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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성과 상상이 보여주는 사유의 세계
「억새의 노래」를 중심으로
文 熙 鳳
(수필가 · 대전문인협회장)
Ⅰ.
수필은 자기를 쓰는 글이다. 만일 자기를 왜곡되게 쓴다면 그것은 이미 수필이 아니다. 수필의 생명은 진실과 솔직함이다. 수필은 어렵게 써서 쉽게 읽히는 글이다. 재미를 위하여 만들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진솔한 자기만의 이야기이되 읽는 이의 공감을 불러일으켜야 하고, 그 이야기 속 주인공이 읽는 자기가 되어줄 수 있는 감동의 글이어야 한다. 수필은 눈으로 읽는 글이 아니라 가슴으로 읽는 글이다. 가슴에서 가슴으로 교감하고 그 교감을 통하여 ‘나’가 ‘너’가 되고, ‘너’가 ‘나’가 되는 문학이다.
박 수필가의 작품 편편은 여정, 견문, 감상이라는 기행문의 3대 요소 중 감상 측면에 초점을 맞춰 본인의 사상을 집중적으로 다뤄 기행수필로서 성공하고 있다.
2012년 1월 7일이었다. 교통사고가 났다. 그 사고로 가족과 친지 세 명을 잃고 네 명이 중상을 입었다. 중상자 중 한 명이 박 수필가다. 유명을 달리한 분들에 대한 미안함이 박 수필가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다시금 생각하기조차 싫은 교통사고를 당한 후 일 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혹독한 더위와 열대야에 시달리던 여름을 보내고 가을에 접어드는 계절에 갑자기 억새가 눈에 들어왔다. 불현듯 자신도 억새 같은 삶을 살아야 한다는 마음이 들었다. 억새는 보기보다 열악한 환경에서 묵묵히 자라면서도 생활력이 강하다. 억새의 삶을 이어받아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주제가 있는 일관된 기행수필을 쓰게 된 것이다.
박 수필가의 제7수필집 「억새의 노래」는 다른 장르에 비해 문학적 가치 및 서술이 허술하다고 터무니없는 공격을 받고 있는 수필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어법과 동떨어지지 않으며 감동이 수반되는 미문(美文)은 미사여구의 비판적 이미지가 끼여들 여지가 없다. 직설적 표현보다는 비유나 은유 그리고 상징 기법을 활용하여 수필의 격을 높이고 있다. 좋은 작품이란 모름지기 독자가 읽을 때에 재미가 있어야 하고, 쉽게 읽혀져야 한다고 믿는다.
산행을 하고 나서 쓴 기행수필인데 다른 기행수필과는 특이하게 가슴 가득 감동이 몰려온다. 바로 예술성 곧 문학성이 가미되어 있기 때문이다. 단순한 여정의 기록이 아니라 주제와 소재 그리고 이것들이 서로 조화의 얼개를 가지면서 가슴으로 파고드는 예술적 감흥 · 동감 · 공감력으로 전달되어 오기에 문학성(감동)이 느껴지는 것이다. 기행수필은 오감을 동원하여 쓰는 글이라는 것을 박 수필가는 몸소 보여주고 있다.
기행수필은 문학수필이다. 단순한 여행의 기록을 넘어 선다. 문학은 창작이다. 얼마만큼의 창작력으로 보고 듣고 느낀 것을 담아냈느냐는 작가의 역량에 달린 것이다. 박 수필가의 수필은 산행을 하고 나서 그 지방의 명승고적, 특색, 인정, 풍속, 산업 등에 대하여 보고 들은 사실이나 겪은 일을 느낌을 곁들여서 적되 생활언어가 아닌 문학적 언어를 사용하여 쓰여진 수필이기에 세간의 관심을 받는 것이다.
모든 문학이 다 그렇지만 기행수필은 특히 독자를 의식해야 한다. 자기도취로 나만의 독백이 되면 안 된다. 읽을 맛은 최소한의 지식제공에서 시작하여 독자에 대한 큰 서비스로 가슴 뭉클한 감동으로 이어져야 성공한다.
Ⅱ.
