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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화경 대강좌 11강 - 1
一心頂禮 盡十方三世 一切諸佛 一心頂禮 盡十方三世 一切尊法
一心頂禮 盡十方三世 一切賢聖僧
我弟子等 講論三藏 唯願三寶 爲作證明
南無本師釋迦牟尼佛 南無本師釋迦牟尼佛 南無本師釋迦牟尼佛
無上甚深微妙法 百千萬劫難遭隅 我今聞見得受持 願解如來眞實意
妙法蓮華經 第四卷 提婆達多品 第十二
부처님의 교설이 대단히 많지요? 우리가 그것을 8만 대장경이라고 표현을 하는데 그 많고 많은 부처님의 교설 중에 저는 이 법화경이 최극에 달한 그런 가르침이다. 그래서 부처님교설의 완성이다. 부처님교설로서는 법화경이상 더 나아 갈 데가 없다고 늘 말씀을드립니다.
提婆達多品을 보더라도 어떻게 스쳐가는 생각으로라도 이 제바달다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겠는가? 우리 범인으로서는 정말 상상도 못할 그런 내용이지요. 불교에서 제일 큰 욕이 뭔가 하면 “조달이 같은 놈” ←이렇게 하면 세속에서 말하는 “죽일 놈” 그야말로 惡口를 다 동원 하더라도 조달이 같은 놈이라고 하는 말을 능가하는 악구는 없습니다.
그만치 이 제바달다와 같은 사람이라고 하면, 더 이상의 욕이 없을 정도로 그렇게 아주 극악무도한 존재로 취급하고 있지요. 이것이 일반불교입니다.
제바달다에 대해서는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역사적인 소위 제바달다는 그렇게 취급될 수밖에 없습니다. 정말 극악무도한 사람이지요.
그런데 이 법화경을 왜 제가 하고 부처님교설의 완성이라고 이렇게 표현 하는가? 더 이상 나아 갈데없는 극에 달한 가르침이다 이렇게 표현 하는 이유가 다른 곳에서도 여러 번 발견이 됩니다만, 특히 제바달다품에서 더욱 명확해집니다. 그런 제바달다를 이 법화경에서는 바로 부처님이다.
그리고 석가모니의 나의 스승이다. 그러면서 수기를 내리지요. 과거 이러이러한 인연이 있었다고 표현을 합니다. 그래서 제바달다에게 수기를 하지요.
提婆達多品은 옛날해석 식으로 하자면 惡人成佛. 그리고 龍女성불이 나오니까 畜生成佛. 또 龍 女이기 때문에 女人成佛. ←이런 세 가지로 구성이 되었다는 재래해석이 있습니다만, 부처님과 제바달다의 관계를 그냥 그대로 역사적인 사실로만 우리가 두고 말 것인가? 불교역사에서 제바달다는 정말 영원히 죽일 놈이 되고 말아야 하는가? 부처님의 그 광대무변한 자비로도 이것이 구제될 수 없는 인간인가? 이 문제를 대승불교에 와서는 매듭을 짓고 넘어가야 하는 그런 사실입니다. 거기에 대한 답이 말하자면 법화경입니다. 그것은 곧 우리가 일상에서 처한 그런 어떤 피할 수 없는 관계. 어떤 원한의 관계. 원수의 관계. 서로 껄끄러운 관계. 서로 정말 좋지 아니한 풀려고 해도 도저히 풀 수 없는 그런 관계들을 우리가 맺으면서 불가피하게 고의적으로 그렇게 맺는 사람이 없지만, 살다보면 이런 저런 문제로 해서 불가피하게 그런 관계를 맺고 살 수밖에 없는 그런 인연들이 있습니다.
아무 탈 없이 스님들 사이에 무슨 그런 원수지간이 있겠나? 무슨 부모때려 죽인 원수도 아닌데 그렇게 보기 싫은 관계. 껄끄러운 관계. 이름만 거론해도 정말 기분이 팍 상해 버리는 그런 관계가 있겠나? 하겠지만 아니지요.
살다보면 그런 것이 다 있습니다. 있게 되어 있어요. 이것이 이 사바세계의 좋은 면이고 그것이 妙입니다. 또 그런 관계를 우리가 어떻게 소화해야 할 것인가? 하는 그런 문제에 대한 해답이 바로 提婆達多品입니다.
