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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오입도요문론 강의
(2007. 10. 14 진명스님)
〔우리들의 이야기〕
우담화님: 옛날에는 절이 산중에 있어서 민가와는 멀고 절 자체의 운영능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지금은 신자들과 함께 살아가야할 그런 상황이고 보니 무위법과 유위법을 잘 활용해서 더불어 살아나가야 되며 지금 포교당이나 민가 속에 스며들고 있는 이런 형편에 너무 무위법만 강조하면 포교가 잘 되지 않겠지요. 시대에 따라서 너무 유위법에만 치중하면 그것 또한 어색한 면이 있고 무위, 유위를 잘 활용해서 한 다면 좋은 결과가 나오리라 생각 됩니다.
진명스님: 이조시대 불교가 우리나라 불교의 전형이라고 생각하면 절은 산중에 있고 골짜기에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조 불교는 사실로 망한 불교입니다. 숭유배불 정책에 의해서 쫓겨난 불교입니다. 스님들조차도 천민들이었고 수준이 낮았습니다. 이조시대는 스님들의 저서가 많이 없지요. 신라 시대나 고려시대에 저서가 많이 나왔고 원효스님 의상 스님, 일연스님 등이 다 신라와 고려 시대 스님들입니다.
그 시대 스님들은 일반 사람들을 인도하고 계도할 만큼 실력이 있었습니다. 실력이 있다 보니 저절로 사찰이 산중에 있는 게 아니라 시내에 있게 되었지요. 경주만 하더라도 경주 시내에 분황사, 황룡사가 있었고 고려시대에는 불교가 국교였기 때문에 개성도읍지에 사찰이 엄청나게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 것들을 보면 지금 현재 사찰이 산중에만 있는 것은 문제가 있는 것이지요.
물론 스님들이 자체적으로 산중에 살면서 농사를 짓고 자급자족을 한 것은 중국불교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중국에 叢林이 생기면서부터 一日不作이면 一日不食이라고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밥 먹지 않는다고 했지요. 공부만 하는 것이 아니라 공부도 하고 농사도 짓고 그런 영향으로 우리나라도 큰 산을 중심으로 절이 있습니다.
실제로 일반 세속 사람을 떠나서 사찰의 존재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면 부처님 사상에도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훌륭하신 이유는 부처님이 성불하신 후에 일생을 교화 하시다가 열반에 드셨다는 것이고, 우리가 부처님의 행동이나 사상을 이어 받는다면 이조시대처럼 절이 산중에 있어야만 하는 것은 본래의 사상이 아닙니다. 단지 이조불교는 정치적으로 산중으로 쫓겨난 것입니다.
유교가 사회를 정신적으로 지도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찰이 밀리게 되고 남자들은 절에 가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불교를 배우기 위해 절에 간 남자들은 거의 없었지요. 주로 간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여자들입니다. 여자들은 이조시대에 공부를 많이 하지 못했고, 또 여자들에게는 공부를 가르치지도 않았지요. 또 스님들도 무식한 분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니 서로 통하지요. (웃음)
이조시대에는 저서가 많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물론 서산, 사명스님 같은 분이 계셨지만 이분들 이외에는 사찰과 스님들이 무척 피폐했습니다. 유생들이 워낙 득세를 하니 스님들 생활자체도 자급자족을 하면서 공부시키지 보다는 생활에 급급한 그런 입장이었지요.
개화기에 들어서면서부터 선각자들이‘이래서는 안 되겠다’고 고민을 한 것입니다. 일반 세속에 나와서 포교도 해야 되고 사람들을 인도하고 지도하려는 스님들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보통 쉽게 생각하는 사찰은 골짜기에 있어야 하고 동떨어져 있어야 된다고 하는 생각은 조금 맞지 않지요.
마니주님: 조선시대에는 숭유억불 정책으로 불교를 탄압했다고 하지만 궁전 내 왕족들 사이에는 불교가 굉장히 성행했다고 생각 됩니다.
