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國 旅行記 (2)
蘇州에서는 가이드가 별도로 한사람이 또 나왔는데, 이처럼 각 省마다 가이드를 따로 쓰게한 것은 골고루 먹여 살리려는 中國 정부의 정책적 배려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 蘇州의 가이드는 아버지의 고향이 大邱라고 해서 더욱 친밀감이 있었는데, 경상도 사투리가 靑松 村者이 나를 무색케 했다.
'절까치'(젓가락).'개갑다'(가볍다) 등등 명승지를 설명하는 중간중간 우리마저 잊고 지내던 사투리가 튀어나올 때 마다 실소를 금치 못하게 했다. 서울에서 여행객들이 올 때는 서로 말을 알아듣지 못해 애를 먹는다는 얘기가 우스갯 소리만은 아닌 듯 했다. 진지하게 설명을 하다가도 꼭 끝에가면 야릇한 해학(諧謔)을 곁들이는 재미있는 친구였다.
杭州에서 두 번째 밤. 저녁 식사에서 특별한 요리가 나왔다. 杭州의 특미인 동파육(東坡肉). 소동파가 돼지고기와 술을 가져오라고 주문을 했으나 이를 잘못 이해한 요리사가 돼지고기에 술을 넣어 온 것에서 비롯됐는데 그 맛이 기가 막히게 좋아 하나의 요리법으로 정착됐다는 것이다.
남한과 비슷한 인구 4천300여만의 江蘇省 성도인 杭州(항저우). 중국 7대 전통도시 중의 하나로 진시황이 도시로 개척한 이후 2200여년의 역사를 가진 도시로 남송(南宋)시대의 수도이기도 했다.
杭州市 남쪽을 가로로 흐르는 전탄강(錢塘江.쳰탕지앙)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연안에 우뚝 선 육화탑(六和塔.리어우훠타)은 59.9m의 나무와 벽돌로 세운 8각형 13층탑으로 970년에 창건됐다가 淸대인 1900년에 개축해 1991년 다시 재보수한 전망탑 겸 등대이다.
錢塘江은 파도의 역류로도 유명한 곳이다. 매년 음력 8월18일 무렵이면 杭州灣의 만조때 해수가 강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는 현상이 일어나는데 시속 25km 높이 3.5m의 파도가 장관이다.
문화유적이 많고 자연경관이 아름다워 중국여행의 메카로 꼽히는 항저우는 특히 중국 호수 문화의 최고 수작이라 할 만한 서호(西湖.시후)를 빼놓고 이야기 할 수 없다. 강남(江南) 특유의 수려한 풍광으로 연중 관광객이 끊이지 않는데 우리나라의 부산과 대구 관광객들이 즐겨찾는 곳이다. 김해공항과 대구공항에서 上海를 거치는 교통의 편리성 때문인 듯 했다.
西湖는 소동파와 백낙천을 비롯한 숱한 문인묵객과 월왕 구천과 오왕 부차 그리고 구천이 부차에게 바친 중국 4대 미인의 한사람이었던 서시(西施)의 추억이 서린 곳이다. 杭州市 서쪽에 위치해 西湖란 이름을 가지게 된 이호수는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가운데 한면은 杭州시내의 현대식 건물과 접한 자연과 인공, 고전과 현대가 어우러진 호수.정원문화의 걸작이다. 계절이나 시간에 관계없이 맑으면 맑은대로 흐리면 흐린대로 나름대로의 특유한 분위기로 사람을 매료시키는 곳이다.
남북 3.3km, 동서 2.8km(주위 40리, 170만평)의 西湖에는 新.舊 十景을 비롯한 갖가지 볼거리들이 즐비해 이들을 구석구석 돌아보는데도 한나절은 걸린다고 한다. 蘇堤春曉.平湖秋月.曲院風荷.斷橋殘雪.花港觀魚.柳浪聞鶯.雙峰揷雲.三潭印月.南屛晩鍾.雷峰夕照 등 西湖十景이 西湖의 진수를 잘 표현하고 있다.
가이드 南兄 선생은 호수 북서쪽 물가에 있는 중국 충신의 대명사 악비(岳飛.1103~1142)의 묘가 있는 악묘(岳廟.웨먀오)에 대한 설명을 빼놓지 않았다. 岳飛는 아직도 중국인들의 큰 추앙을 받고 있는 인물로 대전 안에 높이 4.5m의 좌상이 있고 대전 밖 정원에는 岳飛 父子의 묘가 있다고 했다.
西湖 인근의 眞珠 판매장에 들렀다. 西湖에서 양식한 커다란 조개안에 알알이 박힌 진주의 모습이 참으로 신기하다. 오늘 점심도 중국식. 8가지의 요리가 나왔는데 이번에는 술이 二鍋頭酒가 아닌 샤오싱(紹興)주이다.
중국 교포가 운영하는 대형식당에서 점심을 먹으며 우리는 紹興酒와 술 데우는 주전자를 기념품으로 한세트씩 구입했다. 샤오싱주는 2천400여년의 역사를 가진 술로 월왕 구천이 오왕에게 선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西湖 북쪽 3km 거리의 北高峰(베이까오펑)과 飛來峰(페이라이펑) 사이에 자리한 영은사(靈隱寺.링인스)는 東晉시대인 326년 인도의 승려 慧理가 걸립한 절로 중국 10대 고찰의 하나이다. 吳나라 때는 9樓 18閣 72殿에 3천명의 승려를 가진 대규모 사원이었으며 현재의 건물들은 대게 19세기 이후에 재건된 것이다.
淸나라 강희제가 남긴 운림성원(雲林禪院)이란 편액이 걸린 천왕전 안의 위태천보살상은 宋나라 때의 것이고 경내의 8각9석탑은 吳나라의 유물이다. 대웅보전 안의 19.6m 높이의 장대한 금색 석가모니상이 사뭇 위압적이다.
