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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한배달 2004.1 기획특집 ‘정치개혁’(한누리 연구소 제공)>
1. 우리 정치, 무엇이 문제인가
현재 우리나라 국민들은 정말 모든 정치인과 정당에게 실망하고 있다.
변화를 바라는 국민들의 여망으로 당선된 대통령은 변화의 방향은 제시하지 못하고 탈권위를 내세우며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가벼운 말로 사사건건 구설수에 오르고, 정치개혁을 표방하며 ‘열린 우리당’이라는 신당이 창당되었으나 “열리지”도, “우리”가 되지도 못하고 과거․다른 당과 똑 같이 책임 떠넘기기나 상대방만 비난하기 등의 과거형 관행을 답습하고 있으며, 국회 제1당이라는 한나라당과 민주당, 자민련은 자기의 구린 선거자금의 냄새는 덮어두고 대통령 측근의 비리 수사에만 특검을 하기로 하는 등 모두가 자기의 잘못을 겸허하게 반성하고 고치기 전에 남을 탓하고 비난하고 있다. 결국 미래에 대한 비젼은 없고, 각자의 욕심에 찬 이전투구만 나타나니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다.
모든 당이 ‘새로운 정치’ ‘희망의 정치’라는 말은 내세우면서, 자기 내부의 썩은 부분을 덮어두고 바루지 않은 채, 경쟁자의 허물만 들고 시비를 하거나 비난을 하는 행태들은 여전히 옛날과 같아 전혀 새롭지도 않고, 희망을 걸 수도 없으니, 새로운 희망에 비슷한 싹이라도 보이는 정치집단이 하나도 없는 것이다. 그런 가운데 최근의 어떤 여론 조사에서 열린우리당에 11%를 넘는 국민들이 지지를 보내는 것은, 당 운영 방향자체가 없고 대통령을 무조건 지지하거나 전라도 민심을 지나치게 신경 쓰는 등 여당으로서의 능력이 전혀 갖추어지지는 않았지만 일하는 절차에 있어, 전 국민이 참여하는 것은 아니더라도, 위로부터의 방향제시가 아니라 많은 국민들의 참여를 통해 방향을 잡아가려고 시민사회와 네트워크를 구성하고 있으니, 가능성조차 보이지 않는 다른 당보다는 차라리 가능성이라도 보이는 당을 택하자는 심리 때문이라고 보여진다. 한나라당에 대한 국민지지율이 18%대에 머물러 있는 현실은 우리 국민들의 정치권에 대한 실망과 바램의 정도를 절실히 느끼게 한다.
근본적인 가치기준이 필요하다
왜 그런가? 그건 바로, 현실적으로 각 당과 이해관계가 있는 문제에 대해서만 이런저런 대안을 내놓을 뿐 근본적으로 미래의 희망이 될 수 있는 어떤 가치기준도 제시하지 못하여, 국민들에게 비젼(희망, 기대)을 주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정치자금의 문제, 지역갈등의 문제, 노사의 문제,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문제, 당 운영의 민주화, 돈 안 드는 선거 등을 해결하기 위한 일관성과 타당성․실천가능성이 있는 희망적인 가치기준(=잣대)이 있어야 그렇게 될 수 있다는 믿음이 생길 수가 있을 텐데 그것이 없기 때문에 사안마다 결정될 방향을 예측할 수 없어지는 탓이다. 따라서 외형적이고 구체적인 문제가 아니라 근본적인 문제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자기를 버리고 자유와 평등의 개념정립부터
오랜 세월 인류사회가 추구해온 것, 그리고 현재도 추구하고 있고, 미래에도 추구할 것은 “자유와 평등 속에서의 평화로운 번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서양에서는 인류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이 목표를 당성하기 위해 발견한 최고의 제도가 민주주의라고도 한다. 그러나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방법과 인식 면에서는 상당한 차이와 문제를 안고 있다.
개인의 자유에 좀 더 무게를 둔다는 점에서 경제적으로 자본주의와 연결되는 ‘자유민주주의’도 있고, 사회적인 평등에 대한 무게를 어느 정도로 하느냐에 따라 사회주의․공산주의와도 연결이 되는 ‘민주사회주의’, ‘사회민주주의’, ‘인민민주주의’ 등이 있는데, 결국 평화로운 번영을 달성하는 데는 모두 한계를 보임에 따라 지난 세기말에 공산․사회주의가 몰락(?)을 하고,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제3의 길, 신자유주의 등의 대안이 나오고는 있으나 어느 것도 미래사회의 평화로운 번영을 담보하지는 못하고 있다. 자유와 평등이라는 두 가치를 동시에 달성할 수 있는 방안을 찾지 못하고 있다는 말인데, 자기의 이익을 과감히 버리지 않으면 그것은 영원히 달성이 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오직 자기를 버리고 “우리”를 생각하는 눈에만 대안이 보일 것이다. 객관적으로 이의 합리성을 얻기 위해서는 자유와 평등이라는 개념의 정립부터 필요하다. ‘자기역할 안에서의 자유’, 그리고 ‘우리’가 되는 데 ‘역할’을 한다는 ‘참여 기회의 평등’이라는 홍익인간 이념에서의 개념처럼 말이다.
역할의 크고 작음이 아닌 이러한 가치관에 모두가 공감을 할 때 새로운 눈이 뜨여질 것이다. 각자가 자기의 입장을 바탕으로만 생각을 한다면 평화로운 번영의 달성은 영원히 불가능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경우 이런 기준도 없이 자유다 평등이다 하는 것을 상황에 따라 자기에게 유리하게, 또는 자기가 아는 범위 안에서 내세우니 문제가 되는 것이다.
법치(法治)만으로도 안 된다
법치주의와 덕치주의는 매우 고전적인 정치에 대한 쟁점인데, 민주주의는 법치주의를 선택하고 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법이란 것이 사회규범이나 조직의 유지를 위한 최소한의 기준은 될 수 있지만 평화로운 번영을 추구하는 기본가치로서는 미흡한 접이 있다.
‘법에는 눈물도 없느냐’고 하듯이, 성문법이든 판례법이든 간에 인간의 마음의 상태를 반영할 수 없어, 어떤 사안에 대한 상황요소의 고려가 충분히 될 수 없으니 인간세상이 유지되는 매우 중요한 요소인 정(情)이 배제되므로 인간성의 상실을 불러올 수 있기 때문이다.
인민민주주의(공산주의)가 독재와 전제 속에서 인간을 생산이나 기술의 노예로 만들어 당이나 개인에게 맹종하게 하여 결국 붕괴되기에 이르렀고, 자유민주주의(자본주의)가 물질의 풍요 속에서 인간성을 잃어가고 있어 변화를 요구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법치만으로는 인류의 꿈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으며, 특히 정이 많은 우리 민족의 경우 법치만으로 평화로운 번영을 이루기가 어려울 것이라는 것은 너무나 분명하다..
