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가희와 BH>의 촬영 당시. 낮을 배경으로 한 실내 장면을 찍다보니 밖이 어두워졌다. 아무리 창밖 조명을 바꾸어도 밤을 낮처럼 훤히 밝힐 수도 없는데, 감독은 그냥 촬영을 강행하는 상황. 눈에 보이는 화면을 중시하는 촬영감독과 배우의 연기를 우선시하는 감독의 갈등은 현장에서 흔히 벌어진다. 뒤늦게 당시의 촬영 분량을 확인한 백윤석씨는 “실제로 보니 그렇게 어색하지도 않고 이상한 그 느낌이 오히려 괜찮아 보여” 재촬영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러고 나니 오히려 당시 얼굴을 붉히며 연출에게 스트레스를 표출했던 것이 미안했다고.
물론 모든 갈등이 이렇게 머쓱하지만 ‘보기에는 나쁘지 않게’ 해결되지는 않는다. 늘 일정이 빡빡한 학생영화에서 밤 장면 촬영을 제대로 마치지 못했는데 먼동이 터오는 것도 일상적인 문제 상황. 아무리 서둘러 찍어도 앞 장면과 자연스럽게 연결되지 못할 것을 뻔히 아는 촬영감독은 촬영을 접을 것을 권유하지만 연출은 “일단 찍어줘”라고 밀어붙인다. 엄혜정씨는 이런 상황을 “그래? 그럼 일단 찍어. 근데, 보충 촬영 얘기 절대 하지 마”라는 말로 마무리한다며 웃는다. 그러나 촬영 결과를 확인한 연출이 슬그머니 보충촬영을 요구할 것까지, 그는 이미 알고 있다.
이런 문제에 대해 김병정씨는 감독에게 필요한 자질 중 하나는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이야기하며 주변 사람들에게 조언을 구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아무리 감독은 결정하는 사람이라지만, 그의 모든 결정이 옳을 수는 없는 노릇. 십수명에서 수십명에 이르는 스탭의 ‘삽질’ 중 많은 것이 잘못된 결정에서 비롯된다. 원하는 동선이 나오지 않아 고민이 된다면 이를 촬영감독이 카메라의 위치와 무빙으로 해결해줄 수도 있고, 해가 져서 문제라면 어느 정도까지 관객이 어색한 화면 연결에 관용을 베풀어줄 것인지를 합리적으로 결정해줄 수도 있다. 전체적인 맥락을 파악한 스탭이 언제든 도와줄 용의를 가지고 기다리는 것이 바로 현장이라고, 그는 강조한다.
그러나 세명 모두가 치를 떠는 상황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1mm만 왼쪽으로 프레임을 옮겨주세요!”라는 감독의 ‘쪼잔한’ 요구. 이럴 땐, 찍어도 소용없을 듯한 화면을 막무가내로 찍어달라는 순간보다 더 곤혹스럽다. 어떤 프레임을 원한다는 명백한 설명이 없기에 감독의 말에 따라 이리저리 앵글을 바꾸다보면 화면이 어색해지는 것은 당연한 결과다. “화면 안에 가로등이 잡히는 게 싫다면 그게 보이지 않도록 움직이거나 렌즈를 바꿀 수 있을 텐데 1mm를 운운하게 되면 수동적으로 카메라를 움직이게 된다”는 그들은 “뭘 해야 할지 모르고 기계처럼 움직여야 하는 상황”을 견딜 수 없다. 물론, 이 세 사람은 자신이 연출작을 찍을 때는 의식적으로라도 촬영감독에게 그런 요구는 하지 않으려 했다고 자신있게 말한다.
“소설을 비롯한 글을 재미있게 만드는 것은 문체. 영화의 문체는 촬영감독의 몫인 것 같다.” -백윤석 “도서관 사서는 모든 분야를 알기 위해 늘 배워야 하는 사람이다. 촬영감독 역시 비슷하지 않을까.” -엄혜정 “피사체는 물론이고 감독을 비롯해 다양한 스탭과 항상 관계를 맺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매력이다.” -김병정
“감독은 아무나 할 수 있다. 하지만 ‘아무나’가 되어서는 안 된다. 촬영감독은 아무나 할 수 없다. 그러나 ‘아무나’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 있다. 촬영감독이 되어야 할 ‘아무나’는 그가 지녀야 할 유연성과 박학다식함의 다른 말이다. 이들의 스승인 김형구 촬영감독은 당시 한국영화로서는 획기적인 컷 수를 자랑하던 액션영화 <비트>와 하루에 한컷씩 촬영하기 일쑤였던 작가영화 <아름다운 시절>을 비슷한 시기에 찍어낸 바 있다. 상황에 따라, 영화에 따라, 함께 작업하는 감독에 따라 수시로 정체성을 바꾸고 뭔가를 끊임없이 배워야 하는 촬영감독의 운명이 이들에겐 놓칠 수 없는 매력이다.
