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 / 시조 부문
눈은 길의 상처를 안다 - 이 민 아
무제치늪* 골짜기에 사나흘 내린 눈을 녹도록 기다리다 삽으로 밀어낸다 사라진 길을 찾으려 한삽 한삽 떠낸 눈
걷다가 밟힌 눈은 얼음이 되고 말아 숨소리 들려올까 생땅까지 찧어본다 삽날은 부싯돌 되어 번쩍이는 불꽃들
성글게 기워낸 길 간신히 닿으려나 내밀한 빙판 걷고 먼 설원 헤쳐가면 삽 끝은 화살 같아져 모서리가 서는데
결빙에 맞서왔던 삽날이 손을 펴고 쩌엉 쩡 회색하늘에 타전하는 모스부호 마침내 도려낸 상처 한땀 한땀 기워낸다
*무제치늪 : 울산 울주군 삼동면 정족산(鼎足山)에 자리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고층습원(高層濕原). 6000여 년 전 생성됐으며 지금도 수많은 습지 식물이 서식하고 있다.
[심사평]
이근배 (시조시인)
땅속 깊이 뿌리박은 나무가 봄을 만나 꽃을 피우듯이 시조는 신춘문예를 만나 새 잎을 틔운다. 시조가 현대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태어난 지 100년을 맞은 지난해에는 모국어의 가락이 크게 소용돌이쳤다. 그런 까닭일까, 응모작들이 예년에 비해 형식과 내용의 각도에서 날을 세우고 있었다.
신춘문예를 의식한 소재와 주제를 다룬 작품들이 고른 수준을 유지하며 앞서 달려오고 있었으나 의욕과 실험정신을 완성도 높게 채우지 못한 점이 아쉬웠다. 또한 시조는 시각적 형식미에서 자유시와 식별시켜야 함에도 의도적으로 구와 장의 구분을 모호하게 하는 표기법을 쓰는 유형을 경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시조가 자유시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형식의 파괴가 아니라 내재적 의미의 농축에 힘써야 하고, 글감잡기에서 형상화까지 치밀하게 결구(結構)해야 할 것이다.
당선작 ‘눈은 길의 상처를 안다’(이민아)는 순수한 원형을 지닌 눈이라는 오브제에서 상처를 만들고 그것을 도려내는 메스를 잡는 손이 능숙하다. 계절성을 띤 소재이면서 일상에서 끄집어내기 어려운 시의 줄기를 찾아가는 생각이 살아 있다. 명사 ‘삽’을 거듭 쓰는 것과 새맛내기가 덜한 점이 있으나 발상의 깊이가 있고 감성의 칼끝에 날이 서 있어 시조에 한몫 하리라는 기대를 갖는다.
마지막까지 겨룬 작품으로 ‘무용총수렵도를 보며’(방승길), ‘신 공무도하가’(박채성) ‘탁본’(송은율) ‘그 겨울의 갯벌에서’(송유나), ‘숲과 그루터기’(설우근) 등이 숨 가쁘게 시조의 벽을 타고 넘고 있었으나 다음 기회로 넘겨지게 되었음을 밝힌다.
[당선소감]
이 민 아 △1979년 서울 출생 △2002년 부경대 국문과 졸업 △2004년 해양수산공모전 창작부문 해양수산부장관상 수상 △2007년 대구매일 신춘문예 시조 부문 당선 △현재 울산 보라컨트리클럽 근무
이태 전 고속도로 교통사고 이후 시 습작은 한 손에도 꼽지 못할 만큼 빈약했다. 열정에 대한 자기검열과도 같았던 이번 투고는 시마(詩魔)에 들린 듯 밤을 새며 쓴 연애편지였던 셈이다.
심사위원 선생님과 동아일보사에 충심으로 감사드린다. 7년 간 거듭된 낙선의 시간이 시어의 살결을 단단하게 하기 위한 염장(鹽藏)의 숙성기와 닿아 있음을 깨닫는다. 객토를 하듯 스스로 경계하며 시조의 부단한 걸음을 한 발씩 딛고 나갈 것을 약속드린다.
