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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기자에게는 ‘국장 같은 책임
하인 같은 책무‘가 따른다
글 정운종 (전 대한언론인회 부회장 겸 상임이사)
<윤임술 약력>
1923년 2월 20일 경남 의창군(현 경남 창원) 대산면 가술리 출생. 아호 萊山
1943년 일본 릿쇼대 불교학과 중퇴.
1945년 민주중보 사회부기자
1955년 국제신보 편집부국장
1956년 연합신문 편집부장
1958년 세계통신 편집부국장
1960년 한국일보 편집부국장, 편집위원
1964년 조선일보 편집부국장
1965년 신아일보 창간 편집국장
1969년 서울대학교 신문대학원 연구과정 수료
1972년 신아일보 상무이사 겸 논설주간1973년 한국신문연구소 소장
1975년 신문회관 부이사장
1981∼1986년 한국언론연구원 초대 원장
1985년 언론중재위원회 부위원장
1986∼1988년 부산일보 사장
1991년 4월 한국자유총연맹 총재 직무대행
1996년∼2023 일경언론문화재단 이사장
1997∼2003년 조선일보 사료연구실 고문
2004년 대한언론인회 자문위원
<수상>
* 77년 서울시 문화상(언론부문)
* 83년 한국신문상
<차례>
편집기자의 대부 윤임술(尹壬述)
1. 일본서 키운 신문기자의 꿈-----------------------
2. 민주중보 사회부기자로 언론계 첫발--------------
3. 조선일보 편집부국장에서 신아일보 초대편집국장으로--
4. 신문편집의 제갈공명----------------------------
5 방대한 언론사료집 편찬
6. 신문풍진(新聞風塵) 부산일보사장시절-----------------------
7. 100세 노년의 열정 ‘지방언론 육성’--------------------
8. 망부곡 ‘나팔꽃 일기 10년’-------
신문편집의 달인 윤임술(尹壬述)
윤임술 원로회우가 신아일보 초대 편집국장 재직 시 모시고 신문을 만들었던 50여 년 전을 비교적 소상히 기억하고 있는 입장 때문일까 ‘한국언론계의 거목 윤임술’ 편을 필자가 쓰게 되니 만감이 교차한다. 한편 고인께 누가되지나 않을까 하는 생각에 솔직히 송구한 마음으로 이 글을 쓴다. 삼가 고인(이하 호칭은 ‘윤임술 사장’으로 통일)의 명복을 빌며 여러 자료를 취합해 고인의 행적을 나름대로 정리해 본다. <필자의 변>
1. 일본서 키운 신문기자의 꿈
윤임술 사장은 1923년 2월 20일(실제론 1922년 임술 년 출생) 경남 창원에서 태어나 1943년 일본 立正대 불교학과를 중퇴했다. 그러니까 8.15해방 전 일제의 학병 강제 징집으로 어수선 할 때 일본 유학의 길을 택한 것이다.
해방직전 일본은 학병권유가 절정에 달했다. “일제는 너무나 조직적이었다. 하숙집으로 학교로 매일 고향의 집에서 친 전보가 날아들었다. 그 전보 내용은 모두가 ‘집에서는 승낙을 하였으니 하루빨리 학병을 지원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뒤에 집에 돌아와서 보니 전보 친 일은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알고 보니 관계 관청에서 조작으로 만들어 친 전보였다.” (1972년 1월 20일 발행 ‘청춘만장’ 290~291쪽, 윤임술 기고 참조)
이 같은 상황으로 미루어 윤 사장이 일본 유학의 길을 택한 것은 기왕 학병으로 끌려 갈 바엔 일본으로 건너가 공부를 좀 더 하는 것이 후일을 기약할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해 과감하게 일본 立正(릿쇼) 대학의 문을 두드렸다고 보아 틀리지 않을 것이다.
당 시 일본 릿쇼대학은 1580년에 설립된 일련종 스님의 교육기관을 연원으로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1904년 전문학교령에 의거 일본 문부성의 인가를 받은 구제전문학교로서 고등교육기관의 지위를 명실상부하게 갖추고 1924년(다이쇼 13년) 문부대신의 허가를 받고 구제대학으로 승격된 대학이다. 불교학은 물론이고 오래 전부터 심리학, 역사학, 지리학 연구에도 힘을 쏟았다. 수도권 대학 최초로 심리학부를 설치했고, 사학과는 일본의 사립대학 중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를 지닌 대학이다. 특히 고고학은 일찍부터 불교고고학 분야를 개척해 전 일본 고고학계에서 독자적인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윤임술 사장이 바로 이 대학 불교학과를 택해 유학의 길에 오른 것이다.
