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필의 자유가 허락되지 않은 감옥에 한 시인이 있었다. 그는 읽던 책의 여백이나 담배 갑을 해체하여 생긴 은박지에 못으로 눌러서 시를 썼다. 그 시인은 글을 쓸 시간과 공간의 자유를 갈구했다. 펜을 들고 뇌리를 스치는 시상들을 설사하듯 분출하고픈 욕망이 가득했다. 철창 속에서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을 만나지 못하는 한 사내로서의 절절한 사무침, 쓰지 않고는 견디기 힘든 시인이 바라보는 세상에 대한 상념 등 이유는 있었을 것이다.
나는 글을 쓸 수 있는 자유로운 환경에 살고 있다. 하지만 자유를 만끽하지 못하고 있다. 왜인가? 나는 주어진 번역 원문을 또 다른 언어로 옮겨야 하는 학생이다. 우리말로 물 흐르듯 옮겨 적고 싶다. 그러나 나에게는 욕망을 분출할 힘이 부족했다. 통사적인 집이 부실했다. 그 집을 지탱할 벽돌이 부족했다. 그 벽돌을 나름대로 운용할 스킬이 부족했다.
이 번 학기 번역수업을 들으며 얻은 것이 많다. 잔잔한 여운이 남는다는 것이다. 학습은 감동이다. 그 감동은 일방적인 것이 아니다. 준비된 의문 속에 주어지는 유레카의 메아리다. 이론의 회색빛으로 물든 나무를 보는 감동이 아니다. 살아 숨 쉬는 저 생명의 나무를 보는 것이다.
번역에 대한 에세이를 쓰려니 다분히 笨头笨脑의 느낌을 받는다. 번역은 한 개의 언어공간에서 벌어지는 일이 아니다. 번역대상과 번역되어야 할 언어 사이의 소통이다. 간단하게 말해서 이 두 언어에 달통해야 하는 것이다. 그럼 두 언어에 대한 실력이 부족한 사람은 번역을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가 나의 대답이다. 그 이유는 두 언어에 통달한다는 기준이 무엇인지 의문이 가기 때문이다. 중국과 한국에서 오랫동안 언어경험을 한 사람이 물론 언어구사능력이 좋아 번역을 잘할 수 있는 개연성이 있다. 하지만 글 꽤나 쓴다는 분들의 글을 봐도 참으로 난삽한 면을 발견한다. 번역은 이미지의 전달이라 한다. 생활상의 언어 표현능력을 내포한다. 또 그 수준을 뛰어넘는 미적 감수성이 있어야 한다. 나는 이것을 남녀사이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경우의 수로 대치하여 설명하고 싶다.
편의상 번역 대상을 여인에 비유하겠다. 무릇 나의 작업의 대상인 번역원문에 대한 첫인상은 좋아야한다. 한 번 쭉 훑어보는데 그 느낌이 꾸어 온 보리자루 같다면 번역의 시간 길은 재미없는 것이다. 가슴이 두근두근 콩닥콩닥 뛰는 그 설레는 맘속에 내 언어세계의 기저에 놓여있는 욕망의 언어들이 작품 속에 모습을 드려내려 하는 것이다. 그럼 이 첫 느낌을 어떻게 유지하면 좋을까? 비록 가진 것이라고 달랑 펜과 종이 밖에 없는 나 어찌하면 이 원문을 나의 세계로 끌어당길까? 아 앞으로 벌어질 대상과 나의 심리전이 가관일 것 같다. 가진 것이 많지 않을수록 대담해야 한다. 음식점 주방장의 심정으로 대상을 잘라야 한다. 대상을 내 수준으로 작게 만들어야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작다고 깔보지 말라는 것이다. 작아도 우리에게 만족감을 주는 물건들이 있다. 그것은 작음이 가지고 있는 알찬 미학이다. 그렇다고 마구잡이로 잘라낸다는 것은 처음 여인을 대하는 사내의 자세가 아니다. 속된 말로 그러면 꽝이요. 그 여인은 배려라고는 좁쌀만큼도 없는 사내의 크기에 놀라 단숨에 십리 길을 걸으며 떠날 것이다.
그럼 어찌 칼질을 해야 할까? 칼질에도 기술이 있다. 무슨 기술이 있을까? 먼저 대상을 처음 접했을 때의 그 느낌을 버리지 않겠다는 약속이다. 첫 느낌 그 가슴 뻐근한 감정을 고스란히 간직하며 번역대상과 나의 번역작업을 이어가야 한다. 조강지처 버리면 지탄받는다. 이것을 동사인 나와 목적어인 번역 원문으로 비유하고 싶다. 동목구조를 유지하라는 것이다. 기본을 지키면 번역이라는 가족이 편안해진다. 제 아무리 현란한 외모를 자랑하는 여인이라도 장미에 가시가 있듯이 차고 부족한 면이 있다. 수수해 보이는 그 모습으로도 충분히 예쁜데 화장을 하고 쥐잡아먹은 듯 립스틱을 바르고 손톱에 매니큐어를 하는 경우가 있다.
