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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훈국학상 수상자의 말
加耶史의 自己位相 復歸를 위한 첫 발
1.
여러 모로 부족한 본인을 지훈상 수상자로 천거해 주신 심사위원 여러분과 지훈상 관계자 여러분께 감사드린다. 또 본인의 저작물을 아름답게 단장하여 오늘의 영광이 있도록 도와준 푸른역사 출판사에도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싶다. 아무래도 이번 수상의 기쁨은 본인이 아니라 가야사 그 자체에 돌려야 할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가야는 562년에 멸망한 지 1,500년 이상 한국사학계에서 그 실체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었다. 10년 전에 본인은 이에 대한 연구 성과를 내놓은 적이 있으나, 그 당시에는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사료 속에서 헤매고 여러 모로 꼬인 학자들의 편견에서 헤어나기에 급급했다. 그런 것들 중에는 전통적인 6가야연맹설, 스에마쓰의 임나일본부설, 에가미의 기마민족정복왕조설, 김석형의 일본열도내 분국설, 이노우에의 위왜설, 천관우의 백제군사령부설 등이 있었다. 그래서 이들을 극복하고 본인 나름의 전·후기 가야연맹설을 주장했으나, 논증 과정이 너무 복잡해서인지 많은 사람들이 그 요약된 결론 이상의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가야사는 최소한의 이해 기반을 확보했으나, 가야를 경시하는 논리는 그다지 줄어들지 않았다. 일본 학자들은 임나일본부설을 이제는 포기했다고 하면서도 야마토국이 막연히 가야에 대하여 세력을 미쳤다거나 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하고 있고, 국내의 어떤 분들은 백제가 가야에 대하여 수백 년간 세력을 미치고 있었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또 어떤 분들은 아주 오래 전부터 신라가 가야에 대하여 세력이나 문화면에서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또 주위에서 가야에 사회, 경제, 문화라고 할 만한 게 어디 있느냐고 하는 말도 많이 들었다.
반면에 옛 가야 지역에 살고 있는 분들은 기존에 자신들이 알고 있던 6가야 연맹설이나 허왕후 전설, 월광태자 전설 등을 학계에서 설명해 주지 못하는 점에 대해 목말라 했다. 또한 영남 각 지역에서는 학계의 연구 성과들은 너무 어려워서 알아듣기 어렵다 하고, 자기 지방에 있던 소국의 역사를 좀더 분명히 알고 싶어했다. 특히 한국 고대사의 삼국시대 논리 속에서 가야 지역이 역사의 한 주인공으로서 실체를 인정받지 못하고 단순한 변방의 이름 모를 이방인처럼 취급당하는 것에 대한 불만을 토로했다.
얼마 전에 라디오에서 미국의 재벌 록펠러가 길가다 무엇을 묻는 사람들의 말 속에 엄청난 부(富)의 기회가 있다고 했다는 말을 들었다. 본인도 가야사에 대해서는 위와 같은 사람들의 말 속에 앞으로의 가야사 연구를 위한 방향이 담겨 있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 말 속에는 받아들일 수 없는 엉뚱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들도 많이 있었지만, 곰곰이 되씹어보면 무언가 밝혀야 할 의미가 그 속에 분명히 들어 있었다. 본인의 새로운 가야사 연구는 위와 같은 학계의 가야사 경시 경향과 일반의 가야사 연구에 대한 불만을 극복하기 위해서 다시 시작되었다.
이런 구상을 비교적 쉬운 문장으로 구체화하는데 7년이 걸렸고, 그 문장에 대한 설득력을 높이기 위해 유적 사진을 찍으러 다니고 각종 도록에서 유물 사진을 선정하고 각종 발굴보고서에서 실측도를 추려내고, 또 수십 장의 참고 지도를 그려 이를 다시 편집하는데 2년이 걸려《미완의 문명 7백년 가야사》를 완성하게 되었다.가야사를재정비하는작업이모두끝난것은아니지만 일단 지금까지의 성과를 발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 모든 작업의 대부분은 본인 혼자의 연구가 아니라, 가야사를 연구하는 많은 고고학자와 문헌사학자들의 연구를 나름대로 종합한 것에 불과하다.
2.
