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恕)의 아들 문양(文養)은 대사간이다. 문양은 청주한씨와 혼인하여 영의정 한익모(韓翼謨)의 사위가 되었다. 한익모는 서원부원군 한확(西原府院君 韓確)의 후손으로 청주한씨 문중에서 가장 화려한 가문 가운데 하나이다. 노론 벽파 정객으로 활약한 그의 행적을 보여주는 실록의 기록을 살펴본다.
삼사(三司)【대사헌 김재순(金載順)·대사간 심이지(沈履之)·집의 이일증(李一曾)·장령 유영진(柳榮鎭)·교리 심풍지(沈豐之)·부교리 정우순(鄭宇淳)·정언 강인(姜)·수찬 정원시(鄭元始)이다.】에서 합계(合啓)하기를,
“지난 겨울의 국가의 안위(安危)에 관한 기틀은 지금도 뒤쫓아 생각해 보면 오히려 늠연(凜然)해짐을 느끼게 됩니다. 진실로 국가를 체념(體念)하는 대신이 있었다면 비록 위에서 하교가 없었다 하더라도 진실로 마땅히 곧바로 대리 청정하기를 청했어야 할 것인데, 그 때에 수상(首相) 한익모(韓翼謨)는 국가의 사세가 위급함을 생각하지도 않고 위의 하교가 간절하고 측은함을 체념하지도 않고서, 한갓 미봉(彌逢)하기만 일삼고 즉각 그대로 받들지 않아, 종국(宗國)의 큰 계책이 거의 말할 수 없는 지경이 되게 하였기에, 진 죄가 지극히 무거워 용서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가볍게 죄를 감단(勘斷)한 지 얼마 안 되어 작질(爵秩)이 여전한 까닭에, 놀라와하고 한탄스럽게 여기는 물정(物情)이 오래되어도 끝나지 않으니, 청컨대 판중추부사 한익모를 우선 삭탈관작(削奪官爵)하고 문외 출송(門外黜送)하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였다.
익모의 형인 현모(顯謨)는 대사헌이며 현모의 손자 용구(用龜)는 영의정이다. 대제학 한장석(韓章錫) 중추원 고문 한창수(韓昌洙) 등은 현모의 후손이다. 한익모의 후손으로는 도사 한관수(韓觀洙)가 이완용의 매부이며 기업인으로 친일행각을 일삼았던 한상룡(韓相龍)은 관수의 아들이다.
한익모의 사위들을 보면 유문양 외에, 김치영(金致永)은 영의정 김상로(金尙魯)의 아들로서 중부(仲父)인 판서 김취로(金取魯)의 아들이 되었으며, 좌랑 김겸주(金謙柱)는 영의정 김흥경(金興慶)의 손자이고 판서 심이지(沈頤之)는 청릉부원군 심강(靑陵府院君 沈鋼)의 후손으로 아버지인 수(鏽)도 판서이다. 김취로의 사위에 홍계희(洪啓禧)가 있다. 홍계희는 남양홍씨로 감사 명원(命元)의 후손인데 문과에 장원을 하고 대제학을 거쳐 판서에 올랐다. 그러나 그의 정치행태는 권력을 좇아 반복무상하여 간신으로 지목되었으며 결국에는 노론 강경파인 김상로 등과 한 무리가 되어 사도세자를 죽이는데 앞장섰다. 이러한 영향으로 정조가 즉위 한 후 일가가 핍박을 받게 되자, 그의 아들들인 판서 지해(趾海) 감사 술해(述海) 등과 손자들인 상간(相簡) 상범(相範) 등이 주동이 되어 정조를 시해코자 궁궐에 자객을 잠입시키며 역모를 꽤했으나 홍국영의 기민한 대처로 사건이 미수에 그치고 일가는 주륙을 당했다.
그리고 한익모의 막내 사위인 군수 홍대응(洪大應)은 판서 홍담(洪曇)의 후손으로 판서 홍억(洪檍)의 아들이며 실학자인 담헌 홍대용(湛軒 洪大容)의 종제이다.
