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다도란 무엇인가?
茶道란 차를 마시는 멋과 더불어 인간의 건전한 삶의 길을 걷자는 것을 말함이다. 정상구의 『韓國茶文化學』에서는 건전한 삶의 길이란 심신(心身), 즉 몸과 마음을 건전하게 하며 멋 속에 삶의 도리를 다하자는 것으로 논하고 있다.
차는 처음에 약용으로 사용되었을 만큼 기호음료일 뿐만 아니라 우리들의 몸을 건강하게 하는 보건음료로서 효과가 큰 것이었다. 이런 점에서 차는 우리 인간들이 건전한 삶의 길을 걷는데 있어 가장 소중한, 몸을 튼튼히 하는데 큰 도움을 주는 귀중한 기호음료이다. 뿐 아니라 차를 끓이고 마시며 대접하는데 있어 따르는 정성과 예의범절 및 청정하고 고요로운 분위기 등에서 알뜰한 각성의 생활을 체득(體得)하게 된다.
즉, 다도는 우리 인간들의 정신면에 있어 사심 없는 맑고 깨끗한 마음씨를 기르고 나아가 봉사하고 일하는 실천력을 기르고 이를 통하여 너 나 할 것 없이 다같이 한없는 기쁨 속에 깨달음을 가져오게 하는 것이다.
그러면, 깨달음이란 무엇을 말함인가? 다산 정약용의 아언각비(雅言 覺非)에 보면 이렇게 말하고 있다.
배움이란 무엇인가 ? 배움이라는 것은 깨닫는 것이다.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 깨달음이란 것은 ... 중 략 ... 이미 저지른 잘못을 깨닫고 부끄러워하고 뉘우쳐서 고치는 것, 이를 배움이라고 이르는 것이다.
라고 하였다. 우리 다도인들이 차를 마시며 인간다운 삶의 길을 추구하는 것도 인간답게 살기 위한 배움의 길 즉, 깨달음의 길을 추구하고자 하는데 있다.
이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김명배의 『茶道學』에서는 "찻잎 따기에서 차를 우려 마시기까지의 차일(茶事)로서 몸과 마음을 수련하여 덕을 쌓는 행위를 말한다" 라고 정의 내리고 있다. 그러면 道란 과연 무엇일까?
하늘이 명령한 것을 성이라 부르고, 성에 따르는 것을 도라 한다.
(天命之謂性 率性之謂道)
라고 중용에서 밝히고 있다. 따라서 다도란 차의 성품에 따르는 것이 될 것이다. 차의 성품에 대해서는 대흥사의 초의선사가 김명희에게 보낸 다시(茶詩)에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옛부터 성현들은 모두 차를 즐겼나니
차는 군자처럼 성미에 사악함이 없어서라네
(古來聖賢俱愛茶 茶如君子性無邪)
그리고 이능화의 『조선불교통사』에서 「차는 풀의 현성(즉, 禪)이다. 현미한 도, 청화의 덕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또한 송나라의 소식도 「차의 청정무구한 힘은 참으로 덕망있는 군자와 같아서 더럽힐 수가 없다.」고 하였다. 결론적으로 다도는 물. 불. 바람. 차. 다구 등을 매개체로 하여 차의 천성을 따라서 덕을 쌓는 수도행위이다.
석용운은 『한국다예』에서 다도란 차 다(茶)와 길 도(道)자가 합쳐져서 이루어진 문자로서 차라고 하는 물질적 또는 정신적 세계와 道라고 하는 절대적 진리적 경지가 한 단어로 표현된 말로 정의내리고 있다. 이는 차생활을 통해서 절대의 경지인 도의 차원에까지 이를 수 있다는 데서 생겨난 말이다. 이런 의미에서 다도란 차생활을 통해서 얻어지는 깨달음의 경지이지 차생활의 예절이나 법도 그리고 차를 끓이는 행다법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차를 대접하는 예법이요, 차 끓이는 방법일 뿐이지 결코 다도는 아니다.
禮는 차생활의 예법이요 행동의식인 과학적인 차원이요 형이하학적인 범주이다. 그리고 禮는 과학적 차원인 차생활에 예의범절과 법도를 통하여 얻어지는 정신세계의 심미안적 예술세계요, 그 예술성을 포함한 정신적 만족감 등을 말한다. 그리고 道라고 하는 경지는 형이상학적 경지에서 최고도로 승화되어 이루어진 절대의 경지요 진리의 차원이다. 이 경지는 완벽한 깨달음의 경지로서 상대적인 것이 무너지고 오직 하나의 세계로 선악과 시비와 유무와 색채와 형상과 언어가 떨어진 경지이다.
2.다도와 다례
최근 다도와 다례에 관하여 「다도는 일본 고유의 것이며 한국에는 다도라는 것이 없고 다례이며 중국은 다법이다.」라고 하고, 「한국의 다서에는 다례라는 말은 있어도 다도라는 말은 찾아볼 수 없으며 중국의 다서에도 다법이라는 말은 있어도 다도라는 말은 없다.」라고 말하고, 「고유문화를 존중하고 전통을 살리는 다운동이 우리 다론에도 발견할 수 없는 다도라는 말을 쓰는 것은 전통계승과 배반되는 행위이며 일본의 것에 추종되는 것」이라고 말하고 또 우리는 하루 속히 일본 고유명사인 다도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아야 한다 라고 하는 사람이 있다.
과연 다도라는 말은 어떤 중국 다서에도 없는 말이며 또, 어떤 한국 다서에도 없는 말인가. 이러한 점을 살펴보기 위해 「다신전」에 보면 차의 보관부분 이후의 구절만 봐도 다도라는 말이 세 번이나 나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첫째, 차의 보관부분을 보자.
차를 만드는 데에는 정성을 다하고 보관할 때에는 건조한 곳에 두어야 하며 탕을 끓일 때에는 청결하게 하여야 한다. 정성을 다하고 건조하게 보관하며 청결하게 끓이게 되면 다도를 극진히 했다고 할 수 있다.
(造時精 藏時燥 泡時潔 精燥潔 茶道盡矣)
그리고 동다송 29송 포법 부분에 보면 다음과 같이 다도란 말이 나오고 있다.