정상적인 경우라면, 가야사 연구는 한국 고대사에서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의 역사를 보좌하고 보완하는 것이 가장 기본적인 의미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가야사 연구가 아직까지 너무도 부진했던 지금의 상황에서는 그 자체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한국 고대사의 전개 과정은 고구려, 백제, 신라뿐만 아니라 가야를 포함한 사국시대, 사국체제로 설명해야만 제대로 이해될 수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한국 고대사에서 사국시대를 인정해야 하는 주요한 명분이다. 삼국만이 정립되어 움직였던 이른바 삼국시대는 가야 멸망 이후 98년에 지나지 않는다. 사국시대의 논리는 이미 조선 후기 실학자들에 의하여 제기되었다가 일제 강점기를 전후하여 다시 수면 속으로 잠겼었다. 그러므로 사국시대론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라 백여 년 동안 끊겼던 우리 역사 연구의 맥을 잇는 작업이라고도 할 수 있다.
둘째로, 가야가 장기간에 걸쳐 왜국에게 지배를 받았다는 기존설, 즉 임나일본부설은 오랫동안 가야사 연구의 저해 요인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한국사 전체에 열등의식을 고취시켰다. 한일 양국의 학계에서는 이미 이에 대한 논란은 끝이 났고 오히려 가야의 선진적인 철기 문화나 도질토기 문화가 언제 어떤 방식으로 일본에 건너갔는가를 논하는 경지에 있으나, 아직 일반적인 인식으로 자리잡지 못하고 있다. 일부 일본 역사 교과서의 임나 관련 서술은 이에 대한 반증이다. 그러므로 바로 그 지역에서 발전했던 가야 역사에 대한 연구는 이를 불식시키기 위해 필수적인 과제이다.
셋째로, 가야가 점유한 영역은 경상남북도의 낙동강 유역과 그 서쪽 일대를 포함할 뿐만 아니라, 최대 판도를 이루었을 때는 전라남북도의 동부 지역을 포괄하는 매우 넓은 땅이었다. 이를 고구려의 최대 판도에 비할 수는 없지만, 백제나 신라에 비해서는 손색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지역은 고대사 연구의 한 축을 이루지 못하고 신라나 백제의 정복 대상이라는 단순한 객체로서 머물고 있을 뿐이다. 이는 해당 지역에 살고 있는 많은 사람들을 우리 한국 고대사의 이방인으로 축출해 버리는 것에 다름없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어쩔 수 없는 일이나, 이것이 오해나 편견에 기인한 것이라면 반드시 시정되어야 할 것이다.
넷째로, 가야는 여러 가지 대내외적인 원인이 중첩되어 끝내 중앙집권적인 정치체제를 완성하지 못하고 멸망한 미완의 문명이지만, 개별 소국들의 생산력이나 기술 수준이 대단히 높아 이를 바탕으로 하여 거의 700년 동안 지리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대외적으로 독자적인 역사를 지속했다는 점이다. 혹자는 중앙집권적 체제의 문제를 들어 가야의 역사를 한국 고대사에 편입시킬 수 없다고 하지만, 그렇다면 6세기 법흥왕대 이전의 신라사도 고대사에서 제외할 것인가? 연맹체의 형태이기는 해도 가야는 수백 년 동안 고구려, 백제, 신라 및 기타 동아시아사에서 하나의 실체로서 기능했다. 식민사관에 대항하여 신라 나물왕대 이후 법흥왕대까지의 역사를 중시하는 것이 우리 학계의 자세라면, 당연히 해당 시기의 가야사도 중시해야 형평성이 맞는다고 할 수 있다.