당선 통보를 받고 일터인 골프장으로 나가 솥발산 무제치늪 너머를 오래 바라보았다. 은현리에 계신 정일근 선생님의 응원에 가슴이 뜨거워진다. 부경대 국문과 은사님, 국제 가족들과 박정애 선생님께 감사의 눈물로 연하장을 적는다. 학창시절 문학을 꿈꾸게 해 준 대산문화재단과 절정문학회에도 안부를 전한다.
지금처럼, 눈 덮인 길을 함께 헤쳐 갈 어머니와 가족. 더불어 내 생의 모든 필연과 4월 이후 잠시 찾아온 회복과도 같은 이 기쁨을 나누고 싶다.
(* 참고로 2007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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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AP자료사진 트레이싱 페이퍼 - 김윤이
잘 마른 잎사귀가 바스락거리며 나를 읽네 몇 장 겹쳐도 한 장의 생시 같은, 서늘한 바람 뒤편 달처럼 떠오른 내가 텅 빈 아가리 벌리네 지루한 긴긴 꿈을 들여다봐주지 않아 어둠이 흐느끼는 밤 백태처럼 달무리 지네 일순간 소낙비 가로수 이파리, 눈꺼풀이 축축하게 부풀어 오르고 거리마다 지렁이가 흘러넘치네 아아 무서워 무서워 깨어진 잠처럼 튀어 오른 보도블록, 불거져 나온 나무뿌리 갈라진 혓바닥이 배배 꼬이네 비명이 목젖에 달라붙어 꿈틀대네 나는 이 길이 맞을까 저 길이 맞을까 손바닥에 침을 퉤퉤 뱉고 싶지만 손금이 보이지 않는 손 금 밟지 않기 놀이하듯 두 다리가 버둥대네 두 동강난 지렁이 이리저리 기어가고 구름을 찢고 나온 투명한 달 내 그림자는 여태도록 나를 베끼고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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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신문
연금술사의 수업시대/이강산
세상에서 가장 낡은 한 문장은 아직 나를 기다린다.
손을 씻을 때마다 오래전 죽은 이의 음성이 들린다. 그들은 서로 웅얼거리며 내가 놓친 구절을 암시하는 것 같은데 손끝으로 따라가며 책을 읽을 때면 글자들은 어느새 종이를 떠나 지문의 얕은 틈을 메우고 이제 글자를 씻어낸 손가락은 부력을 느끼는 듯. 가볍다. 마개를 막아놓고 세면대 위를 부유하는 글자들을 짚어본다. 놀랍게도 그것은 물속에서 젤리처럼 유연하다. 그리고 오늘은 글자들이 춤을 추는 밤 어순과 문법에서 풀어져 서로 뭉쳤다 흩어지곤 하는. 도서관 세면기에는 매일 새로운 책이 써지고 있다.
마개를 열어 놓으며 나는 방금 씻어낸 글자들이 닿고 있을 생의 한 구절을 생각한다. 햇빛을 피해 구석으로 몰린 내 잠 속에는 오랫동안 매몰된 광부가 있어 수맥을 받아먹다 지칠 때면 그는 곡괭이를 들고 좀 더 깊은 구멍 속으로 들어가곤 했다. 그가 캐내온 이제는 쓸모없는 유언들을 촛농을 떨어뜨리며 하나씩 읽어본다. 어딘가 엔 이것이 책을 녹여 한 세상을 이루는 연금술이라고 쓰여 있을 것처럼 그리고 지금 나는 그 세상에서 오래도록 낡아갈 하나의 문장이다. 언젠가 당신이 나를 읽을 때까지 목소리를 감추고 시간을 밀어내는 정확한 뜻이다.
[당선 소감]
쓰자마자 휘발하는 시는 매순간 절망하는것 프랑스 해변의 민박집에서 나는 TV가 있는 독방을 요구했다. 이제 남은 돈이 얼마 없었다.TV소리를 크게 해놓고 바지를 벗었다. 벗어놓은 바지에서 비린내가 흘러나왔다. 이국의 언어들이 차츰 공간을 메우면서 열어놓은 창으로 바람이 불쾌한 소문처럼 커튼을 한껏 부풀렸다. 커튼이 한 덩이의 절정을 토해놓았다.
