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빌리입니다.
여기계시는 회원님 여러분은 모두가 신실하시고 영적인 분별력이 있으신 분이라 믿습니다.
이런 글을 올린것은 진실이 왜곡되어 바로 잡고 싶은 울림이 있어 그나마 선교사님들에 글을 올립니다.
저는 지질이도 못살은 시골 목회자 자녀로 태어나 탈출구로 삼아 서울에 대학을 왔었습니다. 강남에 누님집에 엊혀있어서 사랑의 교회, 온누리교회, 소망교회, 그리고 먼 명성교회 여러교회를 처음 몇 번 다니다가, 저와 맞는 교회를 찾아 헤며였습니다. 저희 누나를 소망교회로 인도하고 새벽기도를 다녀도 영적인 곤궁함을 풀지못해, 고등학교때 잠시 알았던 김기동목사님의 교회를 찾아가 2년동안 청년부 생활을 했습니다. 물론 이단이라고 교계에서 금시여기는 것 다 알고 있지만, 저는 문서를 통해 전혀 이단이라는것에 대한 느낌을 받지않고, 오히려 이러한 대단한 영성을 갖은 목사님이 있을까 해서 호기심으로 갔는게, 청년부 생활을 했습니다. 물론 이단"이라는 경계심을 갖고요..하지만, 2년동안의 청년부 생활에서 전혀이단이라는 생각보다 오히려 성령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신앙생활과 영혼 구혼을 위해 발버둥 치는 신도들에 모습을 보고 놀라왔고, 꺼져가는 한국교회에 이같은 교회가 있다는것에 새삼스러웠습니다.
모두가 말하는 김기동목사는 귀신파"다 라는것은 김기동 목사님의 신학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김기동목사님의 한부분적 신학을 가지고 물고 늘어져서 그러한것같습니다.
김기동 목사님은 25살때부터 부흥강사로 전국을 누비며 대형천막하나가지고 부흥집회를 하시다가, 성경이 적혀있는 것은 그데로 믿고 응하시고 구약에서 사무엘과 엘리야도 하지않았던 과 달리 신약에 와서 예수님이 오셔서 마가복음 16장 17~18절 믿는자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저희가 내이름으로 귀신을 쫒아내며..를 믿고 시행한 후 80년 초반까지 30만명의 귀신축사를 하시고 병자를 일으키셨습니다. 누가복음 17장에 보면 예수님이 세우신 70인의 사역자들도 전도하고 돌아와 주여, 주의 이름을 대니 귀신들도 우리에게 복종합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사탄이 하늘에서 번개처럼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다. 하였고, 예수님은 죽기 삼일전까지 귀신을쫒겠다고 했고, 신약에만 귀신쫒는게 113번 언급이 되었습니다. 혹 제자들이 못 쫒을때에는 기도 (성령)없이는 이런 유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말로만 능력이 아니라 믿음을 행했습니다. 이런 교권세력으로 인해 이단교정화된것을 지금은 한국의 교단에서 20년이 지난 지금도 해명할 기회도 주지않고 지금은 김 기동목사님께서 축사하실때마다 쫒기전에 물어 통계적으로 낸걸가지고 물어뜯습니다. 어느 학문으로 하자면 신학이던 백퍼센트 완벽한 신학이 있습니까?
이공계를 치자면 여러번 시험하고 임상하고 논문을 써내는데, 그런 통계가 나왔다는 글도 못쓰는지..그건 이미 연세대 에서 김 기동목사의 축사연구에 대한 논문도 패스되어 졸업했는데, 어찌 그걸 신학의 한 연구글로 보지않고 교리로 보는지..
만약 조용기 목사님께서 김기동목사님보다 더 창조론과 계시록과 구원론 은사론에 대해 그리고 많은 오류가 있고 이단시 되었지만, 그게 성경이 아니라 신학의 한소리 학자로 치자면 한 연구입니다. 논문을 대조하고 글로 파헤쳐 입증할 신학자가 글로써 다른사람을 정죄할정도로 성령데로 행하고 이적을 행하는 신학자 있는지..만약 김 기동목사님이 조용기 목사님처럼 60만 교회성도를 내시고 좁은 한국이 아니라 세계를 상대로 이미 눈을 뜨셔서 Pastor David Cho. 하면 다 알정도가 되면 누가 김 기동목사님을 함부로 이단 정죄할찌..
어느정도 이단시비에 대해 아는사람은 믿지않은 자가 죽은자가 어찌 귀신이 되느냐? 성경에 나와있느냐? 하고 그 핵심이 그거 하나입니다. 하지만, 믿지않고 지옥갈 영혼을 저주해서 빼던 악귀를 빼던 성령을 받아 사단에 눌려있고 귀신을 추방하여 포로를 자유함을 주는데, 지옥갈 죽은자를 옹호하는것인지..요즘 누가 예수님이 세우신 사도들과 70인의 전도자들에게 명하신 지상명령을 거룩하고 거룩한 교회에서 실천을 하는지...귀신은 커녕 설교시간에도 자신들도 이단시될까봐 구약에서 언급한 사단은 언급할지언정 신약에서 언급된 귀신은 언급조차 않습니다.
믿지않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세상사람들도 죽은자가 귀신된다고 들 하는데, 성락교회는 교리가 귀신론이 아닙니다. 그저 성경있는 그데로 철저하게 믿고 성령의 행함데로 살고 그중 하나가 귀신쫒고 자기자신을 절처하게 살려고 몸부림치고 또 몸부림칩니다.
김기동목사님께서 내신 대략 2백여권에 책들중에 단 한권의 책"귀신론 을 제외한 199권은 어느 신학자 어느 목사님이 연구해도 전혀 하자없고 오히려 성도들이 갖아야 할 영적인 친서입니다.
누가 신약에서 그토록 많이 언급된 귀신에 대해 연구책을 당당하게 내놓겠습니까?
십중팔구 이단소리 듣기 백퍼센트인데 ..
저는 신학을 않해서 잘모릅니다.하지만 어렷을때부터 할아버님때부터 기도원신앙을 해서 영적분별력은 활식히 가지고 있습니다. 뭐 지금은 기도원이 않 좋게 평가하실찌모르지만..
저는 베뢰아를 공부하지도 않은사람이고, 김기동목사님의 저서만 고등학교때 읽어 스스로 내 발로 성락교회를 대학때 찾아간사람입니다. 가보니, 강남에 많은 대형교회들이 휘황찬란한 오디오시스템과 워십으로 찬미를 드리지만, 성락교회는 찬송가를 중요시 여기고 오순절초대교회와 같은 신앙으로 전신갑주를 입은 사람입니다. 청년부를 하다보니, 많은 대형교회에서 목회자가 일으키지 못한 앉은뱅이들, 귀신들린자들을 조용조용 성락교회로 보내고 낫곤해서 본교회로 되돌아 가는것을 보았습니다.
사역자의 사명이 무엇입니까?
대학강단 철학교수마냥 좋은 예화 들어가며 감동받고 은혜받은것이겠습니까?
예수님은 이땅에오셔서 많은 귀신들을 쫒고 병자를 고치셨습니다. 그건 성락교회가 귀신쫒는것으로 유명한게 아니라 그만큼 영적으로 충만한 교회라고 감히 생각되어집니다. 사역자가 악한영을 쫒는게 이단입니까?
아니면 사역자가 영적인 권위도 없이 이러한 사람들을 정신병원으로 심방가는게 사역자의 영적인 권능입니까?
