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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남천강의 푸른 물결 1911년 가을. 동화학교의 교장실 겸 교무실로 써온 작은 방에서는 남천강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나라가 일본에 강제 합병되고 일 년 남짓 지났지만 강은 읍내를 감싸 안고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가을이라서인지 물빛은 짙고 푸르렀다. 옛 군관청 낡은 건물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교사의 추녀를 스치며 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학교 앞 솔숲 너머 강안을 따라 축조된 왕조 시대의 성곽 앞에서는 허리가 긴 갈대들이 아우성치듯 흰 꽃 머리들을 흔들고 있었다. 창가에 섰던 전홍표 교장은 그것을 조선 백성들의 소리 없는 아우성처럼 느꼈다. 김대지 교사가 문을 열고 교무실 밖으로 나가더니 추녀에 매달린 종을 쳤다. 마지막 수업을 알리는 신호였다. 전홍표 교장은 강과 성곽을 바라보던 눈길을 거두고 두루마기 고름을 고쳐 매며 일어섰다. 남은 수업은 이제 한 시간. 그가 맡은 1․ 2학년 합반 조선역사 과목이었다. 복도가 없는 세 칸짜리 건물. 전교장이 교무실을 나가 흰 조약돌이 깔린 통로를 걸어 1학년 교실로 가는데 가네무라(金村) 오장(伍長)과 일본 헌병의 사냥개 노릇을 하는 헌병 보조원 김가가 교정으로 들어섰다. 법인체를 설립하지 않고 사립학교를 운영한다는 트집을 잡아 경상남도 학무국이 폐교 명령하는 공문을 보낸 것은 한 달 전이었다. 헌병은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학생들의 소요를 막기 위해 온 것이었다. 조선을 강제 합병한 뒤 일본은 헌병이 경찰기능을 하는 헌병경찰 제도로써 조선인들의 목줄을 조이고 있었다. 전홍표 교장은 가네무라와 김가에게 눈길 한 번 안 주고 교실로 들어갔다. 1학년 35명, 2학년 31명. 66명의 학생들은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서 스승을 향해 허리 굽혀 절을 했다. 전홍표 교장은 길게 심호흡을 했다. “우리 학교의 마지막 수업이다. 엄숙한 마음으로 공부하자.” 학생들은 이미 진도에 맞춰, 교과서의 ‘고려의 항쟁’ 부분을 펴 놓고 있었다. 전교장은 마지막 수업을 충실하게 하고 싶었다. 그는 학생들이 다시는 조국의 역사를 공부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대부분 가난하여 도회지의 중학교에 가지 못할 것이었다. 앞자리에 앉은 1학년 윤세주처럼 집안 사정이 좋은 학생은 전학을 가겠지만 대개는 이것으로 끝나게 될 것이었다. 그는 꼬투리를 잡혀 헌병대에 끌려가면 고문을 당해 초죽음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제자들에게 의연한 모습을 마지막으로 보여 주고 싶었다. 몽고에 대한 고려의 항쟁으로 수업을 이끌고 갔다. 6차에 걸쳐 펼쳐진 몽고군의 침략과 이에 맞선 고려의 항쟁을 이야기하면서 삼별초의 항전에 많은 비중을 두었다. 그는 2학년 김원봉을 지목했다. “원봉아, 네가 요약해 말해 보아라.” 원봉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삼별초는, 몽고에 굴복하는 조정의 항복 명령을 거부하고 반기를 들었습니다. 강화도에서 육지와 교통을 끊고 반몽 정권을 수립했습니다. 그 뒤 전라남도 진도로 옮겨 진을 치고 격문을 발표하여 백성들의 항몽 정신을 북돋우었습니다. 남해의 여러 섬과 해안을 지배하여 해상왕국을 만들었습니다. 고려와 몽고 연합군이 진격해와 진도가 함락되었으나 삼별초군은 제주도로 가서 항전을 계속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병력 태반을 잃은 터라 오래 지탱하지 못했습니다.” 원봉은 전홍표 교장보다도 차분했다. 표정도 여느 날과 같았고 음성도 또랑또랑했다. 원봉은 잠시 말을 끊고 스승을 바라보고, 고개를 좌우로 돌려 동급생과 후배들을 돌아보았다. 그러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삼별초는 무력으로 지배하려는 외국에 굴복한 조정의 투항명령을 거부하고 여몽 연합군에 대항했습니다. 삼별초는 패했지만 패한 게 아닙니다. 불굴의 저항 정신이 6백 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 가슴에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전홍표 교장과 가네무라 오장은 동시에 눈을 크게 떴다. 아아, 원봉아. 너는 내가 하지 못하는 말을 거침없이 하는구나. 