나는 그렇게 태어났다. 나는 반성을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은 폭력적이다.
쓰자마자 백지에서 휘발되는 언어를 가지고 싶었다. 나는 언어의 물질성과 의미의 비정형성 사이가 아찔하다는 것을 안다.
허천난 사람처럼 껴안고 핥아도 시의 육체는 매순간 절망할 것이지만 심장을 꺼내들고 생을 고민하는 일과 같이 이것이 내가 가진 가장 확실한 증명의 방식이 될 것이다.
부족한 작품을 믿어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과 뵐 때마다 내 1인칭의 권위가 욕심을 부리는 김명인 선생님과 이창민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목요팀 형들과 종원, 소현, 철규 그리고 내가 기쁜 마음으로 부르는 많은 이름의 주인들이 함께 있어 좋다. 자주 찾아뵙지 못하는 부모님께 좋은 소식이 먼저 찾아가 조금은 죄송하고 많이 기쁘다.
생각해보면 혼자 찾아간 이국의 해변에서 나는 아주 오래전 처음 육지로 나와 폐를 느끼는 양서류처럼 아득하고 막막한 한 호흡이었다. 그것이 내가 사용하는 언어이다.
●이강산 약력 1978년 전남 광양 출생,2005년 고대 국문과 졸업, 고대 국문과 대학원 재학
[심사평]
유연한 언어구사 돋보여 예선을 통과해 올라온 작품들 가운데 우선 배호남의 ‘사군자의 꿈’, 백상웅의 ‘층층나무의 잠’, 김강산의 ‘엉덩이’, 이산(본명 이강산)의 ‘연금술사의 수업시대’, 박은지의 ‘진짜이든 가짜이든 어쨌든 가방’ 등이 논의 대상이 되었다.
여기서 다시 대상자를 좁혀 이산의 ‘연금술사의 수업시대’와 박은지의 ‘진짜이든 가짜이든 어쨌든 가방’이 최종적인 검토의 대상이 되었다. 배호남의 ‘사군자의 꿈’은 잘 다듬어져 시적 안정감을 느끼게 하지만 우리에게 익숙한 작품들의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 약점이었고, 백상웅의 ‘층층나무의 잠’은 현실적인 체험의 추상적 표현이 그 나름의 객관성을 확보하기에는 조금 부족하다고 느껴졌다. 김강산의 ‘엉덩이’는 기발한 상상력이 돋보였지만 외설적인 부분을 조금 순화시킬 필요가 있었다.
이산의 ‘연금술사의 수업시대’와 박은지의 ‘진짜이든 가짜이든 어쨌든 가방’은 두 편 모두 장단점이 있어 어느 것을 당선작으로 해야 할지 선뜻 결정하기가 쉽지 않았다. 전형적인 신춘문예 유형의 작품이기는 하지만 이산의 ‘연금술사의 수업시대’는 그 유연한 언어 구사와 분방한 상상력으로 미루어 볼 때 앞으로 시인으로서의 성장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여겨졌다. 박은지의 ‘진짜이든 가짜이든 어쨌든 가방’은 명품 백과 가짜 백을 대비, 여성들의 내면적 심리를 실감나게 살려냈다. 그러나 기성시인의 작품을 모방한 흔적이 엿보였다는 것이 약점이었다. 결국 보다 유연하고 자유로운 상상의 세계를 보여 준 이산의 ‘연금술사의 수업시대’를 당선작으로 선정하였다.
