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갈매못이란 지명은 갈마연(渴馬淵)의 뜻으로 목마른 말이 갈증을 푸는 곳이란 뜻인데 성지 산세가 갈마연가 비슷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갈매못 순교 성지는 충남 보령시 오천면 영보리 375- 2에 위치하는 곳으로 1866년 병인박해 500여명의 무명순교자가 순교한 곳이며 서양선교사로서 다블뤼 안주교, 오메르트 신부님, 위앵 민신부님, 세분이 순교하였으며 연풍출신 황석두 루까, 배론 회장을 지낸 장주기 요셉이 순교를 당한 곳이다. 다블뤼 주교님은 내포지방 신리에서 사목하시며 한국 천주교사에 대한 고증을 수집한 후 교회사를 집필하여 그 일부를 파리외방전교회에 보내 조선시대 천주교사를 생생하게 우리들이 접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든 장본인이다. 신리에 머물며 집필과 사목활동을 하던중 사제관이 화재로 소실되어 귀중한 자료들이 잿더미로 변해 버리기도 하였다.
한국천주교사를 집대성한 ss 달래신부님은 그의 저서 하권 434페이지에 갈매못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형장으로 택한 곳은 바닷가 모래사장이었다. 조선 5대 대복구장을 지낸 다블뤼주교 기념관은 주교님의 순교를 기념 1999년 주교모관을 본을 따 지은 교회건축물을 (경당과 기념관)2006년 10월 승리의 성모성당으로 재건축한 후 봉헌하게 된 곳이다. 기념관 안에는 4대 대목구장을 지낸 베르뇌, 다블뤼 주교를 비롯하여 다블뤼 주교가 21년간 집필한 책 열권중 신명초행, 회죄직지, 영세대위, 성찰지략과 오메르트 신부님이 사용했던 제병기, 회중시계가 전시되어 있다. 또한 다블뤼 주교님의 중백의는 사제수품 당시 입었던 중백의오서 안 깃에 AD 신부님을 뜻하는 이니셜이 새겨져 있다. 이 유품들은 2004년 다블뤼주교 출신 불란서 아미앵 교구 교구장 장 룰 부이에레 주교님과 교구 사제단, 신자들이 방한하여 기중하였다.
순례일시: 2015년 7월 18(토) 오전7시 모이는 장소: 반포대교 남단 현대증권 앞. 준비물: 타우 십자가, 묵주, 미사참례준비, 모자, 썬그라스, 행동식, 생수, 개인물품 등등
일정표.
2015년 07월 성지순례& 걸음여행 일정표 일 시 행 선 지 세부 사항 비 고 2015,7,18(토)07:00 현대증권 앞 집합 07:00 현대증권 출발 07:40 기흥휴게소 빌린다 자매님 픽업 08:20 행담도 휴게소 15분간 휴식 10:00 갈매못 성지 탐방, 미사참례, 점심식사 13:00 성지 출발 14:00 안면도(해변길 걷기) 몽산포 지원센타 출발 A팀 안면도(해변길 걷기) 청포대해변 B팀 18:00 드르니항 회합및 석식 20:30 귀경
많은 신자들이 희생되는 것을 보다 못한 다블뤼 주교님은 스스로 자수한다, 마침 이 소식을 들은 오메트르 신부와 위앵 신부도 자진하여 자수한 후 한양으로 압송된다. 이 때 황석두와 장주기도 함께 처형된다. 한양에서 처형되지 못하고 보령 갈매못까지 내려와 순교한 것은 당시 절대권력을 쥐고 있던 대원군의 뜻이었다. 국혼을 앞둔 고종을 위해 한양에서 피를 뿌릴 수 없다는 의지와 전국 곳곳에 세운 척화비와 유관성이 있다. 다섯 순교자들의 시신은 황석두 루까는 가족들에 의하여 연풍에 안장되었지만 네분을 사형장 부근에 가매장된 후 다시 홍산, 일본 나가사키를 전전하다. 명동 주교좌 성당 지하와 절두산 성지에 모셔져 있다.
