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레 8코스 시작 지점인 월평포구를 잘못 찾아들어서 대평포구에서부터 걷기 시작했다. 몇몇 사람이 앞서 걷는다. 가볍게 인사를 주고받았다. 올레를 표시하는 파랑과 노랑 끈이 가끔씩 나뭇가지에 매달려 바람에 흔들렸다. 올레 8코스는 대체로 바닷가를 끼고 걷는다. 이제 막 피기 시작한 진분홍 유도화가 유독 많다. 해당화는 이미 지고 주황색 열매를 매달고 있다. 두어 개 따서 바지에 쓱쓱 닦아 먹어 보았다. 달큰하고 시큰한 맛이다. 어렸을 때 먹던 찔레열매와 비슷하다. 거의 끝물인 산딸기도 몇 개 따먹었다. 오가는 사람들이 모두 이리 따먹는다면 이도 문제일 것 같다. 길가 풀들과 꽃들에 고개 숙이니 무당벌레가 짝지기 하는 모습도 볼 수 있고 손톱보다 작은 꽃들의 꽃술도 보인다.
쉬엄쉬엄 걸었다. 시에스 호텔 부근엔 ‘아름다운 가게’와 ‘카페’가 있었다. 모두 제주식 초가형태 건물이다. 그 또한 눈을 즐겁게 했다. 일부러 ‘카페’에 들러 쉬었다. 실내는 정갈하고 시중드는 이들은 깔끔했다. 건물 외관도 실내장식도 제주다운 것이었을 텐데 오히려 이국적으로 느껴졌다. 토마토 생과일주스는 4천원이다. 소박하지만 깨끗하고 멋스러운 장소에서 싼값으로 마실 수 있으니 그 짧은 순간이 참으로 즐거웠다.
바닷가 올레엔 파도소리와 검은돌들과 이따금 새소리도 동행했다. 눈푸른 외국인들도 탄력 있는 검은 피부 외국인들도 중문 해수욕장의 여유와 아름다움을 즐기는 모습들이 간간이 보인다. 바람의 방향에 따라 해와 구름의 숨바꼭질에 따라 바닷물색은 수시로 바뀌었다. 바다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나, 바닷가에 서서도 바다 자체엔 늘 무감했던 나, 그런데 이번에는 좀 다르다. 옥색도 짙푸른 초록색도 회색이 감도는 푸른색도 모두 가슴을 물들였다. 자주 눈길 주었고 눈길에 마음도 얹혀 갔다. 바닷가에 서면 아! 혹은 와! 하는 탄성의 순간이 지나자마자 아득한 수평선이 너무 막막하고 먼지처럼 작아지다가 마침내 소멸해 버리는 나 자신을 보는 무력감이 버거워서 바다를 회피했다. 그런데 지금 걷고 있는 이 바닷가길에서는 그런 무력감도 막막함도 없다. 정면으로 마주하지 않고 어깨동무하듯 옆에 두고 걸어서일까. 바다와도 친구처럼 지낼 수 있을 듯 친근했다.
신의 조각품 주상절리에 감탄하고 나니 국제컨벤션센터 앞은 꽃바다로 출렁인다. 사람이 만든 아름다움도 신이 만든 자연의 아름다움 못지않다. 코스모스, 오렌지색 금련화, 하얀색 큰데이지, 노란 유채꽃, 이름 모를 흰꽃과 보라색꽃 물살이 남실댄다. 꽃바다 사잇길에서 배드민턴 셔틀콕처럼 한껏 솟구쳐 튀어 올라 본다. 그러나 몸이 무거워 겨우 깡충깡충 수준이다. 랄랄랄라 콧노래 저절로 나온다. 이 충만한 행복, 며칠은 가리라.
