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5에서 4.19까지, 자유당 최후의 국무회의 비록 |
|
방송일: 2003419 조회수 :
20415번 읽음
|
동영상 :
if("http://asx.kbs.co.kr/vod300.php?title=역사스페셜&url=1TV$20030419$hi_special$hi_special20030419_m"!="" && "http://asx.kbs.co.kr/vod.php?title=역사스페셜&key=12&url=1tv$hi_special$030419.asf"!=""){
if(1 == display_4week('2003419')){
//alert(a=display_4week('2003419'));
document.write("
");
//alert('1');
}else{
//alert(a=display_4week('2003419'));
document.write("
");
//alert('2');
}
//alert('3');
}else if("http://asx.kbs.co.kr/vod300.php?title=역사스페셜&url=1TV$20030419$hi_special$hi_special20030419_m"=="" && "http://asx.kbs.co.kr/vod.php?title=역사스페셜&key=12&url=1tv$hi_special$030419.asf"==""){
document.write("");
}else if("http://asx.kbs.co.kr/vod300.php?title=역사스페셜&url=1TV$20030419$hi_special$hi_special20030419_m"=="" && "http://asx.kbs.co.kr/vod.php?title=역사스페셜&key=12&url=1tv$hi_special$030419.asf"!=""){
//alert(a=display_4week('2003419'));
document.write("
");
}else if("http://asx.kbs.co.kr/vod300.php?title=역사스페셜&url=1TV$20030419$hi_special$hi_special20030419_m"!="" && "http://asx.kbs.co.kr/vod.php?title=역사스페셜&key=12&url=1tv$hi_special$030419.asf"==""){
if(1 == display_4week('2003419')){
//alert(a=display_4week('2003419'));
document.write("
");
}else{
//alert(a=display_4week('2003419'));
document.write(" ");
}
}else{
if(1 == display_4week('2003419')){
//alert(a=display_4week('2003419'));
document.write("
");
}else{
//alert(a=display_4week('2003419'));
document.write("
");
}
}
줄거리:
| |
역사스페셜 <자유당 최후의 국무회의 秘錄> 원고
PD 박현민 / 작가 유재은 ━━━━━━━━━━━━━━━━━━━━━━━━━━━━━━━━━━━━━━━━━━ 비디오
오디오 ━━━━━━━━━━━━━━━━━━━━━━━━━━━━━━━━━━━━━━━━━━ 프롤로그
6 블랙 백으로 국무회의
비록 1960년- 이땅은 독재정권에 항거하며 자유민주주의를 외치는 시민들의 함성으로 뒤덮였다.
그러나 바로
그때-
1960년 2월23일 "선거에 풍파나 난동이 없도록 하여 개명한 백성의 명예를 손상치 않도록 국민에게 잘
알려야 할 것이다"
권력의 핵심부, 경무대에선 다른 목소리가 나오고
있었다.
1960년3월17일 "마산사건의 책임을 자유당에 밀고 있는 것은 당치도 않은 일이다."
정권은
시국을 전혀 다르게 판단하고 있었다.
1960년 4월12일 "혹시 선거가 잘못됐다고 들은 일은 없는가"
그리고
국민들의 피맺힌 절규를 끝내 외면하고 있었다.
1960년 4월19일 "내가 나가 달라고 하는 것 같은데 있을 수
없다"
8 국무회의 비록 이러한 정권의 움직임은 한자 한자 기록이 되어 남겨졌다. 자유당 최후의 국무회의록이 바로
그것이다.
────────────────────────────────────────── 서브타이틀 3.15부정선거에서
4.19데모까지 자유당 최후의 국무회의 秘錄 ────────────────────────────────────────── ST
1.
#MC 걸어나오며 멘트
1960년 봄- 시민들의 힘으로 12년에 걸친 자유당 독재정권을
무너뜨리고, 이 땅에 최초로 민주주의의 싹을 틔웠던 4.19 혁명. 그것은 우리에게 감동적인 역사의 하나로 아직까지도 기억되고
있습니다.
그로부터 43년이 지난 오늘- 우리는 당시 이승만 대통령을 비롯한 자유당 정권의 핵심 인물들은 과연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국무회의록 떠오르고
자, 이것은 자유당 정권과 몰락을 함께 한
제1공화국 국무회의록인데요.
당시 국무원 사무국장에 의해 쓰여지게 된 이 문서는 자유당 정권 말기, 이승만 대통령과
국무위원들이 당시 시국을 어떻게 파악하고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대처해 나갔는지를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당시 국무회의의 분위기는 물론 그 자리에 참석한 이승만대통령과 국무위원들의 말투를 사실적으로 그대로 묘사해 놓았다라는
점입니다.
#국무회의록 58년2월18일자 관련내용 펼쳐지고
한 예로 58년 2월 18일자 국무회의록을 살펴볼 것
같으면 당시 재무장관하고 이승만 대통령이 나눈 대화 내용이 나오는데요.
당시 재무장관이 "선거에서 승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많은 국회의원의 공격과 압력에 당해내지 못할 것 같아서 진퇴문제를 생각하고 있다."고 말하자 이승만 대통령은 "DO NOTHING-
아무 일도 하지 않고, SAY NOTHING- 아무 말도 하지 않으려면, BE NOTHING- 거기에 있을 필요가 없는 것 아닌가"라며
일소, 웃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당시 영어를 자주 썼다는 이승만 대통령의 독특한 말투 그대로 기록해 놓고 있어 마치
속기록을 읽는 느낌을 주는데요.
그런데 이 제1공화국 국무회의록은 자유당 정권이 무너지고, 그 뒤로도 오랜 시간이 지난 뒤인
1990년 처음으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자유당 정권이 무너진 이후 30년동안 그 존재조차 일반에 알려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제1공화국 국무회의록은 어떻게 작성되었으며, 과연 어떤 내용들이 기록되어
있을까요? ------------------------------------------------------------------------------------- VCR
1.
8 아파트 외경 PAN 지난 4월 초 취재팀은 서울의 한 아파트를 찾아갔다.
8 계단 오르는 피디 (잠시
보다가) 취재팀을 맞은 사람은 지난 30여년간 공직에 몸을 담았던 이희영씨.
8 국무회의록 펼쳐보고 그가 가지고 나온
것은 미농지 2천여장 분량의 제1공화국 국무회의록이었다.
11 1월2일자 국무회의록 보이고 (현장음-58년1월2일자지. 첫
국무회의를 경무대에서 했다.)
9 국무회의록 세권 펼쳐져 있고 제1공화국 국무회의록은 1958년 1월2일을
시작으로 1960년 4월, 자유당 정권이 무너지기까지의 국무회의 내용을 소상히 담고 있었다.
9 국무회의록 PAN 당시
국무회의 석상에서 논의된 내용을 누가 무슨 말을 했는 지 대화형식으로 상세히 기록해놓고 있는 것이다.
11 국무회의록
T.D 그런데- 그것은 다른 국무회의록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점이었다.