신경림 최동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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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일보
붉고 향기로운 실탄 / 정재영
드티봉 숲길을 타다가 느닷없이 총을 겨누고 나오는
딱총나무에게 딱 걸려 발을 뗄 수가 없다
우듬지마다 한 클립씩 장전된 다크레드의 탄환들
그 와글와글 불땀을 일으킨 잉걸 빛 열매를 따 네게 건넨다
실은 햇솜처럼 피어오르는 네 영혼을 향하여
붉게 무르익은 과육을 팡팡 쏘고 싶은 것이다
선홍빛에 조금 어둠이 밴 딱총나무 열매에 붙어
이놈들 보게, 알락수염노린재 두 마리가 꽁지를 맞대고
저희들도 한창 실탄을 장전 중이다
딱총을 쏘듯 불같은 알을 낳고 싶은 것이다
그게 네 뺨에 딱총나무 붉은 과육 빛을 번지게 해서
갑자기 확 산색이 짙어지고
내 가슴에서 때 아닌 다듬이질 소리가 들리고…
막장 같은 초록에 갇히면 누구든 한 번쯤 쏘고 싶을 것이다
새처럼 여린 가슴에 붉고 향긋한 과육의 실탄을
딱총나무만이 총알을 장전하는 게 아니라고
딱따구리가 나무둥치에 화약을 넣고
여문 외로움을 딱딱 쪼아대는 해 설핏 기운 오후
멀리서 뻐꾸기 짝을 부르는 소리 딱총나무 열매 빛 목청
딱총나무의 초록이 슬어 놓은 잉걸 빛 알들이
겨누는 위험한 숲 내 손을 꼭 잡는다.
[2007 신춘문예 - 시 / 심사평]
역동적인 생명력 거대 물결 이뤄
장시간 600명에 가까운 이들의 시를 읽으면서도 그다지 지루한 줄 몰랐다. 문학의 위기니,시의 죽음이니들 해도,상당수의 투고작들이 저마다의 얼굴을 반듯하게 갖추고 있었고,저마다의 매력적인 향기를 뿜고 있었다. 전반적인 수준이 만족할 만했다.
고른 수준을 보이는 이,앞으로의 창작 활동에 대한 신뢰감을 주는 이 등을 골라서 열다섯 명을 뽑았다. 모두 손색없는 작품들이었다.
그래도 어쩌랴,서정적 진정성,언어적 숙련도와 개성의 깊이 등을 기준으로 다시 다섯 명을 뽑았다. 모두 수작들이었다. 그러나 한 편의 당선작을 위해 다섯 명의 흠을 잡아보기로 했다.
김경미씨의 투고작들은 참신한 언어감각이 돋보였다. 동시에 이 장점은 씨의 한계로 지적되기도 했다. 젊은 언어감각이 언어적 경박성으로까지 치달아 버린 것이다.
김명희씨는 사물과 일체되는 물활론적 감수성으로 단련되어 있었다. 그러나 산문적인 서술을 지양하고 보다 응축된 표현을 해야 하겠다는 주문이 따랐다.
김영건씨는 지나친 노련함과 산문성이 트집 잡혔다. 하지만 위트가 시적 재능의 기반이 된다는 점에서 그의 유쾌한 상상력은 돋보였다.
정재영씨는 이들 중에서 가장 많은 시를 투고하였을 뿐 아니라 한결같이 높은 수준의 역작들을 보여주었다. 그중에서 당선작으로 정한 시 '붉고 향기로운 실탄'은 한마디로 역동적인 생명력을 보여주는 시이다. 산문적인 서술로는 이를 수 없는,말소리의 조직과 오감을 통해 서정을 주입하는 시이다. 불필요한 이인칭 청자,수사적 어법의 과용 등이 흠이 된다는 지적도 있긴 하였으나 이를 당선작으로 정하는 데는 반대가 없었다.
한 편을 뽑는 일은 괴로웠다. 하지만 심사자 셋은 한동안 향기로운 시의 바다를 유영하고 나오는 달콤한 나른함을 나눌 수 있었다.
/시인 김종해 신진 안도현
2007 신춘문예 - 시
[당선소감 / 정재영]
"치열한 삶 속 시 '담금질'은 계속돼"
어느 날 갑자기 시가 내게 온 지 꼭 20년이 지났다. 시는 고향역의 대합실 벤치에 새우처럼 웅크리고 잠에 빠진 노숙자의 등을 타고 내게 왔다. 시에서는 모름지기 사람 냄새가 나야 한다는 스승의 가르침을 받기 이전에 시는 이미 그 단서를 가지고 내게 온 것이다.