막상 이역만리 타국에서 대학공부를 하게 되니 당장 학비조달이 초미의 과제였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신문 배달, 그가 신문기자의 꿈을 키운 때가 바로 이 무렵이다. 윤 사장의 손녀 윤기숙씨는 "할아버지는 일본에서 유학할 때 신문 배달을 하며 언론인의 꿈을 키웠다고 하셨다"고 말한 것으로 미루어 유학시절은 고학으로 힘겨운 나날을 보내야 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2. 민주중보 사회부기자로 언론계 첫발
윤 사장은 일본 유학에서 돌아오자마자 1945년 9월 1일 창간한 한글신문 중보(1945년 군정기인 9월 20일 제호를 민주중보로 변경하고 1949년까지 발간)의 문을 두드렸다. 8.15광복 직후 혼란기에 새 소식을 전하는 부산 유일의 신문이었던 중보의 사회부기자가 된 윤임술은 1949년 이 신문이 문을 닫자 바로 국제신문으로 자리를 옮겼다. 국제신문은 1947년 9월 1일 김형두가 주체가 되어 동아산업신보와 주간 수산신문을 통합하여 산업신문으로 출발했다. 1950년 제호를 ‘국제신보’로 바꾸었다가 1977년 6월 1일에는 다시 ‘국제신문’으로 바꾼 신문이다.
윤임술은 도하 각지가 6.25 전쟁의 전황을 보도했을 때부터 부산 남포동으로 옮겨 전국제일 신문으로 활기를 띌 때를 포함해 6년 남짓 이 신문에서 신문기자의 자리를 굳혀 갔다. 윤임술 사장은 ‘국제신문 50년사’에서 ‘6년 남짓한 기간 이 신문에서 6.25전쟁의 전황을 보도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고 술회한바있다. 윤임술은 이처럼 6.25전쟁 중 언론사들이 임시수도 부산에 있을 무렵 국제신보 편집부 데스크를 맡아 급박한 전쟁 상황을 신속하게 보도하는 뉴스 편집에 탁월한 역량을 발휘하면서 정통 편집기자로의 성장가도를 치닫게 된다.
3. 조선일보 편집부국장에서 신아일보 초대편집국장으로
이 같은 노력으로 국제신문에서 일약 편집부국장의 자리에 올랐고 뒤이어 1956년 연합신문 편집 부국장으로 자리를 옮긴다. 1949년 1월 22일 양우정이 창간한 연합신문은 논설보다는 기사위주로 된 편집체제와 적극적인 가두판매방식으로 대중적인 인기가 높았던 신문이다. 이 당시 신문사 사정은 여러모로 재정이 열악했고 그 명맥을 유지하는 데는 많은 시련이 뒤따르기 일 수였다. 이 신문에서 신문 편집 제작 기술을 익힌 윤임술은 1958년 세계통신 편집부국장을 거쳐 1960년 한국일보 편집위원, 1964년 조선일보 편집부국장 자리에 올라 신문제작에 몰두하게 된다.
이 같은 윤임술을 유심히 관찰해 왔던 신문인 장기봉이 1965년 5월 새 신문 신아일보를 창간하면서 그를 초대 편집국장으로 발탁하니 윤 사장의 신문인생에도 일대 전환기를 맞게 된다.
한국 최초 다색도 신문이었던 신아일보 편집국장 시절은 윤 사장의 신문 인생의 절정기였다. 창간작업을 총괄 주도했는가 하면 직접 신문사 편집국 진용을 갖추고 진두지휘하면서 발군의 역량을 발휘했다. 한국신문편집기자의 대부로 평가받을 정도로 다재 다능,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신문지면을 다채롭게 장식 한국신문계에 선풍적인 바람을 일으켰다.
4. 신문편집의 ‘제갈공명’
윤 사장은 이때 개성 있는 편집을 주도해 화제가 됐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으로 사진을 과감하게 키우고 컷과 제목을 타지보다 더욱 크고 돋보이게 만들었다. 영상매체 시대에 대비한 ‘읽는 신문에서 보는 신문’으로의 전환을 꾀했던 것이다.
