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
"어릴 적에 절에서 자랐지?"
구천이의 입술이 하얗게 변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하얀 입술이 움직였던 것이다.
"아비가 있느냐?"
이번에는 고래를 흔들었다. 대신 그의 눈알은 뚜렷하게 치수를 응시했다. 하인의 눈빛이
아니었으며 하인의 몸짓도 아니었다.
"어디서 많이 본 얼굴 같군. 누굴 닮았을꼬……?"
치수는 육박해 들어가듯 했다. 순간 구천의 눈은 사나운 짐승의 눈으로 변했다. 이빨만 드
러낸다면 그는 여지없는 이리였으리라. 그러나 그것은 한순간에 지나지 못하였다. 강하고 두
꺼운 장막이 얼굴에 내리덮이면서 그는 완전한 무표정으로 돌아갔다.
구천이 별당아씨와 달아난 후 치수는 사람을 시켜 좇으려면 좇을 수도 있었다. 왜 좇지
않았는지, 치수는 그러한 자신을 이해하지못했으며 그것은 어쩔 수 없는 미묘한 감정의 소
이라는 것도 이해하지 못하였다. 증오, 보복, 그 어느것도 아니면서 사실을 구명하고자 하였
고 또 구명하고자 하는 강렬한 옥망을 누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치수는 절방에서 온종일 비몽사몽의 상태로 보내다가 야심하여 절간이 죽음에 달한 것처
럼 인적이 끊이면은 박쥐같이 절문 밖으로 빠져나가 절 밑의 마을을 헤매었다. 새벽녘, 인경
소리가 울릴적에, 영혼의 깊이까지 스며들어 찬미하는 노래 같기도 하고 지옥의 죄 많은 망
자(亡者)들이 울음 우는 소리 같기도 한 인경이 산과 수목과 새벽이 걷혀가는 하늘에 울려
퍼질 때 방이슬에 흠씬 젖어서 치수는 돌아오곤 했다.
사흘 밤을 지낸 뒤 끝내 우간과의 대면을 회피한 최치수는 수동에게 떠날 채비를 차리라
고 일렀다. 떠날 때 비로소 치수는 우관을 찾아 하직인사를 했다. 우관은 묵묵히 일행을 따
라 절문 밖까지 나왔다.
석장(錫杖)에 몸을 기댄 그는 떠나는 치수의 뒷모습을 지켜본다.
법당 쪽에서 목탁 소리 독경 소리가 한가롭게 울려퍼진다.
16장 목기막에서
여남은 채의 초가가 옹기종기 모여 있는 산기슭 마을에 나귀와 긴요치 않은 물품, 필요할
때 가져다 쓸 요량으로 일부분의 식량, 화약 따위를 맡겨놓고 산으로 들어간 일행은 화전민
의 산막에서 하룻밤을 보내었다. 이튿날 다시 길을 떠나 일행은 깊은 곳을 헤치고 들어섰다.
치수는 서울서 구해온 엽총을 들었고 탄약대를 둘렀으며 강포수는 총과 탄약대 이외 불치주
머니를 옆구리에 차고 걷느다. 수동이는 화약고 산탄을 따로따로 넣은 마포대와 식량 꾸러
미를 짊어지고 뒤를 따랐다. 아름드리 산목련나무와 우묵하게 철쭉으로 가려졌던 계곡을 지
나 일행은 관목 지대를 계속 헤치고 간다.
원시림인 데다 산죽이 밀생하여 하늘이 보이지 않는다. 곡사(谷寺)근방이었다. 나무숲을 거
스르고 지나가는 바람 소리, 다시 나타난 계곡의 물 떨어지는 소리, 앞장서 가는 강포수는
이따금 뒤따르는 사람에게 주의를 주곤 했는데 고함을 치듯 하는 그의 목소리는 금방 산소
리에 지워지고 만다. 얼마나 오랜 세울 나뭇잎은 쌓이고 쌓였던 것일까. 몸무게가 둥 뜨는
것 같은 부엽토의 더미, 인적에 다져지질 못한 부엽토에 푹석푹석 발목이 묻히는데 모래밭
과 달리 발바닥에 저항은 없다. 계곡에서, 바위마다 두껍게 늘어붙은 이끼에서, 썩은 나무
밑둥, 푸르름이 서로 반영되어 소나기 퍼붓는 곳에 번개치는 순간의 밝음과도 같이 더러는
움직이고 더러는 정지한 나뭇잎, 발밑에서 스치는 산죽에서, 사방에서 습한 기운이 기류를
타고 묻어오며 움직인다. 날짐승은 요란하게 날갯짓을 하여 가지에서 가지로 옮겨앉으며 인
간들이 가까이 왔음을 경고하는 것인지 날카롭게 우짖는다. 작은 동물들은 덤불 속으로, 혹
은 석벽 쪽으로 피해서 달아난다. 다시 계곡이 멀어지면서 물소리도 멀어져갔다.
강포수는 역시 사냥꾼이었다. 골수에서부터 사냥꾼이었다. 귀녀로 인하여 미망(迷妄)에 빠
져 헤어날 것 같지 않았던 그가 마치 건드리면 흩어지는 수은(水銀)이 다음 순간 다시 모여
들어 본시대로 한덩어리가 되고 마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지러운 사념은 사냥꾼의 목적 의식
에 집중되었으며 감미롭고 쓰라린 귀녀의 환상은 어느덧 무산되고 말았다. 그의 온갖 지각
은 짐승의 발자국, 짐승의 냄새, 짐승이 비비적거려놓고 떠난 낙엽더미의 흔적에 쏠리었다.