한 편의 기행수필 속에 시 한 편씩을 동행시켰다. 그 시는 기행수필을 1/100로 축약시켜 놓은 것이나 다름 아니다. 시 한 편을 읽어보면 수필 한 편의 내용을 미리 읽어보는 결과가 된다. 축약된 시와 수필의 너그러운 궁합이다. 모든 시들은 그의 명석하고 철학을 가미한 두뇌에서 밤새 고아낸 진국들로 이루어진 것들이어서 더욱 이채롭다. 시와 수필의 조화로운 조합에서 우리는 새로운 문학적 시도를 경험하게 된다. 자연과 인공이 어우러지는 그 절묘함, 그걸 체득하기 위해 산에 오르는데 투구를 쓴 억새들이 자신을 사로잡는다. 그렇게 하여 수필과 시가 자연스럽게 만나고 있다. 40편의 시 중에서 몇 편만 소개한다. 수필 한 편 한 편을 축약해 놓은 것이라는 사실을 독자들은 발견하게 될 것이다.
척박한 산상에 모여 사는 것도 죄더냐
우리는 눈을 속이는 사교집단도
은둔한 범죄 집단도 아니다
약물 없이도 일사불란한 군무에
몸 부비며 으악으악 노래하고
스스로 삶을 즐길 뿐인
어떤 명분으로도 고문하지 마라
비록 관절이 부러질망정
까닭 없이 허리 굽혀 애걸하지 않는다.
- 천관산 억새
화왕산은 본래 불의 뫼로 화산이 폭발한 산
달집 태우다 불장난으로 번진 불
수많은 인명사상 참사에
질긴 목숨 살아남은 억새는 더 번성하여
살풀이 춤이라도 추는가
애잔하면서 화려한 은빛물결
허준의 삼적사 너와집, 굴피집, 움막집도
널너리기와집 부럽잖은 보금자리
한센병 환자 의인과 억새꽃 웃음 짓고 있네.
- 화왕산 억새
여름이면 무성한 풀밭
초록빛에서
가을이면 은빛 춤사위
은빛이다가
겨울이면 농익은 대궁
금빛이지만
눈치껏 살아남기 위한
발버둥이니
멋쟁이가 아닌 못난이.
- 억새의 노래
하늘은 푸른 물결
햇빛 뚝뚝
세상을 밝히고.
들녘은 황금 물결
땀물 뚝뚝
농심을 채우고.
산상은 억새 물결
은빛 뚝뚝
산야를 뒤덮고.
- 억새꽃 가을
병풍폭포가 무지개를 만들며 분위기 띄운다.
인공이냐 자연이냐 따지지 마라
단풍은 피를 토하며
황토 모랫길 따라 맨발로 걷는 강천사
구름다리 아찔해도
현수교서 뜬금없이 스치는 것들
강천호수 깊어졌다
아홉 장군은 어딜 가고 이름만 남았나
금성산성에는 아직도 투구를 쓴 억새의 물결.
- 강천산 억새
Ⅲ.
박 수필가가 풀어내는 기행수필에는 맛과 멋이 들어 있다. 맛은 읽어서 느껴지는 미적 감각 곧 감흥이다. 눈으로 본 것처럼 감동으로 펼쳐지면서 시간을 초월하는 생각내기, 그리고 표현력, 문장력이 읽는 이를 현장으로 옮겨놓는다.
수필집 「억새의 노래」는 백두대간을 몇 차례 종주한 경력이 있고 외국문물과도 교우한 경력이 많은 수필가가 엮어낸 것으로 여러 특징들을 내포하고 있다. 서정의 나열이 개성적이다. 한 주제(억새)만을 대상으로 고집스럽게 쓴 기행수필이어서 큰 가치가 있다.
전국의 산과 들에 분포되어 자라고 있는 억새를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보통의 산행기가 아니다. 박 수필가의 수필에는 철학이 있고, 사상이 있고, 내용이 있고, 서정이 있고, 인정이 있다. 보통의 기행문은 육하원칙에 의거하되 길게 늘어놓는 것이 특징이다. 요즘 누가 그 긴 글을 읽으려 하겠는가? 사진으로 보면, 다큐멘터리 필름으로 보면 그보다 더 좋은 것이 없을 터이다.
