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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 스크랩 제목:강도 바라바에게 찾아온 기회(요18:38~40절)
sk 추천 0 조회 123 10.01.31 17:21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제목:강도 바라바에게 찾아온 기회(요18:38~40절)

 서울 주님의 교회 이재철 목사님이 1997년 3월29일 서울 구치소 강당에서 부활절 축하 기념예배를 드렸는데 예배가 끝난 뒤 이미 사형 확정을 받아 집행할 날만 기다리고 있는 사형수 8명의 특송이 있었답니다.

 “세상에서 방황할 때 나 주님을 몰랐네 내 맘대로 고집하며 온갖 죄를 저질렀네...”

 특송을 마친 후 원언식씨가 잠시 마이크 앞에 섰습니다. 원언식씨는 원주에서 한 직장에만 20년을 다닐 정도로 착실했던 그는,어느 날 아내가‘여호와의 증인’에 빠져 가정을 팽개치기 시작하면서부터 심각한 가정불화를 겪게 되었습니다. 1992년 10월 4일 홧김에 술을 잔뜩 먹고 ‘여호와의 증인 회관’에 나가있는 아내와, 아내를 불러내는 사람들을 혼내주기 위해 석유통을 들고 회관을 찾아가, 입구에 석유를 뿌리고는 불을 질렀다는 것입니다. 불길은 삽시간에 집회장 안으로 번져갔고, 그 방화로 인하여 따로 비상구가 없는 실내에 있던 사람중 무려 15명이나 되는 사람이 그 자리에서 불에 타죽은 것입니다.

 마이크 앞에선 원씨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눈물을 훔친 뒤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 직장 상사 내외분이 제게 전도하기 위해 목사님과 함께 저희 집으로 심방을 왔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날 나는 일부러 술집에 앉았다가 밤 12시가 너머서야 귀가했습니다. 만약 그날 내가 예수님을 영접했더라면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따르십시오. 예수님 아니면 여러분들도 저처럼 붉은 명찰을 달게 될 것입니다”

 원씨는 우리나라가 1997년 12월 이후 사형집행이 정지된 상태에 있기 때문에 93년 11월 사형확정 판결을 받은 후 17년째 감옥에 있으면서 예수를 영접하고 죄를 참회하고 새로운 삶을 살고 있다고 합니다.

 1996년 우리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막가파 사건의 주범 최정수도 사형수 신분으로 13년째 복역 중에 있는데 역시 예수를 영접하고, 현재는 참회하면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현재 우리나라에 사형언도를 받고 복역 중에 있는 사람은 총 58명(2008년 10월 법무부 자료)   2005년 6월 21명을 살해한 유영철/2006년 13명 연쇄살인범 정남규/부산,경남의 철강회사 회장 부부 등 9명을 살해한 정두영/1992년 15명을 사망케 한 원언식/1996년 막가파 최정수/1999년 영웅파 이순철/1994년 부모를 살한 박한상/1995년 황금장 여관 모녀 살인사건의 성낙주/2000년 고창 연쇄살인의 김해선/2002년 4월 용인 일대에서 6명을 살해한 허재필/2000년 2명을 살해한 중국인 왕리웨이/2007년 혜진,예슬의 살해범 정성현/연쇄살인마 강호순

 성경은 절대로 사람의 생명을 해치지 말라고 했습니다.(출20:13)하나님은 십계명에서“살인하지 말라”고 했습니다.여러분,살인은 남을 죽이는 것만이 아니고 자살도 살인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왜냐, 사람의 생명이라는 것이 내 자신이 맘대로 할 수 있는 소유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예수 믿는 사람들은(고전6:19-20)말씀대로“너희몸은 너희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받은 몸이다.예수님의 십자가 피에 의하여 값을 주고 사왔다.그러니 너희 몸을 맘대로 하지 말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살인이나 자살은 하나님을 향한 반역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가 사람을 미워하면 그것도 이미 살인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일3:15).   그러므로 여러분,여러분은 절대로 자살도 하지 말고,남을 죽이지도, 다른 사람을 미워하지도 말기를 바랍니다. 왜냐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 이유는, 자살이나 살인, 남을 미워하면 틀림없이 지옥에 가기 때문입니다(계21:8,계22:15).둘째 이유는,“미운 놈 떡 하나 더 준다”고 그냥 축복을 빌어주면 그게 그 사람을 더 괴롭히는 것이고 내 자신이 도리어 축복을 갑절로 받는 일이기 때문입니다(롬12:14시109:17,시35:13,욥42:10:).   

