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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땅끝해남문화관광해설가협회 원문보기 글쓴이: 민영란
1. 해남의 연혁
신석기시대후기-해남에 자리잡은 가장 오래된 문화유적에는 상한 연대를 신석기시대후기(B. C 2000~1000)로 편년 하는 「두모패총(斗毛貝塚)」이 있다. 사회발전단계에서 신석기 시대 후기는 혈연적부락연맹체사회 단계에 해당한다.
청동기시대-청동기시대를 대표하는 문화유적으로 해남에는 모두 90여군의 지석묘가 분포하는데 전남에서는 B. C 1000~200년 전후로 편년한다. 역사적으로는 고조선시대 후반기에 해당하며, 사회발전단계 면에서 지역적부락연맹체사회 단계에 해당하는 이 무렵에 해남지역에는 대체로 10개 정도의 읍락국이 성립되었던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삼한시대-원삼국시대 또는 초기철기시대 또는 열국시대라고도 하는데 마한지역인 전남지역의 경우 철기문화가 등장하는 B. C 2C에서 영산강유역의 고유묘제인 대형옹관묘가 소멸하는 A. D 5C말까지로 편년 한다. 해남의 경우 철기문화를 대표적 문화층으로 하는 군곡패총(B. C 5C~A. D 3C말)에서 증산리 조산고분(A. D 5C말~6C초) 시대까지-역사적으로 서력기원전후에서 백제 동성왕 20년(498)무렵까지가 여기에 해당한다. 해남지역에서는 최소한 백포만 연안지역에 1개 북일면 지역에 1개 해남, 삼산․옥천 지역에 1개등 3개이상의 마한제소국세력이 성립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삼국시대-지금 해남지역이 백제의 지방제에 편재되는 것은 백제 동성왕 20년(498)이후의 일이며, 성왕 16년(546)에 비로소 마한의 소국세력이 자리잡았던 지역을 제외한 지금 화산․현산 지역에 새금(塞琴)현, 계곡․마산․산이 지역에 고서이(古西伊)현, 화원반도지역에 황술(黃述)현이 설치되었다. 그러나 이들 3현이나 기타 세력이 백제 5방성의 하나인 남방구지하성(南方仇知下城)의 직접통제를 받은 것 같지는 않으며 월송리 조산고분(造山古墳-百濟古墳) 피장자와 함께 반 독립세력으로 남아있었을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통일신라시대-서기 660년 신라에 병합된 백제의 영토는 신문왕 5년(685)까지 신라식의 4주 3소경 및 다수의 군현으로 편제되고 명칭이 일부 바뀌었을 뿐이었으나 경덕왕 16년(757)에 이르러 당제(唐制)를 따라 주․군․현 간의 영속체제를 강화하는 한편 지명도 모두 바꾸었다. 여기 따라 해남지역은 무주의 양무군에 속하게 되었으며 고서이는 고안(固安), 혹칭동안( 同安)으로, 새금은 침명(浸溟) 혹칭 투빈(投濱)으로, 황술은 황원(黃原)으로 바뀌었으며, 옛 소국세력지역은 특수자치구역인 향․소․부곡으로 분할 격하되어 영암군역으로 편제되었다. 그 큰 것에는 옥천 지역의냉천부곡(冷泉部曲), 신갈(神葛)부곡, 해남, 삼산 지역의 사라향(紗羅鄕), 송지 지역의 송지(松旨)부곡, 북일지역의 좌곡(佐谷)부곡이 있다.
고려시대-태조 23년(940) 침명을 해남(海南)현으로 고안현을 죽산(竹山)현으로 개칭하고, 현종 9년(1018)에 황원현을 군으로 승격하여 각각 영암군에 붙였다. 또 사라향을 옥산(玉山)현으로, 송지부곡을 송양(松陽)현으로, 냉천부곡을 옥천(玉泉)현으로 고쳐 역시 영암군에 붙였으며, 팔마(八馬)부곡․귀인(貴仁)부곡․능산(熊山)소․유산(杻山)소․대상이(大上伊)소․구량산(仇良山)소․덕지(德池)소․마봉(馬峰)소․심정(深井)부곡■송정(松井)부곡을 신설하여 역시 영암에 붙였다.
조선시대-왜구의 창궐로 고려 충정왕 2년(1350)부터 내륙으로 들러와 있던 진도를 후의 삼촌(三寸)면 지역에 옮기면서 태종 9년(1409)에 해남현과 합하여 해진(海珍)군을 만들고 치읍을 구 녹산(綠山)역지로 옮겼다. 태종 12년(1412)에 다시 영암속현 옥산현지로 옮겼다. 당시 해진군 속현은 진도(珍島)의 가흥(嘉興), 임회(臨淮), 해남의 죽산과 죽산에서 나눈 진산(珍山)등 4현이었다. 세종 19년(1437) 진도를 다시 나누어 해남현을 복설 하고 치읍을 현재의 읍터로 옮겨 현감을 두었다. 세종 22년(1440) 목포에 있던 수영을 황원꽂이(門內面)로 옮겼다.
세종 19년(1447) 영암에 속한 신갈부곡(현재의 옥천면 동부 흑천지역)이 해남현에 들어오고, 세종 30년(1448) 영암에 속한 옥천현․팔마부곡(지근 옥천면 팔산지역), 그리고 황원현이 해남현에 들어왔다.
세조 10년(1464) 황원의 수영처치사영을 절도사영으로 고치고 성종 10년(1479)에 여수에 수영이 설치되면서 황원수영을 우수영으로 고쳤다.
고종 32년(1895. 5. 1) 해남현을 나주부 관할 해남군으로 개편하였으며, 같은 해(1895. 9. 5)에 2등군으로 고쳤다.
대한제국시대-1896. 2. 3 신설한 완도군에 해남군의 도서지역을 넘겨주었다.
1896. 8. 4 13도제에 따라 전라남도 해남군 (2등군)이 되었다.
1906. 9. 24 영암군의 옥천시면․종면, 송지시면․종면, 북평시면․종면과 진도군의 삼촌면이 해남군에 들어왔다.
1914. 3. 1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완도군의 보길(甫吉)면 삼마(三馬)도와 강진군의 백도(白道)면 월성(月城)리․항(項)리․만수(萬樹)리․좌일(佐日)리․금당(金塘)리․중봉(中峯)리․동(東)리․중산(中山)리․방축(防築)리․남촌리를 북평면에 편입하고, 군일면․군이면을 해남면, 녹산면․삼촌면을 삼산면, 화일(花一)면․화이(花二)면․완도군 보길면 일부를 화산(花山)면, 송지시면․종면․은소(銀所)면 일부를 송지(松旨)면, 북평시면․종면․강진군 백도면 일부를 북평(北平)면, 옥천시면․종면을 옥천면, 비곡(比谷)면․청계(淸溪)면․영암군 곤이시(昆二始)면 일부를 계곡(溪谷)면, 산일(山一)면 일부․황원(黃原)면을 황산(黃山)면, 산일면 일부․마포(馬浦)면을 마산(馬山)면, 관저(管底)면․장서(場西)면․장동(場東)면을 화원(花源)면, 그리고 은소면 일부를 현산(縣山)면에 통폐합하여 산이(山二)면을 포함 13면 177리로 관할구역을 개편 조정하였다.
1915. 4. 1 영암군 곤이시면 신주(新舟)리․원진리․선산(船山)리가 해남군에 편입되었다.
1917. 9. 30 무안군 압해면 달(達)리․치하(淄下)도와 완도군 군외면 당인(唐仁)리․어불(於佛)리가 해남군에 편입되었다.
1955. 7 . 1 해남면이 해남읍으로 승격되었다.
1973. 7. 1 송지면 월송리를 현산면에 마산면 보평(洑坪)리를 해남읍에 편입하였다.
1993. 2. 15 북평면 만수, 신월, 금당, 흥촌, 운전, 용일, 방산(方山), 내동(內洞)리를 나누어 북일(北日)면을 신설하여 1읍 13면이 되었다.
2. 해남지방의 문화적 배경
해남지방은 한반도의 서남쪽 모서리에 자리잡은 전남 최대의 군역으로 화원․산이 반도와 대둔산(大屯山-해발 672m) 두륜산(頭輪山-해발 703m)이 남북으로 뻗어있는 해남반도로 되어 있다. 또 해남군역은 동 측과 동북 측만이 강진․영암군과 연결된 육지이고 나머지 3면은 바다이어서 옛날부터 이곳을 통과하는 해로 (즉 문화이동로)와 함께 다양한 문화적 성격을 지니고 있는 곳이다. 즉 영산강 유역의 문화요소들이 파급되거나 또 형성되는 배경으로서, 혹은 반도의 중심세력이 전파되는 막다른 골목으로서 더욱 크게는 이 지역의 서남부를 경유하는 해로가 중국-한반도-일본을 연결하는 문화 이동로였다는 점에서 그 문화적 성격이 매우 주목되는 곳이다.
1) 신석기시대
해남지역에서는 아직 구석기유적이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선사문화를 신석기문화, 청동기문화 등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해남지역에 자리잡은 최초의 문화는 신석기문화이다. 이것은 현산면 백포리 두모부락 뒷산에서 신석기 시대의 패각이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수습된 토기편은 모두 소형으로 구연부와 동부편인데 그 성격을 쉽게 파악하기 어렵지만 동부에 희미하게 남아 있는 평행문, 횡주어골문(橫走魚骨文) 등을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은 패각과 같은 시문구로 기표면을 문지르기 때문에 생기는 얕은 문양으로 보여진다. 이와 같은 수법은 신안군내 대흑산도, 소흑산도, 하태도 등지의 패총에서 발견된 것과 동일한 것으로 신석기시대 후기에 속하는 즐문토기(櫛文土器)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이곳 유적은 대략 B.C. 2000~1000년 사이에 살던 사람들이 남긴 유적으로 추정할 수 있다.
전남지방에서는 지금까지 신안․완도군 등 도서지방에서만 신석기유적이 발견되었는데 해남지역에서 신석기 유적이 발견됨으로써 신석기유적이 도서지방 만이 아니고 해안지방에서도 분포되었다는 사실을 알게되었다.
2) 고조선시대
청동기시대에 접어들면 지석묘, 패총, 유물분포지 등 다양한 유적이 전지역에 걸쳐 분포하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지석묘는 모두 88개군 830여기가 확인되었는데 지역적으로 화산면․현산면 일대, 산이면․마산면 일대 및 계곡면․옥천면 일대로 삼분되어 밀접 되어 있다. 이들 지석묘군은 주로 해안이나 평야지대에 인접한 구릉․산록 등에 위치하며, 1열 혹은 3열을 이루거나 타원형을 이루며 군집하고 있다.
지석묘의 하부구조는 발굴된 예가 없어 알 수 없으나 판석으로 석실을 만든 경우가 많아 보인다. 또한 상석을 받치는 지석은 있는 경우(지석식)와 없는 경우(개석식)가 섞여 있는데 상석이 거대한 경우에는 지석이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들 청동기문화인의 생활상을 밝혀줄 고고학적 자료는 아직 군곡패총지역에서 발굴된 주거지 정도이기 때문에 아직은 하게 말하기 어렵다. 그러나 그들이 쓴 도구에는 반월형석도, 석부, 연석, 석촉, 석창 등이 수습되었으며, 특히 산이면 대진리를 중심으로 하는 산이반도에서 많은 석기류가 발견되었고, 화산면 평호리 평발부락 부근에서는 양인석부, 끌, 대패날 등 석부류 9점이 일괄로 수습되어 당시의 생활상을 일부 추측할 수 있다.
우선 지석묘의 분포상황으로 보아 청동기시대에는 전 시대와 달리 해남의 전 지역에 문화가 파급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 그들의 생활 근거지가 주로 해안지대임에도 당시의 패총유적이 적고, 수습유물에 고기잡이에 필요한 도구가 거의 발견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그들의 생활이 주로 농경이나 수렵에 의지하였으리라고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지석묘유적 분포지역과 연관되는 지명유적을 통해서 우리는 지금의 ① 송지면 군곡지역 ② 현산면과 화산면 경계의 탄동지역 ③ 화산면 석정지역 ④ 삼산면과 해남읍 경계의 계동지역 ⑤ 옥천면 백호지역 ⑥ 계곡면 원덕지역 ⑦ 산이면 건촌지역 ⑧ 마산면 안정지역 ⑨ 문내면 충평지역 ⑩ 북일면 운전지역 등에 장차 해남 마한소국세력의 기반이 되는 읍락국이 성립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3) 마한시대
청동기문화를 뒤이어 해남지역에는 기원전후에 새로운 철기문화가 등장한다. 이 문화의 특색은 철기가 사용되며, 토기로는 무문토기 대신에 경질무문토기와 소위 김해식토기가 사용되고, 묘제는 지석묘가 소멸되고 옹관묘로 바뀐다.
이 시기의 유적으로는 송지면 군곡리패총, 화산면 안호리패총, 해남읍과 삼산면 경계 옥녀봉패총, 북일면 월선(月城) 주변 패총이 있다. ,
군곡리패총은 해발 20m의 구릉 전체가 패각으로 뒤덮여 있는데 그 규모는 150×200m로 나타나고 노출된 단일 패각층의 높이도 약 20m에 이른다. 1984~88년에 걸친 발굴로 김해패총과 쌍벽을 이루는 철기시대 유적으로 확인되었다.
이들 유적과 함께 군곡리 옹관유적, 북일면 옹관유적, 옥녀봉과 삼산면 농암․시등․신촌옹관유적, 그리고 북일면과 삼산면의 전방후원분이 있다.
군곡리옹관은 개간 중에 우연히 발견된 것으로 대형옹관에 합구식 이다. 이와 같은 대형옹관은 영암 시종면, 나주 반남면 등 영산강 하류지역에 주로 분포하고 있는데 이 세력이 한반도 최남단인 이곳까지 파급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북일면 일대에는 소위 전방후원분, 방대분, 즙석방대분(葺石方臺墳) 등을 위시하여 옹관묘, 석곽묘 등 다양한 묘제가 집중 분포하고 있다.
이 시기는 역사적으로 볼 때 마한에 해당한다. 마한은 진한, 변한과 함께 한반도 중남부에 위치하며, B.C.2C경에 성립되었다고 보고 있다. 마한은 삼한 중에서도 주도권을 행사하였던 것으로 보여지나 백제가 성장함에 따라 점차 남쪽으로 밀리다가 소멸되었다고 여겨지고 있다.
일반적으로 학계에서는 백제가 전남지방을 장악하는 시기를 근초고왕(346~375)때이며, 그 이전에는 마한의 잔존세력이 분포하였을 것으로 보고 있다. 실제로 290년경의 중국사서(晉書)에 마한의 신미제국(新彌諸國) 등 이십여국이 산을 의지하고 바다를 대하고 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런데 영산강하류의 대형옹관묘는 3세기 후반 ~ 4세기 전반에 발생하여 5세기말까지 계속 사용되었다고 보고 있기 때문에 이 지역이 근초고왕 때에 백제에 완전히 복속 되었다는 사실에는 의문점이 있다. 오히려 백제가 공주로 남천한 뒤인 동성왕 20년(498)에 탐라(濟州)를 복속 시키는데 이때를 전후하여 영산강하류지역이 백제에 편입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해남 월송리에서 조사된 백제 석실분은 전남에서는 가장 이른 시기에 만들어진 고분인데 그 고분의 연대를 5세기 후반으로 보고 있다. 결국 좀 더 연구되어야 할 문제이지만 해남지역은 기원전후로부터 5세기 후반까지는 마한의 일지역이었으며, 송지면 군곡리 일대와 북일면 일대, 그리고 삼산면과 해남읍 일대에 3개의 마한 소국세력이 자리잡았을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중앙대학교 이도학(李道學)은 이들 해남 마한소국들을 초기 신미제국의 중심세력으로 보면서 군초고왕의 남정에 따라 이들 세력이 위축되면서 이들과 대체하여 영상강유역세력(영암과 나주 반남세력)이 후기 심미제국의 중심세력으로 부상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여기 대하여 해남문화원 황도훈(黃道勛-『해남고대국명지명연구』1992-1997)은 군곡 중심 백포만연안세력을 토착 마한소국세력으로 보고, 북일면의 후기 마한 소국세력을 목지국(目支國) 중심 마한종주세력의 잔존세력으로 보고 있다.
4) 백제시대
백제시대의 해남지방이 어떤 상태로, 어떠한 정치체제아래에서 운영되었는지에 대하여 알아볼 만한 기록은 거의 없다. 따라서 지지류에 보이는 단편적인 기록과 백제사 전반에 관련된 기록을 연역하여 추측하고, 이 시대의 문화유적들을 간략하게 이해하는 정도로 미흡한 수준에 머물 수밖에 없는 형편이다.
백제시대에 현재의 해남군지역에는 3개의 행정편제가 마련되어 있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현재의 현산면 일원에 자리잡았던 새금현, 화원반도의 황술현, 마산․계곡․산이반도 일원에 자리잡았던 고서이현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다음시대인 통일신라와 고려시대까지 존속된 것에 한정된 것으로 이 3현 외에도 선사․마한시대의 문화기반을 지키면서 백제시대에도 일정한 세력을 형성했던 지역으로 송지면 일대와 북일면 일대, 그리고 해남읍․삼산면․, 옥천면 일대 등이 있는데 그들은 모두 통일신리시대의 향이나 부곡으로 나타나고 있어 이들과 백제와의 관계, 그리고 통일신라와의 관계가 어떠했는지 의문이 아닐 수 없다.
그러면 백제의 3군현(새금현․황술현․고서이현)은 과연 어떤 연유로 어느 시기에 이 지역의 독립군현으로 설치되게 되었을까?
먼저 백제의 마한정복은 기록상 근초고왕 24년(369)으로 나타나고 있지만, 그것은 전북 익산일대의 마한 중심세력에 한정된 내용일 가능성이 크다. 근초고왕대에 마한의 또 다른 본거지인 영산강유역이나 서남해안지역에서는 마한세력이 아직도 독자적인 세력으로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동성왕 20년조(498)에 보이는 동성왕의 탐라복속은 바로 이러한 대립관계의 종식을 의미하며, 백제가 이때를 비롯 반도 서남부의 전역을 다스리게 되었음을 보여주는 사실이라 할 수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하여 이 동성왕 20년을 분명한 계선으로 하여 일괄적으로 그 전후의 지방통제정책이 판이하게 달려졌다고는 할 수 없을지 모른다. 왜냐하면 지역에 따라 백제정부와의 유착․대립관계는 서로 달랐을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동성왕의 탐라 복속이 의미하는 가장 큰 사실 중의 하나는, 적어도 백제가 이들 마한의 마지막 세력 근거지들에 대하여 우위에 서서 능동적이며 적극적인 통제와 편입을 위한 노력을 개시하였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런데 이 능진시대의 백제사에서 우리가 주목할 또 하나의 중요한 사실은 이 시기에 바로 담로제(擔魯制)로 불리는 지방통제조직이 생겼다는 점이다. 소위 「22담로제」가 그것으로 그 명확한 설치시기는 불분명하지만 능진에 도읍해 있던 시기임에는 틀림이 없으며, 바로 이 동성왕대의 영토확장과 담로제의 실시를 함께 상관시켜 생각할 수 있을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양서(梁書)』백제전에 보이는 담로제의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백제는 치도를 고마성이라 하고 읍을 담로라 하였는데 중국의 군현과 같은 것으로 전국에 모두 22개소를 설치하였으며, 왕의 자제와 종족으로써 분거케 하였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 담로제와 백제의 지방편제가 제도로써 확립된 사비시대의 오방제도를 비교해 볼 필요가 있다. 오방제도란 백제의 서울(부여․사비)를 5부로 나눈 것인데 이와 비슷하게 지방을 오방(동․서․남․북․중)으로 나누고 각각 방령(方領)이라고 불리는 달솔(達率-16관등 중 3품관)을 배치하고 700~1200여명의 군대를 통솔케 하며, 그 예하에 6~10여 군을 두는 것이었다.
한편 각 군에는 군장(덕솔德率-4품관)을 3명씩 임명하였으며 군에 크고 작은 성들을 귀속시켰다. 그리하여 백제가 멸망한 당시 5방 예하에는 37군, 200성이 있었다고 한다.
담로제와 오방제를 비교할 때 우리는 먼저 지방장관 격인 「담로」와「방령-군장」의 신분적 차이를 발견할 수가 있다. 즉 담로의 경우 일종의 봉건영주를 연상케 하는 왕실․종친이라는 혈연적 유대가 돋보이는 반면, 방령이나 군장은 제한적이나마 군사적이고 제도적인 관리임명의 모습이 강하다. 바로 이 점은 백제의 왕권이나 지방 통치력이 어떤 상태에서 어떤 상태로 변화되었는가를 읽게 하는 자료일 수도 있는 것이다. 예컨대 담로제가 능진천도후 겨우 회복세를 보이는 시기의 지방통제방식이었다면 사비시대의 오방제도는 왕권의 안정 혹은 지방세력에 대한 상대적 우위가 반영되는 형태였다고도 볼 수 있기 때뭄이다.
따라서,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해남지역의 3군현(새금현, 황술현, 고서이현)의 성립시기도 크게 보아서 담로제 실시시기와 오방제 실시시기의 사이임에 틀림이 없으나, 과연 구체적으로 어떤 순서에 의해 (혹은 3현이 함께) 현으로 구획 되었는지의 여부는 알 수가 없는 것이다. 단지 여기서 우리는 백제가 마한잔재세력의 최후거점인 서남해안지역을 장악하는데 있어서 택할 수 있는 정략적인 방법은 몇 가지로 예상해 볼 수가 있다. 즉
첫째는 담로체제와 같이 강력하고 직접 왕권의 후원을 받는 세력을 부식시켜 통제하는 방법과
둘째, 토착세력기반과 제휴하여 그들의 지배력은 인정하면서 다만 백제의 행정편제에 편입시키는 것으로 만족하는 방법
셋째, 오방제도와 같이 중앙에서 지방령장을 직접 파견시켜 토착기반을 종식시키거나 대화의 장으로 활용하는 방법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과연 해남지방의 경우가 이중 어떤 방법에 의해 행정 편제 속에 편입될 수 있었는지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는다. 대체로 이러한 지배세력의 교체나 문화의 상충․접변이 유적(유물)을 통해 규명되어져 왔던 기왕의 연구경향을 대체할 결정적 문헌자료가 없는 한 우리도 이 시대 유적․유물의 철저한 검색과 정리를 통해 그러한 과제들을 풀어 나아가야 할 것이다.
특히 이러한 문화의 접촉과 변이를 추적하는데 있어서 당시의 지배세력(토착세력 및 새로운 지배세력)들의 묘제와 이들 묘에서 반출되는 유물의 성격은 결정적 자료가 되어준다. 예컨대 해남지방에 마한시대 이후로 존속해 왔던 토착세력의 묘제가 옹관묘였다면 새롭게 이식된 백제세력의 묘제가 어떤 것이었으며, 서로 다른 이들 묘에서 반출된 유물들의 성격은 어떻게 다른가? 또 서로 어떻게 교류되고 영향을 주고 받았는가에 따라 위에 든 세력교대는 규명이 가능할 것이다.
1974년 현산면 월송리에서 우연히 발견된 백제 석실고분과 같은 예는 바로 이러한 연구에 결정적 자료가 되는 것으로써 주목된다. 월송리 고분은 전형적인 백제의 지배층 묘제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으며, 총 194점에 달하는 다양한 유물과 특히 지배 신분층의 유물이 확실한 무구나 마구류가 발견된 점은 이 시기의 세력교체와 직결된 자료로서 매우 중요하다.
한편 이들 3현 외에 앞에서 전제했던 해남지역 마한소국세력의 유적․유물들도 실은 선사․마한뿐만 아니라 백제시대와도 많은 관령을 보이고 있으며, 단지 기록상 돌출 되지 않거나 〈백제→통일신라〉기에 일시 위축․소외된 지역일 가능성이 크다 할 것이다.
이와 함께 최근에 현산면 고현리에서 수습된 고배(3점)와 개(1점)에서 가야계통의 이단투창(상하 일렬식)이 보이는 것은, 백제~통일신라시대에 남해안을 경유한 고대 해로와 관련시켜 그 교류상이 규명되어야 할 것으로 여기에서 전제한 이도학의 저서 『백제 고대국가 연구』(1995, 일지사)는 주목할만한 성과라고 할 것이다.
5) 통일신라시대의 해남지역
백제의 중앙세력이 한반도의 서남쪽 끝 해남지역을 완전히 복속 시킨 시기는 빨라야 6세기초반이었을 것이니, 이로부터 백제가 신라에 병합되는 660년을 하한으로 하여 약 150~160년 정도가 백제의 온전한 지배하에 있었던 기간이라고 보여진다.
신라에 병합된 구 백제영토는 685년(신문왕 5)까지 신라식의 4주와 3소경 및 다수의 군현으로 편제되고 명칭이 일부 바뀌어 졌을 뿐이었으나, 757년(경덕왕 16)에 이르러서는 당제를 따라 주․군․현간의 영속체제를 강화하는 한편 지명도 모두 바꾸어 단지 그 영속체계를 다시 마련하는 정도로 일단 정리되었던 것 같다. 이를 간략히 도표화하면 다음과 같다(<삼국사기> 지리지 참조).
〈표1〉통일신라시대의 서남해안지역 군현체계
즉 이 백제~통일신라시대의 군현변화는 명칭상의 변화와 영속체제의 마련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었다. 먼저 명칭 변화를 보면
① 현재의 현산․화산지역에 있던 새금현이 침명현으로
② 현재의 마산․산이 일대에 있던 고서이현이 고안 (혹은 동안이라고도 함)현으로
③ 현재의 화원반도에 자리잡았던 황술현이 황원현으로 각각 바뀌었다.
한편 이러한 명칭상의 변화와 함께 한반도의 서남해안 지역에 설치된 통일신라의 여러 현을 관할하게 된 양무군은 그 전신이 백제시대의 도무군으로서 이 변화시기에 해남․강진지역을 통할하는 대군으로 성장하였다는 점이 주목된다. 당시 양무군의 주변에 무안군․영암군․압해군․뇌산군 등이 서로 인접해 있었다.
이 시기에 세력과 영역을 확장한 군으로는 무안군과 반남군을 들 수 있는데, 이와 함께 양무군세가 확대된 것을 보면 통일신라시대에 한반도의 서남부를 경유하는 해로가 주목된 때문이 아닐까도 생각되어 진다. 인접한 보성군세의 강화도 같은 예일 것이다.
한편 이 통일신라시대에는 앞 절에서 거론한 바 있던 3현 외의 지역에 관련된 기록도 그 편린들이 확인되어 진다. 즉 『동국여지승람』 해남군 고적조에 보이는 「옥산폐현」과 동서 영암군 산천조에 보이는 「송양현」 그리고 송지면 미황사 사적기에 보이는 촌주(村主)와 향도(香徒)기록이 그것이다.
옥산폐현조의 내용은
현의 남쪽 10리에 있는데 옛날의 사라향이다. 고려시대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 영암군에 속하게 하였다. 지금은 해남현의 치소이다.
라고 되어 있다. 위 인용문이 보여주듯이 고려시대 이전이라면 백제나 통일신라시대로 볼 수 있고, 그때에 「사라향」이라 불려졌다면 통일신라시대로 유추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결국 역사기록에서는 그 과정이 누락되어 있자만 사라향도 해남지방의 이 시대 문화를 영위했던 한 근거지로 3현과 함께 주목해야 될 것이다. 최근의 조사결과 이 지역에서 고분과 마한성지가 추가로 발견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다음으로 「송양현」의 경우는 전혀 거론되지 않았던 새로운 현지인데, 그 시기는 주로 고려시대와 관련되어 있고, 후일 이 지역의 부곡(송지부곡)으로 나타나는 것과 관련시켜 남은 숙제를 풀어야할 것으로 생각된다. 관련기사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동국여지승람> 영암군 산천조: 달마산 옛날 송양현에 있는데 군(영암군)의 남쪽으로 124리 떨어져 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현재의 송지면 일대에 있던 현명이 「송양」임은 분명하나, 고려시대 영암의 속현으로 송양현이 있었다는 기록은 찾아지지 않는다. 이 지역의 경우도 위에든 옥산폐현지와 마찬가지로 많은 선사이래의 유적과 유물들이 발견되고 있다. 이것은 이들이 마한의 강성한 토착세력이면서 백제 이후 통일신라에 이르러 정치적으로 소외․위축되면서 부곡집단으로 전락된 것이라 여겨진다.
세 번째의 미황사 사적비에 보이는 내용도 역시 송지면 일대에 관련된 것이다. 물론 이 자료는 미황사의 창건유래를 밝힌 것이며 문자화된 연대도 훨씬 후대이기 때문에 당시대의 정확한 사실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고 하더라도, 해남지역과 관련된 귀한 내용이다.
…(上略)…당 개원십사년을축(725년) 신라경덕왕 8년(원문에는 경덕왕 8년으로 나타나지만 이 725년 을축은 신라 성덕왕 7년이다) 8월 21일 문득 한 석선이 산밑 사자포구에 닿았는데 신비한 음악과 범패소리가 배에서 울려 퍼졌다. 사람들이 신기하게 여겨 다가가서 살펴보려 하면 그 배는 멀리 달아나곤 하였다. 마침 의조(義照)화상이 소문을 듣고 장운․장선 두 사미와 촌주 우감, 향도 100여인과 함께 목욕재계하고 가서 정성껏 기도를 드리니 석선이 언덕에 다가왔다.…(下略)…
사찰연기설화의 면모이지만 이 기록은 당시대의 이 지역 분위기를 보여주는 내용으로 승려와 촌주․향도의 존재를 그 속에 담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 있는 자료이다. 이 시대의 「촌주」라면 바로 토착적인 지방세력을 대표하는 인물로서 주목되어 오는 터이며, 향도 역시 신앙집단 내지는 공동체조직으로 지방사회조직연구에 중요한 위치를 점유한다. 물론 이 기사 자체가 당시의 이 지방사정을 모두 설명해주는 것은 아니지만, 앞에 든 「송양현」과 함께 송지 일대가 어떤 세력의 근거지로서는 일단 주목받아도 좋은 것으로 생각된다. 최근에 발견된 군곡리의 패총이나 옹관묘도 사실은 이들 지방세력의 선주문화였을 것이다『해남고대국명지명연구』(1997. 황도훈)는 송지․현산 지역에 마한 54국 중의 하나인“소위건국”을 비정하고, 북일 지역에 구전하는“선성국”을 마한 최후세력의 유적으로 비정하였다. 또 근래 한 재지연구자에 의해서 장보고의 철해진(828~846)과 해남 녹청자문화에 대한 주목할만한 논문이 발표되었는데 그의 주장에 따르면 장보고 해상왕국의 경제적 배후에 화원과 산이면의 녹청자요지가 있었다고한다(『瓷器 發祥地攷』卞南柱, 1999).
6) 고려시대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백제․통일신라시대 해남지역에는 3개의 현이 존재하여 서로 반독립적인 행정체제를 지녔었다. 물론 이들 3개 현 이외에도 이 현들에 버금가는 규모의 세력들이 있었을 것이며, 걱 대해서는 앞 절에서 간략히 제기한 바 있다. 그러나 실제 고려시대가 되면 이러한 지역세력의 분포, 혹은 행정체계는 더욱 큰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즉 백제~통일신라시대를 연이어 존속했던 3현 외에 그와 유사한 문화기반을 가졌던 지역들-현재의 해남행정체계로 말하면 송지면, 계곡면, 옥천면, 북일면, 북평면 등 - 이 모두가 인접한 영암군역으로 편입되었으며, 이들의 행정 단위 명칭은 부곡(송지부곡․냉천)․향(북평)․소(마봉) 등으로 격하되어 있었던 점이 주목된다.
이러한 변화는 왕건의 고려 건국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던 영암군의 급성장이 한 요인이 되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참고로 고려시대 전남지역의 행정체계를 보면 현재의 영암․해남․강진권을 묶는 커다란 행정중심지로 영암이 크게 부각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표 2 참조)
이들 해남지역 군현들의 고려시대 연혁을 『세정실록지리지』, 『고려사』지리지, 『동국흥지승람』을 토대로 간략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표 2> 고려시대 전남지역의 행정체계표
나주목 /┬/ 지사부 /// 장흥부(속현4)
(주목) ├/ 지사군 /┬/ 영광군(속군2, 속현8)
| ├/ 영암군(속군2, 속현3) /┬/ 황원군(해남 화원)
| ├/ 보성군(속현7) ├/ 도강군(강진)
| └/ 보성군(속현7) ├/ 곤미현(영암 미암)
| ├/ 해남현(해남 현산)
└ 현령관 /┬/ 해양현 └/ 죽산현(해남 마산)
├/ 진도현(속현2)
├/ 능성현
└/ 탐라현
1) 해남현(고해남현): 백제시대 새금현이다. 신라시대 침명현(『고려사』 지리지에는 혹은 투빈이라고 했음)의 고려시대 명칭으로 그동안 커다란 경역의 변화는 없었으리라 보여진다. 현재의 현산면 일평리 성지, 또는 읍호토성이 그 유지라고 생각된다. 통일신라시대에는 양무군의 영현이었으나, 고려조에 양무군이 영암군에 영속되면서 함께 영암의 임내로 편입되고 해남현으로 고쳐졌다.