예를 들면 전쟁 중에 절을 지어서 왕조실록을 보관하게 했다든지, 문정왕후 같은 분은 불교 중흥을 위해서 노력을 했었다든지, 이런 사례들이 있는 것으로 보아서 궁중에서는 불교를 숭상했다는 생각입니다. 서민들과 궁중생활의 불교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지요?
진명스님: 한편으로는 그렇게 볼 수도 있겠지요. 이조불교를 치마불교라고 보는데 궁중의 여인네들이 일반 아녀자 백성들 보다는 시간이 많습니다. 일반 서민들은 일하기도 바쁘고 아이 키우기도 바쁘지 않았겠습니까? 궁중의 여인네들은 시간이 있으니 글을 배워 불교를 접하기가 쉬웠지요.
그래도 민중신앙은 불교였습니다. 고려에서 조선으로 오면서부터 궁중의 여인네들이나 지식층에 있던 사람들은 불교가 고급문화이고 상당히 발달된 철학이었기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지요. 유교가 정치적으로는 득세했지만 불교가 진리나 철학적인 면에서 인정을 받았고, 당시에 민중을 위해서 한글을 제일 쉽게 보급하려면 결국 신앙을 기준으로 해야만 했겠지요. 일반 서민들에게 가까이 갈 수 있는 것이 불경이었으므로 이조시대 불경이 한글로 많이 번역되었습니다.
당시의 불경번역을 보면 참 정확합니다. 능엄경만 하더라도 전문가들이 번역했다고 볼 수 있지요. 조선 초기에는 훌륭한 스님들이 많았지 않습니까? 예를 들면 무학스님, 함허스님 등은 상당한 수준의 스님들이시지요.
조선 초기 이후부터는 지식층의 스님들이 점점 적어졌습니다. 유생들의 서원이 있는 곳에서는 절이 반드시 망하게 되었지요. 당시 개성주위에도 많은 절이 있었는데 이조시대에 들어서면서부터 불타버린 절이 많아 아쉬운 부분이 많지요.
법일거사님: 일반적으로 느끼는 것은 종교가 아무리 고준한 진리나 이치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대중 속에서 숨 쉬지 않으면 종교의 존재 이유가 상당히 희석되지요. 포교가 시대상이나 공간의 조건에 맞는 것들이 개발되어야 하는데 그것이 뒤떨어집니다. 이런 점이 상당히 거리감이 있습니다. 스님께서 중생과 부처가 같다고 법문해 주셨는데 사실 처음 듣는 사람은 굉장히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어떻게 중생과 부처가 같느냐? 또 극락과 지옥이 있고 없고를 떠나서 극락만 지향하는 사고를 가지고 있다 보니 이런 편향된 사고를 스님께선 포교를 잘 하셔서 바꾸어 주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목사들의 설교를 별로 타당하게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듣고 나면 잊어버리는데, 스님들 법문을 듣고 나면 상당기간 마음에 와 닿아서 어떻게 살아야 되겠느냐 하는 그런 고민의 시간을 가지게 됩니다.
진명스님: 현실적으로 보았을 때 불자가 많은 도시가 부산이라고 하는데 그 꿈이 깨어지고 있습니다. 범어사만 하더라도 사월초파일에 다는 등의 수가 점점 줄어들고 있지요. 불교 신도들은 1주일에 한번 사찰에 오느냐? 이렇게 오시는 분들은 많지 않고 보통 초하루나 관음재일, 지장재일 등 한 달에 한번 또는 두세 번 옵니다. 교회는 적어도 일주일에 한번 씩은 꼭 가게 됩니다. 교회신자는 조금 규모가 있다 하면 그 수가 거의 만 명이 넘습니다. 또한 가족들 모두 나오며 그 구성원들이 젊지요. 부산도 다른 종교 보다 불자가 많다고 하지만 지금은 이런 꿈이 깨어지고 있지요. 우리 대에는 안일한 생각으로 살 수 있지만 이런 추세로는 점차적으로 스님 수도 줄어들고 목사는 자꾸 불어나고 갈수록 어렵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 같은 저출산 시대에 독신승려가 자꾸 줄어들고…….