한 편 한 편에서 서정의 국밥에 토종 한우육이 듬뿍 들어 있는 아주 특이한 음식을 우리는 맛볼 수 있는 것이다. 길지 않게 적당한 길이의 표현으로 독자들의 관심을 끌어들인다. 한 사물에 대한 일관성을 지닌 기행문을 쓰기란 그리 쉽지 않다. 한두 장 쓰면 밑천이 떨어져서 포기할 법도 한데 가을부터 겨울까지 마흔 군데를 돌아다니며 억새에 관하여 일관되게 쓴 수필인데 하나도 같은 내용의 반복이 없다. 전국을 두루 섭렵하며 억새를 관찰한다. 40편 기행수필에 나열된 억새 이야기가 같은 내용이 하나도 없다는 것은 신비에 가깝다. 모두가 다르다. 달라도 많이 다르다. 많이도 연구하고 관찰한 결과일 터이다.
기행수필을 풍경묘사나 역사탐방 해설처럼 써버리면 글의 맛도 멋도 잃게 된다. 무엇보다 남이 보지 못한 것도 보고, 남이 듣지 못한 것도 듣는, 눈과 귀를 갖고 그걸 가슴에서 키우거나 여과해 내는 문학적 역량으로 잔잔한 감동을 일으키는 글을 쓸 때 좋은 기행수필이 되는 것인데 그런 일을 박 수필가가 해내고 있는 것이다.
도란도란 정겹게 얘기하듯 문장을 풀어간다. 박 수필가가 사물을 보는 눈은 관조의 눈이다. 사색의 눈이다. 그것은 곧 마음 - 내면으로 흘러든다. 작가의 마음이 읽는 이에게 그대로 동화되고 그게 공감의 폭을 넓힐 수 있게 해줄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억새’는 농부들의 허연 머릿결을 닮았다. 민초들의 강인한 삶을 대변하는 듯 지독한 생명력으로 논두렁 밭두렁과 그리고 산기슭에서 살아간다. 어부들이 갈대숲의 물길 사이로 배를 띄운다면 농부들은 억새밭의 언덕 너머로 소를 몬다. 억척스런 억새들의 생활 모습에서 박 수필가는 인생을 배우고 있다. 칠순의 나이에도 배울 것이 많이 있는 모양이다. 그가 쏟아내는 억새 찬양은 그래서 독자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지도 모른다.
저 수많은 억새들 하나하나가 개체로서 어딘가 다른 모습을 담고 있을 텐데 똑같은 하나로 보인다. 그냥 그렇게 닮아가며 살아가는 것일 게다. 그래 너도 억새고 또 너도 억새이듯이 너도 스님이고 너도 부처님이다.
억새의 대궁은 겨울을 지나고 봄이면 희뿌옇게 변질되고 삭아 비스듬하게 기울어져 같은 그루터기에서 새순이 올라오면 길을 터준다. 결국 묵은 대궁은 썩으면서 밑거름이 되고 자연스럽게 세대교체가 되는 것이다. 「억새가 있는 풍경」 천성산에서
모두가 기피하는 한센병 환자들이다. 그네들끼리 억새처럼 모여서 살았다. 억새는 결코 외롭지 않다. 서로 몸을 부비며 서로 노래하며 살았다. 원망도 시기도 부러움도 다 버리고 오로지 자신들만의 길을 살았던 곳이다.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치장할 필요도 없이 억새처럼 살았다. 나름대로 마음을 펴고 살았다. 강한 집념으로 내공을 쌓듯 수없이 자신을 채찍질하였으리라. 그렇게 남모를 세월 보내며 수많은 눈물을 삼켰을 것이다. 「억새가 있는 풍경」 화왕산에서
우리는 이따금 억새가 된다. 정말 살아가기 힘들다면서 세상 온갖 고난을 다 짊어진 듯 헐떡거리며 힘들게 끝도 보이지 않는 기나긴 언덕을 오르고 오른다. 꾹꾹 참고 견디며 가다보면 어느 순간 목표지점에 도달한다. 잔잔한 날에 꽃 피고 감미로운 새소리도 덤으로 묻어온다. 억새가 억새와 어울려 한판 춤을 춘다. 아우내 「억새가 있는 풍경」
꼿꼿한 억새에게 유연한 춤사위는 강함 속에 부드러움을 보여주는 극치다. 흔들림에서 바람의 방향을 눈치 채고 억새를 보노라면 계절을 느끼며 특히 가을을 만끽한다. 참을성과 기다림은 가히 일품이라고 할 만하다. 승학산 「억새가 있는 풍경」
‘만성(晩成)의 힘’이라 할까. 오색 꽃들이 한 시절을 풍미하고 모두 흩어지는 날 은빛 머릿결을 휘날리며 등장하는 ‘로멘스그레이’의 바람기랄까 찬바람을 몰아 오는 그 형형한 자태는 풋풋한 무채색의 미소로 담박하다. “큰 종이나 큰 솥은 그리 쉽사리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했던가. 드러나는 것인지 우러나는 것인지, 침묵인지 달관인지, 바람잡인지 눈보란지, 허심인지 허공인지 모르는 억새에겐 그런 은은하고 슴슴한 매력이 있다.