노련한 사냥꾼 강포수는 여느 때와 달리 다소 흥분된 상태였다. 방아쇠를 당길 때마다 심하
게 튕기면서 어깨에 통증을 느끼곤 했던 화승총으로도 선불 맞힌 일이 없는 명포수인 그가,
하기는 사정거리가 짧고 발사 속도가 형편없이 느렸으므로 맹수인 경우 한 방에 급소를 뚫
지 않는다면 포수 자신의 목숨을 내놔야 할 경우가 있는 만큼 격 솜씨의 정확함이 포수의
첫째 자격이긴 했었다. 하여튼 화승총으로 숱한 맹수를 사냥했던 강포수는 지금 마을에 맡
겨둔 짐짝 속에 화승총은 처박아두고 신식총을 들고 있었으니 흥분할 만도 했다. 그 동안
최치수와 함께 당산에서 사격 연습을 계속했기 때문에 총의 성능을 알고 손에 익기도 했으
나 아직 엽총은 짐승의 피를 보지 못했다.
석벽 근처를 지나올 때 치수는 고라니새끼 한 마리를 보고 시험삼아 쏘려고 했었다.
"그러지 마시이소!"
강포수의 어세가 강하여 치수는 힐끔 쳐다보며 동작을 멈추었다.
"그까짓 거, 고라니새끼 머하실라꼬 그랍니까."
"…"
"한 마리를 잡아도 듬직한 놈을 잡아야제요. 초지닉에 나온 호랭이는 고분 각시나 처자나
하고 새북 호랭으는 쥐나 개나 한다 안캅니까. 아즉 우리 사냥은 초지닉이니께요."
보일듯말 듯 웃음기를 머금으며 치수는 엽총을 거수었다.
"총은 함부로 쏘는 기이 아입니다. 총 한 방을 쏠라 카믄 목심하고 바꾼다 생각해야 하니
께요. 짐승도 그렇심다. 살 만큼 살아야, 새끼를 직이는 거는 산신이 노하니께요."
제법 타이르는 투다. 산 밑에서는 최치수 위엄에 눌리어 말을 더듬거나 망상에 빠져서 묻
는 말에 대답도 못하던 강포수가 산에 들어서면서 단연 달라진 것이다. 언동에 두려움이 없
어졌다.
'저, 저 뉘 앞이라고?'
두려움 없이 말하는 강포수가 수동에게는 괘씸했다. 그러나 짐승도 살 만큼 살아야 한다
는 말이 마음에 들었으며 우둔하고 버르장머리없는 그에게 묘한 친밀감을 느낀다. 최치수
아무말 없이, 그러나 다음 수풀 속을 지나가는고라니를 새끼도 아니었건만 쏘지않았다. 강포
수는 앞장서 가면서 제 말을 들어주거나 말거나 아랑곳없이 지껄였다. 벌써 이태 동안이나
눈독을 들여온 곰에 관한 얘기였다.
별 소득 없이 해가 저물었다. 치수는 종시 무덤덤했다. 일행이 화전민의 집을 찾아가기에
는 상당한 거리가 있었으므로 강포수 제안에 따라 비어 잇는 목기막에 들었다.
수동이 지어낸 저녁을 끝내자 별수없이 세 사람은 마주보고 앉아 있을 수밖에 없다. 강포
수는 새삼스럽게 주눅이 들었는지 써보지도 못한 엽총을 꺼내어 공연히 총신을 닦아보고 들
여다보곤 한다. 곤솔불 아래 텁석부리 강포수의 얼굴은 붉게 번들거렸다. 치수는 한쪽 무릎
을 세우고 짐꾸러미에 몸을 기대듯 하며 눈을 감고 있었다. 피로한 빛이 역력했으나 그것도
잊은 듯 깊은 생각에 잠긴 모습이었다. 수동이는 두 무릎을 모으고 단정하게 앉아서 상전의
멀아 떨아질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강포수."
눈을 감은 채 치수가 불렀다.
"예."
"산속에 화전민이 얼마나 있는고?"
"그러매요. 세세히야 우찌 소인이 알겄십니까."
'산속의 일이라면 개미 기어가는 것도 알 거라고 김평산이 말하드데 어째 모르는고?"
산속의 냉기 탓인지 치숭의 입술 빛은 짙게 보였다.
"노상 산에서 싸돌아댕기니께 빈말은 아닐 깁니다마는,"
"…"
'하지마는 짐승이라믄 몰라도 사람으 일이사 눈여겨보지 않으니 께요."
"…"
"그라고 본시부텀 화전민이란 한곳에다가 자리를 박고 살지 않으니께요."
"왜 자리를 박고 살지들 않나."
"소인겉이 뜨내기 신세라서 그런개비요."
강포수의 눈은 잠시 관솔불에 가서 머문다.
"불질러가지고 게우 한두 해, 좁쌀 강냉이 심어묵고 나믄 땅이 갈아서 못 해묵으니께, 그러
니께 다른 자리를 찾아서."
"그것는 알고 있네."
수동이는 두 무릎을 모으고 앉은 채 졸음이 오는 것을 떠밀어내려고 애를 쓴다.
"땅도 땅이지마는 세상에 나가서 살 형편도 못 되는 사람들이니께 자연 남으 눈을 피해서
자리를 옯기기도 하나배요."
"어떤 사람들이기?"
"믑쓸 병이 들었거나, 아 이 산속에는 문둥이가 참 많을 깁니다. 그러니께 차라리 비어 있
는 산막이 안심스럽고, 그라고 또 죄 지은 사람이 숨어 안 살겄십니까."
"무슨 죄를 졌기?"
치수의 눈시울이 희미하게 움직인다.
"여러 가지가 안 있겄십니까. 빚에 몰리서 관가 송사 난 사람도 있일 기고 역적질한 가솔
들도 있을 기고요, 족보에서 활적(割籍)돼서 올데갈데 없는 양반댁 자식들, 그라고 또오 동
학당도 적잖이 숨어 있을 깁니다."
"그렇겠지."
"옛적에는 서학패들도 많이 숨어 있었다 카는데, 그렇거나 저렇거나 햇볕 바르게 못 사는
사람들 아니겄십니까. 도망친 노비들도 있일 기고 남으 계집 업고 와서 사는 놈도 있일 기
고요. 세상에는 별의별 죄인이 다 있이니께, 첩첩산중 여기사 아무래도 법은 멀고."