신아일보 창간 당시의 편집국 인원은 20명 내외에 불과 했지만 수십 년의 역사를 가진 신문들과 경쟁하기 위해 다양한 지면과 생활면에 파고드는 신문을 만들려고 애를 쓴 ‘윤임술 사단’의 신문편집 스타일은 '읽는 신문' 에서 '보는 신문'으로의 전환을 앞당기게 된다. 윤임술 사장은 이 신문에서 독창적으로 새로운 난을 많이 개설하기로 소문나 있었다. 종교 관계 기사가 정기적으로 취급되지 않았던 때라 종교계 난의 인기는 종교계에서 크게 환영을 받았다. 서울시내 소식을 깊이 있게 보도한 ‘서울백과’ 난도 처음으로 사용한 용어였다. ‘사교계’ 난도 신선한 반응을 일으켰다.
특히 임기응변의 두뇌 플레이가 돋보이는 대목은 1969년 일면기사에 아폴로 우주선에 탑승한 암스트롱이 인류 최초로 달 표면에 내려딛는 사진을 대서특필해 이목을 끌었던 일이다. 이는 더딘 전송사진을 커버하기 위해 실제상황을 전제한 연출사진을 미리 구해 놓았다 보도함으로서 독자의 궁금증을 충족시키는데 기선을 제압한 단면이라 할 것이다. 이 같은 파격적인 아이디어가 표출된 신문제작으로 명성이 자자했던 윤임술 사장을 가리켜 ‘한국 신문 편집의 선각자’ 로 보는 것은 결코 과장된 평가라 할 수 없을 것이다.
이 당시 윤임술 편집국장이 겪어야 했던 수난도 적지 않았다. 강두순 당시 사회부장과 함께 검찰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은 것은 1966년 3월 4일 이른바 '차균희씨 내사‘ 관련 보도를 문제 삼은 것이다. 문제의 치균희씨 내사 기사는 검찰이 농약살포용 농기구인 자동분무기 대량공급을 둘러싸고 거액의 금품이 전농림부장관 차균희씨에게 오고 간 정보를 입수하고 차균희씨를 내사했다는 내용이다. 3시간에 걸친 심문 끝에 풀려난 이 사건은 신아일보 창간 이후 최초로 당한 윤 사장의 필화사건으로 기록된다. 윤임술 사장은 이밖에도 72년 3월 26일 이른바 서울 이문동 약혼녀 집 방화사건 기사와 관련해서도 당국에 연행되는 곤욕을 치렀다.
“막중한 편집기자의 책임”
윤임술 사장은 신문은 편집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편집기자를 가리켜 희랍신화의 주신 주피터라도 머리를 숙인다고 한다。너무나 과찬의 말이지마는 그 정도로 편집기자는 신문기자 중에서도 중요하고도 고생스런 일을 많이 한다는 것을 비유한 것 같다.”(윤임술 저 신문풍진초 298쪽 참조)
“우리나라에서도 아무튼 고생스런 일을 하고 있는 직업이 기자라는 것은 알려져 있으면서도 그만큼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다. 반면에 편집기자 자신들은 자학에 빠져 어쨌든 이 편집기자 만큼은 면해야겠다고 어느 구멍을 뚫어서라도 빠져 나가려고 애를 쓴다. 여기서 빠져나가 출입처 같은 것을 가진 사람들은 해외에 갈 기회도 있고 그래도 생활이 낫다고 하며 편집기자를 오래하면 할수록 점점 늘 푼수가 없어져 결국에는 밀려나가 편집기자로 늙은 것을 후회한다는 일부의 말들이 있다. 오늘의 한국의 편집기자란 직업은 다 같은 신문기자이면서 이론상으로는 우위에 속할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자기 불만과 비례할 만큼 형편없는 위치에 있다고 해도 과히 틀린 말은 아닐 것 같다.” 이 같은 윤 사장의 편집기자관(編輯記者觀)은 그가 이 분야에서 겪어야했던 많은 애환을 함축하고 있어 시 사 하는바 적지 않다.
윤임술 사장은 특히 편집기자에게는 ‘국장 같은 책임 하인 같은 책무가 따른다’는 인식을 갖고 있다. “국장 같은 직업、직공 같은 직업、하인 같은 직업、 중간연락책 같은 직업”、 이것이 편집자의 책임이고 임무라고 본 것이다..