다섯째로, 일본 고대문명의 성립은 가야의 문화수준 및 가야사의 전개과정과 밀접한 관련이 있고, 가야 멸망 후에 신라가 삼국을 통일할 때, 가야의 유민들은 문(文)과 무(武)의 양 측면에서 큰 공헌을 하였다. 이는 가야가 가진 높은 문화수준을 바탕으로 가능했다. 일본 고대사에서는 보통 5세기를 고대문명이 꽃피기 시작한 시기로 보고 그 문화를 전래한 사람들을 존중하여 이를 ‘도래인의 시대’라고 말하기도 한다. 한국이나 일본 교과서에서 이 문제를 살펴보면 일본에 대한 문화 전수의 주체를 백제로 보고 신라와 고구려를 보조적인 존재로 다루고 있다. 즉, 가야의 존재는 몰각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한국과 일본의 고고학계에서는 양국의 유물, 유적의 실물을 바탕으로 하여 그 문화의 변혁을 가야 문화와 관련하여 살펴보고 있다. 가야 사람들은 때로 한반도 역사의 변동 속에서 약자로서 핍박을 받았지만, 바다를 건너가 일본을 개화시킨 것이다. 또한 신라의 삼국 통일에 군사적 측면에서 가장 큰 공헌을 한 것이 금관가야 왕족 출신인 김유신이라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나, 문무왕의 말에 의하면 고구려와 백제를 평정할 때 문장의 도움이 있었으며 그에 대한 강수의 공을 소홀히 할 수 없다고 하였다. 강수는 임나가야 사람으로서 역시 가야 계통의 후손이다. 가야금이 지금까지 전해져 우리 민족의 정서를 표현하고 있는 것도 가야 문화의 저력을 보여준다. 하나의 악기가 개발되고 전승되는 것도 우연히 가능한 것이 아니라 상당한 문화수준의 바탕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볼 때, 가야사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은 곧 그동안 최후의 승자였던 신라 중심의 삼국시대론에 매몰되어 오해되었던 한국고대사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올바른 길이다. 또한 가야사가 한국고대사 체계에서 다른 삼국과 함께 동등한 자격의 시민권을 획득하는 것은, 곧 고대 한일관계사의 쟁점인 임나일본부설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기도 하다. 이를 위해서는 한국과 일본의 학계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들에게도 직접 가야사의 실체를 설득할 필요가 있으며, 그래서 가야사에 대한 전문적인 연구에 더하여 이를 쉽게 풀이한 가야사 개설서가 필요했던 것이다.
3.
처음에는 쉬운 가야사 개설서를 한 권으로 만들려고 했으나, 그동안 가야사학계의 연구 축적이 너무도 많아서, 이를 한 권으로 담기에는 지면이 너무 부족했다. 그래서 부득이하게 가야사를 시대사, 분류사, 각국사의 세 권으로 나누어 정리할 수밖에 없었다. 가야사는 아직도 비전문가들에게는 생소한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가야사의 대체적인 전개 과정을 간략하게 요약하고자 한다.
전기 가야사는 2~4세기 동안 김해 가락국을 중심으로 존재한 경남 해안과 낙동강 유역의 변진 12국의 역사를 말하나, 그 이전의 소국 형성 과정을 포괄할 경우 그 기원을 위만조선이 멸망하고 그 유민들이 남하하는 기원전 2세기 말~1세기 초까지 올려 보아야 한다. 이 시대를 세분하면, 철기를 수반하는 목곽묘 문화가 시작되는 기원전 1세기부터 기원후 1세기 무렵까지를 가야 문화 기반형성기로 볼 수 있고, 목곽묘 문화가 형성되는 기원후 2세기를 가야제국 성립기, 3~4세기는 김해 지방의 우월성이 드러나는 전기 가야연맹 시기이면서 가야 문화의 전성기로 볼 수 있다.
경남 해안 지대를 중심으로 한 전기 가야 지역은 2세기 후반 또는 3세기에는 서북한 지역의 낙랑과 바다 건너 왜와의 원거리 교역을 통해서 점진적으로 발전하였고, 3세기 후반에는 기존의 문화 축적을 토대로 사회 통합이 한 단계 더 진전되어 김해 가야국의 우월성이 더욱 두드러졌다. 4세기 전반에는 낙랑군과 대방군 멸망의 여파로 일시적으로 동서로 분열되었으나, 4세기 후반에는 백제와의 교역이 시작되고 서북한 지역에서 이민을 받아들여 다시 김해 중심으로 통합되면서 강성해졌다.
4세기말에는 신라 지역과 자웅을 겨루면서 우세를 유지하였으나, 전성기 후반인 400년경에 동북아시아의 패권을 다투는 국제관계에 휘말려 김해, 창원 등의 중심 소국들이 고구려―신라 연합군의 공격으로 멸망하고 부산, 창녕 등의 낙동강 동안(東岸) 소국들이 신라에 투항함으로써 전기 가야연맹은 해체되었다. 전기 가야는 한창 발전하던 중에 고구려의 공격을 받아 급작스럽게 소멸되었기 때문에, 특정한 쇠퇴기를 설정할 수 없다.
