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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탐진최씨화수회 원문보기 글쓴이: 최윤영(대전)
다큐멘터리
역사를 찾아서
<제579편>
「표해록」은 어떻게 만들어졌나
방송 : 2015년 11월 29일(일) 00:05~01:00 (한민족방송)
11월 29일(일) 00:05~01:00 (제1라디오)
극본-이상락 연출-김태성
해설-김석환 낭독-이슬
<나오는 사람들>
최부 임호기
고벽 장희문1
계면 서승휘
한신 송대선
관원1 공준호
통역관 이정민
관원2 김진수1
성종 사성웅
승지 허성재
조형 이승준
홍귀달 석승훈1
한치형 이규창
윤장 장병관
윤필상 김진수2
송질 석승훈2
이세좌 장희문2
*시그널 & 타이틀
<해설> (인사)
지금 우리는 성종19년인 1488년에, 부친의 사망 소식을 듣고 제주도에서 배를 타고 본가로 향하다가 풍랑을 만나, 중국의 강남 방면으로 떠밀려 갔던 전 홍문관 교리 최부의 표류 행적을 탐색하고 있습니다.
최부 일행은 표류한 지 한 달 남짓 지난 2월 11일에는 중국 절강성의 항주에 도착하는데요, 최부는 거기서 ‘고벽’이라는 이름을 가진 관리에게 북경으로 가는 여정을 질문합니다.
최부 여기서 육로로 이동을 합니까, 아니면 배를 타고 바다로 갑니까?
고벽 우리나라의 소주, 항주, 복건성, 광동 등지에서 해상 무역을 하는 상인들이, 후추나 향료 따위를 사들이기 위하여 멀리 점성국이나 하회국을 향하여 떠나지만, 열 사람이 가면 겨우 다섯 사람만 돌아올 정도로 바닷길은 위험합니다. 하지만 황하수를 따라 가는 길은 매우 안전합니다. 유구국이나 일본 등지에서 우리나라에 공물을 바치러 오는 사신들도 항주에 들렀다가 가흥을 지나 이곳 소주에 이르게 되는데, 천하의 이름난 비단과 보물들이 모두 여기 소주에서 나가지요.
최부 허면, 소주에서 북경에 이르는 노정은 어떻게 되지요?
고벽 소주에서 상주를 지나 진강부에 들른 다음, 거기서부터 양자강을 지나게 되는데, 여기서 양자강까지 천리쯤 됩니다. 그런데 양자강은 물살이 험해서 풍랑이 없어야만 건널 수 있습니다.
최부 바다가 아니라 강인데도 물살이 그리 험하단 말인가요?
고벽 그렇습니다. 양자강을 지나서는 바로 배를 타고 북경으로 가게 됩니다. 당신들은 봄철을 만났으니 다행이지만 만일 여름철이라면 찌는 듯한 더위 때문에 쇠약한 몸으로는 탈이 나서 무사하지 못 할 것입니다. 또한 산동성, 산서성, 섬서성 등지는 몇 해 동안 연거푸 흉년이 들어서, 사람이 사람의 고기를 먹는 형편인 탓에, 백성들이 유랑을 하고 있습니다. 양자강을 지나 천여 리를 가면 산동 땅인데, 거기 닿거든 사람을 조심해야 합니다.
<해설> 그러니까 최부 일행은 표류 끝에 강남에 표착하였다가 거기서부터는, 쌀을 비롯한 물자 운반을 위해 조성해 놓은 대운하를 따서라 북경에 이르렀다는 얘기가 됩니다. 서울대 규장각 송웅섭 선임연구원과 청운대 김경수 교수의 얘기, 들어보시죠.
*인서트-1. 테입<384> 송웅섭
(39:00 대략 최부가 표류하다가 정박해서 조선으로 돌아오기까지의 긴 여정이 거친 큰 줄기만 보면 중국 남부의 영파라고 하는 그 부근에 기착을 한 것 같고요. 그 다음에는 육로로 소주, 항주 까지 이렇게 갔다가 항주에서 수로를 이용을 해서 북경으로 올라오는, 그리고 북경에 와서 다시 이제 조선으로 오는, 대략적인 큰 흐름의 코스들은 그런 경로를 밟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39:34)
*인서트-2. 테입<383> 김경수
(28:58 중국대륙의 강남 대운하를 쭉 따라갔던 것으로 보입니다. 최부가 거쳤던 루트 자체가. 지금도 쉽지 않을 텐데, 당시에 표류하면서 이렇게 갔다는 것은 상당하고, 무엇보다 최부라고 하는 사람이 가지는 특징은 유구국에 표류했던 사람들이 남긴, 실록에 남긴 기사와 달리 이분의 경우에는 문과에 급제한 사람이거든요. 글쓰기가 되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상당히 상세할 수 있고, 좀 더 구체적일 수 있고, 좀 더 내용이 아주 정밀하다고 볼 수 있는 것이 이제 최부의 표해록, 그가 이런 다양한 루트를 거치면서 보고 들었던 것들을 기록을 남겼던 것이 가지는 의미가 그만큼 크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29:52)
<해설> 최부가 이 고벽이라는 관리와 항주에서 나눈 얘기 중에는 두 나라의 종교와 관련된 대목도 있는데요, 이런 내용입니다.
고벽 우리 항주성의 서쪽에 팔반령(八盤嶺)이라는 산이 있는데 그 산에 오래 된 사찰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절의 이름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고려사입니다, 고려사. 여기서부터 거리가 시오리밖에 안 돼지요. 이 절은 송나라 때 고려 사신이 왔다가 지은 것인데, 당신네 나라 사람이 타국에 와서 이처럼 절을 지은 것을 보면, 얼마나 불교를 숭상하는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해설> 고벽은, 원하기만 하면 최부를 고려사라는 그 사찰로 안내해 줄 수도 있다는 의도로 이렇게 말했는데요, 그렇다면 최부는 고려 사신이 지었다는 그 절을 구경했을까요? 아니었습니다. 최부는 냉담하게 이렇게 대꾸합니다.
최부 그 절을 고려 사람이 지었다는 얘기지요? 하지만 지금 우리 조선은 이단을 배척하고 유학을 숭상합니다. 그래서 사람들마다 집에서는 어버이에게 효도하고 바깥에서는 어른을 존경합니다. 나라에 충성을 다하며 사람들 간에 신의를 존중하며 제각기 맡은 일을 다 합니다. 만일 백성들 중에 중이 되려는 자가 있으면, 나라에서 그 사람을 군대에 편입시켜버립니다. 고려시대하고는 딴판이지요.
고벽 중국에서는 보통의 경우 사람들이 부처를 섬기지 않으면, 귀신에게 제사를 지내지요. 그렇다면 조선 사람들은 귀신을 섬기지 않습니까?