- 이희영 인터뷰 국무회의 기록은
일반적으로 의결결과만 기록해도 된다. 다른 분 같으면 그렇게 했고 지금도 그러고 있는데 이분은 아예 문답 내용 사실대로 실록을 기록한
거다. 그 가치가 있다. 그래서 대통령이 말씀하시는 영어면 영어대로, 또 다른 얘기면 다른 얘기대로 전부 다 풀어 가지고 말씀
하신거라든지 그런 것은 이분 특유의 사명감을 가지고 자기 국무원 사무국장 재임중 자기 일을 충분히 했던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16 신두영 사진 Z.I 제1공화국 국무회의록은 한사람에 의해 쓰여졌다.
이희영씨가 20여년간 상사로 모셨던 고
신두영씨-
제1공화국 당시 국무원 사무국장이었던 그는 28 이미지 재연, 국무회의 F.S에서 신두영 아직 제대로 된
국무회의록조차 갖추지 못했던 그 시절- 개인적으로 국무회의 내용을 속필로 메모했던 것이다.
그는 경무대 국무회의뿐만
아니라 대통령이 참석하지 않는 중앙청 국무회의에서 논의된 내용까지 소상히 기록했다.
그리고 미농지에 묵지를 대고 필사한
뒤, 19 이미지 재연, 이승만에게 보고하고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고했던 것이다.
이처럼 당시 중요한 문서였던 제1공화국
국무회의록.
그러나 이것이 세상에 알려진 건 1990년- 자유당 정권이 무너지고 30여년이란 오랜 세월이 흐른
뒤였다.
- 이희영 인터뷰 육필로 3부를 썼다. 그래서 한부는 청와대, 한부는 정부, 한부는 자기가 가지고
있었는데 4.19와중에 다 없어지고 결국 자기가 가지고 있던 한 부만 남은 것. 생존시 이것을 공개할 수 없는 이유는 거기에 있는
각료가 아직 생존하고 있어서 공개하지 않고 가지고 있었다.
4 수원대 전경 그렇다면 제1공화국 국무회의록에는 어떤
내용이 담겨있을까?
10 국무회의록 보는 피디와 이달순 교수 제1공화국 국무회의록을 분석해 당시 자유당
정권의 정책을 연구해온 이달순 교수- 그와 함께 제1공화국 국무회의록에 담긴 자세한 내용을 알아보기로 했다.
5
국무회의록 넘겨보고 거기엔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
3 "진보당간부체포..." 국무회의록 한 예로
58년에 있었던 진보당 간부 체포 사건- 15 "조봉암은 벌써 조치되였으야 할 인물이며" 당시 최대의 라이벌이자 진보당
당수였던 조봉암에 대한 이승만 대통령의 개인적인 감정이 상세히 표현되어 있다.
5 국무회의록 펼쳐지고 그 뿐만
아니라 당시 사회적으로 화제가 됐던 내용들 또한 빠짐없이 담겨 있었다.
7 "재무-시말차회사가 세금이 시발차회사의 세금
체납문제- 많아서 못내고 있다.
6 "대통령-국민이 싫어하드라도 아파트를 토지절약차원에서 아파트를 짓자는
주택건설계획- 많이 지어야 토지의 절약이 된다."
9 "대통령-항상 일본한테 져서는 그리고 대일외교에 대한 이승만 대통령의
생각까지 안된다는 것을 잊고 나가면 안된다." 나타나 있다.
- 이달순 교수 인터뷰 그 당시의 정부 방침, 국무회의
이끌고 있는 장관들의 전략, 이런 것을 상세하게 알 수 있기 때문에 국가 전략에 대해서 정확하게 분석할 수 있다는 점에서 가치 있다고
생각하고 또 잘잘못을 논의하기 전에 정부가 하고자 했던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 객관적이 아닌 그분들의 주관적인 것을 우리가 다시
한번 살펴내는 그런 특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8 국무회의록 펼쳐지고 이처럼 자유당 정권 당시 시대상과 정부의 움직임을
상세히 증언해주고 있는 제1공화국 국무회의록-
15 자막 뜨고 1959년 이 기록에 따르면 3.15선거 1년 전인
1959년의 경우에는 총124회에 걸쳐 국무회의가 열린 것으로 나타나 있다. 논의된 안건은 모두 1288건-
23 자막
뜨고 그 가운데 법제정비와 산업경제 분야가 17%로 제일 많고, 그 다음으로 재정과 물가, 외교, 그리고 국방과
치안, 마지막으로 정치 순이었다. 즉 1959년만 해도 정치문제가 국무회의 석상에서 많이 다뤄지지 않았던
것이다.
12 이미지 재연, 국무회의 모습 그런데- 1960년 접어들면서 상황은 크게 달라진다. 국무회의석상에서
정치문제에 대한 보고와 제안이 눈에 띄게 증가한 것이다.
5 국무회의록 펼쳐져 있고 6 "1월5일" 자막 빠져나오고
제4대 정부통령 선거를 앞둔 1960년- 3 "개헌에 관하여" 개헌문제. 3 "선거시기에 관하여" 그리고 선거시기에 대한 논의로
서막을 연 6 또다른 페이지로 넘겨지고 국무회의는 마치 선거대책본부와 같은 느낌이 들 정도였다.
2 자막
뽑아져나오고 3 "선거일자에 관하여" 자막 빠져나오고 선거일자 역시 민감한 문제였다. 5 또다른 페이지로 넘겨지고 자막
뽑아져나오고
9 "학생의 선거운동 금지에 관하여" 또한 학생의 정치활동에 대한 규제방안들이 논의되고
있었다.
16 여러 장의 사진 컷으로 시위모습 12년에 걸친 자유당 독재정권의 붕괴를 가져오는 운명의 1960년은 이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자유당 정권의 몰락- 그것은 어느 누구도 예견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 ST 2.
#MC+국무회의실
C.G백으로 걸어나오며 멘트
지금 제가 서 있는 곳은 당시 국무회의가 열린 경무대 회의실입니다. 기록을 바탕으로 컴퓨터
그래픽을 통해 재현한 것인데요. #MC 의자쪽으로 다가가고 오늘날처럼 원형의 탁자를 가운데 놓고 대통령과 국무위원들이 빙둘러
앉아 회의를 하지 않았나 봅니다. 탁자는 없고 의자만 일렬로 놓여진 것이 마치 강의실 같은 분위기를 느끼게
해주는데요.
여기 일렬로 늘어선 의자들이 보이시죠. 바로 국무위원들이 서열대로 앉았던 자리입니다. (따로 마련된 자리
손으로 가리키며) 그리고 저기 따로 마련된 자리가 바로 이승만 대통령이 앉았던 자리입니다.
(국무위원 자리에 앉아보고)
이처럼 당시 국무회의는 국무위원들이 서열에 맞춰 지정된 자기 자리에 앉아 있다가 이승만 대통령이 입장해 따로 마련된 자리에 착석하면
비로소 회의가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국무위원석에는 책상이 없기 때문에 국무위원들은 보고서를 손에 들고, 회의를 했어야
했는데요.