꾸벅꾸벅 졸고 있던 수동이 눈을 떴다. 가물가물 흐려지는 의식속에 강포수의 나중 말이
귀에 흘러 들어왔던 것이다. 수동이는 강포수를 한 번 노려본 다음 겁먹은 눈이 되어 치수
의 기색을 훔쳐본다. 치수는 모호하게 웃고 있었다. 옆모습, 날카로운 콧날에 관솔불빛이 미
끄러진다. 치수는 나직하게 불렀다.
"강포수."
"예."
대답을 하면서 강포수는 뒤늦게 아뿔싸! 하고 제 한 말의 실수를깨닫는다. 그도 수동이처
럼 겁먹은 눈이 된다. 세상일과는 별로 인연이 없었고 세상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도 드물
었으며, 설사 남의 말을 귓속에 바싹 디밀어준다 하여도 한 귀로 흘려버리는 강포수였으나
최참판댁에서 일어난 사건은, 얼마 동안 그댁 지붕 밑에 있었던 만큼 뒤늦게나마 기억이 살
아났던 것이다.
"다음부터 되도록이면 빈 막에서 잠자리 펴는 일이 없도록 해주게."
"예, 예."
덮어놓고 대답하다가
"그렇지마는 짐승을 쫓다 보믄 자연히 그럴 수도,"
"서둘 것 없네. 짐승 잡아 장에 갈 것도 아니고… 수동아."
"예."
"나무를 넣어라."
"예."
수동이는 불씨만 남은 모닥불 위에 마른 솔가지를 분질러놓고 꺼지려는 불을 살린다. 불
길이 솟으면서 관솔불은 희미하게 약해지고 거무죽죽했던 목기막 안이 훤해졌다.
"강포수."
"예."
"자네 호랑일 잡은 일이 있는가?"
"하모요, 잡고말고요."
"그래 몇 마리나?"
"두어마리 잡았심다."
"음, 옛적에 우리 대숲에서 포수가 호랑이를 잡은 일이 있었다더군."
"대숲에서?"
"음… 들은 얘기니 사실이 그러했던지… 노루를 쫓아서 내려왔던 모양이야."
치수는 벌써 옛날에 죽은 늙은 종한테서 들었던 이야기를 생각하며 혼자 싱긋이 웃는다.
노루, 비극적인 사건에 저촉된 이야기였었는데 치수는 웃는 것이다. 그는 얼굴을 모르는 부
친에 관한 사건에 대하여 실감할 수 없었던 것이다. 불사(佛事)를 끝낸 뒤 노루고기를 먹었
기 때문에 벌을 받아서 부친이 죽었다는 이야기가 믿어지지 않았다. 그 이야기는 대개 호랑
이에 관한 대목만은 빠뜨리고 전해져 내려왔으나, 치수는 어릴 적에, 이름조차 기억할 수 없
는 늙은 종이 하던 말을 생각해낼 때마다 묘하게 웃음이 나는 것이었다. 개 두 마리가 미친
듯이 울부짖던 날 밤, 사실은 노루를 쫓아서 호랑이가 대숲에 남아 있었던지, 이름난 포수를
초빙해서 호랑이를 잡았다는 것이다. 늙은 종의 얘기로는 총소리가 나고도 대숲에서 아무
소리가 없기에 엉금엉금 기다시피하여 가보았더니 포수는 허공을 행해 노 젓는 시늉으로 총
대를 들고 허위적거리고 있더라는
것이다. 저만큼 덕채만한 호랑이 한 마리가 쓰러져 있었고.
'너무 놀래서 포수가 그만 정신이 나간 기라요. 사램이 가도 그냥 총대로 노를 젓고 안
있
겄십니까?'
늙은 종의 말이었다.
"호랑이 사냥을 할려면 담력이 세야 할 거로?"
"그렇십니다. 여간한 담력이 아니믄 호랭이 불덩이 겉은 눈만 봐
도 기절을 하니께요."
"나는 아예 호랑이 사냥할 생각은 없으니, 강포수."
"예."
"자네는 언제든지 해 떨어지기 전에 화전민 집에 당도할 수 있도록 길을 잡아주게."
"예."
하다가
"그라믄, 정히 잠자리가 편찮으시믄 소인이 자주 묵은 산막에다가 얘기해서… 그라자믄 아
무래도 멀리는 갈 수 없을 깁니다. 사냥이란 짐승을 보았다 싶으믄 며칠이고 몇 밤이고 뒤
따라가야 하는 법인데."
"누가 그걸 모르나?"
어세가 강했고 엷은 입술이 파들파들 떨었다.
"한 집에다 숙소를 정해놓고 그 변두리만 돌자고 누가 말했나!"
"…"
"사냥은 둘째고."
"…"
"사람을 찾는 게야!"
"예, 그, 그라믄 그리 알아서 요량하겄십니다."
우둔한 강포수는 전혀 짐작을 못하고 치수 기상에 눌려 얼떨떨하여 대꾸했다. 수동이는
저도 모르게 모닥불을 마구 헤집는다. 불티가 날리는 바람에 멈칫하느데 치수의 눈길을 느
낀다. 그러나 치수는 수동이를 보고 있지 않았다.
'우연… 우연을 기다리고 있는 겔까. 산막에서 우연히 그놈을 만나기를 기다리고 있다…'
눈이 강포수에게로 옮겨진다.
'흐흐흐…'
속으로 웃다가
"허허허…"
웃음이 밖으로 나왔다. 강포수는 눈이 휘둥그래져서 치수를 분다.
"그, 그렇게 하겄십니다. 사람을 찾을라 카믄."
하다가 강포수는 엽총을 구석지에 세우고 이번에는 멍하니 치수를 바라본다.