평해서 말하면 차를 달일 때에는 오묘함을 다하고 차를 만들 때에는 그 정기를 간직하며 물은 참된 물을 얻고 포법에는 중화를 얻으며 체와 신이 즉, 차와 물이 서로 조화를 이루어 웅건함과 신령스러움을 갖추니 이런 경지에 도달하면 다도를 극진히 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다신전」끝부분에서도 다음과 같이 다도라는 말이 나온다
우리 불가에도 혹은 조주의 풍이 있다. 그러나 이를 통해 다도를 완전하게 알 수 없기에 써 보지만 두렵기 짝이 없는 일이다.
이처럼 다도라는 용어는 일본 고유의 말이 아니고 우리 조상들도 옛부터 다도라는 말을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면 다도와 다례는 어떻게 다른가를 살펴보기로 하자.
정상구의 『한국다문화학』에 의하면 다도와 다례는 얼핏 같은 것 같지만 그 질, 양면에 있어서 다른 것이라고 하겠다. 즉, 그의 연구대상의 양면에 있어서 볼 때 다도는 그 폭이 광범위하며 그 질면에 있어 구도적인 측면이 깊다 하겠다. 한마디로 표현하면 다도란 다와 더불어 심신을 수련하여 다도의 멋속에 인간의 도리를 추구하는 다에 관한 전반적인 수련의 길인데 반하여, 다례란 다를 마시는 데 있어 이를 중점적으로 다루는 예절과 심신수련을 말함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도학을 연구하는데 있어서는 다도정신, 다도문화사, 다의 역사를 비롯하여 다의 산지, 기후, 다와 타학문과의 관계 등 광범위한 연구와 더불어 다례가 또한 핵심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다례는 그 양면에 있어서 다도의 핵심적인 한 부분에 속하는 것이다. 이를 불교에 비유하면 마치 불교의 선과 같은 것이다. 선은 불교의 핵심이지만 선 자체가 불교의 전부는 아니다.
다음 다례와 다도의 질적인 면에 있어서 차이는 무엇인가 ?
넓은 의미의 다례에는 실용 다법도 있어 이는 다를 마시는데 있어 간단한 예법과 더불어 누구라도 손쉽게 마시는 다사이다. 이는 다 애호가들이 마시는 가장 간략한 다법이다. 여기에는 구도적인 자세란 물론 있을 수 없다. 도까지를 추구하지 않으나 불교, 유교, 궁중 예법 등과 더불어 행하는 다례는 이를 의식다례라고 말하고 싶다.
그러나 과거 우리 조상들이 해 온 다례는 궁중다례, 불교식 다례, 유교식 다례 등이 있었으나 이 다례에선 의식중심의 것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구도적인 경향은 없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구도적인 자세가 깊었던 다법은 불교의 것이라 하겠다. 때문에 다례는 다도의 핵심적인 부분이지 다도 즉 도의 경지에 이르기에는 미흡했다.
다만 다도(茶道)가 다례(茶禮)에 그치지 않고 심오한 도(道)의 경지에 가기 위해서는 참선 또는 다시 등의 연구과 더불어 다정신을 체득하여 깨달음의 경지에 들어가야만 했다. 이런 경지는 불교에서 있었다 하여 초의(草衣)는 다도(茶道)라고 했다. 도란 유(有)와 무(無)가 같은 근본에서 나와 이름만을 달리하는 동일한 것이라고 노자는 그의 도덕경에서 말했지 만은, 그와 같은 어려운 철학적인 풀이는 유교에서는 하늘의 길이라 하였으며 이것은 곧 참된 사람의 길이기도 하다. 중용에 보면 「참은 하늘의 길이요, 참을 행하는 것은 사람의 길이다. (誠者天之道也 誠之者 人之道也)」라고 했는데 하늘의 길이란 참을 행하는 사람의 길이 된다.
때문에 다도란 다와 더불어 참된 사람의 길을 걷자는 천리(天理)를 행한 구심적인 행위를 말하는데 비하여 茶禮는 다를 마시는 것을 중점으로 하는 예의범절 즉 예(禮)나 몸가짐 그리고 茶와의 조화를 중심한 분위기와 지식 등을 일컬음이다.
김명배의 『茶道學』에서는 사람(人). 귀신(神). 부처님(佛)에게 차탕을 바치는 예의를 다례(Tea Ceremony)라고 한다고 보고 있다. 이러한 다례의 종류로서 역대 왕조의 조정다례, 유불도교의 종교적인 다례, 여염집에서의 손님맞이 다례가 있다.
신라. 고려. 조선왕조의 조정에서는 이웃나라의 사신을 영송하는 다례와 왕실의 궁중다례가 거행되었다. 종교적인 다례로서 유교의 다례. 불교의 다례. 도교의 다례가 있다. 신라시대 유교적인 다례에 대해서는 일연스님의 「삼국유사」에 전재된 김양감의 「가락국기」에 적혀 있다. 그리고 송나라의 주희가 「주자가례」에 제정해 놓은 관혼상제의 다례는 고려 말기에 정몽주와 이숭인의 상주에 의해 채택되었다.
신라시대에는 미륵하생신앙에 의하여 미륵세존에게 차를 공양하였고 , 화엄사상에 의하여 문수보살에게 차를 공양하였다. 그리고 신라의 도의선사는 당나라에 유학하는 동안 홍주 백장산의 대지수성선사에 있는 백장회해선사를 만나고 돌아 왔으니 「백장청규」에 의한 다례법을 전파하였을 것이다.
고려시대에도 지켜진 「백장청규」에는 특정한 인물을 위한 다례인 특위차를 비롯한 불전헌다법이 적혀 있다. 대개 음력 5월 5일의 단오명절이면 민간에서는 창포주를 마시어 백병과 백충을 물리친다지만 선사에서는 새벽에 창포차를 달이는 것이다. 또 음력 9월 9일의 중양절이면 민간에서는 수유주를 마시고 술에 국화를 띄워서 장수를 빌지만 절에서는 수유차로 대신한다.
도교에서는 절에 있는 칠성각, 도교의 관사, 복원궁, 소격서에서 옥황상제, 보화천존, 사해용왕 등의 여러 신에게 단잔으로 다례를 받들었다.
손님맞이 다례는 여염집에 문득 찾아오거나 초청한 손님에게 차를 접대하는 것인데 『난파선생 시권』의 「후서」에 손님맞이 다례의 좋은 예가 보인다.
거인 청주 이상국은 내 아버지와 나이가 비슷한 어른이시다. 난파는 그 호요, 수부는 그 자이다. 공은 어려서부터 이상한 풍속을 즐기고 숭상하였다. 손님이 오면 반드시 향을 사르고 차를 달이고 노래를 읊으며 잔을 돌렸다.