전교장은 달려가서 제자의 어깨를 끌어안고 싶은 충동을 억눌렀다. 식민지의 벽촌 밀양 땅에 저렇게 총명한 소년이 자라고 있구나. 저런 아이는 장차 위험인자가 될 가능성이 크지. 가네무라 오장은 수첩에 김원봉의 이름을 또렷하게 적었다. 그 때 조용히 회중시계를 꺼내 보며 교실을 빠져나간 김대지 교사가 수업 끝을 알리는 종을 쳤다. 가네무라 오장이 큰 소리로 외쳤다. “이 시각으로 이 학교는 폐교되었다. 학도들은 즉시 귀가하라.” 전홍표 교장은 두 눈을 감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동화학교의 학도들아, 잊지 말아라. 이 학교에서 배운 정신을!” 학생들은 책상 위에 엎드려 통곡했다. 그 때 누군가가 앞으로 나아가며 벽력같은 음성으로 소리쳤다. “동화의 학우들이여, 울지 말자! 눈물은 약한 자의 것, 실패한 자의 것이다.” 학생들의 동요는 가라앉았다. 보통학교에 다닐 때 일본인 교사에게 불온한 질문을 해서 퇴학당한 일과, 대담하고 걱실걱실한 성격 때문에 학생들의 존경을 받는 열일곱 살 된 최수봉이었다. 최수봉이 밀양공립보통학교에 다닐 때였다. 일본인 교사가 조선 민족의 시조인 단군은 일본 민족의 시조인 스사노오 노미코토(小盞鳴尊)1)의 아우라고 가르쳤다. 학기말이 되어 구두 질의시험을 볼 때 교사가 최수봉에게 물었다. “조선의 시조인 단군과 일본의 시조인 스사노오 노미코토님은 어떤 관계인가 말하여라.” 최수봉은 거침없이 대답했다. “스사노오 노미코토는 단군의 형이 아니라 새까만 손자뻘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교사가 따귀를 때리며 호통쳤다. “뭣이라고? 다시 한 번 말해 봐라.” 최수봉은 대답이 한결같았다. 그래서 퇴학당했다. 최수봉은 턱수염이 거뭇한 얼굴로 학생들을 휘휘 둘러본 뒤 김원봉을 바라보았다. 세 살이나 어린 원봉의 의견을 앞세우는, 우리 모두 원봉의 말대로 하자는 뜻을 표정에 담고 있었다. 김원봉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우리 모두 일어나 세 분 스승님께 큰절을 올리자. 그리고 오늘을 잊지 말자고 엄숙히 다짐하며 학도가를 부르자.” 두 학년이 합반인데다 책상들이 빽빽하게 놓여 있어 교실이 비좁았지만 학생들은 스승들에게 큰절을 올렸다. 세 사람의 스승은 두루마기 깃을 여미며 학생들의 절을 받았다. 학생들은 <학도가>를 합창하기 시작했다.
청산 속에 묻힌 옥도 갈아야만 광채 나네 낙락장송 큰 나무도 깎아야만 동량 되네 학도야 학도야 청년 학도야 너의 직분 잊지 마라 새벽달은 넘어가고 동천조일 비쳐온다
동화학교는 아직 교가가 없었다. 그래서 학교 행사 때마다 대신 학도가를 부르고 있었는데 마지막 순간에도 그렇게 된 셈이었다. 학생들이 학도가를 부르며 교실을 나가자 헌병 보조원 김가가 문에 못질을 했다. 그리고 가방에서 큰 종이와 풀통을 꺼내 풀칠을 해서 문과 벽에 붙였다. 조선총독의 제령(制令)에 따라 이 학교를 폐쇄하며, 향후 이 시설에 출입하는 자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처벌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로부터 열이틀 뒤 귀뚜라미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리는 초저녁이었다. 전홍표 교장 집 삽살개가 컹컹 짖었다. 학교가폐교당한 억울함을 잊으려고 책을 읽고 있던 전교장은 외바라지 문을 열었다. 대문 담장께에 누군가가 서 있는 것이 어슴푸레 보였다. 담장 너머로 겨우 어깨와 얼굴이 보이는 것으로 미루어 젊은 학도 같았다. 그는 툇마루 아래로 내려서 나막신을 발에 꿰고 마당을 천천히 걸어 나갔다. “교장 선생님, 김원봉입니다.” 전홍표 교장은 깜짝 놀라 대문을 열어 원봉을 사랑방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원봉은 교모를 벗고 큰절을 올리고 주머니에서 두툼한 봉투를 꺼내 놓았다. “지난 며칠 동안 학부형님들과 밀양의 유지 어른들을 찾아뵙고 학교를 다시 살리는 성금을 모았습니다. 모두 80원입니다. 유지님들이 돈을 내시면서 학교법인 등록 기준에 맞게 시설을 갖춰 학교를 다시 열어달라고 하셨습니다.” 전교장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그런 일이 어찌 소리 소문도 없이 진행됐단 말이냐? 왜놈 헌병대도 모르느냐?” “네. 돈을 주시는 분들이 모두 은밀하게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전교장은 길게 한숨을 쉬었다. “네가 큰일을 했다만 학교는 열 수 없단다. 이 돈으로는 학교 법인을 만들 수도 없거니와, 돈이 충분하다고 해도 왜놈들이 승인을 안 해 줄 게다.” 전교장은 가장 총명하여 그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제자를 찬찬히 설득했다. 