절을 찾은 불자들이 여러개의 향묶음을 들고 연신 흔들어대며 절을 하는 모습이며 합장을 하는 방법도 우리와는 많이 다르다. 우리나라 절의 경우 입구에 해당되는 天王殿에서도 무릎을 끓고 예를 올리는 정경도 특이하다.
법당을 비롯한 모든 당우의 실내는 우리처럼 신을 벗고 들어가는 마룻바닥이 아니라 신을 신은채 방석이 깔린 나무 판자위에 무릎만 꿇은채 절을 할 수 있도록 한 것도 다른 풍속도이다.
靈隱寺의 건물은 대웅보전(大雄寶殿)과 天王殿.藥師殿.大悲寺 등으로 구성돼 있다. 그 중에서도 대웅보전은 거대하고 아름다운 건축물로 높이 33.6미터의 단층 겹친 지붕으로 그 안에 모신 거대한 석가모니 불상은 24쪽의 향나무로 조각해 만들어 온몸에 금도금을 했다.
西湖 주변에는 1천200년의 역사를 가진 세계적인 명성의 용정차(龍井茶.룽징차) 명산지가 있었다. 이 중국 명차의 판매장에서 만난 판매원은 조선족 아가씨인지는 몰라도 능숙한 한국말과 능란한 상술이 돋보였다.
杭州에서 3시간을 달려 上海에 도착했다. 上海市 북쪽에 위치한 로신공원(魯迅公園.루신꿍위안)에 도착하니 해가 저물고 있었다. 이곳은 중국 근대화의 아버지 루신의 묘와 그의 기념관이 있으며 공원 옆에는 그가 말년을 보낸 집도 보존돼 있었다. 루신의 묘비명은 마오쩌뚱(毛澤東)의 필체로도 유명하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이곳이 윤봉길 의사가 의거가 있었던 역사적인 장소 '홍구공원'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윤의사가 시라카와 요시노리(白川義則) 일제 육군대장을 폭사시킨 현장에서 우리는 기념촬영을 하고 만세를 불렀다.
그때 독립지사들의 훙중(胸中)처럼 어둠살이 上海를 뒤덮어 윤의사를 기념하는 2층 누각인 梅軒 등을 찬찬히 둘러보지 못한 아쉬움을 남기고 공원을 빠져나올 수 밖에 없었다. 그러잖아도 안내판조차 제대로 갖추지 않아 윤의사 관련 유적은 눈에 잘 띄지도 않았다. 예나 지금이나 여기는 남의 땅인 것을....
中國에서의 마지막 밤은 上海에서 보내게 됐다. 우리 네명은 일행과 떨어져 영사관에 근무하는 친구(이수존)집에 저녁 초대를 받았다. 친구가 호텔 로비에 마중을 나왔는데 마침 그 친구의 관사인 아파트가 호텔에서 멀지않아 걸어서 갈 수가 있었다.
황포강을 사이에 두고 서쪽 外灘(와이탄)의 고픙스런 서양식 건축물과 浦東(푸동)의 초현대식 고층건물의 조화는 참으로 경탄할 만한 경관이었다. 더구나 황포강변에서 본 上海의 東西 新舊의 어우러짐과 夜景은 정말 신비스럽게까지 했다. 밤의 장막이 드리워지고 화려한 조명으로 새단장을 한 黃浦江邊에 서니 감개가 무량했다.
浦東의 東方明珠塔에 오른 北韓의 金正日 國防委員長이 上海 시내를 내려다 보며 '天地開闢'이란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는 말이 실감난다. 카메라를 호텔에 두고 온 탓에 우리는 현지 중국인에게 8천원을 주고 사진촬영을 부탁했다.
그런데 재미있는 일은 이 사진기사가 우리 일행을 배경이 좋은 곳으로 서라고 한 다음에는 꼭 '지기라'라는 알지 못할 말을 연발하면서 사진을 찍는 것이었다. 우리는 아름다운 도시 야경에 들뜬 기분에다 중국인의 행동이 하도 재미있어서 덩달아 '직이라'.'죽여라'를 외치면서 포즈를 취했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그말은 '찍어라'란 우리말을 잘못 배워서 자기 딴에는 한국말로 '찍는다 '는 뜻으로 한 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최고 번화가인 남경동로(南京東路.난징동루)를 걸었다. 밤 11시가 가까워서 인가 행인들의 모습이 그리 많지는 않았다.
영사관 친구와 부인의 안내로 택시를 타고 아파트로 돌아온 우리는 친구의 권유를 마지못해 간단하게 맥주를 한잔 더한 다음 곧장 호텔로 돌아왔다. 여행의 마지막날 밤에 엄습한 피로감과 중국에서의 마지막 밤이란 아쉬움 속에 빈민하던 우리는 기어이 호텔에서 그리 멀지않은 허름한 꼬치집(우리나라의 실내포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王族 兄弟의 낭만과 풍류는 정말 못말린다.
양고기 꼬치 안주와 맥주를 시켜놓고 서너잔을 비우고 나니 눈꺼플이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光奎도 연신 하품을 해댄다. 그러나 신라(新羅) 왕족(王族)인 朴炳潤.炳玉 兄弟는 초저녁인양 기력과 투지가 생생하다. 로열 패밀리답다. 새벽 2시경에야 호텔로 돌아왔다. 3박4일간의 중국여행을 사실상 그렇게 막을 내렸다. 후일 가족들과 함께하는 낭만적인 대륙기행을 기약하면서....
*** 사진은 중국여행기(1)의 내용 하단에 링크된
'형준이와 형우의 홈페이지'를 클릭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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