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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극복 의지와 성찰의 시학
강 경 호
(시인, 문학평론가)
인간의 삶은 불안·상처·모순·부조리·불화·고통의 연속이다. 이러한 것들을 고통이라고 말한다면, 고통은 삶의 에너지를 충족시켜주는 힘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것은 마치 진화론의 원리와 같아서 고통없이는 인간은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일지 모른다.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 나름대로 살아갈 궁리를 함으로써 새롭게 거듭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삶을 살아낸 자들은 모두가 고통을 겪으며 살아내기 위한 방법을 끊임없이 모색한 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 인류가 이룩한 모든 성과는 고통의 결과인 셈이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고통을 겪으려 하지 않는다. 고통을 겪지 않으려고 삶을 포기한 자들도 있다. 그렇다고 그것이 고통을 극복하는 방법이 될 수는 없다. 고통을 이겨냈을 때 인간다운 삶을 이어갈 수 있는 것이고, 다시 그와 같은 고통이 찾아올지라도 이미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지녔기에 대처할 수 있다.
서정시에서 ‘고통’은 시작(詩作)의 출발점이 된다. 고통을 극복하는 방법을 모색할 때 가장 먼저, 그리고 끝까지 지녀야 할 것이 ‘긍정의 정신’이다. 그러므로 서정시가 고통의 무게를 수렴했을 때 시적 흥미는 시인이 당면한 고통을 처리하고 극복하느냐의 문제로 집약된다. 이때 고통의 질보다는 고통을 예술적 정서로 변용시키는 방식에 집중된다. 그러므로 고통은 서정시의 본질에 맞닿아 있다고 할 수 있다.
서춘기의 시에는 고통을 극복하려는 긍정의 힘이 투사되어 있다. 그 고통의 성격은 여러 가지이다. 이는 그의 시의 스펙트럼을 투과한 세계가 다양하듯이 여러 가지 고통의 모습을 극복하려는 긍정의 정신을 보여준다. 《원탁시》 기획으로 조명되는 10편의 작품은 시인이 자선한 것들로 그간 펴낸 『그 섬에 가려면』, 『사람에 취하다』, 『새들의 밥상』, 『얼굴에 대한 기억』 등 네 권의 시집에서 선한 것들이므로 그의 작품세계를 대표하는 것들이라고 할 수 있다.
먼길 가지 않아도
길이 감추고 있는 고갯마루 발길에 채이고
십장생 뛰노는 꽃병마다
피어나지 못한 새벽들이 송이송이 꽂혀 있다
숲에 갇힌 동박새처럼
묶인 마음이 묶인 몸을 풀어 놓지 못한다
여닫이문틈 사이로 조금씩 굵어지는 빛줄기들
손이 닿는 대로 가만히 건드려 보면
눈부신 햇살 속에도 어둠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연탄 보일러의 녹슨 물길 따라
겨우내 감질나게 흘렀던 사연들 곱씹으며
여태 제 빛깔로 움터오른 적 없는
몸이 내 몸이 흘러 내린다
색바랜 꽃장판이 누렸던 지난 봄날의 아픔까지
모두 내 차지라 여기며 나의 전부를 풀어 놓는다
얇고 딱딱한 꽃장판 딛고 일어서는 저 꽃들을 보라
온 방 가득 봄꽃들 무더기로 흐드러지고
피어나는 꽃잎만큼 어둠을 털어 내며
이 봄날, 수선스럽게 털갈이하는
-「꽃장판에 누워」 전문
고통을 제공하는 요인은 “고갯마루 발길에 채이고”, “피어나지 못한 새벽”, “숲에 갇힌 동박새처럼/묶인 마음”, “연탄 보일러의 녹슨 물길”, “제 빛깔로 움터오른 적 없는/몸”이다. 이러한 것들이 “몸”을 묶고, 가두었기 때문에 “지난 봄날의 아픔”이 있었다. 그러나 “손이 닿는 대로 가만히 건드려 보면/눈부신 햇살 속에도 어둠이 있음을” 안 화자는 “색바랜 꽃장판”에 고통을 “모두 내 차지라 여기며” 자신의 “전부를 풀어 놓는다” 즉 고통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고통 자체를 몸이 껴안는다. 그러자 “얇고 딱딱한 꽃장판 딛고” 꽃이 일어서서 “온 방 가득 봄꽃들 무더기로 흐드러지고” “피어나는 꽃잎만큼 어둠을 털어”낸다. 마침내 고통의 꽃을 피우고, 어둠을 털어내기에 이른다.