그동안 알게 모르게 습작기의 내 의식을 지배해 온 것은 새우처럼 웅크린 노숙자의 그 등이었다. 내 시는 웅크렸던 등을 대고 잠 한번 깊이 청할 수 있는 따뜻한 구들장이 되지 못한다. 다만, 나에게 있어 시는 남루한 생의 뜯어진 옷자락 사이로 언뜻언뜻 내비치는 흰 살빛 같은 각성이면 되었다.
20년 세월, 내 지각은 너무 느려터지고 아둔했던 것일까? 내게 주어진 단서는 자명한 것이었지만 내 앞에는 늘 왜곡과 착시의 갈림길이 가지를 뻗고 있었다. 내 시에서 한 조각 살빛의 각성이 읽히고 삶의 결이 잡힐 때까지 나는 얼마나 더 내 무딤을 벼려야 하는가?
내 습작기는 지금부터가 새로운 시작이다. 생의 치열한 연소 속에서 내 시의 담금질과 메질은 계속될 것이다. 시와 삶이 서로의 경계를 넘나드는 상호작용만이 내 시의 방법론임을 잘 알기에 내 범상한 일상을 탓하기에 앞서 나는 앞으로 낯설고 거친 풍경을 찾아 모험도 불사하는 생의 에너지를 키우는 쪽으로 관심을 집중할 것이다.
뽑아주신 심사위원님들께 엎드려 감사의 말씀 올린다. 오늘의 내가 있기까지,빗나간 내 시의 안목을 바뤄 주시느라 노심초사 애쓰시고 심려가 많으신 박제천 선생님께 큰절 올린다.
직장 동료로서 늘 격려를 마지않았던 이영식,황상순 시인님 그리고 문학아카데미 시창작반 문우들과도 당선의 기쁨을 함께하고 싶다. 곁에서 묵묵히 지켜봐 준 아내와 두 아이들과도 이 기쁨을 나누고 싶다.
[약력]
1952년 전남 승주 출생. 광주대,한양대 행정대학원 졸업. 국세청 행정사무관, 현재 국세청 전산정보관리관실 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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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일보
근엄한 모자 / 이기홍
오늘 예식장에 그를 데려가기로 합니다
그는 내 가슴속에 살면서도
맨 위에 올라가 군림하기를 좋아합니다
어쩌면 그는 나와 전혀 상관없는 사람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가끔, 내 든든한 밑바탕이 되어주는 그가
차갑고 근엄한 얼굴을 치켜들면
사람들은 그에게 다가가
다소곳이 머리를 조아립니다
예식장에 초대받아 온 사람들도
나보다는 그에게
더 깊은 관심을 표하기도 해 속이 몹시 상합니다
이제 그가 없으면 나는
사람들의 괄호 밖으로 밀려날지 모릅니다
그래서 난 외려 그의 보디가드가 됐습니다
그의 뾰족한 코가 땅바닥에 곤두박질치진 않을까
낯선 바람에라도 끌려가 낭패를 당하지 않을까
조금도 맘놓지 못하고 그를 지켜봐야 합니다
슬그머니 내 위까지 올라와 상전이 된
그를 위하여 언제까지나 나는 이렇게
나와 다르게 살아야 하나요
그를 몰아내고 청바지 입기를 좋아하는
나를 데려올 수는 없나요
[2007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 시 '근엄한 모자' 당선소감 ]
밝은 날을 뒤로하고 나는 어둠 속으로 걸어갔었다
거기서 그대가 먼 종소리로 날 부르고 있었으므로.
그러나 다가갈수록 꽁꽁 숨어버리던 그대
그대를 찾아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다 나는
깊은 어둠이 되었다, 숯이 되었다.
그 깊은 밤, 비로소 내가 암흑이 되고 나서야
그대가, 해맑은 그대 얼굴이 보이기 시작했다.