부처님이 그런 해답을 내놓지 아니하면 그 후대의 보통 우리 제자들은, 그런 문제가 만약에 생긴다면, 설사 제바달다와 부처님의 그런 관계가 아니라 하더라도, 그보다 100분의 1. 1000분의 1 미약한 관계라 하더라도 역시 껄끄럽기는 매 한가지니까 그런 관계를 우리가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소화해 넘겨야 할 것인가? 이 佛門은 자비가 정말 廣大無邊하고 慈悲無敵이라는 말을 언필칭 쓰면서 그런 문제들을 우리가 어떻게 소화해서 정말 진정한 답을 얻어야 할 것인가? 하는 그런 문제들을 이 법화경은 명확하게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법구경 같은데서 원한을 원한으로 갚으면 영원히 원한 갚을 길이 없다. 오직 참음으로서만이 그 원한은 사라지느니라. ←이렇게 우리가 읊조리고 있습니다만, 그 참는 것 가지고는 안 되는 겁니다. 대개 우리가 참는 일은 돌로서 잔디를 짓 눌러 놓은 것과 같아서 당장은 돌을 뚫고 올라오지는 못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 돌 옆으로 노란 싹이 비집고 올라오는 것과 같습니다. 사람의 감정이라고 하는 건 그렇습니다. 너 나 할 것 없이 누구나 똑 같습니다. 부처님인들 왜 안 그렇겠습니까? 부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실은 거의 그 수준입니다. 정도의 차이가 약간 있을 뿐이지요.
이런 문제를 우리가 어디서 어떻게 해답을 찾을 것인가?
물론 그것이 내 인격화 되지는 않았고, 내 살림살이는 아직 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답은 확실하게 여기 提婆達多品에서 제시해 주고 있다는 이 사실이 참 중요한 겁니다.
부처님은 이것이 후대에 그야말로 법화경을 결집한 어떤 또 뛰어난 부처님의 그 안목으로 이 법화경이 결집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이것은 정말 아주 명작 중에 명작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부처님의 광대무변한 자비가 이 속에 녹아 있고, 또 지혜가 녹아 있고요. 지혜와 자비가 이 제바달다품 한 품에 아니, 제바달다품이야기를 말하자면 소화해 내는 데에 다 담겨 있다고 저는 읽었습니다. 결국은 과거에 내가 법화경을 설해 줄 스승을 찾았는데 그 스승이 바로 제바달다였다. 그리고 나는 그 분에게서 묘법연화경을 배워서 오늘 날 성불하기에 이르렀노라. 제바달다가 아니었으면 나는 성불 할 수 없었노라. ←이렇게 이야기가 되고 있거든요.
그리고 이어서 제바달다에게 부처가 될 것이라는 그런 보증을 하는데 이것이 액면대로는 受記라고 하는 것이 언제 어떻게 해서 부처가 될 것이라는 그런 표현을 자주 쓰지요. 그러나 여러 번 지적 했듯이 수기는, 사실은 깨놓고 이야기 하면 그대로 부처님이다. 惡人은 악인그대로 부처님이다.
善人은 선인그대로 부처님이다. 악인이 선인이 되어서 부처되는 것은 아닙니다.
악인 속에도 선인의 요소가 있고, 선인 속에도 악인의 요소가 있습니다.
우리가 많은 시간이 보장이 안 돼 있어서 一念三千이라고 하는 또 十界互具라고 하는 이런 복잡한 천태학을 제가 이끌어 오지는 않했습니다만,
요컨대 四聖六凡이라고 하는 것이 있지 않습니까? 네 가지 성인의 경우,
성문 연각 보살 佛. ←이것은 네 가지 성인의 세계이고,
지옥 아귀 축생 인도 천도 아수라. ←이렇게 하면 여섯 가지 범부의 세계.
열 가지의 세계를 이렇게 나열 해놓고 열 가지의 세계는 서로서로 갖추고 있다.
부처에도 지옥 아귀 축생 인도 천도 아수라 성문 연각 보살. ←이 아홉 가지가 부처의 정신세계 속에 갖춰져 있고, 지옥 속에도 그 나머지의 아홉 가지의 세계가 다 갖춰져 있고, 인간 속에도 그 나머지의 아홉 개의 세계가 다 갖춰져 있고, 성문 속에도 나머지 아홉 가지 지옥 아귀 축생 인도 천도 아수라 연각 보살 불까지도 성문 속에 다 갖춰져 있다.