여말에 왜구의 창궐로 인하여 서남해안지역이 혼란스러워지자 공도정책의 일환으로 진도현이 충정왕 2년(1350) 해남 땅에 옮겨지는데, 이로부터 조선초에 해남과 진도가 합쳐져 해진군이 되는 빌미가 생기었다.(해남. 진도 양군의 분군 사실은 다음절에서 다시 논급한다)
2) 죽산현: 본래 백제의 고서이현이다. 통일신라 고(동)안현의 후신으로 현재의 마산면 장재리에 그 치소가 있었으며, 죽산성이 그 산성으로 추측된다. 고해남과 마찬가지로 통일신라시대에 양무군의 영현이었다가 고려초에 양무군이 영암군에 영속되게되자 영암의 임내로 편입되었다. 현재 죽산현지에는 고려시대의 불교문화유적으로 남계리에 석탑이 은적사(隱寂寺)에 철불이 남아 있다.
3) 황원군: 화원반도지역으로 백제시대의 황술현이다. 통일신라시대의 황원현인데, 위의 두 현과 마찬가지로 고려초 영암군에 영속되었으나 현에서 군으로 그 격이 상승되었다. 이 시기에 황원현 만이 어떤 연유로 군으로 승격되었는지는 현재로서는 파악하기가 어려우나 근래에 전제 변남주에 의해서 화원 뱀사골 자기요지와 관계가 있을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4) 옥산현: 신라 사라향의 후신으로 고려조에 옥산현으로 고쳤으며 영암의 속현이었다가 조선초 해진군의 치소가 된 곳이다. 이 옥산현의 중심 치소는 현재의 삼산면 상가리 계동 「성뫼산」 일대나 해남읍 남연리~삼산면 창리일대(고성지와 유적분포 상태를 미루어 추측)가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조선초기 해진군의 치소가 된 현재의 해남읍지는 당시 옥산향의 중심부가 아니었으며, 통합된 군(현)세를 바탕하여 보다 넓고 안전한 내륙의 지역으로 선정되었던 것이라 생각된다. .
5) 송양현: 이름만 『동국흥지승람』에 남아 전하고 확실한 존재형태를 파악할 수 없다. 고려승 무외(無畏)의 기문에 ‘낭주의 속현’이라 한 것을 보면 고려초의 현명인 듯 하나, 그 뒤의 연혁이나 기록은 전혀 확인되지 않으며 지역적인 위치로 볼 때 송지부곡과 연결된 세력이었다고 생각된다.(지금 월송~향교지역)
6) 옥천현: 현재의 옥천면 서부지역 일대로 냉천부곡의 후신이며, 고려시대에 일시 현으로 승격되었던 일이 있었던 듯 『세종실록지리지』에 영암 고 속현 4개 중의 하나로 적고 있다.
7) 위에 거론한 현지 외에 고려시대에 해남지역에 있었던 연혁관련 고적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① 북평향 : 현재의 북평면․북일면 일대로 조선말기까지 계속 영암군에 속해 있던 지역이다. 현재의 북일면 신월리 성마산성지, 혹은 완도와의 통로로서 조선시대 수군만호진이 설치되었던 북평면 남창리 일대가 그 중심지로 추측되나 분명하지는 않다. 최근에 발견되는 고분의 축조집단들이 이 지역의 선주․토착체력이었을 것이다.
② 한편 위에 든 지역 외에 많은 부곡․소의 명칭들이 보이는데 그 정확한 위치나 성격은 불분명하다.
팔마부곡(옥천면 팔산리 일대로 추정), ․신갈부곡(옥천면 흑천리 일대로 추정)․귀인부곡(옥천면 신계리일대로 추정), ․유산소․대상이소․구량산소․덕지소 등이 그것이며, 이들이 정확한 위치나 성격은 앞으로 더 연구․추적되어야 할 것이다.
이상 주로 행정편제와 관련된 사항을 간추려 보았다. 다음으로 고려시대의 해남지역 문화배경을 논위하는데 있어서 필자는 또 한 번 해남과 진도사이, 해남과 완도사이를 통과하는 고대해로의 문화사적인 의미를 주목하고자 한다. 물론 이 해로는 통일신라시대부터 이용된 대중국 대일본 교역로이기도 하였다. 통일신라시대 청해진대사 장보고의 활약이나 일승 원인의 <입당구법순례기>에 나타난 교역로의 비중은 모두가 주지하는 터이다. 그러나 이를 통한 문화교류가 보다 본격적으로 진전되는 시기는 고려시대였으며, 그 경유지․기착지였던 해남지방의 이 시대 문화는 당연히 그 영향을 받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중국 남송과의 잦은 사신 왕래나 신안해저유물선발견과 같은 예들이 그러한 사정을 입증하고 있으며, 실제로 현재의 화산면 관동리의 관두량(館頭梁)이나 진도의 벽파진은 당시 대 중국 교역의 출항지․기착지로 이용된 곳이다. 미황사나 강진 백방사, 진불암의 연기설화 중에 서방선에 의한 불교의 해로 수입설화, 산이면이나 화원면, 그리고 강진 청자문화의 발달 등등도 사실은 이와 같은 해로와 무관한 것이 아닐 것이다. 더구나 이 해로는 개경정부와 각종 세곡을 운반하는 조운로로서도 이용됨에 따라 국내․외를 막론하고 문화가 이동되고 교류되는 통로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해로의 개통과 활발한 이용은 해남지역에 좋은 영향을 끼치기도 하였지만, 반대로 사회가 혼란하였을 때는 다른 지역보다 큰 피해를 초래하기도 하였다. 예컨대 신라말, 고려초의 후백제와 고려의 쟁패에서 그 격전장이 되어야 했다거나, 몽고침입기의 삼별초 항쟁시, 더 후대에는 왜구의 침입에 따른 커다란 피해 등이 그러한 예가 될 것이다. 특히 고려, 조선초의 왜구 침입은 전라도의 해안과 도서지방에 결정적인 피해를 입혀 진도 같은 큰 섬이 그 치소를 내륙(해남)으로 옮기고 해안으로부터 50리 이내에는 주민을 살지 못하게 하는 정도였음을 보면 해남의 경유 이 왜구로 인한 피해가 매우 심각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마산면 맹진리 속칭 장군바위에서 발견된 매향암각(1406년, 조선 태종 6)도 이 같은 민심불안을 반영하는 자료라고 할 것이다.
7) 조선시대
현재의 해남지방이 백제이래 고려시대까지의 분립된 행정체계(고해남현․죽산현․황원군)를 청산하고 하나의 영역으로 묶여지는 것은 조선조에 이르러서였다. 물론 이 조선초기의 해남영역이라 해도 현재의 영역과 완전히 같은 것은 아니었다. 아직도 송지 일대와 계곡․옥천․북일․북평 일대는 영암에 속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크게 보아 지속적인 동질성을 가지고 「해남」을 상기할 때, 이 조선초기의 해남현을 그 모체로 보아 무리는 아니며, 대개 해남의 연혁을 설명할 때에 인용되는 『동국여지승람』의 해남현 건치연혁조의 기사 즉,
㈎ 본래 백제의 색금현으로 신라 때 침명(혹은 투빈)으로 고쳐 양무군의 영현이 되었다. 고려 때 지금의 이름 해남으로 고쳐 영암에 속하였고,
㈏ 본조(조선)에 들어와 ①태종 9년(1409) 진도현과 합해 해진현이 되었다. ②태종 12년(1412) 읍의 치소를 영암 땅 옥산에 옮겼고 ③세종 19년(1437)에 해남과 진도를 다시 분리시켜 해남현으로 삼고 현감을 두었다.
중에서 ㈎와 ㈏는 분리․설명될 수 있는 것이다. 즉 ㈎부분의 연혁은 현재의 해남지역 중에서 극히 일부인 고 해남지역(화산면․현산면 일대)에 국한된 설명이기 때문에 사실상 고려시대 이전의 해남지역을 설명하는 기사로써는 부족한 것이고, ㈏부분이 비로소 해남전역이 연혁으로 옳게 설명되었다고 보아야 맞는다.
현재의 해남군이 독립된 단일 행정편제로 비로소 묶어진 이 시기의 변화를 간추려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즉 위의 인용문(『동국여지승람』 해남현조)중 ㈏의 ①②③이 그 변화의 내용인데, ㈏-①이 왜구의 침탈로 부득이 해남 땅과 진도 땅을 합쳐 「해남현」으로 통합 편제한 결과였다. 이 시기가 태종 9년(1409)이니 아직도 변방과 해안지방은 매우 불안정한 상태였고 따라서 행정의 중심 치소도 별도로 마련하지 못한 상태였던 것이다. ㈏-②의 과정은 혼란의 와중에서 통합된 해진군이 갑자기 확대된 영역(고려시대 3현과 진도현)을 다스리는 관부로서 서서히 태동하는 모습이다. 합군 후 4년째인 태종 12년(1412)에 읍 치소를 고 해남(지금의 현산면)에서 현재의 위치로 옮긴 것은 그러한 사정을 말해주고 있다.
한편 세종대의 이러한 행정적 변화와 함께 보다 조직적이고 실제적인 부대시설의 설비도 추진되었으니 읍성의 축조나 수영․만호진성 같은 군사시설, 봉수, 역․원 등의 체제가 이루어진 것도 이시기를 전후하여서였다.
현재의 해남읍에 읍성이 축조된 시기는 정확하게 밝혀져 있지 않지만 대체로 이 분군 연대인 1437년을 전후한 시기일 것으로 추측된다. 즉, 『동국여지숭람』 해남현 누정조(樓亭條)에 정원루(靖遠樓)를 설명하면서,
(정원루는) 곧 성의 남쪽 누각으로 성화 기축년(조선 예종1)에 현감 성중성이 세웠고 성현의 기가 있다.
고하여 적어도 이 정원루가 건립된 1469년 이전에는 축성이 이루어졌을 것임을 알 수가 있다. 또 『세종실록지리지』 (1454년 찬)에는 읍성에 관한 기록이 성곽조에 나오지만(周回 三百三十六步), 문종대에 하삼도 연해읍성에 대한 전반적인 순심을 실시하였을 때(문종원년, 1450년) 해남읍성이 「내구」「퇴축」「개축」의 어느 종류에도 보이지 않고 있다. 문종대의 순심은 정분(鄭笨)에 의해 실시된 것으로 그 결과가 <문종실록> 동년 8~9월조의 실록기사에 상세히 나오는데 전라도의 경우 내구가 11처, 퇴축이 4처, 개축이 5처였다. 이처럼 『세종실록지리지』에 기록된 성곽이 그 보다 앞선 1450년의 순심에서 전혀 보이지 않는 것은 위에 든 3종(내구․퇴구․개축)에 해당되지 않았기 때문으로 보여진다. 결국 읍성 규모의 완성은 국제(規式)에 상응하는 수준으로 1450년 이전 어느 때인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해진군이 설립되었던 1409년에서 이 1450년 순심 이전 어느 때인가 축성이 있었음은 분명하고 합군시의 정황을 미루어 새로운 축성이 순조롭지는 못했을 것임을 감안한다면 1437년 분군의 어간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또 우수영의 전신이었던 수군처지사영이 무안대굴포(현재의 함평군 엄다면 대곡리)에서 목포(현재의 목포시 유달산아래의 목포진이 아닌 이로동 하당 부근인 것으로 추정됨)을 거쳐 현재의 우수영으로 옮겨 전라우부의 수군본영이 되는 것(세종 22년, 1440년), 옥천현이 영암에서 해남으로 이속되는 것(세종 30년, 1448년), 신갈부곡이 영암에서 해남으로 이속되는 것(세종 29년, 1447년), 그리고 그 연대는 분명하지 않지만 - 아마도 이 무렵일 것으로 보이는 - 황원현의 해남 이속 등이 모두 비슷한 시기에 이루어진 개편(再編)들이었다.
이 1430~1450년대 어간의 변화를 겪으면서 해남현은 현재의 해남 경역과 거의 같은 범위를 결정하고 이후 조선말까지 커다란 변화 없이 존속되었다. 이때까지도 이웃 군현의 월경지로 남아 있던 곳으로는 송지면 일대와 북평․북일면 일대, 계곡 옥천면 일대(모두 영암소속), 그리고 전술한 삼산면 일대의 진도소속지가 있었다.(이 조선초의 변화결과가 요약․정리된 자료로서 우리는 『동국여지승람』 1486년을 이용하고 있다.)
이상에서 조선조 초기에 “전라도 56관”의 하나로 독립된 해남현의 성립과정을 개관하였다. 하지만 보다 구체적이고 해남의 사정은 기록상 더 이상 추적이 곤란한 형편이다.
그러나 이러한 현의 성립 직후인 1400년대 중․후반기에 호남은 물론 전국적으로도 문명을 날린 금남 최부(錦南 崔溥-1454~1504)나 귤정 윤구(橘亭 尹懼-1495~1554), 석천 임억령(石川 林億齡-1495~1568), 미암 류희춘(眉岩 柳希春-1513~1577)등이 연속 배출된 지역으로서 앞으로 더 많은 문화적 배경과 성격들이 밝혀질 수 있으리라 판단된다.
한편 해로(조선시대에는 주로 漕運路)와 연접된 해안지역으로서 해남지방은 왜란기에 커다란 혼동을 겪어야 했다. 명종 연간의 달량진(達梁津) 사변이나 우수영을 중심으로 한 충무공의 활약상과 명량대첩(鳴梁大捷)은 바로 우리가 자랑삼는 대승첩이지만, 사실 그 이면에는 지리적 여건 때문에 해남지역이 겪어야했던 수난과 고통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현재 해남지역에 산재한 서원(書院)․사우(祠宇)의 배향 인물 중 이 왜란기의 충절인물이 거의 반수나 되는 것이나, 곳곳에 남아 전하는 당시의 의열사적(義烈事蹟)․구전(口傳) 등은 그러한 사실을 잘 반영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이 왜란 이후에 조선사회는 사회 여러 부면에서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 전환기를 맞이하게 된다. 17~18세기의 사회는 바로 이러한 진통을 딛고 서서 새로운 이념을 추구했던 시기였다. 이 시대를 통해 활약했던 해남인물은 그렇게 눈에 뜨이지 않는다. 고산 윤선도(孤山 尹善道-1587~1671)와 실학자로서의 면모가 강한 해금 오달운(海錦 吳達運-1700~1747), 덕촌 양득중(德村 梁得中-1665~1742)이 주목되는 이 시기 인물들이며, 표충사(表忠祠-대흥사)와 관련하여 유․불 인사들 간의 교류가 매우 이채롭다. 이 부면도 유적․유물의 발굴․조사에 못지 않게 앞으로 추구되어야 할 해남지역사의 한 과제라 할 것이다.
조선후기의 해남지역 면리 체계는 임란(壬亂) 이후에 마련된 것으로 『여지도서』(1759년)와 『호구총수』 (1789년)에는 현일면(縣一面), 현이면(縣二面), 녹산면(綠山面), 현산면(縣山面), 산일면(山一面), 산이면(山二面), 화일면(花一面), 화이면(花二面), 운소면(銀所面), 황일면(黃一面), 황이면(黃二面), 마포면(馬浦面), 청계면(淸溪面), 비곡면(比谷面), 장동면(場東面), 장서면(場西面)의 16개 면으로 나타나고, 고종대의 『읍지』(1871년)에는 현내․비곡․청계․마포․산포일도(山浦一道)․산퍼이도(山浦二道)․황원․장내(場內)․녹산․화산․현산․은소면의 12개 면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한글학회편 『한국지명총람』 해남군조에는 한말 행정개혁이전에 모두 18개 면이 있었다하여 『여지도서』와 『호구총수』에 보이는 16개 면 외에 문내면(門內面)과 관저면(管底面)을 적고 있다.)
고종 32년(1895)의 전국적인 행정개편과 함께 해남군으로 승격되면서 현일․현이면을 군일․군이면으로, 황일면을 화원면, 황이면을 문내면으로 고쳤고, 다음 해에는 도서지방을 완도군으로 이속 시키는 한편 1906년에는 오랫동안 월경지로 남아 있던 진도군의 삼촌면, 영암군의 옥천시면, 옥천종면, 송지시면, 송지종면 등 6면을 편입시켜 모두 23면이 되었다.
다음 1914년 4월 1일 군면 폐합과 함께 완도․영암․강진지역으로 해남과 인접한 지역을 병합 총 13개 면으로 하였는데, 이때의 13면은 최근 북평․북일면의 분면을 논외로 한다면 최근까지 그대로 유지되어온 셈이다. 그 뒤의 부분적인 변화는, ① 1921년 완도의 어불도가 송지면에 ②1955년 해남면이 읍으로 승격 ③1973년 대통령령 제6542호에 의해 송지면 월송리가 현산면으로, 마산면 보평리가 해남읍으로 편입 ④1983년 대통령령 제11027호에 의거 북평면이 북평․북일면으로 분면 되었다.
현재는 1읍 13개면 179개 리에 인구 100,000여 명으로 총 864.67㎢에 달하는 전남 최대의 군역을 자랑한다.
3. 사회경제
1) 면 적 : 총면적859,57㎢(임야 45,272㎡, 국유림 4,073㎡, 도유림 1,468㎡,
군유림 2,290㎡, 사유림 37,441㎡)
2) 인 구 : 세대수 33,630에 99,632명으로 남자 48,624명 여자 50,728명(세대수
전남대비 4.8%, 인구 전남대비 4,6%) 읍면 소재지 농어촌 지역 인구
대비 26,052명(26.2%) 대 73,340명(73.8%) 농가인구 총인구대비46.7%
인 46,386명인데 그중 남자 21,727명(46.8%), 여자 24,659명(53,2%)
3) 행정구역 : 1읍 13면 행정리 513 법정리 177 자연마을 564
4) 문화재 : 국가지정문화재(국보 1, 보물 10, 사적 2, 명승 1, 천연기념물 3,
중요무형문화재 1, 중요문속자료 2)
도지정문화재(유형문화재 10, 무형문화재 3, 기념물 14, 민속자료 1,
문화재자료 4)
5) 교육시설 : 학교수-103개교(유치원 46, 초등학교 36, 중학교 15, 일반계고등
학교 2, 실업계고등학교 4)
6) 문화공간 : 공연시설(1) : 영화관
문화시설(1) : 군민회관
문화보급(2) : 해남문화원, 전수회관
청소년수련시설(2) : 해남 유스호스텔, 해남교육청 학생의 집
체육시설(3) : 공설운동장, 공설운동장 체육관, 해남군 실내체육관
도서관(1) : 해남 공공도서관
복지시설(3) : 사회복지회관, 여성회관, 장애인복지회관
7) 기업체 : 총5624개사(단위노동조합 6, 지부및분화 6, 농림수렵업30, 광업 23, 제
조업 547, 전기가스수도 6, 건설업 157, 도소매 및 소비자용품수리 217
9, 숙박 및 음식점 1016, 운수 창고 및 통신업 374, 금융보험업 78, 부
동산임대 및 사업서비스업 130, 공공행정 국방 및 사회보장 87, 교육
서비스업 206, 보건사회복지사업 73, 공공사업 및 개인서비시업 706)
기타(주간신문 2, 중계유선 8, 등록된 출판사 4, 등록된 인쇄소 12)
8) 의료시설 : 총109개소(종합병원 1, 병원 1, 의원 24, 치과 9, 한방 5, 보건소 1,
보건지소 13, 약국 34, 약업사 10, 한약업사 11
9) 기 후 : 연평균 강수량-1,221㎜
연평균 기온-평균 13.8(평균최고 19.4, 극점최고 34.0, 평균최저 8.4,
극점최저 -10.3)
10) 기 타 :
인물
1. 성명(한글): 최 부
2. 성명(한문): 崔 溥
3. 본관: 나주
4. 아호: 금남
5. 생존시대(생몰년): 1454~1504
6. 출생지: 나주 동강면 성지촌
7. 인물설명: 금남은 지금 나주 동강면 성지촌에서 진사택의 아들로 태어났다. 금남은 호남사림의 사종으로 불려지는데 조선시대 사림파의 형성은 고려말 야은 길재의 제자 김숙자의 아들 점필제 김종직에서 시작된다. 김종직은 29세에 문과에 급제 62세에 죽기까지 현실정치에 왕도정치를 실현하려 애쓰며 많은 제자를 기르게 되는데 영남의 김굉필, 정여창 호남의 최부 등 105명에 이른다. 이들은 조선초 수차에 걸치는 정란으로 권력을 잡은 훈구파에 대립햇는데 이 싸움은 성종 연산을 거쳐 중종 명종까지 수차례의 사회를 일으킨다. 금남은 24세에 진사시에 합격했고 29세에 알성시에 합격 관로에 나간다. 동국통감과 동국여지승람 편찬에 참여했고 34세 홍문관 부교리 때 추쇄 경차관으로 제주에 파견되었다. 이듬해 윤정월에 부친의 부음을 듣고 귀향선을 탔가가 폭풍믈 만나 표류 끝에 중국 절강성에 닿앗다. 6개월 후에 귀국하게 되는데 성종의 명에 따라 표류에서 귀국하기까지의 과정을 “금남 표해록”이라는 3권의 책으로 만들어 바치고 고향에 돌아가서 3년상을 치렀다.
이 책에는 중국의 해로, 기후, 조류 등 지리와 연로(沿路),풍토, 산천, 관아. 민속, 의식, 제도 등 당시 명나라의 모든 것을 자세하고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다. r그 중에는 중국 수차(水車)의 제작법과 이용법도 기술되어 있는데 이러한 연고로 금남을 우리나라 실학사상의 선구자로 일 컸기도 한다.
연산군 3년(1497)에 성절사(聖節使)의 질정관(質正官)이 되어 명나라를 다녀와서 예빈시정(禮賓寺正)에 승진되었다. 당시 금남은 사림파로 불리는 혁신적인 신진사류와 뜻을 같이 했는데 그의 스승 김종직을 중심으로 훈구파로 불리는 기성세력 사이에는 정권차원의 심각한 대립관계가 계속되고 있었다.
이러한 때 연산군 4년(1498)에 사림파의 한 사람인 김일손이 쓴 조의제문(弔義祭文)이 말썽이 되어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나 사림파의 거의 전부가 죽거나 귀향을 가게 되었다. 금남은 단천(端川)에 유배되었으며 다시 연산군 10년(1504)의 갑자사화(甲子士禍)에 연류되어 투옥 후에 51세의 한창 나이에 참수 당했다.
그가 참수 당했응 때 그의 가족은 마산면 버드나무골(지금 상등리)에 살고 잇었으며 그의 무덤도 그곳에 마련되었었는데 30여년 전에 나주로 이장되었다. 금남이 나주에서 어느 때 어떠한 계기로 해난에 와서 살게 되었는지느 그의 처가가 해남이라는 점 외에는 자세히 알 수 없다 그가 관서제를 열고 후학을 가르치면서 살앗던 곳은 지금의 해리이다. 관은 사간(司諫)에 이르고 도승지(都承旨)를 증했다.
8. 관련유적: 해촌사(海村祠-또는 六賢祠)
9. 참고문헌: 해남군사(1925-해남군향교)/95년판 해남군사
1. 성명(한글): 임억령
2. 성명(한문): 林億齡
3. 본관: 선산
4. 아호: 석천(石川)
5. 생존시대(생몰년): 1496~1568
6. 출생지: 해남읍 해리
7. 인물설명: 석천은 증 이조판서 우형의 3째 아들로 해남읍 해리에서 태어났고 일찍 부친이 타계하고 어머니의 손에서 자랐는데 광산의 대학자 눌제 박상에게 글을 배웠다. 석천은 중종 11년 21세에 사마시에 합격 30세에 대과에 합격 옥당, 의정부 사인을 거쳐 44세에 사간원 대사간이 되었다. 을사사화가 나자 동생 백령을 설득하려 했으나 듣지 않자 동생에게 시를 지어 남기고 낙향했다. 그리고 뒤에 백령이 보낸 공신녹권을 태워버린다. 7년 뒤 동부승지에 임명되었다. 담양부사를 역임했으나 62세 벼슬을 버리고 담양의 서하당과 식영정에서 노후를 보내며 고경명 정철, 백광훈, 최경창, 임제, 양응현 등 제자들과 호남가단을 일으켜 성산동 계풍류의 시종(시종)으로 일컬어진다. 1568년 해남 자택에서 별세했다.
8. 관련유적: 석천사(石川祠-후에 해촌사로 개칭)
9. 참고문헌: 해남군지(1925년판)/해남군사(1995년판)
1. 성명(한글): 유희춘
2. 성명(한문): 柳希春
3. 본관: 선산
4. 아호: 미암(眉巖)
5. 생존시대(생몰년): 1513~1577
6. 출생지: 해남읍 해리
7. 인물설명: 미암은 해남읍 해리에서 계린(桂鄰)과 금남 최부의 둘쨰 딸 사이에서 태어났다. 16세에 부친이 별세하자 김안국 최산두에게 사사했다. 김안국은 그가 너무 영리하고 도리에 밝아 제자로만 대하지않고 동등헤게 토론했다 한다. 미암은 중종 32년 24세에 사마시에 합격 이듬해 별시에 병과로 등과, 춘추관 기서관을 거쳐 세자 시강원 설서를 지냈다. 그는 소탈하여 옷이 더러워도 개의치 않았고 방이 어지러워도 치우지 않았으나 학문과 정론토론에는 열심이었다. 동궁의 호학 습관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선조의 학문성취에도 영향을 줬다. 어머니 봉양을 위해 무장현감을 맡았다가 사간원 정언에 임명되었다. 명종이 즉위하자 윤언형 일파가 대윤(윤임, 유인숙)을 제거하려고 대간에 탄핵을 요청했으나 미암 등은 거부했고 윤원형은 대간을 파직하고 을사사화를 일으켰다. 이로 인해 미암은 제주로 유배가게 되었다. 그러나 다음해 양재벽서사건이 나자 함경도 종성으로 유배가 문정왕후가 죽기까지 19년간 종성에서 유배 생활을 했다. 이때 그의 부인 송덕봉과의 일화는 부인 송씨의 문재와 내조를 엿볼 수 있게 한다. 그는 매우 박학다식하였으며 성리학 원리에 충실한 도학자였으나 정치적 식견은 부족했다고 율곡의 석담일기는 전한다. 호남의 도학정신 신장에 앞장섰고 국가 변란 때는 충절에 몸바쳤으며 실학을 실천하고 연구한 실학의 산실이기도 했다.
그는 또 기록문학의 대가이기도 했다. 『미암일기』는 선조 즉위년 부터 선조 11년 그가 죽기 이틀 전까지의 개인기록이다. 조정의 공적 사적 일부터 개인사까지 즉 당시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지금 보물 260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임진외란으로 선조 25년 이전의 승정일기(承政日記)가 모두 불타버린 상황에서 선조실록을 만들 때 이이의 경연일기(經延日記)와 함께 참고가 되었다. 그 외에도 국조유선록(國朝儒先錄), 역대요록 2편, 득몽구 동 저술이 남아 있다. 미암은 1577년 정2품 자헌대부로 승계한 5월 15일 서울에서 별세했다. 관은 호운관부제학이며 추증 좌찬성에 시호는 문절이다. 1남 1녀를 두었으며 담양에 모현관이 있다.
8. 관련유적: 해남 해촌사/담양 모현관
9. 참고문헌: 해남군지(1924판)/해남군사(1995년판)
10. 자료제공: 해남문화원
1. 성명(한글): 윤구
2. 성명(한문): 尹衢
3. 본관: 해남
4. 아호: 귤정(橘亭)
5. 생존시대(생몰년): 1495~1542
6. 출생지: 해남읍 해리
7. 인물설명: 진사 어초은 효정의 아들로 해남읍 해리에서 태어나 연동에서 자랐다. 19세에 사마시 22세에 문과에 급제 승정원 주서(注書)에 제수되었다. 그 뒤 예조좌랑 홍문관 교리를 역임했는데 최산두 유성춘과 호남 3걸이라 불렸다. 그는 청백한 관리였다. 승정원 주서로 있을 때 임금에게서 안당, 김전, 이계명 중에서 정승을 추천하라는 명을 받았는데 정승들(영의정 정광필, 우의정 신용개)의 자문을 구하고 돌아오는 박세희가 안당을 추천하자 그도 따랐다. 그 뒤 기묘사화 때 그 때 추천을 잘못했다 하여 문책을 당하고 따라서 조광조의 당이라 하여 삭직을 당하고 해남에 유배되었다. 그러나 박세의에게 책임을 넘기지 않고 자담하여 선비의 풍도를 지켰으며 뒤에 복관되었지만 나가지 않고 고향에서 금남, 석천과 종유하며 후진 양성에 힘썼다. 해촌사에 배향되었다.
8. 관련유적: 해촌사
9. 참고문헌: 해남군지(1924)/해남군사(1995)
3. 본관: 수원
4. 아호: 옥봉(玉峯)
5. 생존시대(생몰년): 1537~1582
6. 출생지: 장흥군 안량면 기산리
7. 인물설명: 옥봉은 장흥군 안량면 기사리에서 출생했으며 그의 맏형 광홍, 둘째형 광안, 사촌동생 광성과 일문사문장(一門四文章)이라 불렸다. 5세에 해남 옥천 대산리 옥산서당에서 정응서의 제자로 글공부를 시작 6세에 시를 지었고 글씨에 특출했다. 13세에 서울로 유학하여 노수신, 박순 등에게 사사했다. 27세에 아버지의 뜻에 따라 사미시에 응시 급제했으나 문과 응시는 하지 않고 당시의 혼탁한 사회상을 비판하며 고향에 돌아와 재야 학자로 시인으로 남았다. 처음에 스승의 사위가 되었으나 24세에 부인이 죽었다. 고향에 돌아와서 하동정씨 강왕의 딸을 아내로 맞아들여 송산리로 이사했다.
선조 5년(1572) 그의 나이 33세 때 명나라 사신이 우리 나라에 왔다. 이때 이들의 접반을 맡은 노수신이 그들과 응대할 수 있는 사람으로 백광훈을 추천했는데 사신들은 물론 조정에서도 그의 글씨와 시문의 탁월함에 놀라게 되었다. 광훈은 당시 박순의 문하에서 자웅을 겨루던 최경창, 이달과 함께 성당(성당)의 시풍에 들어갔다 하여 삼당시인으로 일컬어졌으며, 최경창, 양사언, 송익필, 이신해, 이순인, 윤탁연, 하응림 등과 더불어 4절 8문장으로 손꼽혔다. 또 글씨도 명필로 알려젺는데 특히 영화체(영화체)는 글 따를 사람이 없으리만큼 독보적 경지에 이르러 해동필가의 한사람이 되었다.
그의 서실에는 중국사신 주지번이 찾아와서 써준 현판이 걸려 있다. 벼슬에는 뜻이 없었으나 친지들의 권에 못이겨 41세에 선능참봉을 제수 받고 44세에 예빈시참봉 등을 거쳐 소격서(소격서) 참봉으로 재직 중에 발병하여 46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1590년에 강진 서봉서원에 이후백, 최경창 등과 함께 배향되었다. 옥천면 송산리에 잇는 옥봉사당에서는 매년 봄, 가을에 추모제를 올린다.
8. 관련유적: 옥봉사당/옥봉유물관
9: 참고문헌 : 해남군지(1924)/해남군사(1995)
1. 성명(한글): 정운
2. 성명(한문): 鄭運
3. 본관: 하동
4. 아호:
5. 생존시대(생몰년): 1548~1598
6. 출생지: 해남군 옥천면 대산리
7. 인물설명: 옥천 대산에서 태어나 7세때 정충보국이라 벽에 써붙이고 나라에 충성을 맹세하더니 1570년에 무과에 급제, 북방의 오랑캐를 무찌르는 공을 세웠다. 웅천현감․삭녕군수를 지내고 임진년에 녹도만호로 있다가 경상도 수군이 원병을 청하는데 이순신이 주저하자 나라를 구하고 왜적을 무찌르는데 경상도 전라도가 어디 있느냐고 강력히 주장하여 임진외란 제해전의 대첩을 이끌어내는데 언제나 압장섰거니와 동래 몰운대해전에서 유탄에 맞아 전몰하니 50세였다. 선무원종 1등훈에 오르고 증병조판서에 충장(忠壯)이라 시호했다. 임금이 녹도에 사우를 세우도록 명하니 지금에 전한다. 효종 임진(1652)에 본군 경호에 사우를 세웠는데 숙종이 충절사라 사액했다. 지금은 옥천 대산리에 옮겨 모시고 있다.
8. 관련유적: 대산리 충절사
9. 참고문헌: 호남절의록
1. 성명(한글): 백진남
2. 성명(한문): 白振南
3. 본관: 수원
4. 아호: 송호(松湖)
5. 생존시대(생몰년): 1564~1618
6. 출생지: 해남군 옥천면 대산
7. 인물설명: 옥봉의 아들로 옥천 대산에서 출생했다. 15세때 부친을 모시고 서울에 가던 중 시를 지어 좌중을 놀라게 했다. 임진왜란 때 난중에도 어머니를 극진히 봉양하는 한편 군수 물자를 모취하며 의병활동에 참여했다. 정유재란 때도 이순신 장군을 도왔다. 27세에 사마시에 합격하나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초야에 묻혀 살았다. 백의 중국사신의 접빈관이 되었는데 중국사신 주지번이 그의 문명에 감탄했다. 그는 삼산 송정에 송호정을 짓고 자적했다.
8. 관련유적: 송호정지/낙낙장송
9. 참고문헌: 해남군지(1924)/해남군사(1995)
1. 성명(한글): 오달운
2. 성명(한자): 吳達運
3. 본관: 동복
4. 아호: 해금(海錦)
5. 생존시대(생몰년): 1700~1747
6. 출생지: 해남
7. 인물설명: 해남군 청계면 흑석산 밑 용지리에서 시탁의 아들로 출생했다. 아직 책을 읽기 전의 일인데 이웃집 감에 속에 까만 점이 있었는데 아무도 그 연유를 알지 못했다. 어린 해금은 감나무에 돌이 박혀 있을 것이라 했다. 사람들이 나무를 베어보니 과연 그러했다 그토록 그는 어릴 때부터 어떤 일이나 그 근원을 파는 성격이 있었다. 6세에 어머니를 잃고 10세에 영암의 김순행에게 글을 배우고 향시에 급제했으나 과거는 응시하지 않았다. 과거 문체가 고루해서 학문의 풍토를 망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런 고루한 문체를 써서 자신의 의지를 굽힐 수 없다는 것이었다.