불교뿐만 아니라 카톨릭의 신부도 자꾸 줄어들고 있지요. 교회 목사는 만 명이 배출되면 서로 경쟁이 되어서 정말 열심히 노력하게 됩니다. 사찰과 포교당의 경우는 능력 있는 사람은 돈이 없고 돈이 있는 스님은 그래도 경제적으로 고민은 하지 않아요. 현실적으로는 편하지요. 절은 이렇게 되면 밝기 보다는 어두운 면이 많아지지요. 그러나 교회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새벽, 아침, 점심, 저녁 예배뿐만 아니라 가족도 같이 열심히 노력하지요.
절은 경치가 좋은 곳에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절을 많이 찾습니다. 그러나 절은 주인이 없으니 싸우는 경우가 있지요. 싸우면 싸울수록 불교 신도는 떨어집니다. 차라리 이조시대처럼 스님들이 열심히 농사를 지어서 이익을 준다면 사람들이 감화를 받고 오게 됩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것도 아닌 것 같고 종단적으로도 참 어렵습니다. 경치가 좋은 땅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저 땅이 포교에는 도움이 되지않는 경우가 있지요. 내적으로 참 가슴 아픈 일이지요. 신도들의 확보는 앞으로 더 힘들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듭니다.
법일거사님: 스님, 실망하지 마십시오. 지금 무비스님께서 운영하시는 염화실 같은 참 좋은 사례가 있지 않습니까. 몇 년 전에 종교학자들과의 토론회에 가 보았는데 학자들의 통일된 이야기가 앞으로 21세기의 종교는 사이버 종교라고 했습니다. 인터넷을 통한 종교, 처음에는 어떤 것이 사이버 종교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염화실의 경우 지금 현재 염화실 회원이 만 명이 됩니다. 무비스님 같으신 큰 스님께서 법문을 하시니 어떤 경우에는 하루에 천명이 가입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런 인터넷을 이용한 포교를 한다면 우리 불교가 얼마든지 발전할 수 있는 길이 있다고 확신합니다.
제가 다니는 마하사 밑에 교회가 하나 있는데 그 교회옆에 눈먼 부부가 있습니다. 신도들이 돌아가면서 매일 그 부부에게 산책을 시켜줍니다. 이것을 볼 때 자비의 정신이 가득한 불교인데 우리는 과연 저렇게 해 보았겠는가? 스님들께만 책임을 물을게 아니라 우리 불자들도 한번 쯤 위기의 시대에 자성해 보아야 합니다. 그런 어려움에 처한 분들이 교회를 나가지 절에 가자고 하면 가겠습니까?
보통 분들은 왜 처음 절에 가면 회비 내기, 신입 카드 만들기, 인등켜기 등 돈 이야기만 먼저 하는 곳이 많다고 저에게 묻곤 합니다. 이런 것을 비교해 보면, 교리는 자비를 강조하면서 행이 이루어 지지 않으니 이것만 고쳐지면 스님, 절대로 실망하실 필요 없습니다. (일동웃음)
우리 불자들도 스님들께서 이렇게 열정을 가지고 가르치시는데 우리가 배운 것 한번이라도 친구들에게 가서‘너 극락이 어디에 있는 줄 아느냐’이렇게 한번이라도 물어본 적 있습니까?
여기 와서 큰 스님 법문 백번 들으면 무얼 하겠습니까? 사실 혼자 깨우쳐서는 무엇을 하겠습니까? 혼자 깨우쳐서는 아무 소용도 없지요. 같이 깨우쳤을 때 (자타일시성불도) 그것이 불교의 경제가치가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보살님들께서는 왜 거사님들 안 모시고 오십니까? 자기 집의 남편도 포교를 못하시면서 어떻게 절에 다닌다고 하시겠습니까? 평일에는 직장 때문에 참석이 불가하더라도 토요법회 때나 일요법회 때 남자 분들도 꽉 차서 불교가 내 생활에 필요한 종교라는 것을 배워야 될 것 아니겠습니까? 포교의 틀을 바꾸어야 합니다. 우리 불교도 전문적으로 개발해야 합니다.