억새는 꽃말도 억세어 ‘세력’이고 ‘활력’이다. 그러나 또 부드럽게 웃어주고 달콤하게 속삭이며, 곱게 손 사래질하는 이미지로 보면 ‘친절’과도 썩 잘 어울린다. 성품은 달고 평하며, 줄기(芒莖)엔 어혈을 없애고 지혈하며 해열하고 해독하는 효능이 있다. 뿌리(芒根)로는 해수와 백대하, 이뇨작용과 입병 등을 치료한다. 전년도의 뿌리를 깨끗이 씻어 절단한 후 볕에 말려 사용한다.
어찌 보면 바람과 억새는 불가분의 관계인지도 모른다. 봄부터 바람이 억새를 키우면서도 끝내는 억새를 괴롭히는 것이 바람이기도 하지만 또 바람 속에서 억새는 군무를 추면서 신바람이 나고 황홀경에 빠져든다. 「억새가 있는 풍경」 사자평
억새도 그늘에 있으면 별 볼 일 없다. 그 강인한 모습은 보이지 않고 대궁도 꽃도 부실하여 실망스럽다. 걸쭉한 땅에서 몸만 키우기보다는 가뭄과 햇살과 바람과 빗물과 바람에 연신 시달리듯 담금질하여야 강해진다. 사서 고생이란 말처럼 한 무더기 억새들이 온갖 시달림을 이겨낸 당당함처럼 그렇게 부딪치며 홀로서기 하여야 짱짱해진다. 「억새가 있는 풍경」 계족산
유등천 버드내다리에서 뿌리공원으로 가고 있다. 하상산책로를 따라가노라면 냇둑이 하얗게 물결을 이룬다. 억새가 만발하여 축제를 열고 있다. 그들만의 축제가 아니라 지나는 길손의 마음까지도 어질어질 흔든다. 굳이 누가 심지 않고 씨를 뿌리지 않아도 어디서 굴러왔는지 억새가 자릴 잡고 꿋꿋이 자라고 있다. 심지어 갈대밭을 비집고 들어가 밀쳐내고 의연한 모습을 보이는 것을 보면 갈대보다 더 강한 녀석임이 분명하다. 버드내 「억새가 있는 풍경」
억새들의 넉넉한 마음을 배울 일이다. 사람의 욕심은 끝을 몰라 계속 채우려고만 한다. 욕심은 만병의 근원이란 걸 알려준다. ‘화를 내지 마라. 될수록 말을 많이 하지 마라’고 늘 가르쳐 준다. 억새는 바람과 맞서기보다는 바람을 먹고 살아가면서 바람과 함께 삶을 구상하는 것일 게다. 바람의 비위를 맞추며 같은 방향으로 눕는 시늉도 하고 함께 즐기기도 하며 자신의 몸뚱이를 은연 중 튼튼하게 만들어 간다.