이 작품은 자신에게 처한 고통을 회피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껴안음으로써 고통을 극복함을 보여준다. 이에 반해 「폐계 일지」는 자신의 고통이 아니라 타자인 ‘폐계’가 처한 소외의 고통을 벗겨주는 태도를 지닌다.
양계장에서 죽도록 알만 뽑다가
이젠 늙어, 문드러진 알집으로 버려진
폐계 한 마리 얻어 집안에 풀어놨더니
난생처음 탁 트인 풍경 너무 숨막혀
비칠비칠 제 그림자 물고 뒤안으로 숨는다
지지리도 못나 복다림상에도 오르지 못한 놈
그럭저럭 여름 한철 넘기는가 싶더니
눈빛이 제법 또렷또렷해져 있다
종종걸음으로 꽃밭을 후비고 참대밭을 후비고
허구한 날 내 무관심의 푸석돌을 쪼아댄다
백로 지나 바람이 한결 선들선들해지자
낼갯죽지에도 힘이 붙어 가는지 장독 위까지 퍼드덕퍼드덕
시든 꽃잎처럼 팍삭 오그라들었던 볏이
쪽빛 하늘 아래에서 홍단풍보다 붉게
제 빛깔 찾아간다
첫눈 내리는 날 무심코 대숲길 오르는데
저 안쪽에서 암탉이란 놈 불쑥 나타나 줄행랑이다
의뭉스런 놈, 앉았던 자리가 궁금해진다
댓잎에 에둘린 작은 둥지가 보이고 그 안에 큼직한 알이 하나
아하 저 놈이 낳았구나 이 겨울날
피 묻어, 눈물보다 더 따뜻한 알 하나를
-「폐계 일지」 전문
고통의 질보다는 고통이 예술적 정서로 변용시키는데 집중하고 있는데, 이는 화자 자신의 고통이 아니기 때문에 가능한 일로 여겨진다. 즉 폐계는 일생동안 알만 생산한 늙은 닭이다. 그러므로 더 이상 인간에게는 가치없는 것이 되고 만다. 그런데 버려진 폐계를 얻어 화자의 집안에 풀어 놓음으로써 새로운 생명으로 거듭난다. 화자는 폐계의 고통을 적극적으로 느끼는 것보다 예술적 정서의 변용에 집중한다.
“양계장”에 갇혀 살다가 “집안”에 풀어진 환경에서 살아갈 수 있는 공간이동은 폐계에게 새로운 생명을 제공하는 기회가 된다. 그래서 폐계는 “비칠비칠” 걸었던 것을 “종종걸음으로 꽃밭을 후비고 참대밭을 후비고” 다닐 수 있게 되며 “눈빛이 제법 또렷또렷해져 있다” 그동안 자유를 박탈당한 채 인간에게 알을 생산하는 도구로 이용당한 후 쓸모없어지자 버림을 받았지만 폐계는 화자의 집안에서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게 되어 “낼갯죽지에도 힘이 붙어 가는지 장독 위까지 퍼드덕퍼드덕”거리게 되고 “시든 꽃잎처럼 팍삭 오그라들었던 볏이” “제 빛깔 찾아”가게 된다. 그러다가 마침내 대숲 속에 둥지를 틀고 “큼직한 알” “피묻어, 눈물보다 더 따뜻한 알 하나를” 추운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생명을 낳기에 이른다.
소외되고 버려진 상처를 안은 폐암탉이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기까지의 과정을 통해 고통을 극복하는 법을 보여주는 「폐계 일기」는 암탉이 금방 낳은 알만큼 따뜻해 보인다.