이렇게 십계호구라고 하거든요. 열 가지의 세계가 거로서로 다 갖춰져 있는 입장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의 본색입니다. 그래서 중생을 중생이라고 못하고 부처를 부처라고도 못하는 겁니다. 부처 속에도 중생이 있고 중생 속에도 부처가 있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면 그 모든 것을 다 아울러서 우리는 부처라고 하자. 부처라고 할 수 밖에 없다고 하는 것이 선불교나 내지 법화경의 정신이거든요.
그렇다면 제바달다같은 사람은 어떻게 할 것인가? 제바달다도 마찬가지다.
제바달다도 역시, 우리는 제바달다가 生陷地獄(생함지옥)했다고 그러지요?
산 채로 얼마나 극악무도한 나쁜 사람인지 산 채로 지옥에 빠졌다. 이렇게 표현을 하는데 그런 사람까지도 부처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그것이 법화경의 이야기이고 또 그 가르침을 통해서 불교의 자비를 우리가 알 수가 있고, 또 자비심뿐만이 아니라 사실은 그것이 진리거든요.
진리이기 때문에 그 진리가 우리에게 제바달다와 껄끄러운 관계. 또 부처님과 제바달다의 껄끄러운 관계. 그 부처님, 사실 부처 佛자 하나 써놓고 그 종이를 우리가 함부로 버리지 못 하잖아요. 땅에다 부처 佛자 하나 써놓고 손으로 고이 지워야지 발로 못 지우지 않습니까? 부처에 대한 경외심이 우리는 그 정도입니다. 이것은 다 같아요. 우리 불자들은 정상적인 상식을 가진 불자라면 부처 佛자 쓴 종이를 우리가 함부로 버립니다.
땅에 부처 佛자 쓰긴 써요. 그렇지만 발로 못 지워요. 손으로 지워야 돼요. 그 정도로 “부처님” 하면 껌뻑 넘어가는 것이 우리 불자이고, 또 넘어가야 되고요. 그 만치 부처님에 대한 경외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 있어야 되고요. 그런데 그런 부처님을, 그런 부처님을 수차례 죽이려고 음모를 했던 그런 제바달다니까 우리가 부처님한테 존경심을 가지고 있다면 제바달다에게 그 만치 원한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사실 부처님은 어쩌면 잊어버렸을지 모르지만 우리는 제바달다한테 감정이 있다고요. 3000년 전의 일이지만 생각하면 너무 감정이 있는 겁니다.
지금 생각해도 울화가 치밀고 화가 난다 이겁니다. 사실 그렇잖아요.
그런 그 누구하고도 불자라면 다 원한의 관계를 가지고 있는 제바달다.
이 매듭을 어떻게 풀어야 할 것인가? 참 기가 막히게 풀었잖아요.
“과거에 석가모니의 스승이다.” 석가모니의 스승인데 우리가 석가모니를 존경한다면 석가모니의 스승은 더 존경해야지요. 그럼 끝난 것 아닙니까?
그 한 마디에 다 깨끗이 풀어지는 겁니다.
또 석가모니. 당신 입으로 “저 제바달다도 부처님이다.” 라고 수기를 했지 않습니까? 이것은 참 엄청난 가르침입니다.
이것이 기가 막힌 가르침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것이 내 인격화가 되기는 어려워요. 그러나 이것이 정답인 이상은 우리는 늘 이것을 가슴에 새기고, 이러한 어떤 해결의 열쇠. 인간관계에 대한 이 보다 더 훌륭한 해결책은 없거든요. 이러한 열쇠를 우리는 가슴에 늘 품고, 이것이 나에게 체화가 되고 인격화가 되고 내 살림살이가 되도록 부단히 정진하는 길 밖에 달리 다른 길은 없습니다. 그런 내용이, 바로 그러한 메시지를 우리에게 던져주는 것이 提婆達多品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제바달다에 대한 이야기다. 이렇게 볼 수가 있습니다. 또 상식적으로 이야기한다 하더라도 나하고 인연 있는 사람. 내가 데리고 있는 사람. 나와 관계있는 사람. 이것이 피할 수 없는 인연이 많아요. 피할 수 없는 관계가 많습니다. 피할 수 없는 인연이고 피할 수 없는 관계라면 스승으로 잘 받들어 모시고, 또 이왕이면 부처님으로 생각을 하는 것. 이것이 우리의 과제이고 우리의 숙명이 아닐까 이렇게 받아 들여야 될 것 같습니다.