그토록 뼈저리게 겪은 굴곡은 접어두고 완성되어 겉으로 드러난 모습만 보고 억새에게 박수를 보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과정이 무슨 대수냐고 그냥 지금 저 모습이 감동시킬 뿐이라고 하겠지만 쉽게 살아온 삶은 없다. 「억새가 있는 풍경」 매화산
억새는 그냥 살아남아야 한다는 본능으로 발버둥을 쳤을 것이다. 태어난 환경을 탓할 수도 탓할 일도 아니다. 그냥 살아갈 수 있다는 희망만 있어도 숱한 바람이나 장마쯤 거뜬히 딛고 일어서 저리 태연한 것이다. 억새는 바람 불면 바람과 함께 움직여야 한다. 바람보다 앞서서 숙이는 시늉을 해야 바람이 쉽게 타고 넘는다. 바람이 지나가면 좀은 떨떠름해도 아무렇지 않은 척 꼿꼿이 일어서야 한다. 이제 엄살 아닌 습관이다. 「억새가 있는 풍경」 월출산
정서의 바탕은 글을 쓰는 출발이다. 감정의 서정적 표현이 본 수필집의 최고의 지향이다. 읽고 나면 무언가 모를 아련한 뒷맛을 남기게 하는 것, 그것이 수필작품의 밑바탕이다. 서정수필은 수필의 정수다. 명수필로 꼽히는 수필들이 거의 서정수필이다. 수필은 그만큼 서정을 중시하고 따라서 가슴에 닿게 하는 글이다. 아름다운 삶은 진정으로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애틋한 마음에서 비롯된다. 현란한 것이 아름다운 것이 아닌 만큼 이를 착각하는 우매함은 범하지 말아야 한다. 아름다움의 지표는 많은 변화를 거듭해 왔다. 그리스 시대에는 실용적인 것이 최고의 선이며 아름다움으로 인정을 받아왔고, 서구의 중세에는 성스러움이 아름다움으로 인식됐다.
보잘것없는 초목으로 시선에서 벗어났다가도 한 번쯤은 눈에 들어올 때가 있다. 언 땅이 풀린 봄날 신록이 그렇고, 활짝 피어난 꽃이 그렇고 가을날 단풍이 그렇듯 혼신에 온몸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억새 또한 그렇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저들이 하나가 되는 모습은 그냥 감동일 수밖에 없다. 은빛 출렁거림은 함성이다. 「억새가 있는 풍경」 신불산에서
고집스럽고 억세게만 보이던 억새의 흔들림에서 부드러움을 본다. 잔인하도록 짓누르고 일어서던 억새에게서 스스로 낮춤을 본다. 손을 흔들고 몸을 흔들어 봉사하며 함께 어울리려는 듯싶은 분위기에서 향수를 느낀다. 제주도 「억새가 있는 풍경」
억새들이 자라고 있는 풍경은 말 그대로 하나의 풍경화다. 바람과 억새의 조화, 억새와 역사가 만나 아름다운 그림을 그려내는 것은 작가가 해야 할 일이다. 그런 일을 박 수필가는 능수능란하게 해내고 있다.
산길을 오르는 작은 방죽 둑에 억새가 많이 피었다. 아침햇살에 눈부시게 은빛으로 출렁거리고 있다. 한동안 바라보는 마음도 함께 반짝이지 싶다. 그 밑에서 낚시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정말 세월을 낚고 있고나 싶어진다. 억새의 강인한 의지가 있고 강한 듯 부드러운 자연의 몸짓이 배어있고 가을을 담고서 길손을 맞이한다. 「억새가 있는 풍경」 계족산
산문에 드니 바람을 타고 비가 내린다. 아니다 단풍잎 휘날리는 단풍비다. 새가 훨훨 날아오른다. 아니다 단풍잎 쏟아지는 단풍잎새다. 자갈길 돌바닥에 곱디고운 카펫을 깔았다. 아니다 울긋불긋 단풍잎카펫이다. 계곡이 너무 좋아 푸름이 너무 좋아 바위가 너무 좋아 폭포가 너무 좋아 단풍이 너무 좋아 산세가 너무 좋아서 볼거리가 많다고 수없이 사람들이 주왕 호칭을 부르며 멀리 가까이서 봄 여름 가을 겨울 찾아든다. 「억새가 있는 풍경」 주왕산
이 좋은 가을날 억새라도 있으니 아니 좋은가. 억새 한 번 바라보고 하늘 한 번 쳐다본다. 여유와 낭만이 그려진다. 억새가 붓을 들어 하늘에 뭔가 그리고 쓸 것만 같다. 가을의 노래도 좋고 가을의 풍경도 괜찮다.