학교도 학교지만 어린 제자가 날개를 달기도 전에 다칠까봐 걱정이 되었다. 그래서 조국이 처한 현실을 큰눈으로 바라보게 이야기해 주었다. 원봉은 스승의 말을 충분히 알아들은 듯했다. 무릎을 꿇은 채 두 주먹을 쥐고 방바닥을 들여다보며 이야기를 들은 뒤 고개를 들었다. “스승님 말씀대로 이 돈은 기부한 분들에게 돌려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주신 말씀 항상 명심하겠습니다.” 원봉이 돌아간 뒤 전교장은 아내에게 말했다. “똑똑하고 차분한데다가 사람을 감화시키는 힘을 가진 아이요. 저런 아이를 더 가르치지 못한다는 게 한스럽소.” 그는 방금 제자가 걸어 나간 대문을 바라보았다. 그 해 겨울, 김주익은 아들 원봉이 경성행 짐을 꾸리기를 기다렸다가 여비와 함께 서찰 한 장을 내놓았다. “이모할머니를 제대로 찾아갈 수 있겠느냐?” “네. 주소를 수첩에 적었습니다.” 아들은 큰절을 올린 뒤 돈과 서찰을 외투 속주머니에 넣고 일어섰다. 김주익은 아들의 얼굴을 미더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귀티가 나고 늠름한 모습을 한 아들. 그는 문득 아들이 태어나던 날의 기억을 떠올렸다. ‘장상이 될 사주’를 타고 났다고 한 옆집 윤시종의 말이 선명하게 기억났다. 그 뒤 십여 년 세월이 지나는 동안 그는 아내를 잃고 새 아내를 맞았으며 또 기생에게 살림을 차려주었다. 게다가 세 여자에게서 아이들이 여덟이나 태어난 터라 토지를 더 늘리지는 못했다. 그러나 논밭을 십여 마지기씩 갖고 있어 절반은 자기가 농사짓고 나머지는 소작을 주는 정도여서 식구들이 배를 곯지는 않았다. 그는 좋은 풍채를 갖고 있었고, 한문께나 읽을 줄 알았다. 그리고 부산과 마산을 자주 왕래하여 개화문물도 익히고 있었다. 다만 그는 총명하다는 말을 듣는 장남 원봉마저도 제대로 공부시키지 못해 안타까웠다. 매제인 황상규는 마산에서 창신(昌新)학교를 세워 운영하고 있었다. 체구가 크고 목소리가 쩌렁쩌렁하며 성격이 호탕하고 의리를 중시해 중국소설「삼국지」에 나오는 ‘관운장’을 별명으로 갖고 있었다. 아들을 황상규에게 보내면 밀양보다 큰 도시인 마산에서 교육을 받게 할 수 있지만 그는 경성 쪽에 마음을 두고 있었다. 그것은 황상규의 말 때문이었다. 황상규는 관운장이라는 별명처럼 휙 왔다가 사라지곤 했는데 어느 날은 큰비가 내려 처가에 묵었다. 김주익은 매제에게 말했다. “원봉이를 더 가르쳐야 하는데 어떡하면 좋겠는가. 자네 학교로 데려가든지 부산에 있는 학교들을 알아보게.” 황상규는 확신에 찬 표정으로 말했다. “그애는 큰일을 할 비범함이 보입니다. 큰물에서 놀게 경성으로 보내 가르쳐야 합니다. 제가 경성 쪽을 알아볼게요.” 김주익이 아들 원봉에게 서찰을 주어 찾아가게 한 그의 이모는 어린 나이에 불문에 들어가 영향력 있는 스님이 되었다. 경성의 큰 사찰에 몸담고 있으면서 고관대작들의 집에 출입하고 있었다. 민간에 살림집을 두고 있었으며 생활에 여유가 있었다. 장남을 경성에 유학시키고 싶은 김주익으로서는 이모에게 의탁하는 수밖에 없다고 여기고 있었다. 두 해 전 김주익이 경성에 가서 만났을 때 이모는 그가 아이들을 일곱이나 두었다는 말에 끌끌 혀를 찼다. “세 여자와 배를 맞추기는 했지만 자네는 아이 만드는 재주는 있군. 하지만 자꾸 낳기만 하면 뭐하나. 가르쳐야지. 큰애가 똑똑하다는 말은 들었네. 그애를 보고 싶네.” 그는 그 때 이모의 말을 기억하며 서찰을 쓴 것이었다. 김주익은 서울로 가기 위해 신발을 신는 아들을 미더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경부선 기차를 타고 경성에 도착한 원봉은 종로에 있는 이모할머니 댁을 찾아갔다. 이모할머니가 용돈을 주며 말했다. “열흘이고 한 달이고 좋으니 경성 구경 실컷 하고 배재학교, 중앙학교도 찾아가 보거라.” 원봉은 경성 거리를 돌아다녔다. 일본인들이 차지해 버린 진고개와 종로통, 그리고 조선인들이 삶에 부대끼며 사는 청계천변도 돌아다녔다. 남산에도 올라갔으며 일본 군대가 주둔한 용산에도 가 보았다. 그 또래 학도들이 공부하는 학교들도 가 보았다. 그의 마음을 사로잡은 곳은 중앙학교였다. 그 학교는 기호학회, 호남학회, 교남학회, 서북학회, 관동학회가 중앙학회로 합병되면서 세워진 학교이자 민족정기를 아우르는 대표적인 사립학교였다. 어느 날, 원봉은 종로의 저자에서 한 모피 행상을 주목했다. 북방 사투리를 쓰는 모피 상인은 좌우를 살피면서 사람들에게 말했다. “지금 왜놈들이 안명근 선생 사건을 트집 잡아 개지구 우리 조선 지도자들을 닥치는 대로 잡아들이고 있수다.” 옷차림은 허술했으나 눈빛이 형형하고 조리 있게 말하는 것으로 보아 독립운동을 하는 비밀결사에서 밀파한 사람인 듯했다. 경성 사람이 소곤거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안명근이라면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놈을 거꾸러뜨린 안중근 선생의 형제인가요?” “그분의 사촌동생입네다. 