숯이 된 내 몸이 뜨겁게 타면서 빛을 낸 것이다
이제 내가 타는 빛으로 세상은 다시 환해지고
나는 그대를 어슴푸레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그동안 시가 내 앞에 다가와도 나는 그것을 알지 못했고 겨우 눈치 채고 마음을 고백하려고 달려갔을 땐 이미 시는 점점 더 내게서 멀어져만 갔었다. 그럴 때, 시를 알아보는 방법과 불러들이는 방법을 알려주셨던 선생님들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문예창작학과 감태준·정희성·이승하 선생님들과 선후배님 그리고 함께 길잡이가 되어준 문학아카데미와 ‘정동진역 동인’ 형들, 사랑하는 어머니와 가족들, 길을 열어주신 세계일보사와 부족한 글을 뽑아주신 심사위원님께 무한한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약력] 2005년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문예창작전문가과정 수료
현재 대한설비건설협회 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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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매일 신문
스트랜딩 증후군 / 김초영 (strand : 좌초하다, 오도 가도 못하게 되다, 사람을 무일푼이 되게 하다)
파일럿 고래들이 피아노의 검은 건반처럼 일렬로 누워 있다. 그들은 바다가 아닌 육지에서 자살을 시도하려고 했다.
중앙병원 307호실, 누워있는 엄마의 팔뚝에 옅은 햇빛이 스며든다. 오늘도 멍이 하나 더 늘었다. 의사는 건조한 표정으로 엄마의 굳어가는 관절들을 만져보곤 했다. 스스로 돌아오려 하지 않는 겁니다. 일종의 무의식 상태의 자살이죠. 의사는 녹음테이프를 재생하듯 또박또박 말한다. 녹색 페인트칠이 벗겨진 산소통이 조용한 병실의 오후를 조금씩 갉아 먹고 있다.
결국 대부분의 고래떼는 죽고 말았다, 고 보도 되었다. 중장비를 동원해 바다로 돌려보내는 작업을 감행했지만 전부 살려 내지는 못했단다. 파일럿 고래들은 하늘로 날려던 것이었을까. 자살하기 위해 육지까지 올라온 고래들처럼 엄마가 가는 물줄기를 내뿜는다. 밀린 병원비가 불어나듯 투명한 오줌비닐이 노랗게 부풀어 올랐다.
신문에 죽어있는 고래들의 사진이 실렸다. 죽은 고래들의 미약한 주파수가 좁은 병실 안을 맴돌다 사라진다. 엄마도 저 주파수를 쫓아 육지로 가고 있을지 몰라. 흑백의 고래 사진을 오려 엄마의 머리맡에 붙여두었다. 고래의 순한 눈이 감기고 있다. 눈알이 오랫동안 따끔거렸다.
[심사평] 권기호, 정호승예심을 거쳐 올라온 40여 편의 작품을 검토한 결과 '스트랜딩 증후군' '에어워시' '비온 뒤' '타워버그' '길' '오래된 가족' '2007 봄, 누드 찍는 남자' '셋방' '젤리 시계를 차고 있는 소설가 P씨!' '장독대를 생각하며' '우물이 땀을 흘리네' '원진다방' '겨울 나방들의 초상'이다. 최후까지 남은 작품은 김초영의 '스트랜딩 증후군'과 한의준의 '에어워시', 구민숙의 '비온 뒤', 김미숙의 '타워버그'다. 신춘문예 특성상 참신성에 몰두한 나머지 제목부터 특이한 것을 들고 나온 것들이 많았는데, 대부분이 시의 구조와는 겉도는 것들이어서 아쉬웠다. 현대적 의미의 묘사 능력은 돋보였으나 깊은 시적 비전을 동반하지 못하고 있는 것들이다. 김미숙의 '타워버그'가 그런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사물을 그려내는 입심이 남다른 데가 있었으나 묘사 그것에 그쳐 시적 무게를 주지 못하고 있는 것이 흠이었다. 구미숙의 '비온 뒤'는 차분하게 처리하는 서정적 진행이 위트와 더불어 어떤 울림으로 살아나고 있었다. 그런데 참신성이 다른 작품에 비해 덜하다는 점에서 제외시켰다.김초영의 '스트랜딩 증후군'과 한의준의 '에어워시'는 둘 다 당선권에 손색이 없는 작품이었다. 한의준의 또 다른 작품 '보일 듯이 보일 듯이'도 '에어워시'와 더불어 충분히 매력을 주고 있었다. 그러나 고래와 어머니의 이미지를 무리 없이 연결시켜 나가는 '스트랜딩 증후군'이 상상력의 폭이 크다는 점에서 당선작으로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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