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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최고 전성기였다고 하는 빅토리아 여왕 시대에는 수 많은 예술가들이 등장했습니다.
간혹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햄릿’이 더 좋다라는 이야기를 들을 때가 있는데, 말하고자 하는 바는 조금 다르지만
문화도 어느 정도 물질이 풍요로워야 꽃을 피운다는 생각이 듭니다.
빅토리아 시대의 수 많은 예술가 중 필립 칼레론 (Philip H. Calderon / 1833~ 1898)은 화가이자
로열 아카데미의 책임자로도 훌륭하게 자신의 역할을 수행한 사람입니다.
어디로 가는 거지? Whither? / Oil on canvas / c.1867
작은 문이 달린 다리를 건너는 소녀의 표정에 두려움이 가득합니다. 방금 지나 온 다리의 난간은 보기에도 섬찟한
가시가 빼곡하게 달려 있습니다. 다리를 함부로 올릴 수 없는 장치처럼 보입니다. 그렇다면 다시 돌아 가는 것은
소녀의 뜻에 달린 것이 아니라는 뜻이 되겠지요. 소녀의 나이쯤 되면 앞으로 자신의 미래가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해 고민이 많아집니다. 그 것은 두려움일 수도 있지만 새로운 힘이 되기도 합니다. 어느 쪽에 방점을 찍느냐에
따라 걸어 갈 길이 다르게 다가 오지요. ‘아프니까 청춘이다’라고 했던가요? 중년도 아프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아픔을 참거나 면역이 되어서 덜 아프게 느낄 뿐이죠.
칼데론은 프랑스인 어머니와 스페인 출신의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원래 가톨릭 신부였지만
결혼을 위해서 신부 옷을 벗었죠. 제 생각이지만 아버지의 이런 기질도 아들이 화가가 되는데 도움이 되었을 것
같습니다. 예술은 열정이 없으면 어려운 것이니까요. 칼레론이 태어난 뒤 그의 아버지는 영국의 킹스 칼리지에서
스페인 문학을 가르치는 교수가 되었고 그의 가족들은 영국으로 이주하게 됩니다.
때문에 칼레론은 영국화가로 분류 됩니다.
도둑맞은 아이를 찾은 프랑스 농부
French Peasants Finding Their Stolen Child / Oil on canvas / c.1859 / 112.4cm x 87cm
극적인 일이 일어났습니다. 서커스단에서 탬버린을 치고 있는 어린 소녀가 예전에 잃어버린 자신의 딸인 것을
확인한 부모는 아이를 안고 ‘이 것이 꿈인가 생시인가’ 하며 감격에 찬 표정입니다. 어린 소녀는 이 두 사람이
기억에 없는지 갑자기 닥친 일에 멍한 얼굴이고 경찰의 제지를 받고 있는 서커스단원은 이게 무슨 일이냐는 몸짓을
보이고 있습니다. 제 추정이지만 소녀가 어렸을 때 누군가가 소녀를 납치해다가 서커스단에 팔아 넘긴 것 아닐까
싶습니다. 19세기 유럽에서는 종종 있었던 일이라고 하지요.
아이를 잃어 버린 부모의 마음을 아주 조금만 헤아린다면 절대로 일어 날 수 없는 일입니다.
갑자기 궁금해졌습니다. 혹시 도둑맞은 마음은 없을까요?.
원래 칼레론은 기술자가 될 생각이었는데 기술 도면과 도면을 따라 만드는 모양들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서 아예
화가가 되기로 결심을 합니다. 하고 싶은 것을 별 주저함 없이 할 수 있었던 예전이 지금보다 훨씬 매력적이라고
느끼는 것은 저 뿐일까요? 1850년, 열 일곱의 칼데론은 런던에 있는 라이 아카데미에 입학합니다.
그 곳에서 처음으로 회화를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낮잠 The Siesta / 1866 / Watercolor and gouache / 178cm x 279cm
참 경쾌한 작품입니다. 낮잠을 자는 두 여인의 모습이 아주 가벼워 보입니다. 두 팔을 새의 날개처럼 펼치고 낮잠에
빠진 여인과 정반대로 소파에 몸을 올리고 새우처럼 구부리고 자는 여인의 모습이 절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혹시 하늘을 나는 꿈과 바다 속을 돌아다니는 꿈을 꾸는 것은 아닐까요? 아주 달콤한 잠깐의 낮잠이 부럽습니다.