경쟁으로서는 평화를 달성할 수 없다
자기입장에서 나오는 논리의 대표적인 것이 경쟁 논리이다. 현재 우리는 세계화라고 하는 “무한경쟁”의 시대를 살고 있다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이다. 그래서 경쟁에서 이겨야 하고, 이기기 위해서는 개혁이 필요하다면서 정작 우리가 추구하는 개인의 인격이나 행복 등 삶의 질은 뒷전이고 오직 경쟁에만 내몰리고 있다. ‘무엇을 위해, 누구와, 언제까지 경쟁을 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채, 그냥 경쟁을 해야 하고 거기서 이겨야 한다고만 생각하고, 이기기 위해 끝없는 개혁과 구조조정을 해야 하는 것으로 강요되고 있는 것이다.
그 결과는 무엇인가? 뻔하다. 경쟁력이 있는 사람이나 조직만 이기고, 그들에게만 이익이 되는 것이다. 지는 다수의 이익은 고려되지 않는다. 경쟁논리 자체가 경쟁력을 가진 이들이, 그들의 입장에서 만든 것이기 때문에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자유경쟁을 처음(? 이 부분은 자신이 없지만) 주장했던 아담 스미스 당시의 영국은 산업혁명으로 경쟁에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처럼….
소위 금융위기라고 하는 냉혹한 경쟁의 현장을 겪은 우리나라의 경우를 봐도 경쟁의 결과 누구에게 이익이 되었는지 분명하다. 그 이후에도 우리는 뼈를 깎는 아픔을 견디고 있지만 우리나라에서 돈을 벌고, 대기업을 포함한 많은 알찬 기업들의 소유주가 되며, 주식시장에서도 돈을 남기는 사람들은 우리가 아니라 소위 경쟁력을 가졌다는 외국의 자본가들이다. 바로 그들이 경쟁을 부추기는 이론을 내놓은 사람들로서, 그들이 그 경쟁에 이겨 그런 부를 챙기는 것이다.
결코 세계화 시대의 “무한경쟁”이 모든 인류, 최소한 다수의 인류를 평화로운 번영으로 이끌어주지 못한다는 것은 이래서 더욱 분명하다. 오직 삶의 주체인 인간, 그들의 목표인 인간의 행복 등이 소수의 경쟁력 있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경쟁이라고 하는 망령에 희생되고, 다수 인류는 인간 이하의 생활로 몰려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한스 페터 마르틴과 하릴트 슈만은 “세계화의 덫”이라고 하여 경쟁력이 있는 20%의 사람만이 안정된 삶을 살 뿐 나머지 80%의 사람들은 그들의 부(富)에 빌붙어 살 수밖에 없어진다고 하였다. 그게 인류의 꿈이 아닌데도 소수 강자들의 논리에 휘둘리고 있는 셈이다. 우리만이라도 이런 논리에서 벗어날 수 있는 ‘우리의’ 논리 개발이 필요하다.
win-win만으로도 안 된다
최근 들어 서구를 비롯한 많은 학자들은 win-win이라고 하여 극한 경쟁이 아닌 상생(相生)의 논리로 ‘평화로운 공동번영’을 달성할 수 있다는 이론을 내놓아 많은 공감을 얻기도 하고, 실제로 현장에서 그런 사례가 보이는가 하면, 일부에서는 zero-sum 게임에서는 win-win이란 것이 있을 수 없으므로 허구일 뿐이라는 비판을 하기도 한다.
우리가 보기에 ‘win’이란 경쟁의 결과이며, 전체 인류가 이기는 것이 아니라 당사자들(결국은 소수임)만 이기는 것이므로 역시 인류사회 전체의 평화로운 번영을 가져올 수 없다고 보여진다. 이기고 지는 문제가 아니라 “자유와 평등을 누리면서 평화롭게 함께 번영”(all-win)하자는 것이 인류사회의 꿈인데, 소수만 이기는 경쟁의 논리 범주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극단적인 예를 들면, 요즘 우리 정치계의 현안인 선거자금의 문제도 결국 양측에 다 도움이 되었다면 win-win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우리나라 전체적으로는 심각한 사회문제로 등장하고 있음에서 그것이 all-win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꼭 누군가가 이기지(win) 않더라도 전체 국민, 또는 최소한 많은 사람들에게 이익이 되는(弘益), 그래서 사회전체의 부가가치가 최대화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 논리는 있을 수 없다고 미리 포기하는 사람에게는 나타나지 않겠지만, 희망을 가지고 집요하게 찾는 사람에게는 보일 가능성이라도 있을 것이다. 경쟁이라는 논리를 벗어나는 지혜가 필요하다.
남의 논리로 내 문제가 풀리지는 않아
현재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많은 논리와 가치기준들은 ‘우리’의 논리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우리가 배운 지식 그 자체가 이미 서구의 것이기 때문이다.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사람이 컬럼버스’가 아닌 것과 같다. 아메리카 대륙에는 이미 선주민들이 그들의 논리를 가지고 살고 있었는데, 컬럼버스에 의해 새로운 항로를 개척한 유럽인들이 그들의 논리로 그 대륙을 짓밟음으로써 새로운 사회가 형성된 것이다. 그 유럽인들에게는 신천지였을지 모르지만 선주민들에게는 죽음과 핍박이라는 최악의 상황을 맞은 것이다. 함께 살 수도 있었을 텐데….
문제는 우리가 우리의 정치문제를 푸는데는 이런 유럽인의 논리보다 인류가 이 지구에 태어난 500만 년 전부터의 경험이 축적된 ‘우리’의 논리가 있음을 알고, 그 논리를 찾는 것이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는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앞에서 지적했듯이 서구의 경쟁논리나 자유민주주의의 논리로는 결코 ‘우리’의 문제가 제대로 풀리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논리를 찾는 것이 시급하다.
그렇다고 그것이 ‘우리’만을 위한 논리여서는 세계화 시대에 맞지 않는다. 당연히 세계 인류 모두를 위한 논리여야 한다. 우리의 눈으로 인류전체를 보아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논리는 서구의 논리와 마주치면서 조정을 겪어야 할 것이다. ‘홍익’(弘益)이라는 우리 고유의 논리가 ‘all-win’이라는 인류의 논리로 인식되면 모두의 꿈이 실현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눈으로 우리와 세계를 볼 때, 그래서 “자기”를 넘어 “우리”를 먼저 생각할 때 우리 정치의 진정한 해결 실마리가 잡힐 것이다.