최부 우리나라 사람들은 사당을 세우고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데 이는 당연히 섬겨야 할 조상신을 섬기는 것이지 잡신을 위하는 것은 아닙니다.
<해설> 우리는 <표해록>에 나타난 최부의 발언을 통해서, 당대 조선 선비의 의식이, 공자의 나라인 중국인들보다 훨씬 더, 유교사상으로 경도돼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조선사 전공자 정설화는 <최부 ‘표해록’에 나타난 15세기 유자(儒者)의 모습>이라는 석사학위 논문에서 이 부분을 이렇게 분석하고 있습니다.
낭독자 당시 조선은 유교를 국교로 받들고 있었다. 불교를 배척하기는 하였으나 기존에 집권하였던 훈구세력들은 유교와의 공존을 인정하였다. 하지만 사림파는 불교배척의 태도를 강하게 보였는데 사림(士林)인 최부 역시 불교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고 있지 않다. 중국 땅에 우리 민족이 세운 절이 있다는 사실을 들은 최부는 충분히 자랑스럽게 여길만한데도, 고려사라는 그 사찰은 ‘조선’이 아닌 ‘고려’에서 세운 것이라고 확실하게 구분하고 있다.
<해설> 비록 조선이 유교를 국교로 받들고 있다고 해도, 만일 나이가 지긋한 훈구대신이 <표해록>의 주인공이었다면, 같은 민족이 세운 고려사라는 사찰에 들러서 감격해 했을 터인데, 당시 최부가 서른다섯 살의 사림파 선비였기 때문에 그러한 반응을 보인 것이다, 이렇게 유추해볼 수 있겠지요.
어쨌든 이러한 최부의 불교 배척의 자세는 나중에 요동에서 ‘계면’이라는 승려를 만나 나누는 대화를 통해서도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그 승려가 최부에게 조선으로 귀화하고 싶다는 뜻을 표명합니다.
계면 소승의 조상은 본디 조선 사람인데 조부께서 도망하여 이곳 요동으로 이주한 지가 벌써 3세가 되었습니다. 우리들도 본국으로 돌아가 살고 있은데 다만 조선에서 우리를 중국인으로 인정하여서, 중국으로 되돌려 보낸다면, 우리들은 필시 외국으로 도망치려 한 죄를 받아서 목숨을 부지하지 못 할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은 가고 싶지만 발길이 머뭇거릴 뿐입니다.
최부 그대는 불교의 무리이므로 깊은 산속에 있어야 할 것인데 어째서 중의 머리를 하고서 속인의 행동을 하면서 여염(閭閻) 속을 드나들고 있는 것인가?
계면 지금 중국의 새 황제께서 동궁으로 있을 때부터 불교를 미워하여 새로 설치한 절과 암자를 철거하고 도첩이 없는 승려들을 찾아내어서 속인이 되게 하는 명을 내리시니, 의탁할 곳이 없는 지경입니다.
최부 사찰을 철거하여 민가로 만들고 불상을 부수어서 그릇을 만들고, 깎은 머리를 기르게 하여 군대에 충당시키려 한다면, 이제야말로 황제가 성군임을 알겠도다!
<해설> 이렇게 싸늘한 반응으로 일관하자 계면이라는 승려는 최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가버렸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계면이라는 그 사람을 같은 민족이라는 동포애적인 자세로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이단인 불교의 승려로만 여겨서 가차 없이 배척해버린 것이지요. 이렇게 보면 최부의 <표해록>은 우리에게, 당시 명나라의 이모저모를 알려주는 기록일 뿐만 아니라, 조선 사회의 일면을 비추어 보여주는 거울이기도 한 셈이지요.
*인서트-3, 테입<384> 송웅섭
(59:41 표해록을 통해서 최부의 기록, 최부의 조선에 대한 진술 가운데에는 분명히 그 당시 조선의 상황들을 이해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이를테면 최부 자신에 대한, 자기는 알성시에서 장원급제를 했다, 물론 이건 방목에 다 나와 있는 자료이긴 합니다만, 또는 최부가 평균과는 조금 다를 수 있지만 부친상을 그렇게 철저하게 지키려고 노력을 했다든가, 또는 그 과정에서 아랫사람들과의 어떤 대화에서 관계들을 볼 수 있다든가, 뭐 이런 것들은 또 다른 조선 사회를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활용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00:22)
<음악> (브릿지)
<해설> 2월 13일에 최부 일행은 항주를 떠나 북경으로 향합니다.
<음악> (잔잔한)BG
<효과> (강가, 물새들 울고) (배 여러 척, 물살 헤치며 나아가는)
낭독자 우리가 탄 배가 사촌하(謝村河)를 거쳐서 동으로 올라가니 강의 남쪽 언덕에 석축으로 쌓은 둑의 길이가 30여 리나 되었다. 한신(韓神)이라는 관원이 내게 물었다.
한신 당신의 어머니께서는 지금 당신이 여기 있는 것을 아실까요?
최부 (한숨)지금 어머니는 망망한 바다 건너에 아득히 멀리 계신 탓에, 내가 소식을 전할 길이 없으니, 어머니는 필시 내가 벌써 고기밥이 되었을 줄로 생각하실 겁니다. 어머니 마음을 이다지도 상하게 하고 있으니 나같이 불효한 자가 또 어디 있겠습니까. 당신네 나라에서 베풀어준 두터운 은혜를 입어서 고국에 살아 돌아가게 되면, 어머니는 마치 저승에서 살아온 자식을 만난 듯할 것이니, 그 기쁨을 어찌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해설> 강을 따라 북경을 향해 가는 배 안에서 명나라의 관원들은 최부와 이야기를 나누기 위하여 서로 자리를 바꿔가며 친근감을 표시합니다.
관원1 우리나라에서 일찍이 낭중 기순(祁順)과 행인 장근(張謹)이 조선에 사신으로 가서 지은 시들을 모아서 <황화집>이라는 시집을 엮었는데 거기 보면 조선의 선비들이 화답하여 지은 시도 올라 있습니다. 서거정의 시가 맨 처음에 올라 있던데 그분은 지금 매우 높은 관직에 있겠지요?
최부 그 양반은 지금 의정부 좌찬성입니다.
관원1 서거정 그 양반은 문장으로 보아하니 조선에서도 매우 높이 평가될 인물이라고 생각하는데 사실이지요?
<해설> 중국 관원들의 이러한 칭찬에 빈말로라도 무어라고 맞장구를 칠 만도 한데, 최부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습니다. 이걸 두고 훈구대신인 서거정에 대하여 젊은 청요직 사림인 최부가 비판적인 인식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냐, 이렇게 분석하기도 하는데요, 글쎄요, 당시에는 최부가 서거정의 인품이 훌륭하다고 맞장구를 쳤더라도 나중에 <표해록>을 기록할 때 그런 사실을 뺐을 수도 있겟지요. 어쨌든 최부는 중국의 관리들 앞에서 조선 선비의 높은 학문적 식견과 유교적 예의범절을 유감없이 보여주는데요, 그래서 중국 관원들이 입을 모아 칭찬을 합니다.