문양(文養)의 후취 부인은 함양박씨이다.
서(恕)의 사위 김노재(金魯材)는 광산김씨로 김장생의 후손이다. 아버지는 영의정 양택(陽澤)이고 할아버지는 판서 진규(鎭圭)이다. 앞에서 색(穡)의 주손인 선양(善養)의 처가를 설명할 때 이야기 한 바와 같이 선양의 처외조부가 진규이니 김노재는 선양에게는 처외사촌이 되는 것이다. 노재는 백부인 성택(星澤)에게로 출계를 했다. 노재의 생가 어머니는 남양홍씨로 현감 홍우집(洪禹集)의 딸이며 감사 명원(命元)의 현손이 된다. 그리고 노재의 양가의 어머니는 우봉이씨로 판서 이만성(李晩成)의 딸이며 앞에서도 이야기 한 바 있지만 이만성은 영의정 김수흥(金壽興)의 사위이다. 김양택의 졸기이다.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김양택(金陽澤)이 졸(卒)하였다. 하교하기를,
“조정의 늙은 신하가 이제는 영원히 갔으니 부의하는 절차를 전례에 비추어 거행하고 3년 동안은 녹봉(菉俸)을 주라.”하였다.
김양택은 광성 부원군(光城府院君) 김만기(金萬基)의 손자이다. 평소에 명성(名聲)과 인망(人望)도 없었는데, 그 선대(先代)의 음덕(蔭德)을 힘입어 두루 화요(華要)한 직을 지내다가 어느새는 숭현(崇顯)한 자리에 오르므로, 세상 사람들이 ‘글을 못하면서 문병(文柄)을 잡게 되기는 김양택부터 시작되었다.’고 했었다. 정승의 직에 있게 되어서도 건명(建明)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뒤에 그의 아들 김하재(金夏材)가 복주(伏誅)되고, 관작을 추탈(追奪)하게 되었다.
노재의 매부인 이명채(李命采)는 연안이씨로 연평부원군 이귀(延平府院君 李貴)의 후손인데 이귀의 아들 이시백(李時白)은 영의정이고 이시방(李時昉)은 판서인데 명채는 시방의 후손이다. 명채의 사위인 김종후(金鍾厚)는 청풍김씨로 장령인데 종후의 동생이 좌의정 김종수(金鍾秀)인 바, 김종수는 노론의 영수로 정조조에 번암 채제공과 대립하였던 인물이다. 종후의 매부인 한용화(韓用和)는 감사로서 대사헌 현모(顯謨)의 아들인데 한용화의 사위가 영의정 남공철(南公轍)이다.
양택의 아들 초재(楚材)는 판서 이익보(李益輔)의 사위이고, 하재(夏材)는 문과에 장원을 하고 젊은 나이에 참판에 올랐으며 부인은 전주이씨 밀성군파로 아버지는 우의정 휘지(徽之)이고 할아버지는 좌의정 관명(觀命)이다. 그러나 하재 일가는 하재가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의 원죄를 거론하고 사림세력을 절멸시켜야 한다는 등 강경한 당파적 주장을 하다가 김양택의 졸기에서 보는 바와 같이 대역죄로 주살되었으며 일가가 몰락하였다.
서(恕)의 사위 김종철(金鍾喆)은 청풍인이며 홍병용(洪秉容)은 남양인이다. 김종철의 아버지는 목사 치온(致溫)이며 할아버지는 판결사 성로(成魯)이고 증조부는 대제학 유(楺)이다. 홍병용의 아버지는 주부 주영(疇永)이고 할아버지는 대사헌 계적(啓迪)이다. 홍계적은 노론의 선봉으로 세제의 대리청정을 주장하다 최석항(崔錫恒)의 강력한 탄핵으로 조사를 받는 도중 옥중에서 죽었다. 홍병용은 감사인 석벽 홍춘경(石璧 洪春卿)의 아들 삼형제 가운데서 중간인 연기 홍일민(燕岐 洪逸民)의 8대 주손이다. 홍계적의 졸기이다.