라이 아카데미에 입학 한 1년 후, 칼데론은 파리로 미술 유학을 떠납니다. 피코의 화실에 입학한 그는 회화를
그리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대신 드로잉만 하게 되었는데 모델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벽하게 정확한
드로잉을 익혀야 했습니다. 이 때 받은 교육이 그의 화가로서의 경력을 쌓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사실 기초만큼 중요한 것도 없지요.
바빌론의 강가에서 By the Waters of Babylon / 1852 / Oil on canvas / 71.8cm x 51.4cm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 보니엠 (Boney M)의 ‘By the rivers of Babylon’을 처음 들었습니다. 지금 기억에도 당시 꽤
유행했던 곡이었죠. 가사에는 별 관심이 없고 곡이 좋아 흥얼거리곤 했는데 아주 훗날, 세례를 받고 성경을 보기
시작하면서 이 노래 속에 담긴 가사가 성경의 시편에서 가져 온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전쟁에서 패해
바빌론으로 끌려간 유대인들의 망향가이자 투쟁가였는데 – 지금도 이 노래를 들으면 장발이었던 스무 살 제가
떠 오릅니다. 기억나는 부문을 잠시 떠 올려 볼까요?
By the rivers of Babylon, there we sat down 바빌론의 강가에 우리는 앉아 있었지
ye-eah we wept, when we remembered Zion. 시온이 떠 오를 때면 그래, 우리는 울었어
When the wicked carried us away in captivity 사악한자들이 우리를 포로로 끌고 가서
Required from us a song. 노래를 부르라고 했었지
Now how shall we sing the lord's song 우리가 어떻게 그런 사악한 자들의 땅에서
in a strange land. 노래를 부를 수 있었겠어
기뻐도, 슬퍼도 외로워도 부를 수 있지만 분노에 찼을 때는 부르기 어려운 것이 노래입니다.
칼데론의 파리 유학은 1년 정도였던 모양입니다. 파리에서 영국으로 귀국한 그는 1852년 로열 아카데미 여름
전시회에 ‘바빌론의 강가에서’라는 작품을 출품했고 대중들의 관심을 끄는데 성공했습니다. 그런데 나름 성공을
거둔 역사화 분야를 바로 그만두고 그는 그 후 5년간 주로 초상화를 그립니다. 보통은 성공한 분야의 것을 계속
그리게 되는데 칼데론은 그 것을 버린 것이죠. 그의 속 마음이 궁금합니다.
부서진 맹세 Broken Vows / Oil on canvas / 1856 / 91.4cm x 67.9cm
담장 너머로 들려 오는 소리에 여인의 가슴 한 쪽이 무너져 내리고 있습니다. 지긋이 눌러 보지만 그 통증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심해지고 있습니다. 담 너머 꽃을 들고 또 다른 여인을 희롱하는 남자는 여인의 연인입니다.
자신에게 쏟아 냈던 밀어들이 또 다른 여인에게 반복되는 것을 보야 하는 상황은 지옥에 있는 기분이겠지요.
깨지기 위해 만들어지는 것이 맹세라고는 하지만, 이 장면은 참 잔혹하군요. 하긴 요즘 세상은 그림보다 더 하면
더했지 덜 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랑이라고 말하는 데는 시간인 많이 걸립니다. 이제, 맹세하지 맙시다.
이 작품은 20년 넘게 1,000점 가까이 인쇄되고 다시 그려질 만큼 인기가 있었다고 합니다.
1857년, 칼데론은 다시 로열 아카데미 전시회에 ‘부서진 맹세’라는 작품을 출품하는데 빅토리아 시대의 가장
훌륭한 작품이라는 평을 받았습니다. 그는 젊고 매력적인 여인을 그리는 재주가 아주 뛰어난 화가가 되었습니다.
처음부터 칼데론은 라파엘전파의 영향을 받았고 그의 작품들 중 일부는 정교한 선과 사실적인 묘사로 라파엘전파의
특징을 보여 주었습니다.