‘시대에 대한 정당한 견식을 토대로 뉴스의 가치 판단에 실수가 없어야 하고 여론을 좌우하는 일보 전에 있는 것이 신문이라면 과격한 표현이나 지나친 취급태도는 언론의 폭력행세가 되기 때문에 한 줄의 제목에서나 몇 자의 기사표현에도 언제나 중용과 이성을 잃어서는 안 된다는 지극히 평범한 상식을 망각해선 안 된다’는 것이 윤 사장의 지론이자 편집기자관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편집기자는 때에 따라서는 참모가 되어야하고 지휘자가 되어야하고 또 어떤 때는 제일선의 전투원이 되어야 하며 뉴스를 손에 잡았을 때는 그것의 취급에 대하여 직감적으로 관련기사나 해설 등을 각부에 연락 한다든지 외국의 뉴스일 때는 사진 기타, 나라의 풍속 등 등 까지 일사천리로 연락이 되고 지면제작에 누구보다도 다양성 있는 역할을 자연스럽고 민첩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윤 사장의 이 같은 인식은 그가 신문편집 분야에 종사하면서 중요한 좌우명이었음을 감지할 수 있다.
윤 사장이 타계하기 까지 줄기차게 주장해온 ‘신문활자키우기’도 경청해야할 대목이다. "앞으로 고령자가 더욱 많이 늘어납니다. 종이신문을 음미하는 독자가 더 늘어납니다. 그런데 활자를 이렇게 내버려두면 안 되지요. 우리나라 기자들 수준도 높고, 기사 내용도 좋은데 읽지 못하게 만들어놓으니 자꾸만 외면 받는 겁니다. 우리와 사정이 다른 미국이나 영국 신문시장을 보지 말고 활자를 확 키워놓은 일본 시장만 잘 읽어도 우리나라 종이신문은 더 많은 독자 확보가 가능할 것입니다."
윤 사장은 신문사가 활자를 키우는 결단을 한다면 우선적으로 사설이나 칼럼 활자부터 키워보라고 제언했다. "돋보기를 쓰면 신문을 오래 읽지 못합니다. 파일럿 개념으로 사설이나 칼럼부터 활자를 키우면 노년층 독자들이 더욱 편안하게 종이신문을 접할 수 있습니다." 윤임술 사장은 "종이신문은 시간적 여유가 있는 노년층을 목표로 삼아 그들로부터 선택받을 수 있도록 편의성을 부여하는 방법으로 파고들어야 한다"며 "지금 젊은 층이 종이신문과 떨어져 있지만 그들도 나이가 들면 이쪽으로 오게 돼 있다"고 말했다.
5. 방대한 언론 사료집 편찬
윤임술 사장은 1973년 한국신문연구소 소장으로 자리를 옮겨 신문기자의 자질향상과 관련해 많은 일을 역동적으로 수행했다.
신문·통신·방송 등의 매스미디어 각 분야에 걸쳐 연구사업을 벌이고 언론인을 재교육 시키려는 목적으로 1964년 4월 7일 설립된 신문연구소는 연구지 ‘신문평론’을 월간으로 펴냈으며 국제 언론인단체와의 긴밀한 협조로 언론인 훈련계획을 마련하고 수습기자훈련, 언론관계 국내외 세미나 등을 통해 언론인 자질향사에 남다른 열정을 보였다. 1981년 6월 언론기본법에 의해 한국언론연구원이 설립되면서는 그 초대 원장으로 발탁된다. 1986년 까지 윤임술 한국언론연구원장은 출판사업으로 74년부터 ‘신문방송년감’을 매년 정기적으로 속간했고 ‘한국신문백년지’(1983년 12월 15일 발행, 1460페이지)를 출간했다. 또한 우리나라 근대화 과정에서 명멸된 신문 7백 95종을 연대별로 실물사진을 곁들여 수록하는 등, 방대한 자료를 체계적으로 정리하였고 대한매일신보와 협성회회보, 매일신문을 영인 발간하였다. 한편 우리나라 언론사 1백 년 동안의 50人을 선정하여 ‘한국언론인물지’를 출간하고 ‘언론비화 50편’ ‘신문과 언론인 의식’ 등 여러 출판물을 저작 또는 편저로 발간했다.
뿐만 아니라 1982년 12월엔 ‘신문활자의 가독성연구(可讀性硏究)조사보고서’를 통해 활자 확대에 대한 근거를 제시하였고 신문증면의 근거를 제시한 신문의 정보량에 있어서도 지역과 신문사에 따라 매일 3.8 내지 5면을 채울 수 있는 정보가 그대로 버려지고 있다는 신문정보량 조사라든지 우리나라 신문 독자의 신뢰 점수가 34.8점인데 이는 일본의 60점보다 훨씬 떨어진다는 비교수치를 제시하는 등 한국최초로 독자 의식 조사를 대규모로 실시해 자료로 이용되게 한 것도 윤 사장의 독창적인 아이디어가 돋보인 대목이다.