'할 수만 있다면 아무일도 없이 돌아가고 싶은 게지. 그러고 명년으로 미룰 게야. 게으른
종놈같이 늑장을 부리면서… 흐흐흐…'
치수는 자기 권위에 대한 손상을 용서치 않았다. 어떤 방법으로든 끝장을 보아야 했던 것
이다. 방법이라면 다른 쉬운 방법이 있었을 것이다. 사람을 사방에 풀어서 남녀를 잡아올 수
도 있을 것이며 미리 손을 써서 행방을 안 뒤 떠나올 수도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왜 치수
는 막연하게 기약도 없이 산속을 헤매려 왔던가. 분노하고, 추상같이 마을이 떠들썩하게, 그
게 싫었던 것일까. 자기 혼자 자신을 납득시킬 수 있으면 그만이었던 것이다. 자기 혼자서
손상된 권위를 찾았다 생각하면 그만인 것이다. 그 절대적인 권위 의식, 그러나 전부를 투신
할 정열을 잃고 있는 것을 부인할 수 없고, 우관선사에게 사실을 규명치 않으려고 안간힘을
쓴 것은 결정적인 포기를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끝장을 내기 전에는 그 문제는 괴로운 숙제
다. 끝장을 낸다는 것은 의무이기도 했었다. 싸움터에서 등을 돌릴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나라를 사랑하는 정열도 없으면서 적병을 향해 치달릴 수밖에 없는 하나의 관념, 굳어져버
린 관념이란 고질, 거의 윤곽을 잡을 수 있게 된 윤씨부인과 구천이, 우관선사와 김개주, 문
의원과 월선네와 바우와 그의 아낙을 엮어서 형태가 만들어진 있을 법한 사실, 그 사실로
인하여 지금 추적하고 있는 구천이를 어떤 방향으로 몰고 가게 될지 그것은 치수 자신도 알
수없는 자신의 감정이었다. 확증을 회피하고 연곡사를 떠나왔으나 확
증을 얻음으로써 구천에 대한 응징이 보다 가혹해질는지 응징을포기하게 될는지 그것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수동이는 부대를 들고 목기막 밖으로 나왔다. 쇙하니 부딪쳐오는 차가운 산기운에 수동이
는 으스스 떤다. 지대가 높아서 그럴테지만 하늘의 별은 무척 가까운 곳에서 반짝이고 있었
다. 반짝이고 있다기보다 수동이처럼 오시시 떨고 있는 것 같았다. 멀리 석벽 쪽에서 짐승이
운다. 혹 사나운 짐승에게 쫓겨온 산양의 울음이나 아닌지. 수동이는 구천이의 울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랑잎을 쓸어모아 부대에 쑤셔넣는다.
'하필 나를 와 데리고 오싰으꼬? 구천이 그눔아 죽은 거를 우예보노! 하나님 맙소사!'
부대에 가득 가랑잎을 채워놓고 난 뒤 우두커니 한참을 서 있다가 수동이는 목기막으로
돌아왔다. 치수는 아까 그 자세로 비스듬히 앉아 있었다. 강포수는 이제 마음놓고 치수를 멍
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휘안한 사람을 다 보겄다. 미치지도 않앗는데 와 헛웃음을 자꾸웃는 길까?'
"저리 비키소!"
수동이는 강포수를 떠밀어내고 가랑잎을 깔아 치수의 잠자리를 마련한다. 목기막의 일꾼
이 쓰다가 팽개치고 떠난 듯한 곳에 굴러있는 목침을 들어다 가랑잎 자리에 옮겨놓고 자랑
스럽게 목침 위를 가랑잎으로 덮는다. 치수는 자리에 눕고 강포수는 짐짝에 기대듯 하더니
이내 잠이 든 모양으로 숨소리가 거칠게 터져나왔다. 얼마 후 치수도 고른 숨길을 뿜는다.
잠이 든 것이다. 수동이는 관솔불을 거 뒤 땅바닥에서 뭉게뭉게 타고 있는 모닥불 속에 집
어던진다. 불꽃이 확 일다가 차츰 사그라진다. 모닥불 옆에 웅크리고 앉은 수동이는 영 잠이
오질 않았다. 염치없이 달겨들던 잠은 다 달아나고 머릿속은 냉수를 끼얹은 듯이 맑아오는
것이었다. 밖에서는 여전히 짐승 우는 소리가 들려온다. 가랑잎을 몰고 가는 바람 소리도 쉴
새없이 들려온다.
'천지간이 죽은 듯이 적막하고나.'
별안간 수동이는 울음이 끼둑끼둑 치미는 것을 느낀다.
'참말이제 적막하고나.'
상전댁에서 짝지워준 분이가 돌림병에 죽은 지도 사오 년이 넘는다.
'생가하믄 서방님도 불쌍치. 여자 하나 들어서…'
그는 분이가 죽은 뒤 어디서 무엇을 하다 왔는지 최참판댁 문저에 나타난 구천이를 동생
같이 자식같이 사랑했다. 사랑했다기보다 상전을 대하듯이 숭배했던 것이다.
'구천이는 남다른 데가 있지. 우리네들하고 다르다 카이.'
그 생각은 상당히 뿌리 깊어서 죄를 저지르고 달아난 후로도 변함이 없었다. 다만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은 별당아씨였던 것이다. 여자에 대한 생각은 가혹했다.
'여자 하나 들어서… 계집은 요물이라니. 어린 애기씨를 생각해서라도 그럴 수 있는 일가.
홀로 청상으로 늙으신 마님을 생각해서라도, 천하에 몹쓸 여자 아니가. 서방님이 멀쩡히 기
시는데… 꼬
리를 쳤으니께 구천이가 넘어갔지.'
여자 탓으로 구천이가 죽게 된다 생각하니 더욱더 분개심을 느낀다.
'천하에 몹쓸…'
밤이 깊어져서 바람은 가라앉는다.
"바아우-- 바아우우--"
이튿날 치수는 강포수의 동의를 얻어 노루 한 마리를 잡았다. 강포수는 노루가 쓰러진 자
리에서 칼을 뽑아 노루의 염통을 찔렀다. 흐르는 선지피를 받아 세 사람은 점심 요기를 대
신한다.
