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 57장 14절 – 21절
예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회복시키시는 사역을 하실 때 하나님아버지의 이름으로 불리우는 성전에서 두 번에 걸쳐서 일을 행하셨습니다. 바로 성전을 정화시키시는 것입니다. 당시 성전은 제사장들의 돈벌이 수단이 되고 있었습니다. 돈을 바꾸어 주거나 제물을 정하여 줄 때에 많은 이익을 얻어 내는 것입니다. 이것은 강도의 소굴과 전혀 다르지 않는 것입니다. 신앙의 이름을 자기의 배를 채우는 수단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아버지의 이름이 하나님의 백성들로부터 멸시를 당하시는 것을 견디지 못해 하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백성들의 타락을 그대로 묵과 하면서 하나님의 백성들의 회복을 가져 올 수 없기에 예수님은 채찍을 드시는 것입니다.
구약에서는 우리는 에스라를 통한 회복의 역사를 경험하게 됩니다. 에스라는 포로기에서 돌아온 하나님의 백성들을 회복으로 이끄는 상황에서 제일 먼저 한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방신을 섬기는 자들과 통혼한 것이었습니다. 신앙의 대적들이 이 혼인관계를 통해서 성전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에스라는 회복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이끌 때에 이방인인 배우자나 그 사이에서 난 자녀들을 이스라엘신앙공동체에서 쫓아 내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많은 반대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에스라는 기꺼이 대가를 지불하며 하나님의 주시는 말씀을 강독합니다. 그러자 말씀의 비추심을 따라 하나님의 백성들이 가정에서 이방인배우자와 자녀들을 쫓아내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회복으로 나아가는 것을 열망하고 좋아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회복을 훼방하는 것들을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서 회복이 이루어 지게 해 달라고 간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령의 역사를 훼방합니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대적하게 만드는 것들을 향한 원한이 보여지게 해야 합니다. 그 때 우리는 그 원한을 따라 청산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가 그리고 우리 각자가 버려야 할 그리고 돌아 서야 할 것들이 무엇인지 알려달라고 성령님께 구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더러운 옷을 여전히 고집하면서 몸이 깨끗해 지길 바라는 것만큼 어리석은 것이 됩니다. 성령을 대적하는 육체에 속한 것들을 과감히 제거하는 역사가 이루어 져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교회각 지체들은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자기의 이익을 고집하면서 회복을 바라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바벨론포로기에서 돌아온 하나님의 백성들을 회복시키시길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과 이사야 선지자의 열망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잘못 생각하면 성전이 세워지고 제사만 풍성하게 이루어 지면 회복이 이루어 질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회복은 회중 각사람들의 변화이며 회복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오시는 바로 임재의 회복은 임재를 가로막는 것들을 제거하는 것을 먼저 요구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의 영광으로 나아가는 그 길에서 허물어지고 잘못되어진 그 길을 수축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지도자들은 회중들이 자신들의 그 길을 볼 수 있도록 말씀을 선포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보는 것이 관건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회복을 갈망하여 나아오는 자들에게 통회하는 마음과 겸비한 자세를 주십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가로막음으로서 자신과 교회가 처한 상황을 인식하고 하나님을 버린 자들을 향한 아버지의 마음 그것이 바로 통회입니다. 그리고 선포되는 말씀앞에 겸비한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어떤 자들은 겸비함이 없어서 말씀을 판단하고 부드러운 말씀을 요구합니다. 이런 자들은 성전에서 돈을 바꾸어 영리를 취하는 자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통회하는 심령을 긍휼이 여기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영원히 정죄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앞에 통회할 때 하나님은 우리의 진홍빛같같은 죄를 용서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통회하는 자와 겸비한 자세를 가진 자들을 회복하십니다. 탕자가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갈 때 아버지는 그 아들의 모든 것을 회복하여 주십니다. 그러나 큰 아들같은 악인들은 깨끗함을 입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통회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