윤임술 사장은 이밖에도 1973년 신문연구소장을 지낸 경력을 바탕으로 1975년 신문회관 부이사장을 거쳐 1981년 초대 한국언론연구원장으로 부임한다. 부임 한 이후 윤임술 소장은 1986년까지 신문·방송·통신 등 언론매체에 종사하고 있는 언론인들의 자질과 전문성을 높이고 언론 창달을 위한 전문적인 연구와 조사활동 수행에 남다른 열정을 보였다.
부임하자마자 한국언론연구원을 주요 언론사와 단체의 대표들로 구성된 이사회와 집행부로 원장과 그 아래에 정책연구본부(출판개발, 연구운영, 기획조정의 3국 아래 5부 1팀), 미디어서비스본부(연수국, 데이터뱅크국 아래 4부)와 언론사 논설위원·해설위원으로 구성된 기획위원회를 두고 언론매체 종사자들에 대한 국내외 연수, 재교육 등에 주력했다. 1990년 이후엔 연구분야에 역점을 두고 본격적인 DB서비스(KINDS)를 개시했다. KINDS는 신문기사정보, 전·현직 언론인 및 언론학자 등의 약력, 전국 언론사 현황과 학계·관계자료 등을 수록하고 있다.
출판사업으로 월간 ‘신문과 방송’을 발행했는가 하면 해마다 ‘한국신문방송연감’과 영문판 ‘The Korean Press’를 발행하였다. 연례사업으로 기본연수, 전문연수, 세미나 및 워크숍, 언론인 의식조사 등 중장기 조사사업을 펴왔고, DB사업으로는 응용소프트웨어 개발, 신문기사자료 입력, 천리안·하이텔·유니텔·나우텔을 통한 일반이용자 서비스, 언론전문도서실도 운영하는 등 언론인 자질향상에 주안을 둔 사업들을 많이 개발, 집행했다.
이 같은 경력을 바탕으로 윤 사장은 1985년 언론중재위원회 부위원장 직을 맡는다. 언론중재위원회는 언론중재 및 피해구제 등에 관한 법률에 의거 설립된 준사법적 독립기구로 1981년 3월 31일 창립했다. 위원회는 조정·중재를 통해 언론보도로 인한 분쟁을 실효성 있게 구제함으로써 언론의 자유와 국민의 인격권이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 위원회는 언론(방송ㆍ신문ㆍ잡지 등 정기간행물ㆍ뉴스통신ㆍ인터넷신문), 인터넷뉴스서비스 및 인터넷멀티미디어방송(IPTV)의 보도로 인한 분쟁 발생 시 정정보도청구, 반론보도청구, 추후보도청구, 손해배상청구를 받아 조정ㆍ중재하고 언론의 보도내용에 의한 법익 침해사항을 심의하여 시정을 권고하며 선거기사의 공정성 여부를 심의하는 기능 등을 수행 하고 있다. 아울러 언론분쟁 및 피해구제 관련 종합 상담서비스, 언론법제 관련 발간 및 학술연구 활동, 언론분쟁예방 및 피해구제 교육 등을 실시한다. 윤 사장은 언론중재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이 기구의 업무를 실질적으로 총괄하는 한편 언론 사료의 중요성에도 남다른 관심을 보였다. 그 많은 사업들이 조선일보 사료연구실 고문 시 방대한 언론사료집 출판으로 꽃을 피우니 윤 사장이 아니고서는 누구도 감히 엄두를 낼 수없는 업적을 남긴 것이다.
윤임술 사장은 지난 2010년 3월 10일 자신이 소장하고 있던 ‘大韓每日新報’ 영인본 전 6권(1904. 8 - 1910. 10, 1976년 9월 10일 발행)을 대한언론인회에 기증한바 있다.
윤임술 사장의 신문인생을 돌이켜 보며 조선일보 사료연구실 고문 시절을 빼놓고 말할 수 없음도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조선일보 사료연구실의 윤임술 고문에 의해 주도된 사업 중에는 1883년 한성순보부터 20세기 말까지 한국 신문사 사설을 묶은 ‘한국신문사설선집’ 과 ‘한국신문통감’ 편찬을 대표적으로 손꼽을 수 있다.