2. win-win을 넘어 all-win으로
1. 우리나라의 정치를 생각하며
사단법인 한배달에서는 ’86년 창립할 당시부터 “숭고한 홍익인간 이념의 실천”을 강령에 포함시키고 있다. 그리고 나는 이 “홍익인간” 사상을 우리 민족정신이라고 생각하고 강원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마침 우리나라의 정치가 심각한 지경에 이르자 본인이 1988년 국방대학원을 이수하면서 개인연구논문으로 미래지향적 정치이념으로 “홍익민주주의”를 채택하자고 주장한 바 있다.
요즘 우리의 정치가 복잡하게 얽히는 이유는 모든 정치적 행위의 근간이 되는 확고한 가치기준이 없이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자기에게 유리한 쪽으로 생각을 하는 것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것을 여러 가지 말로 표현할 수 있겠지만 나는 정치이념이라고 부르고 싶다. 정치행위를 결정하는 기준이 되는 가치이기 때문이다. 자유민주주의는 개인의 자유에 가장 무게를 둔다는 의미이고, 인민(사회)민주주의는 인민전체의 사회적 평등에 더 무게를 둔다는 의미인 것처럼. 그래서 복지 민주주의라는 단어가 생겨나기도 했지만, 어쨌든 이라크 파병문제나 정치자금의 문제나 결정을 하는 데 가장 무게를 두어야 할 가치가 확고하다면, 그리고 그 기준을 가지고 구체적인 정책방향을 결정한다면 대략적인 방향을 알 수 있으므로 기대와 희망이라도 가질 수 있다. 그런데 그런 기준이 없다보니 ‘개구리’처럼 어느 방향으로 튈지 알 수가 없고, 사람마다 자기의 이익을 중심으로 나름대로의 논리를 펴니 어느 쪽이 옳은지를 판단하기조차 어렵다. 모두가 잘못을 남의 탓으로 돌리는 홍보에만 매달리고, 그러니 우리에게 꿈과 희망을 주지 못해 모든 정당에 대한 지지도가 10%대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우리 민족에게는 “우리”라고 하는 독특한 용어사용에서 볼 수 있듯이 오랜 옛날부터 ‘나’나 ‘너’라는 개인보다는 ‘우리’라고 하는 전체를 중시하는 사상이 있었다. 인류의 오랜 꿈이 “다 함께 평화로운 번영”이라면, 바로 전체를 생각하는 이념인 우리의 민족정신과 연결이 된다. 그리고 20세기에 닥쳐온 자유민주주의와 사회민주주의의 한계를 뛰어넘는 미래의 이념을 찾지 못하고 있는 입장에서 보면, 그것은 게오르규의 말처럼 “21세기 인류의 꿈과 희망”이 될 수도 있다.
‘나’를 버리고 ‘우리’ 속에 들어갈 때, 우리나라의 정치문제는 물론 인류의 미래 문제까지도 해결할 수 있어질 것이다. 모든 것을 ‘너’와 ‘나’가 아니라 ‘우리’라는 기준으로 보자는 말이다. 정치자금도 제공자나 사용자만의 문제가 아니고 그 상대를 포함한 나라 전체의 문제로 접근해야 하며, 이라크 파병도 우리 군인들의 희생이나 전후 복구를 통한 국가이익만이 아니라 전체 인류사회의 평화와 연결지어 생각해야 한다. 노사의 문제도 노동자나 사용자만의 문제에 집착해서는 풀리지 않는다. 나라 전체, 인류전체의 경제문제와 연결시켜 답을 찾아야 한다. 경쟁력이나 권력․돈 등의 힘을 가진 소수나 이익이 되는 집단이라는 소수가 자기 중심적인 접근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해서는 사회적인 다수의 공감대를 얻기가 어려울 것이다. 전체의 이익, 즉 개인적인 win, 소수 중심적인 win-win을 넘어 전체의 이익(弘益)인 all-win을 추구할 때 슬기로운 해법도 나타나게 될 것이다.
이러한 홍익인간사상을 정치이념으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은 「계간 한배달」89년 여름호(제4호)에, 국대원 논문 요약하여, “홍익민주주의로 미래의 비젼을”(민족주체적 정치이념)이라는 제목으로 게재한 바 있으며, 그 이후 91년에 경기대학교 이창근(李根昌)교수의 「홍익국가론」, 93년에 미국 헌팅턴 대학 교수인 이홍범(李鴻範)교수의 「홍익민주주의」라는 책이 발간되어 나오면서 홍익민주주의가 21세기를 지배할 수 있는 이념으로 손색이 없다는 확신을 더욱 강하게 갖게 되었고, 그래서 계간 한배달에서는 92년 가을호(통권 17호)부터 “홍익민주주의 시론(試論)”이라고 하여 분야별 정책대안을 4년여 동안 연재했었다.
현실 정책에 반영하기에 충분하지는 못했더라도 자유와 평등, 자연과 인간, 민족(국가)과 민족(국가)간 ‘경쟁이나 투쟁보다는 조화(調和)를 통한 평화와 번영의 달성’이라는 크다란 방향 제시는 했다고 생각하며, 이것이 현재 우리나라의 어려운 정치문제를 해결할 수 있고, 미래 인류사회에서 주도권을 잡아 갈 수도 있는 가장 효율적인 대안이라고 생각되어 다시 요약하여 제시한다.
2. 홍익인간(弘益人間) 사상에 대한 바른 이해
가. 건국이념, 정교(政敎)의 최고 이념, 교육이념
‘홍익인간’이 국조(國祖) 단군의 건국이념으로서 민본․박애정신이라는 것은 대부분 알고 있다. 국어대사전이나 백과사전에서는 “①널리 인간을 이롭게 함 ②국조단군의 건국이념 ③단군이래 우리나라 政敎의 최고 이념으로서 8.15광복이후 이것을 우리의 교육이념으로 삼았다.”고 기술되어 있으며, 교육법 제1조(교육의 목적)에는 “교육은 홍익인간 이념 아래 모든 국민으로 하여금 인격을 완성하고 자주적 생활능력과 공민으로서 자질을 구유하게 하여 민주국가 발전에 봉사하며 인류 공영의 이상 실현에 기여하게 함을 목적으로 한다.”고 규정함으로써 현재 우리나라의 교육이념이 홍익인간임을 명확히 하고 있다.