작년에 간도 땅에 독립전쟁을 위해 무관학교를 세우고자 황해도 부호들에게서 군자금을 모으다가 체포당한 적이 있수다. 증거부족으로 석방된 뒤 이번에는 평안북도 선천역에서리 데라우치(寺內) 총독을 격살하려는 계획을 세웠는데 그거이 수포로 돌아갔수다. 왜놈들이 그거이 신민회원들이 음모한 것이라고 뒤집어씌워 잡아들이는 것이지오.” 스무 살 가까운 서울 청년이 다가가서 말했다. “만주 땅 이야기를 더 해 주시오.” 모피 상인은 청년을 슬쩍 돌아보았다. “서간도로 자네 같은 의로운 청년들이 몰려가고 있지비. 이강년 장군과 함께 의병전쟁을 했던 소백산 포수들도 가고, 노랑수건을 쓰는 삼수 ․ 갑산의 포수들도 가고, 강제 해산당한 군인들도 갔지비. 기래서 거기서 장래를 도모하기 위해 무관교육을 하려는 것이네.” 근처에서 지게를 세워놓고 약초를 팔던 행상이 지게 작대기로 딱딱 지게다리를 쳤다. 그러자 모피 행상은 천연스럽게 소리치면서 저자의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새들도 한번 날아 들어가면 나오지 못한다는 삼수 ․ 갑산 포수들이 잡은 여우털과 너구리털이 있수다. 새아기 가슴처럼 따뜻한 여우털을 한번 만져보시오.” 김원봉이 고개를 돌려보니 일본 헌병이 순찰을 하고 있었다. 짧은 시간의 일이었지만 원봉의 가슴에는 등불이 환하게 켜지는 듯했다. 며칠 뒤, 그는 이모할머니를 따라 인력거를 타고 불교 신도의 집을 찾아갔다. 일제의 강제 합병에 협력하여 은사금과 작위를 받은 고관의 집이었다. 부유함이 넘쳐흘렀으며 노복들도 여럿을 두고 있었다. 이모할머니의 재산이 친일 반역자의 행복을 기원한 대가로 얻어진 것이라는 사실이 그를 회의하게 했다. 눈 꾹 감고 이모할머니에게 의탁한다면 중앙학교에도 갈 수 있을 것이지만 그는 타협할 수 없었다. 그래서 한 달여 만에 홀연히 경성을 떠나 밀양으로 돌아왔다. 그는 집에서 며칠 머물고 표충사로 갔다. 절 살림을 맡아하는 원주(院主) 현각(玄覺) 스님이 한 사람을 거쳐서 김원봉의 동화학교 살리기 모금에 기부했었는데, 그런 인연으로 얼굴이나 보자고 한다 했다. 원주 스님은 원봉을 찬찬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이 녀석아, 경성에 있는 부자 보살님에게 갔다더니 그분께 의탁해 공부하지 않고 왜 그냥 돌아왔느냐?” “할머니의 돈이 떳떳하지 않은 거라 머물 수 없었습니다.” “허, 살모사 대가리처럼 뻣뻣한 놈이라구나. 커서 뭣이 되고 싶으냐?” “안중근 선생처럼 왜놈을 무찌르고 싶습니다.” “입 닥쳐라, 이놈아. 왜놈들한테 끌려가 주리를 틀리고 싶으냐!” 원주 스님은 원봉의 뒤통수를 큰 주먹으로 툭 내질렀다. 그러나 속으로는 흐뭇했다. 그는 불가에 전승되어 온 관상서인「마의상법(麻衣相法)」에 거의 통달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소년의 얼굴과 몸에 서린 기상이 범상치 않음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그는 김원봉 소년에게 요사체의 방 하나를 내어 주고「육도삼략」과 손자와 오자의 병법서를 구해다 주었다. 원봉은 밤이고 낮이고 책을 읽었다. 병법을 거의 외우듯이 읽게 되자 원주 스님은 부산에 탁발하러 가는 스님들을 통해 신학문을 다룬 책들을 구해 오게 했다. 그 중에는「을지문덕전」,「이순신전」등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의 전기소설도 있었다. 그는 틈틈이 재약산(載藥山)의 사자평(獅子坪) 고원으로 달려 올라가 호연지기를 키웠다. 절을 품어 안고 있는 재약산은 신라시대에 화랑도가 머물며 수련했고, 사명대사가 승병을 조련한 신성한 장소였다. 원주 스님은 때때로 원봉의 독서내용을 확인하고 참선도 시켰다. 그는 불문의 교리나 경전의 해석에 전념하는 이판승(理判僧)이 아니라 절 살림을 책임지는 사판승(事判僧)이었다. 그래서「마의상법」외에는 학문도 불교의 철학도 깊지 못했다. 그러나 이판승들이 갖지 않은 따뜻한 인간적 체취를 갖고 있었다. 어느 날, 그는 원봉을 불러내 도량을 천천히 걸었다. “사명대사께서는 왜란 도중에 왕명을 받고 왜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와 담판했다. 가토의 진영으로 들어가는데 왜군들이 마당에 가득 들어차고 좁은 통로만 열어 놓고 콩 볶듯이 허공에 조총을 쏘아댔다. 대사께서는 겁먹지 않고 걸어 들어갔다. 가토가 말했다. ‘조선 땅에 보물이 있소?’ 대사는 가토의 머리를 가리켰다. ‘너의 머리가 보물이다. 조선 땅에서 물러가지 않으면 내가 네 목을 자를 것이다.’ 가토는 대사의 기세에 움찔했다. 대사님은 담판에서 이겼다. 사명대사님은 밀양 출신, 너는 그분이 태어난 땅에서 태어났느니라.” 원주 스님은 원봉을 유물 보관처로 데리고 가서 사명대사의 유물이 담긴 상자를 열어 주었다. “대사님의 장검을 잡아 보아라.” 원봉은 떨리는 손으로 장검을 잡았다. 