‘한국신문사설선집’은 특히 일제식민시대 총독부에 압수당했던 조선일보 동아일보 시대일보 등 민족지의 사설 235건도 모두 수록되어있어 언론사적 연구 가치가 높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1920년대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주도로 ‘사설’로 정착되기까지 신문들은 그것을 사의, 집록, 론셜, 언단, 사셜 등 다양한 명칭으로 표시한 것으로 나타났다. 문장의 경우 초창기에는 한문으로만 쓰다가 1900년대 들어 국한문혼용으로, 1900년대 후반에는 순 국문으로 바뀌었다. 사설제목의 길이 변천도 눈길을 끄는 대목이다. 1960년대 이전까지는 10자 이내로 간결하던 제목이 늘어나기 시작해 부제까지 붙이며 구체적 내용을 적시하다가 1980년대부터 다시 간결화 추세를 보이고 있다. 1883년 한성순보 창간 이후 최근까지 한국인에 의해 국내외에서 단 하루라도 발행됐던 신문 종수는 900여종에 이르고 있다. 이 같은 사실이 극명하게 들어난 ‘한국신문사설선집’은 윤사장이 지난 1995년 ∼ 1999년까지 총 6년간(출범은 94년)에 걸쳐 편찬, 2001년 1월 모두 완료 한 것이다.
국내 시대사의 흐름을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도록 만든 이 출판물은 구한말에서 1999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각 시대 언론의 주축을 이룬 국내외 49개 신문에 실렸던 사설 40여만 건 중 8205건을 선정해 12권으로 집대성하는 방대한 작업이었다. 총람에는 3만3천770건의 사설이 날짜별로 모두 담겨있고 2000년 11월 22일부터는 조선일보 정보자료실과 협력해 인터넷을 통한 검색과 자료 읽기도 가능하도록 만들어 보다 많은 사람들이 손쉽게 자료를 이용하실 수 있게 했다. 이 또한 윤임술 사장이 아니고서는 해낼 수 없는 대작이다.
1883년 한성순보를 시작으로 110여 년 간의 한국 신문사를 정리한 ‘한국신문통감, 이 책은 먼저 1999년까지 발행된 715개 신문을 발행날짜 순으로 정리하고 있다. 또 신문의 역사를 초창기(1880~1910년), 수난기(1910~1945년), 격동기(1945~1960년), 융성기(1960~2000년) 등 4기로 나눠 해당 시기를 체계적으로 해설했다. 해설 집필에는 정진석(외국어대), 차배근(서울대), 오진환(한양대), 이광재(경희대) 교수 등이 참여했다. 각 시기별로는 주요일지와 함께 해당 신문사 소개, 연혁과 약사, 편집방향, 역대 간부 등이 정리되어 있다. 무엇보다 눈길을 끄는 것은 풍부한 신문자료 모음. 최초의 신문 한성순보나 독립신문 창간호는 물론 현존하는 신문들의 창간호, 가로짜기 변천사 등 각종 지면이 참고자료로 실려 있다. 부록으로는 북한 언론과 국내에서 일본인들이 경영했던 신문을 소개했고 과거 신문사들이 위치했던 지리도 설명해 놓았다.
‘나라의 운명이 백척간두에 섰을 때 민중계몽에 앞장서서 신문을 만들었던 소중한 기초사료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언론계는 물론 역사발전에 이바지해야할 책무가 있음을 알면서도 작업이 방대하고 복잡하기 때문에 아무도 감히 손을 댈 용기를 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 안타깝다’ 며 이 어렵고 어진 일을 윤 사장이 성공적으로 매듭지은 것은 ‘신문은 역사의 기초사료’라는 인식으로 접근한 윤 사장의 혜안이면서 한국 언론사에 길이 빛날 족적이라 아니 할 수 없다.
6 신문풍진 부산일보사장 시절
윤 사장은 1986년 부산일보 사장으로 신문경연인의 입장이 된다. 그러나 언론인 최고 수장에 오른 기쁨도 잠간, 취임 후 3년 동안 뜻밖의 시련에 봉착한다. 노조파업사태로 시달림을 당한 것이다. 1988년 1월 사내에 노조가 결성되고 7월 11일부터 6일 간 총파업을 벌이면서 이 사태를 수습하기위해 얼마나 노심초사했던가는 그가 펴낸 ‘신문풍진초(新聞風塵抄)’에 적나라하게 들어나 있다. 부산일보 노조파업사태는 송정제 전 부산일보 사장도 당시의 엄혹했던 상황을 상세히 증언한바 있다.(대한언론인회 발행 ‘못 다한 이야기’ 제1권 232쪽 참조)
윤임술 사장은 1988. 7. 11자 부산일보에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독자의 이해를 구했다.