건국이념과 관련, 김삼웅 교수는 단군설화를 다른 신화와 비교하여 몇 가지 특색을 지적했다. 천제인 한인의 아들 한웅이 땅에 내려와 단군을 탄생시키는 과정 등은 천상과 지상, 신과 인간, 인간과 동물, 남녀의 관계가 모두 평등한 우주적인 평등사상이며, 그 모든 과정에 구속이나 강제가 없는 것은 철저한 자유사상이고, 곰과 호랑이(一熊一虎)를 교화시키는 과정도 강제나 처벌, 보복이 없는 민주적 평화사상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단군이 임금이 되는 것도 부족민들의 합의에 의거했으니 아테네나 요즘 서구의 민주주의보다 훨씬 나은 자유․평등․평화의 사상이 넘친다는 것이다.
단군, 아니 그 이전부터 이렇게 장기간 우리의 민족사를 지배해온 민족이념, 겨레얼, 민족혼이라 할 수 있는 홍익인간 사상에 대해 우리는 과연 얼마나 자세히 알고 있는지 깊이 반성해야 할 것이다.
나. “홍익인간”의 뜻
누구나 홍익인간이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한다”는 의미라는 것은 알고 있다. 그러나 더 큰 의미가 있음은 잘 모르고 있다.
먼저 「홍(弘)」은 ‘크다, 넓다, 깊고 두텁다’의 의미로 공간적인 ‘널리’의 의미뿐 아니라 시간적으로 현재는 물론 미래에까지, 대상 면에서 나와 너를 대립되는 관계가 아니고 융화(조화), 협동하는 ‘하나’의 관계인 ‘우리’라고 하는 大我, 즉 내가 속해있는 조직 내지 이 세계의 동식물과 우주를 포함하는 환경 전체를 일컫는 말로서 한철학, 한사상, 한민족의 ‘한’과 같은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다음 「익(益)」은 ‘이롭다, 도움이 된다’는 뜻인데 물질적인 번영은 물론 정신적인 풍요와 마음의 평화를 모두 포괄하는 말이다. 이는 인류의 이상으로서 민주주의가 추구하는 ‘평화속의 번영’ ‘행복’을 의미하며, 이것을 달성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이 益인 것이다. 따라서 홍익(弘益)은 ‘나의 이익’(私益)이나 ‘너의 이익’(公益)에만 치우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이익’으로서 시간적으로 먼 훗날까지 利己와 利他 어느 쪽에도 기울어지지 않는 ‘조화로운 最適의 상태’를 의미한다.
끝으로 「人間」은 나, 너, 우리 민족뿐이 아니고 세계 인류전체를 지칭하고, 육체는 물론 얼과 넋(정신과 마음),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있는 자연 모두를 포함한다. 여기서 ‘弘’의 범위를 인간으로 제한한다면 ‘한사상’의 인류에의 적용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결론적으로 「홍익인간」이란 말은 간단히는 “인류공영(共榮)”, 자세히는 “세계의 모든 인류가 개인과 민족의 특징을 유지하면서 ‘우리’라는 하나로 조화(調和)되어 더불어 더 행복하게 잘 살자”는 의미로서, 요즘 말로 하면 win-win의 단계를 뛰어넘은 all-win을 뜻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조직(세계)을 구성하는 모든 개체(개인, 국가, 민족)의 개성을 인정하고, 획일이나 통일이 아닌 조화(즉, 妙合 또는 圓融이라고도 함)를 추구해야 하며, 현 시점뿐만 아니라 먼 훗날까지를 생각해야 한다. 우리나라는 작지만, 그 정신은 이렇게 크고 멋지다.
다. 홍익인간의 가치관
조화(調和)룰 위해 생활윤리로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개체간의 평등과 자유 개념의 정확한 이해와 실천이다. 즉, 1불 짜리 나사 하나와 10만 불 짜리 컴퓨터 장치가 우주선을 뜨거나 못 뜨게 하는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는 같고, 거지와 대통령이 다같이 사회 속에서의 자기역할(존재가치)을 가지고 있다는 데서 평등(역할의 기회 평등)이므로 아무리 작고 하찮은 것 같아도 무시하지 않고 인정하며, 자기역할 범위 내에서 수행방법은 자율적으로 결정(역할범위 안에서의 자유)하지만, 누구 한 사람이 자기 역할을 다하지 못하면 조직(큰 하나, 우리)의 기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게 되므로, 모든 구성원이 최선을 다해 현재 자기에게 주어진 역할을 잘 완수함은 물론, (역할간의 조화를 통해)조직번영 내지 사회적 부가가치를 최대화하기 위해 투쟁이나 경쟁보다는 공존공영(共存共榮)하려는 ‘협동’(協同), 조화(調和)를 달성하기 위해 자신에게 최선(最善)이 아닌 최적(最適)에 만족하는 ‘양보’를 실천해야 한다.
홍익인간에서의 정치관은 인류사회의 오랜 정치형태인 덕치주의(德治主義)나 법치주의(法治主義)의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고 보다 높은 차원에서 조화시키는 이치주의(理治主義)다. 덕치를 위주로 하면 자연과 사회규범이 문제가 되고, 법치를 주로 하면 인간적 심성이 문제가 되는 모순이 있으므로, 이 둘을 잘 조화시켜 대립과 분열을 없애고 평화, 평등, 화합을 이루려는 것이다. 자유민주주의(자본주의)가 물질의 풍요 속에서 인간성을 잃어가고, 인민민주주의(공산주의)가 독재와 전제 속에서 인간을 생산이나 기술의 노예로 만들어 당과 개인에게 맹종하게 하여 결국 붕괴되기에 이르렀으니 대안은 바로 우주의 이치(理致)에 따라 그 둘을 조화시키는 이치(理治)주의인 홍익인간 이념밖에 없는 것이다.
경제적으로는 자본이나 자산을 포함한 부(富)의 소유나 관리를 개인(자본주의)이나 개인이 배제된 당조직(공산주의)에서 일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이 가진 것(자본, 노동력, 기술 등)의 역할간 조화를 통해, 개인이 다소 손해를 보는 것 같아도 전체의 이익을 통해 돌아오는 개인의 이익을 생각하는 조화의 섭리가 강조된다. 즉, 자본가와 노동자, 기술자와 관리자, 농민과 상인, 소비자와 생산자 등이 눈앞의 자기이익에만 집착하지 말고 상호 의존적인 서로의 역할과 존재를 인정하고 서로 협동해야 한다는 것이다.
문화관(文化觀)은 개인의 소질과 개성을 최대한 발전시키되 다른 개체(사람, 민족, 국가)의 소질과 문화적 특성도 인정하여 서로 조화를 이룰 때 세상은 문화적으로 매우 풍요로워질 수 있다는 데서 출발한다. 하나의 기준을 세워서 ‘어떤 문화가 가장 우수하다’고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개성을 인정하고 이것이 조화된 전체, 즉 통합문화를 중시하는 것이다. 가장 한국적인 작품이 국제영화제에서 입상하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라. 홍익인간 사상의 역사적 전개
이런 오래된 사상이 살아남으려면 우리의 역사 속에서 지속적으로 이러한 사상이 실천적으로 전개되었어야 하는데, 우리 역사에서는 이를 충분히 조명하지 못함으로써 많은 국민들이 이를 잘 모르고 있다. 몇 가지만을 예로 든다.