( 참고문헌 )
김명배. 「茶道學」. 학문사. 1993
석용운. 「韓國茶藝」. 초의. 1993
정상구. 「韓國茶文化學」. 세종출판사. 1997
3.화랑정신과 다도정신
한국다도정신을 고찰하는데 있어서 먼저 우리들이 생각해야 할 것은 중국의 다도정신을 고찰하는 방식처럼 중국의 유명한 다서를 중심하여 다서 중에 표현된 정신-- 음유적 표현 또는 직설적 표현 등을 중심으로 고찰하는 방법은 합당하지 않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한국에서는 다도정신을 구명할 만한 다서가 초의선사의 다서를 제외하고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여 한국의 시대별 다도정신의 구명은 다인들의 茶詩 또는 다생활을 중심으로 고찰해야 된다는 점이다. 이와같은 관점에서 한국다도정신을 고찰해 보고자 한다.
정상구의 『한국다문화학』에서는 한국의 다도정신은 이미 신라시대에서부터 형성되었다는 견해를 밝히고 있다. 다도정신의 기원은 화랑도에서 엿볼 수 있으며 한국다도정신의 뿌리는 원효의 화쟁지화(和諍之和)정신과 그의 적지적(寂之寂)정신 즉 정(靜)정신에서 일어났다고 논의하고 있다. 그리하여 한국의 다도정신은 원효성사의 화정(和靜)정신을 기조로 하여 고려시대의 이규보(李奎報)의 다시, 정몽주(鄭夢周)의 다시를 비롯하여 조선조시대의 서산대사의 다시 그리고 초의선사의 다시 및 다서를 중심으로 전개되었 다고 하겠다.
가.신라시대의 다도정신 -- <화(和). 정(靜). 청(淸)>
신라의 화랑들과 다도와는 깊은 관계가 있다. 삼국유사의 충담(忠談)과 차관계에 관한 것에서 이미 충담은 미륵세존에게 차 공양을 올리고 남산의 오솔길을 내려 오면서 지난날 화랑 기파랑(耆婆郞)의 인격을 기리며 다음과 같은 노래를 불렀다.
헤치고 나타난 달이
흰구름 쫓아 떠가는 어디에
새파란 냇물속에 기랑의 모습 잠겼세라
일오천(逸烏川) 조약돌이
랑의 지나신 마음갓(際)을 쫓고자
아 잦(栢)가지 높아
서리 모를 화판(花判)이여
삼국사기의 기록에서 밝혀진 바와 같이 차는 이미 선덕여왕 시대부터이다. 그러나 더 구체적으로 기록된 바에 의하면 흥덕왕 2년에 입당회사인 김대렴이 차나무 종자를 가져와 차씨를 화개동에 심었다 하여 점점 퍼지게 된 것이다. 경덕왕은 충담사를 궁중에까지 맞아서 차를 마신 기록이 있다. 왕은 「차의 기미가 신기하여 입안에 이상한 향기가 가득차다.」(茶之氣味異常 中異香郁烈)고 하였다. 이것만 봐도 왕이 차를 얼마나 좋아 했는가를 알 수 있다.
신라 화랑과 다도와의 관계는 고려 중엽의 문인 이곡의 기행문 동유기(東遊記)에서도 엿볼 수 있고 그의 다시 가운데에도 엿볼 수 있다. 그의 다시 「강릉동헌의 운을 잇다.」(次江陵東軒韻) 또는 「한송정(寒松亭)」등에서 엿볼 수 있다. 그뿐 아니라 김극기의 화랑 「차부뚜막」을 읊은 시 등에서도 알 수 있다. 그리고 고려시대의 대학자 이규보(李奎報)의 「원효방(元曉房)」을 심방하고 원효와 사복(蛇福)간의 차생활 기록 등에서도 관계를 알 수 있다.
그러면 화랑도정신은 무엇인가. 어떤 사람은 세속오계를 드나 이는 합당치 않으며 또 어떤 사람은 미덕을 들기도 하나 미덕이란 지나치게 개연적인 것이어서 이를 취하기에는 석연치 않다. 그럼 과연 화랑정신이란 무엇일까 ? 이에 관해 최치원의 난랑비서(鸞郞碑序)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우리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으니 이를 이름하여 풍류라 이른다. 그 교의 기원은 선사에 자세하게 실려 있는데 실로 이는 삼교를 포함하여 중생을 교화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집에 들어오면 효도를 다하고, 나아가 나라에 충성하는 것은 노사구(魯司寇)의 뜻 그대로이며, 그 한없는 일을 당하여 말없는 교를 행하는 것은 주주사의 종지를 다함이며, 모든 악한 일을 하지 않고 착한 일을 행함은 축건태자의 교화 그대로다
여기에서 보는 바와 같이 화랑도는 유.불.선 삼교를 포함하여 중생을 교화했으며, 충효신의를 지켜 유교를 무의무언지교 화광동진(和光同塵) 충기이위화 하는 선교를 또 자비덕행하는 석가의 불도를 다 같이 수련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상에서 보는 바와 같이 화랑의 기상은 유. 불. 선의 장점을 산천에의 주유와 더불어 심신을 단련하여 또 차와 더불어 체득하는 것이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신라시대의 화랑정신은 이를 「화합(和合). 충절(忠節). 숭경(崇敬). 청결(淸潔)」로 요약할 수 있다. 그러므로 화랑의 다정신도 화(和). 충(忠). 경(敬). 청(淸)이라고 하겠다.
정영선의 『다도철학』에서는 화랑의 다문화를 논의하면서 6세기 이전의 인물로 추정되는 신라 사선이 경포대와 한송정에서 「석지조(石池爬)」라는 돌못화덕을 사용하여 차를 끓여 마셨다는 기록이 흔히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사선은 영랑(永郞). 술랑(述郞). 남랑(南郞). 안상(安詳)으로 선인이자 초기 화랑으로 이러한 특수한 다구를 써서 야외의 특정장소에서 차를 끓어 마셨다.
맨 처음 사선의 다조를 글로 남긴 사람은 김극기(金克己,1148-1209)로서 그는 <한송정>이라는 제목의 시에서 아래와 같이 읊고 있다.