저는 외국으로 유학을 가서, 한인순복음 교회를 다녔습니다. 순복음도 오순절 은혜가 넘치지만, 외국에서 유니온신학을 하신분들이 제가 성락교회다닌다는 이유하나만으로 저를 뱅뺑둘러싸서 이단시하며 멸시하고 나오기를 권유했습니다. 저는 당췌 이해가 않됩니다. 왜 베뢰아가 이단인가 분명한 신학적 논리도 없으면서 단지 교단신학대에서 이단"이라고 규정했기에 이단이라는 것입니다. 그때에는 제가 학생이고 이러한 교단적 이단규정에 의해 이단시되었다는것을 몰랐기에 묵묵히 듣고만 있었습니다.
순복음교회는 어떻습니까? 한때 80년도에 주일아침이면 조용기 목사님이 나오셔서 설교하시다가 이단시비로 하루아침에 이단으로 규정되지 않았습니까?
중국에 윈"형제도 중국교회에서는 이단이라고 하고, 미국에 가보니 베니힌"목사님도 이단이라고 규정하는 교단도 많습니다. 영적인 능력이 배가되어 이러한 오순절 초대교회의 현상이 나타나면 무조건적인 이단시비는 그만했으면 합니다. 물론 이단"이라고 규정되어 지는 곳은 정말 이단인곳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교권에 세력에 의해 이단시되어진곳은 정말 억울함니다. 현재 성락교회는 이단이라고도 하지도 못하고 이단이 아니라고 하지도 못하는 아이러니한 형국이 암암리 알려지고 여전히 논쟁이 되고있습니다...하지만, 성락교회가 이미 이단"시비를 제외하면 한국의 침례교회중에 제일 규모가 크고, 세계 20대교회중에 가장 부흥하는 교회라는 것을 미국의 신학자가 저널로 영문으로 써서 연구한 영어책자도 미국에서 봤습니다.
제가 이러한 것을 올린것은 저는 성락교회의 전도로 말미암아 성락교회를 찾아간것도 아니고, 제 발로 찾아가 청년부 생활을 강건하게 했었고, 그로말미암아 세상이 영적인 치밀한 전투속에 있다는것을 깨닫게 해준 고마운교회입니다. 성락교회에서는 한 영혼 한 영혼 귀하게 여기고 찾아가 온몸과 영혼으로 섬기려 합니다. 이렇게 전도해놓으면 사회적으로 성락교회가 이단이라고 해서 매도되어, 오순절 성격이 비슷한 순복음교회나 윤석전목사님의 연세중앙침례교회로 옮겨버립니다. 이미 이러한교회는 어중 떠중 떠돌다 이단시비가 갈아앉은 교회들입니다.
연세중앙침례교회의 윤석전 목사님 베뢰아 10기생이시고, 지금 티비에서 유명세를 타신 장 경동 목사님도 김 기동목사님께 한때 영적전쟁에 대해 영향을 받으신분이십니다. 김기동목사님께서 70년대, 80년대 미국의 한 신자가 지원한 우리나라 최대형 천막을 설계하여 전국을 다니며 천막집회을 강행하셨고, 서울대에서 전도하다가 교파를 초월한 하나님말씀으로 되돌아가자해서 시작한 초교파 공부에 인천 주안교회 나겸일 목사님, 소망교회에 김지철 목사님, 명성교회에 김삼환 목사님등이 신학생으로써 교파를 초월하여 성경공부를 하다가 만든게 베뢰아아카데미입니다.베뢰아는 성경으로 돌아가자! 라는 하나의 구호로 일반사람들도 성경공부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어느 목사님도 김기동목사님과 함께 성경공부했다고를 말하지않습니다. 왜냐면 88년 이후 이단으로 낙인찍혔고 각 신학대에서 그렇게 공포하고 가르치기때문에 그 이하 모든 성도들은 이단으로 알고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답답해서 해외 KOSTA유학생 집회때 성전을 짓지않고 학교강단을 빌리고 나머진 선교 및 구제활동으로 유명하신, 높은뜻 숭의교회 이동호 목사님. 그리고 윤석전 목사, 장경동 목사님 제가 직접 비간접적으로 성락교회와 김기동 목사님에 대해 "함부로 말할수 없다" 라고 일축하십니다. 이분들의 설교역시 그러한 악한 영의 셰계를 그데로 김기동목사님게 답습하는 것을 티비에서 보면, 정말 영적인 세계는 김기동목사님이 밝혀시려 전력하시고 장단은 다른 목사님이 하시니, 최근엔 좌중을 우슴도가니로 만드신 장 경동 목사님도 김기동목사님이 수십번 강조하시고 책까지 내신 미혹의 영에 대해 설교를 여러차레 하신것을 보았습니다.
제가 알기로 김기동 목사님책은 이단"시되어 기독교출판에서 출판금지되어있어 나오지 않지만, 우리나라 사역자들중에 그리고 신학자들중에 김기동목사님과 대략 200여권의 책을 내놓으신 분은 없습니다. 하지만 제가 성락교회 다닐때 많은 타 교파 목사님께서 몰래 몰래 책을 사가지고 가신거 수차례봤고 지금도 몰래 몰래 문제소지가 있는 귀신론만 제외하고 199권의 책을 강단에서 인용하십니다. 저희 아버님도 한국장로교연합 운영위원이신데 몰래 몰래 보실정도인데... 김 목사님은 성경말씀과 은사와 지.정.의를 모두 갖추신분입니다.
너무 은사가 많으시고, 그 받은은사와 주위 교단과 사람들의 삿대짓에 7년동안 설교와 전도외엔 입에 자갈을 물고 다니셨습니다. 그리고 88년이후 한번도 한국교회에서는 김목사님께 스스로 해명할 기회를 주지않으셨습니다.
연세중앙침례교회 윤석전 목사님이 왜 이단시 끌러미를 제공한게 윤목사님이 김기동 목사님의 베뢰아를 했다는거 그것을 원세호 최삼경 이단감별사 목사님입니다. 김기동 목사를 이단이라고 연구한 최초의 목사가 누구입니까? 원세호 목사입니다. 원세호 목사님은 지금 어떻습니까?
김기동 목사님, 윤석전 목사님을 이단 연구한 원세호 목사 자신이 지금은 이단으로 모든 교단에서 이단이라고 낙인찍혔습니다.
왜 크리스챤이 거룩거룩만 해야합니까?
이미 세상은 악한영에 찌눌려 악한영을 대적할 만한 강건함을 가진 교회는 많지않습니다. 이러한 영적권위를 가지려는 교회가 이단"시되는게 한심합니다.
김기동목사님은 아래와 같이 목사님들끼리의 특유의 교권세력다툼에 변방이 되어 이단"시되었습니다.
저는 현재 성락교회를 다니지 않고, 지방에서 아버님이 목회하시는 교회를 섬기고 있습니다. 저희는 장로교 통합이고, 아버님 역시 김기동 목사님을 한번도 뵙지도 않았지만, 정말 영성이 탁월한 분이라는것을 인정하십니다.
이렇게 암연히 김기동목사님을 아시는 분은 종용히 있는데, 유독 교단의 이단감별사들이 야단법석을 떨고 있습니다. 김기동 목사님을 이단연구 최조정죄한 원세호 다음으로 최삼경목사 역시 자신의 교단에서 이단으로 시비로 당하고 있습니다.아이러니하죠?
판단은 사역자님이 하시되, 결코 말씀한번 듣지않고, 이러한 이단감별사에 의한 무차별 이단"정죄함 역시 얼마나 큰 죄인가 다시한번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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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기협(KNCC) 김기동 목사 초청간담회
2006년 10월 2일 오후 3시 한국기독교협의회가 주최한 김기동 목사 초청 간담회가 열렸다. 이날 김기동 목사는 이단규정의 경위와 그 부당성과 자신의 신앙에 대해 설명했다.