30세 무렵 나주로 이거해서 서당을 열고 후진 양성에 힘썼다. 당시 그에게서 수학했던 이행유는 해금이 나주에 끼친 교화 성취의 공이 크다고 말했다. 40세에 부친 봉양을 위해 과거에 응시하여 1년 5장원으로 주위를 놀라게 했다. 그리하여 재상가의 서녀를 첩으로 맞으라는 권유며, 집권세력의 당인이 되라는 권유, 그리고 권세가에 청탁하라는 권유를 단호히 물리치고 일시 승정원 사관을 거쳐 외직인 오수도찰방(鰲樹道察訪-영조22-1746)이란 하관말직으로 1년 가까이 재직 중에 더위를 먹고 47세의 나이에 돌연 사몰하니 곤궁한 살림에 10세의 아들이 남았다. 유택은 처음에 나주 지량면 가척동에 마련했는데 후에 그 아들이 산이면 대진리 원항으로 이장했다.
저서에는 17세기 초의 국가 제도와 여러 가지 폐단을 정확하게 분석하고 지적한 왕패략(王覇略) 10여책, 호남지방의 갖가지 행정․군사․휼민 등에 대한 시정책을 적은 호남책(湖南策) 8책, 만물의 영장인 우리 인간이 배워야할 도리와 방법을 밝힌 종학도설(從學圖說)과 동양철학의 진수를 독창적으로 확충정립한 이기론(理氣論) 등이 잇다.
8. 관련유적: 용지사
9. 참고문헌: 국역 해금 오달운 문집
1. 성명(한글): 윤선도
2. 성명(한문); 尹善道
3. 본관: 해남
4. 아호: 고산(孤山)
5. 생존시대(생몰년); 1587~1671
6. 출생지: 서울
7. 인물설명; 〔행적〕고산은 선조 20년(1587) 6월 22일 한성부 동부 연화방-현 서울 종로구 연지동에서 아버지 유심과 어머니 순흥 안씨의 2남으로 태어났다. 호는 고산 또는 해옹(海翁), 자는 약이(約而)인데 해남종가에 아들이 없어서 8세 때 종가에 입양하여 해남윤씨의 대종을 이었다. 강직하고 곧은 성질에 남인의 한 사람이었던 고산의 일생은 정치적으로 늘 불행하여 생애의 대부분을 유배지에서 보냈다.
고산이 진사시에 합격한 것은 광해군 치하의 26세 때였다. 이때 고산은 광해군의 간신들인 이이첨 일파의 불의 비정을 병진상소를 올렸다가 함경도 경원에서 생애 최초의 유배생활을 시작했다. 그리고 다음해에 경산도 기장으로 이배되어 6년간 유배생활을 했다.
1623년에 인조반정이 성공함으로써 유배에서 풀려나 의금부도사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고산은 이르 사양하고 고향 해남으로 돌아와서 두문불출 은둔생화에 들어갔다.
그후 42세에 별시 초시에 장원급제하고 봉림대군과 인평대군의 사부를 맡고 7년간 중앙정계에 머물면서 정치적 경륜을 쌓아했다. 그러나 48세에 성산현감으로좌천되자 경세의 뜻이 좌절되자 이듬해 현감직을 내놓고 다시 해남으로 돌아왔다. 인조 14년(1636)에 고산의 나이 50세 때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고산은 향리 자제와 가동 수백을 이끌고 배를 저어 강화에 이르렀는데 그 때는 이미 인조가 삼전도에서 치욕적인 화의를 맺은 뒤였다. 고산은 배를 돌려 제주도를 향해서 떠났다. 세상을 버리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보길도에 이르러 그 아름다운 경관에 반하여 이곳을 기세(棄世)의 땅으로 정하고 머물게되니 이곳이 바로 이른바 “어부사시사”의 생향(生鄕)이다.
그러나 고산의 시련은 이로서 끄난 것이 아니었다. 74세 때에 효종이 승하하자 효종의 산능문제와 조대비의 복제문제로 서인과 대립하게 되었다. 이로써 그의 주장이 과격하다하여 송시열 등이 고산에 대한 사형을 주청하였지만 선왕의 사부를 죽일 수 없다는 현종의 뜻에 따라 함경도 삼수로 유배되었으며, 79세(현종 6) 때 광양으로 이배되어 7년 4개월의 길고 긴 유배생활 끝에 81세로 유배에서 풀려나 고향에 돌아왔다. 고산은 유배에서 풀려난 뒤 1671년 6월 11일 보길도 낙서제에서 향년 85세로 시련과 극복-득의와 풍류-고난과 개척으로 교차된 일생을 마쳤다. 그의 유택은 생전의 유언에 따라 현산면 금쇄동에 마련되었다.
〔문학〕고산의 생애는 정치적으로 불운하였지만 문학적으로는 국문학의 비조라 이를 만큼 매우 뜻깊은 생애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고산이 창작산실이요 은거지는 해남의 현산면과 완도의 보길도였다. 현산은 첩첩 산중으로 육로를 거쳐 찾아야할 산수자연이요, 보길도는 배를 타고 찾아야할 해중자연이라는 서로 대조되는 삶의 공간이었다.
해남에서 문학생활의 주무대는 현산면 만안리에 있는 근쇠동과 문소동, 수정동이었여기서 번갈아 10년을 머물면서 산중신곡 금쇄동기 등을 생산했고 보길도 부용동에서는 일곱차례에 걸쳐 12년간을 살았다.
고산의 문학은 크게 3기로 나눈다. 함경도 경원 유배지에서 지은“견희요” “우후요”로 대표되는 초기와 해남 금쇄동과 완도 보길도에 머물면서 지은 “산중신곡 “속산중신곡”“어부사시사”의 중기, 경기도 양주의 고산에서 지은 “몽천요”는 후기로 구분된다. 전기의 작품이 현실참여가 박탈된 유배지에서 지은 것이라면 중기에는 은가지에서 이상적인 절대공간을 노래했다. 따라서 그의 작품들은 그의 생활공간에 따라 현실정치 참여에 대한 동경과 갈망, 자연에의 안주와 몰입 등의 상반된 욕구가 팽팽하게 긴장관게를 이루고 있다. 해남은 그의 음영 짙은 내면풍경과 삶의 흔적을 더듬어 볼 수 있는 곳이며 그의 생애와 시문학은 이곳과 밀접하게 얀결되어 있다.
현산면 금새동에서 지은 “오우가”를 보면 이 시에 등장하는 물․돌․소나무․대나무․달은 현실세계에 존재하는 구체적인 존재가 아니다. 물은 흘러가는 물이 아니며, 달은 세상 만물을 비춰주는 만인의 달이 아니다. 물과 바위, 소나무와 대나무가 어우러진 정원, 그리고 달은 한정적으로 그 정원을 비춰 주도록 조직되어 있다. 고산의 자연은 현실적 욕구의 좌절을 위로하여 주는 기능을 담당하는 심리적 피난처였다. 초기의 은거가 이러한 일반적인 은자의 모습을 지니는데 비교해 후자의 은거는 좌절의 극복을 심리적으로 자연에 수기는 것으로 나타나 더욱 절제되고 심오한 시 세계를 보여준다.
〔원림〕호남지방에는 담양의 면암정가단, 성산의 소쇄원가단, 장성의 기산가단 등 원림가단을 형성했던 곳이 많이 있다. 고산의 금쇄동가단도 여기에 포함된다. 금쇄동은 현산면 만안리에 위치한다. 고산이 53세에 경상도 영덕 귀양에서 풀리어 돌아온 뒤에 금쇄동기 산중신곡 등의 명작을 낳았는데 금쇄동과 문소동, 그리고 수정동은 그 주무대가 된다.
고산이 선호한 자연은 하나는 본래부터 있은 자연이요, 하나는 순수자연에 인공을 가한 조형자연이었다. 보길도에서 자연 속에 연못이나 정자 등을 지어 부용동 원림을 조영하고 현산의 금쇄동과 수정동을 경영한 것은 조형자연의 구축을 의미한다. 보길도의 부용동 원림에 비해 세상에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만안리 저수지 상류에 위치하는 수정동에능 당시 고산이 구축한 정자와 연못, 수정폭포가 남아 있어 이를 잘 증면하여 준다.
국문학대계 고산시가에 의하면 고산의 시가로 현전하는 것이 대략 75수라고 한다. 어려운 것을 걸러낸 쉬움과 복잡한 것을 씻어낸 간소함, 이것이 바로 고산문학의 남다른 특성이라고 한다. 현재 해남읍 연동에는 고산이 살았던 녹우당과 그의 유물이 전시된 유물관이 있다.
8. 관련유적: 녹우당/유물관
9. 참고문헌: 해남군지(1924)/해남군사(1995)
1. 성명(한글): 윤두서
2. 성명(한문): 尹斗緖
3. 본관: 해남
4. 아호: 공재(恭齋)
5. 생존시대(생몰년): 1668~1715
6. 출생지: 해남
7. 인물설명: 공제 윤두서는 겸제 정선, 현제 심사정과 함께 조선 후기 3제의 한 사람으로 예리한 눈으로 사물을 관찰하여 전통적인 회화세계를 바탕으로 자신의 화풍을 이루어낸 선비화가였다. 공제는 현종 9년(1688)에 해남 연동리에서 윤이후의 넷째 아들로 태어나 윤선도의 종손 윤이석에게 입양했다. 자는 효언(孝彦)이고 호는 공제 또는 종애(鍾涯)라 했다.
어릴 때부터 문예에 뛰어났으며, 특히 필법에 고명했다. 25세인 숙종 15년(1689)에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남인인 처지를 경계하여 스스로 벼슬에 나가지 않고 친구들과 교우하며 학문에 열중했다. 특히 성호 이익의 둘째형 이서, 그리고 심경득과 절친했는데 그들과의 교류는 그의 학문에 큰 영향을 끼쳤다. 특히 조선 후기 실학을 대성한 성호집안과 공제와의 교우는 후기 실학의 대표적 학자 이익이나 다산 정약용에게 끼친 영향이 컸다.
윤두서의 학문은 증조부 윤선도가 전형적인 성리학자였던 만큼 그러한 가풍에서 교육받은 바 전통적인 성리학 체계를 바탕에 깔고 있었다. 때문에 다른 실학자들과는 달리 당시의 모순과 폐단을 성리학을 근원적으로 구현함으로써 극복할 수 있다는 기대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신분적으로 사대부계층에 속하면서도 특권 중심세력에서 벗어나 있었던 환경적 요인과 성호집안과의 교류를 통해 현실을 날카롭게 직시하고 현실에 대한 개혁을 추구하는 발판을 만들어나갔다. 그리하여 농민의 부채를 탕감해주고 부채 장부를 불살라버리는 등 파격적이며 혁신적인 지식인으로 발전해나갔다.
공제는 제가의 서적을 연구하되 다만 문자만 강구하여 귀로 듣고 입으로 말하는 것을 학문의 자료로 삼지 않았다. 반듯이 정확하게 조사 연구하여 옛사람의 말의 뜻을 파악하여 스스로 체득하고 사실에 비추어 실제로 경험하였다. 그는 어려서 글씨를 배울 때 종왕의 법을 취했다. 또한 당송 이하의 여러 명가와 우리 나리 제가의 법을 배워 장단점을 직접 경험했으며 이옥동 선생과 영자필법을 연구하여 옛사람이 전해주지 않은 뜻을 깊이 헤아려 체득했다. 공제는 옛 법에 얽매이지 않고 일가의 체를 스스로 완성했다. 그는 또 예전체와 팔분법이 근세 이래 쇠퇴하여 볼만한 것이 없자 진한(秦漢) 이래 간행된 금석문자를 많이 수집 연구하여 독자적인 서체를 체득했다. 또 공제는 어진 사람을 좋아하고 선을 즐겨하는 마음이 높아 아무리 미천한 사람일지라도 한가지 예와 능에서 취할 점이 잇다면 반듯이 사랑하고 아끼며 다정하게 대했다.
공제는 서 하를 모두 잘했으나 특히 그림에 있어서 겸제정선, 현제 심사정과 함께 삼제를 일컬었다 공제는 조선 전기의 관념성을 지향하던 문학, 예술이 임진외란 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사회정치 상황의 변화에 따라 실사구시의 새로운 조짐이 싹트기 시작하여 진경산수화와 일반 백성들의 생활과 정서를 반영하는 풍속화가 그려지기 시작한 시기에 활동했다. 그는 사람이나 동물을 그릴 때 종일 관찰한 뒤에야 비로소 그렸다. 의 이러한 태도는 외형묘사 뿐만 아니라 정신의 표현까지 이르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8. 관련유적: 공제 윤두서의 생가
9. 참고문헌: 해남구지(1924)/해남군사(1995)
1. 성명(한글): 윤덕희
2. 성명(한문): 尹德熙
3. 본관: 해남 윤씨
4. 아호: 낙서(駱西)
5. 생존시대(생몰년): 1685~1756
6. 출생지:
7. 인물설명: 공재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공재와 옥동 이서 선생에게 글과 필법을 배웠다. 영자 팔법을 전수 받아 편액과 왕희지의 초서체에 능했다. 5세에 어머니를 여의고 난 그는 할머니 손에서 자랐으며 기상이 출중하고 호방하여 이름난 선비나 명문가라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깊이 사귀지 않고 비천한 사람도 마음에 들면 흉금을 털어놓고 사귀어 귀천에 구애받지 않았다. 아버지에게 그림을 배우지는 않았으나 천부적 재질과 노력으로 그림을 잘 그려 “하경산수도” “기마부인도”등을 그렸으며 말과 신선을 잘 그려 공재와 함께 쌍절이라 불렸다. 1748년 숙종의 어용을 그리라는 어명을 받고 사양하다 감독의 책임을 맡고 완성했다. 그 공으로 금부도사에 제수 됐으나 사양하고 고향에 돌아와 자적하였다. 공재, 낙서 그리고 낙서의 아들 청고 용으로 이어 지는 3대화맥은 해남의 자랑이다.
8. 관련유적:
9. 참고문헌: 해남군지(1924)
1. 성명(한글): 윤 용
2. 성명(한문): 尹 溶
3. 본관: 해남 윤씨
4. 아호: 청고(靑皐)
5. 생존시대(생몰년): 1708~1771
6. 출생지:
7. 인물설명: 청고는 낙서의 아들로 영조 11년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그림을 그리되 나비, 잠자리를 놓고 미세한 것까지 살펴 똑 같도록 그림을 그렸다. 작품으로 연강색도, 홍각춘망도 등이 있다.
8. 관련유적:
9. 참고문헌: 해남군지(1924)
1. 성명(한글): 충의공 이유길
2. 성명(한문):
3. 본관:
4. 아호:
5. 생존시대(생몰년): 1576~1619
6. 출생지: 서울
7. 인물설명: 서울에서 찰방 선경의 2남으로 태어났다. 임진왜란에 서울에 침입한 왜적에게 부친이 참살당하자 14살 어린나이에 부친의 원수를 갚겠다며 남쪽으로 내려와 지금의 삼산면 충리에 거접했다. 정유재란 때 이순신의 명량해전에 의병으로 참여 공을 세우고 선조로부터 어전무과를 보고 9품직과 “충효” 두 글자를 하사받았다. 평안도 영유현령으로 재임시 명나라의 파병 요청으로 광해의 명을 받아 강홍립 휘하의 우영장으로 출전하였다가 강홍립이 청에 항복의 뜻을 밝히자 은혜를 모르는 짐승같은 짓이라 꾸짖고 끝까지 적과 싸우다 죽게되엇는데 옷을 찟어 혈서로 전황을 적어 말갈기에 묶어 보내니 말이 서울집으로 달려와 길게 울고 죽었다. 동생 복길이 압록강에서 초혼을 하여 파주에 허묘를 쓰고 아래에 애마를 묻었다. 그 뒤 영의정에 추증되고 충의 시호를 받았는데 삼산면 충리에 유허비가 있다.
8. 관련유적: 삼산면 충리
9. 참고문헌: 해남군지(1924)
1. 성명(한글): 초의선사
2. 성명(한문): 草衣禪師
3. 본관: 석
4. 법명: 의순
5. 생존시대(생몰년): 1786~1866
6. 출생지:
7. 인물설명: 초의는 속성이 장씨이며 법명은 의순, 전남 무안 삼향 출생이다. 그의 어머니의 꿈에 큰 별이 품에 들어오는 것을 보고 잉태하였다. 어려서 냇가에 목욕을 하다. 스님에게 구출을 받고 15세에 남평 운흥사 벽봉스님에 의해 스님이 되고 대흥사 완호 스님에게 구족계를 받고 초의라는 당호를 받앗는데 공부에 정진 하여 불경과 율.론에 통달하였다. 20대 중반에 대흥사에 있으며 강진에 귀향와 있는 25세 연상의 다산과 교유하며 유학과 시문을 논하고 또 배웠다. 30세에 서울에서 추사를 만나 교유하고 홍석주와 다산의 자제들과 사귀면서 시서를 나누었다. 또한 낭암스님에게 불화를 배워 그림에도 일가를 이루었으며 소치를 길러 남종화의 맥을 세웠다.
초의는 대흥사 주지로 대둔사지 집필과 여러 일들을 하고 일지암을 지어 놓고 차를 재배하여 음다하며 동다송과 다신전을 펴냈다. 초의는 시서화 3절에 다의 중흥조로 불리며 유학자 특히 실학자들과의 교류로 근대 개화사상을 섭렵했다. 한편 불학에도 두각을 나타내 백파선사의 선문수경에 반론을 제기하는 사변만어를 지어 백파의 선론을 비판했다. 초의는 추사와 동갑으로 막역한 사이였으며 그의 귀양지인 제주에 찾아가기도 했고 추사도 귀양이 풀리자 귀경하는 길에 초의를 찾았을 정도였다. 초의로 부터 사미계를 받은 이가 400명 보살계를 받은이가 70명이다. 초의는 불교문화의 파수꾼이며 불교 근대화의 초석을 놓았으며 다문화의 중흥조요 시와 글 그림에 한경지를 이룬 예술가였다.
8. 관련유적: 대흥사 일지암
9. 참고문헌: 김윤세역 동사열전
1. 성명(한글): 이진원
2. 성명(한문): 李振源
3. 본관: 원주이씨
4. 아호:
5. 생존시대(생몰년): 1845~1915
6. 출생지: 마산 맹진
7. 인물설명: 원주이씨 강릉공 8세손으로 마산 맹진에서 태어난 그는 영조때 왕비의 치료를 부탁받을 정도로 의술에 뛰어났으며 수궁벼슬을 받았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등 화타와 편각에 비견되기도 한다. 지역에 살며 지역주민의 질병치료에 애썼던 그는 어의 물망에 올랐으나 당파 싸움 때문에 밀려 어의가 되지는 못했다고 한다. 한번의 실수로 한 생명이 죽는 것을 본 그는 자신의 뒤를 이으려는 아들에게 100명을 살리더라도 한사람을 죽이면 그 죄업을 씻을 수 없다며 말리고 죽음에 인해 자신의 의서를 전부 불태워 버렸다. 꼿꼿한 자세로 의술인의 길을 갔던 이진원은 첨 지중추부사를 제수 받았으며 황산면 원호리에 묻혔다.
8. 관련유적: 맹진리 생가
9. 참고문헌: 해남군지 (1924)
문화재
1. 분류: 국보
2. 명칭(한글): 공재 자화상
3. 명칭(한문): 恭齋 自畵像
4. 소재지: 해남군 해남읍 연동리(고산유물관)
5. 지정년도: 1987. 12. 26.
6. 지정번호 : 국보 제240호
7. 제작시대: 17세기말에서 18세기초
8. 문화재 설명: 17세기말에서 18세기초에 활약한 대표적인 선비화가, 윤두서(尹斗緖)는 고산 윤선도의 증손이며, 다산 정약용의 외증조부로 자는 효언(孝彦)이요, 호는 공재이다. 시․서․화․ 음악․. 공예 등 다방면에 능통했고, 지리․천문․수학 등 폭넓은 학식을 지닌 실학자였으며, 겸제 정선(謙齊 鄭敾) 현제 심사정(玄齊 沈師正)과 함께 후기 조선의 삼제(三齊)로 일컬어졌다.
관념성을 지향하던 조선 전기의 문학예술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사회 정치상황의 변화로 실사구시의 새로운 조짐이 싹트기 시작하여 진경 산수화(山水畵)와 일반 백성들의 생활과 정서를 반영한 풍속화(風俗畵)가 그려지기 시작했는데 공재는 바로 이러한 시기에 활동한 사람이다.
공재의 그림은 보물 제 481호로 지정된 「해남윤씨가전고화첩」 두 권에 수록된 70여 점과 그 외 50여 점 등 1백 20여 점이 전하고 있는데 소제는 산수․자화상․풍속화․초상화 등으로 다양하다.
그는 모든 인간이나 동식물을 그릴 때 종일 관찰한 다음에 그렸기 때문에 그의 그림은 사실적 경향을 나타내고 있으며 더 나아가 정신의 표현까지 이르고 있다.
날카로운 관찰력과 뛰어난 묘사력을 보여주는 공재의 자화상은 안면 붓질이 많이 몰리는 곳에서는 어두운 분위기가 형성되어 보는 이로 하여금 양감(量感)을 느끼게 한다. 가는 선으로 처리된 수염은 안면을 보다 부각시켜서 예리하게 직시하듯 그려진 눈동자와 함께 강한 힘과 생기를 느끼게 하며, 거짓 없는 외모와 그의 정신세계를 솔직하게 드러낸 작품으로 동양인의 자화상으로는 최고라는 평을 받고 있다.
사색하는 선비가 자신의 모습을 때어놓고 바라본다는 사실 자체가 또한 인생을 성찰하는 철학적인 짙은 훈기를 느끼게 한다. 그 털끝 하나 소홀히 하지 않는 정기 어린 그의 선묘(線描)된 모습에는 사실을 초월하는 동양철학의 아름다움이 서려 있다. 이 자화상은 얼굴 이외의 다른 신체는 모두 생략함으로써 자화상의 상징성을 극대화하였는데 이러한 회화적 단순성으로 말미암아 보는 이의 시선이 공재의 안면에 집중되어 그의 시선과 보는 이의 시선이 맞부딪치면서 그림의 생명력이 전달된다.
다음 「해남 윤씨 가전고화첩 일괄」에서 다시 보겠지만 「백마도」는 말이 비대하면서도 단단하게 묘사되어 있는데 정지된 상태에서 뒷다리는 살짝 들어올리는 조그만 변화로 생동감 있게 표현했다.「두 여인」은 자화상에 다음가는 작품이며 「동국여지도」는 사실주의적이고 실학적인 면을 엿 볼 수 있는데 1710년에 제작된 것으로 조선말기 김정호가 제작한 대동여지도 보다 150년 정도 앞선 것이다. 이 지도는 각도를 색깔로 나타내고 있는 점 역시 그의 섬세함을 입증해 준다.(문책: 편집자).
연려실기술의 평
윤두서(尹斗緖)는 참의(參義) 윤선도(尹善道)의 손자이며, 호는 공재(恭齋)이다. 인물과 동물․식물을 그릴 적에는 반드시 종일토록 주목(注目)하여 그 참 모습을 얻은 다음에야 그렸다. 홍득귀(洪得龜)가 그의 용(龍)과 말의 그림을 보고 놀라면서, “공민왕 이후에는 이런 작품이 없었다”고 하였는데, 이로 말미암아 저명해졌다. 두서는 인물화는 잘 그렸으나 산수화는 그의 장기가 아니었다. 먹을 짙게 하여서 소담(疎淡)하고, 평원(平遠)한 멋이 부족하고 포세(舖勢)도 익숙하지 못하여서 무르익고 윤택한 태도가 없었다. 일생동안의 작품이 화첩(畵帖)정도였고, 병풍․족자는 드물었다. 재주를 믿고 스스로 높은 채하여 마음이 내키지 안으면 작품 내기를 즐겨하지 않았으므로 이 때문에 전해진 그림이 드물다.
두서의 긍지(矜持)가 너무 과하여 남의 요구에 절대로 응하지 않았으나 오직 이사관(李師寬)․이하곤(李夏坤)․민용현(閔龍見)이 요구하면 즉시 응하여서 <이 사람들은> 모두 3, 4첩씩 간직하였고, 장자(障子)에 그린 것도 많았다. 하곤에게는 만마도(萬馬圖)가 있었다. 이 세 사람은 모두 서인(西人)이었으므로 이 때문에 비방(誹謗)이 떼지어 일어났다.
숙종(肅宗) 말년(末年)에 임금의 화상을 그리려고 그림으로 유명한 사람이면 벼슬아치나 선비를 막론하고 모두 청역(廳役)에 예속시켰다. 그때에 두서(斗緖)는 마침 상중(喪中)에 있었는데 임금이 기복(起復)시켜 부르고자하여 대신들에게 의논하게 하였더니, 남구만(南九萬)이 의논하기를 “예(禮)에, 「군자(君子)는 남의 친상(親喪)을 빼앗지 아니하며 또한 친상을 빼앗길 수도 없는데, 오직 전란(戰亂) 때만은 불가피하다」하였습니다. 지금 전하의 어용(御容)을 모사(模寫)하는 것이 사체가 매우 중하나, 전란의 위급함과는 다름이 있을까 하옵는 바 전하께서 두서를 꼭 기복시키는 것은 남의 친사를 빼앗는 것이며, 신하가 왕명을 그대로 받들면 이것은 친상을 빼앗겼다 한 것이오니 결단코 좋은 시대에 있을 일이 아닙니다. 전란이라 할지라도 공양전(公羊傳)에서는, 「임금으로서 상중의 신하를 기복 시키는 것은 잘못이나 상중의 신하라도 임금의 명대로 거행함은 얘(禮)이다」하였는데, 하물며 전란이 아닌데도 신하를 기복 시킬 것입니까. 국기를 유지함은 예법을 엄하게 하는데 있으니, 경솔하게 변경하고 문란하게 하여서는 안 됩니다. 또 명(命)이 내리 뒤에 명을 받은 자가 마침내 그대로 받들지 아니하면 국가 체면만 손상되고 일에 무익하오니 이 점도 염려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하였다. 두서는 부끄럽게 여겨서 해남으로 아주 돌아가서 화필(畫筆)을 끊고 그리지 않았으며 얼마 후에 죽었다.
두서는 사인(寫人) 심득경(沈得慶)과 금석(金石) 같은 사귐을 하였다. 득경이 죽으니 두서가 득경의 화상을 추작(追作)하여 그집에 보냈다. 그림을 보고 온 집안이 놀라서 울었는데, 손숙오(孫叔敖)가 되살아난 것 같았다.
두서의 아들 덕희(德熙)도 역시 그림으로 세업을 이었으며 덕희의 아들 용(熔) 또한 그림재주가 뛰어났다.
9. 참고문헌: 해남군사(1995)
1. 분류: 보물
2. 명칭(한글): 해남 윤씨 가전 고화첩 일괄
3. 명칭(한문):
4. 소재지: 해남군 해남읍 연동리(고산유물관)
5. 지정년도: 1968. 12. 19.
6. 지정번호 : 보물 제481호
7. 제작시대: 1719년
8. 문화재 설명: 해남윤씨 가전 고화첩은 윤고산 수적관계 문서와 함께 보물로 지정되었는데 그 내용을 보면 후일 국보로 고쳐 지정되는 「자화상」과 「송하처사도(松下處士圖)」, 윤씨 가보라는 표제가 붙은 화첩 2권,「가전유묵(家傳遺墨)」이라고 꾸며진 화첩 3권 등이다.
윤두서의 대표작이며 동시에 한국회화사에서 가장 뛰어난 초상화로 지목되는 자화상을 비롯하여 유작들을 모은 화첩은 윤두서의 다양한 회화세계와 발군의 그림 솜씨를 보여준다. 이들은 그가 세상을 떠난 4년 뒤인 1719년에 아들 윤덕희(尹德熙)에 의해서 서화첩(書畵帖)으로 꾸며졌음이 후기에 밝혀져 있다. 화첩의 내용을 보면 한권은 선면(扇面) 그림을 모은 것이고, 다른 한 권은 작은 산수․인물․풍속․화조․영모화(새나 짐승의 그림) 등을 모은 것이다. 여기에 포함된 그림들은 「송하관폭도(松下觀瀑圖)」 등 전통 화풍을 따른 산수도 및 산수인물도, 「유하백마도(柳下白馬圖)」등 그의 장기였다고 하는 말 그림과 말 그림 스케치를 비롯하여 조선 후기 풍속화의 선구적 작품으로 평가되는 「채애도(採艾圖-나물 캐는 여인)」, 목기를 깎는 장면을 그린 「선거도(旋車圖)」, 「경답목우도(耕畓牧牛圖)」등 세속적인 소재의 작품들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하다.
이외에도 「초충도(草蟲圖)」․「채과도(採果圖)」․「도석인물도(道釋人物圖)」등 묵선(墨線) 스케치풍의 소품도 미완성된 상태 그대로 하첩에 함께 꾸며져 있다. 이 작품들은 제작연대가 밝혀진 것이 드물지만 「선면화첩(扇面畵帖)」은 1704년에, 그리고 또 다른 화첩은 그 이후 윤두서의 만년, 해남에의 귀향을 전후해서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말과 인물화를 잘 그렸다. 그런데 산수화를 비롯해서 회화작품은 대체로 중기의 화풍을 바탕으로 전통성이 강한 면모를 지녔다. 그의 그림 속에는 사실적 경향이 더러 나타나는데 이는 아들 윤덕희가 쓴 행장에도 보이는 사실이다. 실학적 학문에 대한 취향은 그가 남긴 동국여지도나 일본지도, 천문학과 수학에 관한 서적, 그리고 이잠(李潛), 이서(李漵) 등 성호(星湖) 이익(李瀷: 1681~1763)의 형제들과의 교분이 또한 그러한 사실을 잘 말해 준다.
9. 참고문헌: 해남군사(1995)
1. 분류: 보물
2. 명칭(한글): 윤고산 수적 관계문서 일괄
3. 명칭(한문):
4. 소재지: 해남군 해남읍 연동리(고산유물관)
5. 지정년도: 1968. 12. 19.
6. 지정번호 : 보물 제482호
7. 제작시대:
8. 문화재 설명: 조선 광해군~현종 연간에 활약한 정치가이며 학자인 고산 윤선도의 수적(수적)과 그에 관계되는 문헌들이다. 고산의 수적으로는 금쇠동집고, 금쇠동기, 산중신곡이 있고, 관계문서로는 은사첩인 윤고산 선생 출계 예조입안이 있다.
9. 참고문헌: 해남군사(1995)
1. 분류: 보물
2. 명칭(한글): 지정 14년 노비문건
3. 명칭(한문):
4. 소재지: 해남군 해남읍 연동리(윤고산유물관)
5. 지정년도: 1968. 12. 19.
6. 지정번호 : 보물 제483호
7. 제작시대: 고려시대
8. 문화재 설명: 고려시대의 노비문건인 보물 제483호는 소지(所志) 4장, 입안(入案) 2장, 등 모두 6장으로 되어 있다. 오랜 세월에 좀이 먹어서 훼손된 것으로 조선 영조 20년(1755년)에 6장을 장첩으로 다시 꾸며 「전가고적(傳家古蹟)」이라고 표제를 붙여서 간수하고 있다.
이것은 고려 공민왕 때 직장동정(直長同正)인 윤광전(尹光琠)이 적장자로 소윤(小尹)의 관직을 가진 윤단학(尹丹鶴)에게 노비를 상속해 주는 증서이다.
소지는 윤광전이 상속에 따른 사유를 상세하게 적고 끝에 제주(財主), 정보(訂保), 필집(筆執), 곧 노비의 현 소유자와 보증인의 성명과 수결을 붙여서 작성한 것이다. 오늘날 고대의 문서가 매우 드문 실정인데 이 문건은 송광사의 노비첩과 합께 고려시대의 유일한 문건이다. 윤광전은 해남 윤씨의 선조이며 윤선도 역시 그의 후손이다.
9. 참고문헌: 해남군사(1995)
1. 분류: 보물
2. 명칭(한글): 대흥사 북미룩암 마애여래좌상
3. 명칭(한문):
4. 소재지: 해남군 삼산면 구림리 799
5. 지정년도: 1963. 1. 21
6. 지정번호 : 보물 제48호
7. 제작시대: 11세기
8. 문화재 설명: 석조문화재인 이 보물은 대흥사 북미룩암의 주존불(主尊佛)이다. 이 북미룩암은 대흥사 본사에서 북쪽으로 2㎞ 떨어진 두륜산 정상 바로 밑에 위치하고 있다.
이 마애불은 거대한 암벽을 다듬어 양각하였는데, 이 마애불을 벽체로 하여 목조 전실(前室)을 가구(架構)하여 용화전(용화전)이라 부르고 있다.