「폐계 일기」에서는 구체적인 서사를 통해 고통을 추스르는 과정을 보여준 다. 그러나 「삐걱거린다」와 「등고선」은 관념적인 삶의 원리를 드러내 보인다.
조금만 기뻐도 삐걱거린다
조금만 슬퍼도 삐걱거린다
조금만 편해도 삐걱거린다
조금만 아파도 삐걱거린다
그러나 쉽게 쓰러지지 않는다
인생은 오래된 목조 건물이다
-「삐걱거린다」 전문
“조금만 기뻐도 삐걱거”리고, “조금만 슬퍼도 삐걱거”리고, “조금만 편해도 삐걱거”리고, “조금만 아파도 삐걱거”리는 것이 인생이라 하고 있다. 이 작품은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다’라고 설파한 파스칼의 명제를 떠오르게 한다. “그러나 쉽게 쓰러지지 않는다”고 한 대목이 더욱 그것을 뒷받침해 준다. 이는 파스칼의 말처럼 바람이 불면 쉽게 흔들리지만 결코 쓰러지지 않고, 오히려 흔들거림, 즉 고통과 즐거움을 몸에 익히고 있기 때문에 이를 극복할 줄 안다. 만약에 갈대가 온 몸으로 바람을 맞고 서 있다면 바람에 쓰러지고 말 것이다. 바람에 흔들거림으로써 힘을 분산시킴으로써 바람을 이길 수 있는 것이다. 조금만 기쁘거나, 슬퍼할 줄 알고, 조금만 편해도 삐걱거리거나 조금만 아파도 삐걱거릴 줄 안다는 것은 인간의 감정표현 방식이다. 갈대처럼 연약하지만 그 연약함을 역동적인 에너지로 변용시키면 존립하는 것이 인생이라는 해답은 삶의 원리를 설파한 말씀인 것이다. 이것은 마치 “오래된 목조 건물” 같다는 것이어서 조금만 바람이 불어도 쉽게 삐걱거리지만 쉽게 쓰러지지 않는 삶의 이치를 보여준다.
이러한 삶의 원리를 노래한 또 다른 작품이 「등고선」이다.
나무도
판잣집도
비탈에 선
우리
사랑도 미움도
경사가
급할수록
더 가까이
다가선다
-「등고선」 전문
“비탈”은 고통스러운 공간이다. 비탈에선 서 있거나 오를려 할 때 평지나 내리막길보다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간의 삶의 여정은 경사가 심한 비탈을 오르는 것과 같은 고통의 연속이다. 그렇기 때문에 화자는 “나무도//판잣집도//비탈에 선//우리”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는 시인의 오랜 생체험의 결과일 것이다. 시인이 지금껏 살아오면서 인생이라는 것이 결코 만만찮은 것이라고 깨달았을 것이고 그 깨달음의 지혜가 이렇듯 짧지만 강한 메시지로 축약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듯 고통스러운 비탈에서의 삶이 버겁기도 하지만, 그러나 화자의 깨달음은 “경사가//급할 수록/더 가까이//다가선다” 는 생각에 이르게 한다.
이 작품은 ‘비탈’이라는 고통스러운 공간이 사람을 더욱 “사랑”할 수 있게 하고 “미움”을 갖게 한다. 여기에서 “미움”은 “사랑”과 대척점에 있겠지만, “미움”은 또 다른 “사랑”의 의미를 역설적으로 갖게 한다. 미움도 또다른 사랑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앞에서 살펴본 서춘기의 작품들은 삶의 원리를 보편성에 무게를 두고 고통 치유를 노래한 시편들이다. 그러나 「저 꽃잎 떨어질라」와 「얼굴에 대한 기억」은 근현대사를 배경으로 아직도 끝나지 않은 역사의 상처에서 핏물처럼 흘러내리는 고통을 노래하고 있다.