마음속 새빨간 청송사과와 샛노란 들국화와 하이얀 억새를 주변이나 둑에 배치하고 가을을 물씬 풍겨본다. 훌륭한 모델로 어우러져 주산지 새벽안개가 형상화하는 작품은 이국적이고 환상적일 수밖에 없다. 주산지 「억새가 있는 풍경」
장불재를 중심으로 억새가 뒤덮었다. 무등산 옛길을 타고 내려와 중봉으로 간다. 10여 년 전만해도 군사시설물이 있었던 곳인데 모두 옮기고 복원하여 놓고 보니 여기에도 억새만 가득 들어찼다. 억새천국이 되었다. 무등산에 또 하나의 억새단지가 되었다. 「억새가 있는 풍경」 무등산
언제 어디서 어떤 작품을 접해도 그 표현이 서정의 극치라는 결론에 이른다. 산이 주는 교훈은 바로 억새가 주는 교훈이다. 박 수필가는 억새와의 대화에도 소홀하지 않는다. 억새와 박 수필가는 마음에서 마음으로 통하는 이심전심의 교량을 같이 설계하고 공사한 둘이다.
오봉이다. 다섯 암봉이 치솟아 키 순서로 늘어섰다. 의좋은 다섯 형제다. 봉우리마다 큼직한 바위가 올려져있다. 고만고만한 형제 간에 다투지 말고 자중하라는 것이다. 맏이가 아우르는 따뜻한 사랑의 손길과도 같다. 마음을 열고 크게 보면 오봉은 밑뿌리 하나에 다섯 가지가 뻗어 피어난 돌꽃(石花)이다. 너무 단조로울까봐 틈새에 분재처럼 소나무를 꽂아놓았다. 도봉산은 발 닿는 곳마다 석제품전시장 같은 돌잔치 한마당이다. 「억새가 있는 풍경」 도봉산
남쪽으로 밀려간 가을이 풍덩풍덩 바다에 빠져 물장구라도 치고 있는지 보고 싶다. 한 구석 은근슬쩍 웅크리고 있는 섬이 그립기도 하다. 봄은 일찌감치 남쪽바다를 타고 넘어와 반도의 육지로 상륙했는데 이제는 북쪽에서부터 거꾸로 좀은 늦다싶게 남쪽바다로 밀려온 가을이 더러는 바다를 건너지 못하고 그대로 익사하는지 어딘가 애수가 서려있지 싶다. 시량도 「억새가 있는 풍경」
‘억새’는 인간뿐 아니라 우리 자연의 혈관인 실개천을 맑게 해주고, 탁한 대기와 쿨럭이는 강을 되살리며, 누군가가 산을 허물고 들을 갈라놓은 곳곳의 상처를 고슬고슬 아물게 하는 산하의 치료약이기도하다. 어떤 척박한 토양과 환경 속에서도 그 끈질긴 생명력을 유지하며 소박함속에서도 화려한 아름다운 기품을 잃지 않는 억새의 성품은 바로 제 주인의 속마음을 그대로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의지가 강한, 개성적인 철학을 향유한 도인이다. 넉넉한 마음을 배울 일이다. 사람의 욕심은 끝을 몰라 계속 채우려고만 한다.
산은 또 하나의 하늘이라 할 만큼 신성함과 많은 신비를 간직하고 있다. 그는 언제나 침묵으로 일관하지만 침묵 속에서도 많은 메타포를 간직한 채 우리들에게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문학은 사실을 있는 그대로 말하는 것으로 사명을 다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이 어떠한 것인가를 부드러운 표현으로 보여줌으로써 인간이 그리고 이들이 펼치는 삶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가를 구현해나가는 작업이다.