|
<즐거운 우리집>의 성공 이후 충무로에서 심심찮게 연출 제의를 받았지만 이를 모두 거절한 엄혜정씨는 “모니터를 통해 프레임을 보는 감독과 달리 뷰파인더를 통해 렌즈에 찍힌 화면을 처음으로 목도하는 촬영감독의 위치를 포기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졸업 즈음 다음(Daum)단편영화 페스티벌 상영작인 장준환 감독의 <털>을 촬영했던 그는 이후에도 촬영감독으로 충무로에 데뷔하기 위한 몇번의 기회를 맞았다. 최근 준비하던 영화가 ‘엎어지지’ 않았다면 원래는 한창 촬영 중이었을 그는 자신의 목표는 촬영감독임을 강조한다. 가능하다면 로드리고 프리에토처럼 “<21그램> <알렉산더> <브로크백 마운틴>같이 서로 다른 영화의 톤을 저마다 확보하면서도 자신의 도장을 찍어내”고도 싶다는 그는, 촬영감독으로 입지를 다진 뒤 시간이 남을 때 마음을 끄는 단편을 연출하고 싶은 욕심을 살짝 덧붙였다.
“뷰파인더를 통해 바라보는 피사체에게 매번 연애 감정을 느낀다”는 김병정씨는 아름다운 여배우뿐 아니라 감독, 시나리오와 매번 연애를 하는 셈이라고 말한다. 관계맺기를 중시하는 그에게 밀고 당기는 미묘한 마인드 컨트롤을 통해 상상에 불과했던 것을 실제 이미지로 옮겨내는 것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재미일 것이다. 물론 그가 존경하는 유영길 촬영감독처럼 엄하면서도 모두에게 기억될 만한 촬영감독이 되는 것이 가장 큰 목표겠지만, “현역 촬영감독으로 일하면서, 색다르고 의미있는 연출작을 만들고 싶다”는 농담 섞인 욕심 역시 그저 빈말은 아닌 듯하다.
현재 <특별시 사람들>의 촬영부로 제창규 촬영감독 밑에서 선배인 김병정씨와 함께 일하고 있는 백윤석씨로 말하자면, 연출과 촬영, 둘 중 무엇이 더 재미있는지 꼽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연출할 땐 연출이, 촬영할 땐 촬영이 재미있다. 뭐가 더 재미있고 우월하다기보다는 자기가 가장 재미있게 참여할 수 있는 파트가 촬영이라고 생각한다.” 당연히 촬영감독을 꿈꾸는 그는 다른 영화의 촬영부와 조명부 제의를 마다하고 선배인 제창규 촬영감독의 촬영부가 되기 위해 기다렸다고. 재학 시절 제창규 촬영감독의 수업을 인상적으로 들었던 탓이다.
연출작인 단편 <사춘기>가 너무 유명해지는 바람에 감독 지망생으로 기대를 모았던 제창규 촬영감독은 여러모로 이들의 선배라 할 만하다. 그는 ‘감독과 평론가가 주목하는 단편감독’ 중 한명으로 <씨네21>에서 기사화되는 등의 에피소드 덕분에 “자신이 촬영감독 지망생임을 설명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고 회고한다. 이후 <비단구두> <모두들, 괜찮아요?> 등의 장편을 촬영한 그는 앞으로도 꼭 하고 싶은 이야기가 생길 때까지는 촬영에 매진하고 싶다고. “영화를 직업으로 삼기에, 가장 재미있는 포지션이 촬영인 것 같다”는 명쾌한 설명은 엄혜정, 김병정, 백윤석, 연출력을 겸비한 촬영감독 지망생 세 명의 진심을 설명하기에도 부족함이 없는 말일 것이다.
엄혜정-1972년생, 영상원 97학번. <영어완전정복> <얼굴없는 미녀> 촬영부 -정확히 과거를 밝힐 수는 없지만, 교생실습을 나가야 하는 과를 전공하면서 영화를 즐겨 보다보니, 영화를 만드는 게 재밌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유학을 준비하던 중 영상원 관련 기사를 보고 얼결에 시험을 본 결과 합격했다. 촬영을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님이 명백한 상황, 웬만한 남자 촬영부보다 좋은 체격 조건을 가진 그를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은 사람들의 고정관념이다. 편견을 걷어낸다면 촬영감독으로서 여성이 더 유리할 수 있다고 믿는다. 국내 최초의, 잘나가는 여성 촬영감독 1호가 목표. 엄혜정의 ‘즐거운 우리집 vs 핑거프린트’<즐거운 우리집> <핑거프린트>(연출 조규옥) |
백윤석-1979년생, 영상원 00학번. 현재 <특별시 사람들> 촬영부 -영문학 전공으로 대학을 다니던 중 1년 먼저 영상원에 입학한 선배의 제안으로 영상원 시험에 응모했다. 시나리오를 쓰고 싶었지만 당시 영상원 안에 세부 전공 분리가 안 돼 있었다. 중학교 이후 영상원 입학 전까지 극장을 간 것은 3회 이하. 유난히 평균연령이 높은 기수 속에서 늘 막내로 생활했고, 신동석 감독(<가희와 BH>) 등 사전 계획보다 현장성을 중시하는 감독과 주로 작업해왔다. 일련의 상황 덕에 1년에 두편 정도씩 촬영하는 과작 스타일을 유지해야 했고, 덕분에 중간중간 연출작을 만들 수 있었다. 백윤석의 ‘내츄럴 보이즈 vs 가희와 BH’<내츄럴 보이즈> -서울독립영화제 상영 <가희와 BH>(연출 신동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