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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로울 수 없겠구나
본교가 분교로 강등됐다가 오래 가지 않아서 폐교되고 마는 것이
시골 초등학교의 현실인데 좌항초등학교는 보장을 받았는가.
특화 지향에, 특히 축구부가 열성적인 듯 운동장이 인조잔디다.
초등학교 앞에서 잠시 망설였다.
한남정맥과 좀 더 오순도순, 함께 하려면 원삼면 소재지로 많이
우회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용담저수지를 지나 사암리(沙岩), 고당리(高塘) 경계까지 갔다.
인조잔디 운동장의 좌항초교
<장수농원은 이름을 사암농원으로 바꿨나.
안골에서 넘어오는 새 길, 넓힌 길, 삼거리가 되어 혼란스럽네.
새로 들어서는 거창한 법륜사(法輪寺)에 깔린 문수봉자락의 신음
소리가 들리는 듯 해 애가 탔던 때가 벌써 4년 반이 더 지났구나.
오른 손을 들면 문수봉이 잡힐 듯 하고 동남쪽으로는 기상연구소,
두창리고개, 구봉산으로 뻗은 한남정맥이 한 눈에 가득차 온다.
옛길이고 뭐고 다 집어치우고 달려가고 싶다.>
고백컨대 아무리 살래질로 부인하려 해도 대간과 정맥들이 거기
그대로 있는 한 나는 그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나.
그렇다.
오로지 대간에서 정맥으로, 산에서 산으로, 무한히 누비는 것만이
한 늙은 이의 사모곡이고, 이 사모곡만이 지고의 선이다.
옛길을 걷는 것은 단지 궁여지책의 차선일 뿐이다.
그러므로 나는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마음 다잡고 발길을 17번국도쪽으로 돌렸다.
길따랗게 늘어진 기상연구소를 부러 외면하고 부지런히 걸었다.
황토현(두창리)장수마을 탈출지점에서 곁눈질로 한 번 훌터봤을
뿐 백암까지 일로매진했다.
바이패스(by-pass) 국도를 버리고 백암면소재지로 갔다.
어제 김량장 앞에서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말했는데 오늘 또다.
오늘은 11일, 백암(白岩) 장날이라 조그만 도심이 바글거렸다.
옛부터 백암장(白巖場)이 있던 지역이다.
어제, 김량장 장에 판을 벌였던 장꾼들이 여기 백암까지 오려면
꼭두새벽부터 영남대로가 꽤 소란했겠다.
17번국도에서 본 기상연구소는 둥근 물체의 지붕들만 보인다
백암 순대국이 유명하다기에 부러 순대국집만을 고집했다.
백암리의 <백암 본가순대>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
소문과 값이 식욕을 불러오지는 못했다.
순대국집 이미지가 전혀 없는 대형식당의 정갈한 음식이 드럼통
식탁 위의 찌그러진 양푼비빔밥만 못했으니까.
오용환과 황규열
원(院)터라는 원대마을 조금 지나 17번국도와 합류하는 지점의
백봉리 오일뱅크(주유소)에 들어갔다.
아차고개에서 그랬듯이 약먹을 물을 얻으려고.
가을인데도 햇살이 어찌나 따가운지 그늘이 좋은 시간이었다.
국가적 불황은 시골 주유소들에도 큰 타격을 주고 있다.
목이 특별히 좋은 곳 아니면 위기에 직면해 있다.
이 집도 주유 차량이 뜸하나 배달 단골로 유지된다고 했다.
40대(?)의 '오용환'은 늙은 길손에게 각별했다.
마치 사람이 그리운 듯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어 했다.
성장 과정과 여기에 있게 된 사연까지 술술 털어놓았다.
그가 오너(owner)냐, 고용인(雇傭人:employee)이냐는 길손의
관심사가 될 수 없다.
화려했던 때에 대한 향수를 기름옷으로 극복하려는 그의 의지에
찬사와 격려를 보낼 뿐이다.
냉동 물병을 배낭 옆구리에 꽂아주던 그와의 재회를 기대한다.
국도 확장과 직선화 공사에서 밀린 자투리 길, 개울길 등이 나타
나면 적잖이 돌더라도 예외 없이 국도를 이탈했다.
마을길, 경운기 농로도 꾸준히 활용했다.
오용환의 주유소를 떠나 얼마쯤 갔을까.
아직도 백봉리(栢峯)인데 도로 확장공사로 일부가 잠식된 듯한
마을(백봉3리, 입남?)의 작은 수퍼에서 메로나를 먹었다.