노루를 수동이 짊어지고 가까운 화전민 막살이로 찾아들었을 때 해는 서산에 떨어지고 있
었다. 마당가에서 강포수는 죽은 노루를 칼로 가르며 고기포를 뜨고 수동이는 치수에게 세
숫물을 떠다 바친다. 세수를 하고 일어선 치수는
"앗!"
하고 소리를 질렀다. 큰 지네 한 마리가 발밑을 지나가는 것이었다. 수동이 쫓아와서 막대기
로 지네를 쳤다. 강포수는 본체만체 하던 일만 하고 있었다. 아무일도 아니라는 듯.
"한 마리가 또 나올 깁니다."
화전민 아낙이 웃으며 말했다.
"한 마리가 또 나와?"
치수의 얼굴이 새파래진다.
"내외간이니께 한 마리를 찾아서 나올 깁니다."
치수는 아낙을 흘낏 노려본다.
"음양의 이치니께요."
강포수는 포를 뜨면서 거들었다.
'빌어먹을, 우찌 저리 눈치코치도 없노.'
수동이 마음속으로 혀를 찼다.
얼마 후 아닌게아니라 죽은 놈과 똑같은 크기의 지네가 나타났다.
"저거 보이소. 쇤네 말이 맞지요."
아낙은 또 웃었다. 치수는 쓴 입맛을 다신다. 그는 지네를 몹시 싫어했다. 호랑이보다 아
마 그는 지네를 더 무서워했을 것이다.
그날 밤 치수는 밤새도록 지네에게 쫓기는 꿈을 꾸었다.
17장 바람인가?
그것은 동상이몽의 경우보다 더 각박한 행위였었다. 더러는 물방앗간에서, 풀숲
혹은 바위 뒤켠에서, 그러나 보다 빈번히 삼신당을 이용하여 귀녀와 칠성이는 제각기 간절
한 기대와 야망에 불타는, 육체적으로는 불모지와 다름없는 관계를 계속하고 이었다. 제각기
의 야망과 기대는 사람다운 애정을 거부함은 물론 정사(情事)에 따르게 마련인 얘욕조차 용
납하려 하지 않았다. 행위는 오로지 목적을 위한 것, 목적을 향한 고행이었으며 본능을 초월
한 것이었다. 그것은 추악한, 비인간적인 것이었다. 그 점에서는 사나이보다 여자 편이 더
강하고 철저하였다.
이같이 깊은 밤에 행해지는 비정의 밀회는 평산의 물샐틈없이 세밀한 지시에 따라 비밀이
잘 지켜지고 있었다. 아이를 배대하느냐 못하느냐, 어쩌면 그것은 신과의 위대한 도박인지
모른다. 아들을 낳는다면 세 사람은 다같이 승리의 술잔을 들 것이요, 딸을 낳는다면 귀녀와
평산의 새로운 음모에서 칠성이는 탈락될 것이다.
당산 숲, 깊은 곳에 묻혀 있는 삼신당은 언제나 무겁게 밤을 지키고 있었으며 당 안에 모
셔놓은 동자불(童子佛) 미륵은 미소를 머금으시고 이들, 열렬한 기자(祈子)의 행워를 내려보
신다. 소슬한 가을바람이 속삭임같이 삼신당 처마를 스쳐가고 나뭇잎과 나뭇잎의 몸을 비비
는 기척, 밤꾀꼬리가 동쳐녀같이 울고 부엉이는 늙은 총각의 넋처럼 우는데 미륵불은 다만,
어느 공장(工匠)이 녹이고 부어서 마음없이 빚어놓은 한갓 쇠붙이에 지나지 않는단 말일까.
부처님은 노상 말씀이 없으시고 미소만 띠셨다.
"이보래? 구녀."
사나이 가슴에 짓눌린 귀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온달이가,"
"…"
"안 그렇나? 한 달이고 두 달이고 안 온다믄 야단이제. 그새 아아를 배믄 아무래도 의심을
안 받겄나? 달수가 있인께. 그렇겄제?"
온달이란 평산이 작명한 최치수의 별칭이었다.
"웬 걱정이오. 설마 추석 전엔 안 올까!"
앙칼진 목소리가 튕겨져나왔다.
"그런 거를 주제넘다 하는 기요."
목청이 낮았으나 이번에는 난데 상관이 없다니."
사내는 강하게 압박해간다. 여자는 신음 같은웃음으로 저항했다.
"떡 줄 사람은 따로 있는데 김칫국부터 마신다더니 아이가 생기서도 머할 긴데 없는 아아
애비가 어디 있노?"
"그, 그거사 그렇다마는 생기는 거로 생각하고 있잉께 미리할 거정은 해놔야제."
"욕심만 목구멍까지 차가지고."
한곳에서풀려난 남녀는 원수처럼 헤어진다. 귀녀가 먼저 산에서 내려간다. 치마를 폭 뒤집
어쓰고 내려가는 여자 뒷모습을 좇아가듯 부엉이 우는 울음이 잇닿는다. 샘터로 내려간 칠
성이가 무릎을 꿇으며 엎드려 샘물을 마시고 일어섰을 때 파수병 노릇을 하던 평산이 바짓
말기에 손을 찌르고 어슬렁어슬렁 마을을 향해 내려가는 것이었다.
"빌어묵을! 살쾡이 겉은 년. 흥, 씨가 제일이지 밭이 무신 소용고."
입가에 흐른 물을 주먹으로 훔치며 칠성이도 내려가버린 삼신당 지붕에 조각난 달이 희미
하게 걸려 있었다.
'엿장수 마음대로?'
동자불은 그런 말씀을 뇌고 계실지 모른다.