비우고 비워도 욕심은 끝을 몰라 보채듯 앞뒤 가리지 않고 자꾸 채우려고만 한다. 억새가 있는 풍경」 천관산에서
바람소리 억새소리 파도소리는 저리 생생하게 들려오고 듣고 있는데 막상 나의 소리는 없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모처럼 다시 찾아와서 고작 빗줄기에 모든 것을 쫓기고 있는 것일까. 아직껏 소리조차 만들지 못한 것이다. 그러고 보면 억새가 때로는 슬프게 우는 것이 아니라 즐거움 넘치는 억새의 노래였다. 몸과 몸이 부딪쳐 서로 비비며 흘러나오는 억새만의 독특한 소리였다. 깊어 가는 가을 억새를 연주하는 자연의 소리였다. 비와 바람 속에 돌아가는 배는 치솟는 파도로 발버둥을 쳤다. 아우내 「억새가 있는 풍경」
길동무가 되어주는 억새들이다. 억새들에게 인격을 부여한다. 억새와의 인연들을 아주 소중하게 유지하려 애쓴다. 억새들은 서로 기대며 살아간다. 승학산의 억새는 참을성과 기다림의 대명사다. 세상을 아주 억세게 만드는 힘이 있다. 억새를 억새답게 하는 것은 바람과 햇살이라고 힘주어 말하고 있다.
억새가 지나는 바람을 등에 업고 으악으악 울면 바다는 바람을 안고 출렁거리면서 해조음을 쏟아내는지도 모른다. 낙동강에서 올라온 바람과 바다에서 올라온 바람은 연신 담금질을 하며 억새를 아주 억세게 만든다. 승학산 「억새가 있는 풍경」
억새는 가을의 한 구석에서 자신이 가을임을 알듯 스스로 즐기고 있었던 거다. 때로는 손을 흔들기도 하고 꼿이 벌을 서듯 햇살을 받아가며 때로는 이웃과 수화하며 외로움을 이겨내는 법을 터득하고 있었던 것이다. 승학산 「억새가 있는 풍경」
가을에는 개성에 따라서 화려함을 좋아한다면 단풍이 먼저 떠오르고, 조용하니 생각에 잠기려면 억새가 스쳐가기도 한다. 몰아치는 바람에 씰룩거리며 무너질 듯 꼬장꼬장 일어서는 억새의 강인한 모습은 민초의 모습이기도 하다.
바람 못지않게 햇살의 힘이 아주 크다. 억새밭의 햇살과 단풍에 쏟아지는 햇살은 분위기를 한층 고조시키기 때문이다. 「억새가 있는 풍경」 사자평
억새는 여러 해를 산다고 나무가 될 수 없고, 매 년 새순이 나와 대궁을 만들어도 나이테를 만들 수 없다. 억새는 풀일 뿐이다. 나무를 흉내 내거나 부러워할 필요 없다. 풀로서 개성과 특성에 맞게 살아야 한다.「억새가 있는 풍경」 주왕산
각 수필의 결미부분에서는 그의 철학이 재포장되어 독자들의 가슴으로 파고든다. 좋지 않은 환경인 산에 살고 있는 억새들의 삶이 한센병 환자들의 삶을 대변한다. 악산에 뿌리내리는 것도 마다 않는다.
억새가 되어보고 싶다. 억새의 노래를 부르고 억새가 바람을 흔들고 하늘을 흔들 듯 흔들어 보고 싶다. 억새처럼 은빛물결을 이루며 출렁출렁 어깨춤을 추면서 흔들흔들 그냥 몸을 내맡기고 싶다. 햇살을 받고 싶다. 저만큼 우쭐 자란 억새의 풋풋한 손길이다. 가끔 찾아와 느긋이 쉬어가라고 하지 싶다. 아쉬운 만큼 그리워하라고 하지 싶다. 허름하니 부족해도 간이역쯤으로 여겨보라고 하지 싶다. 나들이 「억새가 있는 풍경」
아부하듯 끌려 다닐 수 없어 당당하고도 단호할 만큼 옹고집을 지녔지 싶기도 하다. 비록 일 년을 사는 줄기지만 줏대를 세울 줄 안다. 꿋꿋하게 살아남아서 스스로 지조를 지킬 수 있다는 본보기를 보여주는 것 같다. 「억새가 있는 풍경」 금정산
자신이 억새에 비유되기도 한다. 억새의 소리를 슬프다고만 느끼는 게 아니다. 그건 즐거움을 위한 억새의 노래라고 힘주어 말한다. 긍정적인 삶을 사는 억새의 삶속에 자신의 삶을 투영하는 기지를 발휘한다. 달관한 억새의 모습과 자신이 만나는 영광을 누린다.