두관(頭光)과 신광(身光)을 표현한 이 부처는 소발의 머리 위에 큼직한 육계(肉髻)가 솟아 있으며, 상호는 풍만하고 양쪽 귀는 길게 늘어뜨려 어깨에까지 닿고 있다. 눈은 눈 꼬리가 귀 위로 치켜 올라갔고 눈동자가 표현되었으며 입술은 두껍다. 목에는 삼도(三道)가 있고 법의는 통견(通肩)인데 왼쪽 어깨에 가사 끈이 보인 것이 특징적이며 옷주름은 평행선으로 도식적인 표현에 그쳤다. 수인은 항마인(降魔印)을 했으나 이 손도 부자연스럽고 결가질좌(結跏跌坐)한 무릅 위의 발도 어색하다. 상체에 비해 하체가 빈약하며, 밑으로 연화좌(蓮花座)가 있는데 형식적인 표현에 그치고 있다.
두광과 신광은 3조의 음각 선으로 나타냈으며 그 내부로는 아무런 표현이 없고 밖으로는 화염 문(火焰紋)을 새겨 장식을 보였다. 그리고 그 옆에 좌우로 2좌씩의 비천상(飛天像-높이 1.3m)을 대치되게 배치하고 있어 특이하다.
불신은 전체적으로 보아 상당한 양각이나 인체 비례나 조각기법이 이에 따르지 못하고 있다. 조성연대는 상호나 각부의 조각수법으로 보아 고려시대 전반기(11세기경)로 추정된다. 그리고 이 마애불에 대하여 하늘나라 천황의 태자와 공주가 속죄하기 위하여 조각하였다는 전설이 전한다. 이 마애불의 모든 높이는 5.2m이고 몸 높이 : 3.6m. 머리 높이 : 1,2m. 어깨 폭 : 1.85m 좌대 높이 : 0.65m이다.
9. 참고문헌: 「해남군의 문화유적」목포대학박물관 1986
1. 분류: 보물
2. 명칭(한글): 대흥사 북미룩암 삼층석탑
3. 명칭(한문):
4. 소재지: 해남군 해남읍 구림리 799
5. 지정년도: 1963. 1. 21.
6. 지정번호 : 보물 제301호
7. 제작시대: 고려시대 초기로 추정
8. 문화재 설명: 두륜산 정상 가까이 북미룩암에 있는 이 석탑은 2중 기단의 3층 석탑으로 일반적인 형식을 따르고 있다. 기단은 2중으로 하층기단은 지대석(地臺石)과 중석(中石)을 붙여서 수매의 장석(長石)을 짜고 중석 각 면에는 우주(隅柱)와 탱주(撑柱)가 모각(模刻)되어있으며, 1매의 판석으로 된 갑석(甲石)은 밑에 부연(副緣)이, 위에 각형 일단의 괴임을 나타냈다.
탑신 부는 1층 탑신은 4매 판석으로 결구(짜만듬)하고 나머지 탑신과 옥개석(屋蓋石)은 모두 1석씩인데, 탑신에는 각 면에 우주가 표출되고 옥개석은 전각에 이르러 경미한 반전을 보였다. 옥개석의 층급받침은 1~2층에서는 4단이고 3층은 3단으로 줄었다. 1층의 탑신에 비해 2, 3층의 탑신은 체감율이 줄어들었고 옥개석은 평평하고 엷으면서도 경쾌한 감이 있다.
상륜부(相輪部)는 노반(露盤)이 남아 있고 그 위에 앙화형(仰花形) 석재가 남이 있을 뿐이다. 이 석탑은 비교적 정재 된 탑이긴 하지만 각부의 양식에 있어서 일부 퇴화한 부분이 보인다. 조성연대는 고려시대 초기로 추정되며 전체 높이는 4.35m이다.
9. 참고문헌: 「해남군의 문화유적」 목포대학교박물관 1986
1. 분류: 보물
2. 명칭(한글): 대흥사 응진전 앞 삼층석탑
3. 명칭(한문):
4. 소재지: 해남군 삼산면 구림리 799
5. 지정년도: 1963. 12. 21
6. 지정번호 : 보물 제320호
7. 제작시대: 조선중기 이후의 작품으로 추정
8. 문화재 설명: 응진전 앞에 있는 이 탑은 2중 기단의 3층 석탑으로 신라 석탑의 전형적인 양식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지대석 위에 하대석과 중대석을 붙여서 4매의 장석으로 짜고. 각 면에는 우주와 탱주 2주씩을 모각하였다.
갑석은 1석이고 경사진 상면 중앙으로는 호형과 각형의 괴임을 만들어냈다. 상층기단 중석은 4매로 구성되고 각 면에는 탱주 1주와 모서리에 우주가 모각되었다. 갑석은 1매의 판석인데 밑에는 엷은 부연이 있고 위에는 각형 2단의 괴임이 있어 탑신부를 받고 있으나 동남쪽 모서리는 훼손되었다.
탑신부는 탑신과 옥개석이 각 1석인데 탑신에는 1~3까지 4 우주가 새겨지고 체감율도 2층 탑신에 비해 높이는 급격히 줄었으나 그 폭에 있어서는 감축률이 미세하다. 옥개석 처마 밑은 수평으로 각층마다 4단의 받침이 있고, 그 위로 상면에는 각형(角形) 2단의 괴임이 있으며 전각에 이르러서는 경쾌한 반전을 보였다. 2층과 3층의 옥개석 모서리에 약간 훼손된 부분이 있다.
상륜부는 노반과 복발(覆鉢), 보륜 등이 남아 있다. 이 탑은 규모 면에서는 좀 작은 편이나 결구가 정연하고 수법이 명쾌하여 세련되고 정교하게 보인다. 1967년 보수 때에 상층 기단에서 높이 12m의 금강여래입상이 발견되었다. 조성연대는 통일신라 9세기로 추정된다. (전체 높이는 3.4m이다.)
9. 참고문헌: 「해남의 문화유적」 목포대학교박물관 1986
1. 분류: 보물
2. 명칭(한글): 미황사 대웅전
3. 명칭(한문):
4. 소재지: 해남군 송지면 서정리 산 247
5. 지정년도: 1988. 4. 1
6. 지정번호 : 보물 제947호
7. 제작시대:
8. 문화재 설명: 미황사 대웅전은 전면 3칸, 측면 3칸의 겹처마 팔작집이다. 기단은 석재를 쌓은 막돌 허튼 층 쌓기이며 초석 위에는 연봉(蓮峰)과 만개한 연화문 외에 거북, 게 모양 등이 조각되어 있다. 초석 위에 배흘림을 둔 원주를 세웠으며 기둥머리는 창방으로 결구하고 그 위에 평방과 주두(柱頭)를 놓아 공포를 짜 얹었다. 공포는 외삼출목(外三出目), 내사출목(內四出目)으로 외부로 뻗은 살미가 날카롭게 앙설(仰舌)로 되어 있고 내부의 살미첨자의 끝은 연봉형으로 마감하였다.
각종 첨자에는 포작을 하고 포작 위에 대들보를 얹었으며 불단의 부분에만 2개의 고주(高柱)를 세워 대들보를 받치고 있다.
주간포는 측면에 2구, 양측 면에는 1구씩 배치하였다. 창호는 전면 어간에 4짝 솟을 빗살무늬를 달았으며 양 협간에는 빗살무늬의 3짝문을 달았다. 내부 외동간(外棟間)의 천장은 빗천장이고 내동간(內棟間)은 대들보와 층량 위에 우물천장을 두었으며 바닥은 우물마루를 깔았고 불단 위로 닷집을 설치하였다. 처마는 겹처마이며 전면은 어간 양측 기둥머리에는 용두가 달려 있어 화려한 느낌을 준다. 단청은 칠이 벗겨져 거의 없는 상태이다.
9. 참고문헌: 「전남의 사찰」 전라남도 1990
1. 분류: 보물
2. 명칭(한글): 미황사 응진당
3. 명칭(한문):
4. 소재지: 해남군 송지면 서정리 산 247
5. 지정년도: 1993. 11. 19.
6. 지정번호 : 보물 제1183호
7. 제작시대:
8. 문화재 설명: 미황사 응진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층 팔작지붕의 구조이며 처마는 부연을 단 겹처마로 되어 있다. 내부는 통칸(통칸)이며 바닥은 우물마루를 깔았다. 기단은 막돌 허튼층 쌓기의 2단 형식으로 중앙의 계단으로 오르게 되어 있으며 초석은 막돌 초석을 사용하였고 이 위에 배흘림이 약한 원기둥을 세웠다. 기둥머리는 창방으로 결구하고 이 위에 평방과 주두를 놓아 공포를 짜 얹었다. 공포는 주간마다 1구씩의 공간포를 놓은 외삼출목 내사출목의 다포양식으로. 외부로 뻗은 살미의 끝은 뾰쪽하게 앙설로 되어 있다. 첨자의 형상은 소첨, 대첨 모두 교두형이며 고안이 없다. 결구는 5량구조(五梁構造)이며 천장는 우물천장이다. 창호는 전면 주간에 쌓여닫이의 빗꽃살문을 달았으며 양 측면과 후면은 회로 마감한 벽체로 되어 있다
9. 참고문헌: 「전남의 사찰」 전라남도 1990
1. 분류: 보물
2. 명칭(한글): 탑산사 동종
3. 명칭(한문):
4. 소재지: 해남군 삼산면 구림리 799
5. 지정년도: 1963. 1. 21.
6. 지정번호 : 보물 제88호
7. 제작시대: 1599년
8. 문화재 설명: 이 동종은 현재 대흥사 서산대사유물관의 진열장 안에 전시되고 있다. 정부(頂部)에는 용통(甬筒)과 용뉴(龍鈕)가 있으며 용두는 매우 선명하게 조각되었다. 종견(鐘肩)에는 연판(蓮瓣)을 돌렸으며 그 밑에 연주문대(蓮珠紋帶)가 있는데 그 안에 당초문(唐草紋)이 양주(陽鑄)되엇다. 견대(肩帶) 밑에는 유곽(乳廓)이 있고 그 안에 연좌(蓮座)로 둘러싼 유두가 돌기하였다. 종신 중앙에는 보살상 4구가 조식(彫飾)되었으며 하대로 내려와서는 상견과 당좌(撞座)와 같은 당초문이 견대를 돌리고 있다.
전체의 형태는 상원사의 동종을 연상할 만큼 아름다운 소형종이다. 종신보살상 밑으로 「탑산사화향도상현지…금종입중팔십근인. 만력이십(칠)년기해십월일(塔山寺火香徒上玄智…金鐘入重捌拾斤印. 萬曆二十(七)年己亥十月日)」이란 점각명(点刻銘)이 있다. 위 명문연대인 만력27년은 선조32년(1599)이다. 종의 높이는 79㎝, 구경은 43㎝이다. 탑상사는 장흥군 대덕면 연지리에 그 터만 남아 있다.
9. 참고문헌: 「전남의 사찰」 전라남도 1990
1. 분류: 보물
2. 명칭(한글): 명량대첩비
3. 명칭(한문):
4. 소재지: 해남군 문내면 동외리 1186-7
5. 지정년도: 1969. 6 16.
6. 지정번호 : 보물 제503호
7. 제작시대: 1686년
8. 문화재 설명: 충무공 이순신(1545~1598)을 기념하여 1685(숙종11)~1688(숙종14)에 걸쳐 세운 비이다. 비문의 내용은 이순신이 우수영 진도간의 급류를 이용하여 일본군의 선단을 격파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비명은 「유명조선국통제사증시충무공명량대첩비(有明朝鮮國統制使贈諡忠武公鳴梁大捷碑)」이며 김만중(金萬重)이 쓴 전액(篆額)은 「통제사충무공명량대첩비」이다. 1685년에 이민서(李敏敍 1636~1688)가 찬하고 이정영(李正英 1616~1686)이 서(書)하여 1686년에 박신주(朴新冑)가 세웠다.
규모는 높이 2.67m, 넓이 1.14m이며 방형지대석(方形地臺石)과 장방형비좌(長方形碑坐) 위에 비신을 놓고 운용문각(雲龍紋刻)의 가첨석을 얹었다
1942년에 일본사람들이 강제로 철거하여 경복궁 뜰에 숨겨 묻어 두었던 것을 우수영 유지들이 1947년에 찾아와서 다시 이곳에 옮기면서 비각을 건립하였고 1963년에 보수하였다. 그리고 1964년에 이 일원을 단장하면서 충무공의 영정을 봉안한 충무사를 건립하였으며 1975년에 고 박정희 대통령이 충무사라는 현판을 썼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삼문과 담장으로 둘러져 있다.
【비문】만력 25년 정유 9월에 통제사 이공이 해군을 거느리고 진도 벽파정 아래 진을 치고 왜적들을 명량 어귀에서 산산이 무찌르니 적들은 이로 말미암아 크게 패하여 감히 전라도를 엿보거나 경상도 충청도를 건드려 보지 못하다가 그 이듬해에 적이 마침내 군사를 거두어 돌아가니 세상 사람들이 나라를 다시 일으킨 공로로는 공을 으뜸이라 하고 또 울도 싸움이 가장 신기하였다고 이른다. 공이 일찍이 전라좌수영사로 있을 적에 왜적들이 침략해 왔다는 말을 듣고 강개하여 부하들과 맹세하며 영남쪽으로 진군하여 바다의 적군들을 무찔렀는데 처음 옥포에서 싸우고 다음 당포에서 싸우고 다시 고성 당항포에서 싸우되 언제나 적은 군사로 많은 적군을 무찔러 죽이기 얼마인지 모르더니 마침내 한산 바다에서 크게 이기자 그 위엄이 천하에 떨쳐 통제사로 삼도 해군을 모두 거느리게 되었다. 눌러 한산 섬에 몇 해를 머무르매 적들이 감히 다시 침범하지 못하더니 이때에 이르러 왜적들이 또다시 군사를 크게 일으켜 들어와 지난날 진일을 거울삼아 분을 머금고 기를 쓰며 바다를 헤쳐 바로 올라서려는 것이었다. 그때 공은 바야흐로 모함을 입어 잡혀갔다가 특명으로 평복을 입고 도원사를 따르더니 이윽고 다시 복직되었는데 이때는 원균이 이미 공을 대신하여 많은 군사로 왜적과 싸우다가 마침내 져서 군사와 무기와 군량을 모조리 잃어버리고 한산섬도 벌써 무너진 뒤이었다. 어허! 공은 허물어진 뒤를 이어 싸울 군사조차 없으므로 간신히 바닷길을 헤매어 겨우 얼마 안 되는 패전한 군사를 주워 모으고 전선 십여 척을 거두어 드디어 명량을 억눌렀다. 적의 배들이 바다를 덮어 오는지라 공은 여러 장수들에게 나가기를 재촉하여 좁은 목에다 뱃머리를 잇대어 닻을 내리고 바다 중간을 끊어 적들을 기다렸다.
명량은 목이 좁은데다가 조수는 마침 들어와 물결이 더욱 빠른데 적군들이 상류 쪽으로서 조수 따라 덮쳐오니 형세는 마치 산이 누르는 것 같아 우리 군사들은 풀이 죽으므로 공은 기운을 더욱 돋구고 기회 따라 쳐부수게 아매 장수들은 모두 죽기를 맹세하였다.
전선은 나는 듯 나들고 대포는 사방에서 터지며 바닷물은 뒤끓는데 적선은 불타고 깨어져 물에 빠져 죽는 자 이루 셀 수 없게 되어 마침내 적들은 크게 패하여 달아났다. 처음 싸움이 한창 어울렸을 때 거제현령 안위가 뒤로 물러나매 공은 뱃머리에 서서 큰소리로 위의 목을 자르라 호령하니 위도 두려워 되돌아들어 날쌔게 싸워 이날 적군의 배를 쳐부순 것이 오백척이요 그 장수 마다시의 목도 베었다. 그때 남도 백성들로 적을 피해 공을 따르는 배가 백여 척인데 싸우기 전에 공은 그 배들을 바다에 벌려 세우고 싸우는 배처럼 꾸미었다. 전투가 벌어지자 배에서 구경하던 이들은 모두 얼굴빛이 질리며 공은 군사가 적으매 응당 패하리라 걱정하였더니 적이 물러가고 싸움이 끝난 뒤에 우리 전함들이 그냥 우뚝 아무 탈없음을 보고는 모두 경탄하며 달려와 치하하니 이로부터 우리 해군의 위세가 또다시 크게 떨치었다. 저 이일 신립이 패한 뒤로 관군과 의병들이 적을 만나는 대로 무너지며 적들의 칼날에 맞설 길이 없더니 명나라에서 많은 군사를 보내 주어 크게 깨뜨리니 세 도성도 차례로 수복되고 거기 따라 우리 군사도 좀 버틸 수가 있었다. 연안 행주의 승첩은 비록 한때 훌륭했다고 하나 모두 명나라 군사의 힘을 빌어 겨우 성을 지키고 적을 막았을 뿐이었는데 제 힘으로 혼자 한 방면을 당해내어 모조리 죽이고 큰 승리를 거둔 것은 오직 공만이 한 일이다. 그래서 적들이 호남 영남에 진치고 있는 지 예닐곱 해에 감히 서쪽 바다는 한 발걸음도 밟아 보지 못했던 것이다. 남원이 무너짐에 따라 적의 기운은 더욱 세어졌건마는 그래도 뒤가 무서워 제 뜻대로 다 못했던 것도 어허 공 때문이었다. 노량싸움에 이르러서는 크게 싸우고 또한 크게 이기었으며 진중에서 운명하여 마침내 몸을 나라에 바치었고 공이 돌아가시자 적도 또한 물러갔었다.
그 뒤에 조정에서 적을 평정한 공로를 의논할 제 공으로써 으뜸을 삼아 선무공신의 호를 내리고 좌의정 벼슬을 주고 노량에 충렬사를 세워 제사하게 하였다. 공의 이름은 순신이요 자는 여해(汝諧)며 덕수 사람이다. 공은 평소엔 차근차근하여 단아한 품이 마치 선비와 같았으나 전쟁에 다다라 적을 무찌름에 미쳐서는 계책을 냄이 신기하여 비록 옛날의 명장이라도 이에서 더할 수 없었으며 또 늠름한 충의는 저 해와 달을 꿰고 귀신까지도 감동하게 함이 있었다.
그가 있는 곳은 반드시 승첩이 있었으며 위엄은 왜적들로 하여금 무서워 떨게 하였고 의기는 중국을 흔들었나니 공과 같은 이는 그야말로 예부터 일러오는 「참 장군」이라 가히 큰 일을 맡을 만한 분이요 다만 한때의 승리를 들어 훌륭하다고 논할 것만은 아니다.
그의 모든 행적과 군사 거느리던 일들은 역사와 몇 많은 사람의 기록에 적혀 있거니와 내가 젊어 명량을 지나다가 공의 싸우던 터를 보고 하염없이 한숨쉬며 오래 거닐면서 그의 인격을 상상하여 본 일이 있었던 바 이제 남도 사람들이 그곳에 돌을 세우고 거기 샛길 글을 청하는지라 의리에 감히 사양할 길 없어 드디어 옛날들은 이야기를 대강 적고 노래를 이어 붙인다.
울도 목이여 좁을러라
조수 벅참이여 두 골 새로 빠지도다
군사들 날램이여 북소리 울리는데
적을 무찌름이여 남김없이 휩쓸도다
오직 장군이여 의와 용맹 갖추시니
바닷길 억누름이여 걱정이 끊이도다
성난 물결 덮침이여 용과 고래 달리는데
싸움터 바라봄이여 영특한 재주 그리도다
넋이 갸륵하심이여 한 바다에 번듯하매
별들을 꾸짖음이여 바람 우뢰 일구도다
바다 아니 마름이여 돌도 아니 삭을진저
장한 공적 밝히어 그지없이 빛나도다
9. 참고문헌: 「해남군사」 해남군 1995
1. 분류: 사적
2. 명칭(한글): 해남 윤씨 녹우당
3. 명칭(한문):
4. 소재지: 해남군 해남읍 연동리 82. 해남윤씨 종가.
5. 지정년도: 1968. 12. 29.
6. 지정번호 : 사적 제167호
7. 제작시대: 1669년
8. 문화재 설명: 윤고산 고택의 사랑체인 녹우당은 효종이 당신의 사부였던 고산을 위해서 수원에 건립하여 고산에게 하사했던 것을 고산이 82세 되던 1669년에 지금 위치로 옮겨 지은 것이라고 하며 “녹우당(綠雨堂)”이라는 편액을 걸었다. 사랑체의 상량문에는 「함풍팔년무오사월병오초팔일계축무오중수상량(咸豊八年戊午四月丙午初八日癸丑戊午重修上梁)」이란 기록이 있어 철종 9년(1858)에 대대적인 수리를 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안체가 여성만을 위한 공간으로 꾸며져 있는데 대하여 사랑체 전면에는 방형의 연못이 있고 각종 수목이 잘 가꾸어져 잇어 조선시대 반가(班家)의 남성공간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잇다.
사랑체의 건축 구조는 일자형(一字型) 평면이나 좌측의 정면 2칸이 한단 낮게 아래로 내려와 있고 서로 동선이 연결되지 않고 있어 전체적으로 2구간으로 분리되어 진다. 우측의 사랑체는 전면과 우측면에 퇴를 둔 4칸 집으로 좌․우측에 각각 2칸씩 사랑방과 대청을 배치하였으며 사랑방 뒤편으로는 반칸폭의 골방을 꾸몄다. 좌칙구간은 1칸마다 전면 뒷마루 좌측으로 1칸 마루를 설치하였다.
구조는 다듬돌바른층쌓기의 비교적 높은 기단 위에 막돌초석을 놓고 방주(方柱-전면과 우측면의 퇴주는 두리기둥)를 세운 4량 집이며 도리는 장설(長舌)로 받혀진 납도리를 사용하였다(후면의 도리 밑은 장설받침이 없다).
이 건물의 전면에는 반가의 사랑체에서만 볼 수 있는 차양을 설치하였는데 이러한 구조물 역시 흔하게 볼 수 없는 양식이다
9. 참고문헌: 해남군사(1995)
1. 분류: 사적
2. 명칭(한글): 해남 진산리 청자요지
3. 명칭(한문):
4. 소재지: 해남군 산이면 진산리 130 일원
5. 지정년도: 1985. 1. 4.
6. 지정번호 : 사적 제310호
7. 제작시대: 11세기 전반 - 12세기 초
8. 문화재 설명: 진산리 도요지는 행정구역상으로 전남 해남군 산이면에 속한다. 해남읍에서 화원반도와 진도로 들어가는 길을 따라 약 5㎞쯤 가면 분기점이 나오고 그곳에서 서북쪽으로 약 15㎞를 가면 산이면 소재지인 초송리가 나온다. 산이면은 해남의 한 중앙에서 가늘고 길게 뻗은 산이반도에 위치하는데 이 지역은 북으로 영암 삼호반도와 남서쪽으로 해남 화원반도와 접해있다. 면소재지에서 도로를 따라 약 300m를 가면 좌측으로 진산리로 가는 길이 나오고 약 2.5㎞를 들어가면 해안과 접한 진산리가 자리하고 있다.
녹청자 요지는 초송리 남쪽해안에서 진산리 해안에 이르는 약 6㎞의 해안에 집중적으로 산재하고 있는데 산이면은 낮은 구릉지대에 황토와 찰흙으로 이루어져 있다. 높은 산이 없어 낮은 구릉지대로 이루어진 이 지역이 현재는 밭으로 경작되고 있지만 예전에는 낮은 야산이었기 때문에 삼림이 풍부했었고 바로 바다와 인접해 있기 때문에 해남만을 통하여 활발한 교통로가 형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요지가 위치한 지역에는 질이 좋은 조점토가 해안선 단애를 따라 곳곳에 노출되어 있다.
이들 도오지는 1983년에 전남도 문화재 전문위원이었던 조기정, 성춘경씨에 의해 처음으로 조사되었으며 이를 기초로 1985년 1월 5지구 11개 지역이 국가사적 제301호로 지정되었다.
특히 1983년 12월부터 1984년 6월까지 완도군 약산면 어두리 어두지섬 앞 해저에서 총 30,673점의 녹청자가 인양되었는데 이들 유물의 생산지가 산이면 요지임이 밝혀지면서 그 중요성은 더욱 커지게 되었다.
이들 도요지에 대한 자세한 조사는 목포대학 박물관에서 실시한 지표조사의 일환으로 조기정씨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 조사에서 구성리 2기, 진산리 78기, 초송리 24기 등 총104기의 도요지가 조사되었으며 철자, 흑유, 토기, 도지미 등 다량의 유물이 수습되었다. 기형은 대접, 완, 접시, 병, 자배기, 대반, 뚜껑 등 매우 다양하다.
한편 국립중앙민속박물관에서는 진산리 일대 도요지의 채집 품을 일부 정리하여 보고하는데 이 보고에서는 완도 해저유물과 인천 경서동 출토품을 비교하여 진산리 일대의 도요지를 11세기 전반부터 12세기초까지 존속하였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처럼 산이면 진산리 요지는 매우 중요한 유적임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요지가 해안에 접해있는 까닭으로 인해 해수면의 침식으로 심하게 파괴되고 있으며 실제로 기존에 조사 된 요지가 침식되어 흔적만 앙상하게 남아 있는 곳이 많다. 그런데 앞으로 영산강 3단계 공사가 완료되면 해수로 인한 피해는 없어질 것으로 기대되나 다른 요인들에 의해 유적이 파괴되는 일이 없도록 대책이 수립되어야 하겠다.
발굴조사 지역은 진산리 마을에서 북서쪽으로 약 500m쯤 떨어진 해안가로 해안을 따라 많은 숫자의 요지가 위치하고 있다. 해안가에 위치한 관계로 주변의 유적은 대부분 파괴되고 해안을 따라 갑발편, 철회문장고편, 포개구이한 자기 등 자기편과 요벽체(窯壁體)가 산재되어 있으며 침식된 단면에 퇴적의 흔적만 일부 남아있을 뿐이다. 그 중에서 이번에 발굴 조사한 요지는 일부 침식되어 모래사장에 자기편이 넓게 퍼져 있었으나 임야의 경사면에 퇴적층의 흔적이 비교적 뚜렷하게 남아 있어 보존 상태가 양호한 편이다.
9. 참고문헌: 해남군사(1995)
1. 분류: 명승
2. 명칭(한글): 대흥사 일원
3. 명칭(한문):
4. 소재지: 해남군 삼산면 구림리 산 8-1 일원
5. 지정년도: 1975. 9. 2
6. 지정번호 : 명승 제4호
7. 제작시대:
8. 문화재 설명: 대둔산 또는 한둠산, 두륜산이라고도 하는 이 산에 오르면 제주 한라산을 바라볼 수 있다. 백두산의 땅이 수래 구르듯 흘러 지리산이 되고 천관산이 되고 두륜산이 되었다. 그러므로 두류(頭流)라고 칭하기도 한다. 두류라고도 말하는 것은 백두산을 원조로 하는 때문으로 봉래(蓬萊), 방장(方丈), 영주(瀛州) 삼신산(三神山)과 형이요 아우요 하며 어슷비슷하게 꿈틀거려 강역을 떠받든 때문이니, 자자손손 이 강산을 아름답다 말하지 않을 사람이 누구 있겠는가? 그것이 이 동부를 만들었다.
하늘이 넓고 한가하게 하여 절집이 연이어 미치는 산봉우리에 돌다리가 있다. 이름하여 백운교라고 하는 붉은 낭떠러지가 만길이나 높은 그 아래는 땅이 없는데 시인이나 풍류객들은 필히 여기를 지나고서야 그 위에 오를 수 있다. 그러나 오직 발빠른 젊은이라야 다리를 지나 정상에 올라서 그 위에 잇는 깊고 널찍한 굴, 즉 이름하여 금강굴이라고 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 아래에 금수굴(金水屈)이 있다.
산에 일곱굴이 있다. 법왕, 축융, 비로, 반야, 구정, 상도솔, 중도솔 이다. 물에는 구곡이 있다. 구곡은 하나의 계류에서 나와 왼쪽으로 돌고 오른쪽으로 굴러 3리, 5리를 구비치니 이것이 구곡인데 그대로 바다에 이른다.
동에는 장춘(長春)이 있다. 장춘은 잡나무와 풀이 무성한 가운데 동백이 특수하게 울밀한 그늘을 이루었는데 만산이 푸른 속에 붉은 꽃망울이 눈 가운데 반짝이며 그 동부에 들어오니 낙엽지는 가을이 없고 사시사철 꽃피는 봄이다.
백호 임제의 시에,“장춘동에 옛 선인의 열두 경루(瓊樓)가 있다. 맑고 여튼 계류에 사람은 드물고 하얀 돌만 보이는데 두륜봉 정상 팔천길에 학을 타고 오는 마고선녀를 기다려 생황(苼簧) 소리를 듣는다”라고 했다.
9. 참고문헌: 해남군사(1995)
1. 분류: 천연기념물
2. 명칭(한글): 대흥사 왕벗나무 자생지
3. 명칭(한문):
4. 소재지: 해남군 삼산면 구림리 산24-4
5. 지정년도: 1966. 1. 13.
6. 지정번호 : 천연기념물 제173호
7. 제작시대:
8. 문화재 설명: 왕벚나무(prunus yedoensis Matsum)는 앵도과에 속한 나무로서 일제시대에는 학자들이 우리 나라 내륙지방에서 왕벚나무의 자생종(自生種)을 발견하지 못하였으므로 일제 장미과 연구권위자인 고이즈미겡이찌(小泉源一)박사도 일본에서 재배하는 왕벚나무는 한라산에서 도래(渡來)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1965년 4월에 두륜산 및 완도 보길도의 식물상을 조사했을 때 이 곳에서 왕벚나무가 발견되어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것이다.
2주를 조사하였는데 그 1號는 높이가 15m, 흉고(胸高) 둘레가 80㎝이며 이 나무 가까이 올벚나무와 산벚나무 거목이 1株씩 있다. 2號는 높이가 7m, 흉고(胸高) 둘레 30㎝ 정도 되지만 주간(主幹)이 잘린 뒤에 새순이 돋아서 자란 것이다.
왕벚나무의 자생력을 대둔산에서 발견함으로써 이 나무는 한라산과 더불어 대둔산이 그 발생지대라는 점에 의의(意義)가 있고 또 제주도의 원종이 일본으로 건너갔다는 설명에 무리가 있을 수 있다는 증거가 되며, 이 두륜산 산(産)이 일본으로 건너가게 되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뿐 아니라 이 왕벚나무의 발생당시에는 제주도 한라산과 육지부의 두륜산이 서로 연결되었다는 것을 생각 할 수 있는 식물지리학적 입장에서의 귀중한 성과로 간주된다.
9. 참고문헌: 해남군사(1995)
1. 분류: 천연기념물
2. 명칭(한글): 연동리 비자나무 숲
3. 명칭(한문):
4. 소재지: 해남군 삼산면 구림리 산24-4
5. 지정년도: 1966. 1. 13
6. 지정번호 : 천연기념물 제173호
7. 제작시대:
8. 문화재 설명: 해남 윤씨 시조 어초은의 사당 뒤에 있다. 약 500년전에 심은 것으로 짐작되며 높이 20m 내외, 가슴높이 지름이 1m 정도로서 수간의 지름은 1.5m 내외되는 것이 가장 크다. 비자나무 바로 밑에는 곰솔의 밀림 가운데 소나무가 군데군데 섞여있고, 밑에는 사느레피, 참식나무, 마삭덩굴, 개비자나무, 남오미자, 송악, 모새나무, 볼레나무, 자금우, 및 동백나무 등의 상록 수종과 더불어 맥문동, 살맥문동과 춘란이 여기저기 보인다. 그러나 비자나무 숲의 가장 위 가장자리에 커다란 참식나무가 보이며 또 곰솔 중에서 가장 큰 높이 25m, 가슴 높이의 지름이 1m정도 된다.
비자나무 숲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수종은 굴참, 상수리, 갈참, 졸참, 서어나무, 개서어나무, 말채나무, 노린재나무, 덤불작살나무, 진달래, 백동백 및 철쭉 등이며 그 밑에는 구절초, 새, 개솔새, 개억새, 신감채, 며느리밥풀, 반디지치, 싱어 및 네일갈키, 활량나무 등이 자라고 있다.
9. 참고문헌: 해남군사(1995)
1. 분류: 천연기념물
2. 명칭(한글): 우항리 고생물 화석지 및 퇴적층군
3. 명칭(한문):
4. 소재지: 해남군 황산면 우항리 일원
5. 지정년도: 1998. 10. 17
6. 지정번호 : 천연기념물 제394호
7. 제작시대:
8. 문화재 설명: 해남 우항리 고생물 화석지는 해남읍에서 서쪽방향(진도방향)으로 약 20㎞ 정도에 위치하고 있다. 과거에 이곳은 해남만의 남쪽에 위치한 바닷가였으나 지금은 금호방조제에 의해 막혀진 대규모 담수호 가장자리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의 퇴적층은 중생대 백악기 시대에 형성된 것으로 약 5㎞의 해안에 교과서적인 퇴적구조를 가지며 연속적인 수평층리가 잘 발달된 정교한 퇴적층군을 형성하고 있다.