마을 속의 높다란 십자가탑 교회가 어필(appeal)해 왔다.
젊은 여주인은 <한국기독교장로회 백봉교회>라 했다.
넌즈시 물었더니 114년의 역사를 가진 교회라며(1894년 창립)
아주 호의적이었다.
그러면 그렇지, 그 교회 신도란다.
한국 장로교의 일반적인 신앙행태는 열광적 도취형이며, 보수가
지나쳐 수구적이다.
이에 비해 이 교단은 이지적이고, 진보색이 농후해 교세(敎勢)가
답보상태인데 이에 소속된 교회를 삼남대로 해남을 포함해서 두
번째 보게 되니까 특별한 생각이 났다.
인간은 천성적으로 종교적 동물이라고 말한 이가 있다.
그 말을 전제로 한다면 나의 종교적 성향은 이들과 같은 진보파
기독교편이라 할 수 있겠다.
잠시 사상적 유회를 한 후 얼마 가다가 고안리(高安)로 내려섰다.
국도 진입 탈출의 마을(주천마을?) 길이다.
오토바이를 타고 오던 영감이 내 앞에서 발동을 껐다.
자기는 이 마을에서 15대째 살아오는 67세 황규열이랬다.
황희 정승의 직계 후손임을 강조하기도 했다.
저 앞에서 나를 보고 내 용모에 반했다나.
자기보다 7년 연상에 옛길따라 부산가는 길손임을 듣고는 뿌리칠
수 없을 만큼 더욱 말 나누고 싶어 했다.
오늘 숙소가 주유소의 오용환이 알려준 죽산의 찜질방 '건강나라'
임을 듣고는 바로 지근에 있다며 더욱 붙들었다.
하긴, 수도권이라고는 하나 자식들 다 떠나 휑한 시골 집에 늙은
양주만 살고 있으니 사람이 그립기도 하겠다.
부익부 빈익빈, 양극의 현장
곧 용인을 뒤로 하고 안성시(安城)에 들어섰다.
백암면 고안리에서 일죽면(一竹) 방초리(芳草)로.
죽산면(竹山)에 들기 전 잠시 밟고 가야 하는 일죽땅이다.
대로를 걷는 동안 자주 느끼는데 지방자치제 시행 이후 기초단체
홈피(internet)처럼 버스정류장에도 그 지방 특색이 배어 있다.
주위에 다섯 마을이 있어서 오뱅이라는 오방(五芳)마을 교차로를
건너 좌측통행으로 바꿨다.
나는 남들의 권고를 외면하고 줄곧 우측통행만을 고집하고 있다.
차량과 충돌했을 때 정면보다는 후면이 대미지(damage)가 적을
것이라는 인체공학적 판단에서다.
그러나, 매산리(梅山) 건강나라에 가려면 그래야(좌측통행) 한다.
17번국도 자동차전용도로 구간이라 건널목이 없기 때문이다.
골프장으로 착각할 만큼 너른 초장(草場) 깊숙히 자리잡고 있어
마치 클럽 하우스(club house) 같은 찜질방이다.
하늘과 맞닿은 투명지붕, 외부인에 개방된 초대형 식당과 널따란
공부방까지 갖춘 상상 초월의 호화 찜질방이다.
입욕료도 시설에 상응하겠다는 건지 1만3천원이다.(평일 1만원)
삶의 질적 향상을 의미하는 단어가 되어버린 소위 '웰빙'(well-
being)을 목욕탕에서 느끼려는 건가.
소도시 외딴 곳이며 비싼 요금인데도 유소년들을 대동한 가족 등,
집단적으로 북적거리는 현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찜질방 건강나라
'건강나라'의 입욕료는 내 경우, 고가(高價)의 신기록이다.
이처럼 거금 들인 호화 시설의 밤이었는데도 온 몸이 무거웠다.
부익부 빈익빈, 양극화가 유감스럽게도 전국적 평준화 현상임을
대중시설에서 확인했기 때문일 것이다.
대간 정맥 등 산탈 때의 일은 접어두고 옛길에서도 전국 찜질방을
섭렵하듯 드나들며 길걷던 옛분들을 연민하곤 했다.
나그네에게는 이보다 더 안성맞춤인 웰빙장소가 없는데 그분들은
누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서울 영감이 안성땅에서 이런 안성맞춤을 누리지 못하고
기(氣)가 꺾였나 저기압 상태니 말이다.
그림같은 초원의 싱싱한 새벽 공기도 별무 효과였다.