열네 살 소년으로서는 두 손으로도 치켜들 수 없는 무거운 검이었다. “이놈아, 어서 힘을 쓰지 못하겠느냐!” 스님의 호통에 놀라 원봉은 두 팔에 힘을 주었다. 그러자 놀랍게도 검이 번쩍 들렸다. “휘두르거라! 왜놈들이 앞에 있다고 생각하고 휘두르거라!” 사명대사가 수많은 왜병을 도륙했던 장검은 춤을 추듯이 그의 손에서 움직였다. 원봉은 등골을 타고 내리는 전율을 느끼면서 장검을 휘둘렀다. 표충사 생활은 꼭 두 해만에 끝났다. 원봉의 아버지와 고모부가 중앙학교의 편입학 허가를 받아내고 학비를 마련했던 것이다. 작별을 고하자 원주 스님은 껄껄 웃으며 큰 손바닥으로 원봉의 어깨를 철썩철썩 두드렸다. “어서 가서 열심히 공부하거라. 그리고 사명대사님의 장검을 잊지 말아라.” 그러고는 꼬깃꼬깃 접어 숨겨두었던 지폐를 손에 쥐어 주었다. 집으로 가니 고모부가 와 있었다. “중앙학교는 이 나라 최고의 명문이다. 최고의 스승들 밑에서 최고의 공부를 해라. 그래야 일본을 이긴다.” 고모부 황상규는 그렇게 말하며 편입학 서류를 건네주었다. 김원봉이 2학년에 편입했을 때 중앙학교는 김성수(金性洙)가 막 운영권을 인수한 직후였다. 전국의 애국계몽 인사들이 힘을 합해 운영했던 이 학교는 재정난에 부딪혀 곤란을 겪었는데, 호남 대부호의 아들인 김성수가 도쿄(東京) 와세다(早稻田) 대학을 막 졸업하고 돌아와 학교 운영재단을 맡은 것이었다. 김성수는「황성신문」주필을 지낸 유근(柳瑾)을 교장으로 모셔 놓고, 와세다 대학 동창인 안재홍(安在鴻)과 송진우(宋鎭㝢)에게 학감과 교무주임을 맡기고 자신은 겸손하게 평교사에 머물러 있었다. 김원봉의 반 담임교사는 도쿄고등공업학교를 나온 나경석(羅慶錫)이었다. 편입학 첫날 출석부 맨 끝에 이름을 올리며 나경석 교사가 말했다. “추천서를 보니 마산 창신학교의 황상규 교장께서 추천하셨군. 그런데 네가 다닌 학교는 밀양의 동화학교가 아닌가?” 젊은 스승의 말에 원봉은 고개를 숙였다. “황상규 교장님은 제 고모부님이십니다.” “그렇구나. 열심히 공부해서 교사가 되어 그분처럼 고향에서 학도들을 가르쳐라. 우리 민족이 살 길은 바로 그것이다.” 원봉은 잠자코 있었다. 그의 머릿속은 왜놈들과 싸워야 한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나경석 교사는 금방 눈치챘다. “교육자가 되기 싫은 모양이구나. 장차 무엇이 되고 싶은지 말해 보거라.” “안중근 선생처럼 일본과 싸우는 겁니다.” 나경석 교사는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겸손하면서도 당돌해 보이는 편입생이 또렷이 눈을 들고 신념처럼 말하기 때문이었다. 결코 목소리가 크지 않았고 흥분되어 보이지도 않았다. 그런데 강하게 그의 가슴을 울려왔던 것이다. 나경석 교사는 편입학 서류를 다시 찬찬히 들여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동화학교가 문을 닫고 두 해 동안 뭐했느냐?” “서너 달은 경성에 와서 머물렀고 나머지 기간은 표충사에 있었습니다.” “밀양 표충사라면…….” “사명대사님의 유물이 있는 절입니다.” “그래. 나도 가보진 못했지만 들은 바가 있다.” 중앙학교가 여러 지방의 토호들과 양심적 지식인들의 힘으로 만들어진 학교인 터라 학생들은 전국 각지의 명문거족 출신이 많았다. 그러나 그들 대부분이 김원봉의 흥미를 끌지 못했다. 원봉은 어느 날, 도서관에서 열두 살쯤 되어 보이는 어린 학생이「장자(莊子)」를 원문으로 읽는 것을 보았다. 중앙학교의 학도는 열일곱 살이 넘는 청년들이 태반이었다. 소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입학한 경우는 눈을 씻고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런데 앞자리 소년은 소학생 같은 나이인데 책을 넘기는 속도로 보거나 글 내용에 반응하는 표정을 보거나 만만치 않은 한문 실력을 가진 듯했다. 독서에 열중해 책상에 놓은 교모가 바닥으로 떨어진 것도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어린 나이에「장자」를 읽다니 대단하군. 어느 부분을 읽고 있는가?” 앳된 소년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지지기소부지지의(知止其所不知至矣)라.” 원봉이 그 말을 받았다. “허허, 참다운 지자(知者)는 자신이 알지 못하는 데서 멈추고 이를 모른다고 한다, ‘내편(內篇)의 제물론(齊物論)’을 읽고 있군.” 소년은 눈을 깜짝거리며 책을 덮었다. “선배는「논어」도 읽었소이까?” 단순히「논어」를 읽었냐는 뜻이 아니고「논어」에 같은 표현이 있는데 아느냐고 물은 것이었다. 김원봉은 소년의 펜으로 잉크를 찍어 소년의 노트에 재빠르게 ‘知之爲知之 不知爲不知 是知也(지지위지지 부지위지지 시지야)’2)라고 써 갈겼다. 앳된 학생은 그 자리에서 일어서 고개를 숙였다. “나는 경상도 칠곡에서 온 이명건(李明鍵)입니다. 