여기가 네 신선이 자유로이 완상하던 곳
지금도 남은 자취 참으로 기이하구나
주대는 기울어 푸른 풀 속에 잠겼고
다조는 내버려져 이끼 끼었네
또한 이곡(이곡,1298-1351)이 동해안지방을 여행하고 쓴 『동유기』를 보면 경포대와 한송정에 있는 사선의 전다구(煎茶具)에 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날이 아직 기울기 전에 경포대에 올랐다. 옛날에는 대에 집이 없었는데 요즈음 호사자가 그 위에 정자를 지었다. 옛날 선인의 석조가 있으니 대개 차를 달이는 도구이다. 동쪽에 사선비가 있었으니 호종단이 물 속에 넣어 버리고 오직 귀부(거북모양의 비석 받침돌)가 남아 있을 뿐이었다. 한송정에서 송별연을 했다. 이 정자 또한 사선이 유람하던 곳인데, 고을 사람은 구경꾼들이 많은 것을 귀찮게 여겨 집을 헐어 버렸고 소나무도 들불에 타버렸다. 오직 서리 내리는 밤의 달이 맑을 뿐이다. 다만 석조 석지와 두 개의 석정(돌우물)이 그 곁에 남아 있는데 역시 사선의 다구이다.
위의 글을 살펴보면 한송정 뿐만 아니라 경포대에도 화랑들이 차를 마셨고, 그 자리에 석조가 남아 있음을 알 수 있다. 한송정에도 석지와 두 개의 석정이 있음도 적고 있다. 우물이 두 개인 이유는 하나는 제사장용이거나 차 끓이는 물을 쓰기 위한 신성한 샘이고, 다른 하나는 낭도들이 쓰거나 허드렛물을 쓰기 위해 파놓은 우물일 가능성이 크다고 하겠다.
이러한 사서에 남아 있는 내용을 중심으로 신라의 음다풍속을 살펴 볼 때, 주류를 이루는 계층은 화랑이었다고 하겠다. 대표적 인물로는 6세기 이전의 초기 화랑인 사선과 후기의 화랑승인 충담, 월명, 보천과 효명 등이라고 하겠다. 사선이 경포와 한송정에서 차를 끓인 이유는 이곡이 쓴 『동유기』에서의 내용과 여지승람을 참고하면 아마 차를 끓여 누군가에게 바치고 기도하기 위함이었던 것 같다. 차를 바친 대상은 사선과 선인들이 떠받들었던 삼신 혹은 셋을 하나로 본 시조삼신(始祖三神)이었을 것으로 추정이 된다.
석용운은 사선랑의 행다법을 재구성하면서 그 의의는 풍류도를 닦은 선인들이 한송정이나 경포대에서 차를 달여 마시며 심신수련을 하는 선가의 다풍을 알 수 있는 독특한 행다법에 있다고 보았다. 선랑들이 무리를 지어 다니면서 심신수련을 하였는데 그들의 수련장에는 차를 달이는 돌절구와 돌부뚜막, 돌우물과 다구들이 있었다. 항상 차를 달여 마시기 때문에 깨지지 않는 돌로 만든 다구들을 준비해 두고 사용했으며 산수간에 노닐면서 오악산천에 제사를 지내고 또 낭도들이 차를 나누어 마시기 편리하도록 그 자리에 고정시킨 다구를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다음과 같은 헌다순서로 차를 마셨다고 보고 있다.
1. 한송정에서 석지조를 이용하여 차 끓일 준비를 한다.
2. 석조는 찻물을 끓이며 차 달이는 부뚜막이고, 석지는 찻물을 보관하는 기구이다.
3. 석지에 찻물을 길어다 놓고 석조에 불을 피워서 찻물을 끓 인다.
4. 석조 옆에 물을 채워서 물이 데워지도록 하고 연료는 숯이 나 백탄을 쓰되 솔방울을 주워다 쓰기도 한다.
5. 다구를 깨끗이 씻어서 준비하고 찻물이 끓기를 기다려 물이 끓으면 약간의 탕수를 떠내 찻잔을 데운다.
6. 떡차를 갈아서 가루로 만들어 돌솥에 넣어 끓인다.
7. 차의 양은 손님의 수에 따라 가감을 한다.
8. 찻잔에 물을 버리고 잘 달여진 차를 떠내서 찻잔에 나누어 따른다.
9. 낭도 한명이 찻잔을 받쳐들고 정자 안에 계시는 사선에게 차를 날라다 드린다.
10. 사선에게 차 대접을 마치고 나면 다른 낭도들이 마실 차를 달인다.
11. 전과 같은 순서로 차를 달여 낭도들에게 차례로 나누어준 다.
12. 낭도들은 자기의 찻잔은 각자가 휴대하며 차 마실 때 꺼내 어 차를 받아서 마신다.
13. 사선은 정자 안에서 마시고 낭도들은 밖에서 아무 곳이나 편리한 속에서 차를 마신다.
14. 사선이 차를 다 마시고 나면 찻잔을 거두어 가지고 나와 석조의 데워진 물에 씻어서 보관한다.
15. 석조에 설거지하는 통이 함께 붙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나.고려시대의 다도정신
<청허(淸虛), 청화(淸和), 사무사(思無邪)>
이상과 같이 전개된 한국의 다도정신은 고려시대에 와서도 정몽주(鄭夢周), 이규보(李奎報), 이행(李行) 등의 시 등에서 계속 이어져 그 정신적 발전을 만개하였다. 정상구의 『한국다문화학』에서는 고려시대의 다도정신이 본질적으로 和靜精神과 동질적인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먼저 고려시대 이규보의 茶詩 중에서 다도정신을 잘 표현한 시를 감상해 보기로 하자.
밤은 깊어 물시계 딩동할 때 그대에게 三語와의 차이를 묻노니 말해 다오.
나는 긴세월 정진했으나 스스로 구하기 어려웠도다. 그대를 잠시 보고 나니 모든 것이 空함을 알메라.
韓退之의 쌍조부(雙鳥賦)는 싫증나고 장자의 소요유(逍遙遊)는 구미에 맞노라.
타오르는 불에 끓인 향기로운 차는 바로 도의 맛이며 흰구름과 밝은 달은 곧 나의 가풍이로다.
이 시에서는 깊은 밤 물시계의 딩동하는 소리가 바로 여래의 삼어와 같다는 인식이다.