단군은 물론 삼한시대와 부여, 삼국의 초기와 고려 태조까지의 왕은 부족장회의에서 추대(선출)했고, 고구려의 모본왕, 봉상왕 등 3명의 왕이 덕이 없다고 국민들에 의해 교체됐으며(反正思想), 장로회의에서 비밀투표로 국상(國相) 선출(백제), 서경(署經)제도, 왕의 권한을 ‘재상을 임명하고 재상과 국사를 협의’하는 선으로 제한(조선왕조) 등의 왕권 견제 제도가 있었기 때문에 우리나라 왕은 서양의 King이나 중국의 황제와 같은 전제군주가 될 수 없었다.
소도(蘇塗)에 들어온 죄인은 처벌하지 못하게 하거나, 사형수에 대한 삼복심(三覆審)과 석방, 족장 선출에 모든 사람 참여, 화랑을 반관반민(半官半民)으로 운용 등 인권과 자유․평등을 실현하는 제도가 많이 있었으나 유교가 들어와 관 중심으로 관료제도가 바뀐 고려 중기 이후 점차 퇴색되었는데, 그 후에도 민중반란이 일어나는 등 백성들의 민주의식에는 변함이 없었다.
이외에도 두레나 마을 등 촌락단위의 자치협동제도와 다양했던 언로, 붕당정치 등 우리의 민주주의가 서구 민주주의에 못지 않게 발달되었었는데 이는 전통적인 홍익인간 사상이 뒷받침된 때문으로 시대에 따라 승랑(僧朗)의 2체합명론, 원효의 십문화쟁론, 고려 최승로의 왕권의 전제화 반대, 김시습․조광조․정약용의 탕론(湯論, 군주선출론), 허균의 호민론(합의제정치 주장), 실학과 동학사상, 삼균사상 등으로 약간씩 다르게 표현되긴 했으나 우리 나름의 민주사상이 줄기차게 이어져 왔다.
따라서 민주주의가 서구의 산물인 것처럼 생각하는 데서 탈피하여 오래 전부터 실제로 적용되어 온 우리 본래의 민주주의에도 눈을 돌려 애정을 담고 쳐다보면 보이게 되고, 지금까지 버려둔 데 대한 반성도 하게 된다.
3. 홍익민주주의 실천
우리 민족이 옛부터 현묘지도(玄妙之道)라고 한 그 ‘묘(妙)함’은 단순한 논리로서 이해하기 어렵다는 말이다. 현재의 나와 너의 이익만도 아니고, 과거와 연관되고 먼 훗날에도 도움이 되며, 인류뿐만 아니라 삼라만상을 고려해야 하고, 항상 통하는 고정적인 해답이 아니라 상황의 변화에 따라 적응을 달리하되 자연(우주)의 이치(섭리)에 맞추어야 하는 것이므로 말이나 글로써 전달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조상들은 일방적으로 주입시키지 않고 풍류도(風流道)라고 하여 산천을 유람하면서 그것으로부터 각자가 나름대로 느끼고 깨치도록 하는 방법을 사용했던 것이다. 우리의 선(仙)수련에도 원칙만 있을 뿐 중국의 도교나 기공(氣功), 서양의 명상처럼 자세한 방법에 대한 기록이 부족한 것도 ‘자기 혼자만’ 하려는 이유에서가 아니라 이런 개인별 느낌의 차이 때문에 오도(誤導)될 수 있음을 경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홍익민주주의도 원칙 외에 구체적인 현실 대안을 제시하기는 어렵다. 나라별, 민족별, 시기별로 모두 처해 있는 상황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배달에서는 4년여에 걸쳐 게재한 ‘홍익민주주의 시론’을 통해 분야별로 여러 사람들의 다양한 주장을 게재한 바 있으며, 이창근 교수는 ‘통일조국의 지도이념 모색’ 차원에서, 이홍범 교수는 새 시대를 주도할 제3의 이념으로서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국가민주주의의 차원을 초월한 인류의 인류에 의한 인류를 위한 세계민주주의를 달성’하기 위한 대안들을 제시했다. 그 분야별 원칙론만 간단히 요약한다.
먼저 사회․윤리적으로는 나의 이익만 챙기고 남의 잘못을 비판하는 이기적이고 경쟁․투쟁적인 자세를 바로잡아야 한다. 현재의 무한경쟁이라는 개념 자체를 뛰어넘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모든 사람들이 스스로 자기 인격을 수양하는 과정을 통해서만 가능하며, 협력과 양보, 적선 등의 생활가치를 실천하는 과정을 통해 달성된다. 물론 그 방법은 나라별 시대별로 다를 것이다.
정치적으로는 정권을 잡기 위한 술수가 아닌 진정한 정책대결을 바탕으로 하여, 상황에 따라 대안은 달라질 수 있으나 기본방향은 전체이익․사회적 부가가치의 극대화에 두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각자가 서로의 역할을 인정하고 그 역할들을 잘 어울러서 전체의 이익에 기여하게 하는 조화의 큰 정치를 해야한다. 외교적으로는 분쟁이나 협력 문제의 중심에 전 인류의 평화로운 번영이라는 가치가 있어야 한다. 거기에서는 강대국이나 약소국이나 동등한 입장에서, 자국이익 중심이 아닌 전체를 위한 역할분담을 통한 조화라고 하는 평화의 개념, 갈등해결의 논리가 적용되어야 한다.
경제적으로는 경쟁력에 바탕을 두는 대기업화보다는 분야별 중소기업들의 역할을 하나의 시스템으로 잘 엮어 큰 기능(이것이 대기업의 기능일 수 있음)을 수행하게 하고, 경쟁업체와의 경합보다는 역할분담으로 공생공영하는 방법을 상황에 맞게 구상해야 한다. 개인이든 기업이든 자기의 이익과 경쟁에서의 승리만을 추구하면 결국에는 자기도 망하게 됨을 알아야 한다.
문화적으로는 세계적인 유행도 있고 공통문화도 있을 수 있으나, 각 국가와 민족은 물론 한 나라 안에서도 각 지방별 특성 있는 문화를 개발하고 발전시켜 다양성의 조화를 통해 전 인류의 정신적 풍요에 기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문화단체나 정부가 해야 할 일이다. 차별화, 그리고 각각 특징이 있는 그것들의 조화를 추구하는 자세가 필요한 것이다.