후기 가야사는 5~6세기 동안 고령 대가야를 중심으로 존재한 경상 내륙과 낙동강 서안 10여 소국들의 역사를 말한다. 이 시대를 세분하면, 수혈식 석곽묘 문화가 각지에서 나타나기 시작한 5세기 전반기를 가야 제국 복구기로 볼 수 있고, 5세기 후반부터 520년대까지는 가야 문화의 중흥기로 볼 수 있다.
5세기 전반에는 전기 가야 맹주국의 몰락으로 상대적인 우위를 가지게 된 함안의 안라국과 고성의 고자국 등의 가야 서부제국이 활발하게 움직여 교류를 확대해나가는 모습을 보였으나, 세력의 집적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반면 고령 대가야를 중심으로 한 경상 내륙 지방 소국들은 차츰 세력을 축적하고, 5세기 후반에는 세력을 확대하여 서쪽으로 소백산맥을 넘어 섬진강 유역의 호남 동부지역까지 포섭하면서 크게 대두하였다.
520년대 후반 이후 가야연맹은 소멸 과정을 밟았다. 그 가운데에서도 530년대는 신라와 백제의 침투로 인하여 남부 지역의 일부 소국들이 멸망하는 시기, 540년대는 대가야(고령)와 안라(함안)의 남북 이원체제로 분열된 시기, 550년대는 독립성을 유지하면서도 백제에게 복속되어 협력하던 시기였다. 그러다가 백제의 관산성 패전 이후 562년에 대가야국이 신라의 습격으로 함락되면서 후기 가야연맹은 종식되었다.
《일본서기》에 나오는 이른바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는 대외적으로 가야에 주재하는 왜국의 사절단이라는 명분을 지니면서, 실질적으로는 함안 안라국을 중심으로 한 가야제국의 독립성 유지를 위해 일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는 가야연맹이 백제와 신라의 압박으로 위기에 처했던 540년대의 대가야-안라 이원체제 시기에 함안 안라국의 세력을 보완해주는 특수 외무관서, 즉 안라왜신관(安羅倭臣館)이었다고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가야는 기원전 1세기의 소국 성립 과정부터 6세기 중엽의 멸망 때까지 700년 동안 완전한 중앙집권적 고대국가를 완성하지는 못했지만, 그 나름대로 소국 연맹체제를 유지하면서 독립적인 세력을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같은 시기의 백제나 신라 지역에서 출토된 고분 유물들과 비교해 볼 때, 그 유물의 질과 양에서, 또 유물을 만들어낸 사회 기반과 기술력 측면에서 백제, 신라, 왜 등에 비해 손색이 없었다.
4.
본인의 연구는 세 권으로 이루어져 있으나 가야사 전개에 대한 요점은 위에서 서술한 바와 같다. 여기서 그에 더하여 각 권에서 서술한 내용 중에 특징적인 것을 서술하면 다음과 같다.
가야의 멸망 원인은, 소국간의 비교적 고른 문화 축적에 따른 상호 세력균형, 가야 지역이 차지하고 있던 해운의 이권을 노리는 외부 세력들의 도전, 6세기 이후 중앙집권 체제 마련의 지연에 따른 백제, 신라와의 대외관계에 대한 상대적 비효율성, 5세기 이후 일본열도로 제철 등 선진기술이 이전된 데 따른 교역우월성 상실 등을 들 수 있다.
우륵은 5세기 후반 대가야의 전성 시기에 그 소속국인 사이기국(斯二岐國: 의령군 부림면) 출신 사람으로서 대가야 하지왕(荷知王: 嘉實王)에 의해 궁정 악사로 채택되었다. 그는 가실왕이 중국의 쟁(箏)을 기존의 고유 현악기와 절충해서 만든 가야금을 가지고, 5세기 말의 어느 시기에 열린 제천대회 때 모인 연맹 소속 소국 사절들의 음악을 가야금 12곡으로 편곡하였다. 우륵 12곡에는 상가라도(上加羅都)와 하가라도(下加羅都)를 중심으로 하여 경남 지역 각지의 음악이 포괄되었지만, 거기에는 전남 여수시 및 돌산읍에 있었던 상·하다리국의 음악인 달이(達已), 전남 광양시 광양읍에 있었던 모루국의 음악인 물혜(勿慧), 전북 남원시 및 임실, 장수에 있었던 상·하기문국의 음악인 상기물(上奇物)과 하기물(下奇物) 등도 있었다. 우륵은 이를 후세에 전수하며 대가야의 영광을 노래하고 있었는데, 550년경에 가야연맹의 위정자들이 백제에의 종속적 연합을 결정하자, 자신의 음악이 의미를 잃었다고 보고 이에 반발하여 제자 이문과 함께 신라의 진흥왕에게 투항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 후 신라인 제자들이 우륵 12곡을 5곡으로 축약해서 다른 곡으로 만들어 버리자 크게 노했으나 이미 타국에 망명한 입장이라 인정할 수밖에 없었고, 이것이 신라의 대악(大樂)으로 지정되었다.