화창한 봄날
벚꽃은 만발인데
종로구 일본대사관 앞
10년 넘도록 그치지 않는
위안부 할머니들의 수요 시위
바람아 멈추어라
그렁그렁 피눈물 맺힌
우리 할머니 속눈썹 위
저 꽃잎 떨어질라
-「저 꽃잎 떨어질라」 전문
벚꽃이 만발한 봄날, 일년 중 가장 좋은 시절이다. 그러나 시적 공간인 “일본대사관 앞”은 편치가 않다. “일본대사관”이 말해주듯 민족적 은원이 배어있기 때문이다. 그 앞에서 일제 강점기 때 일본군에게 성적으로 유린당한 이른바 “위안부 할머니들의 수요 시위”가 벌어지고 있는데 “십 년이 넘도록 그치지 않”고 있다. 이는 일본이 지난 시대의 과오를 뉘우치고 용서를 빌며 사과하라는 시위이다. 그러나 일본은 망언을 일삼으며 지금껏 보상은 물론 사과를 하지 않고 있다. 그런데 위안부 할머니들은 점차 세상을 뜨고 있다. 그러므로 위안부 할머니들에게는 시간이 별로 없다. 그런데 바람이 불고 있다. 바람에 꽃잎이 떨어질 수 있을 것이다. 그 바람은 지금껏 과오를 뉘우치지 않는 일본의 태도이며 폭력성의 은유이다. 위안부 할머니들의 시위에도 싸늘한 찬바람처럼 아무런 대답이 없는 상황을 말한다. 꽃잎처럼 연약한 어린 처녀들을 유린한 일본은 사과하지 않음으로써 다시 위안부 할머니들을 또 다시 고통을 안겨주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 마음을 다친 위안부 할머니들은 “그렁그렁 피눈물 맺”혀 있으니, 이 아픈 역사의 희생자들을 위로하는 방법은 요원한 것이 되고 말지도 모른다. 고통스러운 역사의 뒤안길을 다시 기억하게 하는 이 작품은 여전히 고통스럽게 이어지는 우리의 역사를 인식하게 한다.
「저 꽃잎 떨어질라」가 일제 강점기 때 생성된 고통을 형상화한 것이라면 「얼굴에 대한 기억」은 1980년 광주의 상처를 다시금 되새기면서 아직도 그 고통이 끝나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오월, 그 날
뒤통수를 때리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애기똥풀꽃에 파묻힌 것처럼 하늘이 노랬다
그리고 모든 얼굴에 대한 기억을 잃었다
얼굴 실인증(失認症)
그 날의 투석전 아직도 생생한데
스쳐갔던 얼굴들 생각나지 않아
오늘 아침, 아내 얼굴 알아보지 못하고
가는귀먹은 어머니께 누구세요 누구세요
보자마자 잊혀지고 시시각각 지워지는 얼굴들
손톱만큼이라도 기억이 있어야
보고 싶다 말하지 미워한다 말하지
-「얼굴에 대한 기억」 전문
화자는 ‘5·18 광주민주항쟁’ 때 그 현장에 있었나보다. “오월, 그 날”, 화자는 “뒤통수를 때리는 둔탁한 소리”를 기억해 낸다. 아마 진압군에 의해 화자가 폭력을 당한 것이다. 그러므로 “하늘이 노랬다”고 당시 화자의 상황을 진술한다. 그날 이후 화자는 “모든 얼굴에 대한 기억을 잃”게 된다. 이른바 “얼굴 실인증(失認症)”에 걸린 것이다. “오늘 아침, 아내 얼굴 알아보지 못하고” 어머니의 얼굴조차 알아보지 못한다. 그래서 “누구세요 누구세요”를 묻는 것이다.
이 작품은 고통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그 고통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민주시민을 폭력으로 상처를 입힌 진압군의 얼굴조차 기억하지 못하니 그들을 용서하려 해도 누군지도 모르기 때문에 용서할 수 없는 답답한 역사와 현실을 아프게 토로하고 있다. 이는 아직도 시민에게 발포한 자가 확실하게 규명되지 않은 채 여전히 고통스러운 부끄럽고 참담한 현대사의 고통을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고통을 극복하려는 의지를 보여주는 서춘기의 또 다른 한 축은 성찰의 힘을 드러내 보이는 세계이다. 주지하다시피 상처 극복과 함께 성찰의 모습을 가진 것이 서정시의 본질이다. 개인적인 삶의 현장에서건 역사의 현장에서건 불화와 모순, 그리고 절망으로 가득차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러한 현실을 극복하려는 의지를 통해서만이 그러한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 그러므로 서정시는 부정적인 현실을 타개하려는 과정을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현실 타개 과정을 통해 공감하며 성찰에 이르게 한다.