교육적으로는 새로운 시대에 필요한 지식(新知識)은 단순한 정보나 학식 차원의 지식이 아닌 지혜(智慧) 차원의 독창적인 지식이다. 그리고 지식의 함양은 개인별로, 수시로 하는 학습사회가 되므로, 학교에서는 학식의 전달이 아니라 각자의 소질을 찾고 사명감과 창의력을 고취하는 역할과 학습의 방법을 가르쳐주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한다. 그리고 사회의 발전에 따라 요구되는 새로운 지식과 기능 함양을 위해 다양한 사회교육 기회를 개발하여 운영하여야 한다. 물론 이러한 이념 자체의 사회적인 전파를 위한 교육과정, 특히 지도자들에 대한 교육과정의 마련은 시급하다고 할 수 있다. 바로 어른 학교와 같은 형태가 될 것이다.
이 정도의 추상적인 원칙도 매우 어렵다. 그러나 각각의 구체안의 도출도 이런 원칙 아래서 구상한다면 어렵고 복잡하기는 하지만 가는 방향은 한 곳으로 모아질 수 있을 것이다. 때로는 현실적으로 실천이 어려운 이상적인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간 우리를 지배해왔던 기존의 서구식 과학적 사고(기계론적이고 이원적인)라는 틀만 벗어난다면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일을 지도하고 담당할 사람들은 항상 나의 이익보다 홍익을 먼저 생각할 수 있는 자질을 갖춘 사람들, 즉 ‘어른’(眞人, 仙人)이어야 하는데, 이런 사람을 양성하는 방법이 우리 역사에서는 현묘지도, 풍류도 또는 선도(仙道)라는 이름으로 존재했었다. 물론 다른 민족들에도 그런 독특한 사상과 방법이 있을 것이다. 요가, 기공, 명상 등이 모두 그런 류(類)에 속한다. 그러나 우리의 방법이 다른 나라의 그것에 비해 ‘나’보다 ‘우리’를 더 강하게 내세우고 있다는 점에서 전 인류사회의 이념으로서의 가능성도 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4. 마치면서
지금까지 현재 우리나라 정치문제에서 출발하여 세계인류의 미래를 열어갈 이념으로서 홍익민주주의를 간단히 소개했지만, 홍익인간 사상에 바탕한 이념을 ‘민주주의’라고 한 것은 정확하지 않는 표현일 수 있다. 모두가 같은 위치(평등)에 있어야 되므로 오히려 누군가가 주인(主人)이어서는 홍익이 안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주인이라면 전체라는 것 자체가 될 수 있을 정도다. 그러나 민주주의라는 것이 지금까지 인간이 발견해낸 제도 중 가장 바람직한 것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현재 세계에서 가장 보편적으로 시행되고 있고, 그냥 “홍익주의”라고 할 경우 현실정치적인 냄새보다 철학적인 의미가 강하며, 홍익인간이란 말 자체에 인간본위 또는 민본적인 성격이 강하므로 ‘민주주의’라는 단어를 붙였다. 정치이념이기 때문이기도 한데, 일반이념으로서는 그냥 홍익주의나 홍익인간 이념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이런 이념이 아직 보편화되지 못하였지만,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국내적으로는 정치자금 문제도 매듭을 지어야 하고, 내년에는 국회의원들을 다시 뽑아야 하며, 국제적으로는 이라크 파병문제와 북한 난민이나 해외동포들의 문제도 결정을 해야 한다.
이런 시점에서 맞는 연말과 연시, 불가능하다고 포기하는 사람에게는 영원히 이루어질 수 없지만 가능하다고 생각하고 노력하는 사람에게는 이루어질 수 있는 가능성은 열려 있다는 생각으로 우리나라 우리민족이 가질 수 있는 나름대로의 희망과 비젼으로 홍익민주주의, all-win전략의 이념을 제시했다.
모든 현안문제의 해법을 이런 기준으로 찾아보자. 거기에 나나 우리 학교나 우리 지역은 없다. 오직 전체가 있을 뿐이다. ‘나’를 희생하여 ‘우리’를 살리고자 하면 나도 살 수 있다. 그러나 내가 살아야 한다는 전제에서 우리를 생각하면 결국은 공영(共榮)이 아니라 공멸(共滅)만 있을 뿐이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가진 자들이 영향력을 행사하는 미국의 경쟁논리, 그리고 거기에 바탕한 이라크 전쟁도 타당성을 크게 잃는다. 그들에게 평화운동 논리를 미국을 위한 것이 아니라 전체 인류를 위한 차원으로 승화시킬 것을 끈질기게 설득해야 한다. 경쟁이 아닌 조화를 추구하는 이론과 방법도 제시해야 한다.
가능하다는 희망을 가지고 모두가 노력한다면 언젠가는, 어느 만큼이라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현재의 우리나라 정당들도 제발 자기들 잘못은 덮어두던가 거론하지 않고 상대의 허물만 잡고 떠들어대는 작태를 그만두었으면 한다. 어느 당이라도 먼저, 우리 것부터 조사하여 잘못을 밝히면, 엄청난 국민들의 지지를 받을 것이다. 잘못된 옛 관행은 인정은 하되 계속되도록 방치해서는 안 된다. ‘나’보다 ‘우리’를 생각하자.
3. 화백형 갈등해결 프로그램을 찾자
인류사회의 "평화로운 공동번영" 이것은 영원한 이상으로만 남을 것인가? 갈등이라는 인류사회의 원초적인 문제가 가지고 태어난 이기심을 바탕으로 한 경쟁과 투쟁이라는 것을 멈출 수가 없는 것인가?
그러나 확실한 꿈을 가지고, 어우름의 원리를 알고, 평화를 깨는 근본 원인이 되는 “갈등”을 해결할 수 있는 효율적인 방안을 찾아낸다면 반드시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영원히 이루지 못하겠지만, 가능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노력한다면 언젠가는, 반드시, 하다 못해, 비슷한 수준으로라도 이룩할 수 있을 것이다.
갈등(葛藤)은 양립 불가능한 것으로 보이는 이해관계나 목표가 상충되고 있는 상태로 이해되며, 개인․그룹․조직․공동체․국가 사이에서 가치․필요․이해․의도를 둘러싼 강한 불일치와 충돌로 종종 정의된다. 갈등은 기본필요가 충족되지 않거나 개인이나 그룹이 다른 개인이나 그룹이 어떤 목적을 달성하는 것을 간섭하거나 방해할 때 발생한다. 갈등은 종종 자원과 권력의 분배와 사용을 둘러싼 갈등을 내포한다.