“1988년 7월 초순께부터 며칠 동안 필자의 이름이 전국 신문에 연일 대문짝만큼이나 크게 보도되었습니다. (중략) 언론노조운동만 해도 운동의 목적과 당위성은 인정하고 이해해야겠습니다마는 그 방법 등에는 질서를 파괴하고 심지어 인륜을 짓밟는 행패가 없지 않았습니다. 민주라는 보자기를 씌우고 과도기적 현상이라는 공간을 이용해서 영웅적이라고 추켜세워지기만 했지 그 과정에서 빚어진 크고 작은 비합리성 같은 것은 아무도 챙겨볼 생각조차 않고 그대로 넘어가 버렸습니다.
“노조의 주장은 회사의 고유권한인 인사권에 대한 간여일 뿐만 아니라 단체교섭의 대상이 되지 않는 법 외적 주장인 것입니다. 노조에서 주장하는 편집국장을 추천한다는 것은 세계에도 예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회사는 이로 인한 파국을 피하기 위해 편집권의 자율성을 인정하고 편집국장의 인사에 있어 노조 측의 의견을 충분히 참작한다는 약속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노조 측은 끝내 거부하고 파업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회사 측은 빠른 시일 안에 노사 간 합의를 보아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보다 알찬신문을 만들 것을 약속드리며 독자여러분의 깊은 해량을 바랍니다.”(1988년 7월 11일 부산일보 사장 윤임술)
편집권과 언론노조에 대한 윤 사장의 시각이 극명하게 들어난 이 글은 부산일보 사태를 이해할 수 있는 단초이면서 노조파업이 남긴 후유증이 얼마나 심각 했는지를 웅변으로 말해주고 있다.
7. 100세 노년의 열정 ‘지방언론 육성’
윤임술 사장은 지방언론 육성 발전에도 남다른 열정을 보였다. 1997년 일경언론문화재단 이사장에 취임한 이후 타계하기 직전까지 매년 일경언론상(一耕言論賞)을 시상해 온 것은 지방언론 육성 발전에 보인 윤 사장의 남다른 집념을 대변해준다. 일경언론상은 국제신보 창립자인 고 일경(一耕) 김형두 선생을 기리고 지방언론의 육성발전을 위해 일경언론문화재단이 1997년부터 매년 지역 언론사의 우수한 기사와 프로그램을 선정해 시상하는 상(賞)이다.
김형두는 1909년 경상남도 고성군에서 태어났다. 고성공립보통학교, 진주공립농업학교(현 경상국립대학교)를 졸업하였다. 1929년 광주학생항일운동과 관련하여 동맹 휴학을 주도하였다. 이후 일본 니혼대학 전문부에 입학하지만 1930년 중퇴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후 동아일보 고성지국 기자로 근무하기 시작하였고 매일신보, 부산일보, 민주신보를 거쳐 1947년 국제신보의 전신이 된 산업신문을 창간하였다. 1950년 제호를 국제신보로 바꾸었고 1957년부터 1962년까지 국제신보 사장을 지냈다.
일경언론문화재단 윤임술 이사장은 1997년 11월 12일 오후 3시 한국언론회관 19층 카페테리아에서 제1회 일경언론상 시상식을 가진 이래 2023년 타계하기 전까지 매년 이 상을 시상하며 지방언론의 역할과 그 육성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8. 망부곡 ‘나팔꽃 일기 10년’
윤임술 사장은 100세 노령임에도 인터넷을 통해 국내외 신문을 다 보고 일주일에 한두 번 수영을 할 정도로 건강했다. 여전히 뉴스와 함께 생활해 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무리 고령화 시대라 하지만 100세를 넘게 산 언론인이 드문 요즘 후진들이 백수연(白壽宴)을 베풀 정도로 존경받으며 천수를 누렸으니 하늘이 내린 건강이 아닌가.
신아일보 사우회는 지난 2020년 10월 30일 정오 서울 프레스센터 18층 외신기자클럽에서 윤 사장의 백수(白壽 99세)를 기념해 축하연을 가졌다. 김용발 사우회 회장의 사회로 진행된 이날 모임에는 신아일보 사우들을 비롯 많은 하객들이 참석해 윤사장의 만수무강을 빌었다. 김종하 전 국회 부의장은 후배 언론인을 대표해 축하패와 꽃다발을 증정했다. 신동호 스포츠조선 사장, 김용원 전조선일보 편집국장은 축사를, 조병철 전 스포츠 조선 전무는 축시를 낭송했다. 만찬 중에는 남시욱 전 문화일보 사장이 건배사를 통해 윤 사장의 백수를 축하했다.