우항리 고생물 화석지는 1996년부터 1998년까지 수행된 발굴 및 종합학술연구(연구책임자 : 전남대 교수 허 민)에 의해 노출된 대규모 고생물 화석지이다. 과거 우항리 지역은 상부와 하부 퇴적층의 수평 노출이 평균 약 30㎝ 정도에 불과하였고, 지층의 경사가 해안 반대 방향으로 놓여 있어(평균 20°SW)발굴 및 복원연구에 의하지 않고는 오늘날 같이 세계적 규모의 고생물 화석산출지를 발견하기는 어려운 곳 이였다. 발굴조사는 화석이 내재 되어 있는 약 2㎞해안에서 대규모로 이루어졌다. 발굴은 크게 3개 지구 6개 층준에서 이루어졌다. : 제1지구 공룡 발자국 화석층(규모 : 가로 40m, 세로 14m, 높이 5m 퇴적층 제거 후 가로 40m, 세로 7m 규모 화석층 노출), 제1지구 익룡 및 새 발자국 화석층(길이 15m, 폭 1.2m 발굴), 제2지구 공룡 발자국 화석층(길이 26m, 폭 4m 발굴), 제2지구 익룡 및 새 발자국 화석층(길이 90m, 폭 1.5~2.5m 발굴), 제3지구 공룡 발자국 화석층Ⅰ(가로 55m, 폭 20m, 높이 10m 퇴적층 제거 후 길이 45m, 폭 9m 화석층 노출과 길이 30m, 폭 3m 화석층 발굴), 제3지구 공룡 발자국 화석층Ⅱ(길이 26m, 폭 4m 발굴) 또한, 기타 지구 공룡 발자국 화석층과 뼈 화석 및 기타 화석들이 발견 및 연구되었다. 발굴 및 연구 수행 결과 용각류, 수각류, 조각류, 등의 다양한 공룡발자국 화석 514점, 익룡 발자국 화석 443점, 새 발자국 화석 약 천여점, 규화목 및 탄화목 화석 수십점, 개형충 미화석 수만점, 생흔화석 수십점 및 새로운 발굴이 요구되는 익룡 및 공룡 뼈 화석 수십점 등이 발견 및 발굴되었다. 공룡 발자국 화석 중 조각류 발자국은 Iguanodon이나 Hadrosaurus 종류의 발자국인 Carrichnium과 Hadrosaurichnus로 해석되며 이들은 기존 아메리카 대륙에서 발견된 발자국에 비해 그 윤곽이 선명하고 특이하여 새로운 형태의 발자국일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이 곳에서 걷는 조각류 공룡에 의해 남겨진 6개의 Caririchnium 보행열과 1개의 Hadrosaurichnus의 보행열이 조사되었다. 세계적으로 볼 때 이들 종류들은 대부분 백악기 전기 및 중기 이전 층에서 발견되었음을 볼 때 우항리(백악기 후기) 지역 공룡 족흔 화석은 이들의 진화 방향을 말해 줄 것이다. 용각류 발자국(?)은 평균 80㎝ 정도의 크기를 가지며 앞발의 골격구조를 반영한 것으로 보이는 별 모양 내부구조로 이루어진 특징적인 발자국으로 지금까지 보고되지 않았던 세계 유일의 형태로 좀 더 세부적으로 연구가 요구되고 있다. 이 층에서 몸통길이(어깨에서 골반까지)가 7m가 넘을 것으로 추정되는 용각류의 이동에 의해 생성된 4개의 보행 열이 산출되었다. 익룡 발자국은 지금까지 밝혀진 것 중 가장 후기의 익룡으로 추정되며 발의 크기나 개수, 그리고 보행렬은 세계적으로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대규모로 산출되었다. 익룡 발자국은 지금까지 밝혀진 것 중 가장 후기의 익룡으로 추정되며 발의 크기나 개수, 그리고 보행 열은 세계적으로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대규모로 산출되었다. 산출 발자국은 세계에서 가장 큰 길이 35㎝ 발자국을 비롯하여 다양한 크기의 모양을 가진 테로닥틸로이드(Pterodactyloid) 종류의 발자국들이 다수 산출되었다. 특히 세계 최대의 익룡 보행열(7.3m)이 산출되었는데 발자국의 생성시기를 고려할 때 이들의 연구는 세계 익룡 연구사에 새로운 장을 열어줄 것으로 사료된다. 새 발자국은 지금까지 전 세계에서 7속 7종이 명명되었는데 2속 2종이 이곳에 있으며 앞으로의 연구에 따라 새로운 신종이 추가될 가능성을 가지고 있어 우항리는 조류의 진화사 해석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다고 생각된다. 그밖에도 3~4쌍의 보행 족을 갖고 아시아 최초의 절지동물 보행 흔을 가진 생흔화석이 산출되었다. 우항리 화석층에 대한 암석연대 측정결과 우항리 화석층은 약 8천 3백만년 전에 형성된 것으로 나타나 우항리 지역은 중생대 백악기 후기에 생존했던 생물들의 실체나 고생태 환경을 유추하고 나아가 공룡, 익룡, 새들의 진화과정과 생활상을 해석할 수 있는 세계적 화석 연구의 최적지로 평가되고 있다. 지금까지 공룡, 익룡, 새 화석들은 세계적으로 불 때 쥬라기부터 백악기 전기에 풍부하여 우항리의 화석은 아들보다 진화된 새로운 척추동물들의 진화를 시사한다고 볼 수 있다. 여기에 이들의 세계적 학술가치를 살펴보면 세계 유일의 매우 정교한 대형 용각류 공룡발자국 화석의 산출, 세계 최대 발자국 크기와 개수(이전 세계 최대 30여점, 우항리 443점) 및 세계최대 길이의 익룡 보행열(7.3m),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물갈퀴 새 발자국 화석, 아시아 최초발견인 절지동물 보행 흔을 가진 생흔화석과 공룡, 익룡, 새 발자국이 한 층준에서 세계 최초로 발견된 세계 유일의 화석지인 것이다. 이러한 화석들은 아직도 퇴적층 속에 대규모로 내재되어 있어 이들의 산출 규모는 가히 상상을 초월하고 있다. 이들 화석들의 다양함과 풍부함은 우항리 지역은 중생대 백악기시대의 고생물 진화나 고생태 환경을 풀 수 있는 세계 고생물 및 자연사의 최적 교육현장으로 판단되고 있다. 이는 우항리 화석들이 세계 우수 학회지 등에서 인정받고 있으며 발굴과 함께 수행된 2회에 걸친 국제 심포지엄에서도 세계적 석학들이 이러한 평가에 인색하지 않았음을 우리는 주목하여야 할 것이다.
한편, 우항리 퇴적층에서는 여러 가지 형태의 층내변형 구조(convolute structure), 성장 화산력(Accretionary Lapilli), 대소형 불꽃 구조(Flame structure), 층상 쳐어트(Bedded Chert), 시네러시스 균열(Syneresis crack) 등의 세계적으로 보존이 드문 퇴적구조 및 각종 연흔, 사층리, 물빠짐 구조, 쳐어트 돌기, 접시구조, 피롤리형 캘리취 단괴, 트러스트 습곡, 길버트형 삼각주층 등 실제로 교과서에서 배우는 퇴적구조들이 풍부히 내재된 산 교육장인 것이다.
세계 대부분 화석지들이 공룡 등의 단일 화석만으로 자연학습장 및 테마파크를 구성하고 있는데 대하여 해남 우항리는 유일하게 공룡, 익룡, 새뿐만 아니라 매우 다양한 화석들이 산출되는 이른바 세계 유일의 자연학습장으로 평가되고 있다.
9. 참고문헌: 「해남 공룡화석지 종합학술연구」 해남군/전남대박물관 1998
1. 분류: 중요무형문화재
2. 명칭(한글): 우수영강강술래
3. 명칭(한문):
4. 소재지: 해남군 문내면 동외리 919
5. 지정년도: 1966. 2. 15
6. 지정번호 : 중요무형문화재 제8호
7. 제작시대:
8. 문화재 설명: 강강술래는 노래에 맞추어 춤을 추는 여성의 군무이다. 추석을 앞두고 마을 소녀들이 모여 노래하며 원무(圓舞)를 하는데 아기강강 이다. 소녀 때부터 이러한 훈련을 거쳐 시집갈만한 나이가 들면 아낙네에 끼어 강강술래를 하게 된다.
추석날 저녁밥을 먹고 달이 뜰 무렵이면 여인들이 넓은 마당이나 잔디밭에 모여든다. 달이 솟기 시작하면 여인들은 둥글게 원을 그리고 서로 손을 잡는다.
목청이 좋아 소리를 잘 하는 여성이 느린 가락으로 소리를 선창하면 나머지 사람들은 소리에 맞추어 느리게 발을 내딛고“강강술래”하고 후렴을 부른다. 멕임소리를 하는 선창자는 사설을 노래하고 사람들은 끝까지 후렴만 부른다. 멕임소리는 점차 빨라지고, 따라서 춤도 빨라져서 수십명의 아낙네들이 추석빔을 곱게 입고 뛰는 모습은 화려하고 활기에 차 있어 장관을 이루게 된다. 노래의 만급(曼急)이 춤의 만급도 정해지고 한참 뛰고 나면 땀이 나고 신이 벗겨져서 버선발로 뛰는 일도 있다. 강강술래를 “놀자” 또는 “뛰자”고 하는 것은 군무의 상황을 잘 설명한 말이다.
강강술래가 원무만으로는 단조로워서 중간에 선창자의 재치에 따라 여러 가지 놀이가 삽입된다. 원무하는 복판에 한 두사람이 들어가서 춤추는 남생이놀이를 비롯해서 고사리꺾기, 청어엮기, 기와밟기, 꼬리따기, 덕석말이, 문지기졸이, 실바꿰기, 등이 있어 그때마다 노래 사설이 달라지고 가락도 달라지고 놀이에 상응해서 원무에서 여러 가지 동작의 변화가 있다. 강강술래는 처음부터 끝까지 쉬는 일없이 노래하고 춤추게 되어 구성지고 활기찬 한마당을 이룬다. 강강술래는 한국 여인놀이를 대표하며 조선시대의 엄격한 여성의 정숙을 요구하던 시대에도 젊은 여인들의 달밤에 야외에서의 놀이로 전승되어 왔으니 그만한 공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만월을 그냥 보낼 수 없고 풍요한 가을 추수를 맞아 생활의 안정을 이룩한 만족감에서 여성들이 모여 노래와 춤으로 한바탕 놀이 흥풀이 신면풀이로 강강술래를 낳고 성장시켜 오늘날에 전승되어 여인놀이로 정착되었다.
명량대첩의 현장이었던 우수영을 중심으로 해남지역 전역에 걸쳐 전승되는 우수영 강강술래에 대하여 해남사람들은 단지 12척의 전선으로 구름같이 엄습하는 왜의 전선들을 남김없이 궤멸시켜 임진 7년 전쟁의 승기를 이끌어 냈던 이순신 장군이 당대 우수영 부녀자들과 함께 적을 속이고 아군의 전의를 북돋기 위하여 비로소 만들어낸 것이라고 믿고 있다.
우리민속에 대한 일제의 말살정책으로 기타지역에서는 강강술래가 일찍 그 모습을 감춘데 대하여 일경에 쫓기면서도 우수영강강술래가 줄기차게 맥을 이어내려 광복과 함께 그 자랑스러운 모습을 활짝 들어낼 수 있었던 것은 그들 민속 주체들의 진솔한 민족적 신념에 따른 것이었다.
강강술래가 역사의 처음부터 구 마한지역에서 개성적으로 전승되어온 놀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명량대첩의 현장주민들인 그들이 그들의 애국심에 실어 이순신 장군과 함께 자신들이 강강술래를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것을 나물할 일은 아닐 것이다. 그렇게 해서 전통적 강강술래가 우수영강강술래로 다시 태어나 오늘에 전승되는 것이라고 말하여도 큰 허물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9. 참고문헌: 해남군사(1995)
1. 분류: 중요민속자료
2. 명칭(한글): 윤탁가옥
3. 명칭(한문):
4. 소재지: 해남군 현산면 초호리 276
5. 지정년도: 1984. 1. 10
6. 지정번호 : 중요민속자료 제153호
7. 제작시대: 1906년
8. 문화재 설명: 이 가옥은 안채의 상량문에 「광무십년 병오십일월 이십칠일 경신수주 동십이월 초삼일 을축 신사시 상량 축좌(光武十年 丙午十一月 二十七日 庚申竪柱 同十二月 初三日 을축 신사시 상량 축좌)」이라고 기록되어 있어 1906년에 건립되어진 것으로 여겨지며 사랑채와 별당채 등도 같은 연대에 지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건물의 전체배치는 완만한 경사지형을 3단으로 정지한 후에 직선축을 이용하여 각 건물을 배치하였다. 가옥의 맨 앞에 ᄂ자 형으로 건축된 문간채를 들어서면 넓은 사랑마당이 전개되고 이 뒤편으로 가면 다시 지형의 정지상 막돌허튼층쌓기한 1.8m 높이의 2번째 석축이 나타나며, 그 우측 위로는 중문간채를 건립하였다. 중문을 들어서면 우측으로는 ᄀ자형의 안채가, 좌측으로는 뒤집은 ᄂ자 형의 별당채가 자리하고 있어 전체적으로 중앙에 앞쪽이 트인 중정이 형성되어지며 안채 뒤편으로는 각종 과실수가 심어져 있는 후원이 넓게 조성되어 있다.
안채 안채는 팔각지붕의 ᄀ자형 집으로서 중부지방식의 평면구성으로 되어있다. 가로간은 전면에 퇴를 두고 중앙에 3칸 대청을 꾸미고 좌측으로는 건너방을 배치하였으며, 세로간은 전․후로 퇴를 두어 앞쪽에 2칸 부엌을 두고 뒤쪽으로는 2칸 안방을 배치하였다. 그리고 꺽어진 모퉁이에는 골마루를 설치하여 안광으로 이용하게 하였다. 큰방 앞 퇴에서 부터 건너방 끝까지는 툇마루를 설치하였으며 마루가 꺾어지는 부문에는 통행의 편의를 위해 세모마루를 덧붙였다.
기단은 네모난 화강석으로 바르게 1벌대로 쌓았으며, 초석은 막돌초석이며 기둥은 툇마루를 설치한 전면에만 두리기둥을 사용하였고 그 외는 모두 방주를 썼다. 구조는 1고주 5량으로 기둥상부에서는 퇴보와 납도리로 결구 시켰으며, 퇴보 밑면에는 기둥안쪽으로는 사선으로, 바깥쪽으로는 직선으로 갈린 보아지를 끼웠다.
안마당에는 대청 앞으로 적벽돌 굴뚝이 높게 세워져 있으며 중앙에는 자연석으로 갓을 돌린 원형의 화단이 조성되어 있다.
별당채 남쪽에서 봤을 때 ᄂ자를 뒤집어 놓은 형의 팔작지붕 와가이다. 가로간과 세로간 모두 앞쪽에 퇴를 두어 툇마루를 설치했다. 가로간 2간에는 샛방을 배치하였으며 가로간은 앞쪽으로 2간 대청을 두고 맨 끝에는 머리방을 두었으며 머릿방 북쪽의 퇴부분에는 높은 누마루를 시설하였다.
기단은 안채와 같은 형식이며 초석은 막돌초석이나 가로간 퇴부분의 우측 끝과 그 뒤편의 것만은 8각 단면의 장초석을 사용하였다. 기둥은 전면의 퇴부분만 두리기둥이며 그 외는 모두 방주를 세웠고, 기둥머리에서는 안채와 동일한 기법으로 보와 도리를 결구 시켰다. 가구는 1고주 5퇴가이며, 도리는 모두 납도리를 사용하였고 도리밑면에는 장설(長舌)를 받쳤다.
사랑채 사랑채 건물로는 보기 드물게 우진각 지붕으로 된 일자형 평면의 정면 7간 집이다. 건물 전․후로는 퇴를 두었으며 평면구성은 우측으로부터 2간의 건너방, 2간대청, 2간의 사랑방 순으로 배치하였으며 맨 좌측 1간은 겹형으로 방을 앞뒤로 2개 배치하였다. 사랑방에서 우측 끝까지의 퇴부분에는 툇마루를 설치하였고 뒷퇴에는 각 간마다 골방을 설치하였다.
가단은 3척 높이의 막돌허튼층쌓기 구조이며 초석은 막돌초석이고 기둥은 모접기를 한 방주를 사용하였다. 기둥 위에서는 장혀로 받혀진 납도리와 퇴보로만 결구 되었으며, 퇴보 밑에는 퇴보머리와 같은 선으로 잘리고 기둥 안쪽으로는 빗잘린 보아지를 두었다. 가구는 2고주 5량구조로 도리는 모두 납도리이고 대량 위의 대공은 동자주형으로 완도리를 받게했다.
문간채 본 건물은 상량문에 “壬子十月二十一日乙酉柱立二十七日上樑”이란 기록으로 보아 1912년에 건립된 ᄀ자 형의 문간채이다. 평면구성은 집 안쪽에서 보아 맨 좌측에 2간을 뒷간으로(후면은 광), 그 다음 2간은 광으로 꾸미고 다음 1간은 대문간으로 하였으며, 그 다음 1간은 광으로 하고 다음은 꺽어지면서 부엌을 드리고 맨 끝으로는 1간 방을 드렸다. 지방은 대문간은 솟을대문이며 좌측지붕은 둘로 나누어서 끼웠으며, 끝은 우진각으로 처리했다. 우측은 중앙을 모임으로 하고 맨 머리는 박공으로 처리했다. 초석은 막돌초석이며 기둥은 방주를 사용하였고 바깥벽면은 막돌로 반화방장 처리하였다.
9. 참고문헌: 해남군사(1995)
1. 분류: 중요민속자료
2. 명칭(한글): 윤두서 고택
3. 명칭(한문):
4. 소재지: 해남군 현산면 백포리 372
5. 지정년도: 1996. 2. 9
6. 지정번호 : 중요민속자료 제232호
7. 제작시대: 1630년
8. 문화재 설명: 인조 8년경(1630년경)에 건축된 것으로 추정되는 윤두서 고택은 해남읍에서 약 20㎞ 거리인 백포 해변가에 있는데 인근마을에는 해남 윤씨 가문 10여세대가 살고 있으며, 전통한옥들이 옛 마을의 정취를 한껏 풍기고 있다. 윤두서 고택은 건립 당시에는 48칸을 지은 것으로 전하나 지금은 본체 13칸, 곡간체 3칸 및 사당과 헛칸 등이 남아 있을 뿐이다.
고산 윤선도(선조20~현종12년/1587~1671년)가 장자인 인미(仁美)를 분가시키고 자신도 거처하기 위해 이 집을 지었으나 해변에 위치하여 해풍이 심해 자신은 연동에서 거처하고 증손인 두서(斗緖-현종 9년~숙종41년/1668~1715년)를 살게 했던 집이다.
북쪽의 망매산을 주봉으로 하고 앞은 훤히 바다로 트여 있어 좌청룡 우백호의 산세가 풍수지리상 명당터라 이르는 자리에 자리잡고 있다. 건립 당시에는 동쪽으로 지은 문간채로 들어가 우측에 사랑채가 있었다고 전하나 지금은 문간채와 사랑채는 없어지고 안채와 사당 및 헛간이 남아 있다.
전통 목조 기와집으로 건축 면은 ᄃ 자형이며, 건평은 55.9평으로 조선후기 건축수법이 잘 보존되고 있다. 건물 높이는 처마지붕 높이가 3.06m이고 고주가 3.17m이며 용마루까지의 높이가 약 60m로 지붕이 높이 쳐들지 않고 푹 덮여 바다 바람의 영향을 막고자하였음을 알 수 있다.
동쪽의 곡간 채와 안채 사이에 출입통로가 나 있으며 정 중앙(북쪽)에 대청을 두었는데 동쪽 익사에는 남쪽으로부터 방, 주방, 방, 방, 주방 순서로 5칸(주간 간격 12척)을 배치하고, 서쪽 익사에는 대청(마루방), 청, 청, 주방(5칸-주간 간격 14.3척)의 순서로 구성하고 있다. 또 안채 대청과 서쪽 방 앞에는 툇마루를 구성하고 있는데 대청 앞쪽에는 쌍여닫이 정자살문을 달았으며, 기둥의 단면은 외진주는 원형이고 간주는 각주로 되어 있다.
지붕은 홑처마 지붕으로 부연 없이 연목만 걸었고 대청마루 위의 가구는 자연상태로 약간 굽은 대들보를 걸고 그 위에 판대공을 구성하여 장여와 굴도리를 받치고 있다. 툇마루 위에는 우미량 형태의 굽은 툇보를 걸고 초각되지 않은 보아지로 기둥의 사괴를 결구시켜 강한 구조를 하고 있다.
동쪽의 부엌문 위에는 정(井)자형 환기구를 내어 민가의 소박한 맛을 내고 있으며 서쪽의 부엌 앞에는 툇마루를 두고 기둥과 기둥 사이에는 판벽과 판문을 달아 부엌의 안쪽이 밖에서 들여다보지 못하게 하였다.
주초는 덤벙 주초이며 기단석은 산돌 평축 쌓기로 되어 있고 벽채는 판벽과 회벽을 방의 용도에 따라 고성 하였다. 지붕은 본채는 맛배지붕으로 하고 용마루에 작은 합각을 만들었으며 동쪽 광이 남면 끝 지붕은 우진각으로 되어 있다.
서쪽 익사의 주방은 14.3척의 넓은 공간으로 구성하고 지붕 밑에는 누마루를 설치하였는데 이 부엌의 남쪽은 3칸이 소실되어 그을린 자국이 남아 있다.
9. 참고문헌: 해남군사(1995)
도지정문화재
1. 분류: 유형문화재
2. 명칭(한글): 천불전
3. 명칭(한문):
4. 소재지: 해남군 삼산면 구림리 799
5. 지정년도: 1974. 9. 24
6. 지정번호 : 유형문화재 제48호
7. 제작시대: 1813년
8. 문화재 설명: 천불전은 남원(南院)에 속하는 건물이다.「대둔사지」에 의하면 순조 11년(1811)에 실화하여 불타버렸으나 2년 후인 순조 13년(1813)에 중건하였음을 알 수 있다. 중건한 사람은 완호(玩虎) 제성(濟醒)두 대사이다. 전각의 내부에는 옥석으로 조각한 1천 개의 작은 불상을 배열하였다.
천불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계 팔작집이다. 기단은 장대석(長大石)으로 높이 축조된 바른층쌓기 형식이며, 이 위에 막돌 초석을 놓고 정면 양 우주(隅柱)는 강하게 민흘림을 둔 원주(圓柱)를 세웠다.
기둥머리는 창방으로 결구하고 이 위에 평방을 놓고 공포(栱包)를 얹었다. 어간 양 원주 위에는 용두를 조각하여 걸쳤는데 꼬리부분이 내부까지 내밀은 형태로 되어 있다. 공포는 양면 어간에 2구, 양 협간에 1구씩의 공간포를 배치한 외3출목 내3출목의 다포양식으로 외부로 뻗은 살미의 끝은 앙서로 되어 있고 내부에서는 여러 개의 판형으로 붙어 있으며 그 끝은 초각(草刻)된 연봉형상(蓮峰形狀)으로 마감하였다.
건물 정면 창호는 꽃살창호로 중앙 칸에는 세 짝의 소슬 꽃창살을 달았고 양협간에는 두 짝으로 벚꽃살창을 달았다. 처마는 전후면 겹처마이고 천장은 연등 천장이다.
9. 참고문헌: 해남군사(1995)
1. 분류: 유형문화재
2. 명칭(한글): 천불상
3. 명칭(한문):
4. 소재지: 해남군 삼산면 구림리 799
5. 지정년도: 1974. 9. 24
6. 지정번호 : 유형문화재 제52호
7. 제작시대:
8. 문화재 설명: 천불전에 봉안된 천불에 관한 설화는 퍽 재미있다. 중앙에 봉안된 삼존불은 목조불이지만, 그 주위의 장엄한 천불은 모두 옥불이다. 이 옥불은 처음 완호스님 등이 천불전을 짓고 경주에서 생산되는 옥석으로 천불을 조성케 했다. 이 천불은 열 사람이 6년간에 걸쳐 조성했다 한다. 불상이 완성되자 3척의 배에 싣고서 울산을 거쳐 부산 앞 바다를 지나 해남의 대흥사로 향했다.
그러나 한 척의 배가 울산강에서 풍랑을 만나 표류하여 결국 닿은 곳이 일본의 장기현이었다. 일인들은 이 수많은 옥불을 만나 기쁜 마음으로 서둘러 절을 짓고 불상을 봉안하려 했다. 그러나 일인들의 꿈에 이 불상들이 나타나 우리들은 지금 조선국 해남의 대흥사로 가는 중이니 이곳에 봉안될 수 없다고 했다. 할 수 없이 일인들은 옥불들을 거두어 배에 실어 해남으로 보냈다. 일본을 거쳐 온 불상들은 수년 전 불상에 분칠할 때 밑바닥에 〈日〉자가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한다.
천불전의 불상들이 일본으로 표류된 당시 상황을 기록한 풍계대종사(楓溪大宗師)의 일본표해록(日本漂海錄)이 있다.
이것은 직접 표류를 겪은 풍계가 몸소 겪은 바를 기록한 것인데, 그뿐 아니라 일본의 풍토, 문물, 습속 등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언급하고 있다. 이 기록은 「고고미술」 5권 1호 및 또 「조선불교통사」, 「동사열전」 등에 기재되어 있다.
9. 참고문헌: 해남군사91995)
1. 분류: 유형문화재
2. 명칭(한글): 대흥사 서산대사부도
3. 명칭(한문):
4. 소재지: 삼산면 구림리 799
5. 지정년도: 1974. 12. 26
6. 지정번호 : 유형문화재 제57호
7. 제작시대:
8. 문화재 설명: 서산대사의 부도는 대흥사의 부도 중에서 조각법이 가장 뛰어난 작품이다. 이 부도는 부도전의 맨 후렬 중앙부에서 약간 우측(향 좌측)에 위치하고 있다.
2단으로 된 하대석에 중석과 앙련(仰蓮)을 안치하고 그 위에 8각의 탑신과 옥개석, 상륜(相輪)을 올려놓았다. 각의 옥개석은 하면에 연목(椽木)의 각출(刻出)이 정연하고 상면에는 기왓골과 우동이 완연하며 전각에서는 반전이 뚜렷하다.
대흥사에 서산대사를 배향하는 표충사와 서산대사유물관이 있다. 현재 유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대사의 유물은 교지를 비롯하여 의발, 금난가사, 대사의 친필첩, 무기류와 갑의(甲衣) 등이 있다. 전체높이 2.65m이다.
9. 참고문헌: 「청어당휴정대사부도에 대한 고찰」 불교미술(4), 동국대학박물관 1978.
「문화재도록」 전라남도 1981.
1. 분류: 유형문화재
2. 명칭(한글): 은적사 철조비로사나불좌상
3. 명칭(한문):
4. 소재지: 마산면 장촌리 산 44-3
5. 지정년도: 1981. 10. 20
6. 지정번호 : 유형문화재 제86호
7. 제작시대: 10세기경으로 추정
8. 문화재 설명: 이 철불은 금강산의 북쪽 중턱에 자리잡고 있다. 은적사의 약사전 내에 봉안되어 있는데, 마산면 장춘리 남계마을에서 약 1㎞쯤 떨어져 있다. 현재 비로사나불은 하부동체와 무릎부분이 완전히 파손된 채이나, 두상이나 흉부, 수인, 의문(衣紋) 등은 전혀 손상이 가지 않아 다행스러운 일이다.
보발(寶髮)은 나발(螺髮)인데 그 모양이 큼직큼직 하지 않고 소형으로 표시되었으며, 두정으로는 육계(肉髻)가 나직하게 표현되었다. 상호(相好)는 원만하게 양쪽 볼의 살이 약간 빠진 듯 하나 양감이 주어졌다. 양미간과 코․입 등이 매우 정재 되었는데, 이마에는 백호공이 깊숙이 파여져 있고, 눈은 반개 하였으며, 콧날은 우뚝하고 입은 다물었는데 사실적 표현이 여실하며 턱은 두 턱이 지고 있다. 또한 목에는 삼도(三道)가 있고 양쪽 귀는 길게 늘어져서 위엄이 있어 보인다. 양 귀는 관통되어있는데 이는 신라․고려 때의 금속제 불상에서 볼 수 있는 양식이다.
법의는 통견(通肩)으로 양쪽 어깨에서 3~4 겹씩의 의문이 양쪽 팔에 걸쳐 밑으로 흐르면서 양 무릎을 덮고 있는데 가슴 양편이나 팔에서의 의문은 매우 유려한 사실성을 보였다. 가슴에서는 군의(裙衣)의 주름이 선각되고 동체의 뒷면에도 법의의 선각이 보인다.
수인은 지권인(智拳印)을 하였으나 양쪽 손가짐이 전형과는 달리 표현되었다. 즉 정상적인 지권인에서는 오른손을 위로하고 왼손을 밑으로 하여 엄지를 올리고 있는 모습이 보통인데 이 불상에서는 이와는 정반대로 오른손을 아래로 하여 엄지를 올리고 있다. 이 불상의 조성년대 추정에는 다음과 같은 점이 비교된다고 하겠다. 우선 비로사나불이라는 존명(尊名)과 그 재료가 철이라는 점에서 같은데 이는 신라하대에 유행했던 것이다. 특히 통견법의(通肩法衣)의 형태나 양쪽 팔에 걸친 의문 등이 도피안사 철불(865년 조선)이나 보림사 철불(858년 조선)과 유산한 점이 많다. 그런데 증심사 철불(9세기 말경)과는 통견의 법의, 양쪽 팔의 의문은 물론 수인까지도 동일수법을 취하고 있어 더욱 주목되고 있다. 이러한 점등으로 보아서 이곳 은적사의 철불은 신라하대의 비로사나불의 전형양식을 일부 고수하면서도 오히려 고려시대로 연결되는 작풍을 나타내고 있는 점에서 조성시기는 10세기경으로 추정된다 하겠다.(현재높이 : 1.03m, 머리높이 : 0.43m, 어깨폭 : 0.85m, 가슴폭 : 0.44m)
9. 참고문헌: 「해남 은적사의 유물유적」 문화재 13호 정영호 1980
1. 분류: 유형문화재
2. 명칭(한글): 대흥사 용화당
3. 명칭(한문):
4. 소재지: 삼산면 구림리 799
5. 지정년도: 1982. 10. 15
6. 지정번호 : 유형문화재 제93호
7. 제작시대: 순조 13년(1813)
8. 문화재 설명: 이 건물은 순조 13년(1813)에 건립된 것으로 강당 겸 선방으로 사용되고 있는 건물이다. 본 건물은 일자형의 팔작집이나 우측 뒤편으로는 “ᄀ”자로 꺾으면서 맞배집을 연결시켰다. 건물 남측부에는 온돌방 3개와 부엌을 드렸으며 건물 중앙부에는 큰 선방과 그 북쪽으로 작은방 2개를 꾸몄다. 선방의 앞뒤로는 큰 퇴와 작은 툇마루를 설치하였다. 본 건물에 특이한 사항은 건축 당시 지반을 수평으로 고르지 않고 자연 지형을 그대로 이용하여 건축한 사실인데 우측면이 좌측면 보다 낮은 관계로 주고(柱高)에 그 차이를 많이 두어 건물을 지었다.(전면 좌․두측 귓기둥은 주고가 각각 272㎝, 365㎝임) 공포는 전면 기둥 일부에만 짜여져 있는데, 그 형상은 주심포계(柱心包系)의 2익공양식으로 행공첨자가 그 어느 부재도 받치지 않고 허공에 떠있는 특이한 모습으로 되어있다.
9. 참고문헌: 해남군사(1995)
1. 분류: 유형문화재
2. 명칭(한글): 대흥사 대광명전
3. 명칭(한문):
4. 소재지: 삼산면 구림리 799
5. 지정년도: 1982. 10. 15
6. 지정번호 : 유형문화재 제94호
7. 제작시대: 헌종 7년(1814)
8. 문화재 설명: 본 건물은 헌종 7년(1841) 초의선사가 건립한 전각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집이다. 장대석으로 바른층 쌓기한 기단상에 막돌 초석을 놓고 그 위에 민흘림원주를 세웠으며 가주(架構)는 5량구조(梁構造)로 되어있다. 공포는 행공첨자가 외목도리(外目道里)의 장설을 받고있는데 주심포계(柱心包系) 형식에 익공의 형식도 가미한 형식이다. 그 형상은 기둥머리로부터 둥근 판형으로 되어있고 그 단부(端部)에는 복잡하게 조각된 쇠서 2개를 내었다. 건물내에는 비로자나불을 봉안했고, 천장은 중앙부 불단 위에만 우물천장을 높게 달고 그 위에는 빗반자로 마감했다. 건물 정면의 창호는 어간에는 3짝, 양협간에는 2짝의 빗살창을 달았다. 본 전각에 특히 주목되어지는 부분은 자연스럽게 중앙부분이 위로 굽은 동형(同形)의 대들보 2개로 그 형상이 몹시 자연스러우면서도 특이하다.
9. 참고문헌: 해남군사(1995)
1. 분류: 유형문화재
2. 명칭(한글): 대흥사 정조친필 서산대사화상당명
3. 명칭(한문):
4. 소재지: 삼산면 구림리 799
5. 지정년도: 1990. 2. 24
6. 지정번호 : 유형문화재 제167호
7. 제작시대: 정조2년(1788)
8. 문화재 설명: 대흥사는 호남이 명찰로서 그 지위와 유적이 풍부하여 이름을 날리고 있으며 그 배경 중에 서산대사의 주석과 활동은 매우 큰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대흥사는 서산대사가 1592년(선조 25) 왜란을 맞아 선조의 특명을 받아 제자인 유정․처영과 함께 승병을 모집하여 팔도도총섭이 되어 전공을 세우고 입적한 뒤, 그의 의발을 모셨던 곳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후 180여 년이 지난 1788년(정조 12)에는 대흥사의 천묵․계홍스님이 서산대사와 유정․처형을 모시는 사우건립을 모색하게 되는데 이것이 표충사 창건으로 연결되었다. 당시 호조판서 서유린은 서산대사의 사적과 사우설립의 당위성을 왕에게 상세히 주청, 이듬해에는 사우건립의 허가와 함께 「표충」이라는 사액을 받게된다. 조정에서는 사액과 함께 예조정랑 정기환을 예관으로 파견했는데 당시의 제문이 현재 표충사(서산대사 유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후 정조는 표충사에 사산대사의 영정이 모셔지는 것을 계기로 〈서산대사화상당명(西山大師畵像堂銘〉과 그 서문을 직접 써서 대흥사에 내려보내었다. 그해가 1794년(정조 18)이었고 「정원대왕신장(正宗大王宸章)」이라는 표사가 있는 이 유물은화운문채화(花雲文彩畵)가 그려진 담황색 비단에 31행의 내용이 적혀 있다. 말미에 정조의 친필임을 상징하는 「홍제(弘齊)」인이 있고, 글의 내용은 서산대사의 충절을 기리는 내용이다.(175.5㎝×69.8㎝)
이 화상당명은 다시 현판문과 금자병풍서로 만들어졌는데 이들 모두가 현재 대흥사에 보존되어 있다.
