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산 종사님의 설법을 일부 정리한 글.
<불교 화엄철학>
"겨자씨 하나가 히말라야 산보다 크다."한다.
그것은 한 사람이 중요하다는 것, 한 사람에 전체가 같아 있다.
교의 품 4장을 보면 일원상의 내역은 사은의 내역이다.
숲을 볼 때도, "숲이 아름답다, 좋다." 고 하지만 한 그루의 나무가 없이는 전체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 한 그루의 나무까지 중요하게 여기는 것, 그것이 바로 후천 개벽 사상인 것이다.
선진님들을 뵈면, 하나같이 모두가 "대종사님이 나를 제일 챙기고 아껴주셨다."고 하신다.
대종사님은 그 한 사람 한 사람 속에서 전체 제자를 보신 것이다.
<일원상 서원 문>
동양은 '절대적 진리'를 신앙의 대상으로 하고,
서양에서는 '절대자'를 신앙의 대상으로 해왔다.
이것은 선천 시대의 신앙 형태로, 미물곤충에까지 이를 수는 없다.
그래서 종교가 많지만, 대종사님 또한 한 회상을 여신 것이다.

일원상 서원 문에서
'~무량세계를 전개하였나니'까지는 일원상의 내역이고,
'우리 어리석은 중생은~'부터는 서원이다.
일원상과 하나가 되겠다고 '서약'을 하면, 순간순간 지켜가야 한다.
일원상 서원문은 원불교 교도만이 아니라 이 세상사람 모두가 암송해야 할 것이다.
'반야지'는 마음 바탕에 깔려 있어서, 마음 작용을 할 때,
착한 마음이 나올 때 반야지의 싹이 나오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 작용은 제8식(분별 이전의 한 마음)부터
제 7식('나'다 하는 생각, 최초의 한 생각) 제 6식(마음, 의식) 제 5식(오감 작용)까지이다.
분별 심'은 중요한 것이다.
이게 없으면 무엇을 볼 수도, 들을 수도 없다.
그러나 분별심이 제대로 못 쓰여 짐은 무엇 때문인가?
불교에서는 '집착'으로 이야기했고,
원불교에서는 '끌린다,'로 이야기한다. 한 생각 일어날 때, 거기에 머무르지 마라.
성리 품 11장(변산구곡로 석립청수성 무무역무무 비비역비비)에서도
'이것이 있다'는 생각은 나도 있고, 재물도 있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조차 없다고 하셨다. 집착이 없고 끌림이 없으니 없는 것도 없는 것이다.
대종사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세상 사람들은 딱 두 가지 생각만 있다고 하셨다.
'이것이 있다'는 생각과 '이것이 옳다'는 생각이다.
일원상 서원문의 내용은 사은이다(천지 부모 동포 법률의 본원이요).
우리의 신앙의 대상은 사은이다. 또한 수행의 표본이다.
능이성 유상하고, 능이성 무상하여 -
능이 있어 유상으로 이루기도 하고, 능이 있어 무상으로 이루기도 한다.
'체'는 '불변'이지만 '용'은 '변'이다.
사람을 예로 들자면, 사람을 등으로 보면 일직선으로 내려온다. 그것이 체다.
그러나 앞에서 보면 울퉁불퉁 나와 있다.
이 두 가지를 합해야 사람의 전체가 된다.
상주불멸 -
항상 머물러서 없어지지 않는다. 항상 변화하는 것이 계속된다.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아주 없어지지 않는다, 는 것이다.
여여자연 -
계속 순간순간 변화하는 것이 언제까지나 계속된다.
무량세계를 전개하였고-
한량없는 세계를 전개하였고. 시간적으로는 영원하고, 공간적으로는 다양하다.
불교와 원불교는 무시무종 사상이 바탕이 된다.
성.주. 괴.공 -
이루어졌다 머물렀다 허물어졌다 없어진다.
이것은 크게 '대체'로 말씀하신 것일 뿐이고, 변의 품 4장에서 보듯,
성주괴공이 시시각각으로 이어진다.
불교의 연식계산과 다르다.
'성'과 '괴'만 있다. 공이라는 것도 없고, 이루어지고(성) 허물어지는 것(괴)만 있다.
주는 이루어져서 무너져가는 상태. 공은 허물어져서 있어져가는 상태다.
육도로 변화를 시켜 -
네 마음이 고락에 빼앗기지 않으면, 극락이다. 마음속의 육도다.
혹은 -
지은 바에 따라. 수행력이 커지면 진급으로, 나태하고 악업을 지으면 강급으로.
은생어해 -
은혜는(행복은) 해(고통)에서 태어나기도 한다. 고 노무현 대통령이 농협채용시험에서 떨어졌는데, 그랬으니 대통령까지 간 것이다.
해생어은 -
순경에서는 마음이 풀어지지만, 역경에서는 분발하는 힘이 나온다.
원불교 분당교당 카페에 글
첫댓글 하! 원불교의 일원상진리를 올려놓으셨네요! 아주 좋습니다.
이처럼 종교란 고집하고 독선하면 안 됩니다.
모든 종교가 진리적인 면에서 하나입니다.
서로 넘나들고 원융회통을 지향해야죠. 그게 삼동윤리라는 것입니다.
예! 일전에 선배님께서
일원상 진리를 접해보라 하시기에
돌아다니다 분당 카페에거 접했습니다!
틈틈히 더 읽어 보겠습니다!
삼동윤리! 고맙습니다!^^
아주 잘하셨습니다. 그
만큼 견문과 식견을 높일 수 있는 방법입니다. 수고 하셨습니다.
예!저는 원불교에 대해서는 하나도 모르고 있었습니다만
같은 불교가 아니었습니까?
깨달음!
깨닫고보니 깨달을것이 없다는걸,
깨닫는게 깨달음 이라 한다 고 하던데요!ㅋㅋ
본래 불교는 큰집, 원불교는 작은 집 아닌지요?
불교가 하도 오래 되다보니까 개혁의 필요성이 대두 된 것이 아닐까요?
그 부름에 응해 과거의 불교를 시대화 생활화 대중화 시킨 것이 원불교입니다.
어쨌던 불교든 원불교든 구원을 받는 것이 꿩 잡는 매 아닌가요?
다만 교조님이 불교는 인도 석가모니 부처님이고 원불교는 한국 그것도 전라도 영광 땅에서
태어나신 소태산부처님이 다른 것입니다.
예!
계정혜를 정혜계로 하신 말씀 뜻도 이해가 됩니다!
헛소리 하지말고, 일단 깨닫거라!
깨닫고 나면, 그 후는 자연스레 된다!
그런 말씀 이신 것 같습니다! 에구, 또 헛소리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