이번 간담회가 열리고 해가 지났지만 김목사가 거론한 목회자와 그 밖의 사람들은 김목사가 해명한 내용 중 어떤 것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본 내용은 한기협 사무총장의 사회로 진행된 김목사의 대담을 정리한 것이다.
▶일 시: 2006년 10월 2일 오후 3시
▶장 소: 한기협 사무실
▶사 회: 박중선 목사(한기협 사무총장)
▶참석자: 김기동 목사(서울성락교회),
성중경 목사(한기협 회장)
한기협 소속 목회자들 및 교계 기자 40여명
▲박중선 목사: 한국기독교협의회 주관으로 서울성락교회 김기동 담임감독을 모시고 한국교계의 여러 가지 현안을 함께 토의하고 확인하고 검증하는 시간을 갖고자 이 자리를 마련하였습니다. 한국기독교협의회 대표회장이신 성중경 목사께서 나오셔서 오늘 이 시간을 갖게 된 배경과 이후 순서에 대해 말씀해 주시겠습니다.
▲성중경 목사: 바쁘신데 이렇게 많이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다 아시는 대로, 한국에는 한기총이 있고 한기총에 들어가지 않은 교단들이 모여서 만든 한국기독교협의회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부족한 사람이 중책을 맡아 일해 오는 과정에서 베뢰아가 한기협과 함께 일하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당신들이 이단이기 때문에 안 됩니다.” 하고 거절했는데, 그동안 한 번도 소명 기회를 갖지 못했고, 이단이라 한 것도 한두 사람이 말한 것이라며 소명 기회를 가졌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작년 6월 29일에 공청회를 열었습니다.
그때 저희들은 별다른 문제점을 찾지 못했고, 그 후에도 부족하다 싶어 1년여 동안 더 연구를 했습니다. 연구하는 과정에서 보니까, 베뢰아에 대한 이단 정죄가 정치적으로 이루어진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일부 언어의 실수에서 빚어진 것임을 알았습니다.
사람이면 누구나 언어에 실수가 있기 마련이고, 또 그런 실수는 얼마든지 시정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어느 책에서는 베뢰아의 주장들은 김기동 목사 본인의 생각이지 교리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는 각서까지 쓴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런 것에 대해서는 공개되지 않고 잘못된 부분만 부각을 시켜 이단으로 정죄해 버렸다는 점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우리와 함께 일해도 문제가 없겠다 여겨 지난 5월에 우리가 함께 일할 수 있다고 받아들였습니다. 진짜 이단은 마땅히 배척되어야 하겠지만, 이단이 아닌 이단은 구제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한국의 이단 정죄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감리교의 이용도 목사 같은 분은 성자 목사인데도 이단으로 몰렸고, 잘 아는 대로 순복음교회의 조용기 목사가 오랫동안 이단으로 몰렸고, 예수님도 유대인들에게 이단으로 몰렸고, 마틴 루터도 가톨릭으로부터 이단으로 몰렸습니다.
이단이라 이단으로 몰린 것은 상관없는데, 이단이 아닌 사람이 이단으로 몰려서 곤혹을 치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저희가 이런 분과는 함께 일해도 되겠다, 또 한기협이 다른 데서 못하는 것, 억울하게 이단으로 몰려서 고생하는 이들을 구제해야 하겠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베뢰아와 함께 일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난번에 한기총에서 우리를 이단을 옹호하는 집단이라고 신문에 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는 1년 동안 공청회도 갖고 연구해서 베뢰아에 아무 문제가 없다고 판단하여 받아들였는데, 당신들은 연구도 해보지 않고 그렇게 말하느냐.”고 말하고, 공개토론을 하자고 제안했습니다. 그리고 또한 이렇게 간담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인이 와 계시니까 의문 나는 점은 질문도 하시고 잘 듣고 판단을 내리셔서 좋은 결과가 있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박중선 목사: 대표회장님이 말씀하신 대로 이 기회에 여러 가지 궁금하고 의심스럽고, 익히 알지 못했던 여러 가지 사안들에 대해서 당사자이신 김기동 감독께서 나오셔서 소상하게 말씀을 해 주시겠습니다.
▲김기동 목사: 감사합니다. ‘베뢰아’, ‘베뢰아’ 하니까 먼저 사도행전 17장 11-12절을 읽겠습니다.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함으로 그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나”
잠깐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한기협에서 마련한 귀한 자리에 종을 세워주심을 감사합니다.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 앞에서 가장 겸손하고 진실한 마음을 주셔서 복 받는 시간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것 가운데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를 원하며 주 예수 이름 받들어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오늘 여러분을 처음 뵙게 되었는데, 저에 대해서 욕하는 것이 많고 또 제가 귀신도 쫓는다고 하니까 마치 제가 도포라도 입고 다니고 뿔이라도 달고 다니는 줄 착각하는 이가 많습니다.
그러나 저는 여러분과 똑같은 사람입니다. 저는 충남 홍성군 서부면에 위치한 양곡감리교회에서 부흥집회를 처음 인도한 이래 지금까지 한 결 같이 일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때 저는 신학교를 다니지 않았던 때인데도 부흥사로서 전국 교역자 집회를 계속 인도했습니다.
1964년에 한일국교정상화 반대 운동이 일어날 때는 서울지역 기독교협의회가 충무로 광장에서 집회를 열었는데, 당시에 전도사로 비봉감리교회를 담임하고 있던 제가 주강사로 그 집회를 인도하기도 했습니다.
그때 한경직 목사와 김치선 박사 같은 분들도 참석하셨는데, 그 집회를 성공리에 잘 이끌었습니다. 그 집회가 끝나고 김치선 박사께서 저에게 대한신학교에 와서 부흥회를 인도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비록 신학교 근처에도 가보지 않은 사람이었지만, 그해 가을학기 초에 대한신학교에서 한 주간 동안 부흥집회를 인도했습니다.
그런 저를 지켜보시던 김치선 박사님이 제게 신학교에 입학하여 공부할 것을 권하셨고, 저는 그분의 권유와 초청으로 대한신학교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당시에 저는 여름마다 전도집회를 했기 때문에 1년에 한 학기씩만 학교에 다니겠다고 양해를 구하고 허락을 받은 후에 학교에 입학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학교를 8년 동안이나 다녀야 했습니다.
그 즈음에 대학에 들어가서 공부를 더 해야겠다고 생각하여 명지대학에 입학했고(1966년), 명지대학을 졸업한 후 1972년에 대한신학교를 졸업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신학교 재학 중이던 1966년 8월에 독립선교회(現 월드선교회)에서 전도목사로 안수(按手)를 받았습니다. 그 후 1980년에 대한신학교 대학원 과정을 마쳤습니다. 이로써 약 11년간 대한신학교에서 공부를 한 것입니다.
저는 감리교회의 감독회장을 지내신 오경린 목사님이 시무하시던 예산감리교회에서 평신도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때 저는 19세의 청년으로 열심히 교회에서 봉사했습니다.
처음 교회에 갔을 때 정말 큰 은혜를 받고 성령충만함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때 제가 하고 싶은 공부를 하는 대신 성경을 읽어야겠다는 마음이 들어 성경을 빌려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하여 성경을 읽기 시작한 첫 해에 42독을 했고, 평신도 생활하던 5년 동안 정말 밤낮으로 성경을 읽어 75독을 했습니다. 감리교회에서 주최한 성경암송대회에 나가서 우승할 정도로 성경을 부지런히 읽었습니다.