9. 참고문헌: 해남군사(1995)
1. 분류:
2. 명칭(한글): 대흥사서산대사유물
3. 명칭(한문):
4. 소재지: 삼산면 구림리 799
5. 지정년도: 1990. 2. 24
6. 지정번호 : 유형문화재 제166호
7. 제작시대:
8. 문화재 설명: 금자병풍서 현재 서산대사 유물관에 보존되어 있는데 원래 6폭(폭당 크기 65×120㎝, 자경 3.5㎝)이었다고 하며, 좌우 1폭씩은 해전도가 그려져 있었다고 전해진다. 본문 금리서는 중간 4폭이며 필자는 누구인지 알 수가 없다.
이 병풍은 표충사 향사시 사용되었던 것으로 1894년(고종 31) 도난을 당해 일본으로 건너갔던 것으로 1905년 반환되었는데, 이때 해전도는 분실되었다고 한다. 현재는 좌우 2폭에 죽과 매가 그려져 있다. 반환 후인 1906년 석치 최병승이 그린 것이다. 글은 경허 스님이 썼다. 내용은 정조친필의 것과 동일하다.
현판문 현재 표충사 사우 좌측 벽에 걸려 있으며 전라감사로 부임했던 이서구(1754~1825)가 글을 썼다.(114×58㎝) 내용은 똑같으며 「봉교근서(奉敎謹書)」라고 되어 있다.
교지 2매 서산대사와 관련된 유물로서 교지 2매가 있다. 이중 하나는 1602년(선조 35)에 내려진 것으로 서산대사 휴정을 「일도대선사 선교도총섭(一都大禪師 禪敎都總攝)」으로 임명하는 내용이고(80×86.3㎝) 다른 하나는 후대의 것으로 표충사가 건립될 때인 1788년 정조가 이전의 교지에 가증(加贈)하여 표충선사라는 칭호를 내리는 내용이다(105.6㎝×69㎝).
서산대사친필 서산대사가 사가(마조․백장․훈벽․임제대사)의 선구를 요약하여 적은 것이다. 표제는 「사대사어(四大師語)」라 되었고 내제(內題)는 「정선사가록(精選四家錄)」이라 되어 있다. 1장부터 6장까지는 서산대사의 친필이며 뒤에 사명당 우정의 친필이 덧붙여져 있다(1책, 20.3×35㎝).
서산대사 의발 염주 2종과 금란가사, 그리고 옥바릿대와 수저이다. 금란가사는 240×90㎝, 옥바릿대는 大 구경(口徑) 21.6㎝ 高 9.6㎝, 中 구경 16.4㎝ 高 6.7㎝(일부파손), 小 구경 12.3㎝ 高 5㎝(구연부 파손)의 크기이다.
표충사 연혁 임진왜란 당시의 충절 삼승(三僧)인 서산대사 휴정․사명당 유정․뇌묵당 처영 등 세분의 영정을 봉안한 사우이다. 1592년(선조 25)에 왜구의 침입이 있자 서산대사는 선조대왕의 특명을 받고 제자인 유정․처영 등과 함께 승병을 무집하여 왜구와 싸웠으며, 1593년(선조 261)에는 명군과 함게 서울수복의 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서산대사가 죽고 그의 衣鉢(유물)은 대사의 뜻에 따라 해남 대둔사(현 대흥사)에 모셔졌다. 스님이 열반한 후로 의발을 보관해온지 185년이 되는 1788년(정조 12)에 사우를 건립하여 세분 스님의 영정을 모시고 영혼에 제사하기 위하여 세분의 공덕을 조정에 상소하기에 이르렀고 이에 호조판서 서유린이 그 사정을 상세히 왕에게 건의하였다. 이에 정조는 서산대사와 그의 제자인 유정․처영 등 삼승이 충절을 크게 치하함과 아울러 표충이라는 액호를 내렸고, 이러한 사실을 국가중흥의 모범으로 삼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다음해인 1789년(정조 13)에는 사우를 건립하였으며, 왕은 예조정랑 정기환을 보내어 치제하고 향축을 올리게 하였다. (현재 사액시 제문이 서산대사 유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한편 표충사는 사액사우로서 최초 건립 당시에는 동남쪽으로 주산이 있고 북쪽으로 대웅전을 바라보는 곳에 있었는데, 이 최초 건립지에서 세분의 영정을 배향해 온지 49년이 지난 1836년(헌종 2)에 망론이 있어 동남쪽의 주산으로 옮기면서 강당 좌․우 제실 등 3칸을 마련하여 배향하였다. 이를 본 모든 사람들은 기이하게 여기고 근심하여 누구나 원래의 자리로 옮기고자 하였으나 재력의 부족으로 이건 할 수가 없었다.
그러던 중 1859년(철종 10) 완정 지봉이 대둔사로 부임해 와서 이 사실을 듣고, 원래의 사우지로 옮길 것을 경정하고 공명첩 2백장을 발행하여 이건의 비용을 마련하였다. 다음 해인 1860년(철종 11) 12월 7일 이건상량(移建上梁) 하고 1861년(철종 120에 단청을 마치고 모든 군민의 숙원인 삼승의 영정을 봉안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초의선사 의순이 기록한 《표충사중이구지기(表忠祠重移舊址記)》에 잘 나타나 있다.
한편 표충사는 1976년 9월 30일에 전남 지방유형문화재 제19호로 지정되었으며, 1978년에 건립한 서산대사유물관에는 대사의 유물이 보존․전시되고 있다.
〈표충사옥비중즙기(表忠祠屋碑重葺記)〉 1836년 수룡이성(袖龍爾惺)의 서문이 있어 비각의 창건에서부터 이건하기 까지의 과정과 경위가 상세하게 적혀있다. 院任秩(院長 海月 以敏등), 사지전질(四持殿秩), 녹화질, 종사질(宗師秩), 노덕질(老德秩)이 함께 기록되어 있다.
한편 비각 이건에 관련한 순사의 제음(題音) 및 각도각사(各道各寺)의 수납전(收納錢) 845량의 내용도 기록되었다. 당시 수합된 총경비는 1,010량이었는데 실제로는 1,670량이 소요되어 5백여량은 체용하게 되었으며, 이 각처(廳․契․堂․殿․齊․庵)의 출채(出債)내용이 함께 수록되어 있다.(27㎝×35㎝)
《표충사 삼창사기책(三創事記冊)》 표충사의 세 번째 중수사실과 관련 문건을 모아놓은 자료로서 1861년 성책 된 것이다. 1859년 1860년의 중수(重修)를 관찰사에게 요청하는 장과 이에 따라 1860년 영하 된 공명첩(空名帖) 2백장의 내용 그리고 중수자재의 마련과정이 자세히 수록되어 있다.
한편 이 자료는 중수된 표충사의 규모와 소요경비를 자세하게 적고 있어 사찰건축사를 규명하는 좋은 자료가 될 것이다. 앞의 자료와 마찬가지로 종사질․본방질․노덕질 등 명안(名案)이 첨부되어 있다.(28㎝×32㎝)
9. 참고문헌: 해남군사(1995)
1. 분류: 유형문화재
2. 명칭(한글): 대흥사 관음보살도
3. 명칭(한문):
4. 소재지: 삼산면 구림리 799
5. 지정년도: 1991. 7. 19
6. 지정번호 : 유형문화재 제179호
7. 제작시대: 1850년경으로 추정
8. 문화재 설명: 서산대사 유물관 좌우 벽에는 각각 한구씩의 관음보살도가 걸려있다. 향좌측의 것은 준제관음보살이고 향우측의 것은 11면 40벽 관음보살이다. 두 작품은 크기가 가로 76.5㎝, 세로 155㎝로 비단에 담채로 그려져 있는데 여러 곳의 훼손되었지만 보존상태는 양호한 편이다.
준재관음보살은 커다란 연꽃대좌 위에 보주형 전신광배를 뒤로하고 앉아있는데 이마 가운데에 눈이 하나 더 표현되어 있고 손은 모두 18개이다. 대준재다라니경의 준재관음보살의 화생법에 의하면 삼목 18벽로 연꽃대좌 위에 안치하고 좌우에 선과 악을 상징하는 두 공양상이 배치된다고 하였다. 이 준재관음보살도는 대준재다라니경의 화생법에 상당히 충실하게 따라 그려진 그림으로 서노가 악을 상징하는 두 공양상이 하단에 연꽃줄기를 잡고 서 있는 모습으로 묘사되었다. 18개의 손의 모습과 지물은 오른쪽 첫째 손의 시무외인과 설법인․선정인을 결한 4개의 손을 제외하고는 검․연꽃․정병․번(幡)․수레바퀴․소라 등을 각각 들고 있다. 섬세한 필치로 그려진 이 불화는 대광명전에 봉안된 불화들과 부처의 얼굴이나 장식 및 의습에 있어서 상당히 유사하다. 그래서 대광명전의 불화들이 조성되었던 1850년경에 조성되어 봉안한 것으로 추정된다.
준재관음보살과 거의 흡사한 필치와 색감을 가지고 있는 11면 40벽관음은 팔각원당형의 연꽃대좌 위에 입상으로 표현되어 있다. 머리에는 화불과 함께 12개의 얼굴이 묘사되고 40개의 손에는 갖가지 지물들이 들려있는데 선정인과 합장을 한 4개의 손에만 지물이 없다. 이 불화도 준재관음보살과 함께 1850년경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9. 참고문헌: 해남군사(1995)
1. 분류: 유형문화재
2. 명칭(한글): 옥산서실 소장품일괄
3. 명칭(한문):
4. 소재지: 옥천면 송산리 129
5. 지정년도: 1991. 7. 19
6. 지정번호 : 유형문화재 제181호
7. 제작시대: 조선시대 중기
8. 문화재 설명: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옥봉 유품의 정식 명칭은 「옥봉서실소장품 일괄(玉峯書室所藏品 一括)」이다. 수량은 9종 113점에 달한다.
이들 유품은 조선시대 중기의 학문적 성향과 시대적 배경을 파악하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문화재 전문위원인 김정호씨가 유품을 조사하여 보고서를 작성한 백옥봉유물일괄의 지방문화재 지정서 목록은 다음과 같다. 이들 유품은 옥봉과 관련된 유품이 대부분이지만 일부는 그의 아들 진남이 수정․보완하거나 남긴 것도 있다.
현재 백옥봉의 유품은 해남군 옥천면 송사리 129번지의 백형진씨(수원백씨옥봉공파송산종중)가 관리책임자로 있는 송산리「백옥봉유물관」에 소장돼 있다. 그러나 실제 보관중인 유물․유품은 문화재로 지정된 것보다 훨씬 다양하고 종류도 많아 이들 자료들은 소중하게 보관․관리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1990년 10월에 유물 소장자인 백형진씨가 조사한 자료에 의하면 족보류와 근대 문집을 제외하고도 모두 26종의 유물이 있었던 것으로 파악됐다.
영여(靈輿 : 혼가마) 옥봉과 관련된 유물 가운데 가장 진귀한 유물의 하나이다. 길이가 243㎝(몸체부분은 63㎝)이며, 높이는 77㎝, 폭50㎝에 이른다. 이 영여는 옥봉이 한양에서 돌아가시자 그의 죽음을 액석하게 여긴 선조임금이 직접 하사했던 것으로 서울에서 해남까지 옥봉의 영정을 운반할 때 사용했다. 전하는 이야기로는 당시 장례 책임자로 율곡 이이가 임명돼 옥봉이 유해를 한양에서 전주까지 율곡이 직접 운반했으며 전주에서 해남까지는 송강 정철이 몸소 수행했다고 한다. 장식물은 많이 벗겨지고 마모 됐으나 원래의 모양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영여는 단단한 나무 재질로 만들어져 있으며 앞과 양옆에 작은 문이 달려 있다. 정교한 단청을 입혔으며 영여의 하단부는 거의 벗겨져 버렸고 상단부 만이 희미하게 남아있을 뿐이다. 덮개는 명주천으로 이었다고 하나 대부분 없어졌고 가마의 상단부에 부분적으로 남아 있다. 이 영여는 나라의 임금이 하사한 물건으로서 모든 매듭과 이음새가 세심하게 조각돼 있으며 정교한 단청이 남아있어 4백여년 전의 상례(喪禮)와 목조공예기술을 파악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강첨(講籤) 대나무를 정교하게 얇게 종이처럼 다듬어 붓으로 글씨를 새긴 것으로 둘레 20㎝의 원통형 통속에 약 1천5백여개가 꽂혀있다. 1개당 높이는 15㎝, 폭 0.3㎝, 두께 0.5㎜ 정도이며 한쪽에 13~20자씩의 한문 글귀가 새겨져 있다.
소장자의 말로는 「방책」이라고 불렀다고 하며 시험 문제 지처럼 전면의 문구를 시험관이 불러주면 후면의 문구를 학생들이 대답하는 것이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강첨의 용도는 서당이나 향교 등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때 일일이 써서 하는 것보다 미리 써놓은 문귀를 그날의 과제로 제출하면서 일일 교재로 사용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문헌 연구가들에 의하면 방책이란 종이가 실생활에 쓰이기 이전에 나온 원시적인 필기장이라고 보고 있기 때문에 백옥봉이 남겨놓은 방책에 대해서도 그 용도에 대한 자세한 연구가 시도대야할 것이다. 그리고 그 내용과 방책의 숫자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으나 글씨에는 「공자왈…」 등의 문귀가 많은 것으로 보아 논어를 새긴 것으로 보여진다. 글귀를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前面) 자공아부욕(子貢我不欲) 자기약시소문(子豈若是小文) 자왈(子曰) 회지(回之) 시운민(詩云緡)
(後面) 사만물면(舍萬物面) 내명우제정가피사락(乃命于帝庭駕彼四駱).
옥봉친필 논어 등본(2권) 가로 26, 세로 16㎝의 친필교본으로 모두 3백 76쪽에 11행 24자씩 새겨져 있다.
옥봉이 남긴 유일한 친필 서책으로 옥봉의 학문적 열의와 서체를 파악케 하는 귀중한 자료이다. 특히 글씨에 능했다는 세인의 평판을 반영하듯 가는 붓으로 논어 전체를 옮긴 이 책은 옥봉이 당시에 어떻게 공부해왔는지를 한눈에 보여주고 있다.
내표지의 차례는 논어집주대전집권지(論語集註大全集卷之) 1~20으로 적혀 있다.
특히 이 논어등본의 2권중 1권에는 당시에 운영된 한글체로 해석을 달아 당시 한글의 변화를 추적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옥봉이 유년시절에 사용했을 것으로 보이는데 한글의 제작이 1425년이므로 한글 사용 이후 약 1백20년~1백30년 사이의 한글 변화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등록된 논어와 한글 주해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자왈(子曰)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 불역설호(不亦說乎) 유명자원방래(有明自遠訪來) 불역낙호(不亦樂乎)
「…습하면 또한 밋부디 니랴 벗이 원방으로 보터 오니 즐겁지 니랴」
학계에 정식보고 되지 않은 이 한글체는 중세 국어 표기와 근대 국어의 표기법이 혼합된 양상을 보이고 있어 학계의 정밀한 분석과 가치 판단이 요구되고 있다.
중용(단본과 해역본 2권) 이 책자도 당시 교육용으로 쓰이던 중용을 붓으로 그대로 필사한 것인데 한글 해설이 함께 있어 당시의 한글변천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내용의 일부를 옮기면 다음과 같다.
「中듕 庸용 諺언 解 天텬 命명 之지 謂위 道도 -오 卒졸 道도 之지 謂위 敎교-리니」
특히 이 책의 한글 사용법은 앞의 논어 등본과 약간의 차이를 지니고 있어 한글의 시대적 변천과 용법의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옥봉 친필 옥돌 서법체본(26개) 옥돌로 만들어진 이 서법체본은 한자의 기본 글자를 옥돌에 음각시켜 찍어냄으로써 한문교육용으로 사용했던 귀중한 유물이다. 아직까지 이같은 교육재료가 이 지역에선 발견되지 않아 후세 교육에 대한 관심도와 교육체계를 추적해볼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대․중․소 3개의 비슷한 크기로 제작된 이 서법체본은 모두 전후양면에 정교하게 글씨가 음각되어 있는데, 그 크기는 대형판(4개) 24×28㎝, 중형판(5개) 20×22㎝, 소형판(6개) 17×20㎝이며 영자를 새긴 판자는 17×20㎝로 나타나 있다.
글씨는 정자체로 쓴 것도 있으나 대부분 초서로 시귀를 판간했으며 옥봉의 시를 그대로 새긴 것으로 보인다.
특히 한자의 가장 기본이 되는 영자 옥석에는 「신인영자팔법(神人永子八法)」이란 제목으로 15×17㎝의 대형 글씨를 정자체로 판각했는데 글자의 획과 삐침마다 측(側), 탁(啄), 책(磔), 노(努), 늑(勒), 책(策), 략(掠) 등의 명칭을 달아 교육용으로 쓰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 옥석은 재료의 특수성과 내용의 정밀함으로 보아 당시 고관의 자제들을 대상으로 가르치던 한문교재로 사용됐을 것으로 짐작되고 있다. 또 이들 초서 내용과 글자체가 옥봉의 친필을 그대로 새긴 것이어서 초서의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장춘동(長春洞) 수창록(酬唱錄) 17.3×27.4㎝의 1권짜리 필사본인데 옥봉이 대흥사를 일컫는 장춘동을 오가며 당시 문장가들과 학자 관료들이 글을 주고 받은 것을 한권으로 엮은 문집이다. 대부분 시이며 시류에 따른 사건을 읊은 문장도 있는데 당대의 문장가들과 옥봉과의 교유 관계를 추정케하는 의미 있는 문집이다.
이 문집은 그 시대의 문장가와 관료들과의 문장을 수록하고 있으나 뒷편에 옥봉만사(輓詞), 옥봉제문(祭文), 송호만사(松湖輓詞) 등이 수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상당히 늦은 후대에 이들을 수집해 다시 정리한 것으로 추측된다.
수록된 내용을 살펴보면 대둔산수창시운(大芚山酬唱詩韻), 대둔산송담기(松潭記), 대둔산차운(次韻), 옥봉만사(輓詞), 송호만사 등 다양한 부류를 포함하고 있고 각 문장의 저자로는 영의정 사암 박순, 전라도 관찰사 송강 정철, 종성(鍾城)부사 고죽(孤竹) 최경창 시인인 백호 임제, 순창군수 김천일등 댱대 최고의 문장가와 세도인들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
이 같은 자료로 보아 특별한 벼슬이 없던 백옥봉은 그 학문적 깊이가 당대에 그 누구와도 겨룰만했으며 그의 교유 관계가 지위의 고하를 막론하고 오직 문장에 포함된 정신을 배경으로 자유스럽게 이루어지고 있음을 반영하고 있다.
목판본 일괄 목판은 옥봉과 관련된 유물 가운데 가장 많은 양을 차지하고 있다. 목각판은 4종류로 분류되어 있는데 옥봉집 목판은 83매가 남아있다. 이 목판은 51.5×26㎝, 두께 7㎝로 전후 양면 각 20행씩 17자를 새기고 있다. 현재 남아 있는 옥봉집을 찍었던 원본으로 옥봉의 장님인 송호 백진남이 제작했다고 전해진다. 또 5매가 남아 있는 옥봉 친필 목판은 124×42㎝의 크기에 두께가 4㎝인데 전후 양면 4행9자씩 36자가 새겨져 있다. 모두 옥봉의 친필로 사료되며 제작은 후대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6매가 남아 있는 옥봉 친필 목판은 124×42㎝의 크기에 4㎝의 두께인데 전후 양면에 5행씩 60자가 각각 새겨져 있다. 각각 옥봉의 유명한 싯귀를 그대로 초서로 새겨놓고 있으나 시의 내용은 아직 파악되지 않고 있다.
이와 함께 한석봉 친필 목판도 6매가 남아있다. 83×36㎝ 크기에 두게 4㎝인 이 목판은 전후 양면에 2행 5자씩 10자가 각각 새겨져 있다. 한석봉의 글씨를 그대로 새긴 것으로써 그의 빼어난 글씨를 각인 할 수 있다.
기타유물 옥봉과 관련된 유물은 각종 문집 이외에도 명나라 사신이 남긴 글씨와 그림 등 다양한 종류가 포함돼 있다. 일부는 상태가 완벽하지 않으나 당시의 시대상황과 학문적 풍토를 가름해볼 수 있는 자료들이 많다. 그 종류만 제시해 보면 다음과 같다.
이조 백자 향로 1점 20×15㎝.
옥봉교지 6매 49×76㎝
송호 백진남 교지 1매 80×38㎝
송호집 1질(2권) 31×21㎝
고시집 2권(7언시) 20×16㎝
2백수 수록 격몽요결․동국문헌집 합1권 22×20㎝
주지번현판 1점(명변) 31×40㎝
병풍화 1점(적벽대전 그림 일부)
옥봉과 송호공에 관련된 각종 홀기(笏記) 4점
9. 참고문헌: 해남군사(1995)
1. 분류: 무형문화재
2. 명칭(한글): 우수영 부녀농요
3. 명칭(한문):
4. 소재지: 문내면 동외리 1102
5. 지정년도: 1987. 8. 25
6. 지정번호 : 무형문화재 제20호
7. 제작시대:
8. 문화재 설명: 해남군 서부에 돌출한 화원반도에 위치한 우수영은 임진왜란 때의 명량해전 승첩지로 유명하며 강강술래, 고싸움, 짱치기 등 많은 민속놀이와 민요가 전승되어 오는 민속의 고향이기도 하다.
폭이 협소한 화원반도는 수원이 극히 메말라 예로부터 『시집가기 전까지에 쌀 서말 먹은 처녀 없다. 들에서 나아 들에서 죽는다』라는 말들이 전해 내려올 만큼 전작에 관계되는 노동을 여성들이 거의 도맡고 있다.
부지런히 일손을 놀리면서 목청 고운 여자가 설소리를 메기면 남도의 유연한 정서가 넘치는 구성진 후렴의 합창이 들녁을 메아리친다. 노동의 고달픔과 생활의 어려움을 노래로 달래가며 장구한 촌락공동체의 일체감을 유지해온 협동과 상조의 원천이었다는 점에서 노동요는 높이 평가되고 있다. 사라져 가는 전승문화에 대한 막연한 향수에서보다는 유흥적 이기적인 저속한 도시문화를 추방하고 생산적 협동적인 본연의 농촌 문화를 확립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현지 부녀자 40여명의 실연으로 재현된 우수영부녀농요는 작업단계별로 『길노래』 『들노래』 『돌개노래』 『방아타령』 『둥덩애타령』의 다섯가지 노래로 묶어진다.
길노래 들에 작업을 나가고 들어올 때 또는 풍년 축하행사에서 불리우는 노래로서 그 여음이 매우 흥겹고 구성지다.
『가노라 간다네 내가 돌아 허허 간다. 정든님 따라서 얼사, 내가 허허 돌아간다. 아하하하 에헤헤야 에헤헤헤헤헤야 아아 허허 허허허어 얼사 지와자자 절사 좋다.』(길노래 중 일절)
들노래 수건을 쓴 부녀자들이 밭에 한 줄로 가즈런히 늘어앉아 김을 메며 들노래를 부르는 광경을 그대로 한 폭의 아름다운 전원풍경화이다. 노래의 사설은 일관된 주제가 없이 여음의 가락에 맞춰 토막사설을 이어가는 것이지만 이 고장 여성들의 공통된 생활감정이 잘 나타나 있다.
『재넘에는 재꽃피고 성넘에는 성꽃피고 우리동네 총각들은 장개곷이 만발했네』(들노래 중 일절)
돌개노래 넓은 마당에 보리단으로 펼쳐놓고 두 줄로 마주서서 구슬땀을 흘리며 내려치는 탈곡작업의 고됨을 리듬으로 슬슬 풀던 이 노래는 여음에 묘미가 있다.
『늘보리만 쳐 먹다가, 이 내청춘 다 늙었소 아하 후어라 후어 허리아요』(돌개노래 중 일절)
방아타령 방아타령은 전국 각지에 널리 분포된 노동요로서 사설과 가락에 지역 차가 심하다. 우수영방아타령은 특히 길고 구성진 여음이 특히 우수하다.
『노들강변에 비두리 한쌍이 물통한알 물어다 놓고 암놈 물어 쑥놈 주고 쑥놈 물어 암놈 주고 암놈 쑥놈 울음소리 청춘과부가 기둥을 잡고서 논다. 애양 애양 애양 어허 이것이 방아로고나 나지나 나나나나 나나나 노나리 방아로구나』(방아타령 중 일절)
둥덩애타령 전남의 남서해안 및 도서지대에서 널리 불리어지는 무용요, 노래와 함께 강강술래와 유사한 원무를 춘다. 정월보름, 백중, 한가위 등 밝은 달밤에 넓은 마당에서 활로 함박을 튕기는 반주 음악에 맞춰 『고사리꺾기』 『가마둥둥』 『덕석마리』 등의 대형을 엮으며 덩실덩실 춤을 춘다. 강강술래 보다 훨씬 무용화된 형태이다.
『꼬방꼬방 장꼬방에 지추 닷말 심었더니 요내 동생 연엽이가 서방선비 눈에 맞아 그 지추 닷말을 다 케어나 갔다네. 둥덩애더 둥덩애더 덩기둥덩애 둥덩애더』(둥덩애타령 중 일절) (제13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 국무총리상 수상)
9. 참고문헌: 해남군사(1995)
1. 분류: 무형문화재
2. 명칭(한글): 해남 진양주
3. 명칭(한문):
4. 소재지: 계곡면 덕정리 439
5. 지정년도: 1994. 1. 31
6. 지정번호 : 무형문화재 제25호
7. 제작시대:
8. 문화재 설명: 이 술은 이미 조사자가 도문화재위원의 자격으로 90년중에 해남군의 지정요청을 받고 현지조사 후 지정을 유보하자고 제안했던 술이다. 그 전통성에서는 트집잡을 것이 없었으나 많은 토속주가 있는데 특정지역 행정책임자가 열성을 보인다고 해서 다른 지역 토속주를 제쳐두고 지정신청주류만을 선별 심사한다는 것은 행정의 공평성에 어긋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당시 기능보유자의 남편 임종모(56)씨는 이 술의 비법이 영암 덕진에 살고 있는 광산김씨 집안에 시집온 최궁인이 궁중에서 익힌 양조법이라는 주장에 의문을 가졌으나 이번 조사에서 그 가계를 확인한 결과 가계상으로는 가능성이 있음을 확인했다.
영암 덕진의 광산김씨 족보를 보면 이조좌랑과 사간(司諫)벼슬을 살다가 낙향한 김권(1549~1622)의 정부인은 천안 전씨였으나 구전처럼 최궁인을 후실로 거느렸다면 해남의 계곡 임씨들에게 그 기능이 전수될 가능성이 있다. 계곡 임씨인 임재중(1848~1891)에게 시집온 덕진광산김씨(1856~1906)는 바로 김권사간의 양손자인 김재희의 누이이기 때문이다. 기능보유신청을 한 최옥림(53)여인의 남편 임종모씨는 바로 덕진 광산 김씨가 증조모가 된다. 해남 진양주 조사내용은 다음과 같다.
성 명 : 최옥림(기능보유지정 신청자)
생년월일 : 1940년 6월 4일생
주 소 : 해남군 계곡면 덕정리
조사 개요
① 기능보유조사신청자 최옥림 여인은 영암군 군내면 동구림리 390번지에서 해주 최씨 관섭과 황구예 사이에서 태어났음.
② 1963년 3월 30일 해남군 계곡면 덕정리 임종모(52)와 결혼, 2남 2녀를 두고 있음.
③ 부군 임종모는 임돌덕(1900~1987)과 윤양임(1902~1969, 해남출신)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3남중 3남으로 현재 계곡중학교 서무과에 근무중임.
④ 최씨는 양조비법을 시어머니 윤양임씨로부터 전수했다는 것으로 윤씨는 다시 그이 시어머니에게서 전수 받았다 함.
⑤ 최씨의 남편 임종모씨는 이 가양주 비법을 원래 영암군 덕진면 강정리에 살고 있는 광산 김씨에 전해오던 것을 그의 증조인 임재중(1848~1891)의 처인 덕진 광산 김씨 할머니(1856~1906)가 친정에서 배운 것을 시집 덕정리에 와서 가르쳐준 것이라고 구술함.
⑥ 임재중→ 임석현(1876~1948)→ 임돌덕(1900~1987)→ 임종모(최씨의 남편)로 이어지는 가계임.
⑦ 임씨는 광산 김씨 증조할머니가 이 마을에 전수한 진양주는 김씨의 선조인 김권(1549~1622, 사간)이 벼슬하다가 고향에 돌아올 때 궁중에서 음식을 만들던 궁녀 최씨를 데리고 와서 살게되어 최씨가 그 비법을 덕진의 광산 김씨에 전승시켰다고 했음. 사실유무는 확인하지 못했음.
⑧ 임씨는 진양주는 한문으로 진양주(眞釀酒)라 쓴다고 했음.
⑨ 진양주는 덕정리 임씨 집에서는 누구나 할 줄 알고 북창, 둔주포, 맹진 등에서도 주점들이 할 줄 알지만 덕정리 우물 물이라야 제맛을 낸다고 했음.
⑩ 체씨가 덕정장흥 임씨의 종가의 맥을 이었고, 장남인 임윤모(1928~1950)의 처나 차남인 윤준모(1929~현재)의 처 진필임(1937~1976)이 모두 현존하지 않기 때문이라 함.
양조법
① 날짜는 크게 가리지 않고 다만 더운인 여름은 피함.
② 찹쌀 1되에 물 5되를 부어 죽을 쑥 뒤 찬기운이 돌도록 식힌다.
③ 누룩 2되(원래 밀로 가정에서 만들지만 지금은 시장에서 개량누룩을 사다가 쓴다)를 방앗간에 가서 곱게 찧어 온 다음 죽에 섞어 항아리에 담아 부뚜막에 놓아둔다. 온도 20℃이상 유지.
④ 3~4일 지나 술이 익으면 다시 찹쌀 9되를 술밥으로 쪄 식힌 뒤 술과 섞어 항아리에 담아 다시 부뚜막에 놓아둔다. 온도는 20~25℃를 유지한다.
⑤ 7~8일이 지나 술이 익으면 다시 물 5되를 푹 끓여 식힌 뒤 그 물을 항아리에 붓는다.
⑥ 3~4일이 지난 뒤 용수를 박아 용수 안에 고이는 맑은 청주를 떠내 참채로 걸러 술병에 담아 먹는다.
⑦ 경주법주보다 강한 향기가 나며 알코올 농도는 15도 내외이다.
문헌고찰
① 국내에는 1078년(고려 문종 32년) 송나라에서 행인자법주(杏仁煮法酒)라는 청주류가 들어 온 기록이 있다.
② 1123년 고려에 왔던 송나라 서(徐)긍의 글에 왕실에서 이미 청법주를 만들어 마시고 있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③ 중국의 「제민요술(齊民要術)」이란 책에 법주양조법이 나오는데 물가 누룩, 쌀의 비율이 각각 같다. 날짜까지의 대응관계가 정한 규정대로 한다고 해서 법주라 했다.
④ 이 책에 「중양주(重釀酒)」가 있다. 이 술은 일차 숙성시킨 밑술(醅)을 물 대신 이용해 누룩과 원료미를 더해 발효시키면 알코올 농도가 높은 중양주가 된다고 설명하고 있어서 이미 AD 530년대에 중국 산동성에서 2차주(次酒)가 만들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차주는 탁주(막걸리)라 하여 알코올 농도가 낮기 때문에 변질될 걱정이 있으나 2차주는 알코올 도수가 높아 변질이 적고 약주라고도 불렀다. 변질을 막기 위해 끓인 뒤 냉각해 보관했던 경우도 있었다.
⑤ 「이조실록」 태종 5년(1405) 조에 ‘진약주(進藥酒)’라는 글귀가 있다. 왕께 드리는 약양주(藥釀酒)를 의미한다. 약주란 순곡주 청주를 의미하고 약양주는 물대신 약즙을 넣거나 쌀과 약재를 섞어 빚은 술이다.
⑥ 『산촌경제(山村經濟)』 『양주방(養酒方)』 『규합총서』 등에 많은 가양주 빚는 법이 나오지만 해남의 진양주란 이름은 없다.
⑦ 술을 빚는 여섯 가지 비방이 있다. 첫째 좋은 쌀, 둘째 좋은 물, 셋째 여름에 만든 누룩, 넷째 좋은 그릇, 다섯째 고른 온도, 여섯째 청결 이다.
이 술은 해남군이 90년중에 순천대학 식품공학과 김용두교수에게 「진양주 개성에 관한 연구용역」을 주어 보고서를 받은바 있고, 92년 전남 농대팀도 현지조사를 통해 기능보유자의 보호육성 및 온도억제방법이 없어 초산유입성장의 위험이 크고 누룩냄새가 나는 결정이 있으므로 이를 개선해야 한다고 그 방법론을 제시하고 있다.