아빠에게서 온 편지 Letter from Daddy / Oil on panel / 16.8cm x 21.9cm
우리 아가, 아빠에게서 편지가 왔단다. 읽어 줄까?
편지를 읽다가 엄마는 아이에게 말을 건냅니다.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지금 마음 속에서 올라 오는 기쁨을 표현할 방법이 달리 없겠지요. 다 읽지 못한 편지, 그러나 그 것만으로도
편지를 보낸 남편이 보고 싶었을 것이고 남편과 굳게 이어주고 있는 아이가 더 없이 사랑스러웠을 것입니다.
어떤 사연으로 남편이 편지를 보냈는지 알 수 없지만 – 여인의 뒷 배경에 배의 모형이 있는 것으로 봐서 남편은
배를 타고 나갔을까요? – 여인의 기분만큼은 확실하게 전해져 옵니다. 그나저나 편지를 얼마 전에 써 보셨는지요?
칼데론은 런던의 세인트 존스 우드 (St. John’s Wood) 라는 곳에 살았는데 빅토리아 여왕 시대에 역사적인 주제와
현대적인 장르에 관심을 가지고 작품을 그리던 화가들이 많이 모여 살던 곳이었죠.
그 그룹을 사람들은 ‘패거리 (The Clique)’라는 이름으로 불렀고, 칼레로은 ‘패거리’들의 리더가 됩니다.
전에 소개한 조지 레슬리 (http://blog.naver.com/dkseon00/140110174130)도 멤버였지요.
고아들 The Orphans /1870 / Oil on canvas / 68.5cm x 51cm
눈이 수북하게 쌓인 길, 하프를 켜고 있는 누나 옆에 추위에 몸을 잔뜩 웅크린 동생이 서 있습니다. 눈은 멎었지만
아직 거리에는 흰 안개가 남아 있습니다. 아무리 봐도 옷차림이나 악기를 든 모습으로 봐서는 우리가 머리 속에
담고 있는 고아의 이미지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어쩌면 순식간에 부모를 모두 잃은 경우일 수도 있겠군요.
그렇다면 당장의 생계를 위해서 거리로 나설 수 밖에 없겠지요. 세상을 살아 갈 일이 답답해 보입니다.
갑자기 추워진 날씨, 그림 속 아이들이 아니어도 올 겨울 돌아 봐야 할 아이들이 떠 오릅니다.
칼데론은 지속적으로 로열 아카데미 전시회에 출품합니다. 1864년, 칼데론이 서른 한 살의 젊은 나이에
로열 아카데미의 준회원으로 선출된 것에 사람들은 놀라지 않았습니다. 이미 그의 재주가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졌기 때문이죠. 3년 뒤 파리 국제 전시회에서 금메달을 수상하는데, 영국인의 감성과 프랑스인의 화려함이
멋지게 섞였다고 그의 작품을 평가했던 영국의 평론가들에게 이 것 역시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이 수상의 결과 때문이었는지 알 수 없지만 이 해 그는 로열 아카데미의 정회원이 됩니다.
서른 넷의 젊은 나이였습니다.
헝가리 성녀 엘리지베스의 금욕을 맹세하는 위대한 모습
St. Elizabeth of Hungary's Great Act of Renunciation / Oil on canvas / 1891 / 153cm x 213.4cm
옷을 벗고 제대 앞에 무릎을 꿇고 간절하게 기도하는 여인은 성녀 엘리자베스입니다. 엘리자베스는 백작과 결혼,
백작부인이 되었지만 남편이 죽고 나자 가난하고 아픈 사람을 위해 남은 인생을 쓰기로 결심을 합니다.
수녀원에 들어가 평생을 자선사업과 병원을 세우는 일에 몸을 바쳤죠. 지금 제대 앞에서 모든 유혹과 욕심에서
벗어나 절제된 삶을 살게 해달라고 간절하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순수한 마음과 앞으로도
허황된 것을 걸치지 않겠다는 각오를 보여주는 것이겠지요.
1870년대부터 칼데론은 주로 초상화를 그립니다. 그러나 그의 작품 한 점이 논란에 휩싸이고 말았습니다.
