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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아티아의 민족주의 기본 개념은 숙적 세르비아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병합을 그 완성으로 간주하고 있다. 이미 프라뇨 투지만 크로아티아 대통령은 1990년에 실시된 크로아티아 총선에서 보스니아에 대한 병합을 선거의 주강령으로 내세워 민족주의를 부추기는 전략을 구사했었다.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 전쟁이 소강상태에 접어든 시점에서 불 붙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내전은 세르비아 인이 주도권을 쥐고 있긴 했지만, 헤르체고비나를 중심으로 시작된 크로아티아의 공세도 격렬했다.
프라뇨 투지만
크로아티아 측이 보스니아 전투에 가장 중점을 두고 있는 이유는 보스니아에서의 크로아티아 인 생존권 보장이라는 측면도 있지만, 세르비아 측이 점령한 동부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의 북부 지방을 연결하는 이른바 세르비아 포위망을 차단하려는 측면도 강조되고 있었다.
그런데 정작 헤르체고비나 지역에서 전개되고 있는 크로아티아 민병대의 활동을 뒤집어 보면, 보스니아의 크로아티아 병합을 목표로 한 크로아티아 민족주의의 실현이라는 거대한 목표에 그 뿌리가 닿아 있었다.
크로아티아 민병대들은 크로아티아 방위 위원회라는 통합 사령부를 만들어 이 작전을 조직적으로 추진하고 있었다. 이슬람 지역을 점령한 크로아티아 민병대들은 세르비아와 마찬가지로 이들을 추방해 버렸다. 이른바 인종 청소가 크로아티아측에 의해서도 자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세르비아측은 1992년 4월 7일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세르비아 공화국’을 창설했다고 선언했다. 크로아티아 측은 즉각 이에 반응을 보여 크로아티아 방위 위원회를 모태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크로아티아 공화국’ 창설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공화국 수도는 6월 세르비아 민병대로부터 탈환한 모스타르(Mostar)로 잠정 결정했고, 군대와 경찰도 별도로 조직했다. 그리고 크로아티아 디나르를 공식 화폐로 유통시켰다.
이런 일련의 과정에 자그레브의 크로아티아 정부가 처음부터 개입했다. 1992년 7월 3일 크로아티아 민병대는 그루데(Grude)에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크로아티아 공화국 창설을 내외에 선포했다. 그러나 내전 당사국뿐만 아니라 유럽 각국도 이에 주목하지 않았다. 보스니아에 설치된 세르비아나 크로아티아 고화국은 둘 다 베오그라드와 자그레브의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누구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보스니아의 크로아티아 공화국 선포가 있었던 시점에서 각 세력의 보스니아 영토 분할은 대충 이렇다. 보스니아 인구의 31%인 세르비아측이 보스니아 영토의 65%를 차지했고, 그 뒤를 이어 인구의 17%인 크로아티아가 30%의 땅을 차지했다. 보스니아의 다수 민족인 이슬람 교도의 인구는 44%에 달했지만 이들이 차지한 땅은 사라예보를 비롯한 몇 개 도시에 지나지 않는 전 국토의 5%에 불과했다. 따라서 이슬람 교도의 대부분이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 세력권에 소속되었고 양측은 이슬람 교도들을 추방했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런 과정에서 엄청난 수의 난민이 양산될 수밖에 없었다.
