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린아 채린아 (1) / 전혜린
― 서간 중에서
-나의 동생 채린이에게(1)
서울은 좋아? 바다도 없고 비린내도 없고 사투리도 없고 짠 바람도 항구의 불빛도 없지?
내가 생각하기에는 서울은 허물어진 회색빛 담벽이 쓸쓸하게 여기저기에 서서 따가운 햇볕을 쪼이고 있는 바람 한점 없고 새파랗게 개인 하늘 밑을 사람들이 굉장히 많이 다니고 있는 것 같다.
모두 허둥지둥 바쁜 듯이 초점을 잃은 표정, 피곤한 눈동자로 군종 속의 외로움을 지닌 뒷모습으로 왔다갔다 하고 있을 것 같다.
서울도 좋지만 나는 부산이 좋다. 그렇게도 잘 변하는 하늘. 그렇게도 언제나 변함 없는, 그러면서도 언제나 다른 표정의 억세고 질기고 끈기 있는 깊푸른 바다, 수박이 익어서 터지는 냄새와 바다의 소금 냄새를 뒤섞은 밤의 공기, 그렇게도 지긋지긋하고 시끄러운 부산 사람들 땀에서는 비린내가, 머리칼에서는 소금이, 눈에서는 바다 바람이 느껴지는 무지하고 미숙하고 단순한 부산 사람이 내 마음에 든다. 반지르르 닦인 '서울내기'보다......
내가 빌고 싶은 것은 하루라도 오래 부산에 머무를 수 있도록 하는 것 뿐이다. 자극과 흥분과 충동과 정열, 그리고 미침을 안겨주는 부산의 바다, 거리, 사람들, 항구...... 그리고 그외의 모든 것. 열일곱 살부터 스무살가지의 내 마음속에 새겨진 모든 것과 헤어지기가 싫다. 부산에는 그래도 꿈과 어리석음과 동화가 있지만, 서울은 완전히 이성적인 어른의 나라 같다. 모두가 싸우고, 그리고 이기는 장소 ― 바쁜 곳 ― 이것이 아마 서울이겠지. 다른 어떤 나라의 수도도 다 그런 것처럼......
나의 작은 채린(2)
오늘 오후 너의 편지를 받았다. 퍽 반갑고도 슬펐다. 네가 그렇게 고생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이 세상에서 뭐가 제일 싫다고 해도 싫은 사람같이 싫은 것이 또 있을까? 너는 그런 싫은 사람들에 에워싸인 것 같다.
내가 지금 너와 단 둘이 산다면 너를 위해 여러 가지 설계도를 그릴 것이다.
우선 너는 오락을 책과 자연 속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내 설계도에 의하면...... 저녁때 박물관 수풀 속에 딩굴면서 읽어야 할 것이다. 보들레르를, 하이네를, 괴테를, 바이런을 그리고 이방인을 읽어야 돼. 공일날에는 눈동자가 독서로 인하여 깊어져 있는 마음 맞는 벗과 남산에 올라갈 것이다. 제일 높은 곳에서 서울이, 집이, 사람이 얼마나 작은가를 내려다볼 것이다. 그리고 함께 읽은 책 한 권을 에워싸고 끝없는 논쟁에 들어갈 것이다.
목이 마르면 샘물을 마시고, 그리고 피곤하면 잔디 위에 누워서 별을 싫을 때까지 세다가 돌아갈 것이다. 진한 커피를 끓여놓고 기다리고 있는 나의 방으로...... 밤에는 자연에서 받은 감정을 정리하여 노트하거나, 지식을 넓히기 위한 공부를 할 것이다. 창을 열어 놓고 너와 나는 마주 앉아 각각 자기의 세계에 깊이 잠겨들어가 공부에 열중하여 서로 누가 곁에 있는지를 잊고 있을 것이다. 새벽이 될 때까지 그렇게 하고 동녘 하늘이 레몬색을 띠우기 시작하면 우리는 말없이 불을 끄고 침대에 올라갈 것이다. 서너 시간의 수면 후, 나의 커피 끓이는 냄새에 깬 너는 방을 쓸 것이다(부려 먹어서 미안해). 한 잔의 커피와 사과 한 개, 귤 한 개의 우리의 조반은 극히 짧고도 간단한 것이다.