바로 위의 작품 ‘헝가리의 성녀 엘리자베스’였는데 비록 그림이지만 남자 앞에서, 그 것도 제단 앞에서 여인이
나체로 있다는 점을 공격한 것이죠. 손가락을 들어 달을 보라고 가리켰는데 달은 보지 않고 손가락만 보는 사람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많습니다. 로열 아카데미의 정회원이 된 칼데론은 많은 작품을 제작합니다. 당대의 풍속화가
있었는가 하면 때로는 근대적인 것을, 또 때로는 고대의 것을 주제로 작품 활동을 했으니까 힘이 넘치는 시기였던
것 같습니다.
자에는 자로 Measure for Measure / Oil on canvas / 1873 / 71.1cm x 92.7cm
자(尺)라는 단어가 제목에 들어가 검색을 해 보았더니 셰익스피어 희곡의 제목이 등장하더군요.
희곡의 내용과 그림이 어울리지 않고 또 ‘법에는 법으로’라고 해석되는 제목 때문에 다른 상상을 하기로 했습니다.
남자는 고개를 묻고 여자를 밀쳐내는 모습이고 여자는 뭔가 오해를 풀기 위해 남자를 잡고 있는 모습처럼 보입니다.
여인의 얼굴은 안타까움과 당혹감이 같이 있습니다. 이 사건을 만든 것은 바닥에 떨어진 편지 때문인 것 같습니다.
몰래 다른 남자를 만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남자가 여인에게 이별을 말하는 걸까요?
인연이라면 남자가 일어서지 않겠지요. 나중에 오해일 수도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저도 그림 속 남자인 적이
있었거든요.
1887년, 쉰 네 살의 칼데론은 로열 아카데미의 책임자가 됩니다. 학교를 대표하는 사람이 된 것이죠.
그의 점잖고 친절한 태도를 많은 사람들이 좋아했습니다. 행정가로서도 그의 능력은 뛰어나서 맡은 직책에서
많은 성공을 거두게 됩니다. 때문에 상대적으로 그림을 그릴 시간이 없었고 나중에는 전시회 참여를 할 수 없을
정도가 됩니다. 두 가지를 동시에 잘 하는 사람도 있지만 어느 것 한 가지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사람이 훨씬
많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칼데론은 신의 귀여움을 받은 사람이 분명합니다.
줄리엣 Juliet / 1888
별처럼 반짝이는 눈이라고 했던가요?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줄리엣의 눈이 꼭 그렇습니다. 한 손으로 얼굴을 받치고
있는 것은 그녀가 지금 아주 많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축복 받지 못하는 사랑에 빠진 젊은이가 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습니다. 앞으로의 운명이 어떻게 흐를 지 알 수 없는 그녀이지만 복잡한 지금의 마음이 얼굴에
그대로 나타나 표정이 밝지는 않습니다. 돌아 보면 그런 것들을 이겨 내는 것이 결국 사랑의 완성이었습니다.
칼데론의 셋째 아들 프랭크도 동물을 주제로 그림을 그린 화가로 유명합니다. 예순 다섯의 나이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는 기록이 있는데 그의 부음 기사를 보니 그 곳에는 그가 오랜 시간 병을 앓았다고 되어 있습니다.
뭐가 맞는지 알 수가 없군요. 그래도 화가로서 젊은 나이를, 중년이 되어서는 행정가로 자신이 가지고 있는 능력을
유감없이 보여 주었으니까, 칼데론은 여한 없이 살다간 사람 아니었을까요?
첫댓글 너무 잘 보았습니다...근데..요즘 본당의 카페엔 어느 자매님의 성서쓰기와 주보 빼놓곤 별다른 글들이 올라오지 않아 황량한데요...이런 주옥같은 그림과 글들을 우선적으로 성가대 식구들이 만끽할 수 있다는 기쁨이외에...어쩄거나 본당의 다른 식구들과도 함께 누리면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그림에 대한 지속적인 열정과 삶이 녹아들어 더 공감되는 감미로운 글들, 너무 감사드립니다.
본당에도 시간 내서 올리겠습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앞으로 계속 하겠습니다
맞아요..이런거 우리만 보기 넘 아까워요...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