하지만 그냥 성경을 읽고 암송만 한 것이기 때문에 성경의 줄거리는 알고 있었지만 성경에 대해서는 잘 몰랐습니다. 또한 저는 가정 형편이 심히 어려웠고 앞길도 막막했습니다. 저는 군대소집 영장을 받아 세 번이나 갔었지만 편평족(마당발)이라는 이유로 세 번 모두 되돌아왔습니다. 5·16 혁명이 난 후였기 때문에 군대를 가지 못한 저는 앞길이 더 막막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무렵(1962년 5월), 저는 길을 가던 중 놀라운 체험(體驗)을 했습니다. 그날은 주일이었는데 당시 아내가 다니고 있던 광시침례교회에서 주관한 야외예배(장소: 살목산)에 참석하러 가는 길에 형광등 같은 불빛이 하늘에 나타났고, 그 순간 제 마음에 2개의 성경구절이 모래시계처럼 ‘쭉’ 들어오는 것 같은 체험을 한 것입니다.
그 두 구절은 바로 요한복음 8장 31절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라는 말씀과 요한복음 15장 7절의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때 저는 ‘아, 내가 성경을 이렇게 많이 읽었지만 마치 머리에 쇳덩어리를 이고 있는 것처럼 머리에 이고만 있었구나.’ 하고 깨달았습니다. 그때까지 성경을 75독이나 하고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도 했지만 제가 주님의 말씀에 거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 주간부터는 회개하는 마음과 기쁜 마음으로 충만하여 ‘주님의 말씀에 거하리라’고 결심했습니다. 무슨 말씀이든지 하나님의 말씀에 거하고, 그 말씀이 내 안에 거하시게 해야 하겠다는 마음으로 야외예배를 드리던 산에 올라가 예배에 참석한 사람들 앞에서 그날 길에서 있었던 체험을 간증했습니다.
거기서 그 교회 담임교역자를 처음 뵈었는데, 그분이 제 간증을 듣고는 환자를 위해 기도해 주로 함께 가자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을 따라 그날 오후에 환자가 있는 집을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환자의 방에 들어가셨을 때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제가 방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그 환자가 소리를 지르며 벌떡 일어났습니다.
그가 소리를 지르고 괴성을 지르는 바람에 저도 깜짝 놀랐습니다. 그런데 그가 일어나면서 “저 선생님이 들어오는데 내 속에서 시커먼 것이 확 나갔습니다.” 하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일이 소문이 나서 다음날부터 저에게 환자(患者)들이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한번은 충남 광시에서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어떤 여자가 걷지 못하는 일곱 살 먹은 아이를 업고 왔는데, 제가 그 아이의 어깨를 붙들고 있으면서 엄마에게 저쪽에서 불러 보라고 했습니다. 아이의 엄마가 아이의 이름을 불렀고 제가 아이를 놓자, 아이가 반듯이 걸어갔습니다.
저는 그 뒤로도 수십 명이 일어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아, 하나님의 말씀에 뭐라 했든지 그 말씀에 거해야 한다. 그리고 그 말씀이 내 안에 거하시게 해야 한다.’는 것을 일생 마음에 새기고 있습니다.
저는 뒤늦게 공부를 한 사람이기 때문에 누가 제게 무식하다고 비판하는 것에 대해서는 시인합니다. 그러나 신앙에 대해서 저를 이단이라 하는 것은 절대로 인정할 수 없습니다. 저는 대학의 문턱에도 가보지 않았을 때, 신학교만 겨우 입학했을 때부터 서울대학교에서 학생들을 모아놓고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이상훈 박사가 서울대학교 기독학생회의 지도 목사로 있을 때 저를 기독학생회 담임자로 정식 초청하여 8년 동안 학생들을 가르친 것입니다. 또 한국교회의 통합운동을 해야 하겠다고 생각하여 서울대학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부산기독학생회 주관으로 고신 측 삼일교회에서 집회를 했습니다.
그때는 장로교 고신측, 합동측, 통합측이 서로 간에 전혀 조화가 안 될 때였는데, 충현교회의 김창인 목사와 통합측 부산영락교회의 고 목사, 그리고 저를 강사로 하여 집회를 한 것입니다. 저희 세 사람이 강사로 나섰기 때문에 부산에 있는 고신측을 비롯하여 합동측, 통합측은 물론이고 침례교까지 교파를 초월하여 약 5천 명이 모여 훌륭한 집회를 할 수 있었습니다.
그 후 서울 종로에 있는 숭동교회에서 이런 집회를 한 차례 더 가졌는데, 그때도 약 5-6천 명이 모였습니다. 그때 저는 한국교회가 지성인들을 중심으로 한다면 하나로 모일 수 있겠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한국에 많은 목사가 있지만 대학에 가서 설교를 할 경우 한두 주간 이상을 못 넘깁니다. 당시에 서울대학교 학생은 일반인들에게 큰 학자들로 인식되어 있었던 데다가 목사들은 대학을 나오지 않고 신학교만 나온 경우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목사들이 공연히 유식한 체 하려고 ‘무슨적(的)’, ‘무슨적(的)’ 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학생들에게 별 영향력을 미치지는 못했기 때문에 한두 주 이상을 버티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서울대학교 학생들을 상대로 8년 동안 설교하고 가르쳤습니다. 저는 ‘무슨적(的)’, ‘무슨적(的)’ 하지 않고 오직 성경이야기만 했기 때문에 그렇게 역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신학교 재학 중에 전국을 다니면서 계속 전도집회를 했고, 신학교를 졸업하기 전에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이미 전국을 다니며 전도집회를 하는 동안 성공한 교회와 실패한 교회의 원인을 꼼꼼하게 정리해 두었던 저는 그 장단점을 잘 분별하여 목회해야 하겠다고 결심하고 서울성락교회를 개척했습니다.
어떤 분은 제가 귀신을 쫓는 것 때문에 교인이 많이 모인다고 생각하고 또 그렇게 말하기도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저도 개척교회 목회를 하되 정말이지 눈물나게 했습니다.
저는 7명의 교인으로 개척예배를 드렸습니다.
저는 10명도 안 되는 교인으로 시작했기에 마치 미친 사람처럼 ‘열 명 주옵소서!’, ‘열 명 주옵소서!’를 입에 달고 살았습니다. 버스를 타고 가면서도 ‘열 명 주옵소서!’ 하고 기도했고, 길을 걸으면서도 ‘열 명 주옵소서!’ 하는 기도를 쉬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초등학교 학생들이 제 뒤를 따라오며 ‘열 명 주옵소서!’ 하고 제 흉내를 내기도 하고, 어떤 노인은 제가 미친 줄 알고 젊은 사람이 안 됐다며 혀를 차기도 했습니다. 정말이지 아무나 붙들고 전도했습니다.
심지어는 사당동에서 객사한 사람을 30리 길이나 되는 신길동까지 업고 왔습니다. 트럭들은 안 세워주고, 택시는 약 500m 가다가 재수 없게 죽은 송장을 어떻게 차에 태우냐며 내리라고 하여 할 수 없이 밤새 비를 맞아가며 죽은 송장을 업고 30리 길을 걸어온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죽은 사람의 딸의 집에 도착했으나 사위가 객사한 송장은 집안에 들여놓을 수 없다고 하는 바람에 결국 우리 교회로 데려와서 교회에서 장례를 치러주었습니다. 그것은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또 한 번은 뚝섬으로 전도를 나간 적이 있습니다. 거기서 문둥이를 전도했는데 아무리 복음(福音)을 전해도 받아들이지를 않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에 그는 틀림없이 문둥병(나병) 환자였어요. 그래서 “나병이시죠?” 하고 물었더니 “아니요, 신경통입니다.’라고 대답을 하는 겁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나병인 것 같은데요.“라고 했더니, ”당신 일이나 하시오.“ 하며 퉁명스럽게 말했습니다.