또 사람에 대해서 뿐만이 아니고, 우리의 처지와 환경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처해 있는 처지와 환경이 현재 나로서는 어쩔 수 없는 것이라면 그것을 긍정적으로 아주 잘 소화하고 받아들일 줄 아는 것. 이것이 참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그래 불교공부라고 하는 것은 이런 부처님의 지혜를 배워서 마음 잘 쓰자고 하는 것이지요. 그런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지혜롭게 마음을 쓸 것인가 하는 것이 불교공부 하는 소득이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妙法蓮華經 第四卷 提婆達多品 第十二
1. 爾時 佛告諸菩薩 及 天人四衆 吾於過去 無量劫中 求 法華經 無有
이시 불고제보살 급 천인사중 오어과거 무량겁중 구 법화경 무유
懈倦 於 多劫中 常作國王 發願求於 無上菩提 心不退轉
해권 어 다겁중 상작국왕 발원구어 무상보리 심불퇴전
그때에 부처님이 여러 보살과 그리고 천인 사부대중에게 告 하사대 내가 과거 한량없는 劫 가운데서 法華經을 구하되 게으름이 없었다.
오랜 겁 중에 항상 국왕이 되어가지고서 願을 發해가지고서 無上菩提를 구하되 마음은 退轉 하지 아니 했노라.
2. 爲欲滿足 六波羅蜜 勤行布施 心無悋惜 象馬七珍 國城妻子
위욕만족 육바라밀 근행포시 심무린석 상마칠진 국성처자
奴婢僕從 頭目髓腦 身肉手足 不惜軀命
노비복종 두목수뇌 신육수족 불석구명
六波羅蜜을 만족 하고자 해서 부지런히 布施를 행하고, 또 마음에 아끼는 바가 없어서 象ㆍ馬ㆍ七ㆍ珍. 칠보지요. 또 國城ㆍ妻子ㆍ奴婢ㆍ僕從ㆍ頭目ㆍ髓腦ㆍ身肉ㆍ手足. 이런 것들에 대해서 하나도, 내 신체적인 몸과 목숨에 대해서 조금도 아까워하는 바가 없었으며,
3. 時世人民 壽命無量 爲於法故 捐捨國位 委政太子
시세인민 수명무량 위어법고 연사국위 위정태자
그때에 세상 사람들의 壽命은 無量 했는데 법을 위한 까닭으로 나라를 버리고 國位. 국왕의 버리고, 정치를 太子에게 위임해 버리고는,
4. 擊鼓宣令 四方求法 誰能爲我 說大乘者 吾當終身 供給走使
격고선령 사방구법 수능위아 설대승자 오당종신 공급주사
擊鼓宣令이라. 북을 쳐가지고서는 令을 내리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四方에다 法을 구해요. 누가 능히 나를 위해서 大乘을 설할 사람이 없겠는가? 대승을 설할 것인가? 만약에 대승을 설해 준다면, 큰 가르침이지요. 큰 가르침을 설해 준다면, 내가 마땅히 終身토록 供給하고 심부름 하겠다.
5. 時有仙人 來白王言 我有大乘 名妙法華經 若不違我 當爲宣說
시유선인 내백왕언 아유대승 명묘법화경 약불위아 당위선설
그때에 어떤 仙人이 있어서 와서 왕에게 고해 말하기를 “나에게 大乘. 큰 가르침이 있으니 이름이 妙法華經이니라. 만약에 내 말을 잘 듣는다면 마땅히 설해 주겠습니다.” 라고 하니까
6. 王聞仙言 歡喜踊躍 卽隨仙人 供給所須 採果汲水 拾薪設食
왕문선언 환희용약 즉수선인 공급소수 채과급수 습신설식
乃至以身 而爲牀座 身心無倦 于時奉事 經於千歲 爲於法故
내지이신이위상좌 신심무권 우시봉사 경어천세 위어법고
精勤給侍 令無所乏(정근급시 영무소핍)
왕이 선인의 말을 듣고는 歡喜踊躍해가지고서 곧 선인을 따라서 가가지고서 供給. 온갖 심부름을 다 해주는 것이지요. 所須. 필요한 바를 전부 공급하되, 과일을 따오고 물을 길어오고 땔 나무를 해오고 식사를 준비하며, 그리고는 몸으로서는 평상이 되고 의자가 되고 그렇게 하는데 몸과 마음이 게으름이 없어서 그때에 奉事하기를 1000년. 千歲를 지나도록 하되 법을 위한 까닭에 부지런히, 부지런히 給侍를 해서, 시봉을 해서 하여금 조금도 그 법사에게 부족 하는 바가 없도록 했노라. ←이런 과거의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흔히 전법의 중요성을 이야기할 때,
假使頂戴經塵劫(가사정대경진겁) 身為床座徧三千(신위상좌변삼천)
若不傳法度衆生(약불전법도중생) 畢竟無能報恩者(필경무능보은자)
아~, 참 대단한 게송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관세음보살 이상으로 늘 읊조려야할 내용인데요. 특히 이 시대에 있어서 포교의 중요성에 대해서 생각해보면 더욱 더 이런 가르침이 절실하게 와 닿지요.