길손의 활력은 역시 길을 걸음으로서만 상승되는 것.
죽주산성 앞에 이르러서는 또 욕심이 발동하려 했다.
새벽부터 372m비봉산의 산성에 끌리고 있으니.
고려때는 몽골군을 물리쳤고, 임진왜난 중에는 왜군과 빼앗기고
뺏는 치열한 전투끝에 왜군을 격퇴시킴으로서 이 지역을 넘보지
못하게 한 역사적인 산성(경기도기념물 제69호)이 아닌가.
아마, 영남대로의 유종지미 여부는 무시로 발동하는 이런 욕구의
성공적 억제 여부에 달렸다고 마음 다잡고 길로 매진하려 했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비석거리(碑立巨里), 미륵당은 확인해야지.
특히 부처와 보살의 양성을 지녔다는 미륵불이다.
석가모니 이후 말법 세상에 와서 용화(龍華)세상을 만들 구원의
부처, 불도들이 추구하는 미래세계의 모습이라 하는데 주의깊게
보고 정중히 인사드려야지.
하긴, 56억년 후에나 올 분을 두고 궁예를 비롯해 가짜 미륵의 세
(勢)가 창궐해 미륵불의 이미지를 구겨놓은 사건들도 있지만.
죽산면 매산리 미륵당과 5층 서탑
순교자 유감(有感)
매산삼거리는 아직도 고요한 아침이었다.
"아는 길도 물어 가라"는 격언의 실천이었을 뿐인데 한 부지런한
트럭 운전자는 방향이 같다며 태워주겠다니 이 일을 어쩌나.
정중히 사양하고 38번국도로 대체된 길 따라 동진을 시작했다.
뒷편에서 발산하는 강렬한 자력을 느껴 뒤를 돌아보았다.
자욱한 아침 안개에 가려 보이는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는데 왜?
지도 위에 콤파스를 올려 놓았다.
앗!, 칠장산(七長)이다.
나는 2003년 10월 25일 새벽에 이 길을 따라 칠장사로 갔다.
만물이 아직 기상하지 않은 시각에 한 노(老)보살의 축수받으며
칠장산에 올라 한남금북정맥길을 재촉했다.
이듬해, 2월 29일(윤달) 한남정맥을 따라서 다시 올랐다.
칠장산은 백두대간 속리산 천황봉에서 분기한 한남금북정맥이
한남정맥과 금북정맥을 나눠보내는 삼맥(三脈)산이다.
다시 볼 수 없음이 아쉬웠던가 보다.
안개속을 뚫고 신호를 보낸 것일 테니까.
이제부터는 한동안 한남금북정맥을 찔끔찔끔 훔쳐보게 되겠다.
다시 일죽면으로 들어서서 잠시 진행하는데 천주교 <죽산성지>
표석이 늙은 나그네를 붙들었다.
죽림리(竹林) 죽산성지는 1866년(고종 3년) 병인양요의 빌미가
된 병인박해때 죽산관아에 갇혀있던 신도들을 처형한 장소다.
나는 지금 그 길을 지나다가 그 때 그 일을 상상하고 있지만 그
때 나처럼 그 길을 지나던 우리의 선인들은 그 일을 보았을 터.
나는 삼남대로 여산성지에서 그랬듯이, 당시의 장면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전율하게 되는데 참혹한 현장을 직접 목도한 그들은
아마 한동안 대공황大(恐慌)상태에 빠져 있었을 것이다.
죽산성지 입구
자기네가 믿는 성서에도 사람의 생명은 온 천하보다 더 소중한
것이라 했거늘 그들은 왜 이 존엄한 생명을 초개처럼 버렸을까.
일차적으론 살 의미를 전혀 느끼지 못할 참담한 현실이었겠지만
대망신앙이 타는 장작에 기름붓듯 결정적 역할을 했을 것이다.
천국과 극락, 기타 보다 완벽한 신세계에 대한 대망(待望)사상이
없는 종교는 소위 앙꼬(팥소)없는 찐빵에 불과할 것이다.
하나, 그들이 죽음을 마치 헌 집에서 새 집으로 이사가듯 기꺼이
수용한 것을 '순교'라는 이름으로 성화(聖化)하기 전에 그들에게
왜곡된 신앙을 주입함으로서 양산된 것은 아닐까.
교회 창설 1백년만에 소위 3대박해를 비롯하여 수많은 박해에서
신도 1만여명이 순교함으로서 카토릭순교사(史)의 새 장을 쓰게
되었다니 그런 생각을 해보는 것이다.