그 사람은 이미 눈썹도 없고 얼굴 여기저기에는 고름이 가득했습니다. 그때 저는 주저하지 않고 얼굴의 세 군데에서 고름을 쫙쫙 빨아냈습니다. 이것도 역시 그 가족을 구원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랬더니 그 사람이 막 울더라구요. 그는 결국 우리 교회에 나왔습니다. 그의 부인은 우리 교회 전도사인데 지금도 살아 있습니다.
이처럼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해서 문둥이의 고름을 빠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해 죽은 송장을 업고 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시궁창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면서까지 송장을 업고 온 것은 영혼 하나를 얻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결코 귀신을 쫓아서 오늘날처럼 교회가 부흥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 교회를 지을 때는 돈이 없어서 한 겨울에 어머니가 사시던 집을 팔아 그것으로 교회를 지었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따로 제 집을 갖지 않고 교회당 한 켠에 방을 꾸며 살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제가 큰 교회 담임이라니까 어마어마하게 잘 사는 줄 알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또 많은 사람이 제가 많은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다고 오해하고 있습니다. 저는 30년 동안 교회당과 교육관을 100개나 지었지만 장사를 하기 위한 건물은 단 하나도 짓지 않았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제가 전화번호가 없다고, 또는 전화를 받지 않는다고 하여 저를 교주라고 말합니다. 이게 말이 됩니까? 아니 어떻게 전화를 안 받는다고 교주라 할 수 있습니까? 정말이지 글을 쓰더라도 무식해서는 안 됩니다. 적어도 상식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도 글을 쓰는 사람입니다. 저는 평생에 250권의 책을 쓰려고 몸부림을 치기 때문에 틈만 있으면 글을 써야 합니다. 그래서 공적인 것은 시간 약속을 하라 하여 만나지만, 사적인 전화는 받을 시간적 여유가 없습니다. 내 모든 시간을 아껴야 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매일 새벽 2시면 일어나서 글을 쓰고 기도합니다. 틈만 있으면 낮에도 글을 씁니다. 저는 제 인생을 하나의 작품으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제게 주어진 모든 시간을 아껴 씁니다. 이렇게 꾸준히 저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1972년 당시에 우리 교회 부목사 중에 서울대 언어학 교수로서 장신대에 가서 헬라어를 가르치던 이상훈 교수가 있었습니다. 그분은 통합측 장로교회에서 3대째 신앙을 이어온 의성 사람이었습니다.
그분이 장신대에서 헬라어를 가르치면서 성경에 관한 여러 가지 얘기를 하자, 학생들이 그런 말씀을 어디서 들었느냐고 물었고, 이에 그가 저한테서 배운 것이라며 학생들이 제게 와서 배울 것을 권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장신대 학생들과 서울대 학생들을 합하여 열 명이 매주 토요일에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중에는 장신대 교무처장으로 있다가 지금은 소망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김지철 박사,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 김기홍 박사, 주안장로교회의 나겸일 목사, 장신대 교수로 있는 장영일 박사 등이 있습니다. 이들이 모두 제 제자입니다.
그리고 명성교회의 김삼환 목사, 제게 5년 동안이나 배운 연세중앙교회의 윤석전 목사도 있습니다. 또 합동 측에 속한 도봉동 성실장로교회를 담임하고 합동측 노회장까지 지냈던 고(故) 우희영 목사도 제가 청년 때 그를 데려다 4년 동안 등록금이며 기숙사비까지 다 대주며 신학교 공부를 시켰습니다. 그런데 제가 핍박을 받고 있는 처지라 그가 저를 찾아오는 것도 말렸고, 제가 그를 찾아가지도 않았습니다.
그랬는데 지난번에 그가 죽어서 장례 치르는 날에 장지(葬地)에만 잠깐 다녀왔는데, 거기서 그 사모님을 만났습니다. 그때 사모님이 저를 붙들고 몹시 울었습니다. 이와 같이 억울한 이단 정죄가 얼마나 많은 사람을 힘들게 하는지 모릅니다. 지금 제가 말한 사람 중에 이단이 있습니까?
이렇게 첫 해에는 장신대 학생들을 중심으로 했고, 그 이듬해에는 총신대 학생들을 중심으로 했습니다. 당시 저한테 와서 배웠던 총신대생 중에 현재 교계의 중진들이 있습니다. 언젠가 그들의 이름을 밝힐 날이 오겠지만, 지금은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 말하지 않는 것뿐입니다.
이렇게 해서 약 60명의 학생이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에 합동측과 통합측을 비롯하여 각 교단 목사님들이 와서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탁명환 씨가 소개한 한만영 씨와 이명범 씨가 와서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탁명환씨를 처음 만난 것은 1972년이었는데, 그가 처음 우리 교회를 찾아왔을 때는 매우 겸손했습니다. 그가 저한테 와서 이단 분별하는 법을 가르쳐 달라고 해서, 그때 제가 성경이 말하는 이단에 대하여 몇 가지를 얘기해 주었습니다.
그 후 그가 약 6-7년 동안 제 설교 테이프를 가지고 다니면서 사용했습니다. 그를 통해 한만영 씨를 소개받았고, 한만영 씨는 저를 찾아와 성경공부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침례교 교인이었던 이명범 씨도 저를 찾아와 성경공부를 했습니다.
그래서 평신도로서는 이 두 사람이 열심히 배웠습니다. 그리고 이 중에 한만영 씨가 나중에 우리 교회에 와서 저를 도우면서 열심히 하다가 개척을 했습니다.
그때 탁명환 씨는『현대종교』라는 잡지를 발간하고 있었는데, 제게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이에 개척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매우 어려울 때인데도 저는 매월 4만원씩 빠지지 않고 도와주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가만히 보니까 그 잡지에 자꾸만 기성교회의 목사들을 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렇게 하지 말라고 권면했습니다. 그는 제 앞에서는 알았다고 대답했지만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제가『현대종교』에 대한 지원을 끊겠다고 미리 얘기하고 1983년부터 지원을 끊었습니다. 그러자 1984년 3월인가 4월부터 ‘김기동은 이단이다’라는 기사를 내보내기 시작했습니다. 재정 지원을 끊자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래서 후에 하얏트호텔에서 다시 한 번 그를 만났습니다. 그때 그는 자기가 어디를 다녀온 사이에 다른 사람이 그렇게 한 것이라며 앞으로 주의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도 그는 계속해서 저를 이단으로 몰아세웠습니다.
제가 호를 시무언(視無言)이라고 했는데, 그렇게 지은 이유가 있습니다. 1962년, 아직 신학교도 다니지 않을 때 저는 이미 10개 교회에 부흥회를 다녔습니다.
어느 날 광시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조그만 교회에서 어느 감리교회 목사님이 부흥회를 인도하신다고 하여 참석했습니다. 그런데 그 목사님이 제가 ‘평신도 부흥사’라는 것을 들어서 알고 계셨는지 그날 설교 시간에 “신학교도 안 나온 것이 건방지게 부흥회를 하고 설교를 한다.”며 저를 겨냥하여 마구 뭐라 하는 것입니다.
그럴지라도 그날 은혜를 받고 거기서 철야하고 새벽기도까지 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냇가에서 밤 만한 크기의 돌 하나를 주워 입에 물었습니다. 그리고는 마음에 ‘나는 평생에 절대로 남 욕하지 말아야겠다. 보아도 말하지 말자’고 마음먹고, ‘볼 시’(視), ‘없을 무’(無), ‘말씀 언’(言) 해서 ‘시무언’(視無言)이라고 호를 지은 것입니다.
그 호를 실제로 사용한 것은 1980년 이후이지만, 마음에는 ‘시무언’(視無言)을 새기고 7개월 동안 돌을 물고 다녔습니다. 밥 먹을 때와 설교할 때만 빼고 계속 물고 다녔습니다. 누가 옆에서 얘기하건 말건 아무 소리 하지 않고 계속 물고 다녔습니다.