억새도 그런 면에서는 다름이 없다. 좀은 거칠고 억세게 산야에서 자라는 하나의 잡풀에 불과하였지만 가을이 되면서 꺾일 줄 모르는 그 꿋꿋함에 존재가치를 다시 눈여겨보게 된다. 미처 몰랐던 면면이 드러나게 된다. 「억새가 있는 풍경」 노인봉
억새는 외로움을 승화시켜 즐길 줄 안다. 우리는 어느 날 갑자기 늙었다고 하거나 한계를 느낀다고 한다. 평소 준비가 덜된 무관심에서 기인한 것이다. 결국 자기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았음이 드러난 자신의 부재이다. 읍천항 「억새가 있는 풍경」
음지와 양지, 옳음과 그름, 강함과 약함, 나아갈 곳과 물러설 곳을 안다. 혼자서 짊어질 일과 함께 힘을 모아야 비로소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을 구분한다. 혼자가 아닌 같이 어우러져야만 더 쉽고 즐거워 능률적임을 안다. 시량도 「억새가 있는 풍경」
Ⅳ.
수필은 수필 나름의 자기 향내를 지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잡문으로 취급당하고 만다. 문학은 그 사회를 마지막까지 떠받치는 버팀목이 되어야 한다. 무너지지 않도록 한 순간에 무너져 내리지 않도록 버티고서 사회가 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힘이 되어야 한다. 박 수필가가 말하는 대로 자기만을 위해 일하는 개미보다 열심히 일하면서 남에게 봉사하는 꿀벌이 칭송받는 사회가 조성되기를 기대한다.
박종국 문학을 지탱하는 두 개의 기둥은 정서의 개성적 표현과 의지의 집약된 결과라고 요약할 수 있다. 거기에 또 하나의 중요한 흐름을 덧붙인다면 수필에 대한 인간적 애정이다. 박 수필가의 수필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들이다.
40편의 기행수필에서 박 수필가는 기행수필의 진로가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야 하는가를 명확하게 제시해줌으로써 나름의 개성적 체취를 느끼게 했다. 왜냐하면 문학은 자기가 만들어가는 자기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기행수필’이라 하면 우선 먼저 고리타분한 것이라 여기는 게 요즘 현실이다. 그런데 박 수필가의 수필은 그게 아니다. 그곳의 역사와 전설, 자연풍광, 그리고 억새의 삶이 개성적으로 조명돼 있다. 평자는 박 수필가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았다. 그의 명석한 두뇌에서 전개되어 나오는 제이, 제삼의 기행수필이 계속 선보일 것으로 확신한다.
인간이 사유(思惟)를 하게 된 것은, 모르긴 하지만 보행으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닐까? 한곳에 멈추어 생각하면 맴돌거나 망상에 사로잡히기 쉽지만, 걸으면서 궁리를 하면 막힘이 없이 술술 풀려 깊이와 무게를 더할 수 있다. 칸트나 베토벤의 경우를 들출 것도 없이, 위대한 철인이나 예술가들이 즐겨 산책의 길에 나선 것도 따지고 보면 걷는 데서 창의력을 일깨울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억새와의 인연을 지나쳐가는 인연으로 생각하지 않고, 남아 있는 생에서 끈질긴 인연으로 만들고자 쉬지 않고 ‘억새의 노래’를 불렀다. 그 파장은 박 수필가가 생을 마감할 때까지 지속되면서 삶을 더욱 아름답고 미끈하게 장식하는데 일조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201305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