함께 전차길 있는 데까지 가서 우리는 헤어질 것이다. 씩씩하게 싸우고 집에 돌아올 것을 서로 빌며...... 저녁 때 네가 복숩, 예습하는 동안 나는 한 잔의 밀크, 한 개의 달걀과 베이컨, 그리고 토스트로 저녁을 준비할 것이다(이번에는 네가 미안하다고 해!). 그러고 나서는 너는 너의 일과(박물관 및 남산의 산보)를 할 것이고 나는 침대에 누워서 다가오는 어둠을 전신으로 느끼고 있을 것이다(이것이 나의 오락일 것이다). 이런 생활이 3년만 계속되면 반드시 헛것이 아닌 무엇이 생기리라. 어때? 네 생각은......? 네 의견을 말해 봐. 그러면 나의 설계도를 고칠 테니...... 지금은 밤 12시 30분이다.
<부산 * 9월 3일 언니>
채린이 생일날에 언니가(3)
커다랗게, 뜨겁게 빛에 차서 더러운 것, 얕은 것을 속에 끊자. 언제나 창조하는 근원의 힘에 서 있자. 애써 미지의 세계를 찾아 내자.
동생을 존경할 수 있는 기쁨은 아무나가 맛볼 수 있는 기쁨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런 동생은 있더라도 극히 적은 고로. 나는 그런 동생을 하나 가졌다. 엷은 우주 속 풀포기와 똑같이 수가 많고 똑같이 평범한 사람들 ― 수억의 ― 가운데서 나는 한 동생을 가졌고 사랑했고 존경했다. 너는 얼마나 나를 내포하며 나는 또 얼마나 너를 내포하는지!
나는 행복하다. 지금 이 순간(1955년 8월 24일 오전 2시 30분). 무의미한 눈물이 끝없이 뺨을 구르도록 내버려둔 만큼 나는 앓고 있다. 지금......이 얼마나 강렬한 즐거움이랴. 아무에게도 뺏길 수 없는 나의 단 하나의 소유가 있다면 그것은 너다. 아니, 너에 대한 나의 애정이다.
나는 기쁘다고 생각하고 있으나 눈물은 그칠 줄을 모른다. 나는 의아히 여긴다. 분석해 본다. 이윽고 나의 전신은 이미 있을 우리의 이별에 흐느끼고 있음을 발견한다. 우리는 헤어진다. 지금, 가슴이 찢긴다. 채린아!
마지막으로 마음껏 불러본다. 이 10년간의 내 애정과 존경의 전부를 이 일순에 기울인다.
그것이 먼 데에서인 것처럼 부르는 내 목소리는 목메이는구나. 채린아! 나의 독일로의 출발!
그것은 정말로 무엇을 뜻하는지? 누구의 시구인 '떠나기 위해서 떠난다'는 말이 자꾸만 맴돈다.
<독일로 떠나며 * 서울 * 1955년 8월 24일>
채린아(4)
나에게 즐거움이 있다면, 그것은 ― 구름을 보는 것일 것이다. 구름 ― 방랑 ― 바가봉드 ― 헤세 ― 헤세는 나에게 또다시 클로즈업 되었어. 이곳 독일 땅에 와서. 그는 여기서 멀지 않은 알프스 산 밑의 '루가노'라는 아름다운 호숫가의 작은 마을 몬타놀라에 살고 있단다. 서독에도 동독에도 속하지 않은 스위스에서 안주의 땅을 정한 지 오래된다. 예의만을 갖춘 나의 편지에 그는 뜻밖에도 그의 최근에 찍은 사진(생각보다 안 늙었고 고민에 찬 맑은 표정이었다)과 그가 그린 그림에 인사말을 써서 보내 주었다. 나의 기쁨을 상상해 봐. 스물두 살의 내가 느낄 수 있는 정도껏의 기쁨.