이런 게송의 원형도 내지 이 身으로 為床座. 그랬지 않습니까? 身為床座徧三千. 그러니까 몸이 부처님이 깔고 앉고 눕고 하는 평상이나 의자가 되는데 그 넓이가 3천 대천세계에 가득 차도록 그렇게 내 몸을 가지고 부처님이 사용할 수 있는 의자와 평상으로 삼아서 부처님께 희생한다 손치더라도 若不傳法度衆生이면 畢竟無能報恩者니라. 만약에 법을 가르쳐가지고서 중생을 제도하지 못한다면 결코 부처님한테 은혜를 보답했다고 할 수가 없고, 부처님한테 점수 땄다고 할 수가 없다. 요는 傳法度生. 자나 깨나 전법도생이다. 그것도 법화경사상을 가지고 전법도생을 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생각 할 수가 있습니다.
7. 爾時世尊 欲 重宣此義 而說偈言(이시세존 욕중선차의 이설게언)
그때에 세존이 거듭 이 뜻을 펴고자 게송을 설해 말하기를
8. 我念過去劫 爲求大法故 雖作世國王 不貪五欲樂 椎鐘告四方
아념과거겁 위구대법고 수작세국왕 불탐오욕락 추종고사방
誰有大法者 若爲我解說 身當爲奴僕
수유대법자 약위아해설 신당위노복
내가 과거 겁에 큰 법을 구한 까닭에 비록 세상의 국왕이 되었으나 五欲樂을 貪하지 아니하고 鐘을 쳐서 四方에 告하되 누가 大法이 있는 사람인가?
만약에 나를 위해서 해설 해준다면 내가 마땅히 奴僕이 되리라.
9. 時有阿私仙 來白於大王 我有微妙法 世間所希有 若能修行者
시유아사선 내백어대왕 아유미묘법 세간소희유 약능수행자
吾當爲汝說 時王聞仙言 心生大喜悅 卽便隨仙人 供給於所須
오당위여설 시왕문선언 심생대희열 즉변수선인 공급어소수
採薪及果蓏 隨時恭敬與 情存妙法故 身心無懈倦
채신급과라 수시공경여 정존묘법고 신심무해권
그 때에 阿私仙. 이것이 아사선인인데 번역하면 무비입니다.
이상하게도 번역을 하면 그대로 無比. 비할 바 없는 선인이었다. (제바달다 전신이지요) 와서 대왕에게 고하되, “나에게 妙法이 있으니 세상에 希有한바다. 만약에 능히 수행할 것 같으면 내가 마땅히 그대를 위해서 설할 것이다.
그때 왕이 선인의 말을 듣고는 큰 환희심을 喜悅을 내고서 곧 선인을 따라서 供給하고 所須. 수고하는 바. 필요 하는 바를 전부 공급해 주되 나무도 해오고 과일도 따고 隨時로 恭敬與나 때를 따라서 공경해 드렸으나 情存妙法故로 생각은, 아무리 고생스럽게 시봉을 한다손 치더라도 생각은 늘 妙法에 있는 까닭에 身心無懈倦이라. 몸과 마음에 게으름이 없었음이라.
10. 普爲諸衆生 勤求於大法 亦不爲己身 及以五欲樂 故爲大國王
보위제중생 근구어대법 역불위기신 급이오욕락 고위대국왕
勤求獲此法 遂致得成佛 今故爲汝說
근구획차법 수치득성불 금고위여설
널리 여러 중생들을 위해서 부지런히 大法을 구했음이라. 또한 己身과 五欲樂을, 자기 몸과 5욕락을 구하지 아니해서 大國의 王이 되었어도 勤求獲此法하고, 부지런 부지런히 이 법을 구해 얻고 드디어 成佛하기에 이르렀다. 지금 짐짓 그대를 위해서 설하느니라.