본인을 이 술을 가져와 전남도보건환경연구원에 시험 의뢰한 결과 에탄올 주정도는 11.4% 였으며, 총산은 1.39% 였다. 같은 시기에 낙안 사삼주도 시험의뢰 했는데 에탄올은 12.2% 였으며 총산은 0.46% 였다. 물론 두 술에서 메탄올은 검출되지 않았다.
전남농대팀의 시험결과는 다음과 같다.
진양주의 일반성분(%)
진양주의 무기성분 및 비타민 함량(mg%)
진양주의 향기성분 함량(ppm)
9. 참고문헌: 해남군사(1995)
1. 분류: 무형문화재
2. 명칭(한글): 해남 탱화장
3. 명칭(한문):
4. 소재지: 삼산면 구림리 799
5. 지정년도: 1996. 10. 4
6. 지정번호 : 무형문화재 제31호
7. 제작시대:
8. 문화재 설명: 탱화장 계보 고재석은 1924년 해남에서 태어나 대둔사(대흥사)를 중심으로 활동해온 화승(畵僧)이다. 고재섭으로 불리기도 하고 법호(法號) 겸 화호(畵號)는 랑월(浪月)이다.
만 12살 때인 1936년 출가하여 대흥사에서 사미승 생활을 하였고, 그때 고재석은 대흥사 불사를 하러온 화승 김일섭의 눈에 띄어 발탁되었다. 15살때인 1939년 대흥사 불교전문강원을 수료한 뒤, 김일섭의 門下生으로 들어가 10년간 본격적으로 화승의 기초를 닦으면서, 불화가(佛畫家)인 금어(金魚)의 전통을 계승하였다.
김일섭(1900~1975)은 송광사를 중심으로 활동한 화승으로 순천 송광면 출신이다. 본명은 김갑병이고, 아호는 김용(金蓉)으로 1972년 중요무형문화재 제48호 단청장에 지정되었다. 김일섭은 계룡산 갑사를 중심으로 활동한 화승으로, 19세기말 공주 마곡사 출신의 금어인 금호 약효(若效)에게서 불화를 공부한 사람이다.
이 계보를 볼 때, 고재석은 19세기~20세기를 이어온 화승 금어의 전통을 옛 방식대로 계승하였다. 즉 조선 말기의 금어인 금호에서 보응(普應)을 거쳐 일섭(日燮)으로 승계된 불화의 맥락을 따른 고재석의 한국 근현대 불화에서 4대 금어가 되는 셈이다. 김일섭의 또 다른 제자로 고재석의 후배이고 부산에서 활동중인 해봉(海峯) 석정(石鼎, 1928년)은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 제48호 단청장으로 이미 지정을 받았다.
작품활동 고재석은 이미 12살 때 만난 김일섭으로 부터 좋은 화승이 될 것이라고 지목 받았고, 김일섭의 문하에 들어간 15세까지 스스로 기초를 닦기도 했다. 15세 때인 1939년 문하생으로 들어가 김일섭이 주도한 경기도 개성의 안화사(安和寺) 불사(佛事)부터 참여하였고, 제주도와 전남북 지역 사찰의 불사를 보좌하다가 1948년 송광사에 머물 때까지 10년 동안 고재석은 불화의 기초작업을 충실히 마치게 된다.
이때 스승인 김일섭과 그 스승인 김보응으로부터 초본을 전수받았고, 현재도 그것을 바탕으로 탱화를 제작해 오고 있다. 김일섭이 그려준 「十王圖」와 김보응이 「地藏圖」 초본을 비롯해서 고재석이 18세때 연습한 「神衆圖」초본 등 줄초본을 고스란히 소장해서 그 훈련과정과 옛 불화의 전통형식을 잘 보존해 온 편이다.
그 이후 고재석은 해남의 도장사(道藏寺) 산신탱과 지장탱(1949)을 비롯해서 광주․전남 지역은 물론 제주, 충남북, 경남 지역에 이르기까지 약 200여 점의 불화를 제작하였다. 화면구성, 도상배치, 선묘, 색채 등 모두 전통 불화형식을 충실히 따른 것들이다. 불사참여 외에도 1981년에는 대한 불교 조계종주최 제10회 불교미술전에 출품하여 입선한 적이 있고, 1982년에는 일본 대판(大阪)의 고려사(高麗寺) 범종불사 기금 마련을 위한 선서화(禪書畵) 개인전을 가지기도 했다.
고재석은 탱화뿐 만 아니라 단청 작업에도 참여해 왔고, 달마도 같은 선화, 인물 초상화, 추사체풍의 서예 등 다방면에 재능을 보유하고 있다.
지금까지 그려온 고재석의 불화는 조선말기 퇴화된 형식이 4대째 계승된 탓에 그 회화적 조형미는 떨어지는 편이다. 하지만 조선시대 불화의 전통형식을 착실히 수업하고 계승해 온 화승으로 옛 금어의 생활과 신앙 및 예술적 면모를 갖추고 있다. 더욱이 그의 스승 김일섭 아래서 배출된 동문으로 후배인 부산의 석정이 중요무형문화재 단청장으로 지정된 점으로 볼 때, 이 지역에서 활동하는 단 한 명의 화승인 고재석을 ‘전라남도 무형문화재 단청장’에 지정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9. 참고문헌: 해남군사(1995)
1. 분류: 기념물
2. 명칭(한글): 표충사
3. 명칭(한문):
4. 소재지: 삼산면 구림리 산 16
5. 지정년도: 1976. 9. 30
6. 지정번호 : 기념물 제19호
7. 제작시대: 정조13년(1789년)
8. 문화재 설명: 표충사는 임진왜란 때 승병을 중심으로 창의하여 왜적을 물리친 서산대사 휴정․사명당(泗溟堂) 유정․뇌묵당(雷黙堂) 처영 등 3대사의 충의를 추모하기 위하여 1789년(정조 13)에 건립한 사우로 동년에 사액(賜額)을 받았다.
한편 표충사는 1976년 9월 30일에 전라남도지정유물문화재 제19호로 지정되었으며, 정조대왕께서 하사한 유물이 서산대사유물관(1978년 건립)에 보존․전시되고 있다.
서산 휴정(1520~1604)은 완산인(完山人)으로 속성(俗姓)은 최씨이고 세창(世昌)의 子이다. 1549년(명종 4)에 승과에 급제하여 1589년(선조 22) 정여립(鄭汝立)의 역모사건에 연류 되어 하옥되었다가 임란시특명(壬亂時特命)으로 팔도십육종도총섭(八道十六宗都總攝)이 되었다. 또한 1593년(선조 16) 명군(明軍)과 함께 도성수복(都城收復)에 공을 세워 국일도대선교도총섭부종수교보제등계존자(國一都大禪敎都摁攝扶宗樹敎普濟登階尊者)가 되었다.
사명당 유정(1544~1610)은 풍천인(豊川人)으로 속성은 임씨이며 수성의 자이다. 1575년(선조 8)에 묘향산에서 서산대사의 법을 이어받고 임란에 승병을 모집하여 휴정의 막하에서 공을 세웠다. 또한 丁酉再亂때에는 명군과 함께 순천에서 공을 세워 1602년(선조 35) 동지중추부사(洞知中樞府事)가 되었다.
유물현황 사우 내에는 비각과 조사전이 있는데, 사우는 정․측면 각 3칸의 맞배지붕으로 내부에 편액 3개와 삼대사의 영정이 있다. 비각은 정․측면 2칸의 팔작 지붕으로 비각 안에는 〈건사사적비(建祠事蹟碑)〉와 〈서산대사표충사기적비(西山大師表忠祠紀蹟碑)〉가 있다. 기타 관련자료는 서산대사 유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관련자료
① 〈서산대사화상당명(西山大師畵像堂銘)〉(1794년 李書九書)
② 《대둔사지》 (4권 1책, 제3권에 표충사의 연혁이 기록되어 있다.)
③ 〈교지(敎旨)〉 (1602년, 1788년)
④ 〈서산대사표충사기적비〉 (1791년, 서유린찬(徐有隣撰), 정동준서(鄭東浚書), 심원지전(沈願之篆), 높이 251, 폭108, 두께 48, 67행 48자)
⑤ 〈건사사적비〉 (1792년, 연담찬(蓮潭撰), 응운서(應雲書), 높이 220, 폭 91, 두께 225, 33행 33자) 그 외 서산대사의 유품인 승군단표식물(僧軍團標識物) (9 種), 표충사보장록(表忠祠寶藏錄) (6폭 병풍), 해남표충사총섭사령패(海南表忠祠摠攝司令牌), 법라(法螺), 바릿대, 신발, 가사(袈裟) 등이 소장되어 있다.
⑥ 관리인 : 대흥사주지
9. 참고문헌: 해남군사(1995)
1. 분류: 기념물
2. 명칭(한글): 정운 충신각
3. 명칭(한문):
4. 소재지: 옥천면 대산리 산54
5. 지정년도: 1985. 2. 25
6. 지정번호 : 기념물 제76호
7. 제작시대: 1681년 건립
8. 문화재 설명: 본 충신각은 임진왜란시 이순신 장군의 휘하에서 많은 전공을 세우고 전사한 정운(鄭運 1543~1592)의 충열을 기리기 위해 1681년에 건립된 정각(旌閣)이다. 1956년에 크게 중수를 하였으며 현재 지방기념물 제76호로 지정되어 있다.
건물배치 및 구조형식 대산리마을 입구의 우측 길옆에 건립된 충신각은 정․측면 각 1間의 팔작집으로 경좌갑향(庚坐甲向)으로 자리하고 있으며 그 주위는 정방향으로 막돌담장이 둘러져 있고 출입문인 일각대문(一角大門)이 담장 앞면 중앙에 세워져 있다. 건축 구조로는 기단 형성 없이 다듬은 원형초석위에 원통형의 원주를 세웠으며 기둥머리는 창방으로 결구시켰고 주두(柱頭)가 얹혔다. 창방은 뺄목으로 기둥머리에서 십자로 교차시켰으며 창방과 주심도리(柱心道里)의 장설(長舌)사이에는 소루(小累)가 3개씩 놓여져 있다. 건물 정면은 15개의 홍살만을 꽂았으며 양 측면과 후면은 회로 마감한 벽체로 되어 있다. 내부바닥은 자갈을 깔았으며 천장은 연둥천장이고 처마는 홑처마로 되어 있다.
9. 참고문헌: 해남군사(1995)
1. 분류: 기념물
2. 명칭(한글): 방산리 장고봉 고분
3. 명칭(한문):
4. 소재지: 북일면 방산리 산1008-1
5. 지정년도: 1986. 2. 7
6. 지정번호 : 기념물 제85호
7. 제작시대: 삼국시대
8. 문화재 설명: 신방부락으로 내려가는 고개 길 즉 북동-남서로 뻗는 성마산의 동사면에 전방후원분으로 보이는 유적이 있다. 이곳 주민들은 이곳을 일명 “장고산”이라 부른다. 성마산의 낮은 구릉을 이용하여 이 고분을 조영(造營)한 것 같다.
전방부는 성마산의 능선방향에 부합하게 되어 있으며 후원부는 전방부 보다 1m정도 높게 조영되어 신방부락을 조망(眺望)하게 되어 있고 바다가 보일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이 유적의 크기를 보면 전방분이 길이 38m, 폭 22m, 높이 8m이며, 후원분은 길이 44m, 높이 9m로 전방분보다 약 1m 정도 높게 축조되었다. 전방분은 북쪽 후원분의 정상부에는 민묘가 있다. 전방후원분 줄 위로 소나무들이 자라고 있다.
성마산토성(城馬山土城)의 경우 토성과 토성주변의 패총, 석실분(石室墳)의 축조,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의 축조 등에 대한 상호연관 관계는 북일면 고분군의 성격을 파악하는 열쇠가 될 것으로 보인다.
또한 좁은 지역에 토성이 축조되어야 했던 제요소(諸要素)들은 무엇인가에 대해서도 연구해야 될 과제인 것 같다.
방산리로 가는 도로를 확장하던 중 발견된 할석조석곽분(割石造石槨墳)은 이 지역에서는 처음 보이는 것으로 이곳에서 단경호(短頸壺) 및 철촉(鐵鏃)등이 출토된 점은 중요한 百濟系의 일반적인 묘제(墓制)가 유입되었음을 말한다.
또한 북일면에서 가장 남단지역인 내동리 외도(밭섬)에서는 2基의 석관묘가 파괴, 노출되었다. 전언에 의하면 이곳에서는 세문경, 철제품들이 출토되었다고 하는데 만일 확실한 유물의 출토가 밝혀진다면 고분의 시대적 흐름을 확실히 연결시킬 수 있을 것으로 본다.
북일면 일대에 나타나는 묘제에는 석관묘, 옹관묘, 석실분과 그 형태로는 원형분(圓形墳), 방태분(方台墳) 전방후원분이 있는데 축조세력과 피장자(被葬者) 집단과의 관계 등은 마한제소국중(馬韓諸小國中) 어느 일국이 여기에 존재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을 것 같다.
북일면 고분군은 나주 반남면 일대, 영암 시종면 일대에 이어 전남지방에서는 3번째로 확인된 고분군 지역으로 앞으로 정밀조사나 발굴조사가 이루어진다면 전남지방의 고분문화는 물론이고 우리 나라의 고분문화의 연구에도 크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성과가 얻어질 것으로 기대한다.
9. 참고문헌: 해남군사(1995)
1. 분류: 기념물
2. 명칭(한글): 월송리 조산고분
3. 명칭(한문):
4. 소재지: 현산면 월송리 378-1
5. 지정년도: 1986. 2. 7
6. 지정번호 : 기념물 제86호
7. 제작시대: 삼국시대
8. 문화재 설명: 월송리 증산부락 주민들이 1973년 방송용 스피커를 설치하다가 백제석실분 1기를 발견하였다.
「외소리 동산」 또는 「조산」등이라고 칭하는 이곳은 평지에 반구형(半球形)으로 불거진 구릉형태(丘陵形熊)인데 석실내의 유물이 신고되어 광주박물관에 보관되었는데 1982년 6월 광주박물관 팀에 의하여 유구를 실측함으로써 보고되었다.
분구형으로 남아있는 밑변의 직경이 약 17m이고 높이는 약 4.5m인데 석비가 지표하 약 70㎝지점에서 드러났다. 조산은 판축기법에 의해 인공적으로 토축한 분구로서 지상에 석실이 구축되어 있는데 분구내의 거의 중앙에 위치한다.
현실(玄室)은 바닥을 중심으로 길이 363㎝, 폭 204㎝, 높이 185~196㎝에 이르며 현실의 바닥은 1매의 판석(板石)으로 설치하고 빈틈은 조그마한 할석(割石)으로 보충하였다. 바닥에 깔린 판석은 사벽하(四壁下)에 비해 높아 배수관계도 고려된 듯하다.
동벽인 오벽(奧壁)은 바닥면의 폭이 217㎝ 천장 162㎝, 높이 195㎝에 이르는 사다리꼴로 축조되었다. 벽면하단은 장대판석 1매와 짧은 판석 1매로 결정하고 그 위에 판석을 진흙과 섞어 축조하였다. 북벽과 남벽도 같은 수법으로 축조되었다. 천장은 3매의 판석이 서벽의 축석을 누르고 있다.
이도시설(羡道施設)은 완전히 갖추지 않았으나 서벽의 중심에서 남으로 치우쳐 문비를 갖추고 1매의 판석으로 현실을 폐쇄한 구용식(構宂式) 석실분이다. 문비는 남벽 끝에 이어져 서벽을 구축한 그 하단에 마련하고 있는데 남쪽은 폭 65㎝, 두께 22㎝, 높이 113㎝의 판석으로 폐쇄하고 있다. 입구 바닥에는 폭 30㎝, 길이 60㎝, 높이 10㎝의 문지방들을 문주 폭의 절반에 이르도록 면을 맞춘 다음 현실 내로 들여놓았다.
출토유물 토기류에 구형호(球形壺), 원저(圓底) 6点, 평저(平底) 2点), 장경호(長徑壺) 1点, 대부호(臺付壺) 1点, 광구소호(廣口小壺) 1点, 유공광구소호(有孔廣口小壺) 2点, 고배(高杯) 3点, 개배(蓋杯) 10点이다. 마구류(馬具類)에는 철지금동장행엽(鐵地金銅張杏葉) 3点, 금동제말재갈 1점, 금제등자(金製登子) 1쌍이다. 이기류(利器類)에는 환두대도(鐶頭大刀), 철모(鐵鉾) 4점, 철촉(鐵鏃) 100여점, 철부(鐵斧) 4点이다. 장신구(裝身具)에는 관옥(管玉) 11点 소옥(小玉) 17点, 다면옥(多面玉) 4点, 곡옥(曲玉) 1점, 동경(銅鏡) 1点이며 기타 철제가래, 꺾쇠 패각편(貝殼片) 등등 다수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유물성격 조산고분은 늦어도 6세기초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또 출토유물 성격에서 파악되듯이 기마(騎馬)와 관계한 석실분의 등장을 지적할 수 있다.
부장품에 있어서도 백제 특유의 토기를 비롯하여 마패류, 무기류, 장신구 등 196점에 이르는 방대한 양이 수습됨으로서 이 유물을 통한 편년시도가 가능하리라 생각된다. 특히 부장품 가운데 성격이 두드러진 백제사기들은 조산고분의 설정이나 그 성격을 판명하고 나아가 자료의 부족으로 빈곤을 면치 못 했던 이 지역 백제 문화 연구가 이 자료를 근간으로 부각되는 계기를 맞게되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9. 참고문헌: 「해남 월송리 조산고분」 광주유물관학술총서 4冊 1985
10. 자료제공: 해남문화원
1. 분류: 기념물
2. 명칭(한글): 수성송
3. 명칭(한문):
4. 소재지: 해남읍 성내리 4
5. 지정년도: 1986. 9. 29
6. 지정번호 : 기념물 제94호
7. 제작시대:
8. 문화재 설명: 해남군의 중심인 군청서(郡廳舍) 입구에 자리하고 있는 수성송(守城松)은 외지인들에게 해남을 소개할 때마다 잊지 않을 만큼 군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수령 500년의 노송이다.
이 노송에 붙여진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오랫동안 해남 역사와 함께 해왔기 때문에 ‘해남인의 애국적인 의지와 충절의 상징과 기상’ 등 여러 수식어가 붙여지기도 한다.
수성송의 유래를 보면 임진왜란이 있기 37년 전인 1555년 일본 대마도 해적들이 병선 60여 척을 이끌고 지금이 해남군 북평면 남창리인 달량진과 완도군의 달도에 침입한 후 해남성 주위의 거의 모든 성을 점령하고 약탈과 살인을 일삼았다. 이 사변을 수습하기 위해 왔던 병마절도사 원적과 장병들이 참상당하여 항복했고 나중에 온 전라감사, 전주부윤(全州府尹), 남원판관(南原判官)과 조정(朝廷)에서 급파된 호조판서(戶曹判書), 이조좌랑(吏曹佐郞) 등이 힘겹게 버티고 있는 전주부윤 이윤경(李潤慶)과 합세하여서야 물리칠 수 있었다. 이때 오직 해남현감 변협(邊協)만이 성을 사수했다는 공으로 그를 장흥부사로 승진시켰으며 수성의 기쁨과 영예를 기념하기 위해 동헌(東軒) 뜰에 소나무 한 그루를 심었다. 이것이 바로 지금의 수성송이다.
9. 참고문헌: 해남군사(1995)
1. 분류: 기념물
2. 명칭(한글): 신월리 방대형고분
3. 명칭(한문):
4. 소재지: 북일면 신월리 295-1
5. 지정년도: 1987. 1. 15
6. 지정번호 : 기념물 제102호
7. 제작시대: 삼국시대
8. 문화재 설명: 성마산 북서쪽의 낮은 구릉에 위치하며 길이는 장축 16.5m, 단축 13.30m, 높이 2~3.3m 정도이다. 봉분은 북동-남서 방향으로 조영되어 있으며 봉분의 둘레에는 잔돌들을 쌓아 봉분이 허물어지는 것을 보강하고 있는 듯 하다. 봉분 위에는 10년생 이상된 소나무들이 자라고 있다. 또한 주변 밭에서 파상문, 격자문 흑색 경질토기편들이 수습되었으며 주변에 있는 과수원을 만들면서 파괴되었다고 하는 고분에서는 금붙이가 나왔다는 걸로 보아 이 부근이 고분군이었던 곳으로 보이며, 현재는 거의 개간으로 인해 파괴된 듯 하다.
9. 참고문헌: 해남군사(1995)
1. 분류: 기념물
2. 명칭(한글): 방축리 지석묘군
3. 명칭(한문):
4. 소재지: 화산면 방축리 702
5. 지정년도: 1987. 1. 15
6. 지정번호 : 기념물 제115호
7. 제작시대: 청동기시대
8. 문화재 설명: 석전 부락에서 갑길 부락으로 가는 고갯길을 지나 은산 부락 못 미쳐 좌측 밭에 위치한다. 선은산의 서쪽 지류 끝 부분에 53기의 지석묘가 북동-남서 방향으로 놓여 있다. 대부분 거대한 지석묘 주위에 작은 지석묘들이 호위하는 형태로 놓여 있다. 큰 지석묘들은 대부분 지석들이 받혀져 있으며 약 80m거리에 걸쳐 산재해 있다. 상석의 형태는 둥글고 넓직한 타원형이 대부분이다. 해남군내에서는 가장 규모가 큰 대표적인 지석묘군이다.
9. 참고문헌: 해남군사(1995)
1. 분류: 기념물
2. 명칭(한글): 이진진 성지
3. 명칭(한문):
4. 소재지: 북평면 이진리 1227외
5. 지정년도: 1988. 12. 21
6. 지정번호 : 기념물 제120호
7. 제작시대: 선조 21년(1508)
8. 문화재 설명: 이진부락은 해안에 위치한 석축성이다. 이진진은 정유재란 후인 1598년(선조 21)에 설진(設鎭)하여 1627년(인조 5)에 만호진(萬戶鎭)으로 승격하였다. 성은 이 때 쌓은 것으로 보여지는데 《여지도서(輿地圖書)》에는 “재군남일백이십리 성석축 주위일천사백칠십척 고팔척치첩삼백삼십사 내유이천(在郡南一百二十里 城石築 周圍一千四百七十尺 高八尺雉堞三百三十四 內有二泉)”이라 기사하고 종4품의 수군만호(水軍萬戶) 밑에 군관 18명, 이(吏) 18명, 지인(知印) 5명, 사명(使命) 37명이 배치되어 있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한편 《해남읍지》에 의하면 전배(戰船) 1隻, 병선(兵船) 1隻, 하후선(何候船) 2隻과 대변군관(待變軍官) 12명, 진이(鎭吏) 18명, 사명 6명, 군내(軍牢) 2명, 방군(防軍) 271명이 배치되어 있었다. 《文化遺蹟總覽》에는 “둘레 2.5㎞의 성지로 조선 인조 26년(1648)에 이진수군만호를 두어 성을 축조하였고 성주위로 바다 호수를 만들어 왜군이 침노하지 못하게 하였다 한다. 또 이진은 제주도 출입통제소였으며 제주도 군마(軍馬) 및 사마(私馬)를 수송하는 곳이기도 하였다하며, 마을 안에 수군만호비(水軍萬戶碑) 4基가 있다.”고 등재하고 있다. 이진성은 영암군에 속한 진성으로 1895년 폐진 되었다.
이진진성은 남․북의 구릉지를 이용 축성한 남북장축의 타원형의 진성이다. 이진리 도로개설 작업시 성축의 일부가 이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성벽은 내탁법(內托法)에 의해 쌓았다. 성내에는 이진부락이 소재 하는데 마을의 통로로 이용되고 있는 부분이 동문과 서문지(西門址)다. 폭 3m의 서문지에는 둘레 34m, 높이 5m, 폭 220㎝의 옹성(甕城)이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주민들의 증언에 의하면 이 서문지 앞에는 목책이 설치되어 있었다 한다. 그 외에도 지금은 파괴되었으나 남문지(南門址)에는 이진리 김호준씨 댁 대문 앞에 口徑 10㎝, 장재윤씨 댁에 보관중인 口徑 18㎝의 홈이 패인 초석이 남아있다. 현재 남아있는 성벽은 총 연장 940m이다. 동벽의 길이는 350m, 하폭 390m, 상폭 200㎝, 높이 5m이며, 남벽은 길이 116m, 하폭 6m, 상폭 4m, 높이 430㎝로 거의 도괴 되어 있다. 성벽주위에서는 백자편 및 각종 잡발 등이 수습된다. 원래 농협창고 옆에 있었다는 비석 4基가 현재는 이진국민학교 입구로 옮겨져 있는데 비석내용은 아래와 같다.
1) 만호박공경환영세불망비(도광이팔(1848년) 무갑)
萬戶朴公慶煥永世不忘碑(道光二八(1848년) 戊甲)
2) 만호최공상규영세불망비(함풍원년(1851년) 신해 칠월)
萬戶崔公祥奎永世不忘碑(咸豊元年(1851년) 辛亥 七月)
3) 행만호김공관길영세불망비(신유(1861?) 칠월 일입)
行萬戶金公寬吉永世不忘碑(辛酉(1861?) 七月 日立)
4) 행만호김공관길영세불망비(함풍십일년(1861년) 신유 칠월 일)
行萬戶金公寬吉永世不忘碑(咸豊十一年(1861년) 辛酉 七月 日)
이 이진진성은 현재도 거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어 특별한 보호대책이 강구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9. 참고문헌: 해남군사(1995)
1. 분류: 기념물
2. 명칭(한글): 용두리 고분
3. 명칭(한문):
4. 소재지: 삼산면 창리 578
5. 지정년도: 1988. 12. 21
6. 지정번호 : 기념물 제212호
7. 제작시대: 삼국시대
8. 문화재 설명: 삼산면 용두리 용두부락에 위치한다. 현지를 답사해 본 결과 총 길이 38m이며 장축이 북동-남서 방향이고 전방부는 남서쪽에 위치한다. 전방부의 길이와 폭이 각 17m이고 높이는 4m이며, 후원부의 직경은 21m, 높이 6m이다. 이와 같은 형태의 고분은 북일면 방산리에 이어 두 번째로 확인된 것이다.
9. 참고문헌: 해남군사(1995)
1. 분류: 기념물
2. 명칭(한글): 군곡리 패총
3. 명칭(한문):
4. 소재지: 송지면 군곡리 940외
5. 지정년도: 1990. 2. 24
6. 지정번호 : 기념물 제129호
7. 제작시대: 철기시대
8. 문화재 설명: 이 유적은 가공산 동편의 작은 구릉에 위치하고 있는데, 군곡국민학교에서 남으로 약 400m 떨어진 속칭 「말매등」이라는 곳이다. 해발 20m 구릉 전체가 패각층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현재 주민들이 계단식 밭으로 개간하고 있다. 노출된 단일 패각층의 높이가 180㎝에 이르고 있어 그 두께는 더 큰 것으로 보여진다.
출토유물 경질무문토기(硬質無文土器), 우각형파수(牛角形把手), 이중구록토기(二重口錄土器), 시루저부(底部), 적갈색연질토기(赤褐色軟質土器), 회청색경질토기(灰靑色硬質土器) 등이 있다.
유적성격 이곳 패총은 출토된 유물로 보아 철기시대의 유적으로 보여지는데 경질무문토기의 존재로 보아 청동기시대의 무문토기의 계통이 계속 남아 있음을 보여준다. 이 유적의 중요성은 그간 전남지방에서 청동기시대 이후 대형 옹관묘로 대표되는 고분시대에 이르는 그 중간 위치의 유적이 광산 신청리옹관묘 밖에 없었던 것인데 이 패총이 확인됨으로써 그 시기를 이어 줄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 유적은 김해패총, 웅천패총, 삼천포 늑도유적과 관련시켜 볼 수 있어 남해안에서 발견되는 한 문화적 특징으로 보여진다.
9. 참고문헌: 해남군사(1995)
1. 분류: 기념물
2. 명칭(한글): 맹진리 암각매향비
3. 명칭(한문):
4. 소재지: 마산면 맹진리 산 96
5. 지정년도: 1990. 9. 5
6. 지정번호 : 기념물 제137호
7. 제작시대: 태종 6년(1406)
8. 문화재 설명: 마산면 맹진리의 문대산 북서쪽 능선에 있는 속칭 「장군바위」에 음각 되어 있다. 이 장군바위에는 예로부터 군량미 수천석에 해당하는 보물이 숨겨져 있다는 전설이 있었다. 이를 필자가 전해 듣고 현지답사 하여 매향비(埋香碑)임을 확인케 되었다. 그런데 이 장군 바위는 마산성진간 도로에서 올려다보면 때로는 석불입상(石佛立像)으로, 때로는 석실안에 있는 좌불상(坐佛像)과 흡사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기형의 자연석이었다.
매향비란 매향(埋香)을 하면서 그 연유와 시기, 장소, 관련된 사람(집단)을 기록하는 비문을 말한다. 매향은 향(香)을 묻는 민간구복적(民間求福的)인 성격이 강한 미륵신앙의 한 형태로 파악되어 지고 있다. 특히 미륵하생(下生) 신앙과 연결되며 매침(埋沈)한 향(香)을 매개로 하여 발원자와 하생한 미륵이 연결되기를 기원하고 있는 것이다.
매향비문은 장군바위 뒷편 작은 틈사이(상단폭 50-60㎝, 하단폭 1.3m정도)의 약간 내경화(內傾化)된 자연암벽에 10행 59자가 음각 되어 있다. 글씨는 마멸되지 않아 매우 양호한 편이며 자경(字經)은 4~6㎝이다. 원문은 다음과 같다. 내용은 “죽산현(竹山縣 해남 古稱)의 동쪽 구포(具浦 ?)에 미타향도(彌陀香徒) 58명과 상당 주민들이 함께 모여 매향을 행하고 영락사년(永樂四年 1406년 태종 6)에 비를 세웠으며, 매향의식(埋香儀式)은 법각(法覺)의 주관 하에 혜관(惠觀) 등이 참여하였다.(맨 끝의 五百步는 비로부터 거리인 듯 함)”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비에서 주목되는 것은 향도의 숫자(조직의 규모)와 향도와 상당민(上堂民) 一百人과의 관계이다. 고려조의 향도조직은 천여명을 넘는 거군적(擧郡的)이면서 행정조직․승려와 밀착된 것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조직의 규모는 여말선초(麗末鮮初)에 이르면서 점차 분화 축소되어 자연촌을 중심으로 소규모 촌락 공동체적 성격을 갖게된다. 아울러 불교의 기능은 쇠퇴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여말 선초의 향도 집단에 대한 정확한 성격이나 규모 등이 아직 밝혀지고 있지 않은 시점에서 미타향도58인이라는 숫적 명시는 매우 귀중한 자료로 주목된다. 더욱이 매향을 향하는 과정에서 이같은 매도(埋徒)와 연결된 上堂一百人은 정치․사회적 성격을 드러내지 않는 일반민(지역민)이었고 그 범위도 결코 월경(越境)의 가능성이 없는 자연집단이었을 것으로 보아 차후 타지역의 사례와 비교 검토되어야 하겠다.
참고로 전남지방의 매향비 발견사례는 필자가 1982~5년 사이에 새롭게 확인한 ①영암군 서호면 암길리 매향비(1344년) ②영광군 법성리 입암면 매향비(1371년과 1410년의 매향 기록이 한 비의 양면에 있음) ③암태도 매향비(1405년) ④장흥매향비(1434년)등이 있고 차후 발견될 가능성은 많이 있다. 동학제현의 관심을 촉구한다.
9. 참고문헌: 해남군사(1995)
1. 분류: 기념물
2. 명칭(한글): 전라우수영 성지
3. 명칭(한문):
4. 소재지: 문내면 선두리 1661외
5. 지정년도: 1992. 3. 9
6. 지정번호 : 기념물 제139호
7. 제작시대:
8. 문화재 설명: 돈내래 해변이 석벽과 망해산의 사벽이 혼합된 성이다. 우수관은 선초무안 대굴포(현 함평군 학교면 학교리)의 수군처치사관(水軍處置使管)에 있다가 세종 二十二年(1440)에 해남 황원관으로 이설하였다. 그후 세조 十年(1464)에 절도사관(節度使管)으로 승격되었다. 성의 둘레는 2,484척, 옹성이 4개, 연못이 하나, 우물이 2개이며, 태평정이 있고, 동문 밖에는 충무공의 승첩비(勝捷碑)가 있다. 관원은 전라우도수군절도사와 중군(中軍 侯가 겸한다) 이 각 1명씩이며 나주․영암․진도․영광․해남․무안․함평 등을 소속으로 하고, 법성포․군산․고군산․위도․임치도․고금도․가리포․남도포․금갑도․어란포․이진․신지도․마도․목포․다경포․지도․임자도․검모포 등을 속진으로 하였다. 또한 본관 및 속읍진의 배 130척(진강(津舡)은 24척)을 관할 하였다. 복파관(伏波館)․망해루(望海樓) 등의 루정이 있었다.《문헌비고》
유물현황 右水館은 북고남저(北高南低)의 구릉지로 해안에 면한 남벽은 석벽성, 북벽은 토벽성이다. 또한 동벽과 서벽의 경우는 남벽에 연결된 부분은 석축, 북벽에 연결된 부분은 토축이다. 북벽으로 된 남벽은 서외리 문재훈씨댁에 잔존하는 길이 20m, 높이 1.5m와, 선두리 박무림씨 댁에 잔존하는 길이 20m, 높이 3m의 성축이 남아있다. 동벽과 서벽의 석축부분은 거의 도괴되어 흔적만 남아 있으며 그 외 서벽의 토축은 길이 50m, 하폭 5m와, 상폭 1m이다. 가장 양호하게 남아있는 북벽은 길이 400m로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데 현 외고 2.5m, 내고 3m, 하폭 5m, 상폭 1.5m이다. 《동국여지지》에 의하면 우수관성은 4문지로 기록되어 있으나 현재는 도로로 사용되고 있는 북벽의 중간부분에 북문지 만이 남아있다. 그 외 치첩(稚堞), 옹성등은 확인할 수 없다. 그러나 성내에는 「옹정(雍正)2년(1724)甲辰」, 「건륭(乾隆)17년(1752) 임신(壬申) 九月」 「가경(嘉慶) 9년(1804) 甲子」에 세운 우물 건립비 및 중수비등이 우물과 함께 현존한다. 또한 성벽의 주변에서는 백자편 등이 수습된다.