자신과의 약속이행이다
길손의 이런 생각이 누((累)가 되었다면 죄송하다는 마음 남기고
다시 본연(本然)으로 돌아갔다.
일죽IC 앞, 중부고속국도 밑을 통과해 월정리(月井) 교차로에서
지방도로(306번)로 탈출했다.
여기부터 생극까지는 단 하나뿐인 친구네 집에 다니는 길이다.
그가 1997년에 생극면 신양리 대지공원으로 이사간 후 매년 1회
이상 왕래하기 어언 11년이 지났으므로 눈감아도 길이 훤하다.
지날 때마다 이천시와 음성군이 한 데 모여 대승적 결단을 내려
주기 바라는 길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일죽면을 벗어나면 306번도로는 이천시 율면, 음성군
삼성면, 금왕읍을 우왕좌왕하여 경계가 헷갈린다.
웬만한 이해관계라면 이 도로를 경계선으로 삼으면 안될까.
경기도 이천에서 잠자고 충청북도 음성에서 식사하는 일 없게.
나는 거동이 가능한 한, 앞으로도 매년 친구집에 드나들 것이다.
이것은 이 친구와의 약속이 아니라 나 자신과의 약속이다.
상대가 있는 약속은 양해를 구하면 되지만 온통 꽉 막힌 자신은
익스큐즈(excuse)가 먹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길을 통해서 친구집에 가고 올 텐데 매번 이런 불만을
갖게 될 것 같아서다.
충북 음성, 경기도 이천, 다시 충북 음성이 반복된다
광암(廣巖:대동지지)은 화봉리(花鳳) 널다리마을일 것이다.
연결이 좀 불합리하지만 마을 앞에 삼남(三南)지방에서 한양으로
가는 널(板)로 만든 다리가 있어서 널다리(板橋)가 되었다니까.
(당시에는 영남을 삼남으로 혼용했으니까)
금산리(金山)에 들어서서 모처럼 쉬려하는데 달려오던 초대형 탑
트럭이 바로 내 옆에 다가와 섰다.
높다란 운전석에서 내려온 기사는 좀 전에 일죽휴게소에서 지나
가는 날 보았다며 궁금한 게 많은지 마치 인터뷰하듯 물어왔다.
많은 이의 공통점은 이 나이에도 장기간, 장거리를 소화해 내는
체력에 대한 선망과 찜질방 효과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라 할까.
금산리에는 망이산성(望夷山城) 들머리 표지판이 서있다.
여기 금산리와 이천시(利川) 율면(栗) 산양리(山陽), 충북 음성군
(陰城) 삼성면(三成) 일대에 걸쳐 있는 산성이다.
한남금북정맥 종주때 삼성면지역 통과중 밟고 간 적이 있다.
칠장산에서 안성CC 앞, 한동안 영남대로를 흡수했다가 진천으로
가는 17번국도 건너 중부고속국도의 화봉육교를 통과하면 472m
마이산(馬耳)에 오르게 되는데 망이산성도 이 안에 있다.
그럼에도 마이산, 망이산성으로 이명(異名)인 점(지근인 비봉산
죽주산성도 있지만)을 의아해 했었는데.(백두대간 86회글 참조)
망이산성 입구
11시에 금산리 기독교대한감리회 금산교회 입구에 도착했다.
옛길에 들기 전에 한가지 스스로 약속한 것이 있다.
<일요일에 길걷다가 11시(대분분 교회의 예배시작시간)쯤 교회
앞에 도착하면 꼭 그 교회에 간다>는.
그래서 이 교회에 들어갔다.
전라북도 정읍시 신태인읍에서 그랬듯이.
약속의 까닭이나 동기, 목적같은 건 참으로 별것 아니다.
단순히 자기와의 약속이행이 전부니까.
한데, 예배를 통해서 받은 은혜도 있다.
졸은 시간을 포함한 1시간 동안 일체의 사념으로부터 해방된 것.
바라기도(祈願) 있다.
내게 주어진 천래(天來)의 자유를 침해받지 않아야 된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내게 내린 카리스마(carisma:恩賜)니까.
그러므로, 이 자유의지의 책임적 실천 이후의 일을 나는 모른다.
그것은 내 영역이 아니니까.
기독교도가 아니라고?
나는 단 한 순간도 내가 크리스쳔이라고 생각된 적이 없다.
그 판단은 전적으로 내 소관이 아니니까. <계속>
금산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