그 다음에 또 '방랑'이라는 제목의 그가 그린 그림을 알았고(풀과 나무 하나와 흰 구름으로 된) 새해 선물로 <데미안>과 <싯다르타> 내가 제일 좋아하는 헤세의 책을 두 권 받았어. 나는 춘향이와 이도령의 인형을 보내 드렸어. 축복해 주고 채린이도 헤세를 읽어 줘.
채린아! 마음의 고향을 잃지 말고 살아다오. 내가 책을 쓰면 '채린이에게'라고 바치겠다. 번역하더라도...... 기다려다오. 장미는 온실에만 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잊지 말고 외국에 대한 열을 무시하도록. '장미'라는 사실이 중요하지 '온실'인가 '산'인가는 아무것도 아니다.
너는 좋은 소질을 가진 인간이니까 그것을 키워서 꽃 피워줘. 지상 목표를 인식(선과 미)에 두고 매일의 생활을 노력의 과정이라고 보고 결과를 생각하지 말고 그 과정 과정에 충실한 넘친 생을 누려줘.
자아와의 끊임 없는 대화를 끊지 말고 자기를 미칠 듯이 사랑하고 아끼되, 자기의 추나 악을 바라보는 지성의 눈동자도 눈감지 말아줘.
<南獨 뮌헨에서 * 1956년 1월 27일 * 너의 언니>
채린이에게(5)
나의 먹고 사는 얘기, 따분한 얘기를 떠나서 쓰겠다. 굶었던 것이 버릇이 되어 밥은 입에 안 들어가고 그저 금붕어처럼 커피만 자꾸 끓여서 꿀떡꿀떡 마시고 있다. 독한 술이나 짙은 시가가 그리울 때도 많다. 모두가 울분 때문인 것이다. 또는 자기 불만, 더 철학적으로 말하면 자기와 참 자기(일상인으로서가 아닌 실존하는 참 자기) 사이의 '거리감(Pathos der Distanz)' 이라고 철학 용어로는 말한다. 그 때문에 발광 상태에 가까운 상황 속에 살고 있다.
채린이가 불어를 읽는다니 여간 반갑지 않다. '악의 꽃'은 내가 산 것이 있으니 기회 있으면 보내 주겠다. 그 속에 있는 '여행에의 초대'니 '풍경'은 참으로 아름답다. 돌체에 가서도 '여행에의 초대'를 들어 봐. 여자가 보들레르의 시를 노래 부른다. 프랑스 현대 작곡가 듀빠르끄(Du Parc)가 작곡한 것일 것이다. 꼭 들어줘.
헤세는 올해 80세다. 인제 몇 년 살지 의문이니까 이쁜 한국카드에 한국말로 써서 생일날 보내는 게 어떠니? 퍽 따스한 좋은 사람이다. 그의 생일은 7월 2일이니까 배편으로 4월 말에 보내면 생일 때까지 갈 것이니까. 그리고 카드는 뒤를 붙이지 말고 '인쇄물'로 보내면 싸단다. 달호랑 의논해 보렴! 주소는 'Herr Hermann Hesse, Montagnola bei Lugano, Sshweiz(스위스)' 이니까 한 번 보내기 바란다. 데미안과 싯다르타의 헤세에게 말야!