한신 당신은 동방예의지국에서 온 훌륭한 사람이어서 우리 모두가 당신을 존경합니다.
관원1 그렇습니다. 공은 훌륭한 조선의 선비이니 시를 한 수 받았으면 합니다만…
*인서트-4. 테입<384> 송웅섭
(1:03:32 최부의 표현으로서는 확인은 안 되지만, 그래도 오랑캐라고 생각을 했을 거 아니에요. 내심으로는 저 동이족 내지는 뭔가 자기들보다는 열등하다, 라고 중국 관료들 입장에서 생각 했을 때는 그렇게 볼 수 있지만, 구체적인 지식과, 중국 지명을 읊고, 또 古事를 이야기하고 하는 부분에 있어서는 놀라울 정도의 어떤 식견들을 보여주니까, 그 사람들 입장에서 좀 당황될 수도 있고, 오히려 그래서 좀 더 善待할 수 있는, 그런 계기로 작용했을 것 같습니다. 1:04:10)
<해설> 최부와 중국 관원들의 대화 내용 중에는, 같은 한문을 사용하면서도 두 나라가 달리 쓰는 사례도 나타납니다.
한신 당신은 황제의 명을 받아 조선에 사신으로 갔던 태감들의 이름을 몇 명이나 기억하십니까?
최부 태감 정동, 태감 강옥, 태감 김흥 등이 서로 뒤를 이어서 우리 조선에 사신으로 왔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한신 정동, 강옥 두 태감은 작고하였고 김흥 태감은 지금 북경에 있습니다.
최부 작고하였다고 했나요? 옛 고(古)자를 쓰는 그 ‘작고(作古)’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나는 모르겠습니다.
관원1 중국에서는 사람이 죽은 것을 ‘작고’했다고 합니다. 조선에서는 무어라고 합니까?
최부 물고(物故)라고 합니다.
관원1 물고가 무슨 뜻입니까?
최부 물건 할 때 쓰는 그 물(物)은 ‘일’을 나타내고 ‘고(故)’는 없다는 뜻입니다. 죽은 자는 다시 일을 할 수 없다는 뜻이지요.
한신 귀국에도 학교가 있습니까?
최부 있다 뿐입니까? 서울에는 성균관이 있고 왕실 자제의 교육을 담당하는 종학(宗學)을 비롯하여 중학, 동학, 서학, 남학 등이 있습니다. 그리고 지방의 주, 부, 군, 현에도 향교와 향학당이 있고, 또 집집마다 국당(局堂)이 있습니다.
<해설> 이 외에도 <표해록>에는 최부가 북경에 이르기까지 살펴본 지형지세를 비롯하여, 여러 가지 내용들이 소상하게 올라 있습니다.
*인서트-5. 테입<384> 송웅섭
(1:01:16 최부라고 하는 사람이 정부 엘리트 관료였고, 오랫동안 중국에서 체험했던 일들을 소상하게 기록을 하고 있기 때문이 이걸 어떻게 다 기억하고 쓸 수 있을까, 할 정도로 구체적인 지역, 자기가 체류하고 이동했던 지역들에 대해서 쓰고 그곳의 여러 가지 상황들, 이를테면 삼국지에 나오는 관우나 유비나 이런 사람들이 뭐 만났던 지역이다, 이런 문헌상으로만 볼 수 있는 그런 기록들에 대해서 실제 현장에서 체험을 하고, 물론 의도를 하고 체험을 한 것은 아니지만, 표류라고 하는 계기를 통해서 체험한 거긴 하지만 그렇게 현장을 체험하고 남긴 기록이니까 이런 기록들은, 중국 외의 사람들이 봤을 때는 좀 더 실증적이고 현장감을 전달해 줄 수 있는 기록이라고 얘기할 수 있고. 1:02:11)
<해설> 드디어 4월 7일, 최부는 표류한지 석 달이 지나서야 명나라의 서울인 북경에 도착합니다.
<음악> (브릿지)
<해설> 최부가 북경에 당도하여 명나라 조정의 처분만 기다리고 있는데 반가운 사람이 그를 찾아옵니다.
통역관 (밖에서)최공 계십니까? 나는 조선말을 통역하는 통역관입니다.
최부 (문 열고 나오며)아, 그렇습니까? 여태까지 필담을 하느라고 애로가 많았는데 정말 반갑습니다, 허허허.
통역관 실은 이틀 전에 병부와 궁정에 사고가 있어서 당신들이 여기 와 있다는 사실을 아직 조정에 들어가서 아뢰지 못 했습니다. 내일까지는 반드시 아뢰겠습니다.
최부 천하의 궁박한 사람으로 나같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늙으시고, 아우는 어리고, 집은 가난하여 아버지 장례를 치를 준비도 못 하고 있을 터인데, 내가 또 표류하여 여기로 왔으나 소식을 알릴 길이 없으니, 내 어머니와 아우가, 어찌 내가 이렇게 살아 있는 줄을 알겠습니까? 청컨대 귀하께서는 이 사정을 예부에 보고하여서 내가 여기 오래 머물지 않게 하여 주십시오.
통역관 당신이 살아 있다는 사실은 이미 귀국의 재상인 안처량이 이미 알고 돌아갔습니다.
최부 (놀라며)아니, 안 재상이 내가 살아 있는 것을 어찌 알았나요?
통역관 절강성의 관리가 당신의 일로 사람을 보냈는데, 그 사람이 밤낮을 달려서 삼월 열이틀에 북경에 도달하였지요. 그래서 조정에 주본(奏本)을 작성하여 올렸는데 마침 북경에 와 있던 조선의 재상이 그것을 베껴가지고 돌아갔으니, 당신 집에서는 분명히 사월 그믐이나 오월 초에는 당신이 살아 있다는 소식을 알 게 될 터이니 걱정할 것 없습니다. 그리고 내가 서둘러서 예부와 병부에 보고하리다.
최부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해설> 이렇게 해서 일이 착착 잘 풀려나가는 것 같았는데 최부가 명나라 황제를 배알하는 예(禮)를 앞두고 복장을 어떻게 할 것이냐, 하는 문제로 논란이 벌어집니다.
낭독자 예부에서 소환장을 가지고 왔다. 그 소환장에는 “조선에서 표류해온 관원 최부는 곧 관아로 들어올 것이며 어김이 있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내가 예부에 들어가니 예부시랑이 나에게 이렇게 일렀다.
관원2 그대는 내일 아침 일찍 일행을 데리고 입조하여 황제가 내리는 상을 받되, 의복은 길복으로 바꾸어 입으시오.
