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의 꽃 망이(亡伊)와 망소이(亡所伊)
고려는 기본적으로 무력의 힘에 기반을 둔 호족세력연합에 의해 성립된 국가이다. 하지만 4대 광종이 과거제도를 도입한 이후, 점차 문인세력이 중앙권력을 차지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성종의 적극적인 유학진흥책에 힘입어, 문인의 권위와 무인의 권위는 역전되기에 이르렀다. 물론 현종시대때 거란족의 침입으로 무인세력의 활동이 활발하긴 하였지만, 상대적으로 전쟁중에 권력기반이 약화되고 많은 희생자가 발생한 것 역시 무인세력이었다.
따라서 거란족의 침입은 오히려 문인들의 중앙정치장악을 고착하 시켰으며, 차별적인 대우를 받던 무인세력들은 정중부를 필두로 하여 의종 24년 1170년 쿠테타를 일으킨다. 그러나 무인들의 난을 쿠테타정도로 밖에 평가할 수 없는 이유는, 이들역시 정권을 잡자마자 문인귀족세력보다 오히려 더윽 극심한 권력 횡포를 부렸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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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귀족사회에서도 수많은 억압과 약탈을 당하였던 민중들은, 무인 정권에 새로운 변화를 기대 하였다.
그러나 정권을 잡은 무인세력이 오히려 더욱 극심한 수탈을 가하자, 전국적인 봉기가 일어나게 되었다.
그리고 무인정권시대 대표적인 사건이 망이와 망소이가 일으킨 공주(公州) 명학소(鳴鶴所)의 민중봉기이다. | 소(所)란 신라말 고려초에 생긴 특수 행정구역이다. 그곳은 주로 사회적으로 낮은 신분인 각종 기술자와 대장장이등의 집단 거주지로,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조정이 원하는 품목에 대해 무한공급과 무한노동을 아무대가 없이 바쳐야 했다. 따라서 이들은 국가의 노예나 다름없었으며, 누가 정권을 잡던 그곳에 사는 사람들과 생산품은 수탈이 대상에 불과하였다.
따라서 그들은 전국적으로 번지고 있었던, 최소한의 생존권 보장은 물론 각종차별대우 개선과 신분해방까지를 목적으로 하는 민중봉기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망이와 망소이 형제가 봉기를 일으킨 것은 1176년 음 1월이었다. 당시에는 조위총이 평안도지역에서 대형봉기를 일으켰고, 무신정권은 이 봉기를 평정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남쪽에서의 감시와 방비는 허술하였다. 망이와 망소이 형제는 스스로 산행병마사(山行兵馬使)를 자처하며 일거에 공주를 점령하였으며, 이어서 여주와 청주 아산등 충청도 일대로 점령지역을 확장해 나갔다.
망이와 망소이 형제가 이처럼 빠르게 충정도 일대를 점령해 나간것은, 그동안 중앙정치에 대해 불만감과 신분상승 욕구가 그만큼 팽배해져 있던 탓도 있었지만, 사전에 치밀하게 봉기계획을 세우고 봉기군을 모집하였기 때문이다. 최초 두 형제가 공주를 점령할 당시 봉기군은 1천여 명 내외에 불과하였지만, 1천 5백명이 지키고 있던 공주관아를 단숨에 점령하였던 것을 보아도 치밀한 계획에 의해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즉 내부호응자가 없었다면, 결코 무기하나 변변치 못한 농민군이 그리 쉽게 공주관아를 점령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관노중에는, 봉기에 적극적으로 참여를 원하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관아를 점령하면서 무기를 보강할 수 있었고, 크고 작은 관군과의 전투를 통해 차츰 이들의 전투력도 상승되어 갔다. 특히 봉기군을 이끈 망이형제나 참여자 모두가 지역민 출신으로, 그 지역의 지형에 대해서 손바닥 들여다 보듯이 자세히 알고 있었다는 점은 가장 큰 장점이었다.
정중부 정권은 충주일대로 확대된 망이형제의 봉기를 평정하기 위해 정황재(丁黃載)가 이끄는 3000명의 중앙 정예군을 파견하였지만, 봉기군의 게릴라전술과 기습전에 말려 한달만에 패퇴하고 말았다. 중앙 정예군마저 패하자 정중부 정권은 소를 현(縣)으로 격상시킨다는 회유책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봉기군을 회유시키기 위한 계략으로 판단한 망이형제는, 북진을 멈추지 않고 마침내 충주지역까지 점령하였다.