사람들이 ‘적대자’를 자신에게 복종시키도록 승리하거나 강제하기 위해 경쟁할 때, 갈등은 종종 강화 혹은 약화되며, 갈등 가운데 있는 사람들은 표면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갈등 상황에 대한 감정을 심각하게 느끼게 된다. 여러 연구 결과를 보면 사람들이 가치와 문화의 차이를 참아 내거나 더불어 살지 못할 때 갈등은 보다 빈번하게 된다.
이런 갈등이 발생되면 이를 해결하기 위해 전쟁, 테러, 범죄 등의 폭력적 방법을 쓰거나, 소송 등을 통한 명령/강제집행, 집단행동을 통한 압력이나 억암 등 강제적(일방적 문제해결)인 방법, 당사자간 협상, 합의 만들기, 전문중재인의 중재, 시민참여 정책결정 등의 자발적(협동적 문제해결)인 방법을 동원하기도 했다.
평화교육으로 추진중인 갈등해결 프로그램
최근 들어 세계적인 평화교육의 일환으로 갈등을 현실로 인정하고 이를 정면에서 해결하기 위한 ‘갈등해결 프로그램’(자발적 문제해결 방법을 보다 체계화한 것)이 확산되고 있다.
폭력 이외에는 어떠한 갈등해결 방법도 알지 못한 채 성장하는 아프가니스탄, 팔레스타인, 우간다 지역에서는 10여 년 전부터 어린이들을 위한 평화교육의 정규과목으로 운영되고 있고, 미국 버지니아주 레이크 브래드독 고등학교에서는 또래중재프로그램이 9년째 정규 수업시간으로 인정받아 을 시행하고 있으며, 구 소련 연방의 일원이었던 벨라루스에서도 아이들이 서로 협력하고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치기 시작했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1999년 9월. 당시 미국친우봉사회(AFSC) 후원아래 여러 여성단체들이 “갈등해결과 관용” 워크숖을 열면서 시작되어, 2000년에는 갈등해결 전문가프로그램을 운영하면서 독일통일과 갈등해소, 갈등해결방법론, 젠더와 갈등해결 등의 과목으로 다양한 영역과 방법에 대한 훈련과정을 거쳐 지난 2001년 7월 첫 지도자를 배출했고, 서울시 교육연수원에서 02년 5월 시작된 교장․교감 승진대상자 연수과정에 8시간 짜리 갈등해결 프로그램을 신설하는 등 아직 초기 단계이지만 많은 공감을 얻어가고 있다.
이처럼 갈등해결 프로그램은 학교내의 학생과 학생, 학생과 교사를 비롯하여 남성과 여성, 나라와 나라, 민족과 민족, 민족내의 통일 등 많은 분야에서 적용하고 있는데, 기본적으로 갈등해결 프로그램은상대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갈등이 노출된 상황만이 아니라 그 이면에 숨겨진 원인을 끄집어내 서로 드러냄으로써 일방적인 판단이 아니라 이해 당사자간에 자율적인 합의를 만들어 가는 과정으로서, ‘타인과 타문화에 대한 배려와 존중, 자기가 속한 사회에서 함께 살고 있는 소수자의 문화를 이해하고 존중하는 것’을 기본원리로 한다.
갈등이 일어났을 때 지금까지는 경쟁-대립형, 절충-타협형, 회피-보류형, 순응-양보형의 해결방법으로서는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나게 되는데, 성․인종․문화의 차이를 이해하고 보면 누구나 옳을 수 있다고 인정하게 되는 철학적인 사고를 기반으로 갈등이 해결되고 나면 이해당사자 모두가 이긴 결과가 될 수 있도록 갈등의 순기능을 강화한 새로운 ‘협동적 문제해결형’이 나온 것이다.
속담을 통해 본 우리의 전통적인 갈등대응방식
우리 겨레도 오랜 옛적부터 갈등해결의 방법을 가지고 있었음이 속담에 잘 나타나 있다. 일방적으로 피해를 감수하는 유형도 있지만, 함께 문제를 해결하는 유형에 속담이 많음을 볼 수 있다.
▲회피 보류형
- 가루는 칠수록 고와지고 말은 할수록 거칠어진다.
- 달걀로 성치기, 계란으로 바위치기
- 똥이 무서워서 피하나 더러워서 피하지
-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진다
▲경쟁대립형
- 가는 방망이 오는 홍두깨
- 나도 덩더쿵 너도 덩더쿵
-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
▲순응 양보형
- 여럿이 가는 데 섞이면 병든 다리도 끌려간다.
- 친구 따라 강남 간다.
▲타협절충형
- 원님과 급창이가 흥정을 하여도 에누리가 있다.
▲협동적 문제해결
-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
- 동냥자루도 마주 벌려야 들어간다.
- 구슬이 서 말이어도 꿰어야 보배
- 말만 잘하면 천냥 빚 갚는다.
- 외손뼉이 못 울고 한 다리로 가지 못한다.
- 은행나무도 마주서야 연다.
- 징과 북이 맞아야 한다.
- 백짓장도 맞들면 낫다.
화백형 갈등해결 프로그램
이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경우 오랜 옛날부터 영고․동맹․무천이라는 제천행사를 통해 한 사람의 반대의견도 없는 전수결의 과정으로 결론을 맺는 ‘화백제도’를 실천함으로써 갈등을 해결했던 역사가 있다.
대동제에 모인 지도자들이 자기의 마음 속을 솔직하게 다 털어놓고, 상대의 솔직한 마음을 듣고 인정을 하면서 자기 중심의 입장을 수정해 가는 과정이었던 것이다. 이런 과정을 잘 운영한다면 전수결도 이끌어낼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새로 도입된 미국형 갈등해결 프로그램에 만족하지 말고 ‘화백제도’를 연구하여 우리 문화에 맞는 갈등해결 프로그램으로 재창조한다면 세계의 평화적인 공동번영에 기여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전문지도자 과정을 수료한 사람들의 여성을 비롯한 사회적 약자들이 의사표현을 할 수 있는 통로가 생기고 합의에 도달하는 메커니즘이 형성되면 갈등이 창조적이고 건설적으로 해결된다.“자율적인 협상과 조정을 지원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가 강화되어야 한다.”는 의견을 참고하여 일정한 메카니즘과 제도적인 장치도 마련되어야 할 것 같다.
4. 정치인은 리이더가 아니라 ‘어른’이 되어야
우리나라에 지방자치단체의 의원을 포함하여 사회지도층이라고 할만한 정치인은 매우 많다. 그런데도 근래 들어 우리나라에는 어른이 없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대통령도, 선생님도, 회장도 지도자이면서 공경을 받지 못한다. 우리나라는 예부터 동방예의지국으로서 어른을 공경해왔는데, 지금 세상에는 지도자는 있지만 공경 받을 만한 어른은 없다는 말이 된다.