저는 동국대학교 등에 불교 관리학과를 만들어서 불교의 조직이나 포교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전문적으로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전문관리사를 대학에서 만들어서 이 대학의 불교학과를 나오면 다른 사람보다 더 잘 살 수 있도록 우리 불교가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훌륭한 인재들이 나와서 불교를 관리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수일행님: 저는 법사님의 말씀에 충분히 공감을 합니다. 그것도 좋은 방법이긴 합니다만, 우리 불자들이 자기 수행과 공부가 같이 병행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부처님 앞에서 참회도 해 보고, 기도도 해 보고, 독경도 해 보고, 염주도 돌려보고, 절도 해 보고…, 자기 마음에서 우러난 불자가 되어야만 포교가 가능하다고 생각됩니다. 또 포교가 중요하다고 하지만 자기 마음이 수행이 된 후에 포교를 해야 한다고 봅니다.
법일거사님: 보살님 참 좋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불교가 지혜와 자비의 종교이지만 사실 우리가 지혜를 터득한다는 것이 참 어렵습니다. 정말 어렵습니다. 보살님이 참 좋은 말씀을 해주셨는데 그것은 원칙이고 우리는 자비행을 하면서 지혜를 찾아야지 두 가지를 동시에 다 하자 라고 말 하는 것은 쉽습니다. 불교가 당면한 사실이잖습니까. 엘리트를 교육해서 발보리심 내어서 나아가는 것이 틀림없는데 그것이 몇 사람이나 되겠습니까? 참 어렵습니다. 먼저 많은 대중들이 불교에 흡수될 수 있도록 자비부터 먼저 펼쳐야 합니다.
지혜를 가르치는 단계는 전문가인 스님께 맡기고 우리는 현실적으로 자비를 펼쳐서 사회에 불교가 기여하는 쪽으로 가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긴 안목으로 볼 때 우리가 실행하기 좋은 쪽은 자비 쪽이지 않습니까? 관리도 잘하고 베풀어 주고 그렇게만 한다면 절에 가자고 하지 않아도 절에 가게 되지 않겠습니까?
이게 현실적으로 부딪치는 문제인데 우리가 스스로 불교의 자비행을 먼저 한 후에 지혜를 터득하는 방법이 저는 옳다고 생각합니다.
수일행님: 내가 절에 간다, 포교당에 간다하고 아이들에게도 절에 가자고 하는 것이 아니라, 엄마가 평소에 기도도 하고 독경도 하고 불자로서 가정에서 모범을 보이면 자식들은 저절로 절에 가게 됩니다. 강제로 공부시키지 않아도 엄마가 가정에서 잘 하면 자식들도 자연히 따르는 것 이것이 바로 불자를 만드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일심덕님: 기독교의 경우는 하루 세 번씩 꼭 기도를 합니다. 우리 불자님들께서는 하루에 몇 번이나 발원문을 읽고, 기도를 하는지요? 저는 생활 속의 불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담화님: 저는 오늘 스님 강의를 기분 좋게 잘 들었습니다. 저는 귀가 잘 들리지 않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스님께서 큰 소리로 법문을 해 주시고 여러 가지를 응용 하셔서 천천히 예를 들어가면서 말씀해 주시니 정말 귀가 번쩍 뜨이는 것 같습니다.
수업시간에 배운 법문내용을 우리끼리도 공부를 해야 되겠고 진도를 조금 줄여서라도 듣는 사람들의 이해도를 확인하면서 진도를 빼 주시면 참 좋겠습니다.
마니주님: 시간이 많이 지났습니다.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일동: 감사합니다.
-끝-
첫댓글 _()()()_
참 좋은 말씀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