중문단지 하얏트 호텔 산책로는 발길마저도 고요하게 안정시킨다. 초록잔디밭에 갈색 나무판을 깔아놓은 길, 왼쪽 어깨엔 바다가 동무하고 오른쪽 어깨엔 호텔 창문들이 동무한다. 다음에 다시 제주에 온다면 저 창문이 있는 방에서 묵으며 돈으로 살 수 있는 호사를 맘껏 누려 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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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굴도 지나고 해병대길도 지났다. 해병대길은 돌길인데 동굴동굴한 둘들을 편편하게 높이를 맞춰서 걷기 편하고 보기 아름다웠다. 올레길 중간중간엔 깨끗한 화장실도 있어서 긴 시간 걷기에 불편하지 않았다. 제주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손길이 느껴졌다. 이제 대포포구가 가까워 온다. 올레 표시리본을 따라 해녀 식당을 알리는 리본이 따라왔다. 올레 소갯글에 나온 어여쁜 카페 겸 식당을 지나 리본으로 안내해온 해녀 식당을 찾아들었다. 일일이 리본을 묶어둔 손길을 외면할 수가 없었다. 소갯글에 나온 식당보다 한산하다. 식당을 지키는 두 모녀 외엔 아무도 없다. 백반 정식과 자라돔 구이를 주문했다. 식당 여주인은 묻지도 않았건만 제주 사람이 아님을 강조했다. 그래도 올레 걷기가 시작되고부터는 찾아오는 사람들이 있어서 장사가 조금 나아졌다고 한다. 음식은 맛있었다. 오후 2시, 걷기 시작한 지 5시간 조금 더 지났으니 시장이 반찬이기도 하겠지만 여주인의 솜씨가 좋았을 것이다. 특별히 주문한 ‘자라돔 구이’보다 백반에 곁들여 나온 ‘밴자리 구이’가 정말 맛있다.
동네 시내버스 정류장에서 시내버스 오기를 기다렸다. 시간이 지나도 출발을 하지 않는다. 결국 우리 일행 외에 한 사람을 더 태우고 중문을 향해 출발했다. 중문초등학교 앞에서 내려 택시를 타고 승용차 세워 둔 곳으로 되짚어 갔다. 금세 가버린 이 길을 5시간 남짓 걸었다. 왜 걸었을까. 걷기가 풍경에 대한 관조고 삶에 대한 명상이라고 하지만 나는 아직 그렇게 거창한 의미를 모른다. 다만 제주 올레를 만든 한 여인의 집념을 알고부터 그 길을 걸어보고 싶었을 뿐이다. 한 사람의 집념은 고독하기 마련이다. 그 고독이 빛나는 성과가 되려면 고개 끄덕이며 함께해 주는 사람들이 있어야 한다. 사심 없는 동행이 한 사람의 집념을 활짝 꽃피우는 거름이 된다.
산방산 아래 용머리 해변길을 걷는다. 세월과 바람과 파도가 빚어낸 시간의 퇴적물이다. 저기 저 절벽 주름 사이사이마다 아득한 고대의 파도소리가 묻혀 있겠지. 그냥 눈으로 일별하지 않고 한번은 내 발로 딛고 손으로 만져보고 싶어 위험접근 금지 구간에 올라 사진을 찍었다. 5천원 주고 제주 조랑말도 탔다. 그냥 걷기만 할 땐 마냥 신났는데 말이 뛰기 시작하자 겁이 나고 엉덩이도 너무 아팠다. 그래도 즐거운 체험이었다.
돌아가는 길 무인 카페 ‘오월의 꽃’ 앞을 지나게 되었다. ‘아, 여기가 거기구나.’ 인터넷 순례하다가 발견했던 곳이다. 온통 하얀색으로 칠해진 이 카페에서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내 눈에 좋았던 것은 다른 이들의 눈에도 좋은가 보다. 카페 안엔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은 모두 스스로 차를 만들어 먹고 대화를 나누고 설거지까지 하고 나가야 하는 이 무인카페를 즐기러 온 사람들 같다. 실내엔 온기가 가득했다. *숙 씨가 커피 한 잔 만들어왔다. 사진 찍고 놀다가 찻값으로 5천원을 돈통에 넣고 나왔다. 기분이 참 좋다. *숙 씨의 옛 동료와의 저녁 약속 시간이 가까웠지만 기분 좋은 여운을 즐기려고 한 코스 더 들리기로 했다. 바로 저지리 예술인촌에 자리잡고 있는 야생화 전시원인 ‘방림원’이다. 이 곳 역시 한 여인의 30년 집념의 결실이다. 야생화 좋아하는 *숙 씨는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한다. 오밀조밀 아기자기한 전시실과 실외 공간엔 약 3천여 점의 야생화와 식물들이 있다. 오랜 세월 오직 야생화만을 위해 살아온 한 사람이 이루어낸 결실, 이런 곳이 바로 낙원이다. 이곳에서 꽃을 볼 수 있어서가 아니다. 그것이 꽃이 아니어도 자신을 다 바쳐 이루어낸 결실은 나를 감동시킨다. 이 순수한 감동을 낙원이 아닌 어느 곳에서 받을 수 있겠는가.