다음의 「나는 몇 년산인가」, 「꾸벅」은 앞에서 밝힌 성찰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오래되어 좋은 친구
그래서 술도 30년산
참나무통에 갇혀 그 세월 버티다 보면
시시때때로 졸아드는 몸집
절반 이상 천사의 몫으로 사라지고
덜어낸 만큼 채워지는 맛과 향
어쩌다 만난 귀한 술 한 모금 맛보던 중
지천명의 목구멍에서 뜨겁게 달아오르는 생각
평생토록 무엇 하나 덜어낸 적 없는, 나
나는 몇 년산인가
-「나는 몇 년산인가」 전문
성찰의 태도를 지닌 작품은 자아의 결핍을 전제로 읽혀진다. 그랬을 때 결핍을 충족시키려는 욕망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몇 년산인가」에서 결핍은 “평생토록 무엇 하나 덜어낸 적 없는, 나”의 결핍이다. 그렇기 때문에 무엇인가를 채우고자 한다. 그 무엇은 “참나무통에 갇혀” 잘 숙성된 술이다. 술은 “30년 산”인데 30년 동안 참나무통에 갇혀 있다보니 “시시때때로” 몸집이 졸아들어 “절반 이상 천사의 몫으로 사라”져 버린다. 그러나 덜어낸 자리에 “맛과 향”이 채워진다. “어쩌다 만난 귀한 술 한 모금 맛보던 중/지천명의 목구멍에서 뜨겁게 달아오르는 생각”에 의해 화자는 성찰의 기회를 갖게 된다. “평생토록 무엇 하나 덜어낸 적 없는” 자신을 인식한 것이다.
이 작품은 술이 숙성되기까지의 고통스러움을 통해 맛과 향이 깊어지는 것을 깨달은 화자는 상대적으로 숙성이 안 된 자신을 바라봄으로써 잘 익은 술이 30년을 거쳐 숙성된 것이 비춰 “나는 몇 년 산인가”를 스스로에게 물으며 성찰하게 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길에 떨어진
낟알 몇
새는
먹이를 쫄 때마다
머리를 조아린다
꾸벅
꾸벅
꾸벅
-「꾸벅」 전문
서정은 자연과 인간의 일체감이 그 근본을 이룬다. 자연이 시적 자아가 펼치는 서정 사색의 원천이 되는 것이다. 전통적인 시학에서 자연은 그 자체 즉, 물적인 존재가 아니라 인간적인 의미를 내재한 인간화된 자연이다. 이때 인간화된 자연이 바로 자연과 인간의 일체감을 이루고 있다. 자아탐구의 양식을 지닌 서정시에서는 자아성찰을 행하는 시적 화자가 자연을 통해 성찰에 이른다. 이러한 시적 모습을 보여주는 작품이 「꾸벅」이다.
새가 “길에 떨어진/낟알 몇”을 발견하고는 “먹이를 쫄 때” “머리를 조아린다” “꾸벅/꾸벅/꾸벅”하는 모습을 화자는 “머리를 조아린다”고 말함으로써 새가 식사하는 모습을 마치 예의 바르고, 양식을 준 무엇에게, 또는 자신을 공양한 낟알에게 감사하는 예의 바른 존재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이렇듯 흔히 볼 수 있는 낯익은 광경조차 시의 영역으로 끌어들여 이를 바라보는 화자에게 성찰의 단서를 제공하는 서춘기의 인식태도는 참으로 놀랐다. 이는 자신의 삶을 함부로 살지 않겠다는 서춘기 시인의 삶의 자세에서 연유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