보성학교를 다니다 편입했는데 2학년으로 가고 싶었지만 나이가 어리다고 1학년을 한 번 더 다니라 했습니다.” “나는 김원봉, 경상도 밀양에서 왔네. 거기서 동화학교를 다녔는데 왜놈들이 학교 문을 닫았지.” 두 사람은 손을 잡고 악수했다. 원봉은 그 자리에서 자신이 기하(幾何) 시간에 이해하지 못했던 ‘피타고라스의 정리’를 이 세 살이나 어린 하급생에게서 배울 수 있었다. “보성학교에서 피타고라스의 정리를 배우고 왔나?” 원봉의 물음에 이명건은 머리를 흔들었다. “교과서에 나온 설명을 보고 혼자 이해했어요.” 원봉은 눈을 크게 뜨고 어린 천재를 바라보았다. 그 뒤 두 사람은 우애가 깊어졌다. 늘 상대가 자기보다 탁월하다, 그리고 자신이 갖지 않은 장점을 상대가 갖고 있다고 여기고 있었으므로 학년과 나이를 넘어 우정을 쌓아 갔다. 이명건은 김원봉의 큰아우 경봉과 동갑이었다. 원봉으로서는 명건이 아우와 동갑인데다, 그 자신이 밀양의 동화학교에서 늘 나이 많은 학생들과 교유했던 터라 세 살 어린 소년과의 교유가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곧 익숙해졌다. 한 달 뒤 교내 웅변대회가 열린다고 공고되었다. 원봉은 웅변 원고를 들고 담임 나경석 선생을 만났다. “‘사회발전은 종교에 있느냐 교육에 있느냐’, 참으로 훌륭한 원고구나. 논리 정연하고 설득력도 있고 주제도 선명해. 누가 쓴 거니?” “1학년 이명건이 쓴 걸 제가 제 호흡에 맞게 고쳤습니다.” 원봉의 말에 나경석은 경탄했다. “이명건이 똑똑하다는 건 알았지만 이 정도인 줄은 몰랐구나. 네가 그애를 잘 이끌어 주거라” 웅변대회에서 원봉은 최우수상을 차지했다. 다른 학생들이 목청을 높여 격정적인 호소를 한 데 비해 그는 차분하게 연설했다. 5백 명이 넘는 학생들 중에는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있었다. 시상식에서 김성수 선생은 청중의 심금을 울리는 호소력 강한 최고의 웅변이었다고 극찬했다. 이로써 김원봉의 이름은 전교생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웅변대회 심사를 본 선생은 안재홍과 송진우였다. 안재홍은 일본 유학을 마치고 중국 상해(上海)로 가서 동제사(同濟社)3)에서 활동하다가 귀국해 교편을 잡고 있었다. 송진우는 호남 유학의 거목인 기삼연(奇參衍) · 김직부(金直夫) 문하에서 공부했으며, 김성수 등과 신학문을 배우다가 일본에 유학했다. 웅변대회 다음날 두 선생은 김원봉을 불렀다. 먼저 안재홍이 입을 열었다. “네 웅변은 훌륭했다. 청중과 완벽한 심리적 동일시(同一視)를 이루어 끌고 가는 것에 나는 놀랐다. 내가 보기에 그건 천부적인 재능인 것 같다. 재능이 최대한 발휘될 수 있게 책을 많이 읽어라.” 송진우는 원봉의 출생과 성장 배경을 꼼꼼히 물어보고 격려를 했다. “어려운 환경을 이기고 공부하는 사람은 그 가치가 더욱 크다. 네 스스로 자기 암시를 하며 살아라. 나는 할 수 있다, 뭐든지 이길 수 있다, 내가 젊은 날에 고생하는 것은 뒷날 반드시 빛나는 열매로 맺힐 것이다, 하고 말이다. 그렇게 배워 맺은 열매를 빼앗긴 조국을 찾는 일에 써야 한다.” 김원봉에게 관심을 기울인 젊은 교사로 백관수(白寬洙)도 있었다. 경성법학전문학교를 나와 변호사가 되는 길을 마다하고 중앙학교에 와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그는 김원봉의 어깨를 다독거리며 말했다. “네 가슴 속에 웅지를 키워라. 청년 학도의 웅지, 그것만이 우리 민족의 살 길이다.” 중앙학교에 재학하는 내내 김원봉은 이명건과 함께 나경석 선생의 총애를 받았다. 나경석은 학생들에게 ‘큰대문집 선생님’이라는 말을 듣고 있었다. 경기도 수원에 있는 그의 집이 ‘큰대문집’으로 불리기 때문이었다. 조부는 호조참판이었고 부친은 합방 직전 사법관과 시흥군수, 용인 군수를 지낸 명문 집안이라 그렇게 불리고 있었다. 그리고 나경석 교사는 혜석(惠錫)이라는 누이동생 때문에 유명했다. 그녀는 진명여학교를 마치고 일본 유학길에 올라 도쿄미술전문학교에 다니고 있었으며 문학에도 재능이 있었다. 김원봉과 이명건은 스승 나경석의 하숙에 드나들 수 있었고 스승의 책을 빌어 읽었다. 두 학생이 스승의 책을 빌어보고 토론을 벌인 첫 번째 것은 양계초(梁啓超)4)의「월남망국사」였다. 나경석은 학교에서 화학을 가르치지만 시를 쓰는 시인이기도 했다. “이 책은 월남국 망명객 반패주(潘佩珠)와 양계초의 대화 형식으로 지어졌다. 몇 해 전에 번역되어 나왔지. 강제 합방 이후 읽어서는 안 될 금서로 정해져 있어. 열강의 침입에 어떻게 맞서야 하는가 하는 타산지석의 교훈이 있지.” 나경석 교사는 책을 내놓았다. 일주일 뒤 두 학생은 스승 앞에서 독후감을 말하고 함께 토론을 벌였다. 그렇게 한 권 두 권, 토론이 이어지면서 김원봉의 안목은 크게 넓어졌다. 그 해 여름방학에 각각 고향에 가 있던 김원봉과 이명건은 수원에 있는 스승의 집으로 갔다. 한나절 동안 독서토론을 하기로 약속되어 있었던 것이다. 