조선 5대 대목구장 안토니오 다블뤼 주교께서 마지막 회유문에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 주셨다.
- 떠나도 너희를 자주 생각하여 그리워 하고, 너희를 위하여 항상 기구하고, 너희 영혼의 신익을 항상 돌아 볼 것이요. 멀리서라도 통공하는 은혜로 너희 가운데 있음과 같으니, 나를 생각하여 너희 본분을 열정으로 지켜라. 환난 이후에는 잊기 쉬우니, 어려운 가운데 너무 겁내고 낙심하지 말며, 부디 사람의 힘으로 구해주기를 생각하지 말고 오직 주님의 도우심만 바라고 구하며. 너희들이 주님을 위하여 당한 것을 주님께서 알고 계시니 당신 인자하신만 믿고 기다려라 - 중략.
그리고 자서전 형식의 글로 자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밝히고 계십니다.
나는 마리 니콜라 앙투 안 다블뤼( Marie Nicolas Antoine Daveluy)로서 1818년 출생하여 1866년 순교로서 생을 마감합니다. 한국 이름으로 안돈이(安敦伊) 입니다. 나는 1818년 3월16일 프랑스 아미앵(Amiens)에서 태어나 소신학교를 졸업 후 1834년 10월 파리교외 잇시(Issy) 신학교에 입학하여 2년 동안 철학을 공부하였고 파리 쉘 쉴피스(Saint Suipice) 신학교에 입학하여 5년 동안 신학을 배운 후 1841년 12월18일 사제로 서품되었습니다. 서품 후 르와(Roye) 본당의 보좌로 20개월 동안 사목하고 1843년 10월4일 파리외방전교회에 입회하여 1844년 극동선교사로 임명되었답니다. 1845년 8월초 페레올 주교님과 상해로 가서 8월17일 김가항성당에서 거행된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서품에 참석뒤 8월24일 상해에서 30리 떨어진 황당 신학교 성당에서 첫 미사를 집전한 김대건 신부를 보좌하였습니다. 내가 가야 할 선교지 조선의 첫사제를 첫사제의 첫미사를 보좌할 수 있어 얼마나 큰 감동을 얻었는지 모릅니다. 저보다 먼저 조선에 입국하여 방인사제를 길러낸 여러 선교사들의 노고를 생각하며 나는 과연 조선에 가서 이렇게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을런지 고심하기도 하였습니다. 하느님만이 모든 것을 아시겠지요. 마침내 8월31일, 나는 조선을 향해 출발하였습니다. 페레올 주교, 김대건신부와 함께 상해를 떠나 어려운 항해 끝에 10월 12일 저녁 8시경 강경부근 황산포에 상륙했습니다. 조선에 입국한 후 페레올 주교님의 명에 따라 교우촌으로가서 조선말을 배우고 한편으론 1846년 1월부터 교우촌 공동 주변의 신자들에게 성사를 주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수리골에서는 몇몇신자들을 모아 신심단체인 성모성심회를 조직하였습니다. 그러나 김대건 신부의 순교 이후 박해를 피해 도망 다니다. 큰 고초를 겪었고 당시 고초로 무릎인대가 늘어나 평생 동안 보행이 불편하였습니다. 1850년도에는 병이 너무 위중해 최양업신부에게 병자성사를 받기도 하였답니다.