낭독자 그러나 나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최부 나는 바다에서 고생할 때 풍랑을 겪느라 행장을 다 없애버리고, 겨우 상복 한 벌만 몸에 건사하였으니 길복이 따로 없습니다. 또한 상중에 있는 몸으로 길복을 입는다는 것은 예에 맞지 않습니다.
낭독자 그러자 예부낭중은 내 말을 가지고 한참이나 여러 사람과 의논하더니 이렇게 말하였다.
관원2 내일 아침, 상을 받을 때에는, 특별히 예식을 행하는 절차는 없을 것니 당신네 아전이 상을 대신 받게 해도 무방합니다. 그러나 모레 사은을 할 때에는 그대가 친히 황제께 배알해야 할 터이니 직접 입조하여야 할 것이오.
<해설> 그러니까 명나라 조정에서 수여하는 상을 받는 받을 때에는 별도의 의례를 하지 않기 때문에 아랫사람을 대신 보내도 되지만, 황제를 직접 배알하는 의식을 치를 때에는 최부가 직접 참여해야 한다는 얘깁니다. 다음 날인 4월 10일-.
낭독자 이윽고 내가 보낸 정보 등이 대궐 뜰에 들어가서 상을 받아가지고 돌아왔다. 내 몫의 상은 흰 모시 옷 한 벌 외에 붉은 비단 관복 한 벌, 줄무늬를 두른 비단 모자 하나, 푸른 비단 마고자 한 벌, 목화 신발 한 켤레, 털버선 한 켤레, 녹색 면포 두 필 등이며, 정보 이하 마흔두 명에게는 솜 두루마기와 솜바지 한 벌씩, 그리고 신발 한 켤레씩 등이었다.
<해설> 최부가 갈아입을 의복이 상으로 내려왔으니, 이제는 옷이 없어서 갈아입지 못 하겠다고 핑계를 댈 수도 없게 되었던 것이죠. 최부는 해당 관원을 찾아가서 상복을 벗을 수 없는 사정을 얘기합니다.
최부 나는 부모상을 당한 자로서 만일 길복을 입는다면 이는 효가 아니라고 비난을 받습니다. 자식 된 이가 어찌 경솔히 상복을 벗어서 불효를 범할 수 있겠습니까?
관원2 오늘 내가 예부상서 대인과 함께 의논하였는데 지금은 친상은 가볍고 천은이 무거우니 직접 나아가서 사은숙배하는 예를 폐할 수는 없소. 밤 사경쯤 되거든 동쪽 장안문 밖에 와서 모두 상으로 받은 의복을 입고 대기해야 할 것이오!
<해설> ‘친상은 가볍고 천은이 무겁다’고 했는데요, 바꿔 말하면 부모의 초상보다는 황제가 베푼 은혜가 더 중요하다, 이런 뜻입니다. 드디어 그날 밤 4경, 즉 새벽 두 시경이 되었습니다. 그때까지도 최부는 여전히 상복 차림을 하고 있었지요. 그러자 관리가 찾아와서 재촉합니다.
관원2 당신은 당장 관복을 차려입고 입조하여, 사은의 예를 갖추는 것을 주저해서는 아니 될 것이오.
최부 상복을 벗고 비단옷에 사모를 쓴다면 어찌 내 마음이 편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할 수 없는 일입니다. 효도하는 도리가 아닌 것이오.
관원2 당신이 지금 빈소 옆에 있다면 당신의 부친이 중요하지만, 지금 여기에는 우리나라의 황제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황제의 은혜를 입고서도 사은의 예를 취하지 않는다면, 조선의 중요한 위치에 있는 관리로서는 크나큰 실례를 범하는 것이오! 우리 중국의 예로 말하자면 재상이 부모상을 당했을 때 황제가 부의를 보내면, 비록 상중이라도 반드시 길복을 갖추고 궐 안에 달려 들어가서 사은한 다음, 나중에 나가서 다시 상복을 입습니다. 황제의 은혜를 사례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니, 사례하자면 반드시 궐 안에 들어가야 합니다. 상복 차림으로는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오. 이것은 비유하자면 형의 아내, 즉 형수가 물에 빠졌을 때는 평소와 달리 몸을 잡아서라도 건져내는 것과 같은 것이오. 당신이 지금 길복을 입어야 하는 것은 사정이 그러하기 때문이오.
최부 어제 호아제가 내린 상을 받을 때에도 내가 직접 받지 않았으니, 지금 사은하는 자리에도 아랫사람을 보내면 어떨까요?
관원2 왜 자꾸 이러는 것이오? 상을 받을 때에는 황제께 배례하는 절차가 없으니 대신 받아도 괜찮았으나, 이미 예부에서 ‘조선 관원 최부가 입조하여 사은한다’고 황제께 아뢰아 놓았으니, 일행의 우두머리인 당신이 어찌 편안히 앉아 있을 수 있다는 말이오?
<해설> 그래서 어떻게 되었을까요? 최부는 자신의 일기에서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낭독자 나는 형편에 강요되어서 끝내 길복을 입고 입궐하였다. 단층으로 된 문과 이층으로 된 큰 문을 지나 들어가니, 또 이층 대문이 나왔다. 군대의 경비가 엄정하고 등불이 휘황찬란하였다.
<해설> 결국 최부는 고집을 꺾고 길복으로 갈아입은 뒤에 궐에 들어간 것이지요. 그렇다면 최부가 명나라 황제를 직접 대면하였느냐, 하면 그건 아니었습니다.
낭독자 동틀 무렵에 조관들이 차례로 문 앞에 열을 지어 섰다. 관리가 나를 인도하여 조신들의 줄에 서게 하고, 내가 데리고 온 아랫사람들도 또 하나의 대열을 지어서 국자감 생원들의 뒤쪽에 세웠다. 이리하여 그 자리에서 다섯 번 절하고 세 번 머리를 조아렸다.
<해설> 그러니까 황제를 직접 배알한 것이 아니 여러 신하들 뒤쪽에 줄을 서서 절을 한 다음 물러나온 것이지요. 그걸로 끝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은의 예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최부가 길복으로 갈아입는 것을 한사코 거부하고 낡은 상복을 고집했다는 기록을 되짚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송웅섭 연구원의 얘기 들어보시죠.