#MC 자리에서 일어나 정면 바라보며 당시 국무회의는 합의제 의결기관으로 국무위원들의 설명을 듣고 대통령이
재가하는 형식으로 운영됐습니다. 부처간 이견이 있으면 대통령이 다시 검토할 것을 지시하고, 국무위원들이 위원회를 구성해 재심을 했던
것입니다.
정부통령 선거가 있던 1960년- 그때도 이승만대통령 주재 하에 국무회의는 계속됐는데요. 당시 국무회의의
의제는 주로 선거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자유당 정권의 중요한 선거전략 역시 바로 이 자리에서 나오게
됩니다. ------------------------------------------------------------------------------------- VCR
2.
18 이승만, 걸어오는 모습 등 일상생활 1960년 정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8순의
고령이었다. 헌법상 대통령 유고시 부통령이 대통령직을 승계하도록 되어 있었다. 따라서 부통령이 누가 되느냐가 최대의
관심사였다.
12 자료화면. 3대 대통령 취임식 4년전인 1956년- 제3대 정부통령선거에서 자유당은 뼈아픈
패배를 겪어야 했다. 민주당의 장면 후보가 부통령에 당선된 것이다.
5 사진자료. 연설하는 이승만 여당 대통령에 야당
부통령이라는 상황은 자유당을 긴장시키기에 충분했다.
6 자료화면. 이기붕과 얘기나누는 이승만 그러나 1960년 정부통령선거
역시 이기붕의 부통령 당선을 자신할 수는 없었다.
9 사진자료. 이승만 PAN 이기붕 따라서 이승만 대통령의 당선은 물론
이기붕을 부통령의 자리에 앉혀야 한다는 것이 자유당의 지상목표였다.
- 박태균 교수 인터뷰 60년 선거에서
대통령, 부통령 선거에서 이길거라는 자신을 할 수가 없는거다. 이승만 개인은 본인이 대통령 되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이미 56년
부통령 선거에서 부통령이 민주당 쪽에서 당선되는 걸 경험했기 때문에 60년 선거를 안전하게 가기 위해서는 대통령, 부통령이 같은
정당에서 나와야 된다라고 하는 논의가 내부에서 있었고.
11 자료화면. 기자들 앞에 앉아있고 1959년12월- 자유당의
총책임자였던 이승만 대통령은 기자회견을 가진다. 이기붕 부통령 후보와의 동반 당선을 보장하기 위한 제도적 조치를 취하기
위해서다.
6 신문자료. "가능하면 헌번 개정" 정부통령을 동일정당에서 선출되도록 헌법을 개정하겠다는
것이다.
18 "정부통령을 동일정당에서 뽑아내야 한다" 정부통령을 동일정당에서 선출하는 동일티켓제가 바로
그것이다.
자유당 역시 이승만 대통령 유고 시를 대비해 동일티켓제에 대해 적극적인 지지를 하고 나선다.
8
국무회의록 F.S 이 동일티켓제는 1960년에 들어서도 강력히 추진된다.
10 "1월5일자"로 Z.I 그런데
60년1월5일- 이승만 대통령이 돌연 태도를 바꾼다. 9 자막 뜨면 선거에 임박해서 헌법을 개정해서는 안된다는 이유로 개헌하지
않는다는 것을 공포하도록 했던 것이다.
9 신문자료 Z.I "동일티켓, 국무총리부활" 이처럼 이승만 대통령이 갑자기 개헌불가를
천명하고 나선 이유는 무엇일까.
10 "동일티켓, 국무총리부활" 민주당이 동일티켓제 개헌을 받아들이는 "민주당,
개헌논의의 가능성 농후" T.D 조건으로 대통령의 독주를 견제하는 국무총리제 도입을 제의했던 것이다.
- 박태균 교수 인터뷰
야당 쪽에서 이걸 반대한 것이 아니고 국무총리제를 도입하면 오히려 찬성을 해서 같이 해보자는 얘기가 나온거다. 그런데 이승만
대통령의 경우 강력한 대통령제를 항상 주장 했기 때문에 국무총리제에 대해선 반대하는 입장이다. 이게 개헌안으로 나와서
자유당과 민주당이 합의한다면 오히려 다른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는 거다.
19 자료화면, 이승만 들어오고 박수 자유당은
국무총리제를 받아들이면서까지 동일티켓제를 이루고 싶어했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의 생각은 달랐다. 동일티켓제를 포기할 망정
국무총리제만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대통령 중심제에 대한 그의 강한 집착 때문이었다.
10 국무회의록
보이고 자유당과 이승만 대통령 간의 시각차가 존재하는 가운데 동일티켓제는 이승만 대통령의 반대에 부딪쳐 결국 무산되고
만다.
20 자료화면, 민주당 정부통령 하지만 당시 민주당 내부 사정도 복잡했다. 후보자지명전국대회 대통령 후보를
둘러싸고 조병옥을 지지하는 구파와 장면을 지지하는 신파 간에 내분이 계속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가운데 59년 11월,
전당대회가 치뤄진다. 투표결과, 3표 차이로 조병옥이 대통령 후보로, 장면이 부통령 후보로 확정된다.
6 자료화면,
조병옥과 장면 박사 그러나 구파와 신파간의 내분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8 국무회의록 1월5일자 넘기고 이처럼 민주당이 갈등을
빚고 있을 때 자유당 정권은 또다른 선거전략을 계획하고 있었다.
16 자막 뜨면 바로 조기선거였다.
원래 선거는
5월에 했지만 농번기를 피해 일찍하는 것이 좋겠다라는 것이다. 그러나 농번기는 6월부터 시작되는 것이니 5월이
적기였다.
10 자료화면, 군중 속 걸어가는 조병옥 이들이 조기선거를 추진한데에는 또다른 이유가 있다. 당시 민주당
대통령 후보인 조병옥의 병세가 심상치 않았던 것이다.
8 국무회의록 펼쳐지고 자유당 정권은 바로 이 점을 노린
것이다. 조병옥이 치료차 미국으로 떠나고 3일 뒤 열린 국무회의-
11 내무 자막 뜨면 자유당 정권은 선거전략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그리고 선거시기를 3월15일로 확정한다.
- 김종완 인터뷰 그 사람들은 아마 조박사의 병을
짐작했던 모양이다. 우리한테는 대수롭지 않다는 병으로 떠 나간다고 그러면서 병원에 가서 속히 돌아오겠다고 그러고 떠났다. 그러니깐 조박사
돌아오 시기만 기다렸는데 비보가 날랐다니까. 16 자료화면, 조병옥박사 장례식 모습 3월15일로 공고된 선거일을 한달 앞둔
2월15일. 미국에서 신병치료를 받던 민주당 대통령 후보 조병옥이 심장마비로 갑작스럽게 사망한다.
그의 죽음은 당시 그를
지지했던 많은 사람들에게 절망감을 안겨주었다.
3 자료화면, 조박사 영정사진 야당의 유력한 대통령 후보였던 조병옥의
죽음.
5 자료화면, 기자회견하는 이승만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심정은 과연 어떠했을까?