원임 대사헌 홍계적(洪啓迪)이 옥중(獄中)에서 죽었다. 홍계적의 자(字)는 혜백(惠伯)이고, 본관(本貫)은 남양(南陽)이다. 사람됨이 준엄하고 결백하여 기이한 기상이 있었다. 젊어서 진사(進士)에 응시하여 제일인(第一人)으로 입격(入格)하였고, 숙종(肅宗) 34년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사간원에 들어가 정언이 되었다. 마침 숙종이 군신(群臣)들에게 연회(宴會)를 베풀고 있던 참에 홍계적이 대궐에 나아왔다가 금중(禁中)에서 노래 소리가 나는 것을 듣고 이에 상소(上疏)하기를,
“예의(禮儀)에 어긋난 음악은 인주(人主)가 들어서는 안되는 것인데, 신은 모르겠습니다만 금액(禁掖)에서 노래하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바야흐로 봄을 당하여 눈이 내리는 때에 연회를 벌려 탐락(耽樂)하는 것은 성인(聖人)이 정성(鄭聲)을 물리친 의의가 아닙니다.”
하니, 숙종이 가상하게 여겨 호피(虎皮)를 하사하여 권장(勸奬)하였으며, 홍문관 부제학에 승진시켰다. 경종(景宗)이 즉위하여서는 사헌부에 들어가 대사헌이 되었다. 다음해에 흑산도(黑山島)에 안치(安置)되었고, 또 다음해에 체포되어 한 달 남짓하게 있으면서 고문(拷問)을 받아 옥중에서 죽으니, 이때 나이 43세였다.
문양(文養)의 장자 시(詩)는 요절했다. 시(詩)의 부인은 청풍김씨로 현감 세연(世淵)의 딸이다. 김세연은 판서 종정(鍾正)의 아들이며 대사간 치후(致垕)의 손자이다. 세연의 어머니는 참의 신경(申暻)의 딸로 신경은 영의정 신완(申琓)의 손자가 된다. 신완의 졸기이다.
“신완이 외모는 비록 단아(端雅)하였지만, 속은 실로 흐리멍텅하고 겁이 많았으며, 부드럽고 유약하여 특별한 절조(節操)가 없었다. 젊은 날에는 한태동(韓泰東)과 조지겸(趙持謙)에게 붙어 청의(淸議)를 주장하였는데, 갑술년에 이르러 훈부(勳府)의 일 때문에 남구만(南九萬)에게 논박 받아 파직되었으므로, 속으로 원한을 품었다. 이때 문순공(文純公) 박세채(朴世采)가 토역(討逆)을 주장하여 남구만과 약간 차이[逕庭]가 있었는데, 신완의 무리가 마침내 사문(師門)을 구실로 삼아 당인(黨人)과 투합(投合)하였다. 뒤에 천관(天官)에서 시작하여 태부(台府)에 올라 임금의 뜻에 순종하고 열복(悅服)하여 오랫동안 권병(權柄)을 차지하고, 당인을 부식(扶植)하며 사류(士類)를 배척해 억눌렀으므로 여러 차례 환관(宦官)의 탄핵을 당하였다. 만년에는 기첩(妓妾)에게 마음이 홀리어 말하는 것마다 다 들어주었으며, 관직과 옥사(獄事)를 파니, 문정(門庭)이 저자와 같아 더욱 족히 볼 것이 없었다. 그러나 그 자상하고 돈목(敦睦)함에 대해서는 세상에서 또 칭송함이 많았다.”
김세연의 할머니는 전주이씨로 군수 이규수(李奎壽)의 딸이니 이규수는 전주이씨 효령대군파로 아버지는 현감 중구(重龜)이고 할아버지는 부제학 지항(志恒)이다. 순조조에 영의정을 지낸 이상황(李相璜)은 지항의 후손이다.
