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치황제(1643~1661)
청나라의 2대황제인 태종이 1643년 급서하자 후계자로 6살 난 아들이 즉위하니 세조(世祖) 순치제(順治帝)이다. 1644년 청나라가 중국의 주인이 되자 순치제는 북경에 입성하여 자금성에서 또 한번 즉위식을 올렸다. 청나라 황제의 즉위선언문은 만주어, 한어(漢語), 몽골어의 세 가지 언어로 되어 있는데 이는 곧 청황제는 세 민족을 아우르는 대황제라는 의미이다.
그런데 만주왕조인 청나라에서의 한인(漢人)과 몽골인의 대우는 사뭇 달랐다. 청조정은 몽골인에게는 왕작(王爵)을 주고 친형제처럼 대우하면서도 한인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원래 만주와 몽골은 서로 동문동종(同文同種)이라고 여기고 있었으며 몽골문화를 무시하고는 만주문화의 일면을 이해할 수가 없다.
일찍이 태조 누르하치가 명나라로부터 독립을 선언할 때 몽골의 문자를 빌려 만주의 말을 표기하게 한 사례만 봐도 두 민족의 관계를 짐작할 만하다.
청나라 황실은 몽골의 왕가를 매우 높게 대우하였는데 태종이나 순치제의 섭정왕이었던 예친왕(睿親王)도 몽골왕가에서 아내를 맞았으며 순치제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이 순치제는 다른 만주족들과는 사상이 다른 황제였다. 7살에 자금성의 주인이 된 순치제는 어려서부터 중국의 문화를 매우 사랑하는 황제였으며 철저하게 중국적인 교양을 쌓으며 자랐다.
그의 거실에는 경사자집(經史子集)의 고전에서부터 소설 등속에 이르기까지 고루 갖춘 수십 개의 책장이 가득 차 있었고, 장원출신의 서원문(徐元文), 오승사(吳承思) 등 젊은 학자들을 내정의 황제거실까지 불러들여서 정치, 문학, 미술, 문단 등에 대한 담소에 시간가는 줄 몰랐다. 또한 불교를 좋아하여 불교경전 읽기를 좋아하고 덕망 높은 스님을 초대에서 불도를 묻곤 했다.
허울뿐인 황제로서 모든 실권은 숙부인 예친왕이 쥐고 있는 가운데 순치제는 이러한 중국적인 문화에 서서히 동화되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선황제 태종의 황후인 순치제의 어머니(몽골인이다)가 예친왕과 결혼을 한 것이다. 즉 형수와 시동생이, 그것도 황태후와 섭정왕이 재혼을 한 것인데 이는 몽골이나 만주에서는 그리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으나 중국사상에 물든 순치제로서는 여간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청조정의 한인관료들도 소스라치게 놀랐지만 아무렇지도 않게 축하의 인사를 올렸다.
그러나 철이 든 순치제는 그러한 문화에 심한 반발심을 느꼈다고 한다. 예친왕이 죽자 순치제는 자신의 몽골출신 황후를 트집을 잡아 폐하였는데 새황후를 또 몽골왕가에서 데려오자 예의를 모르는 여자라며 냉대하며 반몽골적인 혐오감을 드러냈다고 한다.
순치제는 24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는데 그의 죽음에 대한 흥미로운 야사(野史)가 전해온다. 순치제의 후궁 중에 동귀비(董貴妃)가 있었는데 그녀는 만주귀족가문 출신이라고 되어있으나 한인이라는 소문도 있다. 그런데 황제는 동귀비를 너무나 사랑하여 그녀가 곁에 없으면 밥도 들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게 아끼던 동귀비가 덧없이 죽어버리자 황제는 죽은 동귀비를 황후에 봉한다고 고집을 피우다가 인생의 무상함을 느끼고 옥좌를 내팽개치고 출가하여 산서성의 명찰 오대산(五臺山)에 죽치고 들어박혀 버렸다. 아무리 조정대신들이 돌아오기를 간청해도 들은 척을 안 하자 대신들과 황실은 어쩔 수 없이 황제가 병으로 죽었다고 발표를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야사로만 전해져 내려올 뿐 정사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아무튼 순치제의 죽음과 함께 그의 유언이 발표되었는데 한인을 너무 우대하고 만주인을 무시한 점, 문관을 중시하고 무관을 홀대한 점 등을 반성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6살에 제위에 올라 24살에 죽은 젊은 황제에게 스스로 죄책감을 느낄 만한 실정이 있었을까?
그 유언의 이면에는 보수적인 만주출신 무관들의 질투심이 도사리고 있었던 것이다. 할아버지인 태조나 아버지인 태종, 숙부인 예친왕에 비해 너무나도 중국적인 황제였던 순치제는 비록 유언으로 지나친 중국화를 뉘우쳤지만 순치제와 그 뒤를 이은 강희제의 대에 이르러 만주의 정복왕조 청나라는 몽골에서 중국으로 크게 기울게 된다.
순치 황제는 중국에 실재한 역사적 인물이다. 황제 전생에 인도의 수도승으로 있었는데 그 나라 임금님의 폭정에 백성들이 시달리자, 수행(선정) 가운데 '나 자신이 왕이었다면 백성을 위하여 왕도로서 정치를 할 것이거늘', 하고 찰나 생각을 한 인과(因果)로 중국의 제왕이 되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부러울 것이 없는 황제 자리를 버리고 출가를 하였다.
<옮긴 글>
첫댓글 감사합니다......_()_
감사합니다. _()_ _(())_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_()_
요즘 어디를 갈 때 노는 입에 염불한다고 순치황제출가시를 읊조리며 다니니 먼 길도 가깝게 느껴지네요. _()_ _(())_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