6 국무회의록 나오고 2월16일
열린 국무회의- 이승만 대통령은 조병옥의 죽음에 대해 묘한 심정을 털어놓는다. 9 자막뜨면 정당의 경쟁상대자로 지독한
자이었으나, 작고하였다니 섭섭하다- 건국초 각별한 사이였던 조병옥에 대해 애증이 교차하고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8 자료화면, 이기붕 이승만 출마환영 조병옥의 사망으로 시국이 어수선한 가운데 선거는 예정대로
진행되었다.
3 자료화면, 장면과 조병옥선거벽보 민주당은 대통령 후보없이 선거를 치뤄야 했다.
14 자료화면,
선거유세장 그리고 56년 제3대 대통령 선거에서 그랬듯이 유력한 야당 후보의 사망으로 이승만 대통령의 재집권은 사실상 확정된
상태였다. ────────────────────────────────────────── ST 3.
#MC+장면 선거
유세사진 C.G 백으로 걸어나오며 멘트
조병옥 박사의 갑작스런 죽음은 민주당에도 큰 여파를 미치게 됩니다. 대통령 후보 없이
선거를 치뤄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장면 박사만이라도 어떻게든 부통령의 자리에 앉혀야 한다는 것이 당시 민주당이
안고 있는 절대절명의 과제였습니다.
당시 헌법상 대통령 유고시 부통령이 대통령직을 승계하도록 되어 있었는데요. 민주당은
바로 이 점을 노린 것입니다. 장면 박사가 부통령에 당선될 경우, 팔순 고령이었던 이승만 대통령 유고시 대통령직을 물려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유당 역시 사정은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의 재집권이 기정사실화 된 가운데 이기붕 의장의 부통령
당선을 지상 목표로 선거운동을 벌여나갔던 것입니다.
#MC 우측으로 국무회의비록 60년 2월23일 내용 떠오르고
그런데
3.15선거가 있기 20여일 전인 2월23일자 국무회의 기록을 보면 당시 내무장관의 발언 중에서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조박사 장의가 끝날 때까지 표면상 중지상태에 들어가 있으나 내적으로는 착착 진행중이다." 라고 되어
있는데요. 내적으로는 착착 진행중이다? 과연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MC 좌측으로 3월3일자 신문 내용
떠오르고
그런데 그로부터 10일 뒤인 3월3일, 민주당에 의해 자유당 정권의 선거방법 지령과 그 전모가 폭로된 사건이
벌어집니다.
(4할을 무더기 투입 보이면) 전체 득표수 가운데 4할은 투표 시작 전에 미리 조작된 기권표를 자유당 후보에게
기표해 무더기로 집어 넣을 것-
(3인조, 9인조를 활용 보이면) 그리고 나머지 6할은 공개투표로, 자유당 간부를 3인조,
9인조로 조를 짠 뒤 기표소 내에 잠복시켜 기호 몇 번을 찍는 지 감시하도록 지시했다는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당시
국무회의에서 내무장관이 발언한 내용과 선거를 불과 2주 남겨 놓고 벌어진 자유당 정권의 부정선거 폭로사건은 무슨 관계가 있었던
것일까요? ------------------------------------------------------------------------------------- VCR
3.
14 이미지 재연. 국무회의 선거를 1주일 앞둔 3월8일. 이승만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경무대
국무회의에서 국무위원들은 자유당이 승리라도 한 듯 들떠 있었다.
4 국무회의록 펼쳐져 있고 그런데 당시 국무회의록에 적힌
대화내용을 살펴보면 14 내무 자막 뜨면 선거를 둘러싸고 심상치 않은 조짐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내무장관은 전 공무원의
일치단결된 지지도 받고 있으니 자유당의 승리가 거의 확실하다라고 했으며,
11 체신 자막 뜨면 체신장관은 야당인 민주당까지
거론하고 나섰다. 경북 달성군은 민주당의 본 고장같은 곳인데 열렬한 민주당원이 이승만 대통령을 지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15 교통 자막 뜨면 그리고 교통장관은 공무원 뿐 아니라 공무원 부인까지 활동을 하고 시장, 읍장,
면장까지 선거준비에 대해 잘 이해하고 있다라고 했다.
3 자료화면, 이승만과 이기붕 선거벽보 민심이 자신들에게 돌아섰음을 느낀
자유당은 4 자료화면, 장면과 조병옥 선거벽보 이번 선거를 철저한 관권 선거로 끌고간 것이다.
11 자료화면, 이승만과 이기붕
유세차 보이고 이승만 대통령의 재집권이 사실상 확정된 상태에서 문제는 이기붕과 장면, 과연 누가 부통령에 당선되는가 하는
것이었다.
11 국무회의록 펼쳐져 있고 이 같은 상황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참석하지 않은 3월11일 중앙청 국무회의록을 보면
부정선거 움직임이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16 "공무원이 제2선..." 자막뜨면 당시 내무장관은 선거준비에 공무원이 제2선,
제3선에 서서 나가기로 한 것이 지방에 따라서는 제1선에 서게 되어서 주변 공기가 이상하니 각별한 주의를
당부하고 나선 것이다.
- 이달순 교수 인터뷰 대통령을 당선시키기 위해서 선거에 관련된 부처에 6명의 국무위원으로 구성된
위원회를 구성했지만 그건 형식적이었고 실질적으로 최인규 내무가 단독으로 진행하고 있었다./ (4430) 최인규 내무부 장관은
경찰중심으로 모든 걸 부정선걸 치러야 하기에 모든 경찰관 으로부터 사표를 미리 받았다. 그래 놓고 경찰관이 꿈쩍 못하게 악날한 방법을
썼다는 이야기다.
13 신문기사 F.S 최내무 답변기사 하지만 공무원을 통한 관권선거 움직임에 대해 내무장관은 강요한
일이 없다며 사실을 은폐하고 나섰다.
12 자료화면, 장면박사 유세상 F.S 한편 야당 선거 유세에 대한 방해공작도
많았다. 유세장 사용 허가를 내주지 않는 가 하면 야당의 유세장 근처에는 대중교통 수단의 운행을 중단했다.
4
신문기사, "선거희생자 제1호" 그리고 경찰의 노골적인 야당 탄압 또한 빈번해졌다.
10 "민주당원 테러맞고 절명. 선거전이
막바지에 접어든 3월9일. 여수에서" "입원한 지 5시간후..." 전남 여수에서는 급기야 민주당 간부가 구타, 살해당하는 사건까지
발생한다.
15 신문기사, "모의투표지폐기" 그리고 선거 닷새전인 3월10일. "선거법위반지적" "민주당, 중앙선위에.."
모의 투표용지와 3인조, 9인조 공개투표 등 3.15부정선거 계획이 민주당 의원들에 의해 본격적으로 드러난다.
17
자유당, 싸워라. 득표공작강화, 이것을 시작으로 득표공작강화 등 자유당 부정선거 비밀지령 문건 역시 사회적으로 폭로되기에
이른다.
이처럼 자유당이 사전에 계획한 기상천외한 득표전략들이 신문보도를 통해 속속 드러나는 가운데 자유당 정권은
언론에 협박까지 가했던 것이다.