대가야국의 마지막 왕인 도설지왕은 고령, 합천 지방의 전설상의 인물인 월광태자와 동일인이다. 그는 522년에 대가야 이뇌왕과 신라 법흥왕조 왕실의 여자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 당시에 대가야는 백제와의 영역 다툼에서 호남 동부 지역을 상실한 후 신라와의 우호관계를 모색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를 빌미로 대가야국의 반신라적 공격성을 약화시킨 신라는 차츰 가야연맹 소국들을 하나씩 병합해 나갔으며, 창녕군 영산면의 탁기탄국, 김해의 금관국, 창원의 탁순국들이 그 대상이었다. 혼란에 빠진 가야연맹은 내분을 벌이다가 결국은 550년 전후하여 백제와 연합하기로 결정했으니, 월광태자는 대가야 왕위의 계승이 불가능해졌다고 판단하여 이때 신라로 망명하였다. 월광태자는 도설지라는 이름으로 551년의 적성비와 561년의 창녕비에 신라 장군 또는 귀족의 일원으로 나온다. 그러다가 562년에 대가야가 신라에게 병합된 직후, 그들의 반발심을 무마하기 위해 신라에 의해 대가야의 마지막 왕으로 옹립되었다. 그러나 얼마 후 곧 폐위되어 가야산록에서 쓸쓸한 말년을 보냈으니, 그 자리가 지금의 합천군 야로면에 있는 월광사이다.
금관국 마지막 왕인 구형왕은 532년에 자발적으로 신라에 항복해 들어
간 후, 그의 세 아들들과 함께 진골의 신분을 얻어 신라 왕도 사탁부에 소속되어 살았다. 그 중 첫째 아들인 세종(世宗: 奴宗, 弩里夫)은 적성비에 신라 장군으로 나오고, 북한산비, 황초령비 등에는 진흥왕의 어가를 수행한 대등(大等)으로 나오며, 579년에는 상대등에 오르기도 하였다. 셋째 아들 무력(武力)은 554년에 한강 유역의 신주군주(新州軍主)로 되어 관산성 전투에 참여해 수하 장수로 하여금 백제의 성왕을 죽이게 하는 공로를 세워, 유일하게 각간, 즉 서불한의 지위에 올랐다. 금관국의 후손들은 이처럼 신라에 많은 공헌을 세웠어도 항상 신라 사람들에게 차별 대우를 받았다. 무력의 아들 서현은 신라 갈문왕 입종(立宗)의 아들인 숙흘종(肅訖宗)의 딸 만명(萬明)과 서로 좋아하였으나 그 아버지의 반대로 비상수단을 써서 그 딸과 도피 행각을 하여 만노군(충북 진천)에 가서 결혼 생활을 영위하여 김유신을 낳았다. 김유신은 신라 왕실의 유력자인 김춘추에게 자기 동생 문희를 사귀게 하였으나, 김춘추가 꺼려하여 정식 혼인을 못하고 있다가 기지를 내어 선덕여왕으로 하여금 김춘추와 문희가 정식 결혼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런 노력의 결과 문무왕대에 와서 금관국 시조 수로왕의 능과 종묘가 신라 왕실의 인정하에 새로이 복구될 수 있었다.