*인서트-6. 테입<384> 송웅섭
(51:53 최부가 상복을 고집하고, 유교 의례를 철저하게 시행하려고 하는이런 자세들을 보이는 것도 그 당시에 청요직 관리들은 그런 것에 있어서 오점을 남기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오점을 남기게 되면 실제로 이후에 출세라든가 관직 승진에 있어서 물의가 일어나고 그거는 불이익을 당하기도 하거든요. 그러니까 이념적 지향과 현실적 어떠한 승진이라고 하는 것이 같이 사실 맞물리게 되면서 그게 몸에 자연스럽게, 사실 이게 조선 후기, 조선 이 시기 이후의 관료들의 일반적인 양상으로 자리 잡게 되는 것이죠. 지향과 현실 권력과의 연계 속에서 철저하게 더 그들의 가치를 수호하려고 지키려고 하는 그런 태도들이 나오는 것이죠. 최부 역시 그렇다고 할 수 있습니다. 52:40)
<해설> 사헌부나 사간원의 간관, 홍문관의 관원, 사초를 기록하는 사관, 그리고 이조 전랑 등을 청요직이라 일컫는데요, 이 청요직은 더 높은 관직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직책이죠. 그런데 이 청요직에 있는 기간에 부모의 상을 당한 경우, 상례 등을 유교적 법도에 따라 제대로 이행하지 않으면, 장차 출세 는 데에 큰 흠결이 되는 것이다, 이런 얘기죠.
*인서트-7. 테입<384> 송웅섭
(49:03 언론기관의 臺諫, 그리고 弘文館, 그리고 史官, 그리고 吏曹의 銓郞과 같은 인재 선발의 실무를 담당하고 있는 이러한 전랑 층들, 王命을 짓는 藝文館 관원들, 이런 사람들을 淸要職이라고 부르고, 이 청요직들은 엘리트들이 들어가는 코스입니다. 그리고 청요직을 거쳐야만 재상에 올라갈 수 있는 것이죠. 조선의 관료 제도의 승진 체계들을 보면 청요직을 거쳐서 승지를 거쳐서 뭐 이렇게 재상으로 올라가는 이 코스를 밟는데, 요 청요직들이 독자적이 영향력들을 발휘하는 시점이 성종대입니다. 그러니까 김종직 문인이라고 하는 사람도 사실 이 청요직 관료로서, 여러 가지 능력들을 발휘하고 있었던 것이죠. 최부 역시 그런 사람으로 봐야 될 것 같습니다. 49:59)
<해설> 그리고 또 한 가지를 유추해볼 수 있습니다. 사실 조난을 당해서 죽을 뻔했다가 천신만고 끝에 목숨을 건진 처지에서, 황제를 배알하러 간다고 옷을 갈아입으라고 했을 때 ‘나는 상복을 벗을 수 없다’, 이렇게 고집을 부릴 수 있었을까요? 실제로는 한두 마디 해보다가 바로 길복으로 갈아입었음에도, 자신이 부모의 상례를 제대로 지키기 위해서 최선의 노력을 다 했노라고 기록을 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죠. 어차피 최부가 기록한 내용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검증할 수는 없었으니까, 그는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기록을 했을 것이고, 그 과정에서 일부 내용이 과장되거나 부풀려질 수는 있었겠지요.
6월 4일, 최부는 표류한 지 다섯 달이 지나서야 드디어 압록강을 건너 의주 땅으로 들어섭니다. 최부는 그 순간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습니다.
낭독자 아, 반가울손! 드디어 배를 타고 압록강을 건넜다. 의주 목사가 군관 윤천선을 파견하여 나를 강변에서 맞이하여 위로하였다. 어스름해서 또 배를 타고 난자강을 건넜다.
최부 모두 들으라! 드디어 우리는 조선 땅에 들어왔다! 우리가 단 한 명도 죽지 않고 우리나라 땅을 다시 밟은 것이다! 자, 의주목사가 말을 보내왔으니 우리 모두 의주성으로 가자. 이럇!
<효과> (말 울음소리) (이윽고 수십 명 말 타고 움직이는)
<해설> 이렇게 해서 최부 일행은 제주도를 출한한 지 정확하게 5개월하고도 하루 만에 조선 땅에 발을 디딘 것입니다.
<음악> (브릿지)
<해설> 성종 19년 6월 14일, 드디어 최부가 서울에 입성합니다.
낭독자 전 홍문관 교리 최부가 북경으로부터 돌아와서 청파역에 묵으니, 임금이 명하여 최부에게 일기를 기록하여 편찬하도록 지시하고, 이어서 교지를 내렸다.
성종 (에코)예전에 이섬(李暹)이 표류하였다가 생환하였을 때 과인이, 특별히 초자하도록 명하였었다. 최부는 능력 있는 사람인데, 이제 또 만리를 표박하였다가 아무 탈 없이 생환하였으니, 그를 서용하라는 명은 마땅히 부친상을 마친 후에 내릴 것이다. 우선 쌀과 콩 약간과 장례에 쓸 물품을 내려 주도록 하라.
<해설> 최부를 특별히 초자하겠다고 했는데요, 초자(超資)란 관직의 차례를 건너뛰어서 품계를 올려주는 것을 일컫습니다. 특진시켜 주겠다는 얘기죠. 그런데, 최부가 청파역에 도착하여 머물고 있는 상태에서, 임금인 성종이 그에게 그간의 행적을 일기로 써서 편찬하라고 하였고, 최부는 일언반구 이의를 달지 않고 일기문 작성에 들어간 것으로 돼 있습니다. 여기서 잠깐, 중국에 있을 때 최부가 했던 말을 상기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최부 (에코) (비통)지금 나의 어머니는, 망망한 바다 건너 아득히 멀리 계신 탓에 소식을 전할 길이 없으니, 어머니는 분명 내가 벌써 고기밥이 되었을 줄로 생각하실 겁니다. 어머니의 마음을 이다지도 상하게 하고 있으니 나같이 불효한 자가 또 어디 있겠습니까(흐느낌).
<해설> 이랬던 최부였습니다. 그리고 황제를 배알하러 간다는 데에도,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효도를 다 하기 위하여 끝내 상복을 벗지 않겠노라고 고집을 하였던, 둘도 없는 효자였습니다. 그런 그가 자식을 애타고 기다리고 있을 어머니에게 당장 달려가지 않고, 자신의 표류 여정을 기록하는 일에 착수한 것은 아무래도 좀 어색해 보이지 않습니까? 임금이 시켰으니 달리 도리가 없었을 거라고요? 성종실록의 이 대목을 기술했던 사관(史官)은 이런 논평을 덧붙여 놓고 있습니다.
낭독자 최부가 만약 이때에 임금에게 사례를 하고, 자신은 부친상을 당한 처지이니 어미를 보고 난 후에 일기를 찬집하겠다고 하였다면, 임금도 반드시 따르셨을 것이고, 사람들도 끼어들어 말을 하지는 못하였을 것인데, 지금 그렇게 하지 않았으므로 훗날의 논란을 초래한 것이다. 최부가 이런 일로 자신에게 누가 되게 하였으니 이는 그가 지나친 것이다.