11. 佛告諸比丘 爾時王者 則 我身是 時 仙人者 今 提婆達多是 由
불고제비구 이시왕자 즉 아신시 시 선인자 금 제바달다시 유
提婆達多 善知識故 令我具足 六波羅蜜 慈悲喜捨 三十二相 八十
제바달다 선지식고 영아구족 육바라밀 자비희사 삼십이상 팔십
種好 紫磨金色 十力 四無所畏 四攝法 十八不共 神通道力 成 等正
종호 자마금색 십력 사무소외 사섭법 십팔불공 신통도력 성 등정
覺 廣度衆生 皆因提婆達多 善知識故
각 광도중생 개인제바달다 선지식고
佛告諸比丘하사대, 그 때의 왕은 곧 我身是요. 왕으로서 법을 구하기 위해서 왕위도 던져 버리고, 그 선인을 따라가서 고생 고생하면서 1000년을 시봉을 했던 그 사람이 바로 나였고, 그 때의 선인은 今 提婆達多是라.
지금 이 세상의 提婆達多가 바로 그때의 그 선인이었다. 나의 스승. 나를 법화경으로 가르쳐 주던 그 스승이 바로 제바달다다.
提婆達多善知識을 말미암은 까닭으로 나에게 六波羅蜜ㆍ慈ㆍ悲ㆍ喜ㆍ捨ㆍ 三十二相ㆍ八十種好ㆍ紫磨金色身ㆍ十力ㆍ四無所畏ㆍ四攝法ㆍ十八不共法ㆍ神通道力을 모두모두 구족해가지고서 等正覺을 이루게 되었다.
그래서 廣度衆生했다. 이것은 전부 提婆達多善知識때문이었다.
제바달다선지식으로 인해서 내가 오늘 날 이와 같이 훌륭한, 아무것도 부족함이 없는 육파라밀자비희사삼십이상팔십종호자마금색신십력사무소외사섭법십팔불공법신통도력. 그래서 궁극에 와서는 等正覺까지 이룬 완벽한 부처가 되었다. 이런 부처가 되기까지의 큰 공덕이 제바달다에게 있다.
제바달다 아니었으면 나는 언감생심. 부처되는 것은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더 이상 어떻게 제바달다를 미워하겠습니까? 부처님 당신도 당신을 여러 번 죽이려고 했던 그 당사자도 제바달다를 이렇게 이해하고 소화를 했는데, 아무래도 우리는 부처님제자가...
옆의 사람이 더 화낼 수도 있긴 있어요. 하지만 당사자가 이렇게까지 소화해 내는데 우리도 그래도 참고 소화해야 됩니다.
그러면 이것은 부처님과 제바달다의 관계라고 하더라도 우리에게, 일생을 살면서 자질구레하게 가슴앓이 해야 하는 그런 인간관계들 많지요.
그런 것들을 우리가 이렇게 이해해야 됩니다. 소화해야 됩니다.
궁극에 가서는 결국은 그도 부처님이다. 저 미운 놈도 부처님이다 라고 까지 우리가 이해를 해야 된다는 그런 내용입니다. 그리고는
12. 告諸四衆 提婆達多 却後過 無量劫 當得成佛 號曰天王如來 應供
고제사중 제바달다 각후과 무량겁 당득성불 호왈천왕여래 응공
正遍知 明行足 善逝 世間解 無上士 調御丈夫 天人師 佛世尊 世界
정변지 명행족 선서 세간해 무상사 조어장부 천인사 불세존 세계
名 天道(명 천도)
여러 사부대중에게 고하사대 提婆達多는 다시 無量劫을 지나서 當得成佛하리니 마땅히 성불하리니 號를 天王如來ㆍ應供ㆍ正遍知ㆍ明行足ㆍ善逝ㆍ世間解ㆍ無上士ㆍ調御丈夫ㆍ天人師ㆍ佛世尊이요, 세계의 이름은 天道 라고 할 것이다.
13. 時 天王佛 住世 二十中劫 廣爲衆生 說於妙法 恒河沙衆生 得
시 천왕불 주세 이십중겁 광위중생 설어묘법 항하사중생 득
阿羅漢果 無量衆生 發 緣覺心 恒河沙衆生 發 無上道心 得 無生忍
아라한과 무량중생 발 연각심 항하사중생 발 무상도심 득 무생인
至不退轉(지불퇴전)
그때에 天王佛이 세상에 住하는 것은 二十中劫이고, 널리 중생들을 위해서 妙法을 설하게 되는데, 항하사강의 모래수와 같은 중생들은 阿羅漢을 구하여 얻고 無量衆生들은 緣覺의 마음을 낼 것이고, 항하사강의 모래수와 같은 중생들은 無上道心을 發해서 無生忍을 얻고 不退轉의 지위에 이르게 될 것이다.