9. 참고문헌: 해남군사(1995)
1. 분류: 기념물
2. 명칭(한글): 송호리 해송림
3. 명칭(한문):
4. 소재지: 송지면 송호리 산9
5. 지정년도: 1992. 3. 9
6. 지정번호 : 기념물 제142호
7. 제작시대:
8. 문화재 설명: 해송은 바닷가를 따라서 자라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껍질의 색깔이 소나무보다 검다고 해서 흑송, 또는 잎이 육지 소나무보다 억세다고 해서 곰솔이라고도 한다. 소나무과에 속해 해안지방의 모래 성분이 많은 흙에 잘 자라며 전라도를 비롯한 우리나라 남반부의 해안에 널리 퍼져있다. 이 송호리 해송림은 바다바람을 막아주는 방풍림으로 송호리의 해안과 도로에 인접하여 길이 약 394m에 좁게는 7.5m에서 넓게는 38m의 너비로 16,474㎡(4,893평)의 면적에 640여 그루의 해송이 자생하고 있다. 약 200년생 가량의 오래된 나무를 비롯하여 나무의 나이가 다양하게 분포하고 있다. 이 해송림대는 해안방풍림의 기능적인 면에서나 교육적인 측면에서 중요하며 해안지방이 풍치를 유지하는데도 도움이 된다.
9. 참고문헌: 해남군사(1995)
1. 분류: 기념물
2. 명칭(한글): 연정리 지석묘군
3. 명칭(한문):
4. 소재지: 화산면 연정리 73-1
5. 지정년도: 1997. 5. 15
6. 지정번호 : 기념물 제165호
7. 제작시대:
8. 문화재 설명: 해남읍에서 완도로 가는 도로를 따라 12km쯤 가면 연정리 석정마을이 있는데, 그 마을에 위치한다. 도로에서 50m정도 떨어진 숲속으로 크고 작은 지석묘 48기가 남서-북동 방향으로 밀집해 있다. 동으로는 삼봉산(三峯山)이 위치하고, 남으로는 앞산이 있으며 서로 100m 지점에 저수지(연화제)가 위치한다.
9. 참고문헌: 해남군사(1995)
1. 분류: 민속자료
2. 명칭(한글): 정명식 가옥
3. 명칭(한문):
4. 소재지: 황산면 우항리 291
5. 지정년도: 1986. 2. 27
6. 지정번호 : 민속자료 제8호
7. 제작시대: 1871년으로 추정
8. 문화재 설명: 이참판댁으로 불려지는 이 가옥은 20여년 전에 정명식씨가 구입하여 현재 거처, 관리하고 있다. 현재 본 가옥에는 사랑채와 행랑채만이 남아 있으나 본래의 안채와 사당 등을 고루 갖춘 규모가 큰 훌륭한 반가였다고 한다.(11칸 규모의 안채는 약 20여년 전에 그리고 안채 뒤편에 있는 사당은 약 10여년 전에 각각 훼철 되었다고 한다)
건물의 배치는 가옥 맨 앞에 줄행랑채를 두고 이와 평행 되게 그 뒤편으로 사랑채를 축좌미향(丑坐未向)으로 앉혔다.
사랑채 이 사랑채는 상량문에 「崇禎紀元後 五回 甲辛末 三月初 七日 丁酉 巳時…」라는 기록으로 보아 1871년에 건립되어진 팔작지붕의 와가(瓦家)이다.
건축규모는 정면 7칸에 후면으로는 앞으로 퇴(退)를 둔 2칸 규모이며 평면구성은 좌측으로부터 부엌, 방, 대청, 방이 꾸며져 있고 맨 우측 1칸은 방으로 꾸미지 않고 안채로의 진입을 위한 중문간으로 계획하여 그 앞쪽에 2짝이 판장문을 달았다. 그리고 중앙의 정면 5칸에는 뒤쪽으로 반칸(3척폭)을 더 내어 내부공간을 넓게 활용하였다. 구조로는 약 2척 높이의 장대석 바른층 쌓기 기단 위에 막돌초석을 놓고 그위에 8촌각의 방주를 세웠으며, 기둥머리에는 주두가 얹히고 도리방향으로는 첨차를 내어 주심도리의 장활를 받게 하였다. 창호는 전면의 방 출입문에는 2짝의 아자(亞字)살 미닫이문을 달았으며 그 덧문으로는 쌍여닫이의 띠살문을 설치하였고 대청에는 4분합의 띠살문을 달아 들쇠에 메어 달게 하였다. 가구는 후방 평주와 전방 퇴주사이에 고주를 둘 세우고 대량은 평주와 후면 고주 사이에 걸린 보 중앙의 동자주 위까지 연결되어 있는 특이한 가구형태로 되어 있다.
행랑채 정면10칸, 후면 1칸의 본 건물은 우측으로부터 4번째 칸에 솟을대문간을 낸 맛배지붕의 줄행랑채이다.
평면구성은 솟을대문간 좌측으로는 행랑방과 외양간, 그리고 곡간을 배열하였으며 우측으로는 모두 광으로 꾸몄다. 구조는 막돌 초석 위에 방주를 세운 3량 구조의 민도리 집이나 솟을대문간에만은 기둥머리에 창방이 보내지고 주두가 얹혔으며 창방 밑의 안방 사이에는 소로를 일정간격으로 배치하였다. 또한 창방과 주심도리사이에는 조각된 국화무늬가 박혀있고 각종 문양이 장식으로 뚫려져 있는 등 전체적으로 장식화 한 느낌을 주며 처마도 겹처마로 꾸몄고 막새기와도 사용하였다.
9. 참고문헌: 해남군사(1995)
1. 분류: 문화재 자료
2. 명칭(한글): 향교 대성전
3. 명칭(한문):
4. 소재지: 해남읍 수성리 105
5. 지정년도: 1984. 2. 29
6. 지정번호 : 문화재 자료 제77호
7. 제작시대:
8. 문화재 설명: 해남향교의 창건은 려조(麗朝)에 시원이 있었을 것이고 해남현(海南縣)이 해진군(海珍郡)에서 분리되는 시기에 새롭게 설비되었을 것이나, 그 상세한 연혁은 상고할 수가 없다. 현존하는 자료로서 (해남향교창수전래기․海南鄕校創修傳來記) 1책(해남읍 백야리 민정기 소장)은 2차 자료이기는 하나 조선시대 해남향교의 이수․추진 내용을 비교적 소상히 적고 있다. 이 자료에 의하면 고(古)해남(지금의 현산면)에서 처음 이건할 때의 향교수기는 고도리 향교터에 있었던 것으로 고노(古老)들이 이야기하고 있으며, 1482년(성종13)에 이설․이수하였던 사실을 초창의 연대로 잡고 있다.
이후 해남향교는 1549년(명종4), 1611년(광해군 3), 1673년(현종 14), 1739년(영조15), 1816년(순조16), 1844년(헌종10) 등에 부분적인 개보수가 있었다. 한편 현재 위치로의 완전한 추진연대는 1739년으로 이때 현감은 이주진이었고 1844년 중수시에 전체적인 개수와 고사의 신축이 있었다.
현재의 향교건물배치는 삼문과 담장으로 둘러진 대성전을 중심으로 동․서제가 있으며 정면에 누각형의 명륜당이 있고 고직사(庫直舍 - 管理舍) 1동이 우측에 있다.
9. 참고문헌: 해남군사(1995)
1. 분류: 문화재 자료
2. 명칭(한글): 대흥사 일원
3. 명칭(한문):
4. 소재지: 삼산면 구림리 799
5. 지정년도: 1984. 2. 29
6. 지정번호 : 문화재 자료 제78호
7. 제작시대:
8. 문화재 설명: 도지정문화재 78호 대둔산 일원은 경관이 뛰어나고 왕벚나무 자생지 등 식생이 잘 보존되어 있어 1975년 9월 2일 이래 명승 제4호 “해남 대둔사 일원”으로 지정 보존되어 왔다. 대둔산 기슭에 위치한 대흥사는 백제시대에 창건된 것으로 전하는 고찰인데 조선시대에 서산대사의 의발을 봉안하면서 수많은 고승 대덕을 배출하였다. 경내에는 보물4점(제48호 대흥사 북미륵암 마애여래좌상 등)과 천연 기념물 1점(제173호, 대둔사 왕벚나무 자생지), 도유형문화재 8점(재57호 서산대사 부도 등)이 있다. “대둔사 일원”을 도문화재 자료 제78호로 지정하게 됨으로써 이상의 문화유산과 자연유산을 복합유적으로 보존 관리하게 되었다.
9. 참고문헌: 해남군사(1995)
1. 분류: 문화재 자료
2. 명칭(한글): 영산사 소장문서 일괄
3. 명칭(한문):
4. 소재지: 마산면 화내리 산81
5. 지정년도: 1988. 3. 16
6. 지정번호 : 문화재 자료 제159호
7. 제작시대:
8. 문화재 설명: 영산사는 1732년(영조 8)에 설립된 사우로 임란공신 이계정(1542~1596)을 위시한 이숙형(1563~1595), 이황(1553~?), 이대행(1554~1593), 이호(1555~?), 이순(1557~?), 이원해(1559~?), 이후(1579~1645), 이성춘(1577~?) 등 원주이씨 문중의 구충을 배향하고 있는 사우이다.
1868년 훼철됐다가 1901년 복설 된 뒤 1974년 사우를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현 사우는 정면 3칸, 측면 1간의 맞배 지붕이며 삼문과 담장으로 둘러져 있다.
지정된 문서목록은 ①선조밀부유지(宣祖密符論旨)는 이계정이 충청수사로 임명된 후 선조가 내린 밀부와 밀지이다. 이 유지는 가로 78cm, 세로 51cm의 크기로 위급상황이 생길 경우 밀명이 내리면 하사(下賜)를 符(대나무)와 대조하여 시행할 것을 적은 것이다. 전란중인 상황에서 군사권을 쥔 장군(水使)에게 왕이 명령과 작전을 하달하는 제도의 일면을 고증할만한 자료이다. ②왜란 중 군사관련유지는 가로 112cm, 세로 44cm 크기로 이계정이 1595년 충청수사로서 군비, 군양, 군병 등의 운영에 관해 선조로부터 지시 받은 내용이다. 당시의 군비와 운영상태를 고증할 1차 자료로써, 군양의 각도(各道) 분당(分當)(전라도 1만석, 충청도 1천석)과 부족한 수군의 보충 등에 관하여 기록하고 있다.
선무원종공신녹권은 1605년 이순에게 내려진 것으로 22.5cm, 세로 35.4cm의 크기이며 임진왜란 공신 9,000여명이 등재되어 있다. 진무원종공신녹권은 1625년 이광립에게 내려진 것으로 이괄의 <난> 평정에 공을 세운 인물에 대한 포상록이다. 관안(官案)은 춘추관(春秋館) 기사관(記事官)을 지냈던 이류(李劉 1662~1716)와 관련된 문서로 조선 숙종대의 내외직관원명녹(內外職官員名錄)이다.
영산원적(英山院籍)은 영산사와 직접 관련된 유일한 문서로 창설 당시 초대원장 홍만조(洪萬朝), 권중경(權重經) 이하 경향(京鄕) 유림 명단이다. 가로 29.5cm, 세로 39.5cm의 크기이다. 산막리 동계문서는 1645년(인조 23)에 창설된 산막리동계에 관련된 문서로 계안(契案), 동상례문서(東床禮文書), 서계문서(書契文書) 등 1720~1915년 사이의 12책이다.
9. 참고문헌: 해남군사(1995)
1. 분류: 문화재 자료
2. 명칭(한글): 서동사 대웅전
3. 명칭(한문):
4. 소재지: 화원면 금평리 571
5. 지정년도: 1990. 2. 24
6. 지정번호 : 문화재 자료 제174호
7. 제작시대:
8. 문화재 설명: 해남군 화원면 금평리에 위치한 서동사는 절골마을에서 1㎞ 가량 떨어진 곳으로 운거산 중턱에 위치해 있다. 사찰의 배치는 동서로 긴 방향의 대지 위에 정남향의 대웅전을 배치하고 그 우측에 요사를 배치하였는데 대웅전과 요사 뒤쪽에는 축대를 쌓았다. 전체배치 모습은 약간 경사진 지형을 삼단으로 정지하여 두 번째 단에 대웅전과 요사를 배치하고 그 아랫단에는 옛 사찰의 건물지로 보이는 넓은 밭이 있는데 이곳에는 초석이나 와당 등의 유물이 많다.
대웅전 정면 3간, 측면 2간의 단층(單層) 전각(殿閣)이다. 지붕은 맞배지붕으로 한와(韓瓦)를 얹혔으며 막새기와는 사용하지 않았다. 내부는 통문(通問)으로 우물마루를 깔았으며 중앙 뒤쪽으로 3존불을 안치하였다. 윗면이 평평한 대형의 막돌 초석 위에 원통형(일부는 민흘림) 두리기둥을 세웠으며, 기둥위로는 주두(柱頭)를 얹고 창방을 걸었다. 창방 위로는 주문마다 중앙에 3소루화반(小累花盤)을 1구씩 배치하였다. 공포는 기둥윗몸에서부터 쇠서 3개를 낸 3익공식으로 아래쇠서위로는 소로를 놓고 행공첨차를 보내 외목도리(外目道理) 형식으로 나와있는 전면의 도리를 받게 했다. 기둥 안쪽으로는 조각된 보아지를 두었다. 가구(架構)는 전후평주(前後平柱)위에 대양(大梁)을 걸고 그 위에 동자주를 놓아 종양(宗梁)을 얹힌 5양가이다. 양가 위로는 천장이 가설되어 있어 대공의 형상을 살필 수 없다. 양 측면의 중심기둥으로부터는 대양 위로 팔각집에서 가설되는 충량을 걸어 특히 주목된다. 천장은 종양상부로는 우물천장을 가설하고 나머지는 빗천장으로 꾸몄다. 그리고 3층 불단 위로는 닺집을 가설하였다. 창호는 중앙문에는 4분합 빗살문을, 양 협칸으로는 쌍여닫이 띠살문을 달았다. 처마는 전후면 겹처마이다.
요사 정면 3간, 측면 1간인 전후퇴의 건물로 홑처마 팔작지붕의 구조이다. 막돌 초석 위에 네모기둥을 세웠으며 뒷마당에는 우물과 작업공간이 있다. 전형적인 농촌의 주거건축이다.
9. 참고문헌: 해남군사(19950
1. 분류: 문화재 자료
2. 명칭(한글): 민정기 가옥
3. 명칭(한문):
4. 소재지: 해남읍 백야리 537
5. 지정년도: 1992. 3. 9
6. 지정번호 : 문화재 자료 제186호
7. 제작시대: 1670년대으로 추정
8. 문화재 설명: 이 가옥은 현 소유자 민정기(閔正基)의 6대조 민정현(閔亭顯)이 순조 7년(1807)에 건립한 가옥으로 현재 안채와 사랑채, 사당(祠堂), 문간채 등을 갖추고 있다. 이중 청사정(淸斯亭)이란 사랑채는 여흥(驪興)이씨 가(家)에서 1670년대에 건립한 것으로 전해 내려오고 있다.
건물의 배치(配置)는 동서방향으로 직선축(直線軸)을 설정하여 맨 전면에 문간채를 두고 그 다음에 안채를, 그리고 맨 뒷편에는 별도의 담장으로 구획하여 사당을 배치하였으며 사랑채는 사당 좌측편에 정남향으로 앉혔다. 사당은 안채 우측으로 돌아 진입케 되어 있으며 사랑채는 안채 좌측으로 하여 사랑마당을 통하여 오르게 돼 있다.
안채 본 건물은 전후로 퇴(退)를 둔 일자형평면(一字型平面)의 육간 팔작집이다. 평면구성은 맨 좌측으로 부터 건너방, 대청, 안방, 그리고 부엌 순으로 배치하였으며 맨 우측으로는 1간을 내어 달아 부엌을 넓혔고 그 뒤쪽으로는 정지방을 꾸몄다. 대청 뒷편의 좌측으로는 안광을 하나 두었으며 툇마루는 대청과 안방 전면에 90cm 폭으로 설치하였다. 그리고 건너방 전면에는 누마루를 설치하고 난간을 둘렀으며 하부는 토방으로 아궁이를 시설하였다.
구조는 막돌허튼쌓기 기단(基壇)위에 막돌초석을 놓고 방주(方柱)를 세운(전면의 툇마루 부분은 두리기둥) 2고주(高柱) 5양가(樑架)이며 道里는 장설(長舌)로 받혀진 납도리를 사용했다. 들보 위에 놓인 마루대공은 사다리꼴의 판대공으로 그 밑에는 약간 굽은 또 하나의 부재(部材)로 받혀져 있어 특히 주목되며 또한 안방과 대청사이의 벽체 부분에는 상인방과 들보 사이에 태극무늬가 나란히 2개씩 음각으로 새겨져 있는 부재(部材)가 끼워져 있다. 본 건물에서는 아자형, 원형, 조롱목형 등의 동자주(童子柱)로 장식화된 누마루가의 난간이 특히 눈에 띤다.
사랑채 정남향으로 자리하고 있는 사랑채는 정남 5간의 일자형 맛배집이다. 평면구성은 중앙의 2칸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측에 방을 드렸다가 방 전면에는 120cm폭으로 툇마루를 설치하였다.
구조는 전후방 평주 위에 대양(大樑)을 걸고 그 위에 짧은 동자주를 세운 다음 종양을 얹힌 5양 구조이며 도리(道里)는 장설 받침 없는 납도리이고 종양 위에는 판대공을 놓아 종도리(宗道里)를 받게 했다. 기단(基壇)은 박돌허튼 쌓기 구조이며 초석은 막돌초석을 사용하였고 기둥은 방주를 썼다. 지붕은 막새기와 없이 한와(韓瓦)를 사용하였고 그 형태는 사랑채 건물로는 보기 드물게 맛배지붕으로 되어 있다.
사당 본 건물은 정면 3간, 측면 1간 반의 맛배집으로 전면 반간 폭으로는 툇마루를 설치하였고 그 안쪽으로는 모두 방으로 꾸몄다.
구조는 다듬은 방형의 석재로 바른층 쌓기한 기단 위에 다듬은 방형 초석을 놓고 그 위에 방주를 세운 민도리집 구조로 되어 있다.
문간채 정면 4간에 우측과 뒷편으로 퇴를 둔 일자형 대문간이다. 좌측으로부터 2번째 問에 2짝의 판장문을 달아 본 가옥의 출입문을 이용하고 있으며 그 좌우측으로는 각각 광과 방을 드렸다.
구조로는 낮게 형성된 토단 위에 박돌초석을 놓고 그 위에 방주를 세운 민도리집 구조로 되어 있다. 지붕을 시멘트기와를 얹힌 우진각 지붕으로 되어 있다.
9. 참고문헌: 해남군사(19950
비지정문화재
패총 신석기시대후기 유적으로 현산면 두모리 패총이 있고 철기시대 패총으로 송지면 군곡리 패총이 유명한데 군곡리 패총은 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군곡과 동시대의 패총이 해남읍과 삼산면 경계에 위치하는 옥녀봉토성(마한토성)에 조성되어 있다.
지석묘 전남 3대 지석묘분포지역으로 총 90 여군에 900 여기가 분포한다. 특히 현산면, 옥천면, 마산면에 밀집 분포하는데 그 중 방축과 연정의 지석묘군은 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옹관묘 군곡리패총지역, 화산면 갑길리, 삼산면 시등․농암․대형옹관이 발굴되었고 북일면 고분지역 해남읍 남송리에서는 파괴된 옹관편이 수습된다.
고분 전남 3대 고분 분포지역의 하나인 북일면 지역에는 백제의 일반 묘제(횡혈식석실분)를 비롯 방대형고분, 즙석방형고분 등 다양한 고분이 밀집분포하는데 그 중 방산리 장고형고분, 신월리 즙석방대형고분과 현산면 월송리 조산고분(5세기말~6세기초), 삼산면 용두리 장고형고분은 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토성 ◎옥여봉 토성 : 마한시대․해남읍과 삼산면 경계 220m에 있다. ◎읍호토성 : 현산면 읍호리에 있다. ◎백방산 토성 : 현산면 초호리에 있다. ◎죽금성․마한~백제시대․현산면 일평리에 있다. 출토유물→백제토기/가야계토기(현산초등학교 소장). ◎고다산성 : 백제시대․ 현산면 고담리에 있다.
읍성과 피난성 ◎옥산현성 : 삼산면 계동에 있다. 고려 옥산현성으로 이동 중인 해진군이 잠깐 여기에 머물렀다. ◎해남읍성 : 2.857척이며, 옹성이 3개, 성문 3개에 우물이 12개인데 남문을 정원루라고 했다. 축조연대는 분명하지 않으나 세종 19년 읍치 이전에 축조되었던 것으로 추정한다. 지금 군청 뒤에 약 100m의 성벽이 남아 있고, 서초등학교 서벽에 서문 옹성이 남아 있다.
관방유적 ◎우수영성 : 문내면 우수영에 있다. ◎달량진성 : 북평면 남창에 있다. ◎이진진성 : 북평면 이진리에 있다. ◎어란진성 : 송지면 어란리에 있다.
역원 ◎별진역 : 지금 계곡면 소재지에 있었다. 마정과 역지 담벽이 지금 계곡농협 뒤에 희미하게 남아 있다. ◎남리역 : 지금 황산면 남리이다. ◎녹산역 : 녹산구지는 지금 삼산면 나범리에 있고 신역은 해남읍 신안리에 있었다.
봉수 ◎달마산봉수 : 송지면 달마산에 봉수대 석축이 잘 남아 있다 .남으로 송지면 갈두산봉수, 서로 진도 여귀산봉수에 응했다. ◎갈두산봉수 : 지금의 땅끝 사자봉이다. ◎관두산봉수 : 지금의 화산면 관두산이다. ◎일성산봉수 : 지금 문내면 일성산이다. ◎좌곡산봉수 : 지금 북일면 봉대산이다.
전적지 ◎달량진사변과 해남읍성 : 명종 10년(1555)에 외구 50여척이 달량진에 상륙하여 인근 고을을 분탕질하는 중 해남읍성만 잘 지켰다. ◎정유재란과 명량대첩지 : 진도와 해남 우수영 사이의 좁은 물목을 명량이라고 한다. 여기서 이순신이 피란선 2백척과 전선 12척으로 왜적과 싸워 대첩하니 이로써 왜적들이 전쟁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기를 간절히 원했다. ◎정유년 대교들 전투 : 명량대첩 한달 후 정유년 10월 10일 옥천면 대교들에서 우리 의병과 외의 전투가 있었는데 그때 전사한 의병들의 무덤이라 하여 말무덤(쓸어모아 묻었다는 의미의) 6기가 전하는데 지금은 3기만 남아 있다. ◎제3기의병과 대흥사 심적암 전투 : 대흥사 심적암은 제3기 의병의 마지막 전투현장이다. 1909년 7월 9일 새벽 4시에 일본 수비대의 공격을 받고 황두일 황준성이 이끄는 40여명의 의병이 이 전투에서 거의 전사하고 일부는 후에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고문서 수영선생안 : 원본이다. 해남문화원 소장.
도요지 화원면 뱀사골 일대 신라청자요지 : 진산녹청자요지에 앞서는 것으로 보이는 녹자요지가 근래 해남의 한 재지 연구자 변남주에 의해서 발견되었다.
동굴 ◎해남에서 북일면으로 넘어가는 오심제 정상 용암 아래 깊이를 알 수 없는 동굴이 있는데 출입부에는 사람이 4~50명 들어앉을 수 있는 돌방이 있다. ◎송지면 어불도 남벽 벼란에도 사람이 들어가 쉴 수 있는 굴이 있다.
민속자료 ◎솟대 : 황산면 송산리․원호, 송지면 금강리. ◎벅수 : 대흥사 입구. ◎양근석 : 옥천면 흑천리와 삼산면 양촌 약수에 있다
세시풍속
1월의 세시풍속 : 설날 새벽에 장만한 음식을 성주께 차려 올리고 사당이 있는 집에서는 사당에 음식을 차려 제를 지낸다. 어촌에서는 집에서 다례를 올린 뒤 가지가지의 음식을 자기집에서 부리는 배에 가서 진설 한다. 이것을 뱃고사라고 한다. 세배와 성묘 새해 세배는 차례를 바친 뒤부터 시작한다. 떡국 설날아침에는 가래떡을 가늘게 썰어 여러 가지 재료로 놓어 만든 떡국을 먹는다. 매귀굿치기 대게 정월 2-3일부터 15일 내외까지 농악을 치는 것을 매귀굿치기라고 한다. 이와 같은 축귀, 영복의 굿을 집집마다 하고 돌아다니는데 이를 마당밟기 또는 걸궁 또는 농악이라고도 한다. 당산제와 뱃고사 정월 초하루에는 옛날처럼 심하진 않으나 지금도 해남의 여러 마을에서는 마을의 평안과 풍년농사를 기원하는 당산제, 동제, 산제를 모시며 선주나 선원의 무사고와 풍어를 기원하는 뱃고사를 지내고 있다. 오곡밥․찐밥 모두 보름에 해먹는다. 걸판 거두기․개에게 더위밥 주기․더위팔기 모두 보름에 몸의 건강을 빌고 병을 예방하기 위해서 하는 풍속이다. 연 띄우기 대개 음력 12월 들어서면서 시작되는 연 띄우기는 정월 세배와 성묘가 끝나면 본격적으로 마을 앞이나 갯벌에서 띄우는데 정월 대보름 전이 그 절정에 이르러 대성황을 이룬다.
2월의 세시풍속 : 한식 동지 후 105일째 되는 날로 3월이 되기도 하나 대게는 2월에 든다. 이날은 선산에 성묘를 하고 보통 10월에 지내는 시제를 이날에 모시기도 한다.
3월의 세시풍속 : 장 담그기 대게 3월 삼짇날을 택해서 장을 담그는데 왼새끼를 꼬아 장독항아리를 둘러두는 등 금줄을 친다.
4월의 세시풍속 : 초파일 대흥사를 비롯한 각 사찰에서는 수많은 등불로 일대 장관을 이룬다. 이때 다는 등불이 밝아야 그해 수가 좋고 명을 복을 많이 받을 수 있다하여 등불을 단 사람들은 밤새 자기 불을 지친다.
5월의 세시풍속 : 차잎뜯어오기 단오날이면 대흥사 일지암을 비롯한 여러 곳에서 차나무잎을 뜯어 가볍게 대처 말린다. 시식 단오에는 명절기분을 내어 약떡이나 죽순나물을 해먹는다.
6월의 세시풍속 : 복날 복날에는 여름의 더위를 물리칠 수 있다하여 개를 잡아먹는다. 요즘은 쇠고기 혹은 오리고기 등으로 복다름하는 경우가 많다. 미숫가루 미숫가루는 대게 찹쌀이나 보리로 만든다.
8월의 세시풍속 : 다례 추석이 오면 어느 가정에서나 다례를 올린다. 각종과실과 정성 드려 장만한 음식은 물론 올벼심리를 해서 조상께 바친다. 어촌에서는 자기집배의 서낭께도 음식을 차려 올린다. 성묘 추석에는 선산에 성묘를 간다. 멀리 타지에 나가있는 자손들은 추석 때 성묘하기 위해서 모두 돌아온다. 강강술래 무형문화재 제8호로 전승한다. 등덩이 놀이 : 도지정문화재로 전승한다.
9월의 세시풍속 : 가을물고기 가을에는 물고기 많이 재 맛이다. 무와 생고추와 물고기 볶음을 많이 해먹는다. 가을토하젓 가을에 연못이나 냇가 또는 도랑에서 애새우를 잡아 토하젓을 담는다.
11월의 세시풍속 : 팥죽 동지에는 새알을 넣어 팥죽을 해서 먹는다. 동지에도 다례를 올렸으나 지금은 올리지 않는다.
전설
대흥사 천불상에 얽힌 전설 : 경주옥석으로 6년에 걸쳐 완성한 천불을 싣고 울산을 출발한 배가, 그 중 1척이 풍랑을 만나 일본 나가시끼 현에 표류했는데, 꿈에 부처님이 일본인의 꿈에 나타나 조선국 대흥사로 모셔라하여 돌려보냈다. 천상의 공주가 조각한 북암석불 : 죄를 짓고 두륜산에 내려온 남매중 누나는 북암에서 양각으로 남동생은 혈망봉 및 남암에서 음각으로 부처를 조각하는데 만일암에 해를 잡아 매두고 일을 끝마쳤다고 한다. 열녀 임씨를 도운 호랑이 : 진도에서 해남으로 시집온 임씨가 일찍 미망인이 되었다. 친정에서 개가시키려하자 도망쳐 나오는데 바다에 이르니 배가 없었다. 이때에 호랑이가 임씨를 업고 바다를 건넜는데 후일 함정에 빠진 호랑이를 임씨가 구하였다.
이 밖에 마산면 삼막리에 용왕이 병을 고쳐 수궁벼슬한 의원 이진원(실제인물)의 전설, 백년 여우의 여의주를 속여 삼키고 천하의 지관이 된 마산면 맹진리 이의신(실제인물)의 전설, 임금의 사신들에 얽힌 황산면 연호리 연자각씨 전설, 현산면 백방산의 망부석 전설 등이 있다.
해남의 문화적 특성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우리 해남은 태평양과 아시아를 연결하는 해로의 요충에 위치하며, 송나라 고관들이 이거야말로 달마존자(達摩尊者)의 거처가 아니겠는가 라고 찬탄하여 마지않았다는 달마산과 만년불회지지(萬年不毁之地)인 두륜산 자락에 3면에 바다를 거느린 신비하고 아름다운 자연경관과 함께 다양하고 풍부한 역사문화유적을 보유하고 있는 고장으로, 전남 3대 지석묘(支石墓) 분포 지역의 하나이며, 또 전남 3대 고분(古墳) 분포 지역으로 김해페총(金海貝塚)과 쌍벽을 이루는 군곡리패총(郡谷里貝塚)과 일본인들이 이것만은 자기들의 독자 독특한 고유문화라고 자랑하여 왔던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 등 고대문화를 비롯 하늘의 별 같은 시인묵객(詩人墨客) 등 인물유적(人物遺跡), 기이하고 애수(哀愁)어린 전설유적(傳說遺跡), 민족문화의 생성모태인 마을문화와 마한토성(馬韓土城)을 비롯한 많은 옛 성지(城址)와 수영(水營)․만호성(萬戶城) 등 관방유적(關防遺蹟), 그리고 국가지정 국보․보물 등 20여 건과 도지정 문화재 33건에 그리고 근래에 발견되어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는 우항리공룡화석지(牛項里恐龍化石地)가 있다.
이것은 곧 우리 해남이야말로 바로 21세기가 기대하는 약속의 땅이며 인류를 위한 오리지널 문화의 발신기지 되는 희망의 땅임을 의미하며, 우리가 굳이 산업화 기계화라는 반자연적 반인간적 경제논리에 자신을 노출시키지 않더라도 아름답게 살아갈 수 있는 천혜(天惠)의 땅이요, 21세기 형 이상향의 모태(母胎) 됨을 시사한다. 여기에 우리 해남의 미래가 있고 번영과 행복이 있다.
따라서 우리는 먼저 우리마을들의 세시풍속 등 생활문화(民俗)와 전설과 인물유적, 그리고 관방유적 등 역사문화와, 자연자원을 모두 일으켜 세우는 한편 우항리에 자연사박물관과 공룡테마공원을 만들고 우수영, 땅끝, 두륜산 등 기존 3개 관광권에 주광관광단지를 다시 일으키고 우슬제에 교통관광공원을 유치하게 될 것이며, 또 우리의 자존심인 수성송(守城松) 앞 광장에 프른 잔디를 심어 우리 해남을 방문하는 모든 사람들이 거기서 뛰노는 우리 청소년들의 아름다운 모습을 볼 수 있게 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들 해남인의 문화적 삶은 물론 우리 해남을 방문하는 사람들이 어찌 이땅을 일러 참으로 사람다운 사람들이 사는 고장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것만으로 해남사람들의 소임이 다 끝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일단 해남의 미래를 이렇게 정하였다면 도로와 항구, 차량과 선박, 마을과 농장, 바다와 어장, 마을 안길과 밭두렁길, 사람이 사는 집과 짐숭들의 집, 상가와 공공건물 등을 그러한 해남에 알맞게 정비하여야 할 것이며, 특히 다양한 방문자들이 부담 없이 공유 공감 할 수 있는 예술회관, 도서관, 박물관, 민속문화전시관 등에 적극적인 투자를 하여야 할 것이다(해남문화원장 황도훈).
출처 :문화관광해설가 원문보기▶ 글쓴이 : 해남현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