그 후 탁명환 씨가 저를 욕할 때 돌을 다시 주워 입에 물었습니다. 그때는 8개월 동안 물고 다녔습니다. 누가 뭐라 말하든, 내가 손해(損害)를 볼지라도 입에 돌을 물자고 결심했습니다. 성경에도 경건하다 하고 입에 재갈을 물리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으니, 입에 돌을 물고 다니자 하여 8개월을 물고 다닌 것입니다.
한편 1970년대 말부터는 침례교회에 있던 원세호 씨가 저를 욕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유인즉 분명치는 않지만 저희 쪽에서 베뢰아성서신학교를 운영하려 했는데, 원세호 씨가 운영하는 은혜신학교에 다니던 학생들이 자꾸 우리 교회로 옮겨왔습니다. 그래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자꾸 저를 비판(批判)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본래 침례교회 내에서 여러 번 갈등을 일으킨 인물이었습니다.
당시 우리 침례교단의 총회장은 이상모 목사였습니다. 저는 침례 교단의 부흥사협회 회장이었는데, 부흥사들을 찾아다니며 교단 소속 교역자들을 위한 심령부흥회를 열자고 제안했습니다.
그래서 당시 침례교부흥사협회 증경회장인 오관석 목사와 지덕 목사, 그리고 제가 각각 추렴하여 일산의 어느 기도원에서 제1회 전국교역자영적무장성회를 열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총회장인 이상모 목사가 대만에서 전화를 해서는 ‘영적무장성회 때 자기가 첫날 설교를 하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부흥사협회 증경회장인 오관석 목사께 이 사실을 상의했습니다.
이에 대해 오관석 목사님은 ‘부흥사들이 돈을 내서 성회를 여는 것인데 부흥사도 아닌 사람이 왜 설교를 하느냐?’며 그냥 진행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저는 이상모 목사를 설교 순서에는 넣지 않고 축사만 하도록 해 놓았습니다.
그런데 대만에서 돌아온 이상모 목사가 순서에 자기 이름이 빠진 것에 흥분하여 저를 찾아와서는 ‘내가 가만 두지 않겠다.’며 몹시 화를 내며 갔습니다. 그 일이 있고 이틀 후, 성회 중에 오관석 목사님이 저를 불러서 이상모 목사가 조사위원회를 만들어 저에 대하여 조사하려고 한다며 조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까지도 저는 별로 개의치 않고 성회를 잘 마쳤습니다. 그런데 급조된 총회 조사위원회에서 저를 불렀습니다. 이때 ‘귀신이 불신자의 사후 존재’라는 것과 ‘아담 이전에 인류가 있었다.’는 것을 가르치지 말라며 자기들이 미리 준비해 놓은 각서에 서명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읽어보니 그 내용이 너무 심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것은 나의 연구(硏究)이고 주장이지 침례교회의 교리가 아니다. 침례교회의 교리로는 가르치지 않겠다.’고 직접 각서를 썼습니다. 그때 원세호 씨는 나오지도 않았습니다. 저를 만난 적도 없습니다.
그 후 원세호 씨가 저에 대해 조사하고 다닌다는 말을 들었지만 사실 저를 조사한 적도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이 총회장인 이상모 목사의 화풀이로 빚어진 일이었습니다.
그 후 제가 부총회장 선거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당시 침례교에는 침례교 신학교를 나온 정과 출신, 침례교 신학교를 나오지는 않았지만 여름과 겨울에 약 1개월씩 계절학기로 공부한 교육원 출신, 그리고 타 신학교 출신, 이렇게 세 그룹이 있었습니다. 저는 타 신학교 출신에 속했습니다.
오관석 목사가 침례교 본과 출신으로 총회장을 역임했고, 그 뒤를 이어 교육원 출신의 지덕 목사가 총회장을 지냈습니다. 그런데 이제 적임자를 찾지 못하자 사람들이 저에게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당시에 침례교는 제2부총회장과 제1부총회장을 거쳐 총회장에 나갈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3년 후에 총회장이 되도록 그 해에 부총회장 선거에 나가라고 적극 권유했고, 저는 그 의견을 수용하여 부총회장 선거에 출마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볼 때 당시 침례교회의 선거 풍토가 너무 천하고 지저분하게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우리 침례교가 이래서는 안 된다. 돈 안 쓰는 선거를 치르자’는 취지의 편지를 전국에 있는 교단 목회자들에게 여섯 차례나 보냈습니다.
그런데 선거일로부터 20일 전에 입후보 하지 않은 자는 후보 자격이 없다며, 총회사무실에서 선거 당일에 저의 후보 자격 박탈을 알리는 공고를 냈습니다. 그래서 저는 순간에 무자격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총회장이 되어 무슨 정치를 하려던 것이 아니었고, 나를 필요로 하기에 일하려고 했던 것이기 때문에 크게 개의치 않았습니다. 그런데 투표 결과 무자격자인 저의 이름을 적어낸 사람이 전체 투표자의 40% 정도나 되었습니다.
그것이 그들에게는 커다란 충격과 위협이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그 일이 있고 나서 저를 선거에 나오지 못하게 하려고 총회장 선출방식을 중앙집권제로 바꾸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중앙위원회에서 총회장(總會長) 후보를 내어 총회에서 인준만 받는 식으로 총회장 선출방식에 관한 규약을 개정하려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침례교의 총회장 선출방식이 아니었습니다.
제가 장로교 신학을 했으면서도 침례교로 간 것은 자유가 있기 때문이었는데, 그 자유를 박탈하려 한 것이었습니다. 결국 그들이 중앙위원회를 만들어서 노창우 목사가 8개월 동안 공청회를 거친 후 그 이듬해인 1987년 5월에 긴급 임시총회를 소집하여 개정된 규약을 통과시키려 했습니다.
이에 저는 침례교의 자유가 박탈되는 것을 묵과할 수 없어서 두 차례에 걸쳐 전국에 있는 교단 목회자들에게 ‘임시총회는 총회보다 더 무서운 것이다. 임시총회는 모인 사람들의 의견으로 모든 것이 결정되는 것이니 한 사람도 빠지지 말고 참석해야 한다. 이것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 우리 침례교다’라는 취지의 서신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서신을 보내고 나서 미국의 서남침례대학에 ‘김기동교회성장학석좌’라는 학과를 설치하는 것과 관련하여 학위를 받기 위해 미국을 방문해야 했기 때문에 임시총회에 참석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임시총회에 대의원의 90% 이상이 참석했고, 결국 중앙위원회에서 8개월 동안 공청회를 거쳐 준비한 규약은 상정도 하지 못한 채 무산되고 말았습니다.
제가 미국에서 돌아오자 노창우 목사가 저를 만나자고 연락을 해왔고, 만난 자리에서 노 목사는 자기의 일을 방해했다며 저에게 보복하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 침례교회가 잘 되자고 한 것 아니냐’고 말했지만, 머지않아 저를 핍박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해 9월, 김충기 목사가 담임하고 있던 강남침례교회에서 열린 총회에서 김충기 목사와 원세호 씨가 제게 이단성이 있다며 성토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더 이상 내 문제를 가지고 왈가왈부할 것 없다고 하고는 신상발언을 했습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저는 1963년에 비봉감리교회에서 서리 전도사로 시무했습니다. 제가 용문산에서 40일 금식기도를 마치고 돌아와 뼈만 남아서 일어나지도 못하고 사택에 있을 때, 당시 김충기 전도사를 우리 교회 부흥회 강사로 초청했습니다.