그래서 여기 제바달다가 성불하는 것뿐만이 아니고 그 외에, 말하자면 제바달다가 부처가 되어서 중생을 제도할 때에 그 많은 사람들이, 제도 받는 사람들까지도 여기에서 구체적으로 이렇게 이야기해놨습니다.
이것은 왜 이렇게까지 구체적으로 해놨느냐? ‘그 제바달다가 성불한다.’ 그 액면대로 우리가 봅시다. 부처라고 하는 것은 제가 늘 완전히 들어내서 해석하는 것이고, 여기 경대로 해석을 하더라도
‘제바달다가 성불한다?’ ‘그거는 아무래도 믿을 수가 없다.’ ←이런 생각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 생각을 아예 싹둑 잘라 버리는 겁니다.
제바달다가 성불해가지고 중생제도를 하는데, 중생제도 할 때의 그 성과를 이렇게까지 분명하게 이야기했는데 어떻게 그걸 추호라도 의심할 수가 있겠는가? 이런 뜻입니다.
14. 時 天王佛 般涅槃後 正法住世 二十中劫 全身舍利 起 七寶搭 高
시 천왕불 반열반후 정법주세 이십중겁 전신사리 기 칠보탑 고
六十由旬 縱廣 四十由旬 諸天人民 悉以雜華 抹香燒香塗香 衣服瓔珞
육십유순 종광 사십유순 제천인민 실이잡화 말향소향도향 의복영락
幢幡寶蓋 伎樂歌頌 禮拜供養 七寶妙搭 無量衆生 得 阿羅漢果
당번보개 기악가송 예배공양 칠보묘탑 무량중생 득 아라한과
無量衆生 悟辟支佛 不可思議衆生 發 菩提心 至 不退轉
무량중생 오벽지불 불가사의중생 발 보리심 지 불퇴전
그때에 天王佛이 열반에 든 후에 正法의 住世는 二十中劫이요, 全身의 舍利로서 七寶搭을 일으켰는데 높이는 六十由旬이고, 縱廣은 四十由旬이며 諸天人民이 다 雜華로서 온갖 여러 가지 꽃과 抹香ㆍ燒香ㆍ塗香ㆍ衣服ㆍ瓔珞ㆍ幢ㆍ幡ㆍ寶蓋ㆍ伎樂歌頌으로서 七寶妙搭에 禮拜하고 供養할 것이다. 이렇게까지 그야말로 석가모니부처님이 열반에 들어서 사리탑을 세우고 그 뒤에 곳곳에, 전 세계에 불교의 나라에는 곳곳에 부처님 탑을 세우는 이 현실을 그대로 그려놨지 않습니까? 눈에 보듯이 그려놨거든요.
그런데 어떻게 의심의 여지가 있느냐? 이겁니다.
그러니까 제바달다가 성불해서 중생제도를 한다는데 대해서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조금이라도 의심하지 말라. 어떻게 성불 아니 하고 이렇게까지 구체적으로, 열반에 든 뒤에 사리탑 세워가지고, 또 탑의 크기가 어느 정도 된다고 까지 어떻게 이야기할 수가 있겠는가?
제바달다의 성불. 이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라는 이야기입니다.
못 박듯이, 못 박고 거기다가 10m이상 두께로 시멘트를 하고, 그렇게까지 확실하게 해두는 듯한 느낌을 우리가 받습니다. 제바달다에 대해서는 사실은 잘못하면 의심할 수도 있지요. 그것을 염려해서 이렇게까지 해놓은 겁니다.
법화경은 결집의 솜씨가 참 대단히 치밀하고 정말 깊이가 있고, 정말 그 지혜와 두뇌의 능력은 저 앞에 사리불 몇 명... ‘이 사바세계의 사람들을 다 사리불로 만들어서 헤아린다 하더라도’ 하는 그런 표현이 있었는데, 사리불 같은 이를 수 억만 명이나 동원이 되어서 이런 법화경의 결집이 되었을까? 하는 정도로 참 깊이가 있고 치밀하고 조직적이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또 無量衆生은 阿羅漢果를 얻고, 無수衆生은 辟支佛을 깨달으며 不可思議한 衆生은 菩提心을 發해서 不退轉지에 이른다. 이런 이야기까지 다 구체적으로 해놨잖아요.