신라 하대 애장왕대의 승려 순응과 이정은 성목태후의 지원을 얻어 가야산에 해인사를 창건하였다. 순응과 이정은 모두 대가야 마지막 왕 월광태자의 후손으로 대가야의 성스러운 산신이면서 대가야 시조인 정견모주(正見母主) 사당이 있던 곳을 크게 확장하여 해인사를 세운 것이다. 조선시대의 지리지에 의하면 19세기말까지 해인사 안에 정견천왕사(正見天王祠)가 있다고 되어 있는데, 현재는 그곳이 국사단(局司壇)이라고 하여 해인사를 호위하는 산신이 머무는 건물로 바뀌었다. 해인사 국사단, 즉 대가야 시조 사당 정견천왕사는 해인사 창건의 기원을 이룬 곳이다.
가야 소국들의 존재양태에 대한 해석은 여러 가지가 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6가야연맹설, 단순분립설(單純分立說), 단일연맹체설(單一聯盟體說), 지역연맹체설(地域聯盟體說), 영역국가설(領域國家說) 등이 있다. 이런 견해 중에서 요즘 고고학계에서 유행하는 것은 지역연맹체설이다. 이는 토기 양식에 비추어 볼 때 지역별로 고령권(高靈圈), 김해권(金海圈), 함안권(咸安圈), 사천-고성권(泗川-固城圈) 등이 나누어지는 것을 토대로 나오는 말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를 곧바로 대가야 연맹체, 아라가야 연맹체, 소가야 연맹체 및 금관가야 연맹체 등으로 각각 명명함으로써, 변형된 6가야 연맹체로 인정하고 가야 전역에 걸친 연맹체의 존재에 대하여 부정하려는 것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연맹체(聯盟體)란 그 연맹을 이루는 각 소국들의 독립성이 유지된 상태에 있기 때문에, 외부의 신라나 백제와 같은 큰 적에 대해서는 하나의 단일 연맹체라는 외형을 갖추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내부에는 각기 혈족이나 지리, 경제 교류, 문화 전통 등의 측면에서 친하거나 소원한 차이가 있어서, 상황에 따라 몇 개 또는 그 안에서 다시 몇 개의 정치체로 나뉘어 상호 견제하는 분절체계(分節體系)가 존재한다. 문헌사료상으로 볼 때 상당한 시기에 걸쳐 가야 소국들이 신라나 백제에 대하여 ‘가야’라는 단일한 이름 아래 불리었다면, 이들은 하나의 연맹체 안에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 사이에 소지역권이 구분되는 것은 연맹체에 특유한 분절체계의 존재 양상일 뿐이다.
2~4세기의 가야인들은 귀금속 대신에 구슬을 이용하여 부(富)를 표시하려는 관습이 있었다. 김해 양동리 고분군, 대성동 고분군 유물들은 그런 현상을 나타낸다. 금, 은 등의 귀금속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라고 해도, 그처럼 화려한 장신구를 일반인들도 소유할 수 있었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그러므로 가야 사회에서 늦어도 3세기 전반에는 사회경제적으로도 일반민과 구별되는 귀족계급이 생겨났다고 볼 수 있다. 가야에서 전형적인 귀금속 유물들이 출토되는 것은 5세기 이후의 고분군부터이다. 부산 복천동 10, 11호분, 합천 옥전 고분군, 고령 지산동 고분군 등에서는 금관, 금동관, 용봉문 환두대도, 금귀걸이 등의 장신구와 소품들을 금이나 은으로 장식해서 쓰고 있다. 그러므로 5~6세기에는 가야 지역에 사회·경제적인 부에 바탕을 두고 귀금속을 선호하는 귀족계급이 이미 존재하고 있었음을 충분히 논할 수 있으며, 이는 백제나 신라와 마찬가지 현상이다.