여래의 삼어를 살펴 보면
① 수자의어(隨自意語) -- 부처님이 자의대로 자기가 증득한 실법을 설한 것
② 수타의어(隨他意語) -- 부처님이 중생의 근기에 따라 방편 으로 설한 것
③ 수자타의어(隨自他意語) -- 부처님이 중생을 위하여 설법을 하실 때 절반은 자의에 따라 설하시고 절반은 타의 근기에 따라 설하신 것을 말함.
앞의 구절에서 물시계의 소리가 여래의 삼어와 차이가 없다는 것은 바로 실유불성(實有佛性)의 경지를 표현한 것이라 하겠다.
오랜 세월 정진하였으나 스스로 구하기 어려웠던 것을 다를 만나고 나니 공한 것을 알았다는 것이며 장자의 소요유를 한퇴지의 쌍조부보다 좋아하게 되었다는 것은 현실적인 세계관보다 淸虛와 靜寂의 노장사상에 심취해 감을 읊조린 것이며, 茶의 맛을 道의 맛으로 승화시키는 청정한 그의 마음가짐은 흰구름과 밝은 달을 기풍으로 한다는 청정무구(淸靜無垢)한 무소득무아(無所得無我)의 경지를 가풍으로 한다는 것을 읊조린 것이라 하겠다.
이 시에 나타난 이규보의 다도정신을 『한국다문화학』에서는 청허(淸虛)와 무사의(無邪意)로 보고 있다. 이규보가 설봉선사의 청에 의해서 지은 다음과 같은 茶詩속에도 그의 청허한 다도정신을 알 수 있다.
돌화롯불 활화로 피워 차 손수 달이니
찻잔의 차 빛깔과 맛 자랑스럽네 .
끈끈한 그 맛 입속에 부드럽게 녹으니
어머니 젖내와 젖내 맡는 얘기같네.
고요로운 방안에 아무 것도 없고
오직 차솥 생황소리(물 끓이는 소리) 기쁘네.
차 이야기 물 고르는 것은 이 집의 가풍
어찌 千世의 영화를 바라랴.
화롯불 차 손수 달이는 것 등은 自得自覺의 修行心을 표현한 것이며, 차 맛 입속에 녹으니 내 마음 어머니 젖내 맡는 얘기 같다는 것은 無邪意한 정신, 즉 淸和精神을 말함이라 하겠다. 방안에 아무 것도 없고 차솥 물 끓이는 소리 기쁘네 하는 구절은 청허정적(淸虛靜寂)한 마음자리를 나타내고 있고, 차 이야기 물 고르는 것을 가풍으로 삼고 천세의 영화를 버린다는 것은 陸羽의 精行儉德 정신과 유무상통하는 정신이다. 이러한 이규보의 다시를 살펴 볼 때 고려시대를 대표하는 이규보의 다도정신은 淸虛. 淸和. 無邪意 등이라고 할 수 있겠다.
나쁜 평판을 모두 허령한 마음 밖에 던지고 나니
오묘한 도는 오히려 눈앞에 있구나.
돌솥에 끓는 차는 향기롭고 흰 젖이 뜨고
벽돌 화로에 피는 불은 저녁놀 같이 붉구나
인간사의 영광과 욕됨을 알았으니
이제부터 호수와 산을 유랑하는 늙은이가 되리라
위시는 이규보의 茶詩로서 그의 茶道一如 사상을 잘 표현하고 있다 하겠다. 자신의 虛한 마음을 밖으로 던지고 나니 비로소 도가 보이는데, 이 도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눈앞에 끓고 있는 차속에 있음을 깨달았다고 읊고 있다. 이 茶道一如를 통해서 인간사의 영광과 욕됨의 허무함을 알았으니 이제부터 거기에서 벗어나서 자연속을 유랑하는 삶을 택하겠다는 고고한 정신을 암시하였다. 또한 이 茶詩에는 차의 아름다움을 정말 멋지게 표현하고 있는데, 차를 맑은 흰 젖에 비유하거나 화로의 불을 저녁놀에 비유함으로서 차를 대자연과 조화롭게 이해하려는 이규보의 다정신의 일면을 알 수 있겠다. 정영선은 이규보의 道를 논의하면서 그가 추구하는 道는 佛家나 儒家의 도가 아니라 道家의 도라고 보고 있다. 그 예로서 아래의 시를 인용하고 논증하였다.
한자의 쌍조이야기는 듣기가 싫고
장자의 이충설을 몹시 좋아한다네
타오르는 불에 끓인 향차는 진실로 道의 맛이고
흰 구름과 밝은 달은 곧 집의 풍경이네
생공의 설법은 예리하고 날카로우며
열자는 바람을 타고 다녀 육신이 해탈했네
그대를 만나 망형하고 애오라지 뜻을 이루었으니
그날은 방덕공에게 부끄럽지 않았다오
위 시에서 이규보는 장자의 설을 몹시 좋아하다고 밝히면서 생공과 열자를 인용하고 있다. 노장의 無爲自然을 상징하는 흰 구름과 밝은 달이 곧 자신의 집이라고 하면서 이 老莊에 의해서 육신을 벗어나서 해탈을 얻으니 형태를 잊어서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고 있노라 자신있게 밝히고 있다.
또한 익제 이제현선생도 차를 사랑하고 아끼는 다인이었다. 이제현선생은 고려의 충절이요, 대문장가로 어릴 때부터 영리하고 점잖기가 성인 같았다고 전한다. 14세 때 성균시에 장원 급제하였고, 15세때 병과에서 급제하였다. 익제선생은 〈익제난고(益齊亂稿)〉를 지었는데 권4에 「소악부」 11편을 남기고 있는데 <고려사> 「악지」에 소개된 내용과 같은 것으로 「장암」「사리화」「처용」등이다.
익제의 아버지 이진 때도 집안에서 차를 즐겨 마셨던 것으로 보인다. <익제집>에 혜감(慧鑑)이 신명(新茗새로딴차)을 동암(東菴)에게 보내면 동암은 반드시 시를 지어 보답했으며 이제와서 자원국사 역시 차를 익제에게 보내니 이 일이 연례행사처럼 되었다. 이에 <송광화상이 햇차를 보내준 은혜에 대하여 붓가는 대로 적어 방장실에 붙임> 이라는 긴 제목의 시를 지어 바쳤다.
문 두드리는 소리에 놀라 나가보니 대바구니 보내와
옥과보다 더 좋은 신선한 차를 얻었네.
맑은 향기는 한식 전에 따왔는지
고운 빛깔은 숲속의 이슬을 머금은 듯
돌솥에 찻물 끓는 소리 솔바람 부는 듯
자기 찻잔에 도는 무늬는 꽃망울을 토한다.