그러던중 1857년 3월25일 한양에서 대목교구장 베르뇌 주교로부터 승계권을 가진 부주교로 서품되었습니다. 서품예식에는 메스트로 신부, 프티니콜라 신부와 최양업 신부가 참석하였습니다. 오밤중 한양의 회장들과 신망있는 신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주교관에서 이루어졌는데 꼭 그 모습은 로마의 카타콤바를 연상 시켰습니다. 그 후에는 1856년부터 조선의 순교사를 만들 목적으로 사료를 수집하는 일에 본격적으로 메달렸습니다. 이와 더불어 신임교우들을 위한 교리서도 편찬하였습니다. 그리고 1862년 그 동안 수집한 작성한 조선교회사와 순교자들에 대한 자료를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장 알브랑 신부에게 보냈습니다. 이 자료들이 바로 여러분들이 다를뤼 비망기라 부르는 책입니다. 애통하게도 비망기를 쓰면서 모았던 한국 순교자 관련 자료가 주교관이 불이 나면서 소실되어 너무 가슴아펐으며 마음을 한동안 다슬릴 수 없었습니다. 후에 달래 신부가 비망기를 바탕으로하여 한국천주교회사를 썼다니 하느님의 계획은 오묘하심을 깨닫습니다. 1866년 2월, 베르뇌 주교가 서울 태평동 주교댁에서 체포되어 3월7일 새남터에서 순교하십니다. 저는 그래서 대목구장직을 승계하여 제 5대 조선대목구장이 되었지만 재임기간을 불과 23일에 불과 하였습니다. 베르뇌 주교가 순교한 후 나역시 4일 뒤 3월11일 거더리에서 체포되어 위애신부, 오메트로 신부, 그리고 산자 황석두, 장주기와 함께 갈매못으로 이송되어 나의 나이 48세에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순교를 받아들입니다. 사제로서 25년 생활중 조선에서 생활은 21년 이었습니다.
민 위앵 마르티노 루카 (Huin Martin Luc)
민 신부는 프랑스 랑그르 교구 출신으로, 1861년 사제가 되었고 1865년 파리 외방 전교회 선교사로 백, 김, 서 신부와 함께 조선에 파견되었다. 충청도 내포에 머물며 안 주교에게 한국말을 배운 뒤 홍주(洪州) 황무실에 부임하여 전교하였다. 1866년 3월 11일 안 주교가 체포되자 자수하여 안 주교, 오 신부와 함께 서울로 압송되었고, 갖은 고문을 겪은 뒤 3월 30일 갈매못에서 군문효수형을 받음으로써 30세의 나이로 이 땅에 신앙의 씨앗을 뿌리고 주님의 품에 안겼다.
성 마르티노 루카 위앵(Martin Luc Huin) 신부의 세례명은 마르티누스 루카(Martinus Lucas)이며, 한국 성은 민(閔)이다. 그는 1836년 프랑스 랑그르(Langres) 교구의 기용벨(Guyonvelle)에서 태어났다. 포도밭을 경작하던 그의 부친은 항상 그의 가문에서는 성직자와 수도자가 많이 배출되었음을 자랑하면서 9남매가 모두 훌륭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교육시켰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막내로 태어난 위앵은 1851년에 랑그르 소신학교에 입학하였고, 1856년 10월에 랑그르 대신학교에 입학하였으며, 1861년 6월 29일 사제로 서품되어 랑그르 교구의 사제가 되었다.
오메트르(베드로 1837-1866)
한국성은 오(吳), 파리외방전교회 소속으로 1866년 병인년에 순교한 프랑스인 <약 전>
오메트르(베드로 1837-1866)
한국 성이 오씨인 베드로 오메트르는 1837년 4월 8일 앙굴렘 교구에 있는 애젝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첫 아들이었는데 이 집안은 넉넉지 못한 집안이었으나 자녀는 다섯 명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조그마한 땅을 경작하면서 나막신을 만들었다.
1862년 6월 사제서품을 받은 베드로 오메트르 신부는 8월 3일, "천주님께서 당신의 이름을 사랑하시고 찬미하게 하라고 저를 보내시는 나라는 조선입니다."하고 아버지에게 알렸다. 그 뒤 고국을 떠나 패낭 신학교에서 공부하고 있던 두 조선인 신학 생을 데리고 그 다음해인 1863년 6월달에 중국 어선을 타고 연평 바다를 거쳐 비교적 무사히 1863년 6월 23일 그의 전교지방에 도착하게 되었다.
조선에 도착한 뒤에 수원 샘 골에 배치된 오메트르 신부는 평소와 같이 끈기 있게 조선말을 배웠고 그런 다음 거주지가 미리 내로 되어 있는 구역에서 성무 집행을 시작했다. 그러다가 얼마 안 되어 다불뤼 주교가 활동하는 신 리 마을 거더리에서 꽤 가까운 곳인 내포지방에 자리잡았다.