*인서트-8. 테입<384> 송웅섭
(1:09:21 얼마나 좋았겠어요, 뭐 고국에 돌아온 기쁨, 사실 이거는 천행이죠. 최부와 같은 경험은 누구도 할 수 없었던 경험이죠. 굳이 뭐 역사적으로 비교를 해보자면 고려시대의 이제현 같은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충선왕을 따라서 남방 까지도 왔다 갔다 했으니까. 그런 고위급, 또는 엘리트 출신들 중에서는. 누가 가서 경험 하느냐에 따라서 보고 느끼고 적을 수 있는 어떤 이런 범위들이 달라지니까 최부에게 있어서는 그런 기회였고, 그런 것들을 자연스럽게 이렇게 문장으로 옮겨 적을 수 있는, 하지만 그는 상주였다는 것이죠. 그리고 생사조차도 한동안 알 수 없는, 그래서 그의 살아있는 모친에게 있어서 빨리 가서 아버지에게 예를 치르고 어머니에게 자신이 살아있다는 걸 보여줘야 되는데. 1:10:26)
<해설> 고려시대에, 당대 최고의 원로 유학자였던 이제현이, 충선왕을 따라서 중국의 남방을 둘러보고 왔었는데, 최부는 고작 서른다섯의 나이에 중국의 남방에서 북경에 이르는 구석구석을 둘러보는 황금 같은 경험을 했고, 더군다나 함께 갔던 43명이 한 사람도 다치지 않고 살아 돌아온 데다, 임금으로부터 특별진급까지 약속 받았으니, 기분이 무척 들떴겠지요.
*인서트-9. 테입<384> 송웅섭
(1:04:55 그 당시에 청요직들이 영향력이 확대되는 맥락들을 좀 이해하실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사회 전반적으로 유교를 아주 철저하게 지켰기 때문에 이러한 것이 최부가 喪을 제대로 치르지 못한 부분들이 비판 받을 수도 있고, 그런 측면도 있지만, 전반적으로 봤을 때는 관직 인선에 있어서 인사이동에 있어서 특히 청요직 대간, 특히 대간과 같은 직책을 역임할 때는 물의를 일으킨 사람들은 제외되는 기조들이 성종 대부터 정착을 하거든요. 표해록만 보면, 최부는 萬古의 孝子인 것이죠. 상복을 입고, 황제를 보려고 할 때도 이제 갈아입으려고 하지 않고 자기는 지금 상을 치르는 사람이다, 그런데 막상 조선에 왔을 때는 ‘네가 경험한 거를 일기로 남겨라’, 라고 왕명이 떨어지니까. 1:05:57)
<해설> 사회 분위기가 유교적 의례를 철저히 지키는 기류였는데도 임금이 시킨다고 아버지 장례도 뒤로 미루고 고분고분 응한 것은 문제가 있다는 것이죠. 만약 이때 최부가,
최부 주상전하, 마땅히 어명을 받들어 표류 중에 보고 듣고 느꼈던 일들을 상세히 기록하여 올리겠사옵니다. 하오나 전하, 신의 아비가 상을 당하여 장례를 치르지 못 하고 있사옵니다. 더구나 노심초사하고 있을 노모에게 마땅히 아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효의 도리라 여기옵니다. 송구하오나 먼저 본가에 가서 노모에게 안부를 전하고 아버지의 상을 치르게 하여 주시옵소서.
<해설> 이렇게 말했더라면 평소 예와 효를 누구보다 중시해온 성종도,
성종 그것이 자식의 도리다. 마땅히 그리하라!
<해설> 이렇게 윤허를 했을 것이란 얘기죠.
*인서트-10. 테입<384> 송웅섭
(1:06:15 서울에 일기를 쓰면서 체류하고 있는 동안 친구들이 왕래를 해서 여러 가지 상황들을 이야기 하고, 담소를 나누는 그런 모습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전체적으로 봤을 때는 일단은 성종이 아주 학식이 있고 예를 중시하는 임금이었고 당시에는 聖君으로 당대부터 우리 임금 훌륭한 임금이야, 라고 그렇게 일컬어진 사람이었으니까 성종에게 자기가 효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서 먼저 예를 치른 다음에 왕명을 받아서 일기를 撰進하겠다, 라고 해도 성종은 충분히 들어줬을 거다, 사신이 그렇게 논평을 해요. 근데 그런 성종의 자질들을 최부가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명을 받아서 먼저 짓고 내려갔다, 이렇게 해서 아쉽다. 1:07:11)
<해설> 최부의 이런 행동은 나중에 논란거리로 대두됩니다.
<음악> (브릿지)
<해설> 어쨌든 최부는 성종의 명을 받아 기행문 작성 작업을 진행합니다.
낭독자 성종 19년 6월 22일, 최부가 중국에서 보고 들은 일을 일기로 기록하여 엮어내자 임금이 아비의 상을 당한 그에게 옷감 50필을 내려 주었다. 승정원에서 여러 승지가 아뢰었다.
승지 주상전하, 최부가 지금 일기 찬집을 마치고 아비의 상에 분상(奔喪)하고자 하니, 청컨대, 말을 주어서 보내도록 하시옵소서.
성종 그렇게 하라. 과인이 일기를 읽어보니, 애통한 생각이 드는구나. 그에가 말을 내려주도록 하라.
낭독자 최부가 일기를 찬집하느라 청파역에서 여러 날을 머물렀기 때문에, 그의 옛 친구들 중에서 조문을 하는 자들이 있었다. 최부가 응당 초상이라 하여 조문을 받지 말았어야 하는데 이따금 친구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 혹은 자신이 표류하는 중에 겪었던 고생스러웠던 상황을 얘기하기도 하였으니, 이로써 비방을 받았던 것이다.
<해설> 그 일로 비방을 받았다는 데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시 언급하기로 하죠. 어쨌든 이때 찬집된 최부의 <표해록>은 그 자료가치 측면에서 볼 때 대단히 중요한 저작이었습니다.
*인서트-11. 테입<384> 송웅섭
(1:02:12 그 당시에 미처 중국인들로부터 들을 수 없는 정보들이 나오고 있는 것이죠. 그러니까 지금도 우리가 유럽여행이나 아니면 해외여행 체험기를 나름대로 재미있게 보고 또 뭐 그 지역을 동경하거나 가고 싶거나, 관심 있는 사람들은 그런 기록들을 굳이 가진 않는다 할지라도 보면서 대리 만족, 내지는 아 이렇구나, 라고 하는 것들을 이해하듯이 최부의 표해록이라고 하는 기록은 나름대로 구체적이고 여러 지역에 걸쳐서 상세하게 소개를 하고 있기 때문에 중국 이외의 주변국들의 입장에서 봤을 때는 현장감 있고, 나름대로 그 경전이라든가 여러 가지 기존에 전통적으로 보는 문헌들 외에, 중국에 대한 풍부한 정보들을 알려줄 수 있다는 점에서 요긴했을 거라고 생각이 됩니다. 1:03:06)
<해설> 민음사 판 <한국사>에서는 표해록의 가치를 이렇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낭독자 최부의 <표해록>은 당나라를 방문했던 일본 승려 엔닌의 <입당구법순례행기>, 그리고 원나라를 방문했던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과 더불어 세계3대 중국여행기로 꼽히는 빼어난 기행문학이다. 또한 통일신라 때 실크로드를 통해 인도를 방문했던 승려 혜초의 <왕오천축국전>과 함께, 한국인이 넓은 세상을 체험하고 남긴 여행기 가운데 백미로 꼽힌다.