최참판댁 봉순네 방에서는 함안댁과 임이네가 와서 봉순네를 거들어 바느질을 하고 있었
다. 앞으로 보름이면 추석이다. 하인들 입성까지 손이 미치지 못하여 마을에서 손끝이 야물
다는 함안댁과 임이네가 불려온 것이다. 지난해 추석 전에도 이들이 와서 거들어 주었었다.
성질이 찬찬한 함안댁은 바느질을 즐기며 했고 솜씨는 봉순네에게 미치지 못했지만 김서방
이나 귀녀나 삼월의 옷 정도는 미끈하게 뽑아낼 줄 알았다. 임이네는 일손이 빨라서 머슴
옷을 숭덩숭덩 마르고 지어내었으나 바느질은 거칠었다.
"나는 아무래도 선일이 낫더마요. 내리 앉아서 바느질을 하고 나
믄 궁둥이뼈가 아파서."
"그거 다 습관이네라."
함안댁은 바늘을 뽑아 옷섶에 꽂고 등잔의 심지를 돋우며 임이네 말에 대꾸했다.
"김서방댁이, 아이고 무서리야, 재웁지도 않는가배, 날 보고 그라지마는, 일이라도 하니께
세월 가는 줄 모르지."
봉순네는 자를 들고 품을 재며 말했다. 임이네는,
"그거 다 팔잡니다. 낭개서 따온 것 겉은 솜씨니께, 싫었으믄 솜씨가 늘었겠소."
"젊었일 적에는 솜씨 자랑 하니라고 밤 가는 줄 모르고 했지마는 나이 들어갈수록 살아온
세상이 한스러바서… 그래도 일만 잡으믄 이생각 저생각 다 잊으니께 일이 보배지."
"하기는 그렇겄소. 머니머니해도 혼자 사는 사램이 젤 섧다 카더 마요."
"말해 머하노, 자식이 아프니 함께 걱정해줄 사램이 있나,"
"봉순이 아부지가 그리 자식 낳기를 기다맀다믄서요."
"내 복이 없어 그렇지. 인제 남겉이 살 긴갑다 생각든 것도 잠시였지. 꿈길 겉다."
함안댁은 임이네와 봉순네가 주고받는 이야기를 듣고만 있었다. 봉순네는 담담하게 남의
말을 하는 것 같은 표정으로 자기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한다.
"내가 열여섯에 시집을 갔는데, 가니께 신랑 나이가 열한 살이더마. 게다가 우찌나 간풀던
지 여름이믄 또랑에서 미꾸라지 잡노라고 옷이 흙에 범벅이 되고 겨울이믄 얼음판에서 온종
일 미끄럼을 타는 바람에 바지 밑바닥이 성할 날 없었고 날이믄 날마다 연날리기, 연실에
손 비이기는 일쑤고 그래가지고 돌아오믄 이눔으 가씨나야! 니 때문에 손 비었다 하믄서 머
리끄뎅이를 잡아끌고, 그래도 서방님이라고 말대꾸 한분 못하고 살았지. 그런 세월을 살다보
니 어느덧 이녁은 다른 계집하고 눈이 맞아서 바람도 많이 피우고, 하기사 내 복에는 과한
인물이었잉께. 우리 봉순이가 지 아바이를 쑥빼썼지."
"입에 붙은 말이 아니라 봉순이가 크믄 중신애비 땜에 개가 목이 쉴 깁니다."
"그러세, 그거사 다 커봐야 알겄지마는,"
"그래서 우찌 되었소."
말없이 일만 하는 것이 답답하였고 본시 말 좋아하는 성미여서 임이네는 다음 말을 재촉
했다.
"그랬는데 민란이 일어나가지고 이녁이 멋을 안다고 앞장을 섰던가배. 집안이 수라장이 되
고 이녁은 관가에서 쫓기는 몸이 되었는데, 그러면서도 기생 하나를 데리고 도망을 안 갔
나."
"이만저만한 바람쟁이 아니었는가배요. 붙들리믄 죽을 판에 무신 정에 계집까지 끼고"
"하기사 기생 쪽에서 한사코 따라갔다더라마는 그렁저렁 십 년 넘기 타관에서 소식도 없이
떠돌아댕깄는데 무신 바램이 불었던고, 아무래도 지금 생각해보니 우리 봉순이 저거를 하나
떨어뜨릴라꼬 돌아왔던가. 집안이 수라장이 되믄서 나는 할 수 없이 연피연피로 말해주는
사램이 있어서 이 댁에 와 있었는데 떡, 찾아 안 왔겄나? 이녁 나이 서른을 넘었고 나도 서
른다섯이었지. 이 댁을 하직하고 이녁을 따라서 고향으로 돌아갓는데 본시 심성이 나쁜 사
람은 아니었네라. 그라고 풍상을 겪어서 그랬든지 몰라도 우찌나 나를 위하고 다시는 고생
안 시키겄다 캄서,"
"말하기를, 올바람은 잡는다 캅디다."
"이자는 나도 세상을 살 긴갑다 싶어서, 거기다가 난데없이 태기까지 안 있겄나."
"그러니께 삼신이 끌어댕깄구마."
"세상에 그 좋아하는 거라니… 보래 조심하라고, 내가 다 할 기니 임자는 가만 잇으라고,
함서 아아 떨어질까 봐 벌벌 떨더마. 밤이믄 넘어진다고밖에 나오지도 못하게 하고."
"그만했이믄 원도 한도 다 풀었겄소. 하루를 살다 죽더라도 그런 호강 한분 해봤이믄."
임이네가 수선을 떠는데 함안댁은 여전히 말없이 일감에 시침을 두고 있었다.
"남들도 그랬지. 날 보고 복 터졌다고. 밤이 되믄 싫다 카느데도 어디 배 한분 만지보자 얼
매나 컸는가 함서, 하기사 이녁도 삼십이 넘기 자식이 없잉께 좋기야 와 안 좋았겄노. 하도
그래싸아서 나도 걱정이 되더마. 딸을 놓으믄 우짤꼬 싶어서, 그래 딸이믄 우짤 기요했더니
딸이믄 우떻고 아들이믄 우떻노 하더라만 그래도 걱정이 돼서 아들을 낳아얄 긴데 하고 내
가 아들 노래를 부르믄 이녁 말이, 나는 딸이라도 낳기만 하믄 춤을 출란다."