그의 성직수행을 교우들은 매우 훌륭하다고 생각했고 오메트르신부를 너그럽고 착한 사람으로 보았다. 베르뇌 주교도 그의 성직수행을 높이 평가했는데 오메트르 신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전해 주었다.
1866년 초 서울을 중심으로 박해가 가해지기 시작하였고 베르뇌 주교 등이 잡히게 되었다. 이런 소식을 듣고 교우들이 불안해 하자 그는 교우들에게, "걱정 마시오. 외교 인들에게 천주교에 대해 소리 높이 말해 줄 때가 왔습니다."하고 말했다.
그래도 그는 자문을 구하기 위해 거더리에 있던 다블뤼 주교를 만나러 떠났다. 오메트르 신부를 만난 다블뤼 주교는 인근마을 세거리에서 활동 중이던 위앵 신부도 불러서 여러 가지 의논을 하였다. 이 때가 다불뤼 주교가 잡히기 이틀 전인 3월 9일이었다. 다블뤼 주교나 두 신부 모두 이번 박해를 모면하리라고는 생각할 수도 없을 만큼 박해는 심각하였고 그런 불안 속에 그들은 일단 헤어졌다.
이 때 오메트르 신부는 소덜로 갔고 위앵신부는 세거리로 돌아갔다. 그 뒤 오메트르 신부는 다블뤼 주교와 함께 밤을 이용하여 배를 타고 조선을 탈출해 보려고 하였으나 역풍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자 그는 다시 그가 머무르던 교우촌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 곳에서도 오래 숨어 있을 수 없었고 오메트르 신부 자신도 숨어 있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곧 다블뤼 주교를 찾아 거더리로 향했는데 그가 머무르고 있던 마을을 떠나기 전에 만일의 경우에 대비해서 성물들을 어느 우물 속에 감추었다.
그것들을 가지고 떠날 수는 없었고 발각되면 교우들에게 누가 될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서 복사 이 빈첸시오를 데리고 신리를 향해 떠났다. 어느 갈림길에 이르렀을 때 오메트르 신부는 빈첸시오에게 "나는 신 리 쪽 거더리로 갈 텐데, 당신은 나하고, 같이 거더리로 가든지 공주 쪽으로 가든지 마음대로 하시오"하고 말했다.
그가 정자나무 곁에 서 있는 것을 한 포졸이 발견하고, 누구냐고 물었으나 신부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그 포졸은 집안으로 들어가, "방금 이상한 사람이 하나 왔습니다"하고 일렀다. 다블뤼 주교가 문을 열어 보고는, "여러 말 하지 말고 저 삶을 들어오게 하시오" 하고 말했다.
그 뒤 서울로 압송되어 오메트르 신부는 그의 어른이요, 아버지인 주교와 같이 문초를 당하고 고문을 받았다. 그리고 군문효수의 사형선고를 받고 400리나 떨어진 사형장인 갈매 못에서 1866년 3월 30일 정오에 주교 다음으로 참수 치명하니 바로 그 날이 예수 수난 날이요 바로 그 때가 예수께서 십자가상에서 운명하신 시간이었고, 그의 나이 29세였다.
1866년 3월 30일 갈매 못에서 처형된 다블뤼 주교, 위앵 신부, 오메트르 신부, 이 세 성직자는 죽기 전에 특히 다불뤼 주교가 옷을 모두 벗겨 버리고 다른 순교자의 옷은 저고리만 벗겼으나 그 날밤에 어떤 악한 무리가 나타나서 남은 옷조차 모두 벗겨 가 버리게 되었다.