이에따라 정중부는 이적을 병마사로 임명하여 대대적인 공격작전을 세웠다. 이렇게되자 더이상의 싸움은 봉기군의 희생만 키울것이라고 판단, 1177년 정월 봉기군의 무사귀향과 식량제공등을 조권으로 하여 정중부 정권과 협상하였다. 또 일부 권세가들 중에는 망이의 봉기를 이용하여, 정중부를 몰아내고 중앙정권을 잡으려는 사람들도 있었다. 결국 순수한 민중봉기가 정권투쟁에 이용될 것을 우려한 망이는 자진해산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 때가 겨울철이었기 때문에 식량을 확보하는 일은, 성난 봉기군의 마음을 추수리는데 매우 유용하였다. 이제는 명학소의 천민에서 충순현(忠順縣)의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고, 또 겨울철을 날 수 있는 곡식까지 마련하였으니 한결가벼운 마음으로 고향으로 내려 갈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큰 착각이었다. 망이가 정중부정권과 협상을 벌이고 있는 동안, 관군은 명학소에 있던 망이의 처와 자식을 인질로 잡은 것 뿐 아니라, 병사들까지 파견하였다. 결국 그 모든 약속과 회유책은 봉기군을 와해시키기 위한 공작에 불과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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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이는 분노하였다. 그리고 망이뿐 아니라 억압받고 차별받던 모든 민중들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2차 봉기는 1177년 2월에 일어났으며, 1차 봉기때 보다 더욱 극열하였고 과격하였다.
그들은 정계가 손을잡고 각종 탐학을 자행하던 서산(瑞山) 가야사(伽耶寺)라는 절을 공격하여, 그들이 봉기하였음을 알렸다. 일단 망이의 봉기소식이 전해지자, 그와 항상 보조를 맞추어 움직였던 손청도 충북지역에서 2차 봉기를 일으켰다.
*망이 망소이 봉기 기념탐 내에 조성된 조각상 일부 | 2차 봉기군은 1차 봉기 때 한달이 넘어서야 점령하였던 충주를 불과 열흘만에 점령하는데 성공하였다. 이어서 직산(稷山) 홍경원(弘慶院)이라는 사찰을 3월달에 점령, 정중부 정권에 전달하는 편지를 작성하여 주지승에게 전하도록 하였다.
" 이미 우리 고향을 현으로 승격시키고 수령을 발령하였음에도, 그 길로 병사를 보내어 토벌하고 우리의 모친과 처자를 잡아 가두었으니 그 뜻이 어디있단 말인가? 싸우다가 죽을지언정 결코 항복하여 포로가 되지는 않을 것이요, 반드시 개성에 가서 원한을 갚겠다."
사실상 선전포고였다. 봉기군은 충청 전 지역을 장악하였으며, 오직 청주목(牧)만 남아있었다. 목(牧)은 현재로 말하면 도청소재지와 같은 곳이었다. 이렇게 봉기군이 극성을 이루자 정중부정권도 위기감을 느끼고, 충순현을 다시 명학소로 강등시켜 버렸다. 이어 대규모 병력을 편성 3개방향에서 망이의 봉기군을 압박해 갔다. 망이의 봉기군과 보조를 맞추어, 주력을 보호하는 역할을 담당하던 손청은 일시에 밀려드는 중앙군을 막아낼 수 없었다.
이렇게 손청의 봉기군이 무너지자, 망이가 이끄는 봉기군도 삼면에서 닥쳐오는 대병력을 당해낼 수 없었다. 결국 공주 명학소에서 일러난 망이 망소이 형제의 민중봉기는 1년 6개월만에 막을 내렸으며, 두 형제는 그들의 바램과는 달리 생포되어 감옥에서 옥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망이 망소이 형제의 봉기는 헛되지 않았다. 이후 전국적으로 일어났던 고려시대 민중봉기에 도화선이 되었으며, 궁극적으로는 특수 천민 집단이 소멸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대전광역시 서구 남선공원에 있는 기념탑 망이·망소 민중봉기 발원지인 명학소(현 서구 탄방동)를 기리기 위한 기념탑 이라고 함.
*개인의견*
고려시대 때 향 소 부곡같은 특정지역에 대한 차별은 합법이었다. 또 그 속에서 갖은 착취와 억압을 받던 망이 망소이 형제는, 합법적인 방법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이 땅에서 가난하게 살지만 행복하게 살아가고 싶은 것이 죄인가? 그들에게 편히 쉴 수 있는 작은 공간과, 그들의 목소리를 들어줄 수 있는 제도와, 살아갈 수 있는 터전을 제공해 주었다면 과연 그토록 격렬한 봉기가 있었을까.....
법은 지켜져야 하지만, 소수의 권익보호만을 위해 법이 작용할 경우 반드시 고쳐져야 한다. 그리고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그 어떤 것도 개선될 수 없을 때 민중의 봉기와 저항은 발생되기 마련이다. 고려시대 때 망이와 망소이 형제는 단순히 범죄자나 반역죄인 정도였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그들을 부당하고 불합리한 현실에 맞서 의롭게 일어난 봉기군의 주역으로 기억하고 있다. 따라서 토벌의 대상이 될 수 없고 토벌이라는 단어역시 사용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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