- 허종 인터뷰 자기가 자유당 간부인데 새벽에, 자네가 너무 심하지 않느냐, 선생님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하니까 이 사람아, 사람이 신경이 날카로와지면 어떤 일을 할 지 모르는데 내가 지금 자네 때문에 신경이 날카롭다, 그럴
수 있냐
7 자료화면, 투표하기 위해 줄 선 사람들 이같은 소용돌이 속에서도 3월15일. 제4대 정부통령 선거는 예정대로
실시된다.
9 자료화면, 이기붕 부부 투표하고 선거거부를 둘러싸고 민주당 내에서도 선거 전날인 3월14일, 선거
불포기를 재확인하고 선거에 임한다.
9 사진자료, 투표하기 위해 그러나 이날 4할 사전투표, 3인조 9인조 공개투표, 3조,
9조씩 무리져 줄 선 아줌마들 대리투표 등 공공연한 부정투표가 감행되었다.
10 사진자료, 돈 고무신 입당원서 보이고 온갖 부정과
불법이 전국의 각 투표소에서 저질러진 가운데 관권과 금권이 총동원된 사상 최대의 부정선거였던 것이다.
7 신문기사,
3월15일 호외 참다못한 민주당에서는 선거 당일, "선거의 불법, 무효선언" 선거 무효선언을 하기에 이른다.
13
사진자료, 무서지고 깨지고 그리고 민주당 마산시 지부에선 부정선거를 외치며 오전부터 가두시위를 벌였다. 그리고 시민과 학생들이
시위대에 가담, 경찰과 충돌하면서 사태는 걷잡을 수 없게 번졌다.
11 마산거리 PAN 피디와 얘기나누는 변순기 당시
시위군중들은 선거무효를 외치며 마산시청으로 통하는 이곳 대로로 몰려들었다.
- 변순기 인터뷰 여기서 제 뒤쪽으로
7백미터만 가면 마산시청이 나온다. 이 대로상이 제일 치열했다. 부정선거 개표되던 마산시청을 탈취하던지, 개표를 막기 위해서 저희들이
전력을 다해 싸웠다. 그런 공방전이 계속 되었는데 어느 순간 최루탄, 공포탄이 발사되고 실탄이 발사되어 많은 사람이 쓰러지고
죽었습니다.
3 사진자료, 총 쏘는 경찰 마산에서 최초의 유혈사태를 빚은 것이다.
11 사진자료, 무학초등학교 담
총탄자국 당시 무학초등학교 담벼락에 남겨진 총탄자국- 이처럼 경찰은 수백발의 총알을 쏘아댔고 마산은 피로 물들었다
12
김무신 사진 보이고 당시 열일곱살이었던 김무신군. 그 역시 부정선거에 분노를 느끼고 시위에 참가했다가 머리에 총상을 입어야
했다.
- 김무신 누나 인터뷰 총성이 양 사방에서 나고 난리라요. 사람들이 다 죽었다고 고만 그러니까
미칠뿌는거라. 다음날 아침 날이 세서 나가니께 시체가 많이 잡혀 있단다. 그런 소문이 있고 별 희한한 소리가 다
들리는거라요.
17 죽은 김영길 사진 들어오고 이날 경찰의 발포로 10여명의 사망자와 70여명의 부상자가
발생한다.
거리로 뛰쳐나와 자유를 외쳤던 김영길군.
그 역시 가슴에 총상을 입고 끝내 숨을 거두고 만다. 그때
그의 나이 열여덟이었다.
- 김영길 누나 인터뷰 한참 걸어 가다가 보면 신마산이라고 나와요. 그 앞에 큰
광징이었어요. 큰 광장 앞에 서 있었는데 불꽃이 나오더라구요. 그래서 뒷골목으로 숨었죠.. 잠을 안자고 걱정하고 있는데 그 소리
들으니 얼마나 놀랐겠어요. 많이 놀랬죠. 그러고 어머니는 내 가슴 아프다. 등어리 뜨겁다 하시다가 돌아가셨죠. 우리 아버지는 혈압에
돌아가셨죠. 다 돌아가셨어요.
12 신문기사, "선거에 영향없다" 그러나 자유당 정권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야당의
선거 무효주장에 대해 무효선언을 할 자격이 없다며 일축했다.
11 신문기사, "이대통령 사선확정" 그리고 온갖 부정투표
작전으로도 안심할 수 없었던 자유당은 득표수까지 조작하는 개표부정을 자행한다.
10 신문기사, "이승만 92%, 이기붕
78%" 그 결과, 자유당 정권은 이승만 92%, 이기붕 78%라는 압도적인 승리를 얻게 된다.
7 국무회의록 보이고
3월17일. 3.15부정선거이후 처음으로 국무회의가 열렸다.
14 3월17일자 국무회의내용 보이고 그런데 이날 회의는 유혈로
얼룩진 마산사태에 대한 언급없이 선거승리에 대한 이승만 대통령의 격려사로만 이어졌다.
20 국무회의록 펼쳐져 있고 이승만
대통령은 유혈사태 직후 험악했던 당시 상황을 전혀 모르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마산사건의 책임을 자유당에 밀고 있는
것은 당치 않은 일이라며 민주당에게 책임을 전가시켰다.
16 이미지 재연, 빈 국무회의실 이처럼 이승만 대통령을 포함한 자유당
정권과 민심 사이에는 이미 돌이킬 수 없었던 엄청난 괴리가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 ST 4.
#MC+ 국무회의록
백으로 걸어나오며 멘트
3.15부정선거로 유혈사태까지 빚은 상황 속에서도 이승만 대통령은 마산사건의 책임을 자유당에 밀고
있는 것은 당치 않은 일이며 국민들의 소요를 선거에 들뜬 국민으로 파악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이승만 대통령과 자유당
정권이 민심을 제대로 읽지 못하는 사이 정국은 또다른 국면을 맞게 됩니다.
#60년4월11일자 김주열 관련 신문기사
떠오르고 바로 김주열군의 죽음입니다.
3.15 부정선거이후 실종된 지 근 한달만인 4월11일. 눈에 최루탄이 박힌
김주열군의 시신이 마산 앞바다에서 발견된 것입니다.
(신문 쳐다보며) 당시 신문을 보면 김주열군 머리에 박힌 최루탄의
크기며 그 각도까지 자세히 나와 있는데요.
열일곱살의 나이에 남원 고향땅을 떠나 마산으로 유학길에 오른 뒤 이렇게
처참한 죽음을 맞이해야 했던 김주열군의 죽음은 온 마산을 울분에 떨게 했으며, 전 국민의 시선을 마산으로 집중시켰습니다.
------------------------------------------------------------------------------------- VCR
4.
7 MBC 외경 지난 3월- 마산에 있는 한 방송국에서 40여년동안 세상에 묻혀졌던 음반 하나가
발견된다.
8 레코드 찾는 피디 학생시위를 부추긴다고 해서 5.16군사쿠데타이후 금지곡이 됐던 노래였다.