이것은 또한 번역대상에 존재하는 수사법에서도 발견된다. 자기만 알아보는 어휘로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의미를 전달하려는 간 큰 시도도 있다. 무릇 일방통행의 짝사랑은 슬픈 것이다. 오해를 낳기도 한다. 아무리 한 사내가 적극적으로 들이댄다 해도 아량이 있어야 한다. 간결하게 이야기해주면 제 아무리 마님을 향한 영원한 마음의 돌쇠라도 그녀가 던지는 의미의 의도를 조절하게 된다.
둘째 마당이다. 부지런히 남녀 간에 의미소통이 있어야한다. 성실하게 메시지도 보내고 전화도 하고 메일도 보내고 만나서 같이 밥도 먹고 하는 것을 말한다. 번역작업으로 보면 번역할 한 문장 한 문장을 뚫어지게 보는 단계라 하겠다. 첫인상의 전체적인 겉보기에는 눈에 콩깍지가 씌었는지 예쁘게만 보였다. 그러나 현실의 구체적인 만남 속에서 이런 환상은 조끔씩 깨어진다. 문장의 앞 뒤 논리관계가 엉성한 것 같기도 하다. 이 여인이 화장실 칫솔을 사용하고 제자리에 두지 않고 여기저기 어지러이 방치한다.
물론 번역하는 나도 집안청소 설거지 잘 못해주는 건 매 한 가지다. 하지만 현실에선 목수가 대패를 탓하는 경우가 많은 것을 어찌하랴? 어찌되었든 만나는 사이에 정이 드는 것인가? 번역자의 한 숨 속에 그리고 번역자의 애정 속에 번역문은 완성되어가는 단계이다. 밀고 당기는 과정 속에 지쳐 보일 것 같기도 하지만 머나먼 번역의 길을 같이 걸어온 동지애라고 할까? 둘 사이는 애증의 강을 건너 원앙새의 둥지로 날아가는 듯하다. 하지만 여전히 사내는 어휘력을 실감한다. 한 여인의 맘을 알 것 같고 그 여인의 맘을 모두 이해해 주고 싶지만 어휘라는 밑천이 달린다. 속된말로 말발이 좋으면 자다가도 떡이 나타날 것 같은 심정이다. 사내는 다짐한다. 어휘력을 길러야 하겠다고. 그리고 생각한다. 어휘력이 있으면 통사구조가 보일 것이라고. 그 통사구조는 여인의 마음을 포장하고 있는 판도라의 상자이다.
마지막 마당이다. 어느 날 두 남녀는 네온사인 휘황찬란한 거리를 걷고 있었다. 갑자기 사내가 여인에게 허스키하고 느끼한 보이스가 혼합된 목소리로 하는 말“사랑해”. 공교롭게도 그 순간 바로 앞엔 장미여관이 있었다. 사내가 사랑해라고 외친 것은 다른 속셈 없이 순수하게 발화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 장면을 화용론이라 하던가? 여인은 이 사내가 자신에게 흑심을 품고 있다고 그 발화의 내용을 수용했다. 어휘를 많이 알고 통사구조를 파악해도 발화된 메시지를 수용자 입장에서 오해하여 받아들이면 곤란한 것이다. 그래도 그 둘은 수많은 번역의 고비 고비에서 위기를 극복한 커플이 아닌가? 약간 담화상의 의미해석과 의도의 수용에서 문제가 있더라도 앞으로는 그러지 말자라며 집으로 향했다. 따듯한 기운이 감도는 번역 작업실 아직 완성된 번역 작품이 아니지만 사내는 조금 전 있었던 그 오해의 사건을 교훈삼아 그 동안 번역해온 그 여인의 외모를 꼼꼼히 살펴보게 되었다. 몸매는 예나 지금이나 변화가 없었지만 뭔가 미묘한 감정과 의미의 차이에 초점을 맞추며 살펴보았다. 애정은 보는 것이 아니고 만지는 것이 아니고 느끼는 것이다. 여인이 던지는 의미를 사내가 고스란히 받아 그 여인을 장악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 번역의 방 속에 두 연인은 무너지지 않는 두 언어의 의미의 장성을 쌓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