황정견이 운용차를 자랑할 수 있으려나
소동파의 월토차보다 월등함을 알았네.
서로의 친분은 혜감의 기풍이 남아 있고
사례하려 하나 동암의 글귀가 없구나.
붓솜씨도 노동을 본받을 수 없는데
더구나 육우를 따라 다경을 쓰겠는가.
원중에서 공안을 다시 찾지 마시오
나도 역시 지금부터 시에 전념하겠소.
천병식의 『韓國茶詩作家論』에서는 이 시에 대하여 햇차의 신선함, 차의 빛깔, 차 솥에 물끓는 소리가 마치 솔바람 소리 같다는 것 그리고 찻잔에 뜨는 무늬의 아름다움 등 찻자리에서의 모든 일들이 거의 다 묘사되어 있다고 논하였다. 그러나 익제는 스스로 겸손의 미덕으로 글 솜씨의 비천함과 육우 같은 재주가 없어 <다경> 같은 글을 지을 수 있는 힘이 없으니 이제부터 시를 짓는 일에 전념하겠다는 다짐하고 있다.
한번은 묘련사의 순암 법사가 찻자리를 벌이고 그의 친구들을 초청하여 옛날에 쓰던 석지조를 가져와 그 내력을 설명하고 차를 한잔 씩 마신 후에 그 석지조의 내력을 다 설명하고 익제에게 시를 지어달라고 부탁함에 익제는 <묘련사석지조기>를 지었다.
김명배는 고려의 다경을 크게 보아 1. 망형(忘形) 2. 다선삼매(茶禪三昧) 3. 역리의 음양사상 으로 파악하고 있다. 우선 망형사상의 예로서 다음과 같은 茶詩를 들고 있다.
강변을 방랑하니 저절로 형체를 잃고
-- 이규보 --
무너지듯 평상에 누으니 문득 형체를 잊고
한 낮의 베개에 바람 불어오니 잠이 절로 깨누나
-- 임춘 --
나무의 이끼와 흰 납의 차림에 이미 형체를 잊고
-- 이숭인 --
이처럼 고려시대의 다시를 살펴 볼 때 자기의 형체를 잊고 자연에 합일되는 초월적 정신이 표현되었음을 이해하겠다. 그리고 이규보는 「장원 방연보의 화답시를 보고 운을 이어서 답하다.」라는 茶詩에서 세계 최초로 茶禪三昧의 경지를 제창하고 있다.
초암의 다른 날 선방을 두드려
몇 권의 오묘한 책 깊은 뜻을 토론하리
늙기는 했어도 오히려 손수 샘물 뜰 수 있으니
한 사발은 곧 이것이 참선의 시작이라네
이처럼 이규보는 차를 통해서 참선의 경지에 이르는 지극한 다도정신을 느끼고 표현한 茶人이었다. 이러한 茶禪三昧의 정신이 고려시대의 대표적인 다도정신이라 하겠다.
돌솥의 차는 비로소 끓고
풍로불은 빨갛게 피었구나
물불은 천지의 쓰임이니
곧 이 뜻은 무궁하도다
위 詩는 정몽주의 「역경일기」라는 茶詩인데 여기서 역리를 도입한 점이 눈에 띄인다. 『易經』의 설괘전에 따르면 감리의 괘는 물. 불이다. 그러므로 정몽주의 「역경읽기」에 보이는 감리는 천지를 뜻하는 건곤이라고 하겠다. 이 茶詩를 통해서 정몽주의 다도정신은 한 잔의 차를 마시며 천지의 정기를 느끼는 역리정신을 바탕으로 하고 있음을 간파할 수 있겠다.
4.한국다도의 역사
가.고려사회의 다문화
우리나라 固有의 茶는 草衣禪師의 東茶頌에 의하면 우리나라 古來로 長白山에 白山 茶가 있었다고 언급하고 있다. 長白山 중에 있는 나뭇잎을 따서 알맞게 다려 사람들 이 마셨다고 한다.
효당(曉堂) 최범술(崔凡述)은 이 나무를 생강나무일것이라 하고 應松 스님은 石南科에 속하는 철쭉꽃 이라고 하였다. 우리 民族이 韓半島에 移動하여 農耕生活을 하면서 정착하여 안정된 생활을 영위하게 되면서 茶 마시는 풍속이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崔凡述 先生은 우리의 飮茶 풍속이 이미 三韓, 漢四郡 이전부터 시작되어 中國과 文化交 流가 활발해지면서 中國으로부터 직접 간접으로 飮茶 풍속과 中國茶의 移植이 있었을것 으로 보고 있다.
나.고려시대의 다문화
고려시대는 불교문화의 융성과 더불어 우리나라 茶文化의 전성기로 왕과 귀족 관리 백성들 모두가 일상 생활에서 茶를 즐겨 마셨다. 茶는 귀중한 예물로써 왕이 신하에게 茶 를 下賜(하사)하였으며 宮中의 여러 行事를 준비하는 茶房(다방)이란 관청을 두었고 일 반 백성들이 茶를 사서 마실 수 있는 茶店(차점)을 설치하여 茶를 마시는 풍속이 사 회전반에 성행하였다.
또 특히 나라의 큰 행사인 八關會(팔관회)와 煙燈會(연등회)때 土神과 부처님께 獻茶하고 宮中의 각종 의식에도 茶禮가 베풀어졌다.
또 귀족과 文人사회에도 獻茶(헌차) 풍속이 매우 성행하여 茗席(명석:찻자리)을 마련하여 여러 사람이 모여 茶를 마시며 담소하기로 하였다. 고려의 茶人들은 우리 茶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이 강하여 無我(무아)의 경지에서 손수 차 를 끓여 마시며 하나의 道의 경지에 이르렀다.
李奎報(이규보), 李仁老, 李穀, 鄭夢周, 李穡 등의 茶人들은 茶생활의 멋과 풍류를 읊은 茶 詩를 많이 남기고 있다.
특히 寺院의 僧房(승방)에서 茶文化가 발달하여 茶禪一致의 경지에 이르렀으며 수행시 茶 로서 잠을 쫓기도 하였다.
고려사회에 茶文化가 성행되었다는 사실은 仁宗(1122 - 1146)때 사신으로 왔던 서긍(徐兢)이 지은 고려도경(高麗圖經)의 행장도(行狀圖)에 보는 바와 같이 茶가 성행되었으며 세계에 자랑하는 청자(靑磁)도 茶文化 발달의 소산(所産)이라 볼 수 있다.