3
청춘등대, 손인호 가요힛트앨범 보이고 손인호라는 60년대 가수의 가요힛트앨범-
12 수록곡 리스트보이고 노래는 거기에 수록돼
있었다. 마지막 "남원땅에 잠들었네" <남원땅에 잠들었네>-라는 제목의 이 노래는 한 사람의 죽음을 추모하는
곡이다.
8 "남원땅에 잠들었네" 가사 F.S 3.15부정선거로 인해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이한 김주열군- 그의 시신이
마산 앞바다에서 발견되고,
7 작사 차경철, 작곡 한복남 보이고 2개월 뒤- 한복남씨가 곡을 붙이고 차경철씨가
가사를 써서 만든 것이다.
- 작사가 인터뷰 김주열 열사의 시신이 바다에 떠올라 가지고 그게 방송과 신문으로 전국으로
올라가서 모든 국민이 다 울고 했다. 그때 조직위원이 이런 일은 있어서는 안될 일이다 해서 그 당시에 동덕 레코드사 아미동에
한복남선생님과 같이 있으면서 신문을 봤거든. 그래서 선생님 이런 노래 만들면 어떻겠냐니깐 함 해보라는 거다. 그래서 시 쓰는데 한
5분-10분 밖에 안걸렸다. 원통하게 죽었구나. 억울하게 죽었구나...
14 LP판 돌아가고 (노래 듣다가-"남원땅에
잠들었네")
6 LP판 위로 김주열 시신 사진 나오고 3.15부정선거를 온몸으로 부정했던 사람들-
2 LP판 돌아가고
(노래 듣다가-"남원땅에 잠들었네")
4 LP판 위로 김주열 묘소 사진 나오고 시대의 거대한 폭력에 맞서 저항의 목소리를
외쳤던 사람들은 그렇게 죽어갔다.
2 LP판 돌아가고 (노래 듣다가-"남원땅에 잠들었네")
4 LP판 위로
시위군중 사진 나오고 자식과 형제를 가슴에 묻어야 했던 사람들-
2 LP판 돌아가고 (노래 듣다가-"남원땅에
잠들었네")
6 LP판 위로 고문경찰 처벌하라 쓴 사진 매일 울분에 젖어 사람들은 거리로 나갔다
2 LP판 돌아가고
(노래 듣다가-"남원땅에 잠들었네")
5 LP판 위로 시위군중 사진 나오고 그러나 사람들의 가슴 속에 못박힌 상처는 쉽게
아물지 않았다
7 국무회의록 보이고 이처럼 3.15부정선거이후 일어난 일련의 사태에 대해 자유당 정권으로서는 어떤 식으로든
수습해야 했다.
12 4월12일자 국무회의록 보이고 그러나 현실을 무시한 채 시국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부족했던 이들은
사태수습 역시 엉뚱한 방향으로 몰고 가고 있었다.
4 "공산계열..." 자막 뜨면 (자막 보고)
5 국무회의록
옆페이지로 이동 마산사태를 공산계열의 책동으로 호도하고 나선 것이었다.
3 문교 자막 뜨고 그것은 비단 한사람만의 생각은
아니었다.
4 "배후에 공산당이..." 자막 뜨면 (자막 보고)
12 신문기사, "이대통령, 정국안정을 강조" 이승만
대통령 역시 정국 안정을 강조하며 공산주의가 개입된 것으로 보고, 폭동 마산사태를 폭동으로 단정, 관련자들을 보안법으로
처벌한다고 밝힌다.
10 사진자료, 사람들 모여있고 경찰 보이고 그리고 주모자들을 색출한다는 이유로 무고한 학생들과 시민들을
닥치는 대로 연행해 고문을 자행했다.
13 사진자료, 경찰에 잡혀간 정경도 Z.I 이처럼 자유당 정권은 힘으로 시민들의
저항을 누를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정경도 자막 뜨면 당시 민주당 마산시지부 감찰이장이었던 정경도씨 역시 간첩으로
몰려 경찰에 연행되어 갔다.
정경도 수갑찬 자국 보이며 (현장음 살리고-수갑찬 자국이 있다...)
5 뒤목에 맞은
자국 보이고 그리고 그때 당한 고문의 흔적은 아직까지 남아 있었다.
맞은 자국 만져보고 (현장음 살리고-이게 지금 맞은 거냐?
응)
5 얘기하는 정경도
- 정경도 아들 인터뷰 당시 신분으로서는 국제 공산당 지령을 받고 거기서
간첩두목이다 해가지고 무겁게 다뤘다.
18 신문기사, "주임등 3명이 때렸다" 그러나 전국에서 몰려든 신문기자,
국회조사단, 대한변호사 협회 등 각계의 진상규명 노력으로 경찰이 은폐하려던 잔혹상은 낱낱이 드러난다.
10 신문기사,
"발사된 총탄은 458발" 결국 경찰의 발표는 모두 날조된 허위사실임이 "밤 7시경부터 11시10분까지" 밝혀지게 되고 검찰은 발포
명령자와 고문경관 색출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7 사진자료, 최인규내무 3월23일 최인규 내무장관 역시 사태의 책임을
지고 사임한다.
14 자료화면, 행방불명자 찾아내라라는 피켓 그러나 아직 풀리지 않은 문제가 남아 있었다. 바로
행방불명자 문제였다. 사태후 돌아오지 않는 아들, 딸을 찾아내라는 어머니들의 절규가 마산 시민들의 가슴에 응어리로 남아
있었다.
4 자료화면, 마산 앞바다 보이고 그런데 4월11일. 마산 앞바다에서 시신 한구가 떠오른다.
11
사진자료, 김주열 시신 3.15부정선거이후 실종된 지 근 한달만에 발견된 김주열군의 시신- 가족들은 물론 시민들은 경찰의 잔혹함에
치를 떨었다.
- 김주열 누나 인터뷰 꿈인지 생신지 애가 곧 들어올 것도 같고. 참 이럴 수가 있는가 세상에 사람,
인간사는데 이럴 수도 있는가 해서 말할 수도 없었지.
4 자료화면, 김주열 시신보이고 시민들은 김주열의 시신이 안치된 도립
마산병원으로 몰려들었다.
30 자료화면, 김주열 시체 운반하고
남원에서 마산까지 고등학교 입시를 보러 왔던 김주열군의 처참한 죽음은 온 마산을 울분에 떨게 했다.
그리고 그것은
제2차 마산사태를 불러 일으킨다. 4월11일 밤, 통행제한 조치가 취해진 가운데 경찰의 발포로 두명의 시민이
사망한다.
그러나 다음날부터는 시민들이 시위의 주도권을 완전히 장악해 오히려 경찰력을 마비시키는 지경까지 치닫게
된다.
12 4월12일자 국무회의록 펼쳐져 있고 제2차 마산사태가 일어나고 다음날인 4월12일 경무대에서 대통령이 주재하는
국무회의가 열렸다.
그러나 시국을 바라보는 자유당 정권의 인식은 변함이 없었다.
6 "체신" 자막 뜨면
여전히 공산당의 책동과 배후조종문제로 사태를 몰고 갔다.