강사였던 김충기 전도사는 부흥회 동안 침례에 대해 계속 강조했고, 감리교회 교인들 120명을 데리고 가서 침례를 주었습니다. 전도사가 침례를 준 것이나, 타 교회 교역자가 세례주는 감리교회에 와서 침례를 준 것은 엄청난 문제였습니다.
이 문제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예산지방회에서 저를 세 차례나 소환했습니다. 그들은 김충기 전도사가 침례를 주었다고 말할 것을 제게 거듭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김충기 전도사가 침례 주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면, 이는 감리교단에서 침례교단에 항의할 사안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김충기 전도사도 살려야 하고, 침례교단과 감리교단 사이에 문제가 생겨서도 안 된다는 생각에 세 차례 재판을 받으면서도 끝까지 제가 침례를 주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렇게 제가 뒤집어쓰고 감리교를 떠난 것입니다.
이렇게 침례교를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에 그 모든 물의를 감수하고 뒤집어 쓴 채 오늘까지 왔는데, 오늘 김충기 목사가 이렇게 얘기하는군요. 제가 이렇게 침례교를 사랑하지만, 더 이상 제 문제로 소란을 피우지 마시기 바랍니다. 저는 정치도 싫은 사람이니 염려하지 마십시오.“
이렇게 신상발언을 한 후 탈퇴서를 쓰고 그 자리를 나왔습니다. 그것으로 모든 것이 다 정리된 것입니다. 이로써 침례교단을 탈퇴한 것입니다. 그 후 침례교에서 나온 몇몇 목사들을 비롯하여 다른 교파에 속한 목사들, 독립교회 목사들이 찾아와서 총회를 만들자고 건의하여 그 해 11월 9일에 남침례회라는 이름의 교단을 결성했습니다.
남쪽에서 시작했다는 의미에서, 그리고 언젠가는 침례교로 돌아간다는 계획 하에 남침례회라 한 것입니다. 이렇게 침례교단을 탈퇴한 지 한 달여 만에 남침례회란 교단을 결성하자, 침례교단에서는 총회의 결의도 없이 총회사무실에서 저를 이단으로 정죄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무엇이 이단이냐?’고 공개질의를 했지만 아직까지 답변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무조건 이단이라 한 것입니다. 제가 시무언이라는 것 때문에 손해도 많이 봤지만, 오늘까지 인내로써 견디는 것입니다.
또 한 번은 제가 미국의 아리조나 주(州)에 있는 장로교 통합측 교회(담임: 지우영 목사)에 부흥회를 인도하러 간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부흥회를 인도하러 미국에 온다는 소식을 들은 한국의 침례교 출신 목사인 김수명 목사(피닉스 제일침례교회 담임)가 저와 상의도 없이 제가 자기 교회에서 부흥회를 인도한다고 신문에까지 광고를 냈습니다. 그 때문에 저의 스케줄이 중복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김수명 목사에게 왜 그렇게 했는지를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는 ‘침례교 목사가 침례교회에 와서 부흥회를 해야지 왜 장로교회에 가서 부흥회를 하느냐’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당신과 약속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하자, 대뜸 약속하지 않았으면 어떠냐고 대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저는 이쪽도 저쪽도 갈 수 없어서 어느 쪽도 가지 않고, 감리교회의 초청을 받아 감리교회에서 부흥회를 하고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랬더니 나중에 김수명 목사가 서울에 있는 ‘크리스챤신문’에 저에 대하여 욕하는 글을 기고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를 만나서 이유를 물었더니, 그가 ‘미안하다. 사람이 화가 나면 그럴 수 있지 않느냐? 용서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도 계속 저를 핍박했습니다.
그 후 사방에서 저를 이단이라고 핍박하기 시작했으나, 이렇게 심각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장로교 통합측에서 이단이라고 한 후 여기저기서 이단이라고 했고, 총회가 생기기만 하면 저를 이단이라고 발표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강춘오 목사에게 토론회를 제안한 적이 있습니다. 비록 저희 교단이 그리 크진 않지만 그래도 제가 총회장이고 신학교 학장이니까 총회장이나 신학교 학장 급에서 토론회를 하자고 제안한 것입니다. 그리고 토론회에는 다른 것 가지고 나오지 말고 오직 성경 한 권만 놓고 하자고 했습니다.
이에 강춘오 목사도 좋은 생각이라며 이를 추진하겠다고 했으나, 토론회에 나오겠다는 사람이 없어서 무산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기독교 언론연합회 주관으로 하자고 했으나, 그것 역시 성사되지 않았습니다. 저는 현재 대한민국 정부가 인가한 베뢰아국제대학원대학교 총장입니다. 이에 지금도 신학교 총장이나 총회장 급의 토론회를 제안하는 바입니다.
사실 신학자 중에 저를 이단이라 하는 이는 하나도 없습니다. 다만 탁명환 씨와 단국대 교수로 있던 쥬영흠 씨가 악의적인 목적으로 책을 한 권 낸 적이 있습니다.
내용인즉, 이용도 목사와 오경린 목사와 문선명 씨를 한 계보로 엮어 놓은 것입니다. 즉 이용도 목사가 이단인데, 그의 밑에서 오경린 목사와 문선명 씨가 나왔고, 오경린 목사에게서 김기동 목사가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용도 목사나 문선명과 마찬가지로 저도 이단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를 감리교 전도사로 파송하셨던 이강산 목사님을 찾아가서 이용도 목사님과 오경린 목사님이 어떤 관계인지 여쭤봤습니다. 그랬더니 이강산 목사님이 ‘오경린은 협성신학교 나오고 일본에 유학을 가서 십 수 년 있다 왔는데, 언제 이용도 목사를 만난 적이 있겠느냐?’며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했습니다.
사실 저 때문에 오경린 목사님이 욕을 먹기 때문에 매우 죄송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한편으로는 감리교에서도 그 책을 봤을 텐데 왜 감리교 감독까지 지내신 분을 감리교단에서 보호하지 않으시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책이 지금도 있습니다. 이용도 목사를 이단으로 정죄해 놓고 그에게서 오경린 목사와 문선명이 나왔고, 오경린 목사에게서 제가 나왔다고 하여 이단이라는 것이니, 어떻게든 이단을 만들기 위해 갖은 모략과 수단을 다 사용한 것입니다.
이런 일을 겪으면서 이단으로 정죄 받는 것이 매우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했습니다. 사람들은 칼춤 추는 자 앞에서 무서워 벌벌 떨지만, 정작 그 칼에 찔린 사람은 상처가 대단합니다. 그것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습니다.
현재 대법원장으로 있는 이용훈 씨는 본래 저희 교회 장로였습니다. 그의 딸이 혼인을 약속받아 놓고도 이단 교회 장로의 딸이라는 이유로 결혼이 성사되지 못했습니다. 그 뒤로도 이단 교회에 다닌다는 이유로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그분의 딸은 소망교회로 옮겨 갔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저를 찾아와 딸의 결혼 문제로 심히 고민할 때, 저는 오래 생각할 것도 없이 우리 교회를 떠나라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그분이 딸의 결혼 문제로 저희 교회를 떠난 것이 2000년 1월의 일입니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그분이 제 말에 굉장히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또 학생들의 경우에는 좋은 점수를 받고도 성락교회 다닌다는 이유로 면접(面接)시(時) 불이익을 당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렇게 결혼 문제로부터 대학 진학의 문제까지 제가 시무언 한 것 때문에 성도들과 그 자녀들이 당하는 불이익은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저는 오늘까지 ‘시무언’(視無言) 하며 인내해 왔습니다.
제가 예전에 신문에도 우리의 신앙고백을 밝힌 적이 있지만, 우리 기독교베뢰아교회연합 총회의 이상과 주장은 기침(기독교한국침례회)의 그것과 똑같습니다.
