듯 여행의 맨마지막 순간에 가서야 비로소 쿠바의 구체적인 얼굴(concrete human face)을 보았다. 나는 그렇게 더뎠다. 수많은 것을 보고 듣고 질문했지만 그 마지막 순간에 가서야 나는 비로소 그들의 고동치는 심장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남의 나라에 가서 아무리 좋은 구경을 한다 하더라도 그곳 사람들의 내면의 모습과 고동치는 맥박을 느끼지 못하고 온대서야 우리가 무엇을 보고 배웠다고 할 수 있겠는가. 나는 그 때 거기에서 확실히 한 가지를 알게 되었다. 오늘날의 쿠바에 대해 수많은 분석과 견해를 내놓을 수 있지만 지금 데이지와 같은 쿠바의 민중들이 절실히 그리고 처절하게 필요로 하고 있는 것은 희망이라는 단 한마디라는 사실이다. 쿠바가 서반구(western hemisphere)에 남은 유일한 사회주의 국가가 되었다는 사실이 그들로 하여금 더욱 심한 고립감을 느끼게 한 것 같았다. 외톨이가 되었다는 느낌, 세상으로부터 버려졌다는 느낌만큼 처절한 것은 없을 것이다. 쿠바 민중들이 가장 듣고 싶은 이야기는 그들이 결코 외톨이가 아니며 그들의 싸움은 특정체제나 제도를 위한 것이 아니라 인류의 새로운 미래를 위해 의미있는 한 부분이라는 말일 것이다.
데이지는 그녀의 ‘빠뜨리아’(patria, 국가)를 위해 누구보다 열심히 헌신한 사람이었다. 자기의 자식들에게 살기 좋은 세상을 물려주기 위해 그녀는 기꺼이 자신의 삶을 국가에 던졌다. 그러나 그녀의 아들은 자신이 물려주려고 하는 그 ‘빠뜨리아’를 떠나기를 간청했고 어머니는 그를 말리지 못했다. 아들이 떠나자 그녀는 모든 것이 무너진 듯 허망했다. 그런데도 그녀는 다시 일어나 새로운 희망을 일구어 보려고 했다. 하지만 쿠바를 떠난 그의 친지들은 하나같이 그녀의 일을 조롱하고 의심하고 왜곡하고 평가절하했다. 그녀는 외로웠다. 그리고 그것은 데이지 로하스 고메즈만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들이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것은 그들이 혼자가 아니라는 확신, 그리고 동시에 그들 자신이 많은 사람들의 희망이며 또한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희망이라는 ‘희망의 연대감’이었다.
마탄자스 복음주의 신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치는 아돌포 함(Adolfo Ham) 교수는 하바나의 차이나타운에서 가진 저녁식사 자리에서 “쿠바의 미래와 희망은 종말론적”이라고 말했다. 왜냐하면 “오직 하나님만 그 답을 알기 때문에.” 그는 당시 쿠바의 TV 대담에 자주 불려나가 쿠바사회가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지를 설파하는 ‘인기 대담가’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 날 저녁도 우리는 그가 출연한 프로그램을 식사하면서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지구상의 차이나타운 가운데 가장 음식 맛이 형편 없었던 그 중국 식당에서 나는 그에게 쿠바의 미래와 희망은 ‘종말론적이지 않다’고 말했다. 왜냐면 희망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미래’(unrealized future)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구스타보 구띠에레즈(Gustavo Gutierrez)의 말처럼, 죽음을 넘어서는 희망은 민중의 역사적 실천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그는 나더러 그렇게 생각하냐고 묻고는 화제를 돌렸다.
나는 자식마저 떠나버린 빈 광야와 같은 나라에서 다시 시작해 보려고 일어선 수많은 데이지 로하스 고메즈들 속에서 쿠바의 미래와 희망을 읽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미래는 하나님만 알고 있는 종말론적 미래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here and now) 살아 숨쉬고 있는 아주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희망이었다. 나의 가슴으로 느꼈던 그녀의 심장의 고동소리 만큼이나 구체적이고 현실적이며 생생한 희망이다. 멀기만 했던 나라 쿠바, 금단의 열매요 판도라의 상자와 같았던 그 나라는 이렇듯 나에게 성큼 다가왔다.
쿠바를 내 가슴 깊이 담고 오게 된 예기치 않은 또 다른 만남이 있었다. 정말 뜻밖의 마르타(Martha)라는 쿠바이름의 임문희 씨를 만났다. 예순이 넘은 그녀는 쿠바에서 태어난 한인 2세이다. 그녀의 아버지는 겨우 8개월 젖먹이던 1905년에 생모의 품에 안겨 굶어죽지는 않는다는 멕시코로 떠났다. ‘애니깽’이라는 한국영화가 그린 그 가슴아픈 수난사가 바로 임문희씨 아버지와 할머니의 이야기였다. 1921년에 그들은 쿠바 땅으로 옮겨왔고 최초의 쿠바 이주자가 되었다. 임문희 씨의 아버지의 이름은 김구의 백범일지에도 올라 있다. 백범은 상해 임시정부가 재정적인 어려움에 처했을 때 쿠바에서도 성금을 모아 보내주었다며 그녀의 아버지 이름 석자를 기록에 남겼다. 쿠바에는 현재 약 650여 명의 한인 후손들이 살고 있다. 3세에 이르러 혼혈이 많아지고 한국말을 거의 잊었지만 2세까지는 한민족의 정체성을 지키며 살고 있었다. 임문희 씨는 은퇴한 역사학자 라울 루이즈(Raul R. Ruiz)의 아내이다. 지긋한 나이에 학자다운 기풍이 물씬 풍겨 나오는 이 쿠바의 ‘젠틀맨’은 마르타의 “한국적 미와 영성”에 홀딱 반해서 결혼했노라고 털어놓았다. 그렇게 임문희 씨는 단아했고 라울은 마당에 아름다운 꽃을 키우며 종종 그녀에게 꺽어다 바친다고 한다. 멀기만 했던 쿠바는 바로 임문희 씨와 같은 한인들의 고향(home)이었다. 체 게바라는 언젠가 단 한 명의 ‘치노’(중국인─한국인도 치노로 불림)도 쿠바혁명에 반기를 들지 않았다고 말했다고 한다. 임문희 씨도 40년 전 쿠바에 혁명이 났을 때 자신과 같은 애니깽 노동자 후손에게도 주택과 의료와 음식과 교육의 기회가 주어졌다고 회상했다. 아직 남한과는 외교적 관계가 수립되지 않았지만 그녀는 아버지를 대신해 한국정부로부터 독립훈장을 받으러 서울에 다녀가기도 했다.
쿠바를 떠나기 전날 밤 나는 구 하바나(Old Havana)의 아름다운 밤거리에서 쿠바를 그렇게 사랑하다가 쿠바에서 죽은 어네스트 헤밍웨이(Ernest Hemingway)가 손수 만들어 즐겼다는 칵테일(럼주에다 콜라를 섞은 것)을 마시면서 혁명과 낭만, 자부심과 자괴심, 그리고 불안과 희망이 교차하는 대전환기의 쿠바와 안녕을 고했다. 나는 결국 그 ‘금단의 열매’를 따먹고야 만 것이다. 내 눈은 환하게 밝아졌다. 하지만 벌거벗은 내 모습이 부끄러워지지는 않았다. 그리고 나는 결국 그 “판도라의 상자”도 열고야 말았다. 하지만 내가 발견한 것은 온갖 질병과 문제들이 아니라 진실로 값지고 귀한 보석들이었다. 희망을 일구며 살아가는 데이지와 임문희 씨 같은 보석들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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