11 "재무" 자막 뜨면 그리고 더욱더 강경책을 쓸 것을 제의하기에
이른다.
14 이미지 재연, 국무회의 F.S 이처럼 국무위원들은 이날 역시 문제의 본질은 덮어둔 채 사실을 호도하기에
급급했다.
그런데 이 자리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뜻밖의 얘기를 꺼낸다
12 "대통령" 자막 뜨면
3.15부정선거이후 처음으로 선거에 대해 강한 의혹을 제기했던 것이다- 그리고 김주열군의 죽음을 언급하면서 처음으로 대통령
사임의 뜻을 비춘다.
9 "이승만이 대통령을 내놓고..."자막 뜨면 (잠시 보다가) 과연 이승만 대통령의 이같은 발언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 이달순 교수 인터뷰 강제로 몰려나오는 건 생각을 못했을 지 모르지만 위기의식, 이거 내가
잘못하다가는 쫓겨날지 모르는데 내가 관둬야하지 않겠느냐하는 문제가. 그래서 거기다 불쑥 내놓기는 내가 바꿔야 되는 문제도 있을 지
모르겠다고 국무회의에서 얘기를 했거든. 그런 걸로 봐서는 감은 잡았다고 그렇게 평가를 하겠다.
9 신문자료, "이대통령
2차마산사건에 언명" 그러나 다음날. "앞으로 다시는 없도록" 이승만 대통령은 마산사건에 대해 유감의 뜻과 함께 국민들의 협조를
당부하는 담화문만을 발표한다.
13 신문자료, 담화문 그리고 자유당 정권은 여전히 시위군중을 폭도로 몰고, 공산당의 책동에
의한 것으로 몰고 갔다. 이러한 자유당 정권의 태도는 국민의 분노를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14 사진자료, 성명서
읽는 고대생들 4월18일- 마침내 서울에서도 대규모 시위가 일어난다. 고려대학교 학생들이 마산사건 책임자 처단, 경찰의
학원출입금지 등을 요구하며 평화적인 시위에 나섰던 것이다.
15 사진자료, 쓰러진 고대생과 사람들 그러나 시위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학생들이 경찰의 비호를 받는 깡패들에게 습격을 당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이것은 자유당 정권의 종말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 ST 5.
#MC+ 효자동
전차종점 C.G 백으로 걸어나오며 멘트
이곳은 당시 효자동의 전차 종점을 컴퓨터 그래픽으로 재현한 것입니다.
3.15부정선거로 인해 빚어진 마산에서의 첫 유혈사태를 시작으로, 김주열군의 죽음과 4월11일 제2차 마산사태,
그리고 4월18일 고대생들의 데모로 이어진 혁명의 물결은 4월 19일 바로 이곳 효자동 전차종점으로 노도와 같이 밀려들게 됩니다.
바로 경무대와 인접한 이곳 효자동 전차 종점은 시민들에게는 최종 목표지점이자 경찰들에겐 최후의
저지선이었던 곳입니다. 그래서 바로 이곳에서 이른바 피의 화요일이 시작된 것입니다.
#김치호 사진
떠오른다
당시 수학을 전공하는 대학 3학년이던 김치호군- 그 역시 이곳에서 총상을 입고 숨을 거뒀는데요.
#일기장
안네 프랑크 사진과 시와 노래 떠오르고
그가 죽기 전 남긴 일기장입니다. 여기에 보면 그가 좋아하는 안네 프랑크의
사진, 그리고 그가 즐겨 부르던 노래와 시가 적혀 있습니다.
이렇듯 평범하고 다정다감했던 그도 3.15부정선거이후 정치적
상황에 대해서는 분노와 울분의 마음을 갖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일기장 마지막 내용
그리고 그는 마지막
일기장에 "오늘도 나는 진리를 위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련다"라고 써놓고 4.19에 참가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비단 김치호군 뿐만
아니라 당시 4.19에 참가했던 많은 학생들과 시민들의 마음이기도
했습니다. ------------------------------------------------------------------------------------- VCR
5.
12 자료화면, 스크럼 짜고 데모하는 군중들 4월19일 아침부터 사람들은 거리로 나섰다. 서울대학교 학생
3천여명과 각 대학교 학생들이 속속 시위에 참가한다.
17 10시30분 자막 뜨면 그들은 처음에는 국회의사당을 향해
모여들었다. 주동자도 없었고 조직적으로 움직이지도 않았던 시위였다. 시간이 가면서 시민들도 시위에 적극적으로
합세하기 시작했다. 학생들이 앞장서고 시민들이 뒤따랐다. 그리고 마침내 시위대들은 국회의사당에서
경무대로 향했다. 22 이미지 재연, 국무회의 바로 그 시각- 경무대에서는 자유당 정권 하에서 대통령이 주재하는 마지막
국무회의가 열린다.
그런데 이승만 대통령은 이날 따라 자신의 거취문제에 대한 여론의 반응에 신경을 쓰며, 극도의 불안과
초조감을 느끼고 있었다.
20 국무회의 그러나 자유당 정권은 최후까지, 시민들의 요구를 무시하고 외면한다. 이날 역시
사태의 배후조종문제만 따지고 시국수습문제는 진지한 토론에 부쳐지지 못했다. 못했다.
- 서중석 교수
인터뷰 4.19때만 하더라도 강경파가 득세하는 속에서 강경일변도로 나가면 되는 것이다. 누르면 되는 것이다. 이런 사고에서 벗어나질
못하고 있었다라는 것은 그 당시 내무부 여러 조치 발표라든가 이런 것을 통해서 알 수가 있지. 사실 이 국무회의가 열릴 때도 그날
그렇게 심각한 시위가 서울에서 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일어나고 있고 그리고 이제는 오후 조금 지나면 피의 화요일이 되는 경무대 일대에서
엄청난 희생자가 나온다 하는 것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점이 있다.
14 자료화면, 경찰 몽둥이로 때리고 이처럼 자유당 정권이
자신들의 권력이 시민들의 도전에 무너지리라 생각하지 않았던 그 시각- 시위대는 경무대를 목표로 일진일퇴를
거듭하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3 시위 군중 모습 보이고 (현장음 살리고-총 소리)
5 차에 올라탄
시위대 모습 오후 1시40분 마침내 경찰이 발포를 시작한 것이다.
6 겁에 질려 비명지르는 여자 (현장음 살리고-비명
소리)
16 쓰러진 사람, 옮기는 사람들 삽시간에 경무대 근처는 아수라장이 되었고 길에는 학생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경찰의 총격에도 불구하고 이날 시위는 시내 곳곳에서 계속되고 있었다. 그리고 이날 각 지방에서도 격렬한 시위가
벌어졌다. 12 신문자료, "계엄령선포" 오후 4시30분경 자유당 정권은 계엄령을 선포하기에 이른다.
21 자료화면,
탱크 앞세우고 계엄군 들어오고 계엄군이 시내로 들어오자 시위대는 대부분 흩어졌고 상황은 진정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산발적인 시위는
여전히 곳곳에서 계속되고 있었다. 학생과 시민들은 계엄군의 태도가 어떨지 주시하고 있었다.