● 高麗의 茶人들
- 義天(의천 1055 -1101) : 고려 문종의 넷째 아들로 宋(송)나라에 遊學(유학)하고 돌아와 불 교 天台宗(천태종)을 開創(개창)하고 續藏經(속장경)을 刊行(간행)하였다. 義天의 文集(문집)에 茶에 관한 기록이 많아 그가 뛰어나 茶人이었음을 알 수 있다.
- 李奎報(이규보 1168 - 1241) : 고려 중기의 大文章家(대문장가)로 號(호)는 白雲居士 (백운거사)로 武臣政權(무신정권)시대에 큰 뜻을 펴지 못하였지만 뛰어난 文人으로 東 國李相國集(동국이상국집), 白雲小說(백운소설), 麴先生傳(국선생전)등의 저서를 남겼으 며 茶生活(차생활)을 좋아하여 손수 茶를 끓여 마시고 「茶는 禪의 시작이고」「茶맛 은 道(도)의 맛이다」라고 하여 다도일미(茶道一味)를 주장하고 茶時 40여편을 남기고 있다.
- 李齊賢(이제현 1287 - 1367) : 고려말의 文人이요 性理學者(성리학자) 忠宣王(충선왕) 때 元에 유학하였으며 益제潗(익제집), 益제亂苦(익제난고), 轢翁稗設(역옹패설)등의 문 집을 남겼다. 元나라에서 火前春茶(화전춘차)를 가져와 손수 달여 마시며 茶人들에게 나누어 준 기록도 있다.
松廣寺(송광사) 스님들로부터 茶를 선물로 받고 쓴 편지체의 長詩가 있어 이제현 茶生 活 경지를 알 수 있다.
- 李穡(이색 1328 - 1396) : 고려말 文人이며 性理學者 號는 牧隱(목은)이며 관직이 성균관 大事成(대사성)에 이르렀다. 고려가 멸망하자 節義(절의)를 지켜 朝鮮朝에 出仕 (출사)하지 않았다.
牧隱도 茶를 좋아하며, 茶를 끓여 마시니 편견이 없어지고 마음이 밝아 생각에 그릇됨 이 없다하여 無邪意(무사의)한 경지를 표현하였다. 松廣寺, 聞天寺 승려들이 보내준 茶 를 받고 감사의 茶詩를 남기고 있다.
다.고대국가시대의 다문화
가) 伽倻時代의 茶文化 : 洛東江 下流에 위치한 伽倻地方에 일찍부터 음다 풍속이 있었 다. AD 49년 首露王의 王妃가 印度에서 가져왔다는 보통 茶 나뭇잎보다 큰 장군 茶 가 지금도 金海 일대에 재배되고 있으며 許王后가 올 때 같이온 王后의 兄弟들이 河 東七佛庵에서 佛道를 修行 할 때 茶 나무를 심었다는 설도 있다. 삼국유사(三國遺事) 駕洛國記에 新羅 30代 文武王 元年(661) 王은 金官伽倻 始祖인 金首露王의 墓에 제사(祭祀)를 지내게 하였다. 王命으로 宗廟제사에 술과 단술을 빚고 떡, 밥, 茶, 과일등 여러 가지 음식이 차려졌다. 「王之十七代孫 世級于祗稟朝旨 主常漆田 釀 醴정設以 飯茶菓庶치等尊」 위의 사실들을 볼때에 洛東江 下流에 위치한 伽倻地方은 토지가 비옥하고 중국 남쪽 가 交易이 성하여 철기문화와 벼농사가 들어와 경제, 사회, 문화 전반이 발달하고 사회가 안정 되었다. 이에 茶생활도 일찍 시작되어 土産茶를 재배하고 茶를 祭禮에도 사용 하였으며 飮茶 풍속이 널리 성행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나) 高句麗 시대의 茶文化 : 고구려 시대의 飮茶 풍속은 부족국가시대 있어 우리 固有茶 와 연결된다. 고구려가 강력한 중앙 집권적 귀족 중심의 사회로 발전 됨에 따라 茶文化는 성행되었다. 고구려의 귀족 분묘에서 錢茶가 발견되었는데 이것은 死者가 生前에 茶를 좋아했거나 土神에게 茶를 바쳤다고 볼 수 있다. 그외 고구려 初期 首都 집안현(輯安縣)에서 굴뚝이 달린 이동식 화덕이 발견 되어 들 (野)에서 茶를 끓였거나 음식을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다) 百濟時代의 茶文化 : 百濟의 茶文化는 記錄과 遺積은 없으나 일찍이 中國南朝 와 활발한 文化 交流로 학문, 예술, 산업 등 文化 전반이 발달되고 귀족사회가 정착되었다. 특히 4세기 후반 불교의 전래에 의하여 왕실과 귀족사회가 강화되고 화려한 불교 문화의 융성을 이룩하게 되자 寺院과 귀족층에서 飮茶 풍속이 성행되었다. 일본 東大寺要륵에 百濟의 귀화승 行基(행기)(668 - 748)가 중생을 위하여 茶 나무를 심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것은 百濟의 茶가 일본에 전래되었음을 알려 주는 기록이다. 백제는 지리적 위치나 기후로 보아 일찍이 茶나무를 재배하고 茶를 생산하였을 것이다.
라) 新羅時代의 茶文化 : 新羅는 地理的 위치로 사회적, 文化的으로 그 발전이 고구려와 百濟에 비하여 後進的 이었으나 6세기 초 佛敎의 公認(공인)과 더불어 왕권의 강화와 貴族사회의 안정이 확립되고 文化가 전반적으로 발전되고 있었다. 특히 眞興王(579 - 632)이후 花郞제도의 公認으로 청소년들의 인재양성과 佛敎의 護 國的 信仰의 性格은 국가발전과 삼국통일의 토대가 되었다. 법흥왕 19년(532)의 金官伽倻 합병과 眞興王 23年(562) 大伽倻 정복은 新羅가 낙동강 유역의 伽倻地方을 완전히 귀속시킴과 동시에 伽倻지역의 茶文化의 유입이 시작되었으며 中國唐과 통교에 의한 唐문화의 수입과 동시에 中國의 茶가 들어오는 계기가 된 다.