자연도 꽃도 아름답다. 그러나 사람도 참 아름답다. 오래 전 인연을 귀하게 여기고 식구 모두 나와서 함께 저녁을 먹으며 지난 시간 동료로 함께 나눈 정을 따스하게 추억하는 시간, 사람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아름다움이다. 한라수목원 앞 ‘연우’에서 먹은 야채비빔밥과 감자부침은 담백하고 깔끔한 맛 못지않게 함께한 사람들의 우정이 돋보였다.
숙소로 돌아오니 10시가 넘었다. 다리가 무겁긴 하였지만 생각했던 것보단 덜 힘들었다. 쉬멍 놀멍 걸은 탓도 있겠지만 기분 좋게 걸으며 기분 좋은 만남을 가져서일 테지. 오늘은 내가 바닥에서 자기도 했다. 이부자리를 깔고 바람과 햇빛에 그을린 얼굴에 해조 마스크팩을 한 장 붙였다. 피로마저도 달콤하다. 깊은 잠을 잘 것 같다.
첫댓글 그길들을 모니터 앞에서 같이 걸었습니다..하루의 여정을 불과 몇분안에 공짜로 같이하니 왠지 죄송스럽군요..^^
아니요. 함게 걸어주니 오히려 내가 고맙답니다.
오늘도 기억에 남는 말..자연도 꽃도 아름답다.그러나 사람도 참 아름답다..그렇게 미루님처럼 단정적으로 쓸 수 있는 날이 올까요.? ㅎㅎ 정말 부럽습니다. 저같으면.자연도 꽃도아름답다. 사람도 그렇게 아름다웠으면..혹은 아름다울까..? 혹은 아름답기를.. 그럴 것 같아요.꽃옆에 서보면 특히나 아무도 보살펴주지않는데도 돌틈 사이,아스팔트 사이로도 핀 꽃들을 보면 어쩜 저리 대견하고 기특할까..나보다 훨 낫다..보는 이,맘주는 이 없어도 저리 꿋꿋한 것을..미루님 이번 여행으로 미루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충만한 행복이 며칠은 갈 것 같아요. 덩달아 저까지도요..아 저도 요사이 어디로라도, 어디로라도..어디 바깥이기만 하다면..
알랭 드 보통의 그 말처럼.. 정말 어디든..일상의 짐을 벗어버리고 일주일 이상 훌쩍 떠나보고 싶어요. 너무 오랜 동안 서울에서 앵앵거리며 살고 있는 듯해요.어떤 상표의 마스크 팩을 붙였을까요../ 궁금해요. ㅎㅎ
떠났다 제자리로 돌아올 수 밖에 없는데도 떠나고 싶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일상을 지리하고 사소하게 여기는 내 시선을 수정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해요. 나이 많은 부시시한 아주머니가 판매원인 동네 화장품 가게에서 1,000원 주고 샀어요.상표는 익히 알고 있는 게 아니라서 생각도 안 나요. ㅎㅎ
미루님 표현 넘 구엽습니다. 나이많은 부시시한 아주머니.ㅎㅎ 안봐도 떠오릅니다. 그 부시시한 아줌마 바가지도 씌운 거 같아요. 보통 이름없는 마스크팩 천원까지는 안하는데. ㅎㅎ 올리브영에선 제법 좋은 것도 행사 기간에 500원에 두장도 하는데용. ㅎㅎ참고로 전 마스크 팩을 하루도 안거르고 애브리데이 하거든요. sk 투부터 저렴한 것까지 안써본 거 없는데요. 그래서 관심많아서 질문드린겁니다. ㅎㅎ(그래도 피부는 나쁨..ㅎㅎ)
섬이고 작은 마을 가게였으니 운반비가 좀더 얹혀진 것이겠지요. 올라오는 날 면세점에서 Sk 투 마스크 시트지를 샀어요. 여행 중에도 돈을 비교적 아끼는 편인데 걍 샀ㄴ느데 아직도 안 붙였어요. 면세 가격에 6장들이가 무려 8만원이 넘어요. 내가 잠깐 정신이 나갔었나 봐요. 피부는 잘 자야 좋아요. 미인은 잠꾸러기, 괜한 말 아니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