새카만 커피만이 주식이 되고 만 이 팽팽한 신경의 끊길 듯한 줄 속에서는 모든 것이 무관심이란다. 나의 생(生)도 나의 사(死)도. 참 채린이는 언제 대학에 가니? 대학생으로서의 채린이를 상상해보기만 해도 즐겁고 가슴에 흐뭇한 자랑을 느낀다. 누구보다도 깨끗한 눈과 피부를 가진 채린이는 결코 거리의 어지러운 기분이나 헛된 개념에 의해서 더렵혀질 아이가 아니라는 것을 생각할 때 나는 얼마나 얼마나 채린이라는 동생이 자랑스러운지 모른다. 채린이의 대학 생활을 채린이는 다만 '인식을 위해서 온갖 것을 바치겠다'는 생각 밑에서 살기 바란다. 채린이 자신의 참 모습만이 비치고 있는 채린이의 영혼의 고향에의 향수. 참자기와 진리(인생과 우주에 대한)와 미의 인식을 위해서 현실이나 일상적인 것과는 아무 타협 없이 맑은 눈동자를 그대로 지닌 채 열심히 열심히 살아줘! 예술과 학문과 자기 완성에의 끊임없는 정진으로 덮어 버려, 아무런 다른 틈이 남아 있지 않는 정말의 학생(독일이나 프랑스의 학생 같은 학생)이 되어줘! 내가 이루지 못한 이상형 또는 이념형(Idea-bild)인 채린이! 나보다 너무나 뛰어난 채린이! 내가 얼마나 너를 존경하고 높이 평가하고 있는지 너는 아마 꿈에도 모를 것이다.
채린이에게 읽히고 싶은 책은 너무나 많다. 도서관을 잘 이용하고 미국 공보원 같은 곳도 이용해서 닥치는 대로 좋은 책들을 막 읽어다오. 그리고 채린이의 살이 되게 해다오! 풍부한 대하같이 양양히 흐르는 내면 생활을 가진 완성된 인간이 되어다오. 너나 나나 다 이 세상에 우연히 던져져 있는 것을 놀라움을 가지고 발견하고 회의하고 있는 인식의 학생들이다. 괴로워도 괴로워도 최후의 인식의 날을 위해서 출발하자. 세계와 또 쓸데없는 모든 것과는 거침없이 하자.
<뮌헨에서 * 1957년 10월 2일>
나의 동생 채린이에게(6)
좋은 시(독일 현대 시인 홀투젠 H.E.Holthusen)가 있었기에 적어보겠다.
동생의 죽음을 탄함
신의 이름으로 동생이여, 너는 죽었다.
너다. 남이 아니다. 아, 불이 내 옷자락에 붙는다. 몸서리난다.
이것을 말하는 것은 일어나고야 말았다. 내가 두려워하던 일이! 라고.
오 이마를 신에게 내밀고,
큰 입을 한 희랍 가면을 쓰고
사람은 외친다. 너는 나를 망쳤나이다!
깊은 속에서 흘러 나오는 눈물은 이 땅의 무관심 위를 범람한다.
오 달콤한, 달콤한 생, 너는 죽었다!
왜 그런지 동생에 관한 시라면 관심이 간다. 그리고 죽음에 관한 시도...... 맨 끝 구절 '오 달콤한, 달콤한 생이여 너는 죽었다!'가 몹시 실감이 난다. 화란이가 폐가 몹시 나쁜 모양이더니 어떻게 됐는지...... 다들 죽지 말았으면 좋겠다. 정말 조르주 상드의 말대로 그 모든 괴로움에도 불구하고 생이란 취하게 하는 것, 좋은 것이다. 죽고 싶을 만큼 그렇게 귀중한 것이다. 이런 시가 있다.
나는 두렵다.
그리고 죽고 싶지 않다.
생은 귀중하고 단 하나다.
그리고 나는 실컷 살지 못했다.
스물 몇 살 난 시인(프랑스)의 시다. 이것을 쓰고 나서 이차 대전에 나가서 죽고 말았다는, 가엾다 참으로.
채린이도 카뮈를 읽고 그의 인생 예찬을 배우기 바란다(<이방인>에서 특히! 또 <페스트>에서 오랑의 주민들의 생활에서).
<다시 뮌헨에서 * 1957년 10월 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