저는 장로교단인 대한신학교에서 11년간을 공부했기 때문에 그 신앙이 제 안에 고스란히 배어 있습니다. 또 제가 신앙고백을 언론을 통해 여러 차례 밝혔으나 여러 언론들은 전혀 관심을 갖지 않았습니다.
제가 언론사들이 겪는 어려움을 모르는 바는 아닙니다. 언론사들이 대부분 영세하기 때문에 적은 이권(利權)을 나눠 먹기 식으로 하다 보니 매우 어려운 줄 압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저도 언론사를 하나 설립했지만, 기자들을 만날 때마다 ‘우리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거듭 당부합니다. 기자들은 그저 막 써버리면 그것으로 끝이라고 생각할지 모르나, 결코 언론의 사명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언론사 기자들이 갖추어야 할 것이 몇 가지 있습니다.
우선, 기자들은 신앙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현재 교계 언론사 기자들 중에는 신앙 없는 자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보호하기는커녕 아무렇게나 글을 써서 교회에 어려움을 줍니다. 저도 국문과에서 공부한 사람이지만 현재 언론의 행태는 대단히 실망스럽고 잘못되었습니다.
오늘 여기 참석하신 기자 분들도 이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사실 우리 교계 언론이 한국교회를 이렇게 어지럽게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언론들만 제자리를 지켜 주었어도 지금처럼 해마다 두세 교회씩 이단으로 정죄 받아 한국교회가 혼탁해지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 동안 제가 ‘혹 잘못된 부분이 있으면 시정할 것입니다. 성경적(聖經的)으로 잘못된 부분이 있으면 말씀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시정할 것입니다.’ 하고 거듭 말해왔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오늘 한기협에서 여러분과 만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주셔서 이렇게 말할 수 있게 된 것을 감사합니다. 또 저 때문에 많은 시련을 당하고 계신 성중경 대표회장님과 여러분들께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제가 겪어온, 그리고 한국교회가 갖고 있는 현실인 줄 아시면 좋겠습니다.
여기 계신 여러 언론사 기자 분들도 한국교회를 위하여 교회들에게 상처를 주지 않도록 힘써 주시기 바랍니다. 교회에 상처를 주면 불신자들이 교회 오지 않습니다. 그러니 조금만 더 깊이 연구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러면 교회들도 언론을 사랑하고 언론에 의해서 교회가 바로 세워질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제가 언론에 의해서 이단으로 매도되고 정치에 의해서 이렇게 되었다는 아픈 상처를 가지고 있어서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제가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그동안 저로 인해 손해 본 사람들이 있다면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지금껏 한국교회가 이단이라는 것에 너무 집착하여 발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단이라는 문제 때문에 한국에서 저희 교단이 성장하는 데도 상당한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저희는 부지런히 일하고 있습니다.
제가 그동안은 한국에서 가르쳐 왔으나, 현재는 해외 약 70개국의 10만여 명의 목회자가 저에게 배우고 있습니다. 성경에도 여기서 핍박하면 먼지를 떨어버리고 저리로 가라 하신 것처럼, 제 나이도 많이 찼기 때문에 이제 하나님이 주신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는 모르나 그때까지 열심히 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렇게 좋은 기회를 주셨고, 또 우리가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면 한국교회를 위해 더욱 부지런히 일할 것입니다. 제가 마지막으로 여러분께 부탁하거니와 저는 뿔 달린 사람이 아니고 순수한 사람이요, 또 많은 피해를 본 사람이오니 발길질 하지 마시고 애정을 갖고 대해주시기를 바랍니다. (끝)
첫댓글 저는 이 글을 읽고 참으로 은혜를 받았습니다. 저의 신앙이 너무 부끄럽고 누가 이단이고 참단이고를 떠나서 신앙생활 하신것은 어는 신학보다 더 훌륭한 과정을 거쳤다고 생각 되어집니다. 이 모든 것이 진실이라면 저 또한 이분에게 성경을 배우보고 싶습니다. 저또한 이단중에 이단에 빠져서 신앙을 했던 사람입니다. 정석으로 가는길은 은혜와 감동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풀어내는 사람이 교수로 부터 배워서 귀신을 쫓고, 성령의 은혜를 주진 않습니다. 문제는 종말에 "내가 기다리던 그로다", "재림주" 이러면 글쌔 어떻해야 해요?
오직 기도로 깨어 그 영혼이 잠시도 졸지 않아야 할 것이지요... 오직 깨어 분별하는 자가 되어야 할것입니다... 보혜사 성령에 푹 젖은 자라면 더욱 안전할 것입니다..
장문의 글...자료.... 모두 잘 읽었습니다.... 저는 김기동 목사님에 대하여는 잘 모르지만..... 한기협의 회장이신 성중경목사님과는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습니다... 작년에 만도 두 번 중국의 저 있는 곳을 다녀가시면서 함께 많은 의견들을 나누었습니다....
전 봉선교사님, 온라인상에서 뵙지만, 많은 글들을 통해 하나님의 사람이라는것을 믿습니다....영은 영끼리 분별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평신도 선교단 카페와 함께 겸손하며 영적으로 성장하는 사람이 되고싶습다...
세상에 많은 자들이 일어섰지만... 그 가운데에서 참과 거짓을 분별하라 하시었지요... 많은 영혼들이 불리움을 얻고 가르침을 받지만... 그 가르침들이 분분히 갈리워 있음도 선명함이지요... 결국 그 가르침들에 따라... 성도들의 일생의 삶들이 갈리울 것이구요....
가장 크게 분류해 본다면... 큰 한 무리는 육의 것을 좆고... 작은 한 무리는 십자가를 좆는것 같습니다.... 저마다 열심은 열심이지만.... 한정된 자기의 것들을 마치고.... 결국은 한번은 계수하여야 할 그 날을 맞을겝니다... 누구던지 먼저 깨어 먼저 좆는자가 귀한 인생을 허비하지 않는 지혜로운 자가 될것 같습니다...아멘
귀한 인생을 허비하지 않는 지혜로운자가 되기을 주님께 기도합니다..오직 셩경에 말씀에따라 ..진리에 말씀을 사무합니다..인간들이 각자의 해석에따라 조금씩 차이점을 보이고 잇지만...오직 성경속에 잇는 말씀그대로 을 원합니다..이단...이단..성경에도 많은 이단에대한 글들을 보았읍니다..늘영적으로 깨어 기도하는자가 되기를 바랍니다...주여 죄인을 인도하였주옵소서,,
아멘... 저마다의 각기 다른 풀이들에 귀를 기울이기 보다는... 예수님께서 친히 선포하신 말씀들을 더더욱 깊히 깊히.. 묵상하는 것이 좋을듯합니다... 초대교회들의 회개하고 따른 무리들은 결코 신학자들이 아니요... 당대의 무식자요 평민들이 대부분이었지요... 신학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요... 단지 예수님의 친언 가운데 이미 완벽한 진리가 차고 넘침이지요... 결코 어렵지 않은 그것을...많은 신학자들이 서로 다른 주장을 펼쳐 두어.. 결국은 듣는 이들을 어렵게 하였음을 부정할 수 없게되었지요....
인간의 학설은 모두 오류가 있기 마련입니다. 조금 주장이 다르다고 해서............ [지옥에나 가라]고 저주를 퍼부어서야 되겠습니까? 영판 다른 복음이 아니라면.. 걍 봐줘야지요.. [예수가 그리스도로 오셨다], [그피로 죄사함 받고 성령을 모신 자녀가 되었다], [자녀들이 누릴 권세와 능력이 있고 그것으로 원수마귀를 대적하고 물리친다]등등.. 크게 다르지 않다면.. 형제로 여겨야 합니다.
아멘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