<해설> 이 <표해록>은 조선시대에만 다섯 번이나 간행되었으며 일본으로도 흘러들어가서 서기 1769년에는 일본에서 <당토행정기(唐土行程記)>라는 이름으로 번역 출간되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음악> (브릿지)
<해설> 최부를 비롯하여 제주 앞바다에서 조난을 당했던 43명의 인원이 한 사람도 희생되지 않고 생환할 수 있었던 것은 여러 요인이 있겠으나 우선 그들이 탄 배가 매우 튼튼했다는 사실을 빼놓을 수 없을 것입니다. 본래는 제주의 관아에서 제공하는 관선을 타고 떠나게 돼 있었는데 제주목사가 특별히 사찰 소유의 튼튼한 배를 구해주어서 최부 일행이 그 배를 타고 나섰던 것이지요. 그래서 성종은 특별히 제주목사에게 상을 내립니다.
성종 (에코)지난번에 최부가 부친상을 당하여 바다를 건널 때에, 그대가 튼튼한 배를 구해 주었기 때문에, 비록 표류를 당하기는 했어도, 같이 탄 43인이 모두 살아서 돌아올 수 있었으니, 이는 어찌 그대의 도움 덕분이 아니겠는가? 과인이 이를 매우 가상하게 여겨서 특별히 옷감을 내려서 상을 주는 것이니, 도착하거든 수령하라.
<해설> 그리고 성종 19년 8월 4일에는, 최부가 중국의 지방 관리를 졸라서 그 제작법을 배워온 수차를 만들어서 임금에게 바칩니다.
최부가 부친의 3년상을 치른 뒤인 성종 22년 11월 22일, 성종은 몇몇 관리에 대한 인사 발령을 단행하는데요.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성종 (에코)성건(成健)을 이조 판서 겸 세자 좌빈객으로, 이계동을 형조 판서로, 송영(宋瑛)을 이조 참판 겸 세자 우부빈객으로, 최부를 사헌부 지평으로, 노공필을 지중추부사로 임명하노라!
<해설> 그런데 이로부터 40여일이 지난 성종 23년 1월 7일, 사헌부 지평으로 임명된 바 있는 최부가 임금을 찾아옵니다.
최부 (들어와 꿇어앉고)주상전하.
성종 흠, 무슨 일인가?
최부 신이 사헌부 지평에 제수된 지도 이미 여러 날이 지났는데도 사간원에서 아직 서경을 해주지 않고 있사옵니다. 청컨대 신으로 하여금 피혐하게 하시옵소서.
성종 그러고 보니 과인이 그대에게 사헌부 지평을 제수한 지가 한 달이 훌쩍 넘지 않았는가? 그럼에도 아직 서경을 하지 않고 있다 하니, 승지는 사간원에 가서 그 사정을 고하라 이르라. 그리고 최부 그대는 죄가 없으니, 피혐하지 말라.
<해설> 최부의 삼년상이 끝나자 성종이 최부를 사헌부 지평에 임명했던 것인데 사간원에서 그 임명장에 서명을 안 해주고 있으니, 최부는 대간의 논핵이 풀릴 때까지 벼슬자리에서 물러나 대기하겠다고 아뢴 것이지요. 얼마 뒤 사간원 정언(正言) 조형(趙珩)이 와서 아룁니다.
조형 주상전하, 최부는 일찍이 부친상을 당하였다가 바다에 표류하여 중국에 이르렀는데 중국에서 시문을 많이 지었사옵니다. 그런데 시를 지은 것이야 살 길을 구하기 위해서였으니, 어쩔 수 없었다 할 것이오나…
<해설> 전에도 언급한 바 있듯이, 이 시기 조선에서는 시를 지어 읊조리는 것을 좋지 않게 여기고 있었지요. 어쨌든 중국에서 시를 지었던 것은 문제 삼지 않기로 했다는데요,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였을까요?
조형 최부는 본국으로 귀환함에 이르러서는, 비록 주상전하로부터 일기를 지으라는 하명이 있었다 할지라도, 마땅히 글을 올려서 부친상을 당한 데 대한 슬픈 정(情)을 진달하고, 하루 빨리 빈소 곁으로 돌아가야 했는데도, 여러 날을 서울에 머물러서 일기를 지으면서 조금도 애통해하는 마음이 없었사오니, 이는 인륜에 부끄러움이 있는 것이므로, 이로 인해서 사간원에서 논박을 하고 서경을 하지 않은 것이옵니다.
성종 그것은 최부의 잘못이 아니니라. 과인은 최부가 천신만고를 다 겪으면서 듣고 본 것들을 알고 싶어서 일기를 짓게 한 것이며, 최부는 어명을 받고 마지못해 한 것인데, 사간원에서 어찌하여 이런 논의를 내는 것인가?
<해설> 화가 난 성종은 최부의 일을 대간에게 맡겨두지 않고 이조와 병조에 내려서 의논하게 한 다음 그 결과를 아뢰라고 명합니다. 이조판서 홍귀달과 병조판서 한치형은 이렇게 보고합니다.
홍귀달 주상전하, 최부는 전하의 명령을 받들어 일기를 찬술하고 있었으므로, 갑자기 집에 갈 수가 없었던 것이지, 일부러 머문 것이 아니옵니다.
한치형 그렇사옵니다. 최부는 제주에 있다가 부친상 소식을 듣고 즉시 달려가던 중에 태풍으로 인하여 대양에 표박하게 되었고, 구사일생으로 겨우 중국 땅에 도달하여 남경으로부터 연도(燕都)까지의 수륙만리를, 온갖 고생을 겪고 본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사옵니다. 부친상 소식을 들은 지는 많은 시일이 지났사오나, 하물며 전하의 명령을 받들어 일기를 찬술하고 있었으니, 그 정상은 용서할 만하옵니다.
성종 최부는 멀리 중국 땅에 도달하여 여러 곡절을 겪었으므로, 과인에게 와서 복명하지 아니할 수 없었을 것이다. 또 그가 듣고 본 것은 날이 오래 되면 점점 잊어버리기 때문에, 과인이 속히 일기를 찬술하여 바치도록 명령하였는데, 어떻게 본가인 나주로 갑자기 돌아갈 수 있었겠는가? 정상이 용서할 만하다. 더 이상 거론하지 말라!