청기와를 얹은 큰 대문 앞에 선 순간, 김원봉은 눈을 크게 떴다. 스승이 고대광실의 명문가 출신임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상상을 넘어서는 대저택이기 때문이었다. 하인의 안내로 집 안에 들어간 원봉은 연못가에 앉아서 이젤을 펴놓고 그림을 그리는 여학생을 보았다. 그보다 두 살 위인 스승의 누이동생 나혜석이었다. 독서 토론은 두 편의 미국 소설에 관한 것이었다. 허만 멜빌의「백경(白鯨)」과 서머셋 모옴의「인간의 굴레」였는데 하나는 오래된 고전의 대표작으로, 하나는 막 번역되어 나온 신작소설로 세계문학의 흐름을 읽기 위하여 선정한 것이었다. 열띤 토론 중에 차와 과일을 갖고 들어왔던 나혜석도 잠깐 끼여 앉았다. 그녀는 연하의 학생들과 즐겁게 토론을 했다. 토론이 끝난 뒤 김원봉이 일본어가 짧아 일본어 번역본을 읽기 힘들었다고 말하자 나혜석이 웃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일본을 이기려면 일본말에 능통해야 하는 게 첫째 조건이지요.” 김원봉은 머리를 가로저었다. “일본보다 문명이 앞선 독일어에 능통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독일은 또 세계에서 가장 강한 군대를 가진 나라이기도 하지요. 기회가 온다면 나는 일본 유학보다는 독일 유학을 가고 싶습니다.” 원봉이 그렇게 말한 것은 1914년부터 시작된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전쟁 국면을 장악해가고 있기 때문이었다. 나혜석이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일본말이 우선, 다음이 독일어예요. 명건 씨 생각도 같은가요?” 이명건은 갑자기 ‘명건 씨’라고 불린 것에 놀랍고 행복한 표정을 해 보였다. “나는 일본과 독일 모두 다 가고 싶습니다.” 나경석은 총애하는 제자 김원봉이 일본 유학파에 대한 거부감을 갖고 있다는 것을 느꼈으나 그냥 껄껄 웃으며 끼여들었다. “너희가 정말 독일 유학을 하고 왔으면 좋겠구나. 내년 봄 우리 학교를 졸업하면 뭘 하겠느냐?” 김원봉이 답했다. “중국 천진(天津)에 덕화(德華)학당이라는 독일계 학교가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거기 갈 수 없으면 조선 땅을 속속들이 알기 위해 전국을 걸어서 여행할 생각입니다.” “좋은 생각이구나.” 나경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해 가을 어느 토요일, 김원봉은 이명건과 함께 휘문의숙에 갔다가 또 한 사람의 인상 깊은 친구를 만나게 되었다. 일곱 살이나 많은 김두전(金枓全)이었다. 김두전은 경남 동래 출신으로 휘문의숙을 졸업하고 경성공업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후배들의 문예작품 발표회에 선배로서 참석한 것이었다. 김원봉과 이명건이 다니는 중앙학교 학생들 사이에는 전학년 전과목 백점 만점을 받고 졸업한 제1기 수석 졸업생 김두봉(金枓奉)의 이름이 회자(膾炙)되고 있었다. 김두전은 그 김두봉의 사촌아우였다. 김원봉은 김두전과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죄와 벌」에 나타난 지식인의 우월의식과 양심에 대해 열띤 논쟁을 벌였다. 그 결과로 두 사람은 급속히 가까워지고 이명건도 끼이게 되었다. 몇 달이 지나자 세 사람은 형제처럼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조금은 독특한 교유였다. 가장 나이 많은 김두전과 가장 어린 이명건이 아홉 살이나 차이가 났다. 그래서 나이 많은 사람에게 형이라고 부르고 나이 적은 사람을 아우라고 불렀다. 처음에 김원봉과 이명건이 그랬던 것처럼 어색했지만 나이를 넘어서는 우정으로 자리잡았다. 다음해 봄, 김원봉은 중국 유학을 가지 못했다. 학비를 마련할 길이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동저고리 바람에 책 몇 권을 넣은 바랑을 등에 지고 유랑의 길에 올랐다. 조선반도의 등뼈인 백두대간의 품에 누워 나무들이 비밀스럽게 속삭이는 소리를 들었으며, 문경새재에서는 이강년 의병장이 이끌었던 의병들의 함성을 환청으로 들었다. 전라도의 평야에서는 그 땅들이 일본인 지주들의 손에 하나씩 넘어가고 있는 사정을 농민들에게서 들었다. 강경 저자에서는 새우젓 냄새 물씬 풍기는 어부들 가운데서 삶의 현장을 몸에 익혔으며, 식민지 수탈의 문호 인천에서는 무수한 물자가 일본으로 가기 위해 기선에 실려지는 것을 보았다. 그가 밀양으로 돌아왔을 때, 동화학교의 동급생이었던 한봉인이 찾아왔다. 읍내에서 큰 가게를 하는 친척의 경리일을 해주고 있는 친구였다. “가끔 네 아우 경봉이를 찾아가 소식을 들었지.” 김원봉은 친구의 손을 잡아 집 안으로 이끌었다. “네가 날 걱정해 준다는 말을 경봉이한테서 들었어. 