11 사진자료, 계엄군과
탱크 그런데 4월19일밤 약1500명의 시위대는 시체 한구를 지키며 고대 교내에서 농성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이때 계엄군 사단장,
조재미씨가 방문한다.
- 조재미 인터뷰 군대는 국토방위가 제1임무고, 군대는 그 다음에는 국민의 군대라 말이지. 다시 말하면
여러분들의 군대다. 내 임무는 질서유지하러 왔다. 또 한가지 여러분이 생각할 것은 여러분의 부모 형제, 처자의 안위를 여러분들을
염려하고 있단 말이야. 그러니까/ 자기들도 대화해서 해결할 수 있을거라 느꼈을 거예요.
11 신문자료, "송사령관,
훈령 일호내용 발표" 다음날 송요찬 계엄사령관은 훈령 일호로 발포위반자는 엄벌에 처할 것이며, 혐의가 없는 사람은 조속히 석방할
것을 밝힌다. 이런 계엄군의 자세는 일주일동안 지속되었다.
- 박태균 교수 인터뷰 이승만 대통령이 자기 친위대라고
하는 헌병 사령부하고 특무대를 가지고 있지만 기타의 모든 군대를 장악할 수 없었다. 당시 60만명이 넘는 군대인데 그 안에는 이승만
정권의 부정부패에 대해서 혐오하는 그런 군인이 상당히 많았다. 즉 이런 결정적인 순간이 왔을 때 국군 통수권자의 명령을 따르지
않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거다.
5 자료화면, 유리창 깨진 자유당 중앙당부 한편 정치권은 4월21일부터 움직이기
시작했다.
7 자료화면, 회의하고 국회는 서둘러 시국대책위원회를 구성해 사태수습 방안에 대해 논의하기에
이른다.
4 신문자료, 이대통령, 국무원개편 이러한 가운데 이승만 대통령은 이기붕 부통령 곧 송표 F.S "자유당 당무회
완전합의" 당선자에게 사퇴를 권유한다. 9 신문자료, "4.19비상사태인책" 그리고 4.19사태의 책임을 지고 전 국무위원들은 사표를
제출한다.
20 자료화면, 이승만 병원방문 이기붕의 사퇴와 전 국무위원의 사표제출로 수습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이승만
대통령은 4.19부상자들을 위문하는 등 사태 수습에 나섰다.
이승만 대통령은 이러한 조치들만으로도 사태가 해결될 수
있으리라 믿었던 것이다.
- 서중석 교수 인터뷰 그때까지도 이승만대통령은 절대권력을 내놓을 생각은 없었던 것 같다. 다만
내각을 교차하고 자유당과 거리를 두고 그러면서 경우에 따라서는 내각책임제같은 걸로 개헌을 하고 이런 식으로 사태를 수습해서 자신의
대통령 직위는 계속 갖겠다 이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18 자료화면, 대학 교수들 회의하는 모습 그러나 혁명의 물길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4월25일- 대학교수들은 회합을 가졌다. 당초 5,60명이 모일 것으로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300명에 가까운 교수들이 모였다. 이들은 대통령의 하야 요구를 골자로 하는 시국선언문을 채택하고 시위에
나선다.
- 이항녕 교수 인터뷰(테잎 13. 0511) 죽은 학생이 피의 대가를 받아내야 한다. 받아낼려면 결국 정권을
하야시키고 민주정권을 세워야 한다. 해가지고 학생의 피를 보답하자는 말이 떠돌면서 성명서로는 부족하니까 나가서 시위를 해야 되겠다.
5 사진자료, 피켓 들고 시위하는 교수단 교수단은 학생들의 피에 보답하라는 플래카드를 앞세웠다.
8 자료화면,
박수치는 시민들 이날 교수들의 데모는 가라앉은 듯 보였던 분위기에 다시 불을 붙였다. 그리고 이때 처음으로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를
정식으로 요구하게 된다.
- 이항녕 교수 인터뷰 중간중간에 구호가 이승만 물러가라, 우리도 부르고
시민도 부르고- 국회의사당 앞에 가니깐 사람들이 늘어나서 꽉 차서.
11 자료화면, 데모군중들 승리의 화요일이라 불리는
4월26일. 이날은 대규모 군중들이 참여한 가운데 새벽부터 시위행렬이 계속됐다.
14 자료화면, 바리케이트 치고 막고
선 군인들 이때 시위대는 대표를 구성해 대통령과의 면담을 요구한다.
마침내 유일라씨를 비롯한 5명의 학생
시민대표에게 대통령과의 면담이 허용된다.
- 유일라 인터뷰 남산을 쳐다보며 내가 물러나야 되나. 그럴 때 내가 눈물이
나더라. 각하께서 물러나야 한다. 국민이 원하는 것 같애. 예, 그렇습니다. 국민이 원한다면 물러나야지, 국민이 원한다면 물러나야지.
두 번을 했다.
12 시민대표 육성테이프 돌아가고 (현장음 살리고-대통령께서 말씀하시길 국민이 원한다면 무엇이든
들어주겠다며....지금 너무나도 흥분된 상태에 있다.)
19 자료화면, 환호하는 시민들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를 결정했다는 것은
면담을 마친 시민대표들에 의해 학생과 시민들에게 알려지게 된다. 그리고 이날 10시30분 이승만 대통령은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직을 사임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한다
4 자료화면, 이화장으로 가는 이승만 차 4월27일- 이승만 대통령은 대통령
사임을 공식 발표한다.
9 손 흔드는 이승만, 환호하는 시민들 12년간 걸친 자유당 독재정권은 드디어 그 많은 희생을 치르고
막을 내리게 된 것이다. ────────────────────────────────────────── ST 6.
#국무회의 백으로 국무회의록 보이고 MC 걸어나오며
이렇게 해서 1948년8월15일 수립된 제1공화국은
12년만에 막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국무회의록 4월19일이후 넘겨보면 백지 국무회의록 덮어지고
그리고 제1공화국
국무회의록 역시 4월19일을 마지막으로 끝을 맺게 되는데요.
우리는 이 국무회의록을 통해 당시 자유당 정권과 민심 사이에 큰
괴리가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3.15부정선거이후 유혈사태까지 빚으며 계속해서 선거무효와 독재정권 타도를
외치는데 불구하고 이승만대통령과 자유당 정권은 시종일관 데모사태에 대해 민주당과 공산당이 배후 조종해 발생한 것으로 문제를
호도시켜 나갔던 것입니다.
이처럼 이승만 대통령과 자유당 정권은 권력욕에 사로잡혀 민심을 제대로 읽지 못하고, 오히려
힘으로 누르려고만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끝내 민심의 소재를 깨닫지 못하고 자유당 정권은 최후를 맞이하게
됐는데요.
만약 이승만 대통령과 자유당 정권이 당시 사람들이 무엇을 원하는 지, 사람들의 마음을 제대로 파악하고
진정으로 받아들였다면 자유당 정권의 말로는 분명 달라졌을 것입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