기원전 1세기 이후 가야 지역에서는 제철 및 철기 제작이 시작되었는데, 그 형태와 종류가 서북한의 세형동검 문화기와 유사하여, 대동강 유역 위만조선의 철기 문화와 연관성이 인정된다. 그 후로도 이들은 서북한 지역 낙랑군과의 교역을 통해, 또는 그 지역으로부터의 단속적인 주민 이주 등을 통해, 지속적으로 중국의 우수한 제철 기술 및 철기 단조 기술을 수입하고 있었다. 그들은 3~4세기에 철소재인 판상철부형(板狀鐵斧形) 철정(鐵鋌)과 본격적인 철정을 만들어 낙랑, 마한, 왜 등지에 철을 보급하였다. 특히 제철 능력이 없었던 왜국에게 가야의 철은 고대국가 형성을 위해 필수적인 것이었다. 반면에 경주 황성동 유적에서는 4세기 이래 화폐 기능을 했다고 보이는 단면 사다리꼴 주조 쇠도끼의 용범과 실물들이 나타났는데, 이를 가지고 철기를 제작하려면 재용융(再熔融)을 통한 탈탄(脫炭) 과정을 거쳐야 하므로 불편했다. 그만큼 가야 지역의 제철 기술이 신라 지역보다 선진적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400년경 전기 가야연맹의 몰락과 함께 제철 기술이 낙동강 하류 지역에서 각지로 퍼졌으며, 후기 가야연맹의 발전과 일본 고대문명의 성립은 이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아직까지 가야사에 대하여 소개하지 못한 사실들이 많이 있지만 지면 및 시간 관계상 여기서 줄일 수밖에 없다. 본인이 이번 책을 낸 후, 동학(同學)들뿐만 아니라 전국 각지의 여러 일반인들로부터도 깊은 격려의 말을 들었다. 이들의 성원이 없었으면 오늘과 같은 미미한 성과나마 나올 수 없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지금까지 가야사와 가야고고학을 공부해서 많은 성과를 축적해 온 연구자 여러분, 이를 인정해 준 지훈상 심사위원 여러분, 그리고 한국사를 사랑하는 모든 분들께 감사의 뜻을 전하고 오늘의 영광을 함께 나누고 싶다.
지훈국학상 심사보고
2002년도 제2회 지훈국학상 심사위원 일동은 만장일치로 김태식 교수의《미완의 문명 7백년 가야사》를 수상작으로 선정했다. 이 저술은 그동안 잘 알려져 있지 않았던 가야사의 연구 수준을 한 단계 높이면서 이를 일반인도 읽을 수 있는 개설서로 정리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이 책의 새로운 주장 또는 연구성과라고 할 수 있는 점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가야가 백제·신라·왜와는 별개의 독립적 성격의 정권을 오랫동안 영유하였다는 점을 문헌과 고고학적 증거를 토대로 논증하였다.
2. 가야 지역의 고고학적 유물 문화를 배경으로 문헌 사료들을 재해석함으 로써,《일본서기》를 포함한 임나일본부 관련 사료가 실은 가야의 마지막 시기의 상황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료였음을 확인하였다.
3. 서력 기원전 1세기부터 서기 6세기까지의 7백년 동안을 가야사 범주에 넣어 설명하였다.
4. 경상남북도의 서쪽 절반과 전라남북도의 동쪽 절반을 가야연맹체의 최대 영역에 포함시켰다.
5. 가야사는 크게 보아 4세기 이전의 김해 가락국 중심의 전기 가야사와 5세기 이후의 고령 대가야국 중심의 후기 가야사로 전개되었다는 점을 재확인하였다.
6. 가야사를 ① 맹주국을 중심으로 한 연맹체의 발전과정을 보여주는 시대사 ② 가야의 정치·경제·사회·사상 등을 보여주는 분류사 ③ 가야를 구성했던 32개국의 역사를 보여주는 각국사로 정리하였다.
7. 가야와 관련한 수로왕 신화, 허왕후 결혼 설화, 월광태자 전설과 수로왕릉, 허왕후릉, 해인사, 월광사 등의 가야 관련 사적을 정리하였다.
위와 같은 주장을 통하여 이 저술은 몇 가지 문제점을 던지고 있다. 즉, 책 세권에 걸쳐서 각 방면의 가야사를 정리하였을 뿐이나, 이를 통하여 일제 식민사관의 주요 논점인 임나일본부설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과, 한국 고대사는 고구려·백제·신라의 삼국시대가 아니라 가야를 포함한 사국시대로 수정해야 제대로 설명될 수 있다고 본 점이다. 또한 이제는 학술연구서도 몇몇 학자들 사이의 암호와 같은 영역에 머무르지 말고 수많은 사진과 참고 도면을 통하여 일반인까지 설득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점이다. 물론 김 교수의 이 저서가 이와 같은 문제들을 모두 해결한 것은 아니지만 해결의 방향을 향해 주요한 한 걸음을 내디딘 큰 업적임에 틀림없다는 것이 심사위원들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제2회 지훈국학상 심사위원회
심사위원장 김인환(고려대 국문과 교수)
심사위원 정병조(동국대 윤리문화학과 교수)·정옥자(서울대 국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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