 한번뿐인 인생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귀하게 살아야 하겠습니다.

(2)예수님 때문에 자유의 몸이 된 바라바

 (루크 스카이워커)“바라바”라는 책에 보면,강도 바라바는 사형선고를 받고 지하 감옥에서 복역하다가 뜻하지 않게 예수님 대신 석방되고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되었습니다.감옥에서 석방된 바라바는 감옥에서 나와 보니 수많은 사람들 틈에 끼어 십자가를 메고 가는 예수님을 따라갑니다.그러나 바라바는 예수님 때문에 자기가 풀려났다는 고마운 마음을 하나도 없고, 과연 하나님의 아들이 죽을 수 있단 말인가? 예수를 의심합니다.

 몇 년 후 그는 다시 죄를 저지르고 지하 광산에서 노동을 하는 무시무시한 형벌을 받게 됩니다. 아무도 그 감옥에서 살아나온 사람이 없습니다. 하지만 바라바는 억센 인간입니다. 다시 한 번 기적이 발생합니다. 그곳에서 예수를 섬기는(사하크)라는 노예를 만나 동고동락하면서 지내는데,로마 당국에서 예수를 인정하면 죽이고,예수를 부인하면 살려준다는 명령을 받게 됩니다.   결국 예수를 믿고 기독교를 인정한 사하크는 처형당하고 예수를 부인한 바라바는 또 한 번 살아남습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라바는 예수의 존재를 끝까지 부정합니다. 이것이 바라바가 선택한 삶입니다.바라바는 예수님을 만났지만 변화되지 못하고 끝까지 강도짓만 하다가 지옥에 떨어진다는 이야깁니다.

 바라바는 대단히 운이 좋은 사람입니다. 사형 받고 죽어야 할 강도가 그냥 운좋게 풀려났으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아무 잘못도 없는 예수님께서 자기를 대신해서 죽고 자기는 풀려났으니까, 평생 감사하며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그러나 강도 바라바는 전혀 감사를 느끼지 못했습니다. 여전히 강도짓을 하다가 비참히 죽은 것입니다.

 바라바는 축복의 기회를 놓친 것입니다.바라바는 주님을 만났지만 그냥 주님곁을 떠났습니다.

 이것을 보면 주님을 만났다고 다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사실 우리가 구원 받은 것은 내 자신이 어떤 능력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성경(엡2:8)“너희가 그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여러분,우리도 어떻게 보면 누군가를 만나서 전도를 받고 예수님을 믿고 죄에서 자유를 받은 것이지 사실을 따지고 보면 우리 자신도 엄청난 죄악들이 쏟아져 나올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면 과연 우리는 강도 바라바와 다를 바가 없을지도 모를 것입니다.

 어떤 성도님이 아내와 아이들 앞에 자신의 자랑스러운 모습을 확인시켜 주기 위하여 자서전형식으로 일기를 쓰다가 도저히 쓸 수가 없더랍니다. 이분이 써놓은 글을 읽어보겠습니다. “그날 밤 제가 확인한 것은,삶 자체가 더러운 죄인이었던 추하디 추한 제 자신의 모습이었습니다. 주마등처럼 스쳐가는 지난날의 제 모습은 가룟 유다보다 더 흉칙했습니다. 저는 주님을 향해 외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오~주님, 저 많은 죄를 정말 제가 다 지었군요,언제 저토록 많은 죄를 범했습니까? 저 많은 사람들에게 어떻게 사죄를 구해야 합니까? 주님, 이 용서받지 못할 죄인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이 성도님은 지금까지 자신은 큰 죄 안짓고 깨끗하고 멋있게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많은 죄악들이 숨어 있었는데 줄을 몰랐다면서 그날 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인생을 정리해 봄으로써, 자신의 삶속에서 죄 아니었던 것이 없음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윌리엄 도일)“성인이 되는 비결”이란 책에서“성인이 된다는 것을 거창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 자체가 성인이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경은 우리를‘성도’라 부르고 있습니다.성도란(헬)하기오스/영어로 saint(성자)란 의미입니다.따라서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충실하게 살아가는 것 자체가 성자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 받는 삶을 살아가는 것을 신학적으로 두 번째 부르심, 혹은 제 2의 구원, 성자의 삶이라고 합니다.

 우리 다 함께(세상에서 방황 할 때...)를 찬양하시면서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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