<해설> 임금이 그렇게 말했다고 대간에서 입을 다물 리 없었겠지요. 성종으로서도 그 처지가 애매하게 되었습니다. 최부가 중국에서 막 돌아와 청파역에 머물고 있을 때 일기를 써서 편찬하도록 명을 내린 쪽은 성종 자신이었는데, 대간에서 그것을 불효로 몰고 가고 있었으니 그렇다면 성종이 신하의 불효를 조장한 셈이 되는 것이지요.
<음악> (브릿지)
<해설> 이 시기 대간의 위세가 만만치 않았는데, 기왕에 논핵을 시작한 터에 임금이 그만 두라 하였기로 슬그머니 자세를 낮출 리가 없었겠지요. 최부에 관한 대신과 대간의 논쟁은 경연의 자리에서도 이어집니다. 사헌부 지평 윤장(尹璋)과 영의정 윤필상의 이야기를 들어볼까요?
윤장 주상전하! 최부가 비록 군주의 명을 받았다 하더라도 바야흐로 부친을 여읜 슬픔에 잠겨 있어야 할 것이온데, 8일 동안이나 머물면서도 부친의 빈소에 가지 아니하였으니, 이미 효의 도리를 잃었사옵니다. 지방의 외관직이라 하더라도 이런 사람은 써서는 아니 될 터인데, 하물며 전하를 가까이에서 보필하는 근시(近侍)인 바에 어찌 가하다고 하겠사옵니까. 사헌부 지평은 불가하옵니다,
성종 흐음, 영상의 생각은 어떠하오?
윤필상 전하, 최부가 부친의 빈소로 달려가지 아니하고 청파역에 머물렀던 것은 예사로운 일 때문이 아니고, 어명 때문에 오래 머물게 된 것일 뿐이옵니다.
윤장 영상은 그리 말해서는 아니 됩니다. 일기를 수찬하는 것은 단지 하루 이틀의 일인데, 여드레나 되도록 머물면서 부친의 빈소에 분상(奔喪)하지 아니하고, 찾아온 친구들과 태연자약하게 대화를 나누었사옵니다. 자고로 충신은 효자의 가문에서 구한다 하였사오니, 최부는 어버이에게 효도를 다하지 못하였는데, 어찌 임금에게 충성을 다할 수 있겠습사옵까?
성종 흐음, 만약에 최부가 그 곳에서 친구를 접대하였다면, 그것은 과연 잘못한 것이다.
<해설> 성종도 전적으로 최부의 편만을 들 수는 없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홍문관 직제학 송질(宋?) 등은 대간과는 좀 다른 의견을 냅니다.
송질 주상전하, 사헌부에서는 최부가 부친의 빈소로 달려가지 않고, 오랫동안 서울에 머물러 있었다는 것을 들어서 논박을 하였사옵니다. 그러나 최부는 제주에 경차관으로 있을 때, 부친상의 소식을 듣고 돌아오다가, 태풍을 만나 표류하여 중원에 이르게 되었던 것이옵고, 본국의 청파역에 돌아오자마자 전하께서 일기를 찬진하도록 명령하시었사옵니다. 그러니 최부가 서울에 지체한 것은 부친을 잃은 슬픔을 망각한 때문이 아니옵고, 군주의 명을 중하게 여긴 때문이옵니다. 또한 친구를 접대한 것이 잘못이라 하온데, 이는 최부가 친구를 일부러 청하여 담화를 나누었던 것이 아니옵고, 벗들이 스스로 찾아가서 조문을 하자 최부가 차마 사절(謝絶)을 하지 못한 것일 뿐이옵니다. 인물을 기용하고 퇴진시키는 것은 가벼운 문제가 아니오니, 청컨대 널리 중론을 살펴서 처결하시옵소서.
성종 흐음, 그대의 말이 옳도다. 과인이 장차 널리 의논을 해볼 것이다.
<해설> 홍문관을 사헌부 사간원과 더불어 ‘언론3사’로 통칭하였는데 홍문관 직제학 송질이 최부를 비판하기는커녕 옹호하는 논지의 얘기를 하고 있으니 좀 뜻밖이지 않습니까? 아닌 게 아니라 이 발언을 두고 최부가 홍문관 교리 출신이기 때문에 비밀리에 작당하여 편을 드는 게 아니냐, 이런 의혹이 제기됩니다. 결국 사헌부 대사헌 이세좌 등이 그 점을 문제 삼고 나섭니다.
이세좌 주상전하, 지금 들으니, 최부의 옛 동료들인 홍문관 관원들이 최부의 정상을 민망하게 여기어서, 그의 억울함을 전하께 호소했다고 하는데, 최부가 오랫동안 청파에 머문 까닭이, 일기를 써서 아뢰도록 한 어명 때문이라 하여 이러한 말이 있었던 것이 아니옵니까? 신 등이 생각하건대, 부모의 상은 진실로 스스로 정성을 다해야 하기 때문에, 예기(禮記)에도 부모의 초상 소식을 들으면 백리라도 달려가야 한다는 글이 있사옵니다. 이러한 일을 당했다면 마음이 급해서 허둥지둥하며 하루에 백리를 가도 더딘 것같이 여기며, 숙소에서는 고향 쪽을 바라보며 곡(哭)을 하는 것이 옳은 예절인 것이옵니다. 그런데 최부(崔溥)는…
<해설> 최부에 대한 논란이 끝도 없이 이어집니다. 결국 성종은 최부의 직책을 바꾸어서 사간(司諫)으로 임명합니다.
*인서트-12. 테입<384> 송웅섭
(1:07:38 사헌부 지평에 제수 됐을 때, 그런 전력들이 얘기가 되는 겁니다. 옛날에 체류하고 와 가지고, 표류하고 와서, 아버지에 대한 예를 제대로 치루지 못했다. 이것은 문제가 있다. 그리고 그런 문제가 있는 사람에게 대간의 직책을 맡길 수 없다, 라고 하는 어떤 물의가 일고, 그럼 물의가 일면, 정상 참작의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일단 관직에서 遞職이 되거나, 또는 그 내부에서 완전한 동의가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대간에서 일종의 협의체가 있거든요. 그런 협의 장치를 거치지 못하기 때문에 한 사람이라도 반대 하게 되면 통과가 안 됩니다. 그래서 서경이 거부가 되고, 3~4개월 동안 서경이 이루어지지 않으니까, 자연스럽게 다른 관직으로 바뀌게 되는, 이런 수순을 밟았던 것입니다. 1:08:30)
<해설> 다쿠멘터리 역사를 찾아서, 다음 주 이 시간에 계속하겠습니다.
<음악> (엔딩)
*후시그널 & 클로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