이규수의 부인은 대구서씨로 부사 정리(貞履)의 딸이며 달성위 서경주(達城尉 徐景주)의 손녀이다. 그리고 이규수의 어머니는 삭녕최씨로 영의정 최항(崔恒)의 후손인데 군수 여두(如두)의 딸이며 영의정 흥원(興源)의 현손이다. 최여두의 둘째 사위 정재숭(鄭載嵩)은 우의정이며 영의정인 정태화(鄭太和)의 아들이다. 이규수의 할머니는 감사 신감(申鑑)의 딸이고 영의정 신흠(申欽)의 질녀이다. 이규수의 부인은 대구서씨로 부사 정리(貞履)의 딸이며 달성위 서경주의 손녀이다.
김세연의 부인은 한산이씨로 군수 극영(克永)의 딸이고 이극영은 정랑 민진영(閔鎭永)의 사위이다. 민진영은 여양부원군 민유중의 아들로 흥선대원군의 처가가 이 가문이며 고종조에 외척으로서 정권의 중심에 있었던 민태호(閔台鎬) 민겸호(閔謙鎬) 민영규(閔泳奎) 민영환(閔泳煥) 등은 모두 민진영의 후손들이다. 이극영의 가문에서는 그의 삼촌인 판서 이태중(李台重)의 후손이 번창했는데 추사 김정희의 장인인 이희민(李羲民)은 태중의 손자이며 영의정 이경재(李景在)는 태중의 증손이고 헌종의 장인인 영흥부원군 김조근(永興府院君 金祖根)은 경재의 매부이다.
문양(文養)의 둘째 아들 모(謨)는 창원황씨 가문에 장가를 들어 황기석(黃基石)의 사위가 되었는데 황기석은 현감인 유정양(柳正養)의 사위이다. 여기서 보면 유정양은 모(謨)의 재종숙이니 모는 재종숙의 외손녀와 부부가 된 것이다.
황기석의 아버지는 판서 인검(仁儉)이고 할아버지는 대사헌 자(梓)이다. 그리고 어머니는 대사헌 홍계적(洪啓迪)의 딸이며 홍계적은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모(謨)의 고모부인 홍병용(洪秉容)의 조부이다. 홍계적의 맏사위, 그러니까 황인검의 손위 동서는 평산신씨로 영의정인 신회(申晦)이다. 신회의 형인 신만(申晩)도 영의정이다. 황기석의 할머니는 안동권씨로 부사 욱(煜)의 딸이다. 권욱(權煜)은 좌의정 상하(尙夏)의 아들이며 현감 김진수(金震粹)의 사위이다. 김진수는 경주김씨 계림군파로 감사인 경여(慶餘)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연평부원군 이귀(延平府院君 李貴)의 딸이다. 김진수의 부인은 소현세자의 장인인 우의정 강석기(姜碩期)의 손녀이며 영의정 신흠(申欽)의 외손녀이다. 황기석의 삼촌 황인점(黃仁點)은 영조의 사위가 되어 창성위(昌城尉)에 봉해졌다. 황인점은 사신으로 중국을 자주 왕래하였는데 동지사로 가는 길에 서장관으로 함께 갔던 인물이 이승훈(李承薰)의 아버지인 이동욱(李東郁)이었다. 이승훈이 이때 아버지를 따라 연경에 갔던 길에 천주실의 등 천주교 서적을 가지고 가지고 들어와서 공부했는데 그 후 천주교 박해가 시작되자 정사였던 그가 이승훈이 불온서적을 가지고 들어온 사실을 몰랐다하여 문제가 되기도 했다.
문양(文養)의 셋째 아들 의(議)는 광산김씨 가문에 장가를 들어 참판 기상(箕象)의 사위가 되었다. 김기상의 아버지는 참판 상익(相翊)이고 참판 익훈(益勳)의 5대손이다. 김익훈은 일찍부터 성품과 행실이 방자하며 부정축재를 많이 한다는 비난을 받았으며, 특히 1682년 남인 허새(許璽)의 모역사건 당시의 떳떳하지 못한 행동은 서인 내부 소장파의 반감을 부채질하여, 훈척과 서인 노장과의 협력에 소장세력이 크게 대립하고, 결국 노론과 소론이 분기하는 한 계기가 되었다. 어영대장 재직중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다시 정권을 잡자 공신호를 빼앗기고 강계에 유배되었으며, 무고한 사람들을 많이 죽였다는 죄명으로 고문을 받고 투옥되었다가 죽었다.