고마워.” “많은 동창들이 네가 잘 되기를 바라고 있어. 너는 우리와 달라. 우리 모두를 대신해 큰일을 할 사람이니까.” 김원봉은 성실하고 착한 동창의 얼굴을 응시했다. “아냐. 나도 나약한 인간일 뿐이야.” 두 사람은 밤이 깊도록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봉인은 김원봉의 경성 유학생활과 전국 방랑 이야기, 그리고 장래의 포부를 듣고 싶어 했고 김원봉은 학교를 빼앗겨버린 뒤의 동창들과 스승님들의 소식을 듣고 싶어 했다. 돌아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서면서 한봉인은 눈물을 글썽거렸다. “좋은 공부를 많이 해서, 왜놈들한테 빼앗긴 나라를 되찾는 일에 앞장서 줘.” 이틀 뒤, 한봉인이 다시 찾아오더니 대뜸 지폐 뭉치를 내놓았다. “이걸로 중국 유학을 가 줘. 나는 당숙의 가게를 보아주면서 받은 월급을 모두 당숙에게 맡겨두고 있었어. 어제 말씀드려서 그걸 받은 거야.” “몇 해 동안 네가 모은 돈을 난 받을 수 없어.” 원봉은 머리를 완강하게 내저었다. 그의 기억에 한봉인의 집은 자신의 집보다도 가난했던 것이다. 그러나 결국 친구의 결심이 굳은 것을 알고 돈을 받았다. 꼭 친구의 소원대로 일할 거라고 다짐하면서. 그리하여 그는 열아홉 살 가을에 경의선 열차를 타고 신의주로 올라가서 중국 땅 안동(安東. 현재의 丹東)까지 갔다. 그는 거기서 천진으로 가는 배표를 사기 위해 이륭양행(怡隆洋行)이라는 무역회사에 들렀다. 허리춤에 찬 전대를 풀어 돈을 꺼내 매표원에게 주는데 양복을 차려입은 서양인이 유창한 중국어로 말했다. “니 웨이션머 취 티엔진(천진에는 왜 가는가)?” 사무실 책상에 엉덩이를 걸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문득 선박회사의 대표일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워 취 나리 쒸에 씨(나는 공부하러 갑니다).” 김원봉이 대답하며 다시 한 번 그의 얼굴을 보니 반동양 반서양의 얼굴이었다. 말로만 듣던 혼혈이로구나 생각이 들었다. “중국어가 능숙하지 않은 걸 보니 조선 청년이군. 공부해서 무슨 일을 할 건가?” 김원봉은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문득 그가 진실한 사람이며 자신에게 호의를 갖고 있음을 직감으로 알아차렸다. “빼앗긴 조국을 찾을 겁니다.” 혼혈의 신사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내 짐작이 맞았군.” 그는 그렇게 말하고 부하 직원에게 조용히 말했다. “가난한 학생이니 무임 승선표를 주게.” 김원봉은 무명의 조선 청년에게 호의를 베풀어준 그에게 고개를 숙였다. “고맙습니다. 성함을 알고 싶습니다.” “나는 이륭양행의 대표인 쇼우(Show)일세.” 혼혈의 중년신사는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김약산이 소년시절부터 보여 온 특장(特長)은 조용히 있으면서도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을 갖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결코 자기 과시를 하지 않는데도 늘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고 어디서든지 리더로 추대되었다. 젊은 날에 그와 행동을 같이한 동지들은 두 가지를 강조한다. 그가 저절로 호감을 갖게 하는 잘생긴 외모를 갖게 있어 친근감을 가졌다고. 그리고 얼굴에 자기 생각에 대한 강한 확신과 인간적 진정성이 드러났다고. 김약산은 그것을 적절히 이용할 줄 알았다. 주변사람들을 꼼짝 못하게 잡아당겨 자기와 한 배를 타게 하는 놀라운 지배력, 그것은 청년기가 되면서 더욱 확대되었다. 1) 「일본서기」에 나오는 일본의 국조신. 마한(馬汗) 모르게 구주로 이주했다가 여러 신들에 의해 거기서 쫓겨나 신라국의 소시모리에 일시 정착했으나 ‘이 땅은 내가 있고 싶지 않다’고 말하고 흙배를 만들어 타고 본주의 출운(出雲)의 상류로 돌아갔다고 기록되어 있다. 2) 「논어」위정(爲政)편에 있는 말. 아는 것은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정말 아는 것이라는 뜻. 3) 1912년 7월 중국 상해에서 조직된 최초의 한인 독립운동단체로서 이사장에 신규식, 총재에 박은식, 중견간부에 김규식·신채호·홍명희·조소앙, 그리고 회원 3백여 명이 있었다. 임정 수립 전까지 상해 한인의 중심조직이었다. 4) 청나라 말의 계몽사상가로 현대식 학교 설립, 과거제도 갱신, 국가제도 개편을 주장하는 상서를 올렸다. 입헌 군주제로의 개혁을 주창하며 입헌운동을 지도하였고, 신해혁명 이후 원세개(袁世凱)의 정치고문, 단기서(段棋端) 내각의 재정총장을 지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