따라서 알 몽둥이의 다섯 시체가 이후 3일 동안을 그대로 그 자리에 버려져 있게 되었으나 이상하게도 그 많은 까마귀와 개가 이들의 시체를 조금도 해치는 일이 없었다. 그러던 중 3일 후에 그 근처에 살던 외인들이 이들의 시체를 그 자리에 모래로 묻었으며 황석두 시체만이 며칠 후에 친척이 찾아가고 남은 시체는 그 해 6월 초에 이르러 교우들이 찾아서 그 곳에서 30리쯤 떨어진 홍 산 고을에 옮겨다가 묻게 되었는데 돈이 없어서 관을 마련하지 못하고 무덤 하나를 넓게 판 후 시체를 칠성판 하나씩에 받쳐서 묻게 되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미 죽은 지 두 달이 넘은 이들 시체는 모두 썩지 않고 있었고 다만 위앵 신부의 그것만이 조금 썩기 시작하였을 뿐이었다고 한다. 성인의 유해는 절두 산 순교기념관에 안치되어 있다.
걸음여행 (시간소요와 거리)
몽산포와 청포대를 이어주는 곰솔림의 향긋한 솔내음을 맡으며 사구 모래바람이 만들어낸 폭신하고 편안한 길을 걸을 수 있는 코스 아담하게 들어선 곰솔숲과 탁트인 바다 전망을 동시에 즐길 수 있는 두배 만족 코스 별주부마을의 갯벌과 신온리 마을의 염전, 드르니항의 어항 등 전통적인 어촌마을의 풍경을 흠뻑 느낄 수 있는 마을길 탐방 코스 청포대 구간의 낮은 마을 동산을 넘어가는 탐방등급 하 수준의 등산 코스로 산을 넘어가는 동안 해변을 조망하며 걸을 수 있는 코스 몽산포에서 드르니항으로 이어지는 솔모랫길 코스는 완만한 평지의 곰솔숲길과 마을길로 이루어져 있어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편안하고 포근한 탐방을 즐기기에 적당한 곳으로, 코스 중간에 자연놀이장이 만들어져 우리 전통놀이를 즐기면서 쉬어갈 수 있는 몸과 마음이 건강해지는 최고의 힐링 코스이다. 청포대마을의 전통어로 방식인 독살과 갯벌체험, 신온리 마을의 염전 체험도 가능한 코스로 아이들을 동반한 가족단위 탐방객에게 추천할 수 있고 독살, 갯벌, 염전 체험을 즐기며 어촌마을의 색다른 매력에 빠져볼 수 있는 코스이다.
#. 두 팀으로 나눠 장거리팀과 단거리팀으로 구분하여 걷겠습니다.
A팀 - 몽산포에서 드르니항까지 B팀 - 청포대에서 드르니항까지 |
첫댓글 7월 걸음여행 김정자아네스. 김애경빌린다 신청합니다
황새바위 야외성지에 봉헌할 고상은 6월 걸음여행때 준비하는걸로 알고있으며 종신서약 축하연도 6월걸음여행때 있는줄 알고있습니다만 저가 잘못 알고 있나요? ㅠ ㅠ
죄송합니다~~ 어눌하게 착각을 일으켜.... 수정하였습니다. 꾸벅 버벅(납짝 업드려 인사드리는 소리임)
유남수 참석입니다. 기대 됩니다
감사~ 꾸벅. 해송사이를 걷고 여름날 해변의 기슭을 걷다 낙조구경까지 기대를 갖으며 계획을 세웠습니다. 평화를 빕니다.~~
신입회원 인사드립니다
한운문 루치아임다
7월성지순례와 걸음여행 신청함다^^
환영합니다. 반갑습니다. 언제나 평화의 주인이 되시기 바랍니다.
김 도미나입니다. 야고바 종신서약식에서 뵙고 반가웠습니다. 저도 6월 참여합니다.
7월에 참여한다는 것이 6월이라 하였지요 7월에도 넣어 주십시오
저도 반가웠습니다. 성지순례 잘 다녀 오셨는지요? 6,7월 순례때 뵙겠습니다.
7월 순례여행~참석합니다.
주님은총가득한 하루되세요^^
환영합니다. 그리고 덕담 고맙습니다. 꾸벅
김정란 마틸타 참석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날도 더운데.... 여름 건강 잘 챙기셔요. 꾸벅.
이향임 세실리아 참석합니다
네~~ 수고 많으십니다. 날 더운데... 늘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