어른이 지도자를 의미하긴 하지만, 그 어감상 상당히 다른, 어떤 문화적인 차이가 있음을 뜻한다. 지도자를 영어에서는 leader․king․emperor, 한자어로는 황제․군주․왕 등으로 표현하는데, 그 말에는 주어진 지위로 이끌어 간다 또는 법에 의해 주어진 권력으로 다스린다는 의미를 강하게 담고 있다. 그러나 지도자로서의 어른이란 말 속에는 그 보다 훨씬 깊은 지도자의 길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어른이란 말은 어우른다는 말에서 왔다.
따라서 남녀가 어우러져서 한 가정을 이루니 결혼을 하면 어우른 이로서의 어른이 되고, 나이가 들면 집안에서부터 의견이 다른 여러 사람, 여러 가지 입장과 주장을 어우르게 되니 어른이 되며, 직책이 높아져 지도자가 되면 내부의 여러 요소와 성향이 다른 부하들을 잘 조화시켜 조직을 활발하게 움직이도록 어우르므로 어른이 되는 것이다.
서구나 중국의 리-더는 직책을 바탕으로 법적으로 주어진 권력을 행사’하여 조직을 이끌어가지만, 우리나라의 어른은 나를 중심으로 이끌어 가는 것이 아니라 이해관계가 얽힌 여러 사람들을 잘 아울러, “모두가 자발적으로 조직활성화에 참여하도록 만드는 역할”을 수행하는 사람이다.
즉, 지도자로서의 어른은 권한행사보다는 솔선수범을 바탕으로 구성원들을 어울러야 하니, 이렇게 어른이란 말 하나에서도 서구나 중국과 우리의 문화의식의 엄청난 차이를 엿볼 수 있다. 바로 여기서 우리 문화의 너무나 숭고한 향내를 맡을 수 있다.
따라서 어른은 어우르기를 잘 해야하고, 따라서 아무리 나이가 많고, 지위가 높아도 ‘어른 노릇’인 이 ‘어우르기’ 제대로 못하면 어른대접을 받지 못할 수도 있는 것이다.
어른 노릇의 핵심인 어우르기란 어떤 것인가? 한자말로 조화(調和) 내지 화합시키기다. 혼자가 아니고 둘 이상의 다른 요소가 만나면 반드시 갈등이 생기고, 이를 어우르기 위해서는 그런 갈등을 해결해야 한다.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 자라면서, 가정과 학교, 사회에서 자기의 역할로서 다른 사람들과의 어우르기를 경험하다가, 적정 나이가 되면 남자와 여자가 어우러져 부부가 됨으로써 전혀 이질적인 사람들끼리의 어우름인 가정을 형성한다. 가장 밀접한 어우름의 실천인 이 결혼도 둘만의 문제가 아니라, 양쪽의 부모, 형제, 친인척, 친구들의 관계가 다 넓어지므로 실행해야할 어우름의 책임도 그만큼 많아진다. 그래서 과거에는 결혼하는 것을 어른이 된다고도 했었다.
이후 나이가 들어가고, 사회생활에서 직위가 높아지면서 각자에게 점점 큰 어우르는 역할이 주어진다. 가장으로서도 자식과 며느리와 사위, 손자가 생기고, 직장에서의 지위도 높아지는데, 이때 각자에게 주어지는 사회적인 어우름의 크기는 자신이 가지고 태어난 그릇의 크기(전생에서의 삶의 성과와 연결시키는 의견도 있음)와 살아오면서 행한 어우르기의 실적에 따라 한 가정, 가문, 학교, 지자체, 나라, 또는 더 큰 조직에서의 어우르기 책임이 알맞게 주어진다. 자기 그릇 이상의 지위를 탐내면 결국에는 어우르기를 잘못해 조직과 명예에 흠집을 내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나이가 많아지거나 지위가 올라가는 것’은 더 크고 어려운 어우름을 달성해야 하는 책임 부여를 의미하며, 하느님의 천명으로 주어지는 이런 어우름을 숙연하게 받아들여 잘 수행했을 때, 즉 어른 노릇을 제대로 했을 때 공경을 받게 되는 것이다. 단군고사에 나오는 환웅과 단군도 바로 그런 어른들이다.
대통령이나 선생님, 회장님, 의원님들도 각자에게 주어진 어우름의 역할은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면서 지위만 누리려 하거나 법과 권위로만 다스리려고 한다면, 그것은 서구적인 leader나 King, 또는 성리학적인 제왕(帝王)적 논리이므로, 어른 문화를 가진 우리 사회에서는 제대로 대우를 받지 못하게 된다.
이런 어른 문화는 오랜 기간 연맹국가를 운영한 경험의 소산일 수 있다. 서양에서는 성읍 국가에서 바로 중앙집권국가로 발전했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고조선은 물론 신라․고구려․백제의 중기까지 연맹국가의 형태로 있었기 때문에, 절대왕권보다는 연맹국 간의 화합이 중요한 지도력이었고,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방편으로 화백제도도 탄생했던 것이다.
그런데 현대에 들어와서 이런 문화의 필요성은 오히려 서구에서 먼저 요구되고 있음은 EU나 NAFTA와 같은 지역연맹체의 형성에서 찾을 수 있다. 따라서 과거 고대국가에서 늦게 중앙집권화 되었다고 발전이 늦은 것으로 평가하는 서구식 인식도 바뀌어야 할 것이다.
우리 겨레의 어른 내지 어우름의 문화는 이렇게 심오하다. 생활공동체의 구성원들을 큰 하나로 조화시키기 위해 나이나 지위로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먼저 솔선수범하여 조직의 화합에 참여하고, 구성원들에게 스스로 자기역할의 완수를 통해 조직의 활성화에 참여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지도자로서의 어른이란 말 속에는 이렇게 깊은 지도자의 길이 들어있다. 우리의 ‘어른’ 문화를 현재의 정치사회에서 다시 살려내는 것이 우리나라 정치발전을 위해 매우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어른 학교”라도 만들어 ‘어른’ 정치인들을 양성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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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弘益人間 弘 넓을 홍이 아닌 클 홍
지금 현재 사전이 잘못 표기 되어네요
강희 대자전 참조
홍익인간 이념 위주로
큰사람이 약한 사람 도우며 재산이 많은 사람이 가난한 사람에게
학문이 깊은 사람이 앝은 사람에게 알려 주면서 내 혼자만이 아닌
여러분 하고 같이 더불어 사는 사회 이지요
학문이 깊은사람이 앝은 사람에게 도움을
내 특기나 내 재능 가지고 나 보다 못 한사람 에게 도움 주는
그래서 더불어 사는 사회 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