윤 사장을 오래도록 만나본 사람이면 누구나 처음 만날 때의 인상과는 180도 다른 정감을 느끼게 된다. 깐깐하고 말도 없고 맥주 한 잔도, 물론 담배도 안 태워 장수
했는지도 모른다.
윤 사장은 2011년 12월 4일 65년을 해로한 부인 여옥수 여사가 세상을 떠난 직후부터 10년 가까운 세월 동안 거의 매일 쓴 일기를 발췌해 정리해 ‘나팔꽃 10년의 일기’를 펴냈다. 책 제목을 나팔꽃 일기라 한 것은 부인이 생전 집에 심어 해마다 곱게 피어나고 있는 나팔꽃을 볼 때마다 부인이 연상되기 때문에 붙인 제목이다.
윤 사장은 "하루에도 몇 번씩 가슴이 타는 그리움을 참을 수가 없어 일기를 썼다. 65년 세월을 더듬으면서 99세의 고아가 되어 흐르는 눈물을 닦고 또 닦고 있다"며 "그리운 당신 얼굴, 애달픈 마음 이 글자들에 엮어 전하고자 일기를 썼다"고 했다.
"여보, 당신 방 앞에 심어 놓은 나팔꽃이 예쁘게 피었는데 당신은 어디 가고 꽃만 당신 방을 보고 곱게도 피었소. 여보, 나팔꽃은 사람보다 정이 있어 보여요. 주인 보라고 곱 게 곱게 피었소."(2011년 12월 9일)
"당신이 계셨으면 말싸움이라도 해 보았으면…(중략) 다투기라도 해보았으면…이렇게 적막하고 답답하고 보고 싶어 견딜 수가 없네요."(2015년 7월 31일)
"당신이 떠나고 안 계시는 이 방은 아무리 많은 가구들이 있어도 빈방이지요. 큰 수술을 두 번이나 하는 동안 내가 얼마나 소홀히 대했는지를 생각하니 너무도 미안하고 죄송해서 가슴이 타는 것 같네요. 저승에 가서 만나면 천 번 만 번 용서를 빌겠습니다."(2018년 1월 27일)
구구절절 부인을 생각하는 마음이 하해와 같다.
대한언론인회가 발행하는 ‘대한언론’은 2009년 11월호 실버 파이팅에서 “윤임술 사장은 이름 없이 시작해 이름을 날린 명 편집자, ‘편집의 달인’으로 평가 받고 있다”고 소개한바 있다. 윤사장은 신아일보 창간 초대편집국장으로 자신이 만들었던 신문에 대해 남다른 관심을 쏟곤 했다. 지금은 비록 역사의 뒤안길로 살아졌지만 한국 최초 다색도 신문 신아일보를 편집 제작하며 쏟은 열정은 윤사장 전 생애를 통해 가장 값지고 보람찬 ‘언론이의 길’이었다고 보아 과장된 평가는 아닐 것이다.
언론계의 거목, ‘신문편집의 달인’이요 ‘제갈공명’이었던 윤임술 사장의 일대기는 한국 언론 100년사에 혜성처럼 나타난 큰 별이자 한국 언론의 살아있는 역사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 유족으로는 며느리 이미옥 씨와 손녀 윤기숙·윤기원 씨, 손자 윤영 씨 등이 있다. 4월 3일 오후 3시 대한언론인회 추도식 후 4일 오전 7시 30분 발인했다. 향년 101세. 장지는 시안공원묘원.
<참고문헌>
한국언론인물지(한국신문연구소 1981)
신문과 언론인의식(윤임술, 한국신문연구소 1981)
한국신문백년지(윤임술, 한국언론연구원 1983)
신문백년인물사전(한국신문편집인협회 1988년)
한국신문사설선집(1883~1999) (윤임술, 방일영문화재단 2001)
한국신문통감(윤임술, 조선일보출판국 2001)
신아일보 40년사(신아일보 2007)
한국신문방송연감(한국언론재단 2009)
조선일보 90년사(조선일보 2010)
신문풍진초(新聞風塵抄) (윤임술, 1992)
나팔꽃 일기 10년(윤임술, 2020)
<필자>
정운종
전 신아일보, 경향신문 논설위원
전 민주평통 운영위원(간사)
전 대한언론인회 부회장 겸 상임이사
재외동포저널 상임논설위원(현)
한국유림총연합 부총재겸 편집고문(현)
시사문제연구소 대표(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