15. 佛告諸比丘 未來世中 若有善男子 善女人 聞 妙法華經 提婆達多品
불고제비구 미래세중 약유선남자 선녀인 문 묘법화경 제바달다품
淨心信敬 不生疑惑者 不墮地獄餓鬼畜生 生 十方佛前 所生之處
정심신경 불생의혹자 불타지옥아귀축생 생 시방불전 소생지처
常聞此經 若生人天中 受 勝妙樂 若在佛前 蓮華化生
상문차경 약생인천중 수 승묘락 약재불전 연화화생
부처님이 여러 比丘에게 告하사대 未來世中에 만약 善男子 善女人이 妙法華經 提婆達多品을 듣고 淨心信敬. 아주 청정한 마음으로 믿고 공경해서 不生疑惑者. 여기 바로 나오네요. 우리 속을 아주 훤히 들여다보고 해놨잖아요. 疑惑을 내지 않는 사람은 地獄ㆍ餓鬼ㆍ畜生에 떨어지지 않고,
十方 부처님 앞에 태어날 것이다. 所生之處에 태어나는 곳 마다 항상 이 법화경을 듣게 될 것이고, 만약에 人天 가운데 태어나면 勝妙한 즐거움을, 樂을 받게 될 것이고, 만약에 부처님 앞에 태어날 것 같으면 蓮꽃에서 化生하게 될 것이다. 제바달다품의 공덕까지도 이렇게 소개를 하면서 믿기를 권하는, 제바달다 이야기에 대해서 믿기를 권하는 ‘꼭 믿어라.’ 꼭 믿으라는 내용으로서 이렇게 매듭을, 결론을 짓고 있습니다.
천번만번 생각해 봐도 제바달다와 부처님관계. 또 제바달다와 우리 불제자들의 관계를 이렇게 풀지 아니하고 어떻게 하겠는가?
이렇게 풀어야 그 매듭이 풀리지 이렇게 풀지 아니하고는 그거는 달리 다른 길이 없다 하는 것입니다. 또 부처님문중에서 원수라는 것이 있을 수가 없는 것이고, 다른 종교에서는 원수가 있지만 불교에는 원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어떤 사람도 원수가 없는 것입니다. 법망경 같은 데는 부모를 죽인 원수라 하더라도 결코 원수로 갚지 말고 존경하고 따르라는 내용이 있듯이,
여기에 일반적인 부처님의 자비를 우리가 생각한다 하더라도 원수란 없습니다.
그런데 제바달다의 평소의 행동거지를 우리가 알고 있기 때문에 거기에 대한 우리의 머릿속에 남아있는 제바달다에 대한 기억은 참 잘 안 지워지지요.
도저히 잘 안 지워집니다. 그런데 이 제바달다품. 법화경제바달다품 이것으로서 깡그리 지워야 되고, ‘그도 부처님이다.’ 그냥 그대로, 그 상태 그대로 부처님이다. 그 사람이 무슨 짓을 했느냐 하는 것은 그 사람의 일이고, 그 사람 몫입니다. 그런데 나는 그 사람에 대해서 법화경에서 이야기했듯이 ‘그도 부처님이다.’ 이것은 내 살림살이이고 내 몫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요. 그것은 바꾸어 말하면 지금 당장에 나하고 껄끄러운 관계가 있는, 그 사람이 나에게 해코질 하고 음모하고 모함하는 것은 그 사람의 인생입니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안 한다 이것이지요. ‘나는 그렇게 안 한다.’ ←이것이 법화행자의 정신이라고 말씀드릴 수가 있습니다.
법화경제바달다품을 공부한 우리 법화행자는 그것이 쉽지는 않겠지요.
그것이 나의 인격이 되기까지는 이것이 참 간단한 것은 아닌데 그러나 어떻게 생각해보면 한 순간에 그런 인격이 될 수도 있습니다. 충분히 있어요.
또 안 되더라도 이론적으로는 ‘그런 것이다.’ 우리 법화행자는 그런 길을 가야함에도 불구하고 ‘내 감정은 아직까지는 도저히 주체할 길이 없다.’ 이렇게 자수하고 나서면 그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지요.
- 11강 - 2로 이어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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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묘법연화경 나무 묘법연화경 나무 묨법 연화경
제바달다품을 설한곳에서 무량중생들이 발보리심을 낸다는게 오히려 더 당연하게 느껴집니다.
무량자비심의 힘이 아닐까 합니다.
감사합니다 나무 묘법연화경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