크로아티아 민병대에도 세르비아 민병대의 체트니크와 유사한 별도 부대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은 익히 알려져 있다. 이들은 검은 셔츠를 입고 나치 독일과 우스타샤를 칭송하는 부대였다. 이들은 세르비아측의 살인 부대 체트니크와 마찬가지 역할을 하고 있었는데 특히 이들은 세르비아 부녀자들을 납치해 창고 속에 감금해 놓고 필요할 경우 세르비아측에 포로로 잡힌 크로아티아 민병대와 교환하는 비인간적인 일도 했다. 전쟁은 인간이 어디까지 잔인해질 수 있는지 시험해 보는 장소라고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현대의 우스타샤
190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소식이 전세계로 타전되고 있던 8월 3일, 6백여 명의 어린이들로 이뤄진 대규모 단체가 헝가리로 들어왔다. 그들의 부모는 이미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전쟁 지역에서 죽거나 행방불명되었다.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제대로 먹지도 놀지도 못한 이 천애의 고아들을 헝가리가 일시적으로 받아들였다. 이 고아들의 헝가리 도착은 유럽의 언론을 장식했고 보스니아 내전의 비극을 다시금 일깨우는 계기가 되었다.
유엔군의 감시하에 사라예보를 떠나는 노약자들. 버스차장을 통해 아버지와의 작별을 슬퍼하는 어린이와 아이의 엄마.
이들이 헝가리에 들어와 수용된 곳은 크로아티아 국경에서 약 4㎞ 떨어진 나지아타드라는 조그만 도시였다. 전에는 이곳에 육군 병영이 있었지만, 이 병영은 헝가리에서 제일 큰 난민 수용소로 변했다. 수용 규모는 5천 명. 회색빛 건물이 스산함을 자아내는 분위기의 이 난민 캠프에 수용된 사람은 모두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출신들이며 그나마 부녀자, 어린이가 80%를 차지하고 있었다. 어린이들은 군인들이 남기고 간 군사 시설을 놀이터로 삼아 뛰어놀았다. 또 부녀자들이 빛바랜 사진을 꺼내 눈물을 글썽이기도 하는 모습도 발견할 수 있었다. 사진 속의 주인공들은 전쟁에서 죽은 남편이거나 자식들이었다. 전쟁고아들과의 돌연한 만남, 그리고 뒤따르는 눈물의 절규는 명분 있는 전쟁이 결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 주었다.
전쟁 지역을 벗어나 다른 국가에 수용돼 있는 난민들은 그나마 다행스런 경우였다. 구연방 지역을 벗어난 유고 난민은 대략 40만 명 선이다. 그 절반이 독일에 수용되었고 나머지 대부분은 헝가리, 오스트리아, 스웨덴에 머물렀다. 그러나 보스니아, 크로아티아 등 구유고 연방 지역에 남아 있는 180만 명의 난민들은 구호품마저 제대로 전달받지 못했다. 전쟁의 공포와 식량난, 그리고 전염병의 3중고에 시달렸던 것이다.
모두 60만 명의 난민을 수용한 크로아티아는 계속 몰려드는 난민을 감당하지 못해 보스니아 쪽의 국경을 폐쇄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국경을 넘으려는 난민을 기관총 공포를 쏴 해산시키는 일도 일어났다. 필사적으로 국경을 넘으려는 난민과 크로아티아 국경 수비대 간의 충돌은 전쟁 기간 내내 끊이지 않았다.
6만 명의 난민들이 수용되어 있는 헝가리도 마찬가지 입장이었다. 특히 헝가리는 루마니아(200만), 우크라이나(20만), 슬로바키아(60만), 세르비아의 보이보디나 자치주(45만), 크로아티아(2만 5천)에 각각 소수 헝가리 민족들이 살고 있어 이들의 본국행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다.
이례적으로 20만 명의 난민을 받아들인 독일과는 달리 다른 서구 유럽 국가들은 자국의 이해를 앞세워 난민 수용에 난색을 표명했다. 이탈리아는 아예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에 난민 캠프 건설 자금을 제공하겠다는 제의를 했고, 프랑스와 영국 등도 국내 사정을 내세워 소극적인 입장을 일관했다. 독일도 1996년 후반 들어 보스니아 평화 협정이 표면화되자 자국 내의 난민들을 일괄 송환키로 했다. 그러나 난민들이 살아가기에 좋은 독일에 계속 남아 있겠다는 입장을 표명하고 시위까지 벌여 독일 내에서 사회문제가 되기도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