봉순네는 임이네에게 들려준다기보다 엣날 추억 속으로 잠겨들어가고 있었다.
"태기가 있고부텀은 우떡허든 살아볼라고 이녁도 고생 많이 했지. 손에 안 익은 장사를 하
노라고, 그러니까 아이가 여섯 달 됐을 때, 이녁 말이 산월에는 집에 있어야 한다믄서 서둘
러 서울로 장삿길을 떠났는데 그기 마지막 길이 될 줄 뉘 알았겄노. 도둑떼한테 걸리서 그
만…"
"그러기 세상사가 다 뜻대로 안 되나배요."
처음으로 함안댁이 입을 떼었다.
"다시 만내가지고 일 녕도 못 살았지. 상막 앞에서 곡을 하다가 우리 봉순이를 낳앗는데
낳기만 하믄 춤을 추겄다 카든 사람은 간곳이 없고 이웃 할매가 삼줄을 끊어줌서, 그 할매
도 울고 나도 울고, 남보다 바삐 갈라꼬 그리 정을 주었든가, 사람으 가슴에다가 못을 박아
놓고 무정하고 야속한 남정네, 내가 발을 헛디디서 아아 지울까봐 신돌에 신발까지 갖다 주
든 사람이… 첫국밥을 끓이주는 데 시상에 목에 넘어가야지. 참말이제 그때 핏덩이만 없었
다믄 함께 가겄더마. 강보에 싸인 봉순이를 안고 이 댁으로 돌아왔을 때 눈물이 길을 막
고… 그래도 사람 목숨 모진 기라. 세월이 간께 배 고프믄 밥 묵고 잠 오믄 잠자고 잊을 때
도 있으니."
"우짤 깁니까. 산 사람은 살아야제요."
"그러기 우리 봉순이 치울 때까지는 살아얄 긴데… 남들 겉으믄 버얼써 며느리 사위 보았
일 거를, 어서어서 세월이 가고."
밤이 깊어져서 방마다 등잔불이 하나 둘 꺼질 무렵 일손들을 놓은 함안댁과 임이네는 낡
은 초롱으로 발밑을 비춰가며 언덕을 내려갔다. 그들이 돌아간 뒤 봉순네는 방소리에 귀기
울여가며 일손을 멈추지 않고 옷 짓는 일을 계속한다.
"바램인가?"
고개를 든다.
"이상해라. 요새는 꼭 이맘때만 되믄."
옷섶에 바늘을 꽂고 초롱에 불을 옮겨 붙인 봉순네는 소리 나지 않게 방분을 열고 나간다.
뒤꼍으로 돌아갔을 때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누고!"
"…"
"누고!"
"누구긴,"
가라앉은 귀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초롱을 치켜든다. 귀녀의 얼굴이 드러났다. 귀녀는
불빛을 받고 한두 번 눈을 깜박였다.
"귀녀가?"
"야. 도둑인 줄 알았소?"
"밤마다 요맘때만 되믄 인적기가 있어서 오늘은 마음묵고 나와봤지."
귀녀의 얼굴은 탈바가지를 쓴 것처럼 움직이질 않앗다. 움푹 패인 큰 눈이 봉순네를 쏘아
본다.
"잠이 와야지요."
탈바가지 같은 얼굴은 여전히, 입술만 움직였다.
"와 잠이 안 오노. 다 큰 처니가 잠이 안 온다믄 그거 큰 병일세."
"흥, 봉순어매도 그라믄 병이라서 잠이 안 오요."
봉순네는 말문이 막혔다.
"추석이 닥치오니께 우리 어매 생각도 나고, 물밥 한 그릇 못 얻어묵고 떠돌아댕길 혼백
생각한께 잠이 안 오누마요."
말은 그랬으나 그러나 귀녀의 얼굴은 여전히 탈바가지를 쓴 듯 딱딱하였고 괴이했다. 봉
순네는 무섬증을 느낀다.
"니도 그런 생각을 다 하나?"
초롱을 내려 귀녀의 얼굴을 지워버린다.
"나는 사람으 자식 아니라 말이요?"
"사람된 도리가 어렵지. 원망이 있어서도 안 되네라, 순리대로 살아야,"
왜 자신이 그런 말을 하는지 봉순네도 알 수 가 없었다.
"무신 말을 그렇게 하요?"
"그러매…"
"내가 뉘한테 원망이 있단 말이요?"
되잡힌다. 한두 번 당하는 일이 아니면서도 봉순네는 그럴 때마다 당하고 마는데
"와 그런지 그런 생각이 드누마. 섬찟한 생각이 말이다. 남으 탓을 하믄 안 되니라. 타고난
제 신세를 남으 탓으로,"
기분에 쫓겨서 역시 되잡힐 소리를 지껄인다.
"기가 맥히서, 바람 쏘일라꼬 좀 나왔기로, 그기이 우때서 그러요?"
"우때서 그렇다는 기이 아니고 니를 보니께 자아는 원한을 품고 있다… 아, 아니다. 저 아
이는 맘이 모질다, 그런 생각이 드누만."
귀녀는 여느 때와 달리 시비를 더 이상 가리려 하지 않았다. 치맛자락을 날리듯이 거칠게
등을 돌리고 제 처소로 사라진다.
봉순네도 초롱을 돌리며 오던 길을 되잡는다. 귀녀에게 하필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알 수
없었다. 물밥 한 그릇 못 얻어먹고 떠돌아 다닐 혼백 생각을 한다는 그 말 때문에 봉순네는
그랬는지 모른다. 그 말이 임시변통의 거짓이라는 것은 뻔했으니까 감동한 것은 물론 아니
었고 다만 귀녀가 무서웠던 것이다. 초롱불을 받고 서 있던 귀년의 크고 움푹 패인 꺼무꺼
무한 눈동자가 무서웠다. 그 눈동자 속에 그칠 줄 모르는 집념이 미끄러운 뱀의 살갗처럼
넘실거리고 있었다. 밤이어서 그랬는지 모른다.