김기상의 어머니는 현감 홍계백(洪啓百)의 딸이다. 홍계백의 가문을 보면 계백의 아버지는 현감 우해(禹諧)이고 할아버지는 판서 수헌(受瀗)이며 감사 명원(命元)의 현손이다. 홍계백의 어머니는 영의정 이여(李畬)의 딸이며 할머니는 우의정 이숙(李䎘)의 딸이다. 홍계백의 부인은 좌의정 조태채(趙泰采)의 딸이다. 조태채는 경종조의 노론4대신 가운데 하나로 건저문제와 세제의 대리청정 문제로 강경한 주장을 하다가 화를 입었으나 영조가 즉위 한 후 노론이 집권하게 되자 그의 후손은 번창하였다. 그의 4촌들인 조태구(趙泰耈) 조태억(趙泰億) 등이 소론이었던데 비해 그는 노론으로 일관했으며 영의정들인 조두순(趙斗淳) 조병세(趙秉世) 등은 모두 조태채의 후손들이다.
홍계백의 외조부인 이여는 덕수이씨로 택당 이식(澤堂 李植)의 손자이며 이여의 아들인 도정 태진(台鎭)은 판서 김창협(金昌協)의 사위가 되었다. 김창협은 영의정 김수항(金壽恒)의 아들이며 형인 김창집(金昌集)도 영의정이다. 김창협의 가문은 물론 장동 김문으로 노론의 중심세력이자 안동김씨 세도정치의 중심에 있지만 학문적으로도 기호학파의 학맥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즉 기호학파 내에서의 호락논쟁(湖洛論爭)에서 김창협과 그의 손자 김원행(金元行)은 이간(李柬) 이재(李縡) 등과 함께 낙론(洛論)의 중심이 되었으며 권상하(權尙夏) 한원진(韓元震)이 중심이 된 호론(湖論)과 대립하였던 것이다. 김창협은 부제학 이단상(李端相)의 사위인데 이단상은 월사 이정구의 손자이다. 이여의 졸기이다.
“이여는 판서 이식(李植)의 손자였는데, 약관(弱冠)에 이미 문명을 떨쳤다. 처음 벼슬하여 사국(史局)에 천거되어 들어갔으며 이어 옥당(玉堂)에 선임되어 호당(湖堂)에서 사가(賜暇)하였다. 화직(華職)을 두루 거쳐 여러 번 전관(銓官)의 자리에 들어갔는데, 선인의 경계를 인용하여 힘써 사양하였으나 체직이 되지 않았다. 태사(台司)에 올라와서 더욱 경계하고 조심하여 마음을 편하게 가지지 아니하고 항상 국세(國勢)를 진작시키고 조정을 화합시키는 것을 자기의 임무로 삼았다. 언제나 당론(當論)이 나라의 화가 될 것을 걱정하여 일찍이 과격하거나 각박한 의논을 한 적이 없었다. 전후 상소하여 아뢴 것이 명백하고도 적절하여 간략하게 설득하는 뜻을 깊이 체득했다. 사문(斯文)의 큰 시비를 당하여서는 또 의연하게 의논을 정립하여 조금도 흔들리거나 의혹되지 아니하니, 사람들이 그 학력(學力)을 증험하게 되었다. 지위가 공상(公相)에 올랐으나 몸가짐은 한결같이 포의(布衣)의 선비처럼 하였으며, 거주하는 집이 좁고 누추하였으나 거처하는 데에 여유가 있었다.”
기상의 동생 기성(箕性)은 사도세자의 사위가 되었는데 사도세자가 장조(莊祖)로 추존되자 광은위(光恩尉)에 봉해졌다. 기성의 아들 재창(在昌)은 판서이고 재삼(在三)은 참판이다.
첫댓글 공부하고갑니다
잘읽었습시다 희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