- 三國史記 권2에 茶는 善德女王(632 - 647)부터 있었다는 기록 「茶自善德女王之時有之」
- 三國史記 弟 10拳 興德王條에 王3年(828) 唐나라 사신으로 갔던 金大廉 (김대렴) 이 돌아오는 길에 中國茶를 가져와 智異山에 심었다는 「入唐廻使 大廉持茶種子來 王使植智異山」
기록을 보면 新羅初期부터 있어온 茶가 佛敎의 공인, 중국과의 文化交流의 확대에 의하여 6세기 이후부터 9세기 불교의 융성과 더불어 왕족, 귀족, 승려, 화랑等 下流 사회에 飮茶풍속이 성행되고 佛敎寺院에서 부처님께 올리는 獻茶行事와 팔관회 행사 에서 獻茶(헌차)행사가 행하여 졌다. 또 儒彿仙 思想의 영향을 받은 花郞(화랑)들 사 이 에서는 心身의 修練(수련)과 더불어 茶 생활을 즐겼다. 그 증거로 江陵의 寒松亭 (한송정) 四仙의 茶 유적을 들 수 있다.
마) 統一新羅 社會의 茶文化(676 - 935) : 新羅는 삼국통일 후 전쟁이 없는 平和스러운 생활 가운데 영토의 확장 경제활동의 확대, 귀족사회의 고착등 많은 사회의 변화를 가져왔다. 특히 불교의 문화의 융성과 화려한 귀족사회의 발전은 예술 문화전반이 발달하여 사 회 전반에 茶文化가 보급된다.
八關會(팔관회)등 국가정 행사와 각종 궁정행사에도 獻茶儀式이 널리 행하여지고 귀 족, 관리, 文人들의 생활과 花郞들의 修練(수련)에도 茶가 큰 역할을 하고 승려들의 修行 생활에도 茶는 필수가 되었다.
통일신라 사회에서 彌勒佛(미륵불)에 獻茶(헌차)하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미륵불은 도탄에 빠진 民衆을 구제하는 理想佛이며 未來佛(미래불)로서 미륵이 化身하여 花郞 이 되고 화랑이 나라를 구한다는 民衆的信仰으로써 신라인들은 화랑을 미륵불의 化身 으로 생각하고 화랑을 삼국통일의 역군으로 양성하여 이들은 통일의 선구적 역할을 하였다.
미륵불과 花郞, 茶를 연관시켜 볼때에 신라人들이 미륵불에 올린 茶는 미래 이상세계 를 믿고 기다리는 신라인들의 염원을 미륵불에 전달하는 매개체로 볼 수 있다.
● 통일신라의 茶人들을 보면
- 원효(元曉 617 - 686) : 통일기의 학자적 승려로 韓國佛敎思想史에 가장 위대한 업 적을 남겼으며 和靜(화정) 사상으로 茶道情神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고려 후기의 文人 李奎報의 「南行日記」의 元曉房(원효방)의 기록에서 원효의 茶에 대한 경지 를 엿볼 수 있다.
- 설총(薛聰 692 - 746) : 원효의 아들이며 유학자로 神文王(신문왕)을 訓戒 (훈계)한 花王戒(화왕계) 設話(설화)내용에 「임금께서 그렇게 잘먹고 잘지내지만 茶와 술로서 정신을 맑게 하시라」 「高粱以充腹 茶酒以精神」
- 보천(寶川)과 孝名(효명) : 31대 神文王의 두 아들로서 강원도 오대산에서 佛道를 닦으면서 문수보살(文殊菩薩)에게 茶를 끓여 바쳤다는 기록(三國遺事 3卷)
- 충담사(忠談師) : 신라 35대 景德王(742 - 764)때 茶僧이자 詩心이 뛰어난 鄕歌 (향가) 作家였다. 일찍이 화랑도에 몸을 담아 기파랑의 고매한 인격을 찬양한 찬기파랑가(讚耆婆郞歌)를 지었다. 三國遺事에 의하면 忠談師는 每年(매년) 3월 3일과 9월9일에 경주 南山 三花領의 미륵세존(彌勒世尊)에게 茶공양을 올렸으며 경덕왕 24年에는 王에게 茶를 끓여 올리고 王의 요청으로 安民歌를 지어 바쳤다.
忠談師가 삼짇날 (3.3)과 重陽節(중양절 9.9)에 미륵세존에게 茶를 올린 것은 불교 적 헌차(佛敎的 獻茶)의 의식(儀式)만이 아니고 신라의 下層民(하층민)인 大衆 (대중) 구제에 대한 염원이 담겨져 있으며 지난날 통일 전쟁에 희생된 신라 壯丁 (장정) 들의 넋을 위로하는 뜻이 담겨져 있다고 볼 수 있다.
라.조선시대의 다문화
조선 初期에 왕실과 조정의 儀禮(의례)에서도 茶가 사용되고 조선예법의 기준이 되는 朱子家禮(주자가례)에도 祭祠(제사), 婚禮(혼례), 祠堂(사당)의 祭禮(제례)등에 茶를 올리는 獻茶(헌다)의 법도가 있어 양반 관료 사회에 飮茶(음다) 풍속이 성행되었다. 조선중기 倭亂(왜란), 胡亂(호란)등 양란이후 경제적 사회적 혼란으로 茶생산이 감소되어 茶文化의 쇠퇴를 가져왔다.
그러나 寺院의 僧房(승방)에서 飮茶의 생활과 造茶(조다)의 기술이 유지 발전되어 왔다. 조선 말기에 茶山丁若鏞, 秋史金正喜 草衣大禪師가 쇠퇴한 茶文化를 다시 일으키고 특히 草衣禪師는 海南(해남)에 一枝庵(일지암)을 중건하고 40년동안 茶의 모든 것을 연구하고 韓國茶文化를 中興(중흥)시켰다.
대체로 조선왕조가 신라와 고려시대에 비하여 茶文化가 쇠퇴한 원인은 조선초기 불교의 탄압과 寺院에 重稅(중세)를 과하여 불교가 힘을 잃은점과 일반가정의 祭禮(제례)에서도 淸酒(청주)를 많이 사용하였으며 일상생활에 담배와 술같은 기호품의 성행과 韓國의 좋은 生水(생수)와 식탁에서 숭늉을 많이 마시는 등 한국인의 생활습관 등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고 또 조선후기 地方官吏(지방관리) 茶貢(다공)에 대한 지나친 수탈도 茶文化 쇠퇴의 한 원인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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