"이 가시나가 이불을 걷어차고, 감기들겄네."
방으로 돌아온 봉순네는 이불자락을 끌어올려 주고 아이 얼굴을 우두커니 들여다본다. 방
바닥이 뜨겁고 화로를 들여놓아 아이의 얼굴은 앵도같이 붉었다. 땀에 젖은 머리칼이 이마
빼기에 달라붙고 시큼한 땀 냄새가 풍겨온다.
"그린 듯이 이삐구나. 내 자식이지만 크믄 참말이제 문전의 개가 목이 쉬겄다."
빙긋이 웃는데 봉순이는 덮어준 이불을 다시 걷어찬다.
"저 아바이가 살았이믄 얼매나 귀히 여기겄노. 금이야 옥이야, 손바닥에 올려놓고 볼라 칼
긴데 다 복이 없어서,"
하다 만 일을 들고 봉순네는 옷섶의 바늘을 뽑는다.
당산에서 내려온 평산은 곧장 제 집으로 돌아갔다. 최참판댁의 바느질을 거들어주고 집에
돌아온 함안댁이 작은방 베틀 위에 올라앉다가 남편이 돌아온 기적을 듣고 동작을 멈추었
다. 등잔불을 불어 끈다. 큰방으로 들어간 평산은 옷을 벗고 자리에 들었다. 얼마후 그는 곤
하게 잠이 들었다.
황금더미에 올라앉은 꿈을 꾸면서
'누구 마음대로?'
평산의 꿈속에 미륵님이 나타나서 빈정거리기라도 했으면 좋으련만 평산의 오산도 딱하기
한량없으나 미륵께서도 적이 심술이 있으신 모양이다. 오색 무지개를 잡아보려고 힘겹게 언
덕을 기어올라가는데 이 불운한 무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무서운 재앙이요 함정이라는 것
을 한마디 귀띔도 없이 오히려 요만큼 더, 요만큼 좀더, 손짓을 하는 것이나 아닐는지. 차생
의 일은 불문에 부치고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지옥의 심음은 볼만한 구경거리인지도 모르겠
다.
'나는 죄의 연대자가 아니로소이다.'
'나는 하수인과는 하등의 연고가 없소이다.'
'다만 구경을 했을 뿐이외다.'
시원한 얼굴로 중얼거릴지 모를 일이다. 옛적에 천지만물을 다스리는 하나님께서 사랑하
시는 독생자를 보내시어 인간의 고초를 함께 겪게 하시었다 하고, 석가여래께서는 다음 미
륵불이 오시어 중생을 건지시리라 예언하시었는데 그때는 진금(眞金)으로 땅을 깔 것이며
의식(衣食)은 원하면 스스로 올 것이며 쾌락이 무량하고 남녀가 오백 세에 이르러 혼인을
하게 된다는 참으로 즐거운 세상이, 그러나 오십 몇억 년을 기다리는 동안 미륵불께서는 곧
장 구경만하실 모양이다. 그렇다면 한결같이 세상은 악역(惡役)과 선역(善役)이 있어 늘 정
해진 대본대로 움직이는 무대이며 인간은 광대인지 모를 일이다.
아무튼 평산은 황금더미에 올라앉은 끔을 꾸고 있는 것이다. 그는 대체 누구에게 속임을
당하고 있는 것일까.
18장 초록은 동색
나무 사이에서 움직이는 옆모습으로 총구가 옮겨지는데
"구천아!"
수동이 외쳤다. 외침에 이어 총성이 산을 흔들었다. 몸뚱어리가 솟구치더니, 몇 번인가 굴
렀다. 구르는 몸이 그 구르는 상태의 계속처럼 바위를 넘어 달아난다.
"저놈 잡아라!"
치수가 고함쳤다. 강포수가 뛴다. 수동이도 함께 뛰면서 강포수의 허리춤을 잡는다.
"강포수, 강포수, 강, 강포수."
허덕이며 뇐다.
"사, 살리주소. 살리…"
강포수의 걸음이 한결 느리어진다.
"뭣들 하느냐!"
훨씬 뒤떨어져서 뛰어오던 치수가 다시 고함쳤다.
"구신 곡하겄십니더. 금시 어디 갔일꼬요?"
바위를 넘어서서 엉거주춤하며 강포수가 말했다. 구천이 어느 방향으로 달아낫는가 알고
있는 강포수는 풀숲을 헤치며 우회한다. 귀신같이 산을 타는 구천이를 잡으려면 강포수가
서둘지 않으면 안 된다. 설령 치수나 수동이난다 하더라도 결코 그네들은 산사람이 아닌 것
이다.
한동안을 헤매다가 일행은 언덕 밑에 나직이 엎드린 초막 하나를 발견했다. 방금 사람이
머물렀던 흔적은 보였으나 이미 초막은 텅 비어 있었으며 여자의 미투리 한 짝이 엎어진 채
땅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구천이 별당아씨를 업고 달아났음이 분명하다. 치수는 텅 빈 초막
을 향해 총질을 했다.
"초록은 동색이군."
얼굴이 풀빛으로 변해서 후둘후둘 떨고 있는 수동이를 노려보며 최치수는 씹어뱉았다.
구천이를 처음 만났던 자리에는 칡뿌리가 굴러 있었고 기운 무명자루에 머루가 가득 들어
있었다. 산에 들어와서 보름 동안을 지냈을 때 일어난 사건이었다. 최치수는 이틀 동안을 거
의 쉬지 않고 강포수와 수동이를 앞장세워 산을 샅샅이 뒤졌으나, 그러나 구천이의 모습을
다시 찾질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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